시어(詩語)의 애매성
시(詩)에 쓰인 언어 즉 시어(詩語)는 단일한 의미를 지닌 일반적, 과학적인 언어와는 달리,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 함축적, 정서적 언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함축적’이라는 의미는 그 언어가 가리키는 일차적이고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라, 사전적인 의미 외에 비유나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우리가 애송하는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다시 한 번 낭송해 보자.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 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이 시에 나타난 모란은, 단순한 사전적 의미인, ‘미나리아재빗과의 낙엽 활엽 관목에 피는 붉은 꽃’이 아니라, ‘그리움과 희망, 기다림’의 표상으로 쓰이고 있다.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국화꽃 역시 마찬가지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여기서의 국화 또한 ‘국화과 국화속의 식물의 총칭으로서 아름다운 꽃이 가을에 피는 것’이란 사전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꽃이 아니라, ‘봄 여름의 온갖 풍상을 이겨 내고 성장해 온 내 누님과 같이 성숙과 완숙미에 이른, 생명 탄생의 신비함과 존엄성을 지닌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시어의 함축성은 그 의미가 두 가지 이상으로 확대 전달되는 기능으로 이어진다. 곧 하나의 시어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님은 때로는 조국으로, 때로는 불타로, 때로는 연인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인데, 이를 가리켜 시의 애매성(ambiguity)이라 한다.
이 시의 애매성은 시의 의미를 폭넓게 하고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가변적이고 생동적인 것으로 새로이 형성해 가는 창조적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시적 효과를 높이는 요소가 된다.
고려 말의 시인 이조년(李兆年)이 지은 저 유명한 ‘이화에 월백하고……’를 보자.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
배꽃에 달빛이 희게 부서져 내리고, 은하수는 야삼경에 기울었는데, 한 가닥 봄 마음을 밤새도록 울어대는 저 두견새야 알랴마는, 정이 많음도 한 가닥 병이런가 나는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구나.
그런데 이 시조의 묘미는 중장의 ‘알랴마는’이란 시어에 있다. 이 ‘알랴마는’이란 시어의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즉 ‘알고 있으련마는’이란 뜻과 ‘알까마는’이란 상반된 두 가지 뜻으로 각각 해석이 가능하다.
전자로 해석하면, ‘한 가닥 봄밤의 정서를 저 두견새야 알고 있으련마는, 나는 나도 모르게 왠지 잠을 못 이루겠구나.’의 풀이가 되고, 후자로 해석하면 ‘한 가닥 봄밤의 정취를 저 두견새인들 어찌 알까마는, 나 또한 까닭 모를 정감이 일어나서 잠을 이루지 못하겠구나.’의 풀이가 된다.
이러한 ‘알랴마는’이 지니는 애매성 때문에 이 시의 폭은 넓어지고 그 만큼 맛을 더하게 한다.
다음으로 신대철의 ‘박 꽃’이란 시를 맛보자.
박꽃이 하얗게 필 동안
밤은 세 걸음 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벌떼 같은 사람은 잠들고
침을 감춘 채
뜬소문도 잠들고
담비들은 제 집으로 돌아와
있다.
박꽃이 핀다.
물소리가 물소리로 들린다.
현대에 사는 우리들은 자연을 잃어버린 지 오래다. 문명이란 이름으로 자연을 인간의 부속적인 존재로 만들고, 개발이란 명분으로 자연을 훼손해 버렸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대하기란 퍽이나 어려운 세상이 되었다. 시인은, 벌떼 같은 사람이 잠든 밤에, 박꽃이 피고 담비가 제 집을 찾으며, 물소리가 제 소리를 내는 자연을 비로소 대하는 그 감동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의 둘째 연에 쓰인 ‘침’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그 하나가 바늘 같은 ‘침(針)’이요 또 다른 하나는 입안에 고이는 ‘침〔타액〕’이다. 전자로 해석하면, ‘벌떼가 지닌 침과 같은 것으로 남을 헐뜯고 찔러대는 뜬소문도 잠들고’가 될 것이고 후자로 해석하면, ‘침이 마르도록 남을 질타하거나 달콤한 말로 굴려대는 뜬소문도 잠들고’가 될 것이다. 이러한 애매성으로 인하여 이 시는 묘미를 더해 주고 긴장성을 증대하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근자에 황동규 시인이 그의 아버지인 황순원의 정신적인 연인이었으며, 자신에게도 오랜 술친구였던 김수명 씨에게 시를 바쳐 화젯거리가 되었다.
오늘이 오늘 같지가 않습니다.
진달래는 마음먹고 눈 주기 전에 사라지고
라일락 향도 열어 논 연구실 밑을 그냥 스쳐가고
< 중략 >
사라지기 직전까지만 보겠습니다.
나머지는/ 평생을 허리 구부리고 보낸 할미꽃/ 막판에 꼿꼿이 서듯/ 느낌도 흐느낌도 없이 표표히 서서 망각하겠습니다.
문단에서는 이 시의 끝 부분에 나오는 ‘망각’이란 단어에 대하여 관심이 집중되었다. 일각에서는 ‘개인적인 관계의 문을 닫는다는 의미가 숨어 있는 것 아니냐’고 해석하였다.
황 시인은 이에 대해, ‘문제의 ‘망각’이란 단어는 ‘잊는다’는 의미의 ‘망각(忘却)’이 아니라, ‘환상을 잃지 않겠다’는 뜻의 ‘망각(妄覺)’인 것인데, 그냥 한자(漢字)를 없애 독자들의 자유로운 해석을 가능케 한 것’이라고 하였다.
시인의 이야기인즉, 시어의 애매성을 살려 독자들에게 그 묘미를 돌렸다는 것이다.
시어가 지니는 애매성 그것은 시가 지니는 특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애매성이 지니는 그러한 은근함과 융통성과 다양성(다정성)을 시라는 울타리 밖에 나오게 할 수는 없을까?
오늘 우리는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짜인 틀 속에 옥죄어져 운신의 폭이 극히 제한된, 현대라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고 있다. 느슨함이 통하지 않고 여유가 메말라 가고, 약간의 두루뭉술함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비좁은 사회 속에서, 답답해하며 쫓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약간의 빈틈이 있고, 조금 덜 명료하더라도 여백이 있고, 좀 둔하다 싶을 정도로 다 말해 버리지 않는 어수룩함도 있어야, 나름대로의 맛과 아름다움이 있는 세상이 아닐까? 현대는 너무 직설적이고 다듬어진 말만 너무 잘하는 세상이다. 무엇인가 좀 감출 줄 알고, 더듬거리는 겸손함이 비치는 생활 모습이, 결코 뒤지고 못난 자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이 비록 중요한 것일지라도, 시어의 애매성처럼 가려진 곳에 숨는 것도 하나의 멋이 될 것이다. 우리 몸에서 가장 중요한 심장이 밖에 튀어나오지 않고 속에 숨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