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사투리
퇴근 시간인데도 왠지 버스 안은 그리 붐비지 않아, 편안히 자리를 잡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시외버스 정류장 앞에 이르니, 시골서 오는 손님들이 한꺼번에 우루루 몰려 차에 올라왔다.
손님 중에 연세 높은 할머니 한 분이, 아들에게 줄 큼직한 보따리를 들고 힘겹게 올라왔다.
버스의 중간쯤 되는 좌석에 앉아 있던 나는, 멀찍이 버스 앞문으로 올라오는 할머니를 보고,
“할매 이리 오이소.”
하며 커다란 소리로 할머니를 불렀다. 연로한 분들이 귀가 어둡다는 것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차에 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이 소리를 들은 할머니는 매우 반가운 표정을 지으면서, 내가 양보하는 자리에 앉더니 할머니 특유의 그 순박하고도 인정 어린 말투로
“아이고 고맙구로, 이래가 우야꼬.”
하면서 내 손을 잡아 흔드는 것이었다. 나도 참 기분이 좋았다.
할머니 옆에 서서 한참을 가다가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내가 ‘할매’라고 부르지 않고 ‘할머니 이리 오세요.’ 했더라면, 과연 할머니가 그렇게 단번에 알아듣고 기뻐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렇게 불렀다면 승객들이 과연 모두 내게로 고개를 돌렸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할매’라고 하니까 승객들은 아마도 나의 친할머니를 부르는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떻든 표준어 ‘할머니’가 아닌 사투리 ‘할매’의 위력이 그러한 정황을 불러왔다고 생각되었다.
그렇다. 사투리의 효과는 매우 큰 것이다. 엄격히 말하면 ‘할매’와 ‘할머니’는 같은 어휘가 아니다. 가리키는 대상은 같지만 그 속에 품고 있는 의미망은 다른 것이다. ‘할매’가 가지고 있는 어감과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내용은, ‘할머니’가 가지고 있는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버스가 여러 정류장을 거치면서 손님이 불어 거의 만원이 되었다. 그렇게 되니 자연 출입구가 복잡해져서 오르고 내리기가 순탄할 리가 없었다. 이를 본 운전기사가 하는 말이
“뒤에는 훌빈하이꺼네 좀 들어가 주이소.”
한다.
‘훌빈하다’는 말을 정말로 적재적소에 쓰고 있었다.
‘훌빈하다’는 어휘는 그냥 텅 비어 있는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무엇인가 놓여 있어야 할 곳에, 그것이 놓여 있지 않고 빠져 있을 때 쓰는 말이다. 사람들이 그 자리에 들어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공간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운전기사가 그렇게 표현한 것인데, 이에 대치할 수 있는 적절한 표준어는 없다.
대구․경산 지방의 사투리에 ‘우지바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조심성 없이 위험한 행동을 마구 한다’는 뜻을 지닌 말인데 그 반대어는 ‘상적바르다’이다. 이 어휘들 또한 그 의미에 값할 만한 표준어가 없다. 이러한 예를 들자면 한정이 없다.
이처럼 사투리는 사투리만이 가지는 삶터가 따로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사투리에 대해서 잘못 인식하는 사례를 종종 본다. 사투리는 저급한 말이요, 표준어는 고급의 말이라는 인식이 그것이다. 참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경상도 방언과 서울 지방의 방언인 표준어는 우열의 관계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러 방언 중에서 의사소통이 가장 편리하다고 생각한 수도권 방언을, 국가적인 표준으로 삼은 언어가 표준어일 뿐이다. 그러므로 경상도 방언이나 서울 방언이나 그 자격은 똑 같은 것이다.
어느 초등학교의 한글날 기념식에서, ‘표준어는 좋은 말이고 사투리는 나쁜 말이니 표준말만 사용하자.’고 하는 훈화를 들은 적이 있다. 학생들에게 표준어의 중요성을 일깨우려고 한 말이겠지만 이 역시 옳지 못한 말이다.
본래 언어에는 우열의 차이가 없다. 말은 그 지역에 따른 문화의 차이에 맞추어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에스키모인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눈이 많이 오는 그곳의 기후에 맞추어, ‘내리는 눈’, ‘쌓인 눈’, 그리고 ‘얼음집을 만드는 눈’을 가리키는 말이 각각 따로 있다.
우리는 무지개를 일곱 가지 색으로 나타내지만, 쇼나어는 세 가지로, 바사어는 두 가지로 나타내며, 영어권에서는 여섯 가지로 나타낸다.
에스키모어나, 영어나, 쇼나어는 다 같이 그 지역의 특성과 문화에 맞게 만들어진 언어일 뿐, 이들 간에 높고 낮음의 차이는 결코 없는 것이다.
사투리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그 지방의 문화 속에서 만들어지고 길러진 것일 뿐, 표준어와 비교하여 좋고 나쁨의 구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투리는 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소중히 보존해야 할 하나의 무형 문화재이다.
그 지방 사람들끼리 모여 있는 경우나 가정 내에서는 그 지방의 사투리를 쓰는 것이 바른 언어생활이다. 그래야만 그 언어권 사람들만이 갖는 정감을 드러내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도 귀중한 사투리들이 메스미디어의 발달과 교육의 보급으로 점차 사라져 가고 있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투리에 대한 그릇된 인식도 이에 한 몫을 더해서 그 속도를 더해 가고 있다.
골골이 그 지방의 독특한 사투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멋스럽다. 그만큼 언어생활에 다양성이 존재하고 있다는 증거인 동시에, 맛깔스런 문학 작품이 생성될 수 있는 영양소를 갖추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투리로 ‘할매’에게 어리광을 부려서, ‘할매’의 가슴을 따스히 적셔 줄 수 있게, 우리의 아이들에게 참된 언어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