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은 한글 전용을 주장했을까
훈민정음 곧 한글은 세종대왕이 만든 위대한 문자다. 이제 그 누가 새로운 문자를 만든다 하더라도, 이보다 앞서는 문자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발음기관을 본뜬 자음과 천지인으로 요약되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 모음의 아우름은 단순한 언어학적 이론을 훨씬 뛰어넘기 때문이다.
그런 깊은 사상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보다 더 쉽고 편리한 글자가 또 있을 수 있을까? 정인지는 그것을 일러,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자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으며, 그 쓰임 또한 무궁무진해서 바람소리, 학 울음소리, 개 짖는 소리까지도 나타낼 수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가 지금 세계 속의 강국으로 힘찬 행진을 할 수 있는 저력도, 알고 보면 그 밑바탕에 한글이 떠받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외국인들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고 매우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가 훌륭한 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지도상의 작디작은 코리어는, 아마도 중국이나 일본의 말이나 문자를 쓰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왔는데, 예상과는 달리 높은 문화적 자산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이 글자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힘들었을까? 또 세종대왕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고마움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는 정작 훈민정음의 창제정신과 그 이면에 담긴 뜻을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많다. 비근한 예로 세종을 한글 전용론자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고, 세종이 사대와는 거리가 먼 주체사상으로만 물들어 있는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더러 있다. 또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는 사대모화에만 찌든 못난이로 취급하기도 한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대왕의 거룩한 뜻은 그 머리말에 잘 나타나 있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말과 달라서, 한자와는 그 뜻이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제대로 나타낼 수가 없다. 그래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할 바가 있어도 자기의 뜻을 글로 써서 나타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어 내놓으니, 모든 사람들이 이를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백성을 사랑하는 대왕의 마음이 절절이 녹아 있다. 어려운 한자를 알지 못하여 자기의 생각을 글로 표현할 수 없는, 어리석은 백성들의 답답한 가슴을 같이 아파하고 있는 성군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글에 나타난 표면적 사실은 잘 알지만, 그 뒤에 숨은 대왕의 고뇌는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지나친 데서 오는 결과다. 당시의 중국과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은 그 위상이 전혀 다르다. 오늘의 중국은 우리와 대등한 하나의 국가이지만, 당시의 중국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지구상의 유일한 선진국이요 문화국이었다.
나아가 국가로서의 인정을 받는, 오늘날의 유엔과 같은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기에 사대(事大)는 주변 국가들이 지향하는 최대의 이념이었다. 사대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히 큰 나라에 아부하는 개념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가 외치는 선진화, 세계화, 민주화와 같은 가치를 지니는 용어였다. 그러니 사대는 아무나 거스를 수 있는 담론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 세종도 사대라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였다. 그만큼 중국은 우리에게 중요한 나라였고 영향력 있는 나라였다.
한 나라가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당연히 그 문제는 중국과의 정치적 관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사안이었다. 천문기구 하나도 중국의 허가 없이 마음대로 설치할 수 없는 것이 그 시대의 상황임을 생각한다면, 문자 창제가 지니는 사안의 중대성은 엄청나다 하겠다. 그래서 훈민정음 서문에는 그에 대한 세종의 고뇌가 군데군데 배어 있다.
서문의 첫머리에, ‘국어가 중국어와 달라서 한자로는 맞지 않다’는 것을 내세운 것도 그러한 고민의 일단을 조심스럽게 드러낸 것이다. 겉으로 보면, ‘한자 대신에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글자를 만든다’는 의미지만, 실상 그것은 중국과의 문자 창제에 따른 마찰을 방지하기 위한 외교적 조치며 수사(修辭)라 할 수 있다. 중국의 뜻에 반하는 별다른 의도가 있어서 새로운 글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천명한 것이다.
이어서, 어리석은 하층 백성들의 어려움을 들어주기 위하여 글자를 만들 뿐, 상층의 선비들까지 이 글자를 쓰게 하기 위해 새 문자를 만드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넌지시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러한 의도는 서문 끝머리의 ‘따름이다’란 말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날마다 편리하게 쓰도록 한다고 하면 될 것을, 왜 하필이면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라 했을까? 이는 자신이 만든 글자를 나라 전체가 전용하려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은 백성들에게만 쓰도록 할 ‘따름’이라는 것이다. 치자의 고뇌가 서려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세종은 실제로 훈민정음을 전용(專用)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문화선진국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사대에 맞지 않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훈민정음 반포를 전후하여 지은,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월인천강지곡, 언해본 훈민정음 등도 하나같이 국한문혼용으로 지어졌으며, 훈민정음을 전용한 것은 하나도 없다.
나아가 세종은 한글을 당시의 흐트러진 한자음을 정리하는 데 원용함으로써 문화의 수준을 높이고자 하였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후 제일 먼저 시행한 작업이 혼란 상태에 있던 우리나라 한자음을 정리하고자 한 것이다. 세종은1443년 12월에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그 이듬해 2월 14일에 그 첫 사업으로 의사청(議事聽)에 물어 훈민정음으로써 한자음 정리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동국정운(東國正韻)이라는 책이다. 훈민정음 창제 후 제일 먼저 한 일이 한자음 정리 사업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는 훈민정음을 한자의 용이한 학습에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이때까지의 한자음은 반절법(半切法)이란 것을 이용하여 적었다. 즉 한자음을 적을 때, 알기 쉬운 다른 한자의 음을 이용하여 적은 것이다. 예를 들면, ‘東’ 자를 ‘德紅切’로 표기하는 따위다. 즉 덕(德)자의 첫소리 ‘ㄷ’ 과 홍(紅)자의 중성과 끝소리인 ‘ㅗ ㅇ’을 합하여 ‘동’을 표기하는 방법이다. 조금은 불편한 방법이지만 그때는 이 방법밖에 없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한글을 발명하여 ‘東’을 ‘동’으로 바로 적어 내었다. 한자를 이용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그만큼 한자음을 쉽게 적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종대왕은 한자를 쉽게 익힐 수 있는 발음기호를 창안해 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이것을 앞세워, 세종이 한글을 만든 주된 목적은 한자를 바로 익히고 쉽게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어떻든 세종은 훈민정음 전용을 주장하지 않은 것은 명백하다. 그것은 선진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사대에 어긋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흔히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최만리를 사대에 찌들었던 주체성 없는 인물로 평가한다. 이것 또한 사대에 대한 정확한 개념 위에서 최만리의 생각을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만리의 상소문은 6개 항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첫머리 부분의 3개 항을 보자.
1. 우리나라는 조종 이래로 지성껏 중국 문화를 섬기어, 오로지 중국 제도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야흐로 중국과 문물제도가 같아지려고 하는 때를 맞이하여 언문을 창제하시면, 이를 보고 듣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상히 여길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중화를 섬김에 있어 어찌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1. 예로부터 9개 지역으로 나뉜 중국 안에서 기후나 지리가 비록 다르더라도 아직 방언으로 인해서 따로 글자를 만든 일이 없고, 오직 몽고, 서하, 여진, 일본, 서번과 같은 무리들만이 각각 제 글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모두 오랑캐들만의 일이라 더 말할 가치도 없습니다. 전해 오는 고전에 의하면, 중국의 영향을 입어서 오랑캐가 변했다는 이야기는 있어도, 오랑캐의 영향을 입어 중국이 변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1. 만약에 언문만을 사용한다면 관리들은 오로지 언문만을 습득하려 할 것입니다. 진실로 관리들이 28자의 언문만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면,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궁리하려 하겠습니까?
이에서 보듯이 최만리는 당시의 시대정신인 사대에 입각하여 한글 창제를 반대하고 있다. 한글 창제가 선진국인 중국의 문물제도를 받아들여 선진문명국이 되고자 하는 데 지장을 줄까 염려한 것이다. 한자 배우기에 소홀함을 가져오는 것은, 지금 영어를 가르치지 말자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당시로서는 중대한 국가적 문제였음을 고려한다면, 최만리의 상소는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그래서 세종도 신하들의 비판을 막기 위해 비록 그를 하옥시키긴 하였지만, 하루 만에 그를 석방한 것이다. 이러한 최만리의 뜻을 간파한 세종의 반박도, 훈민정음 자체가 아닌 한자의 음과 관련한 운서(韻書) 문제에 치중하였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대가 운서를 아느냐? 사성(四聲)과 칠음(七音)을 알며, 자모(字母)가 몇인지 아느냐? 만일에 내가 저 운서를 바로잡지 않는다면, 그 누가 이를 바로잡겠느냐? ”
고 한 것이 그것이다. 훈민정음을 통한 한자음 정리가 시급하다는 자신의 생각을 내비친 것이다. 그만큼 훈민정음이 한자음 정리를 위하여 긴요하다는 것이다.
최만리는 1419년(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그 이듬해 집현전 박사로 임명되고. 그 뒤 집현전학사를 거쳐 부제학에까지 올랐다. 대제학은 명예직이었고 부제학이 집현전의 사실상 책임자였다. 요즘으로 치면 그는 학술원 원장이나 서울대학교 총장과 같은 최고의 지식인이다. 그런데 그가 어찌 매국노 같은 단순한 생각으로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했겠는가?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세종은 불편한 백성들의 문자생활을 덜어주기 위하여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그러나 세종은 훈민정음을 전용하려는 목적은 없었으며, 나아가 훈민정음을, 운서를 통한 한자음 정리에 활용함으로써 선진문화를 받아들임에 힘을 쏟았다. 최만리도 단순히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문화선진국으로 나아가는 사대에 어긋날까를 두려워한 것이다. 시쳇말로 하면 세종도 최만리도 세계화를 염두에 둔 인물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