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는 육식을 금지했나
석가모니의 입멸(入滅) 후 100여 년이 지나면서 승가는 석가모니의 법(法)과 율(律)에 대한 해석과 전승의 차이로 분열하게 되었는데, 이중 최초의 공식적인 분열은 계율의 준수에 있어서 보다 자유로운 태도를 주장하는 대중부(大衆部)와 엄격하고 보수적인 상좌부(上座部)로 나뉜 것이 그것이다. 그후 승가의 분열은 더욱 가속화되어 대중부와 상좌부를 중심으로 대중부 계통은 6부, 상좌부 계통은 12부로 분열하여 모두 18개의 부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상좌불교와 대중불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서로 다른 전통을 갖고 있다. 교리적·사상적 측면은 물론 실천적 특성에 있어서도 거의 정반대로 보이는 입장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계율적인 측면에서는 일반적으로 상좌불교가 보다 보수적이고, 대승불교는 상대적으로 느슨한 진보적인 성향을 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출가자가 고기를 먹는 것, 즉 식육(食肉)에 한에서는 상좌불교 국가에서는 허용되고 있는데 반해서 오히려 대승불교 국가에서는 엄격하게 금지되고 있다.
현재 불교 승단에서 채식을 고수하고 있는 나라는 중국·대만·홍콩·한국·일본 등 주로 대승불교권이다. 반면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 등 남방 상좌불교권에서는 스님들이 주로 걸식(탁발)과 청식(請食; 신도들의 식사 초대)에 의존하여 생활하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육식이 허용되고 있다. 그 대신 오후불식(午後不食)을 철저하게 고수하고 있다.
정확히 말해서 초기불교에는 출가·재가를 막론하고 절대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해 놓은 엄격한 계율은 없다. 다만 부처님은 재가자들에게 "산 것을 몸소 죽여서는 안 된다. 또 남을 시켜 죽여서도 안 된다. 그리고 죽이는 것을 보고 묵인해도 안 된다. 난폭한 짓을 두려워하는 모든 생물에 대해서 폭력을 거두어야 한다."라고 가르쳤다.
붓다는 불교도가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데와닷따(Devadatta, 提婆達多)가 제안한 불교교단 개혁에 대하여 붓다가 취한 태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팔리 율장(律藏)]에 의하면, 데와닷따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사항을 세존께 제안했다.
즉 ① 비구들은 평생토록 산림에서 거주해야 하며 마을[村邑]에 거주하면 죄가 된다. ② 비구들은 평생토록 걸식해야 하며 청식(請食)을 받으면 죄가 된다. ③ 비구들은 평생토록 분소의(糞掃衣)를 입어야 하며 거사의(居士衣; 재가 신자가 보시한 옷)를 입으면 죄가 된다. ④ 비구들은 평생토록 나무 아래에서 거주해야 하며 집 안에서 거주하면 죄가 된다. ⑤ 비구들은 평생토록 물고기와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야 하며 먹으면 죄가 된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조항을 불교 교단에서 실천하자고 데와닷따가 붓다께 제안했을 때, 붓다는 다음과 같은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
즉 ① 비구는 원에 따라 산림에 머물러도 좋고 마을에 머물러도 좋다. ② 비구는 원에 따라 걸식을 해도 좋고 청식을 해도 좋다. ③ 비구는 원에 따라 분소의를 입어도 좋고 거사의를 입어도 좋다. ④ 8개월 동안은 나무 밑에서 좌와(坐臥)해야 함을 인정한다. ⑤ 스스로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거나 죽였다는 소리를 듣거나 그런 의심이 가지 않는 것은 먹어도 좋다
여하튼 데와닷따가 제안한 것은 당시 인도 전통의 출가자 생활방식이었던 사의법(四依法)에 육식 금지의 조항을 추가한 것이다.
그런데 붓다는 데와닷따가 제안한 마지막 다섯 번째의 불식육(不食肉)에 대하여 세 가지 점에서 깨끗한 고기, 즉 삼종정육(三種淨肉)은 먹어도 좋다고 허락하였다.
"비구들이여, 자기 자신을 위해 죽인 고기라는 것을 알면서 그 고기를 먹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그러한 고기를 먹으면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만일 자기를 위해 죽이는 것을 보지 않았고, 자기를 위해 죽였다는 소리를 듣지 않고, 자기를 위해 고의로 죽였다는 의심이 없다면, 즉 세 가지 점에서 깨끗한 생선과 고기는 먹어도 좋다고 나는 허락한다."
의사 지바까는 외도(外道)들이 '사문 고따마는 자신을 위해 죽인 동물의 고기인 것을 알고도 먹는다'라고 말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 비방인지에 대해 세존께 여쭈었다. 붓다는 지바까에게 다음과 같이 일러 주었다.
"지바까여, '사문 고따마를 위해서 생명을 죽이는 자들이 있는데, 사문 고따마는 그 고기가 자신을 위해 죽인 동물의 고기인 것을 알고도 먹는다'고 말하는 자들은 나에 관하여 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니고 진실이 아닌 말로 나를 비방하는 것이다. 지바까여, 나는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즉 보여진 것이고, 들려진 것이고, 추측된 것인 경우이다. 지바까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한다고 말한다. 즉 보여지지 않은 것이고, 들려지지 않은 것이고, 추측되지 않는 경우이다. 지바까여, 나는 이러한 세 가지 경우, 고기를 수용한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자기를 위해서 죽인 것이라는 견(見)·문(聞)·의(疑)의 세 가지 사항에 위배되지 않는다면 생선이나 고기를 먹어도 좋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동물의 고기를 먹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팔리 율장에 의하면, 붓다는 제자들에게 열 가지 종류의 고기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금지시켰다. 먼저 인간의 고기는 엄격히 금지하였다. 이를 허용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타락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코끼리나 말의 고기는 왕의 상징이기 때문에 쓰지 못한다. 개고기는 사람들이 메스껍게 여기는 까닭에 금지되어 왔다. 뱀·사자·호랑이·표범·곰·하이에나와 같은 숲 속에 사는 짐승들을 잡거나 그것들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 어떤 동물들은 자신들의 고기냄새를 맡고 승려들을 공격했다고 한다. 결국 이러한 고기들은 나쁜 행위를 유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붓다 당시 고행주의자들은 '비린내' 나는 음식 때문에 그 사람이 부정해진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바라문은 붓다께서 '비린 것' 즉, 생선과 고기를 금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크게 실망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직접 붓다를 찾아가서 '비린 것'과 '부정'의 관계에 대해 붓다께 질문한다.
"이 세상에서 욕망을 억제하지 않고, 맛있는 것을 탐내고, 부정한 생활에 어울리며, 허무론(虛無論)을 가지고 바르지 못한 행을 하는 완고하고 어리석은 사람들,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
"난폭하고 잔혹하며 험담을 하고 친구를 배신하고 무자비하며, 몹시 오만하고 인색해서 아무 것도 남에게 주지 않는 사람들, 이것이 비린 것이지 육식이 비린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음식과 부정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그리고 음식과 건강과도 꼭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이 청정해지고 부정해지는 것은 음식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각과 행위에 의해서 결정될 뿐이다. 비록 생선과 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 채식주의를 실천한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나쁜 생각 혹은 나쁜 의도를 갖고 행동한다면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 붓다의 가르침이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붓다는 비록 조건적으로나마 식육을 허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육식을 금지하는 계율이 율장에 삽입되어 있을 까닭이 없다. 따라서 팔리 율장을 비롯한 사분율(四分律)과 근본율장(根本律藏) 그 어디에도 '고기를 먹지 말라'는 계율은 발견되지 않는다. 율장에서는 오직 생명을 빼앗는 행위, 즉 살생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을 뿐이다.
율장 외에 붓다의 계율관(戒律觀)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문헌 가운데 하나가 팔리어로 쓰여진 범망경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불살생(不殺生)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불식육(不食肉)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리고 마하가섭이 실천했다고 하는 두타행(頭陀行)의 내용에도 불식육에 대한 언급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대승불교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식육을 무조건 금지하는 경전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를테면 열반경(涅槃經) 능가경(楞伽經) 범망경(梵網經) 승만경(勝曼經) 등은 극단적인 육식금지 사상을 담고 있는 경전들이다. 이러한 대승경전 가운데 특히 불식육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경전은 열반경이다. 열반경은 불식육계(不食肉戒)를 불성계(佛性戒)로 이해하고 있다. 이 경전은 '일체중생 실유불성(一切衆生 悉有佛性)'의 사상을 주장한 경전이기 때문에 모든 생물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사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불식육의 문제를 더욱 강조한 경전은 능가경(楞伽經)이다. 이 경전에서는 단순히 불성 때문이 아니라 뭇 생명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일체의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매우 강경한 식육금지 사상을 표명하고 있다.
이러한 대승경전의 육식금지 사상을 바탕으로 대승계경(大乘戒經)에서는 하나의 완전한 계율로서의 불식육계(不食肉戒)가 제정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붓다 당시 더 나아가 율장 성립 때까지도 고기를 먹는 것 자체는 허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일체의 식육을 금지하는 사상으로 발전하여 나중에는 계율로까지 제정되었다.
그러면 왜 초기불교는 물론 부파불교에 이르기까지 허용되었던 고기를 먹는 문제가 대승불교에 이르러 금지되었을까? 대승불교의 육식금지 사상의 원인을 불교 밖에서 찾는 경우와 불교 안에서 찾는 경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의 불교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경우는 대승경전 편찬 당시 인도의 일반적인 추세에 따른 것이라는 견해이다. 즉 당시 인도 바라문 집단의 참여나 주도에 의해 자극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실제로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흥기(興起)할 당시 바라문들은 대부분 채식위주의 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회적인 분위기가 수행자들의 육식에 대해 부정적인 흐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의 대승불교에서 육식금지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두 번째의 불교내부에서 그 원인을 찾는 경우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요약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① 육식은 불교의 불살생계(不殺生戒)에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② 육식은 불성(佛性) 혹은 여래장(如來藏) 사상에 위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③ 육식은 자비의 종자(種子)를 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육식은 불교의 불살생계에 위배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육식 자체가 곧 다른 동물의 목숨을 빼앗은 살생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비록 자신이 직접 동물을 죽이지는 않았지만 죽인 동물의 고기를 사먹는 행위 자체가 살생과 다름없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사상을 극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경전이 바로 입능가경이다. 입능가경 제8, 차식육품 제16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고기를 먹지 않는 자[不食肉者]라면, 고기를 먹는 사람 때문에 또한 중생을 살해하고자 들어가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만약 곳곳에서 먹을 수 있는 고기를 매입하지 못한다면, 돈을 벌기 위한 사람이 매입하는 사람을 위해 동물을 죽이고, 판매하기 위해 동물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입자도 또한 살생하는 자와 다름이 없다. 그러므로 고기를 먹는 자는 성스러운 길에 장애가 된다."
이 경전의 내용에 의하면, 고기를 먹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중생을 살해하는 사람이 있게 된다는 논리이다. 즉 소비자가 있기 때문에 생산자가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기를 사서 먹지 않는다면, 그 만큼의 동물은 생명을 건지게 된다는 주장이다. 따라서 육식의 권장은 동물 살생을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육식과 살생은 한 가지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
"살생은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을 시키거나 또는 자신이 동물의 목숨을 '고의로' 빼앗는 것을 말한다. 산목숨을 고의로 죽이는 것에 대해서는 첫 번째로 금하는 계율이다. 이것은 행동 뒤에 목적이 있는 것이다. 즉 의도나 목적이나 살생목적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육식과 살생은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 의도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붓다는 어떠한 살아있는 생명체라도 고의로 죽이지 말라고 했다. 이러한 계율에 의해 육식을 완전히 금하는 채식주의를 고수하라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이러한 논리로 오늘날 어업과 목축업에 종사하고 있는 전 세계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 있겠는가? 이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붓다는 현실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이상주의자가 아님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이처럼 엄격한 계율을 재가자에게 적용시킨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울 것이다. 다만 수행자는 자신을 위해서 고의적으로 어떠한 생명체도 죽여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모두 생명체로 인정하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식물도 생명이 있는 것이다. 동물을 죽이는 것과 식물을 죽이는 것 모두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 그런데 채식을 하면 죄가 되지 않고, 육식을 하면 죄가 된다는 주장은 인간과 동물위주의 윤리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식물도 동물과 마찬가지로 생명을 지닌 생명체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면 불교도들은 음식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유익한 정보를 담마난다 스님의 견해에서 얻을 수 있다.
"고기를 먹는 불교도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음식에 대한 불교도들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한다. 살아있는 존재(有情)는 음식물이 필요하다. 우리는 살기 위해 먹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음식물을 자기 몸에 공급해 주어야만 한다. 그 음식물은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고, 일을 하기 위한 에너지를 제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부(富)가 증가한 결과, 점점 더 사람들은, 특히 경제적으로 발전한 나라에서는 단순하게 자신들의 미각을 만족시키기 위해 먹는다.
만일 어떤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음식이라도 간절히 바라거나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동물을 죽인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어떤 사람이 탐욕 없이 먹거나 직접 죽이는 행위에 관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육체적인 몸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며, 그는 스스로 자제를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로부터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어차피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육식이든 채식이든 먹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육식 자체를 죄악시할 필요는 없다. 다만 다른 생명을 희생시켜 가면서 그러한 음식을 먹고 얼마나 가치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 반문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붓다는 재가자들에게 육식에 대하여 엄격히 규제하지는 않았다. 재가자도 출가자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 종류의 고기와 앞에서 언급한 열 가지 고기가 아니라면 자유스럽게 먹어도 될 것이다. 재가 신자도 '살아있는 생명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계율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자신을 위해 살아있는 것을 죽여 음식을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죽은 것을 음식으로 요리하는 것은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육식을 권장한 것은 아니다. 붓다는 육식의 폐해도 잘 알고 있었다.
남방불교의 경우 재가자들은 자신이 마련한 음식을 스님들에게 공양한다. 스님들의 발우에는 채식은 물론 육식으로 가득 찬다. 재가자들이 올린 공양물은 선택의 여지없이 모두 먹는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불교도라면 육식을 해야 할 때에는 세 가지 점을 고려하여 판단한다. 그리고 그 음식물을 먹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깊이 숙고한다.
대승불교권인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불교에서는 완전히 육식이 금지되어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현재 한국의 사찰에서는 관습적으로 육식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 때문에 한국 사찰에서는 김치를 담글 때에도 젓갈류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스님들이 생선이나 고기를 먹으면 크게 잘못된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신심 돈독한 불자들은 채식을 실천해야만 훌륭한 불자가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 불교 본래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극단적인 채식주의자가 아니었다. 육식이든 채식이든 자신의 취향에 따르면 그만이다. 음식은 생명 유지에 필수적이다. 그 사람의 개인적인 체질과 건강 상태에 따라 채식이 이로울 수도 있고, 육식이 이로울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개인도 자신의 건강상태와 신체 리듬에 따라 입맛이 달라지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음식물의 선택은 그 사람의 체질과 건강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똑같은 음식을 먹었다 할지라도 인체 내에서 받아들이는 기능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같은 물이라도 소가 마시면 우유를 만들어 내고, 뱀이 마시면 독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신체적 상황에 따라 필요한 영양소를 보충해 주는 것이 건강에 도움이 될 것이다.
지나치게 채식주의를 고집하는 것은 먹을 것이 없어 아사(餓死) 직전에 있는 사람들이나 육식을 주로 하는 국가의 사람들에게는 전혀 현실을 무시한 배부른 사람들의 헛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이런 사람들에게 육식이 좋다거나 채식이 좋다는 논쟁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무엇을 먹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음식은 오직 이 신체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채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또 하나의 집착에 불과하다. 붓다는 중도(中道)에 의해 세 가지 종류의 육식을 허용하였다. 그 주어진 음식을 어떻게 먹고 소화할 것인가. 그 음식을 통해 얻어진 에너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그 음식을 먹고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마성 스님의 글을 요약 정리한 것에 약간의 졸견을 덧붙인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