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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반의 지리산 개척사-5

작성자jirisan|작성시간15.11.11|조회수105 목록 댓글 0

연하반 지리산 개척사-5


1962년 지리산등반지도를 만든 연하반은 1963년 이정표 60개와 안내리본 300개를 만들어 종주 등반로 곳곳에 부착하여, 지리산 종주등반 코스를 확정하였다. 연하반은 확정된 종주등반 코스등 보완된 지리산등반지도 1,000매를 제작하여 각 산악단체에 무료로 보내주었다.


1962~1963년까지 ‘지리산종합개발연구조사단’을 안내하였던 연하반은 1964년 정부에 자연보호를 위한 ‘자연국립공원’ 창설을 건의 하였다. 1965년 연하반 회지 창간호를 발행하였으며 지리산종주등반 코스에 2차로 이정표 90개를 설치 하였으며, 등반지도 2,000매를 제작하였고.  처음으로 연하반 회지를 발행하였다. 1967년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연하반을 ‘지리산악회’로 개칭한 후 우종수 연하반 총무가 지리산악회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1970년 ‘전라남도산악연맹’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며, 종주등반로에 3차 이정표 100개를 설치하였다.


연하반은 지리산종주 등반로 개척뿐만 아니라. 다양한 등반로를 답사하고 개척하였다.

1960년 피아골 ~ 노고단, 1965년 왕시루봉~노고단, 1966년 노고단 ~질매재~피아골~직전마을 이정표 설치하였으며, 1970년 ‘총각샘’을 발굴하여 이정표설치를 하였고, 1971년에는 칠선계곡~천왕봉코스에 이정표를 설치하였다. 1972년 “월간 산‘(산악문화사) 지에 지리산 10경을 선정하여 발표하였고, 1973~1974년에는 월간 山지에 지리산 차일봉의 전설, 음양수의 전설 등 11편의 전설을 발굴하여 발표하였다.


연하반(지리산악회)은 지리산의 등반로를 개척하고 무명봉우리의 이름을 지어 등반지도에 표기 하였으며, 종주등반로에 샘 10곳을 찾아 정비하는 등 지리산을 누구나 위험하지 않게 오를 수 있도록 개척하였다.


                                                                     맨 앞 함태식씨

                                       천주(음각자)를 발견하여 페인트로 알아보기 쉽게 함.

                                왼쪽 위 우종수님, 줄무뉘 함태식님,오른쪽 위 안기호씨

 

지리산을 개척할 때 이름 없는 봉우리나 샘등에 이름을 지었을 때의 일화 몇개를 소개합니다.


“삼도봉 일화”


“현재 삼도봉으로 불리는 봉우리는 1962년 종주등반을 하면서 지도를 만들기 위해 표기를 하면서 등행을 하였는데 현재 삼도봉은 탐문해 보았어도 이름을 알 수 없었기에, 우종수님께서 이봉우리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겠느냐고 물으셨답니다. 회원 한분이 봉우리 옆에 바위가 나라니(나란히의 사투리) 서 있으니 나라니봉으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셨답니다. 또 누가 좋은 이름을 지어줄 사람 없느냐고 해도 아무도 좋은 이름을 말씀 하지 않았답니다. 지도에 일단 표기를 해 놓았는데 종주등반을 마치고 집에 와서 정리를 하는데, 습기가 차서 잉크가 번져 날라리로 보였답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날라리 봉이라고 불렀는데 한국 산악사진 대가이신 김근원 선생님이 우종수님께 연하반에서 이름을 지은 곳 모두 좋은데 날라리봉은 좋아 보이지 않는 다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으셨답니다. 이후에 남원산악회 이병채씨와 상의를 하여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의 경계인 이 봉우리의 이름을 삼도봉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답니다.”


 

“총각샘 일화”


“연하반이 지리산종주등행을 한때 무척 더운 날 삼도봉을 지나 연하천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어린학생들이 넓은 바위위에 누워 있었답니다. 학생들은 연하반일행들에게 물좀달라고 했었답니다. 연하천에서 노고단으로 가려면 임걸령샘까지 가야 물을 먹을 수 있어, 충분히 물을 가지고 가지 않으면 고생을 할 수 밖에 없었답니다. 우종수님은 임걸령과 연하천 중간 지점에 샘이 있는지 탐문을 하였는데 경남 하동군 화개면 의신마을에 사는 약초를 캐러 지리산을 자주 다니는 사람을 소개받아 물었더니 등산로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는 샘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답니다.  이분은 당시에 환갑이 넘은 분인데 장가도 못가 혼자 사셨답니다. 지리산악회는 1970년 지리산종주코스 제 3차 이정표 설치를 한때 약초꾼이 알려준 샘을 찾아 이름을 지었는데. 이곳에 샘이 있다고 알려준 그분을 기념하기 위해 총각샘이라 명명했다고 합니다.”


 

“산희샘 일화”


“ 1965년 연하반이 지리산종주등반 코스 제 2차 이정표를 설치하면서 등행을 한때 무명 봉우리나 능선, 샘의 이름을 지어 표기하면서 가는데, 당시 연하반의 회원인 안기호씨가 아들을 낳으면 이름을 ”산“이라고 지으려고 했었는데 딸을 낳아 ”산희“라고 지었답니다. 등산을 하면서 우종수님께 이름을 지을 곳이 있으면 저도 한곳 지어보고 싶다고 했었답니다. 여러곳의 이름을 지어 표기를 하고 가는데 어느덧 장터목가까이 가게 되었답니다. 안기호씨는 안절부절하며 천왕봉에 다 와 가는데 이름 지을 곳이 없겠느냐고 하셨답니다.

 장터목에 도착하여 목이마른 회원들이 샘으로 몰려갔답니다. 우종수님은 이 샘이름을 지어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하셨답니다. 안기호씨는 좋아 하시면서 자신의 딸이름인 “산희”라고 이름을 지었답니다. 회원들 모두 이름을 지은 것을 축하해 주어 “산희샘”으로 불리게 되었답니다. 연하반이 지리산 종주등반로에 10개의 샘을 지도에 표기하기 전에는 “세석평전”의  음양수나 선비샘 같은 이름을 가진 샘도 있었지만 대부분 이름이 없었답니다. “산희샘”은 경상남도 산악인들이 두고두고 문제를 삼은 샘 이름이었습니다..“


 

1978년에는 ‘한국야생동물보호협회에서 ’지리산 사향노루 특별 보호위원회를 결성하였는데 우종수 회장님이 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사향노루,반달가슴곰,수달 등 야생동물 보호활동을 개시하였다. 1980년에는 ‘섬진강보호회’를 결성하여 섬진강을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강으로 보호하기 위한 활동을 개시 하였다.

1980년 그동안의 활동을 기록한 제 3호 회지 ‘지리산’을 발행하였다.  


1973년 제 1회 지리산철쭉제(노고단)개최 이후 회원으로 가입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구례군민들이 ‘연하반(지리산악회)의 산악활동에 참여하였다. 노고단 철쭉제, ’원추리 잔치‘ ’피아골 단풍제‘등 산악행사에 구례군 공무원들도 많은 협조를 하였다. 이러한 연하반(지리산악회)의 산악활동은 구례군민들이 화합하고 협조하는 풍토를 조성하는데도 크게 기여하였다.

 


-1974년 산악문화사에서 선정한 ‘한국 100산악인’에 우종수회장님 선정됨(산지 57호)

-1974년 제 2회 지리산철쭉제에서 우종수회장. 전라남도산악연맹으로부터 산악공로상 수상

-1974년 8월 산악문화사에서 선정한 ‘전국60개우수산악단체’에 지리산악회 선정됨

-1975년 제 1회 국립공원대회(국립공원협회 주관)에서 ‘지리산악회’ 산악공로 단체상 수상

-1975년 제 1회 국립공원대회(국립공원협회 주관)에서 함태식 지리산악회 부회장이 산악공로상 수상

-1977년 제 1회 ‘피아골단풍제(전남매일신문사주최)’에서 우종수회장 감사패 받음.

-1977년 함태식부회장 산악공로 건설부장관상 수상.

-1977년 함태식부회장 산악공로 ‘전라남도지사상 수상

-1977년 ‘지리산악회’ 산악문화사 발행 산지에서 선정한 ‘전국30우수산악단체’에 선정됨

-1978년 한국국립공원협회에서 우종수회장 ‘자연보호공로패’받음

-1979년 우종수회장 내무부장관 표창 수상

-1979년 김정무회원 전남매일신문사에서 산악공로 감사패 받음

-1979년 안극순이사 내무부장관 표창수상

-1995년 우종수회장 구례군민의상 수상

-1998년 우종수 지리산악회 고문 자연보호 공로로 대한민국 훈장 ‘모란장’수상(1998년 환경의날 기념식에서 김영삼대통령에게 직접수상)


                                                             노고단 철쭉

 

아래 글은 우종수 지리산악회 회장님이 지리산의 설화를 발굴하여 산악문화사에서 발행한 “山”지에 발표한 원문입니다.


“山”지 1973년-1월호


차일봉의 전설


차일봉은 지리산의 3대 주봉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노고단의 자매봉으로서 그 서쪽에 우뚝 솟아있다. 마치 차일을 펼쳐 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 부르게 된 이름이며, 더욱 전망이 좋아 경관이 웅장하고 아름답기로 이름난 봉우리다.

 또, 차일봉은 우번대, 관음대, 종석대 등 여러 이름을 갖고 있으니, 그 유래와 전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수려한 차일봉의 남쪽아래 계곡 즉 수석이 아름다운 천은사 계곡의 상류 깊은 산중의 비경엔 오랜 옛날부터 상선암이란 이름난 선원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옛날 신라의 도승 우번조사께서는 젊은 시절에 조용한 산성암을 찾아 이곳에서 10년 동안 좌선수도하기로 결심하고 혼자서 열심히 불도를 닦은 지 어언간 9년째 나는 따뜻한 어느 봄날. 하루는 선녀처럼 아름다운 절세미인이 암자 창문 앞에 홀연히 나타나 요염한 자태로 우번에게 추파를 던지며 자기를 따라 오라고 정답게 손짓을 하는 것이 아니가?

 그 유혹에 마음이 홀린 우번은 황홀감에 도취되어 수도승이란 자기 자신의 위치를 생각해 볼 여유도 없이 허둥지둥 그 여인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런데 그 미모의 여인은 보일 듯, 말 듯 앞서가며 온갖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산새들이 즐겁게 노래하는 아름다운 수림 속을 나는 듯 가볍게 지나쳐 산봉을 향해 높은 곳으로 올라만 간다.

 우번도 놓칠세라 그 여인의 발자취를 따라 숲속을 헤치며 정신없이 올라가다 보니 어느덧 차일봉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손짓하며 앞서가든 그 여인은 갑자기 간 곳 없고 난데없이 관세음보살이 눈앞에 나타나서 앞을 가로막고 위엄스레 서 있지 않은가?

 우번이 감짝놀라 정신을 가다듬고 생각하여 보니 이것은 필시 관세음보살이 자기의 도심을 시험하기 위하여 미녀로 변신한 것이라 비로소 깨닫고 그 자리에 꿇어 엎디어 자기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참회하다 다시 살펴보니 관세음보살은 간 곳이 없고 그 자리에 큰 바위만 우뚝 서 있었다. 자신의 수도가 부족함을 크게 깨달은 우번은 이로부터 더욱 발분하여 수도하기로 결심하고 즉시 그 바위 밑에 토굴을 파고 토굴속에서 다시 열심히 수도정진하기 수년 뒤에 크게 도를 닦아 드디어 도통 성불하여 이름난 도승이 되셨다 한다.

 그래서 우번조사가 도통한 그 토굴지리를 우번대라 부르게 되었으며 또, 우번조사께서 도통하는 순간에 신비롭고 아름다운 석종소리가 홀연히 들렸다 하여 이곳을 종석대라 부르며 그리고, 관세음보살께서 현신하여 서 있던 자리를 관음대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그 후에도 이곳에서 수도하여 도통한 고승이 많이 나왔으며, 특히 근세의  고명한 진응도사를 비롯하여 용화스님, 호은선사등 많은 도승을 배출하였음으로 이곳은 불도의 영지로 손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수도하여 도통성불하게 될 때는 누구나 그 신비롭고 은은한 석종소리가 들려왔다는 전설 때문에 지금도 도통성불의 꿈을 안은 도사의 후예들이 이곳을 찾아 종석대, 관음천 샘터에 세워진 조용한 암자 불당에서 춘풍추우에 귀를 기울이며 수도하는 승도들의 발자취가 끊이지 않는다.


“山“지 1973년-3월호


황호랑이 막터


지리산 화엄사 계곡 어구에 황듬이라 부르는 작은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옛날에 이 마을에는 황씨 성을 가진 용감한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황씨는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 캐는 것을 생업으로 겨우 생계를 유지하였으나 채약을 못하는 겨울철에는 주걱을 만들어 팔기도 하였다. 겨울철 어느날, 황씨는 주걱을 깎으러 지리산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그날은 집에서 기르고 있던 암캐가 한사코 따라나서기에 하는 수 없이 길동무 삼아 데리고 갔다.

 황씨가 노고단을 넘고 임걸령을 지나 반야봉 근처 밀림지대에서 주걱을 한짐 깎아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고산지대의 변덕스러운 기후는 별안간 눈이 내리기 시작하였다. 펄펄 쏟아져 내리는 백설로 산마루엔 순식간에 눈이 수북이 쌓여서 길이 막히니, 눈을 헤치며 걸어야 하는 황씨의 발길은 힘에 겨웠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어두워지기 시작하였다..

 

더 걷기를 단념한 황씨는 할 수 없이 임걸령 샘터 영마루에서 피아골 쪽 낭떠러지 암벽 밑으로 내려가 바위굴을 의지하고 나뭇가지를 모아 간단한 산막을 마련한 다음, 막 앞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암캐와 함께 산막에서 하룻밤을 나기로 하였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하필이면 그날 밤에 암캐가 갑자기 산기가 돌아 강아지 새끼를 일곱 마리를 낳았다.

 계속 내리던 눈은 밤이 깊어서 말끔히 개었으나, 하늘엔 구름사이로 달빛이 희미하고, 지상엔 백설이 만건곤하니 온 산은 은세계를 이루어 신비롭고 적막한데, 갓 나온 강아지 새끼들은 찬 공기 탓인지 어미 품을 찾아 보채며 낑낑거린다. 황씨는 따스한 모닥불 앞에서 보채는 강아지들을 돌봐 주며 조용히 상념에 잠겨 있을 때, 난데없이 황소만한 큰 호랑이 한 마리가 막 앞에 나타나서 어흥! 하고 산천이 무너질 듯 한 큰 소리로 포효한다.

 

대경실색한 황씨는 등골에서 식은땀이 흘렀으나 정신을 가다듬고 살펴보니 호랑이도 지혜 있는 짐승인지라 모닥불이 무서워서 막 앞에 접근하지는 못하고, 건너편에서 이쪽을 노려보며 큰 아가리를 딱 벌리고 으르렁대는 꼴이 아마도 강아지가 탐이 나서 그러는 눈치다. 호랑이는 원래 강아지를 좋아한다. 황씨는 할 수 없이 강아지 한 마리를 집어 호랑이 앞으로 던져주며 "옛다! 먹어라." 소리쳤다.

 그랬더니 호랑이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강아지가 땅바닥에 미처 떨어지기도 전에 딱 벌린 큰 입으로 날쌔게 받아 널름 삼켜버리고서는 다시 또 으르렁댄다. 황씨는 별 수 없이 강아지를 또 던져주고, 호랑이는 기분 좋게 받아먹고, 이렇게 승강이를 거듭하다 보니, 급기야 강아지 일곱 마리를 몽땅 호랑이 아가리 속에 던져준 결과가 되었으나, 그래도 호랑이는 부족한지 물러갈 기색조차 보이지 않고 더욱 더 기승을 부리며 으르렁댄다.

 강아지만 모두 던져주면 순순히 물러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어미개와 자기마저도 잡아먹고야 말겠다는 흉악한 호랑이의 욕심 많은 속셈을 알아차린 황씨는 분하고 괘씸한 생각에서 오히려 반항심이 불타 호랑이와 단호히 정면대결하기를 결심하였다. 이렇게 되어 백수의 왕자 지리산 호랑이와 용감한 산사람 황씨가 눈 나리는 한겨울 고요한 으스럼 달밤에 백설로 덮힌 임걸령의 낭떠러지 절벽 밑에서 불꽃을 튕기며 훨훨 타오르는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생사를 가름하는 처절한 대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분노한 인간의 강한 의지와 그리고 호시탐탐 야수적 탐욕만을 노리는 호랑이의 영맹한 시선이 모닥불 너머로 서로 사납게 마주쳐 교차하는 초긴장의 순간이 일각이 여삼추로 그 얼마나 흘렀을까? 그러나 이러한 위기일발의 긴박감 속에서도 태연한 인간의 용기와 임기응변하는 지혜는 오히려 사나운 호랑이의 영맹을 물리치고 장하게 이겨낼 수 있는 놀라운 기적을 나타내고야 말았다.

 황씨는 모닥불 앞에서 호랑이를 노려보며 그 놈을 내쫒을 계책을 골똘히 궁리하다가 이글거리는 모닥불을 무심코 바라보는 순간, 마치 섬광처럼 기상천외의 기발한 기지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옳거니! 자탄하며 무릎을 탁치고 자리를 일어선 황씨는 이글거리는 모닥불 속에서 시뻘겋게 달아 있는 강아지만한 돌덩이 하나를 주걱으로 뎅겅 떠서 조금 전에 강아지를 던져 주던 때와 꼭 같은 동작으로 "옛다! 먹어라." 소리치며 호랑이 앞으로 슬쩍 던져주었다.

 호랑이는 가다렸다는 듯이 그 것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날쌔게 아가리로 늘럼받아 꿀꺽 삼켜버리고서는 아픔을 못 이겨 산천이 무너질 듯 한 큰 포효소리와 함께 단장의 비명을 거듭 지르고 날뛰며, 뒹굴다가 마침내 백설 위에 붉은 피를 토하며 얼룩진 거구를 지탱하지 못하고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렇게 하여 남다른 용기와 지혜로 맨주먹으로 큰 호랑이를 잡은 황씨는 고을에서 큰 상을 탔을 뿐만 아니라, "황호랑이"라는 영예로운 장사의 칭호까지 얻었단다. 그리고 그 때의 그 산막자리를 "황호랑이 막터"라 불러 전해 오고 있으며, 지금은 이곳이 지리산 등반의 길목인 임걸령 캠프사이트의 한 명소로 되어 있다.


“山“지 1973년-5월호


화엄사 각황전의 전설


“지리산하면 화엄사를 손꼽게 되고 화엄사 하면 각황전을 연상케 할 정도로 유명한 국보 제 67호 각황전은 거금 1,430여 년 전 신라 진흥왕 4년에 화엄사의 개산조 연기조사께서 화엄종의 오지를 선도하기 위한 법회강전으로 건설한 대법당으로서 그 규모가 광대웅장하고 그 구조가 미려 장엄하여 신라문화의 웅건한 기상과 슬기를 자랑하는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물이며, 오랜 역사 속에 유서 깊은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각황전은 처음에 방장의 삼존불을 모셨다 하여 장육전이라 불렀다.

 

옛날에 장육전이 실화로 소실된 때가 있었는데 그 후 3천승도가 화엄사 회승당에 모여 장육전 재건을 위한 방안을 논의한 끝에 널리 시주를 구하여 희사를 받아서 거액의 건축비를 마련하기로 대중결의를 한 것 까지는 좋았으나, 그러나 막상 누가 그 중책을 짊어지고 시주를 받아 모화의 화주로 나서느냐가 문제였다. 그래서 가장 덕이 높고 역량 있는 승려를 한 사람 골라서 화주로 정하자는 중론이었으나 뽑는 방법이 또한 문제였다.

 결국 사람의 힘으로서는 적임자를 고르기가 어렵겠으니 부처님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하여 3천승도가 다시 대원법회를 열어 성대한 불공을 올린 다음 부처님의 영험을 얻어 화주를 정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그 방법으로서 하얀 밀가루를 가득 담은 큰 독안에 엿덩이를 묻어놓고 누구나 그 밀가루 속에 손을 집어넣어 엿덩이를 꺼내게 하여 손에 흰 가루가 묻어나지 않은 기적이 나타나는 사람은 부처님의 영험이 내린 증거로 삼아 화주로 정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대덕스님부터 상하를 막론하고 승도들이 차례로 독 속에 손을 넣어 보았으나 예기했던 부처님의 영험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으니 왠일일까?

 마지막으로 절에서도 가장 미천한 화부노릇을 하고 있는 매월이라는 젊은 공양주의 손목에서 뜻밖에도 영험의 기적이 나타났을 때, 이것을 지켜보던 3천 승도들은 기쁨보다도 오히려 놀라움이 앞섰다. 이렇게 되어 무거운 화주의 책임을 맡게 된 매월이 길일을 택하여 떠나게 된 전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서 현몽하시기를 "무슨 일이고 첫 걸음이 가장 중요하니 새벽에 길을 떠나거든 첫 번째 만나는 사람부터 반드시 시주를 받아야 성공할 것이니 명심하라."는 당부였다.


매월은 다음날 새벽에 새로 지은 가사장삼을 떨쳐입고 바랑을 짊어지고, 백팔염주를 목에 걸고 한 손에 관음장을 또 한 손에 목탁을 공손히 들고 여러 대중 승도들의 환송을 받으며 장도에 올랐다.

 매월은 어젯밤 부처님의 현몽이 생각나서 옳거니 저분 시주부터 받아야겠다고 마음속에 다짐하면서 다가오는 그 사람과 마주쳐 보니 뜻밖에도 그는 평소에 낯이 익은 아랫마을에 하는 가난한 벙어리 노인이었다. 벙어리 노인은 그날도 먹을 것이 없어 마침 구걸을 할 요량으로 새벽 일찍부터 이렇게 절을 찾아오는 중이라 하였다. 그러나 매월은 첫 손님을 놓칠세라 벙어리 노인에게 권선문을 보이면서 시주하기를 권하였다.

 

희사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벙어리 노인은 민망하여 미안하다고 사정을 하였다. 그러나 매월은 길을 가로 막고 막무가내로 애원하듯 시주를 강요하니, 사정이 매우 딱하게 되어 궁지에 몰리게 된 벙어리 노인은 당황한 나머지 오던 길로 되돌아서 길을 피해 도망치듯 가다가 자기 때문에 대사를 그르치게 한 자책감을 못 이겨 계곡을 흐르는 애천 소에 몸을 던져 가엽게도 투신자살을 하고 말았다.

 

자포자기의 심정에서 차라리 벙어리 노인처럼 물에 빠져 죽고 말까하고 수면을 바라보는 순간에 마침 석양이 비춰주는 맑고 푸른 수중에는 큼직한 은어 한 마리가 활기차게 유영하고 있지 않은가. 이것을 바라 본 매월은 갑자기 생에 대한 애착심이 울어나서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무슨 면목으로 다시 절로 돌아가랴! 모든 것을 단념하고 우선 살기 위하여 36계 도망을 가기로 결심한 매월은 그 길로 정든 고향산천을 버리고 홀로 정처 없는 방랑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렇게 삶에 대한 집념으로 시작된 많은 방랑의 구걸행각 속에서도 세월은 흐르고 흘러 화엄사를 떠난 지 어느덧 8년이 되던 해, 멀리 고국을 떠나 당나라 서울 장안의 화려한 거리를 구경삼아 거닐고 있을 때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매월대사님" 하고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매월은 사고무친한 만리타국의 낯선 거리에서 자기의 이름을 부를 사람이 있을리 만무한데 웬일일까? 자기의 귀를 의심하면서도 소리 나는 곳을 돌아다보니 이상한 일이다. 8세가량으로 보이는 준수한 소년이 한 장정의 등에 업혀 자기를 보고 반가운 듯 손짓하며 다가오더니 땅에 엎드려 "매월대사님. 이제야 뵙습니다." 하고 공손히 큰 절을 하는 것이 아닌가?


 매월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고 서 있는데 그 때 또, 3-4명의 장정들이 우루루 달려 나와서 매월에게 하는 말이 "대사님을 오랫동안 가다렸습니다." 하며 덮어놓고 자기들을 따라 가자고 간청한다. 그 장정들의 표정이 매우 은근하고 부드럽기는 하나 의아스러운 마음이 앞서 겁도 나지만 할 수 없이 장정들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 보니 놀랍게도 당나라 황제가 거처하는 큰 궁궐로 안내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또 더욱 놀라운 것은 노황제가 그 소년과 더불어 높은 용상에 앉아 매월을 몹시 반기매 희색이 만면하여 하는 말이 "대사는 오늘 나의 단 하나 밖에 없는 말 못하는 벙어리 황태자의 말문을 열게 하여 주었으니 고맙기 한량없다." 면서 크게 주연을 베풀어 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주연이 끝난 후에도 황제는 다시 말하기를 "은혜를 보답코자 하니 대사의 소원이 무엇이냐?" 고 물으신다.


 매월은 거듭 사양하였으나 황제가 간청함으로 할 수 없이 자기가 당나라까지 오게 된 경위를 말하고 장육전의 재건만이 소원이라고 사실대로 솔직히 고하였다. 황제는 서로 불연이 깊음을 알고 더욱 감격하여 마지않으며, 즉석에서 매월의 청을 쾌락하고 장육전 재건을 위하여 국고를 열어 금은보화를 큰 배에 가득 실어주며 신라연안까지 군선으로 운송케 하였다. 이와 같은 인연으로 8년 만에 다시 고국에 돌아온 매월은 화엄사에 장육전을 재건한 것은 물론이다.


그런데 이처럼 불력으로 맺어진 매월과 벙어리 노인과 황태자와의 인연은 더욱 기이하다 하겠으니 즉 8년 전에 매월의 간청에 쫒기어 애천 소에 빠져 죽은 벙어리 노인의 영혼은 그 길로 당나라 태산에서 동천을 향하여 자식을 빌던 당나라 황후의 품으로 달려가 태자를 잉태 환신 하여 다시 이 땅에 인도 환생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불력과 불연으로 인하여 재건을 보게 된 장육전을 황태자의 깨달음으로 인하여 자건하게 되었다 하여 이때부터 명칭을 각황전이라 고쳐 부르게 된 것이란다.“

                               1979년 적설기 등반(여수 천왕산악회와),노란옷이 필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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