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편단심 민들레 야
(심금을 울리는 사연)
ㆍ팔 수 없는 꽃
꽃집에는 민들레꽃이 없습니다.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꽃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우리가 진정한 사랑과 다정함,
우정과 소중한 사람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민들레는 야생으로 자라나
한적한 곳에 조용히 꽃을 피우고,
마침내 자신을 향해
허리를 굽혀줄 누군가를 기다립니다.
민들레의 꽃말,
"내 사랑 그대에게"
"나의 사랑을 드려요"
그리고 — 일편단심(一片丹心)
ㆍ노래가 된 사연
1981년, 가왕 조용필은
〈일편단심 민들레야〉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이 노래의 작사자는 이주현 여사.
당시 72세의 그녀가 신문에 투고한
한 편의 자전적 수기가 노래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조용필이 그 글을 읽고 감동하여
직접 가사로 만들어줄 것을 제안하였고,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애절한 노래 하나가 탄생했습니다.
ㆍ50년의 기다림
50여 년 전, 이주현 여사는
동아일보 총무국장이던 남편과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광풍 속에서
남편은 그만 납북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 그녀는 홀로 세 남매를 키우며
노점 좌판을 전전하는 고단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평생 모은 돈을
남편이 몸담았던 동아일보에 기부하며
남편의 이름을 붙인
'수남(水南) 장학금' 을 만들었습니다.
ㆍ남편에게 보내는 편지
1981년 4월 28일,
신문에 실린 기사 〈햇빛 본 할머니의 꿈〉은
이주현 여사의 일편단심 이야기를 이렇게 전합니다.
"수남(水南)! 이렇게 불러볼 날도 이제 오래지 않겠지요.
나도 고희(古稀)를 넘겼으니, 살아갈 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당신과 헤어진 지도 어언 30년 성상이 넘어갔네요.
밟혀도 밟혀도 고개를 쳐드는 민들레같이 살아온 세월,
몇 번씩이나 인생을 포기할까 생각했지만
그때마다 당신을 생각하며 이겨왔답니다."
그리고 1천여 장의 원고 첫머리에는
이런 고백이 적혀 있었습니다.
"내가 아무리 끈질긴 생명력의 민들레라 해도
일편단심 붉은 정열이 없었다면 어린 자식들을 못 키웠을 것이고,
지아비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없었다면
붓을 들 용기조차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ㆍ노랫말 속에 담긴 뜻
"님 주신 밤에 씨 뿌렸네, 사랑의 물로 꽃을 피웠네.
처음 만나 맺은 마음 — 일편단심 민들레야.
그 여름 어인 광풍, 낙엽 지듯 가시었나.
행복했던 장미 인생 비바람에 꺾이니
나는 한 떨기 슬픈 민들레야.
긴 세월 하루같이 하늘만 쳐다보니
그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일편단심 민들레는 — 떠나지 않으리라."
이 노랫말 속에는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사연이 숨어 있습니다.
"그 여름의 어인 광풍" — 1950년, 청천벽력 같은 6·25 전쟁.
"낙엽 지듯 가시었나" — 그해 가을, 납북된 남편.
"하늘만 쳐다보니" — 소식조차 알 수 없는 그이를 향한 그리움.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그 목소리" —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말,
"걱정하지 마, 금방 돌아올게!"
그 목소리였습니다.
ㆍ스튜디오의 눈물
조용필은 녹음 당일,
이주현 여사를 스튜디오에 직접 초대했습니다.
한 맺힌 사연이 조용필 특유의
절규에 가까운 열창으로 울려 퍼지던 그 순간,
"나는 한 떨기 슬픈 민들레야.
긴 세월 하루같이 하늘만 쳐다보니
그이의 목소리는 어디에서 들을까 —"
이 대목에 이르자
이주현 여사의 주름진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스튜디오 안의 모든 사람들도
눈을 감은 채 숙연히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ㆍ민들레처럼
모진 풍파에도 꺾이지 않고
밟혀도 밟혀도 다시 고개를 드는 민들레처럼,
이주현 여사는 평생을
일편단심 하나로 살아냈습니다.
사랑은 살 수 없습니다.
우정도, 그리움도, 기다림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이렇게 꽃집 한켠이 아닌
우리들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그리고 끈질기게 피어납니다.
- 받은 글 -
*
오늘도 민들레처럼,
꿋꿋하고 후회 없는 하루 되십시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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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死 時 隱 四 🦚
(사시은사)
"죽는 순간까지
숨겨야 할 4가지"
법정 스님은. "비우면 비울수록 더 가벼워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분은 또 한편으로 끝까지 지켜야 할 '마음속의 품격'도 강조했습니다.
세상에는 드러낼수록 가벼워지고 숨길수록 깊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평생의 가르침 속에서 전한 죽는 순간까지 숨겨야 할 네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자신의 선행을 숨겨라!
진짜 착한 사람은 자신이 착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선행은 보여줄수록 가치가 떨어지고 숨길수록 깊어집니다.
누군가를 돕고도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마음의 겸손이다. "주는 손이 아름답다"라고 했습니다. 받는 이를 돋보이게 하는 선행이 진짜 공덕입니다.
둘째. 자신의 상처를 숨겨라!
아픔을 말로 풀면 잠시 위로가 되지만 그 아픔을 품고 견디면 마음이 단단해진다. 세상은 상처를 드러내는 자보다 묵묵히 이겨내는 자에게 고개를 숙인다!
"아픔은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라 했습니다. 상처는 보여줄 게 아니라 배우는 것입니다.
세째. 자신의 재산을 숨겨라!
재물은 드러낼수록 불행의 빌미가 된다. 가진 것을 자랑하는 순간 타인의 비교와 욕심을 불러온다. 富(부)는 조용할수록 오래갑니다.
"가난하게 살아야 자유롭다" 라고 했다. 재산은 드러내는 게 아니라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네째. 자신의 지혜를 숨겨라!
지혜로운 사람만큼 말이 적다. 자신이 얼마나 아는지 말로 증명하려는 순간 그 지혜는 가벼워진다.
배운 사람은 대화에서 이기려 하지 않고 이해하려 한다. 진짜 지혜는 말이 아니라 태도에 담겨 있습니다.
삶의 마지막까지 '겸손한 무게'를 지키라 하셨다.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고 아픈 것을 떠벌리지 않는 삶... 진짜 깊은 사람은 드러내지 않는다. 그 고요함 속에서만 마음은 자유로워진다.
오늘도 이웃과 마음을 함께 나누며 건강에 유의하시고, 즐겁고 행복한 하루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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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 현충일 ♣︎
♣︎6월 현충일을 몇일 앞두고 오늘 받은 글 입니다. 가슴을 저미게 하는 글이라 공유코져 옮깁니다煥26丙午
■ 셈 워커 대위..
하버드 박사 과정을 포기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해 28세의 나이로 전사한 '윌리엄 해밀턴 쇼 대위'의 이야기를 썼다.
글이 나간 후 많은 분들이 "이런 분이 계신 줄 몰랐다", "너무 부끄럽고 감사하다"는 메시지를 보내 주셨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 반응들이 내게는 조금 충격적이고 씁쓸하게 다가왔다.
우리가 매일 숨 쉬고 밥을 먹으며 당연하게 누리는 이 나라의 평범한 일상이, 실은 남의 나라 청년들의 찢어지는 피와 눈물 위에 세워진 기적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철저하게 잊고 살았구나 싶어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은 그 먹먹한 부채감을 조금이라도 덜어 보고자, 교과서가 가르쳐 주지 않았던 또 다른 기가 막힌 사연 하나를 더 써볼까 한다.
1950년 여름, 6.25 전쟁 초기.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북한군 앞에서 대한민국은 멸망 직전이었다. 임시 수도 부산이 지척인 낙동강 방어선.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워커(Walton H. Walker) 중장은 후퇴를 입에 올리는 미군과 한국군 지휘관들을 모아 놓고 권총을 빼들며 그 유명한 명령을 내린다.
"Stand or Die (버티거나, 아니면 죽어라)."
"우리가 여기서 밀리면 수백만의 한국인들이 바다로 쫓겨나 학살당할 것이다.
덩케르크는 없다.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
그는 그 절망적인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며 기어이 대한민국의 숨통을 살려냈다.
우리가 아는 서울 워커힐(Walkerhill) 호텔의 이름이 바로 이 장군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것은 익히 알려진 유명한 일화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당시 그 끔찍한 전장에는 8군 사령관인 아버지 워커 장군뿐만 아니라, 그의 외아들인 24세의 샘 워커(Sam S. Walker) 대위도 미 제24보병사단의 중대장으로 소총을 들고 최전선에서 함께 뒹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최고의 장성이 자신의 귀한 외아들을 가장 위험한 사지로 밀어 넣은 것이다.
비극은 1950년 12월 23일에 찾아왔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황이 다시 악화되던 매서운 겨울, 전선을 시찰하러 이동하던 워커 장군의 지프차가 서울 도봉구 부근에서 한국군 트럭과 충돌해 전복되었다. '낙동강의 영웅' 워커 장군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도쿄에 있던 유엔군 총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최전방에서 중대장으로 전투를 지휘하고 있던 워커 장군의 아들, 샘 워커 대위에게 특별 지시를 내린다.
"부친의 유해를 모시고 당장 미국 본토로 귀환하라."
아버지가 전사했다. 장례를 치러야 한다. 최고 사령관이 직접 귀국을 명령했다.
그 어떤 누구도 이 24살의 청년 장교가 짐을 싸서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비난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나 합당하고,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명분이었다.
하지만 얼어붙은 참호 속에서 아버지의 부고를 전해 들은 청년 장교는, 그 달콤하고도 합당한 생존의 동아줄을 단칼에 찢어 버린다.
샘 워커 대위는 맥아더의 귀국 명령을 거부하며 이렇게 타전했다.
"나의 부하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목숨을 걸고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중대장인 제가 어찌 부하들을 이곳에 버려두고, 나 혼자 살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남겠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차가운 관을 홀로 태평양 너머 알링턴 국립묘지로 돌려보냈다.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대신, 그는 다시 수류탄을 챙기고 눈 덮인 전방의 참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버지는 타국의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불사했고, 아들은 자기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기꺼이 아버지의 장례식마저 포기했다.
그들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모를 나라에 총과 대포만 보낸 것이 아니다.
미국 상류 사회의 가장 고결한 도덕과 핏값을 함께 보낸 것이다.
이것이 얄팍한 이념 장사꾼들이 틈만 나면 훼손하려 드는 '한미동맹'의 진짜 밑바닥에 흐르는 묵직한 본질이다.
화사한 봄꽃이 피어나는 출근길. 우리가 숨 쉬듯 당연하게 누리는 이 5월의 아침은 아버지의 관을 태운 비행기가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다시 총을 쥐었던 24세 이방인 청년의 그 거룩하고도 고독한 뒷모습 위에 세워진 기적이다.
위기가 닥치면 특권 뒤로 숨기 바쁜 비루한 시대에, 진짜 어른이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가 가슴을 서늘하게 짓누른다.
[기록]
"My men are fighting hard. I cannot leave them. I will stay here."
[해석]
내 부하들이 악전고투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떠날 수 없습니다. 저는 이곳에 남겠습니다.
-1950년 12월, 부친상으로 인한 귀국 명령을 거부하며 샘 워커 대위가 맥아더 장군에게 타전한 내용입니다..
◇박주현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