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단종유배길 청령포
일상을 비워 낸 자리에 단종이 들어앉았다(2)
강원도 영월에서의 여정은 차분한 수묵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이었다. 겹겹이 층을 이룬 산세와 그 사이를 유유히 굽어 도는 강물은 순수한 자연으로 존재하고, 켜켜이 쌓인 옛이야기는 지역의 정신적 뿌리이자 정체성으로 자리한다.
웅장한 자연의 전시장 같은 곳 영월, 한반도지형의 신비로운 굴곡과 선돌의 아찔한 절벽에 감탄했고, 밤이면 별마로 천문대에 올라 쏟아지는 별빛을 좇는 영월. 화려한 풍경에 취해 지역의 서사에는 미처 시선이 닿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무심히 흘렀고,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만났다. 스크린 너머로 전해지는 어린 단종의 애달픈 생애는 영월이라는 지명을 새로운 색으로 덧칠해 줬다. 단지 옥빛 강물과 기암괴석이 아름다운 곳을 넘어, 영월이 묵묵히 품어 온 진짜 이야기와 단종의 짧은 삶이 몹시도 궁금해진 것이다. 비로소 영월의 진짜 얼굴을 들여다볼 준비가 됐다.
영월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순간은 무엇보다도 1457년 어린 단종의 유배로 기억된다.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으로 강등된 단종은 험준한 지형과 강물로 고립된 청령포에 유배됐고, 끝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다. 시신마저 버려질 위기에 처했을 때, 영월의 호장 엄흥도가 목숨을 걸고 시신을 거두어 암장했으며, 이는 훗날 왕릉인 장릉으로 승격됐다.
이러한 배경을 되새기며 단종의 애달픈 숨결이 밴 청령포로 향했다. 강이 삼면을 에워싸고 험준한 암벽이 퇴로를 막아선 천연의 유배지. 같은 해 홍수가 염려돼 어소를 영월 객사인 관풍헌으로 옮기기 전까지, 단종은 이곳에서 2개월간 고립된 생활을 했다. 덜컹거리는 배를 타고 뭍으로 넘어가면 하늘을 가릴 듯 빽빽한 소나무 숲이 여행자를 맞이한다. 이토록 수려한 풍광 속에서 어린 임금은 어떤 마음으로 홀로 밤을 지새웠을까. 불행한 역사와 상반되게 청령포는 그저 아름다운 색감을 지녔고, 여행자의 마음을 달래 주는 안식처로 다가왔다.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단종의 비통함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수령 600년의 관음송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절벽 위 노산대에서는 어린 왕의 고독이 먹먹하게 전해져 왔다. 정순왕후를 그리워하며 흩어진 돌을 주워 쌓아 올린 망향탑 앞에서는 애잔함이 더 짙어졌다. 그래서 그럴까. 다른 여행자들처럼 청령포 초입에 작은 돌탑 하나를 보태었다. 아득한 시간이 흘렀건만, 청령포를 맴도는 바람결에는 그날의 애달픈 탄식이 머물러 있는 듯했다. 풍경 속에서 오래도록 서성이며 단종의 멈춰진 시간을 되짚어봤다.
영월의 수묵화 같은 풍경 속에는 지워지지 않는 슬픔이 있다. 청령포에서 시작된 어린 왕의 비극은 장릉에서 끝을 맺는다.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향하는 발걸음은 작은 숲이 내어주는 짙은 녹음 덕분인지, 아니면 역사적 무게 때문인지 몹시도 차분해진다. 솔향기를 맡으며 조금만 걸어가면 왕릉의 영역이 펼쳐진다. 장릉은 처음부터 왕릉으로 터를 잡은 곳이 아니기에 여느 조선의 왕릉과는 그 결이 사뭇 다르다. 능침 또한 소박하기 그지없다. 시신이 묻힌 지 오랜 시간이 지난 1516년(중종 11년) 겨우 암장지를 찾아 봉분을 갖췄고, 선조 13년(1580)에 상석과 망주석 등을 세워 비로소 능역의 형태를 띠게 됐다.
봉분 주변에는 왕릉을 호위하는 화려한 병풍석이나 난간석이 없고, 무인의 호위를 상징하는 무석인도 생략된 채 문관 모양의 문석인 두 기와 석마 한 쌍만이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심지어 단종이라는 묘호와 장릉이라는 능호를 1698년(숙종 24년)에 이르러서야 얻었다. 이 단출한 공간이 그 어떤 왕릉보다도 여행자의 마음을 묵직하게 두드리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길도 독특한 지점이다. 신령이 걷는 향로와 임금이 걷는 어로가 합쳐진 향어로는 보통 일자형으로 곧게 뻗어 있지만 장릉은 지형에 맞게 기역자로 꺾여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단종의 무덤은 슬프고 차갑기만 한 곳이 아니다. 목숨을 건 충절들이 곁을 지키고, 사람들의 따뜻한 발길이 끊이지 않기 때문이다. 먼저 참혹했던 권력의 폭력 앞에서도 꺾이지 않았던 고귀한 인간의 도리와 마주한다. 단종이 세상을 떠난 후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시신을 거두지 못할 때, 시신을 수습해 암장한 엄흥도의 숭고한 충절을 기리는 공간이 있다. 1726년(영조 2년)에 세워진 엄흥도 정려각 앞에 서면 시린 역사 속에서도 온기를 잃지 않았던 의리에 숙연해진다. 정려각과 멀지 않은 곳에는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268인의 위패를 모신 장판옥도 있다. 1791년(정조 15년)에 세워진 장판옥은 마지막까지 외로웠을 소년 왕의 곁을 끝내 비워 두지 않겠다는 뜻처럼 읽힌다.
오늘날의 장릉은 깊은 잠에 든 소년을 위로하듯, 여행자에게도 색다른 볼거리를 건넨다. 단종을 지켰다는 지역 도깨비 설화를 흥미롭게 엮어 낸 창작 뮤지컬 '1457, 잠든 소년-장릉 낮도깨비(가을까지, 매주 토~일요일)'를 통해 잔혹한 역사의 현장을 생명력 있는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아이들에게는 춤과 노래가 어우러진 즐거운 역사를, 어른들에게는 잔잔한 감동을 선물한 셈이다.
◈청령포
영화가 대흥행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주목 받는곳이 있다. 바로 강원도 영월, 단종과 엄흥도의 이야기를 다룬 이작품은 단순한 사극이 아니라 기억과 충절 그리고 시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중심에 있는 도시가 바로 단종의 유배지, 영월이다. 어린 왕의 한 많고 애달픈 이야기는 영월 곳곳에 남아있다. 영월은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유배지로, 영월의 역사적 정체성을 보여 주는 공간이다. 동, 남, 북 삼면이 맑은 강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은 험준한 암벽이 우뚝 솟아 있다. 배를 타야만 닿을 수 있어 마치 고립된 섬과도 같은 곳이라 어린 임금의 적막했던 유배 생활을 상상하게 된다. 울적한 생각이 들면서도 600년 수령의 관음송을 비롯한 소나무 숲의 수려함에 빠져들게 된다. 잘 닦인 길을 따라 단종이 머물렀던 본채, 궁녀와 관노들이 지내던 행랑채를 둘러본다. 이 밖에도 단종이 한양을 바라보며 시름에 잠겼다고 알려진 노산대, 망향탑 돌무더기, 금표비 등이 남아 있다.
-세상과 완벽히 격리된 곳" 단종의 눈물이 고인 영월 청령포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끝내 유배길에 올랐던 곳, 강원도 영월의 청령포는 그 자체로 거대한 창살 없는 감옥이었다. 청령포는 왕에서 노산군으로, 비극의 시작이였다.
단종은 1456년 성삼문 등 사육신의 복위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봉되는 수모를 겪었다. 이후 첨지중추원사 어득해가 이끄는 군졸 50명의 삼엄한 호위 속에 원주와 주천을 거쳐 머나먼 영월 땅으로 압송되었다. 청령포는 지리적으로 매우 독특한 구조를 띠고 있다. 동쪽과 남쪽, 북쪽이 모두 남한강 물길에 막혀 있으며, 유일하게 지면과 연결된 서쪽조차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 있다.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외부와의 접촉이 사실상 불가능한 '육지 속의 섬'이었다.
이처럼 고립된 지형적 특성 때문에 단종은 외부와 철저히 두절된 채 적막한 유배 생활을 이어가야만 했다. 당시 청령포 내부에는 단종이 거처할 수 있는 집이 마련되어 있었다. 철저한 감시 속에서도 충심을 잃지 않았던 호장 엄흥도는 밤이면 남몰래 이곳을 찾아 단종에게 문안을 드렸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철저한 감시와 고립 속에서도 왕을 향한 충정은 물길을 건너 이어졌다.
현재 청령포는 영월군 문화관광 자원으로 관리되며 당시 단종이 머물던 거처의 흔적을 보존하고 있다. 수려한 자연경관 덕분에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왕권을 둘러싼 조선 초기의 잔혹한 정치사가 깊게 투영되어 있다. 청령포는 단순한 관광지를 넘어 권력의 허망함과 충절의 가치를 동시에 보여주는 역사적 상징물이다. 단종의 눈물과 영월의 수려한 산세가 어우러진 이곳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묵직한 울림을 전달한다.
배경음악 :Glee Cas - How Deep Is Your Love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Yj Park 작성시간 26.06.05 트레킹 하시는 내내 영화가 새록새록 떠오르셨나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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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산마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05 "왕과사는 남자" 를 다시한번
극장에서 관람하고 싶은 마음~ -
작성자보슬비 작성시간 26.06.05 영화<왕과 사는 남자> 로 하여
급 부상된 영월. 찾아드는 인파의
증거로 알수 있듯 국가나 개인의
역사가 저마다 다르며 존재의
가치까지 달라 관심의 대상은
있기 마련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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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산마루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05 그전에도 많이 알려져 지명도가
높았던 영월 관광지중 한곳이였지만
"왕과사는남자" 가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그날도 보니 학생들이 현장학습을
온 학교가 많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