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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웅열 신부님

왜 어부를 부르셨을까?

작성자John|작성시간26.06.23|조회수1 목록 댓글 0

왜 어부를 부르셨을까?

 

▪마태오 4,12-23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오늘 미사는 인천 방 카페 식구들이 와서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 재외 교포 또 한국에 있는 신자나 환자분들도 TV 앞에 많이 계시겠죠.
모두 이 미사 중에 주님의 축복받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미사 전 잠시 말했지만, 이 집은 은퇴 사제가 사는 전원주택 개념으로 지은 집이 아니죠.
성인 유해를 모시고 있어서 거기에 합당한 모습으로 집이 지어졌습니다.
제가 모시고 다니고 있는 성모님 상이 두 분이에요.
한 분은 파티마 성모님 또 한 분은 매괴 칠고 성모님.

매괴 칠고 성모님은 사제관 안쪽에 계시고, 이 파티마 성모님도 내 침실 옆에 계셨는데 이번에 색을 다시 칠해드리고 집도 새로 만들어 드렸어요.
저 파티마 성모님은 햇수로 따져보니까 41년째 나랑 같이 계시는 분이에요.
군종 신부 들어갈 때 로마에서 파티마 성모님을 받았죠.

그때는 네모난 집이었어요.

이분을 모시도 GOP에 다녔죠.

그곳의 아이들은 엄마가 늘 그립죠.
아이들에게 성모님 상본 한 장 주고 성모님에게 한번 안아보라고 하면서 ‘네 새엄마다.’ 정말 저 성모님은 최전방 안 가본 데 없이 가본 성모님 세요.

제대 후 본당에 있을 때는 사제관에는 별로 없으셨어요.

본당 부임하면 항상 한 집에서 3일씩 내가 떠날 때까지, 계속 순회하시는 거예요.
계속 돌면서 많은 치유도 일어났지요.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 성모님 얼굴 색깔도 좀 창백해지고.
그래서 작가한테 옷을 좀 새로 하고 화장을 좀 새로 해드려야 되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하는 김에 성모님 집 없이 산 지도 오래니 집도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저 집 디자인은 내가 한 겁니다.
그리고 감곡 가서는 몸에 7개의 총알구멍이 있는 매괴 칠고 성모님을 집에 모실 수 있게 만들어 정말 많이 보급했죠.

5년 동안에 수만 개가 나갔어요.

그중 하나가 제가 모시고 다니고 있는 성모상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도 매괴 성모님 모시고 있는 집 있죠?
사람들이 성모님 모시고 간 다음에 혹시 여기에 구멍에 뭘 집어넣냐고 자꾸 물어요.
왜 그러냐고 하니, 거기서 향기가 자꾸 나온다는 거예요.

지금도 그 총알 자국 구멍에 코를 대면 아주 짙은 장미 향기가 계속 나와요,
제작가에게도 물었는데 아무것도 넣지 않았대요.

그것은 지금도 신비예요.
일단 매괴 성모님 자체가 총알을 맞고 안 부서진 것도 신비하지만, 총알은 어떻게 보면 죽음을 의미하잖아요.
그런데 그 구멍에서 장미 향기가 풍겨 나와.

지금도 가끔 지나다니다가 맡아보면 아직도 나네.
어쨌든 두 분의 성모님 잘 모시고 있고, 우리 정원에는 누가 모셔져 있죠?
지금 매괴 성모님이 숄을 걸치고 계시죠. 장갑도 끼고.

예수님도 목도리도 하고 털신도 신으셨지요.
어떻게 신겨드렸을지 잘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아마 전 세계에서 양산을 쓰고 계신 성모님은 여기밖에 없을 거야.
처음에 이 집 짓고 그다음에 정원 꾸미면서 성모님이랑 예수님이 자리를 잡으셨는데 유리창 밖으로 땡볕에 계신 성모님을 보니까 내가 에어컨을 못 틀겠어.
천막을 치려니 너무 번거롭고, 생각하다가 올리브 이파리 모양으로 뒤에서 쓰여 드렸죠.

그래도 이 가슴 위로는 비도 안 맞고 해도 안 들어요.
그런 다음 난 에어컨을 틀 수 있었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평소에도 옷을 입지 않고 계시는데 겨울은 얼마나 추워.
그런데도 또 웃고 계셔.
그러니까 내가 더 미안해.

원래 그전에, 감곡에 있을 때도 저는 밖에 모셔놓은 예수님께 항상 옷을 입혀 드렸어요.
여기도 작년에는 보라색 옷이었고 올해는 황금색 옷을 해드렸죠.
그래서 여기는 성인 유해만 계신 것이 아녜요.

사진은 다 찍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래서 어찌 보면 나는 저분들 돌보는 청지기 비슷한 집사 위치로 살아가고 있죠.
어떻게든지 제가 잘 지켜드리다가 어느 교구나 수도원에서 잘 모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천년만년 살 것도 아니고 개인 신자에게 나누어 줄 수도 없죠.


자, 오늘 복음 뭔 얘기 중간 밑에서부터 어떤 얘기가 나왔어요?
그래요, 4명의 제자를 선택하셨죠.
그런데 그 4명의 직업이 뭐예요? 어부예요,
그리고 둘 둘이 형제죠.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
‘나를 따라오너라’ 했을 때 그 두 형제가 포기한 내용이 달라요.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냥 낡은 그물을 버리고 몸뚱어리만 쫓아간 거예요.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한테 물으니까, 뭐라고 나와요?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나옵니다.

우리들이 부르심을 받을 때도 부르심을 받고 쫓아갈 때도 포기하는 게 사람마다 다 달라요.

그것이 부르심의 첫 번째 단추예요.
내가 늘 얘기하죠.

오늘 여기 온 것은 겉으로 보면 인간들이 만든 일처럼 보이지만, 아니라는 거 내가 강조하죠?
거룩한 땅은 하느님이 불러내지 않으면 절대 못 와요.
그래서 어젯밤까지는 온다고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 못 오는 사람들도 많아.

또 안 간다고 버티다가 끌려오는 사람도 있어요.
어떤 사람은 차 운전 때문에 억지로 끌려와 우거지상을 하고 앉아 있죠.
하지만 나중에 돌아갈 때 보면은 얼굴이 예뻐져서 가요.

우리가 사람 불러놓고 아무 얘기도 안 하면 이상한 사람 되는 거죠.
하느님이 오늘, 이 추운 날 우리 불렀잖아요?
그리고 하느님이 우리를 부를 때 그 부르심에 응할 때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것이 있는데, 포기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 다르다는 거예요.

신학생 때부터 저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 바보 아닌가 생각했어요.
대개 제자를 선택하면 똘똘한 놈 선택해요, 멍청한 놈을 선택해요?
스승의 이름을 빛내줄 똘똘하고 지혜로운 제자를 찾는 것이 기본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열두 제자 보면 하나같이 다 이상한 사람들이야.
우선 마태오는 세리였잖아요, 매국노요
유대인들한테 세금 뜯어서 로마 사람들한테 바치고 커미션 받는 인간들이야.
그리고 그런 매국노를 죽이러 돌아다녔던 게 열혈당원 유다스야.
이 12명을 자세히 보면 그냥 두면 죽이러 쫓아가는 물과 기름 같은 인간들이었죠.
그리고 아는 것도 없어.

제일 유식한 게 그래도 세리이니 마태오인데, 다른 어부들이 초등학교는 나왔겠어요?
아니면 꾸르실료를 갔다 왔겠어요?
그리고 그래도 어려울 때 경제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집안 자식도 아냐.

그 당시 똑똑한 사람 많았죠. 율법 학자 바리새인.
그런데 열두 사도에는 한 명도 없어요.
그 당시 하층 계급인 매일 바다에 나가 생선 잡아 온몸에 비린내 나는 어부를 부르고

길거리 나가면 돌 맞고 매국노 소리 듣는 마태오를 부르시죠.

그런데 이 이상한 12명의 구성원이 깨지지 않았던 제일 큰 이유는 뭡니까?
그 중심에 누가 계셨어요? 그렇죠, 예수님.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예수님이 안 계신 교회에는 파만 수백 개예요.

성당 100억짜리를 지어놓으면 뭐 해요, 예수님이 안 계시면,
신부는 신부대로 신자 신자대로 그냥 패거리 생기고.

오늘 제2독서에도 나오잖아요. 베드로파 바오로파 어쩌고저쩌고.

그때도 패거리가 많은 거야.
예수님 중심으로 사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사제는 최선을 다해서 사목해야죠.
사제 자기가 예수님 행세하려고 하면 안 되잖아요.
그건 우상 숭배하는 거예요.

세례자 요한이 왜 위대합니까?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이 나타났을 때 당시 사람들이 메시아로 알고 있었어요.

그야말로 깡그리 무시해 버릴 수 있는 위치였죠.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혈육으로는 동생이고 영적으로는 구세주가 나타나니까

‘나는 이분의 신발 끈을 풀을 자격도 없다.’ 합니다.
제자들 보러 ‘하느님이 어린 양이 저기 가신다.’ 하셨죠.

지난주 복음이잖아요.
그래서 제자들이 갔잖아요.

최상의 자리에서 밑의 자리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내려가는 건 결코 쉬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사목자들은 하느님한테 받은 카리스마를 보고 신자들은 찾아오면 비켜서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 본인이 딱 가로막고 선다면, 교주죠.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전부 다 우상 덩어리에요.
그러니 여러분들 본당 신부님한테 상처받았다고 냉담하고, 그렇게 유치하게 살지 마세요.
왜? 성당 신부님 보러 가요? 예수님 보러 가야지요.
삼위일체 하느님 때문에 가는 거지.

신부님만 가슴에 담고 살면 죽을 때까지 수십 번 냉담해요.
어떻게 내 입맛에 맞는 신부만 찾아다녀요.

개신교 신자들은 맘에 드는 목사가 떠나도 찾아가죠.
하지만 천주교는 그게 아니잖아요.
예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

너무나 다른 성향의 열두 제자였지만 깨지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 때문에 분열이 안 일어난 거예요.
아파트 문에 천주교 교우 문패 붙어 있으면 뭐 해요?

거실이고 방마다 이탈리아제 십자가가 걸려 있으면 뭐 해요?

몇 안 되는 네 식구들이 같이 모여 기도한 적도 없고 맨날 서로 싸우는데.

모태 신앙으로 태어났어도 아버지 돌아가시자 재산 때문에 싸우고 난리고 법정 가는데요.

프랑스제 십자가가 걸려 있다고 그 집이 성가정이냐, 아니죠.


똑같은 어부 형제 두 쌍이지만 두 쌍이 포기하는 내용이 달랐다는 거죠.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냥 낡아 빠진 배와 낡은 그물만 버리고 쫓아갔어요.
그런데 야고보와 요한은 아버지 제베대오와 삯꾼을 버리고 떠나갔다.

두 형제의 내용이 달라요.
사실 사도 토마스도 전직은 어부이니, 사도 중 어부 비율이 굉장히 높아요.
예수님이 왜 좋은 직업도 많이 있는데 하필이면 밑바닥 생활하는 어부들을 많이 선택했을까?

그러니까 아까 ‘바보 아니야.’ 그랬잖아요.

그래서 오늘 ‘왜 예수님이 어부를 불렀을까’를 이해하면 주님이 왜 나를 천주교 신자로 만들어서 이렇게 살아가게 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거예요.

사실은 어부를 부른 것에 관한 이야기는 40년 넘게 피정하면서 가만히 헤아려 보니까 2648번을 했어.
그만큼 내가 강조를 많이 했다는 거예요.
정말 내가 많이 했던 것 가운데 하나가 또 뭐죠?

나무 판에 입구에 써놨죠.
‘혼란스러울 때는 전통으로 돌아가라.’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 환난의 시대에 어느 집이든 교회든 어느 공동체든 혼란스러울 때는

내 영혼이 혼란스러울 때도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은 교회도 세상과 열려 있어야 한다는 핑계로 교회 안에도 얼마나 실용주의가 들어오고 편리 주의가 들어오고 계산 주의가 들어오는지, 신앙은 계산하는 것이 아니죠.

신앙 자체로 불편해야지 맞는 신앙이에요.
신앙이 편하다면 그것은 취미생활이에요.

장궤 불편하다고 장궤틀 다 없앴잖아요.

전 세계 장궤틀 떼어낸 천주교는 대한민국밖에 없어.
후까시 주저앉는다고 미사포 안 쓰고 다니잖아요.
더 기가 막히는 건 어느 젊은 신부는 미사 수건 왜 쓰냐, 쓰지 말라 했대요.
그것은 아니죠.

나는 교우들한테 그전부터 강조했잖아.
사제가 제의를 입는 마음으로 자매님들은 머리에 성령의 너울을 얹어야 한다.
미사 수건 쓸 때 성령이 내 머리에 앉는 거예요.

사제도 제의를 입을 때 그런 마음으로 입어요.
성령이 이 제의와 함께 미사에 같이 할 거라는 믿음으로, 늘 내 생애 마지막 미사를 하듯이.

그리고 미사 수건을 일 년에 한 번은 빨아 쓰세요.
우리 세례받을 때 대모님이 뒤에서 미사포 씌어주죠.

그리고 사제가 안수해 주고.

그것이 초심입니다.

그것을 왜 잃어버려요.
그런데 왜 머리를 가리는 거예요?

바오로 사도가 자매들은 머리를 가리라고 했는데, 여자를 깔봐서가 아니에요.

왜냐? 이유는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나를 위해서, 두 번째는 남을 위해서.

뒤에 있는 사람은 싫어도 앞의 자매 머리가 보여요.

‘어휴, 새치가 저렇게 많은데 염색 좀 하고 다니지, 머리 언제 감은 거야? 떡 졌네.’

앞의 자매 머리 때문에 분심이 들어 신부님 강론은 안 들어와요.
네 머리로 다른 사람 분심 들게 하지 말라는 것이 이웃에 대한 애덕이요.

그리고 본인은 미사포를 쓰면 옆이 안 보이죠. 앞만 보게 되지요.
미사포를 쓰는 이유는 이런 이유예요.

공의회 이전에는 수녀님 머리카락도 안 보였죠.

그런데 공의회 이후 모든 것이 편리해지니, 수녀님들 머리카락이 휘날리고, 사복 수도회까지 생겨서 머리카락도 날리고 귀걸이하고 루즈도 발라요.

그런 수도원은 다 망했어요.

결국 지금도 한 사람 죽어 나와야 한 사람 들어가는 수도원은 봉쇄 수도원이에요.

혼란스러울 때 우리가 전통을 찾지 않으면 망가져요.
그래서 신부님들 가운데도 나를 존경하고 따르는 신부도 있는가 하면, 안티인 분도 있어요.

왜? 자기가 와서 장궤틀 다 떼어냈거든.

그런데 세례자 요한이 칼이 무서워서 그 광야에서 그렇게 외쳤겠습니까?

당시 왕한테 어떻게 네 동생의 여자를 취할 수 있냐고 그랬죠. 그렇게 목 잘려 죽었죠.
사제들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신자들을 절벽이 아닌 초지로 이끌어야 하죠.

그러기 위해서는 사제가 정신이 살아있어야 해.
사제직을 직업으로 알면 바뀌어요. 사제는 직업이 아니죠.
이게 직업이라면 난 절대 이 직업 안 했어요.
많은 교우가 착각해요. ‘신부님 다시 태어나셔도 사제 되시겠죠?’

미쳤어요? 이렇게 한 번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뭘 또 두 번을.

만일 다시 태어나면 글쎄 결혼하겠죠.

난 한 평생 가정이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그 지식으로 살아봐야죠.

 

자 이제 오늘 핵심 얘기 드릴게요.

왜 어부들을 선택했을까 왜 어부들을 불렀을까?

당시에 안다는 사람 똑똑하다는 사람 권력자들도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제자 써달라고 줄을 서 있는데도 불구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비린내 풍겨가면서 고기 손질하고 있는 어부들을 이렇게 많이 불렀을까?

혹시 기억나시는 분 있어요?
(대답) 무소유성, 공동체성, 종말론성
이걸 내가 풀이를 해 드릴게요.


첫 번째 무소유성.

어부들한테 자기 것인 것이 있을까요?
갈릴래아 호수가 자기 거예요? 내 것이 아니에요.
유일한 재산은 낡은 배와 찢어진 그물, 그리고 건강한 몸뚱아리, 그게 전 재산이었어요.
다시 말하면 많이 갖고 있는 사람일수록 포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려요.
농부들한테 나를 따라오라고 하면 ‘불러주시니 영광입니다.

그런데 주님, 휴대폰 번호만 알려주세요. 제가 좀 정리할 게 있거든요.

논도 팔아야 하고, 이것저것 정리하고 두 달 후면 쫓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많이 가질수록 포기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핑계를 많이 대요.
하지만 어부는 그냥 훌훌 몸에 묻은 물만 털고 따라나서면 되는 거예요.
농부를 불렀다면 율법 학자를 불렀다면 당시에 똑똑한 사람 불렀다면

이런 핑계 저런 핑계 대며 머뭇거렸을 겁니다.

여러분들 어려운 내가 질문을 하나 할게요.

한 사람 하루하루 자고 일어날 때마다 살 날이 많아집니까, 죽을 날이 가까워집니까?
(대답) 죽을 날이오.

세상에! 그 어려운 걸 어떻게 아셔?
그런데 여러분들 평소에 의식하고 사세요? 의식 잘 안 돼요.
사실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죠.
엄마 뱃속에 잉태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유한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거예요.
그런데 그날 그 시간이 언제인지 모르죠.

나이를 먹고 점점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자꾸 뭔가를 비우고 살아야 해요.
나를 지배하고 있던 세상 것들이 줄어들수록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커지신다는 얘기죠.

어차피 이 세상 사는 목적은 행복입니다.
맞죠? 사제도 행복해야 해요.

모든 사람은 행복하게 살아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어요.
그런데 교우들 얼굴을 보고 대화하다 보면 얼굴이 어두워 그리고 행복하질 않아.
행복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뭐냐?

현재 내가 애착하고 있는 것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포기를 못 했기 때문에 그래요.
기적은 언제 일어나느냐?

내가 애착하는 것에 마지막 한 조각까지 떨어뜨려야 해요.
기쁨의 기적을 원하십니까?

그러면 욕심의 마지막 한 조각까지 포기해야 해요.
병이 낫는 치유의 기적을 원하십니까?

그러면은 그 병도 내 몸의 일부라고 하느님께 감사해야 해요.
마치 깊은 어둠의 끝에 끝자락에 빛이 나오듯, 기적은 항상 포기할 때 일어나요.
그동안 내 안에서 나를 재배하고 나를 노예처럼 했던 수많은 것들이 있지 않습니까?
돈일 수 있고 미움일 수 있고 상처일 수 있고 복잡한 인간관계.

아무튼 나를 행복하게 하지 못하고 나를 늘 불편하게 하고

성당에 가 앉아 있어도 마음은 항상 편치 않았던 바로 그런 것들이 죽을수록

내 안에 예수님은 분명히 커지시는 거죠.
그래서 신앙은 한마디로 비우는 작업입니다. 비우는 작업.

사실 무소유라고 하는 이 단어는 우리 가톨릭 용어는 아니에요.
불교 쪽에서 무소유라고 하는 단어를 쓰죠.

우리 가톨릭 영성 신학에서는 무소유라는 말 대신에 ‘텅 빈 충만’이라고 씁니다.
비어 있지만 꽉 차 있는 거야. 이것이 전통 영성 신학의 용어예요.
엄밀히 따지면 텅 빈 충만의 개념과 무소유의 개념은 좀 달라요.
마치 ‘영겁’이라고 하는 단어와 ‘영원’이라고 하는 단어가 의미가 전혀 다르듯이요.

하여튼 ‘텅 빈 충만’은 말 자체가 좀 어렵기에 그냥 무소유라고 설명합니다.

내가 이 얘기할 때 법정 스님 얘기를 가끔 해요.
한국 사람들에게 너무나 좋은 영향을 주고 가셨죠?
또 아름다운 책들을 많이 썼던 법정 스님은 참 열려 있는 분이었어요.
나는 개인적으로도 친분이 좀 있었어요.

그분은 서울에 올라오면 명동성당에서 성체조배를 몇 시간씩하고 가셨죠.
그리고 길상사라고, 성북동에 요정을 어느 분이 기증했는데 절로 만들었죠.
당신이 갖지 않고 재단으로 만들고 본인은 양구 산속에 조그만 암자 하나 짓고 사셨어요.

거기서 도를 닦고 한 달에 한 번씩만 그 길상사 가서 법회를 주관했죠.
그런데 어느 날 법회 끝나고, 아주 부잣집 할머니가 기사에게 뭘 빨리 가져오라고 하더래요.

스님 가시기 전에 드려야 한다고.

기사가 뭔가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오는데 ‘난’이더래요.

그 할머니가 그 난을 법정 스님 가슴에 탁 안겨드리면서, 스님 계신 곳에 봉헌하는데, 이 난이 중국에서 온 것이고 500만 원짜리라고 하면서 가버렸대요.
그래서 스님은 그 난을 버스를 타고 양구까지 가서 산을 오르며 고민했대요.

이 비싼 난을 어디에 둘까?

제일 좋은 곳이 대웅전 부처님상 옆인 것 같아 거기에 두었대요.

그런데 아침에 목탁을 두드려도 석가모니는 안 보이고 그 옆의 난만 보이고, 절을 하더라고 꼭 ‘난’에게 절하는 게 되고, 또 누가 훔쳐 갈까 어디를 못 나가겠더래.
한 달 동안 자기는 지옥에서 살았대.
그래서 다음 달 법회 때 들고 가서 그 할머니가 오셨길래 가져가시라며 그랬대요.
‘내가 저놈을 갖는 게 아니라 저놈이 나를 갖고 있구나.’

아까와 똑같은 얘기예요.

나를 지배하고 있던 세상 것들이 내 안에서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내 안에서 예수님은 커지신다는 거죠.
‘텅 빈 충만’이 된다는 거죠. 불교 용어로는 ‘무소유’

제가 가끔 그런 얘기를 합니다.

이 김 신부는 소망이 있다.

언제가 내가 죽으면 신자들도 장례 미사에 올 텐데, 돌아가면서 이런 말을 하길 소망한다.
‘글쎄 말이야. 신부님 돌아가신 다음에 보니깐 가지신 거라고는 아무것도 없대.
한평생 입었던 수단 한 벌, 운동화 한 켤레, 갖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대.’
그런데 불가능할 것 같아요?
어떤 자매가 아주 비웃듯이 웃으시는데, 그렇게 할 거예요.
정말 사실은 나는 이제껏 살면서 하여튼 하다못해 이 오디오만 하더라도 그래요.

전 중학교 때부터 혼자 오디오 연구해서 이 시스템을 만드는 데 60년 걸렸어요.

그리고 은퇴 전에 생각한 것이 좋은 음악을 혼자 듣는 것이 굉장히 미안했죠.
그래서 은퇴하면 신자들을 불러 음악 피정을 하고 음악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게 도와주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나 세상 떠나기 전에 사실 이미 갈 곳도 다 정해져 있어.
난 옷 같은 것은 한 3년에 한 번씩 바자를 해 전부 다 줘요.
코로나 때문에 지금 바자를 못 했잖아요.
올해는 10월에 바자 할 때 오면 아마 내 물건들 많이 가져가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아무튼 열심히 기를 쓰고 내 나름대로 포기하고 비우려고 하는데, 그래도 보면 작년보다 젓가락이 하나 늘어도 더 늘더라. 이거예요.
주머니 없는 수의를 입고 빈 몸으로 갔다가 빈 몸으로 가는 게 진리인데도 불구하고, 왜 해가 갈수록 점점 이 짐이 더 늘어날까?

그래서 ‘짐을 비우는 작업’, 우리에게 정말 매일 묵상해야 할 주제예요.
낮이 길어지면 밤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면 낮이 짧아져요.
내가 하느님 쪽으로 오래 서 있으면 분명히 내가 어둠 때문에 고통은 덜 당했을 것이죠.

그런데 어둠이 길어지면 내가 예수님을 본 기억이 거의 없을 거란 말이에요.
여러분들도 저처럼 그런 소망을 한번 가져보세요.
세상 떠날 때 ‘그 자매님 다 내놓고 그야말로 홀가분하게 좋은 일 많이 하고 떠났대.’
그게 바로 우리 신앙인의 삶 아닌가!

 

‘텅 빈 충만의 삶’ 때문에. 많이 가질수록 포기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 당시에 많이 가진 사람이 있었잖아요. 부자도 많았어요.

경제적으로 지원해 줄 사람, 후원해 줄 사람, 그리고 능력 있는 공무원 역할 하는 사람.

그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려고 줄 서 있었거든.

그렇지만 아는 척도 안 하고 엉뚱한 사람 12명을 불러 교회라는 것을 만들었단 말이죠.
그 첫 번째 이유가 가진 게 별로 없는 인간들이기 때문에, 따라오라 하면은 핑계 안 대고 따라올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아멘

아무튼 나를 정말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믿고 소유했던 것들에게 내가 지배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 살면서 느낄 때가 많이 있어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죠.

행복은 자유로울 때 오는 겁니다.
무엇인가에 속박되어 있을 때 행복은 절대 안 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이 여부를 부른 이유는 ‘공동체성’이라고 그랬어.
지금은 물론 어부들이 기계로 자동으로 그물도 끌어 올리고 풀고 하지만, 옛날에는 철저하게 공동 작업이었죠.
배 두 척이 그물을 다 풀어요.

시간이 지나고 난 다음에 손짓을 보면서 영차 리듬에 맞춰서 같이 끌어올려.

힘세다고 자기 혼자 막 그물을 끌어 올리면 그물이 뒤집어져요. 안 돼.
힘이 센 사람은 힘을 낮출 줄 알았고 힘이 약한 사람은 평균치까지 올리려고 애를 썼었어요.
비록 그들은 겉으로는 비린내 나고 거칠어 보이는 직업이었지만, 이 공동체 안에서 내가 함부로 하면 이 공동체가 망한다는 것, 고기 못 잡는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본능으로 직업상으로 한마음을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것이 어부들이에요.
지금도 원양 어선도 보면 자기 할 일들이 다 있잖아요.
선장 할 일 다르고, 기관사 다르고, 고기를 끌어 올리는 거 다르고,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나를 죽이고 공동체를 살려야만, 내가 주님 안에 진정한 자식이 된다고 하는 것으로 알 수가 있는 거죠.
사람의 능력이 다 다릅니다.

교회 안에도 보면 부유한 자 있고 없는 자도 있어요.
잘난 사람이 있고 못난 사람이 있고, 재주가 많은 사람도 있고 재주가 없는 사람이 있고 다양하지만, 남에 대한 배려와 겸손이 없다면 교회에서마저도 가진 자, 잘난 자, 힘 있는 자, 똑똑한 자 그런 자들이 교회를 좌지우지하는 세상과 다를 것이 없는 세속적인 교회로 타락하고 만다는 얘기겠죠.


한평생을 혼자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많은 경우가 에고이스트가 많대요.
혼자 조몰락조몰락, 충분히 혼자 할 수 있는 직업들이 있잖아요.
그런 직업일수록 남과 공동체 생활하는 데 되게 힘들어한 해요.
남에 대한 배려 같은 게 필요 없거든, 내 직업은 나 혼자만 열심히 하면 돼.
그런데 같이 움직여야만 뭔가 결과물이 만들어지는 사람들 속에 하나가 나라면, 기분이 나빠도 참을 줄 아는 인내심이 생기고 속이 뒤틀려도 참아내요.
그리고 나 때문에 이 작업이 망가지지 않게 하려고 기를 쓰고 열심히 일을 해요.
여러분들이 명심하셔야 할 것은 우리 그리스도교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된 교회가 아니라 공동체로부터 출발했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스갯소리 있지 않습니까?

베드로 사도가 천당 문을 지키고 있는데 그 위에 현수막이 걸려 있대요.
뭐라고 거기에 쓰여 있느냐?

‘단체 환영 개인 사절’

다시 말해 하느님은 전체가 다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어느 특출한 한두 사람 구원이 아니라, 그 본당 전체가, 우리 가족 전체가.

어느 집에서 열심히 한 그 사람만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냉담 중인 모든 내 식구들이 같이 천국 문 들어가길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교회 액션 단체 안에서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것이 공동체지만, 그 중심에 아까 얘기한 대로 그리스도가 계시면 절대로, 어떤 유혹이 오고 어떤 어둠이 오고 어떤 고통이 오더라도, 그 공동체는 깨지질 않아요.
그래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절대로 잘난 척하면 안 돼요.
교만하게 살면 안 돼요.

우리 예수님이 큰 바보이셨듯이 우리는 바보처럼 살아야 하죠.
여러분, 물에 무엇인가 들어가면 그 물은 두 가지에 전혀 반대된 힘을 작용해요.
하나는 물건을 뜨게 하는 부력, 그리고 잡아 끌어내리는 침력.
물은 그런 전혀 반대의 힘이 있어요.
여러분들은 본당에서 다른 사람을 들어 올려주는 부력의 역할을 하고 사시는 분들인가요,

아니면 나보다 잘난 척하는 놈만 나타나면 물귀신처럼 잡아끌어서 익사시켜야만 속이 시원한 그런 사람으로 살고 있는가?

늘 우리들은 각자가 반성해야 합니다.
내가 신자들 이렇게 보면, 본인은 의식을 못 하는 것 같은데, 어떤 신자 입에서는 남 칭찬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는 때도 있어요.

늘 누군가를 비판해요.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익사시키는 사람들이야.
그런데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내가 봐도 공공의 적인데, 그 사람의 장점을 말해요.
남을 칭찬하면 본인이 올라갈까요, 안 올라갈까요?
당연히 올라가죠.

남을 무시하면 본인 자신도 무시당하는 거예요.

그런데 어부들은 직업 자체는 거친 직업이었지만, 이 작업할 때 내가 함부로 하면 안 되고 옆에 있는 사람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하고, 나도 하나의 나사이기 때문에 내가 풀리면 다 무너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공동체성에 아주 적합한 직업이었다는 거죠.


이제 누구 뒷담화 치려고 할 때 제가 월정리에서 부력과 침력 얘기한 거 기억하세요.
꼴도 보기 싫은 사람이 나타났어, 확 익사시키고 싶어.

그럴 때마다 다른 사람은 가까이하지 않아도 나는 가까이 가서 인사도 건네세요.

그러다 보면 그 사람이 바뀌어요.
오죽하면 칭찬을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항상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일주일을, 한 달을, 1년을 마무리하는 시점에 우리들이 성찰해야 할 것 중의 하나가 ‘내가 다른 사람을 얼마나 칭찬하고 살았는가, 좋은 소리 해 주고 살았는가?’입니다.

그런데 뒤 돌아보니 남 칭찬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어.
심지어 내 가족, 내 자식, 내 남편한테도 한 적이 없어.

‘여보 당신 정말 멋있는 거 알아?’

이 말 한마디에 남자는 그냥 뿅 가는 겨~ 없던 능력도 나와요.


이제 어부를 부른 세 번째, 마지막 이유가 뭐라고 그랬어요?
종말론성

‘종말론적 삶’이라는 게 무슨 말이에요?

군더더기 다 빼면 ‘오늘을 마지막으로 알고 사는 게’ 종말론적인 삶이라는 의미예요.
‘오늘을 마지막으로’ 어려운 말 같지만 죽음을 늘 가까이하는 직업이 사실은 어부였죠.
지금도 대서양 태평양에서 수십만 톤짜리 배가 태풍에 그냥 반 조각이 나서 죽어요.
옛날에는 바닷가에 과부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몰라요.
갈릴리 호수는 바다같이 큰 곳이에요.

그러고 태풍이 불 때 고기 잡으러 나가는 어리석은 인간은 없을 겁니다.

그때는 기상캐스터가 날씨를 알려주던 시대가 아니었죠.
파도가 잔잔해서 갈릴리 호수에 가서 그물질하는데, 이게 갑자기 난리 치는 거예요.
왼쪽에 계곡이 있는데 그쪽이 서쪽이야.

그 계곡을 따라 서풍이 불기 시작하면 한순간에 갈리리 호수를 뒤집어 놓아요.
성경에도 예수님 배에서 주무실 때 제자들이 살려달라고 그러잖아요.
더군다나 배가 뭐 큰 배입니까?
저 멀리 육지는 보이는데,

‘하느님 이 두 다리로 저 땅만 좀 밟게 해 주세요. 우리 새끼 얼굴 보게 해 주세요.’
이렇게 죽음을 가까이하는 직업일수록 저절로 하느님을 찾게 돼 있어요.
여러분도 이제껏 사시면서 죽음의 고비를 넘긴 적 있겠죠.
그런데 그 죽음의 밑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하느님 찾잖아요.
죽음의 밑바닥에 내려가 본 사람을 하느님을 체험해요.
차 사고가 났는데 차가 다 찌그러졌어.

소방관들이 보고 ‘아 다 죽었겠다.’ 그랬는데 세상에!

그 찌그러진 틈으로 누가 상처 하나 없이 있어.
문짝을 뜯어냈더니 누구냐? 20년 냉담하던 천주교 신자.
그러면 어디부터 가겠어요?

퇴원하고 난 다음에 고백 성사부터 보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주님 잘못했습니다. 살려주셨으니 이제 몇 배로 열심히 살겠습니다.’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은 하느님을 찾아요.

그래서 예수님이 어부를 부른 세 번째 이유는, 이 인간들은 한마디 하면 세 마디를 알아들어.

영원한 세상 얘기해도 알아들을 인간이야.
왜? 늘 생과 사를 넘나들었기 때문에.

옛날에 군종 신부 시절에 여러 부대를 다녔어요.
육군 군종 신부지만은 공군이나 특전사 공수부대에 가서 미사 드릴 때도 있는데 제일 열심히 한 군인들은 누구냐?
특전사 애들이에요.
낙하산으로 떨어지기 전에 그 비행기 밑에서 미사를 드려요.
그러면 신자든 아니든 다 손을 모아요.

왜냐하면 확률적으로 2만 개가 떨어지면 한 개가 안 펴져.

혹시 내가 그 이만 개 중 하나가 될까, 하는 그 죽음에 대한 공포.
물론 저도 낙하산 메고 같이 비행기 타죠.

빨간 불이 딱 들어오면 떨어지기 1분 전이죠.

그러면 내가 메가폰을 들고 비행기 안에서 기도해 줘야 해요.
주님, 낙하산을 천사의 날개로 만들어 주셔서 이러쿵저러쿵.

처음 타는 아이들은 자기도 모르게 오줌을 싸요.

그래서 내가 ‘첫 번째로 뛰어내릴게, 따라 뛰어내려.’ 합니다.

먼저 뛰어내리고 땅에 닿으면 또 다음 비행기로 가서 해 주고.

그러다 보니까 제대 후 무릎이 결딴나서 크게 수술했죠.

지금도 피정할 때 서서 못하는 이유가 오래 서 있지를 못해요.

사람이 뛰어내리면 낙하산이 펴지데 돼 있는데, 이게 안 펴지는 경우가 있어요.

그것을 대비해서 앞에 보조 낙하산이 있어서 그것을 당기기만 하면 돼.

그런데 그것이 안 펴졌어요.

다른 애들은 둥실둥실 내려오는데 자기만 휙 떨어져~ 그때 기절해 버리는 거죠.
그렇게 논두렁에 처박혀서 가보면 뼈는 하나도 없어요.

그렇게 위험한 거예요.

그리고 아무리 조종을 잘해도 동그란 파라슈트는 바람 불면 나뭇잎처럼 이리저리 밀려요.
그러다 산에 있는 절벽에다 패대기쳐지면 창자 다 터져 죽는 거예요.

논에 떨어져야 하는데 지붕 위에 떨어지면 허리 다치고.

특전사 중에는 병신이 많아요.

마산교구에 배기현 주교님이 공수부대 출신이야.

그분도 허리 수술을 많이 받으셨죠.
이렇게 그런 위험을 가까이 느끼기 때문에 하느님을 찾게 되는 거예요.
죽음을 가까이 느끼는 위치에 있을 때는 하느님께 다가설 수 있는 거죠.

내가 늘 교우들한테 그런 얘기를 하죠.
아침 기도는 출근하느라고 바빠서 제대로 못 하더라도 저녁 기도는 제대로 해야 한다.
그리고 저녁 기도할 때 ‘오늘 내가 말과 행동으로 또 생각으로 지은 죄가 뭐가 있는가, 오늘 내가 우상숭배하고 살았던 게 뭐가 있는가?’를 묵상하라.
우상숭배의 개념은 뭡니까?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있는 건 다 우상이에요.
그게 자식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아픈 내 몸덩이일 수도 있겠죠.
그리고 아침에 눈 떠서 잡소리와 자의식이 나를 지배하기 전에 제일 먼저 어떡하라고요?
내 몸에 성호를 그으며 나오는 첫 번째 기도가 ‘주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또 바로 나오는 이 기도가 ‘주님 오늘 하루 내 생애 마지막처럼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루밖에 안 남았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산다면 누구 험담할 시간 없죠?
정말 1분 1초가 아까울 거예요.

그리고 ‘오늘 내가 굴리는 이 묵주가 내 생애의 마지막 묵주 기도’라는 마음으로 한다면 어디 묵주 기도하면서 분심 잡념이 듭니까?
평일 미사 가서 성체 영할 때마다 ‘이 성체가 내 생의 마지막 성체가 될 수도 있다’라는 마음을 갖고 종말론적인 마음을 가지고 성체를 영한다면 성체 영할 때마다 눈물이 앞을 가릴 거예요.
성경을 읽을 때마다 ‘내가 내 눈으로 보는 이 성경이 내 생애 마지막이다.’라는 마음.


저는 이제껏 사제 생활하면서 정말 감사했던 게 뭐냐면은요.
이 종말론적인 삶 때문에 내가 한눈을 안 판 거예요.
미사 드리러 제의실에 들어가 성호를 그으면서 ‘주님, 오늘 이 미사가 내 생애 마지막 미사를 봉헌하는 마음으로 거룩하게 드리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오늘 이 사제의 입을 성령께서 가지시어 이 사제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치유되고 어둠이 있는 사람한테 구마가 일어나고 담대한 믿음이 자라나게 해 주는 미사가 되길 청합니다.’

정말 마지막 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드리게 되길 청합니다.

나는 미사 때 분심 잡념이 든 적이 없어요.
그런데 다른 신부님들은 이 말을 잘 안 믿어요.
어떤 신부님도 얘기 들어보면 마귀가 제대 위까지도 와서 공격해요.
어떤 신부님들은 성체 들어 올릴 때 눈을 꽉 감는데요.

왜? 갑자기 신자들이 홀라당 벗은 모습으로 보이는 거야.

정신 안 차리면 마귀가 그만큼 장난해요.
그래서 나는 그런 신부님들한테 말해요.

‘신부님 내가 방법을 하나 알려줄게요. 제의 입으면서 저처럼 기도하세요,’

‘내 생애 마지막 미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나는 제단에 올라갈 것이다.’
그리고 내 생애 마지막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만든다는 마음으로 하면 분심 안 들겁니다.

마귀가 장난 안 할 것이다.

마찬가지 여러분들도 묵주 기도할 때도 내 생애 마지막 묵주 기도, 성체를 영할 때도 이것이 마지막 영성체다.
이게 바로 종말론적인 삶이에요.

이 세 가지 이유가 우리가 숨을 거둘 때까지 늘 기억하고 묵상해야 하는 영적 테마죠.
이 세 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빠지면 찌그러진 삼각형이 돼 버려요.
정삼각형이 아니라 영적 균형이 안 맞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늘 묵상해야 해요.

첫 번째 내가 정말로 무소유의 삶을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가?

두 번째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을 올려주는 봉사의 위치에 있는가, 아니면 늘 봉사만 받으려 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을 흠집 내며 살아가지는 않았는가?
예수님이 큰 바보였듯이 잘난 척하지 않고 작은 바보처럼 살려고 애를 쓰고 있는가?

세 번째는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주님 오늘 하루를 내 생애 마지막으로 알고 살게 해 주십시오’라는 기도, 종말론적이 삶을 살겠다는 기도로 아침 시작을 해야 한다.

무소유의 삶, 공동체의 삶, 종말론적인 삶을 기억합시다.

 

♣2026년 연중 제3주일 (1/25)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출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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