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24년 4월 14일 부활 제3주일

작성자John|작성시간24.04.14|조회수33 목록 댓글 0

제1독서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3-15.17-19
그 무렵 베드로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17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 요한 1서의 말씀입니다. 2,1-5ㄱ
1 나의 자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이 글을 쓰는 까닭은
여러분이 죄를 짓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2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3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4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5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백성에게,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이라며,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한다(제1독서).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시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평화를 비시자 그들은 유령인 줄 알고 두려워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신다(복음).

☆☆☆☆☆☆☆☆☆☆☆☆☆☆☆☆☆☆☆☆☆☆☆☆☆☆☆☆☆☆☆☆☆☆☆☆

베드로 사도는 유다 백성에게, 그들이 무지한 탓으로 거룩하고 의로우신 예수님을 배척하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여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하느님께서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으니, 이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권고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바쳐지셨기 때문에, 의로우신 그분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신다(제2독서). 복음도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말씀에 따라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으니 이제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선포되어야 한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서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부분으로서, 승천 이야기 바로 앞에 등장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과 제1독서의 본문은 이미 부활 팔일 축제 기간에 읽었는데, 오늘 다시 읽는 이유는 승천을 준비하며 강조되는 내용, 곧 ‘증언’이 이야기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신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자신의 책 1부에 해당하는 복음서를 ‘증인이 될 것’에 대한 촉구로 마무리하고(48절), 2부인 사도행전은 그 증인들의 ‘증언’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사도행전의 첫 기적 이야기로서, 베드로가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3,2)을 고쳐 준 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라고 선언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수난을 겪으시고 돌아가셨으며 부활하신(케리그마) 예수님을 선포하고 이를 증언하는 것이 사도들의 임무임을 공적으로 선언하는 것입니다. 
제2독서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앎’이 세 번 되풀이되는데, 이러한 앎이야말로 그분을 ‘우리 죄를 변호하여 주시는 분’, ‘속죄 제물이 되신 분’으로 증언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증인이 되어 주기를 당부하십니다. 그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 함께 나누었던 빛나는 기억을 전하는 것, 수난과 죽음마저 받아들이신 사랑을 증언하는 것, 사도들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촉구하시는 일입니다.(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

신학교에 입학한 지 5년이 지난 어느 날 제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앞으로 4년 뒤면 신부가 될 터인데, 지금처럼 살아도 될까? 아직 아무런 하느님 체험도 없고, 하느님도 알지 못하는데 하느님을 전할 수 있을까?’ 이런 큰 고민에 빠져 있을 때 마음을 두드리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당시 신학교 학장 신부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영성 생활은 영적 독서(Lectio Divina)와 함께 시작되고, 영적 독서를 끝내는 순간 끝난다. 먼저 성경을 읽어라. 읽으면서 마음에 와닿는 구절을 찾아라. 그 찾은 말씀을 되새겨라. 그리고 그 말씀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그 말씀대로 살아라.” 그래서 다음 날부터 신약 성경을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읽다가 마음에 와닿는 말씀이 있으면 밑줄을 긋고 종이에 써서 그 말씀을 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세수를 하고, 옷을 입고, 성당으로 가는 시간뿐 아니라, 수업을 듣기 전에 노트에 그 말씀을 가장 먼저 썼습니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되뇌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되새기며 살다 보면 그 말씀과 꼭 맞아떨어지는 일이 생기는데, 그럴 때면 그 말씀대로 살아 보고자 더욱 노력하였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읽고 외우며 그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한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마음속 깊은 곳에서 깨달음이 올라왔습니다. ‘참으로 하느님께서 계시는구나! 그냥 저 멀리 계시는 하느님이 아니시라 바로 곁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시구나! 그 살아 계신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으려면 우리도 노력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내 말 안에 머무르면”을 『공동 번역 성서』에서는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읽고 새김’으로써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됩니다.
(서철 바오로 신부)

☆☆☆☆☆☆☆☆☆☆☆☆☆☆☆☆☆☆☆☆☆☆☆☆☆☆☆☆☆☆☆☆☆☆☆☆

성경에서 죄는 윤리적인 잘못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죄는 하느님과의 관계의 단절입니다. 성경은 한결같이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느님 안에 살게 되고,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느님과 단절된 채 탐욕의 자아 안에 머물 때 죄에 빠지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이르는 모든 일이 예언자의 입을 통해 전해진 하느님의 섭리임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고 선포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나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불안에 떨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 중에 하신 수난 예고와 부활이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놀라운 사건임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참된 회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세상의 악에 대한 승리가 선포되고, 죄의 용서가 선포되었음을 믿는 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제자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시기까지 하는 행동은, 예수님의 부활이 현실임을 일깨워 주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예수님의 이 파스카 신비의 증인들로 파견되었습니다. 구원은 생각이나 상상만이 아니라, 현실로 드러나는 회심의 체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진정 죽음으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며, 어떤 죄도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음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하느님 없이 사는 우리 삶을 하느님께 되돌리는 회심임을 잊지 맙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회개, 화해, 속죄’는 주로 사순 시기에 어울리는 듯한 단어이지만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모두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성자의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본기도의 내용에서 부활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의 죄와 이 세상의 악에 대한 어두운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시는 동안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의 예언자들과 의인들, 그리고 고통 받는 ‘주님의 종’의 모습 안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은 결코 뜻밖의 일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그 고난을 포기하시거나 거부하셨더라면 그것이 오히려 인간의 죄악에 대한 패배였을 것입니다. 

고난의 잔을 끝까지 받아들이신 그분의 죽음은 영광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온갖 조롱과 박해를 묵묵히 받아들이신 그분은 참임금이셨고, 승리자셨고, 메시아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사도 3,18).

영광스럽게 돌아가신 그분 덕분에 이제는 ‘그분의 이름으로’ 회개와 용서가 선포됩니다. 우리가 부활의 기쁨과 평화와 생명에 참여하려면 먼저 회개하여 그분의 용서를 받고 동시에 우리에게 잘못한 형제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이렇게 용서와 화해를 통하여 부활의 기쁨과 평화를 전하는 부활의 증인이 되어 그분 생명에 참여하면 좋겠습니다.

☆☆☆☆☆☆☆☆☆☆☆☆☆☆☆☆☆☆☆☆☆☆☆☆☆☆☆☆☆☆☆☆☆☆☆☆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지만 유령을 보고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답답해진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보는 앞에서 음식을 잡수시며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오랫동안 같이 있었고 수차례 부활의 말씀을 들었지만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는지요?

너무 엄청난 사건이기에 그랬을 것입니다. 말이 그렇지, 돌아가셨다고 확신했던 분이 말씀을 걸어왔으니 놀람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먼저 다가가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경 말씀을 깨닫도록 하신 것입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긴가민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꾸짖으시기는커녕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오히려 당신 상처를 보여 주시며 음식까지 드시는 애정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모습은 어떤 설명보다 더욱 힘 있게 제자들을 설득하였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을 믿는 행위입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스승님에게서 이 사랑을 먼저 느꼈습니다. 그러기에 애정을 확인받자 곧바로 용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머리보다 ‘마음을 먼저’ 열어 주신 셈입니다. 

깨달음에는 애정이 언제나 이론보다 앞섭니다. 그러므로 ‘사랑 없는 이론’은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위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부활을 ‘마음으로 승복’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

오늘 복음에 나오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드러내지 않고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입니다. 스승의 죽음은 그들에게 크나큰 충격이었습니다. 마음을 달래려 그들은 시골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승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전혀 모릅니다. 왜 몰라보았을까요?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이 점을 묵상하는 데 있습니다. 그들의 선입관 때문입니다. 스승은 이미 죽었다는 선입관입니다. 그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곁에 오셨지만 알아차리지 못한 겁니다. 그만큼 선입관은 무섭습니다. ‘스승은 돌아가셨다.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그들은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들의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해 오고 있지만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이 그저 덤덤하게 느껴진다면 그들과 무엇이 다를는지요? 부활의 기쁨을 위해서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선입관이 빠져나가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라고 부활 시기가 있는 것이지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말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그들은 뜨거움을 체험하였습니다. 기쁨이라는 뜨거움입니다. 그러므로 기쁨은 은총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부활 시기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미국의 범죄학자 조지 켈링과 정치학자 제임스 윌슨이 명명한 ‘깨진 유리창 이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유리창이 깨진 차를 방치하면 이곳의 법과 질서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메시지로 읽혀서 강력범죄로 확산될 수 있다는 이론입니다.

 

이 이론을 사회학적으로만 볼 수 있지만, 어쩌면 우리 각자의 마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마음이 깨진 유리창처럼 형편없어지면 어떨까요? 점점 더 자기 마음의 상태가 무너지고 맙니다. 자기 비하가 계속 심해지면서 자존감 하락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됩니다. 따라서 마음의 수리는 얼른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또한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흔들리지 않는 의연함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만큼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배가 갑작스럽게 아프면 어머니께서 “엄마 손은 약손”이라면서 배를 문질러 주셨습니다. 배를 쓰담는 그 손이 제 배의 아픔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이렇게 나의 아픔을 쓰다듬어 줄 수 있는 손이 필요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께서 우리의 아픔을 쓰다듬어 주십니다. 그래서 주님을 나의 ‘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의 사랑을 보면서 그분 안에 머물러야 했습니다. 깨진 마음이 아닌 아주 건강한 마음이 되어 이 세상에 힘차게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은 다락방에 문을 걷어 닫고 숨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들립니다. 여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알리고, 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기뻐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사람들의 시선이 무서워서 숨어 있는 자기들 모습이 떳떳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불안한 마음, 완전히 깨어진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기 위해 나타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첫 마디도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놀람에 자기의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까지 보여주시면서 유령이 아닌 육체의 부활임을 드러내신 것이지요.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먹을 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십니다. 살아있는 인간으로서의 부활임을 그들 앞에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아픔을, 또 깨진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떠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 힘만으로는 아프고 깨진 마음을 고치기 힘들지만, 전지전능하시고 사랑 가득하신 주님께서는 충분히 정상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분이기에 우리는 주님 말씀처럼 세상에 기쁜 소식을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남의 생활과 비교하지 말고 너 자신의 생활을 즐겨라(콩도르세).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문사에 있을 때입니다. 2024년 4월 2일에 ‘산티아고 꼼뽀스텔라’로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습니다. 신문에 성지순례 안내 광고를 냈습니다. 40여명의 순례자가 신청했습니다. 성지순례를 많이 다녔지만 ‘산티아고’는 갈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도 산티아고 순례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다른 순례와는 달리 산티아고는 보는 순례가 아니라 걷는 순례입니다. 매일 3시간 이상을 걷기에 큰 어려움 없이 순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번에도 제게 산티아고 순례는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2월 13일에 인사이동이 있었고, 저는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의 소임을 마치고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으로 새로운 소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저는 새로운 임지로 떠났습니다. 그동안 준비하였던 산티아고 순례는 후임 신부님이 가기로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의 아쉬움을 아셨는지 새로운 방법으로 산티아고에 갈 기회를 주셨습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에서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는데, 전임 신부님이 인사이동으로 한국으로 갔습니다. 자연스럽게 제게 성지순례를 갈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새로운 본당으로 온지 몇 달 되지 않았기에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님이 다녀와도 된다고 하였고, 전임 신부님이 같이 가기로 했었기에 저도 성지순례를 가기로 했습니다. 주로 성모님 성지를 다녀오는 것인데, 그 길에 ‘산티아고’ 순례도 있었습니다. 온전히 산티아고 순례만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방식으로 제게 산티아고 순례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시간은 ‘직선’으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흘러간 물로는 방아를 돌릴 수 없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굴 수 없다.’ 이는 시간은 흘러가는 것임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변화’를 경험합니다. 아이는 소년이 되고, 소년은 청년이 되고, 청년은 장년이 되고, 장년은 노년이 됩니다. 저는 이제 장년에서 노년으로 넘어가는 시간을 살고 있습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 우리는 기쁨과 분노 그리고 슬픔과 행복을 만나게 됩니다. 죽음이라는 친구를 만나 기억과 추억의 한 점이 됩니다. 이것이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머무는 우리의 삶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간은 ‘순환’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태양은 어김없이 떠오릅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계절’은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이 순환하는 시간 속에 ‘축제’는 어김없이 찾아옵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흘러간 물로 다시 방아를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같은 강물에 두 번 몸을 담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순환하는 시간에서 ‘희망’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 순환하는 시간에서 ‘다시 한 번’이라는 기회를 만나게 됩니다. 회개와 희망이 만나면 ‘기회’는 현실이 됩니다. 교회의 전례는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순환하는 시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계절이 매년 돌아오듯이 성탄과 부활은 매년 돌아옵니다. 성탄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대림시기’를 지냅니다. 부활을 맞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냅니다. 저는 2024년 ‘부활’을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서 맞이했습니다.

신앙인들은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인들은 순환하는 시간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그러니 회개하고 기쁜소식을 믿어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셨습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과 표징 그리고 십자가와 부활로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서 보여주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렇습니다. 부활은 이 세상과의 단절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음의 강을 건너서 있는 먼 미래가 아닙니다. 부활은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것을 알고 실천한다면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2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고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증인의 바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앞선
당신 계시어


여기
나 있듯이


뒤선
나 있으니


여기
당신 계시소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셨고,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하고 물으셨고, 제자들이 건넨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사실 제자들의 경우 주님의 부활을 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의혹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고, 또한 성령을 전해 주셨고, 또한 식사도 하면서도 함께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모든 일의 증인, 곧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의혹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또한 다시 고기잡이를 나갔던 제자들처럼 인간적인 일상의 바쁨 속에서 자신의 사도로서의 사명마저도 잊어버리고 살아가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진정 그분의 제자요 사도라면 오늘 복음의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처럼 부활을 살아가는 삶, 곧 이 모든 일의 증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증인의 삶을 이루어 갈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역시 세상 속에서 온갖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평화를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평화는 단순히 무사안일의 평화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함께하며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음을 보여주시고 만져 볼 수 있게 하시고 함께 음식을 나누셨던 것처럼 생각과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진실한 행동으로서 실질적인 사랑을 실천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전해 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만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시길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성령의 전이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살아있는 기운 곧 생기를 전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욕심 속에서 죽음의 기운이 만연한 우리의 주변에 하느님 안의 참된 생명의 기운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평화를 전하고, 사랑을 나누고, 생명의 기운을 전하는 삶이 바로 주님의 사도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증명하는 참된 증인의 삶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는 모든 일의 증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는 부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보고 두려움에 유령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왜 두려움에 떨었을까요. 사실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든 이유는 예수님이 잡혔을 때 지키지 못했고 심지어 도망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심지어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말했으니, 예수님을 본 제자들의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지키지 못했던 제자들 앞에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아시고 화를 내기보다는 그들의 두려운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몸을 보이시고 더 나아가서 유령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구운 물고기를 드셨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메시아로서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왜 죽어야 했는지에 대해 성경을 중심으로 알려주십니다. 특히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함을 알려주시면서 자신이 현재 부활한 것임을 제자들에게 알려주신 것이지요. 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고난을 받고 희생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죄를 용서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를 받기 위해 필요한 것이 회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회개하라는 것인데 즉 자신의 부족함과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회개는 죄를 지은 이들이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된 길을 걷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그런데 이 회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회개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권능을 통해서 제자들의 마음을 여시어 말씀을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여시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가 주님의 평화안에 살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죄 있다고 좌절하지 말고 부족한 자신을 예수님께 고백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의 평화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있습니다. 아멘!

 

 

 

복음을 통해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키엣 대주교님

 이탈리아의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성인은 아주 유명한 법률가로 그가 맡은 사건은 언제나 승소했고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작은 사건에 패소한 후 명성과 화려했던 삶이   사라져버리는 깊은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 작은 실패는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절망의 순간 하느님을 떠올리고 주님의 위안으로 마음의 평화를 되찾은 그는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수도자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이분이 바로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 수도원(Congregatio Sanctissimir Redemptoris)”을 설립한 신부님이십니다.

실패는 끝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시련을 통해 깨달음을 주십니다.

시련은 아픔입니다. 그러나 아픔만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면 아픔의 의미가 없습니다. 고통의 의미를 생각하고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겸손함으로 주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세상의 성공과 실패, 하늘나라의 영광이 모두 주님의 손안에 있음을 깊이 깨달아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본 제자들은 두려웠습니다. 스승을 잃은 아픔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자신들 앞에 나타난 그분을 보고도 믿지 못한 그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손과 발의 상처를 보여주시고, 함께 밥을 드시고, 성경 말씀을 들은 후 비로소 그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지 않습니다. 

나의 삶이 힘들 때는 주님을 원망합니다. 경악할 만한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면 더욱 비판적입니다. 그 분께서 일부러 사건을 일으키신 것이 아님을 알지만 혼란 속에 침묵하고 계신 주님을 원망하고 부정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시련의 의미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시련과 기쁨에 담긴 주님의 뜻을 헤아리고 지금 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실패를 통해 나를 깨닫고 주님의 인도로 새로운 영혼, 고귀한 삶으로 가던 길을 재 정비해야 합니다.

실패를 당하면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 순간이 바로 주님께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라는 걸 기억해야 합니다. 실패와 고통 모든 순간에 주님께서 함께하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조차 믿지 못하는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면서도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믿음이 강해지자 부활하신 주님의 실체를 보게 되고 믿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믿음에 대한 확신이 필요할 때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볼 수 없습니다. 제자들의 말을 통해, 복음을 통해 주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미사 중에, 성경 속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기도 속에서 주님을 보십시오. 무엇보다 혼자 하는 기도 속에서 가식을 버리고 나의 모습, 진실된 모습 그대로 주님과 대할 때 주님과의 친밀함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복음을 통해 믿음에 대한 확신을 가지십시오.

매일 독서를 통해 주님을 더욱 깊이 깨달으십시오.

묵상을 통해 주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가장 중요한 것은 생활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속에 주님의 말씀을 깨닫는다면 더 이상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삶의 모든 순간 주님이 함께하심을 느끼고, 주님을 볼 수 있습니다. 기쁨과 평화로 가득한 삶이 될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당신께서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믿고 주님께 모든 것을 위탁할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주십시오. 아멘.

 

함께 묵상해봅시다

1. 하느님께 버림받은 것과 같은 슬픔을 느껴보았습니까?  

2. 고통 끝에 평화를 경험해 보았습니까?

3. 성경은 우리가 주님을 알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을 하며 주님의 뜻을 찾아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삶, 회개의 삶, 증인의 삶-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우리에게 좋은 일을 보여 주리이까?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 밝은 빛을 비추소서.”(시편34,7)

 

2008년도 시작된 왜관수도원 계간지 “향기로운 길, 분도”가 16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니 참 반갑고 고맙습니다. 2012년 봄호 18호에 실린 ‘산중한담(山中閑談)’란 ‘문(門)과 벽(壁)’이란 글이 앞부분을 나눕니다. 벌써 12년전 글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창문 좋은 방이 제일이다. 내 집무실이나 성당 내 자리에 지극히 만족하는 것은 좋은 창문 때문이다. 계절마다 바뀌는 창밖 풍경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그림도 없다. 굳이 그림이나 꽃꽂이가 필요없는 성당이고 집무실이다.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행복감을 느낀다. 창밖의 푸른 하늘을 그대로 하느님 마음 같기도 하고 얼굴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창밖을 보며 써놓은 시도 부지기수다. 예전에 써놓고 흡족해 했던 시가 생각납니다.

 

-방에 있는

 TV,그림,사진...

 대부분 군더더기

 쓸데없는 짐

 

 이 보다 더 좋은

 임 만드신

 창문 밖 하늘 풍경

 살아 있는 그림

 

 늘 봐도 새롭고 좋네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러울 것 없겠네-2005.4

 

좋은 창 지닌 방 하나만 있어도 부자다.”

 

12년전 그대로의 환경에 지금도 여전히 공감하는 내용입니다. ‘문과 벽’이란 위 글은 34년전 1990년 부활 제2주일 강론 제목에서 착안한 글입니다. “벽이 변하여 문으로”라는 강론이었는데 제목의 신선함 때문에 지금도 잊지 못하는 강론이요, 그 이후로도 참 많이 생각했던 주제이고, 오늘 다시 사용하는 강론의 제목입니다. 영적 삶의 여정에 중요한 세요소에 대해 나눕니다. 

 

첫째, 만남의 삶입니다.

만남들로 이뤄진 우리의 삶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한두번의 만남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매순간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니 우리 영적 삶은 말그대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주님 부활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제자들 가운데 나타나신 주님입니다. 지난주는 요한복음이었는데 오늘은 루카복음입니다. 분명 문은 닫혀 벽뿐이 방이었을 텐데 제자들의 공동체에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입니다. 임재(臨在)하니 이 말마디를 너무 좋아하신 지금은 고인이 된 문세화 신부님이 생각납니다. 제가 대구가대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지대한 영향을 주신 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임재와 더불어, 만남과 더불어 벽은 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움의 벽이 평화의 문으로 변하는 순간입니다. 주님의 참 좋은 최고의 선물이 평화입니다. 주님의 만남과 더불어 선사되는 평화와 더불어 제자들의 절망과 슬픔, 두려움에 닫혀 벽같이 되었던 마음도 활짝 열린 문이 되었을 것입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평화와 더불어 기쁨의 선물이요 닫힌 벽같은 마음도 활짝 열린 평화의 문, 기쁨의 문이 됩니다.

 

둘째, 회개의 삶입니다.

만남과 더불어 회개입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부활의 증인이 된 베드로의 열화같은 솔로몬 주랑에서의 설교도 회개를 촉구하는 내용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때 즉각적으로 이뤄지는 회개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이제, 형제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이요, 무지보다 인간에게 큰 걸림돌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의 불행이나 비극은 바로 무지에서 기인합니다. 탐욕, 교만, 질투 모두 무지에서 기인하는 것이며 마음의 눈을 멀게 합니다. 참으로 무지의 인간이라 정의할만 합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계속되는 전쟁 역시 인간 무지를 반영합니다. 

 

무지에 대한 근원적인 대책은 주님과의 만남에 이은 전적인 회개뿐입니다. 참된 회개는 무지에 대한 유일한 답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하느님게 돌아서는 회개요 회개와 더불어 죄는 지워지고 무지에서 점차적인 해방입니다. 그러니 우리 삶의 여정은 회개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무지의 벽은 변하여 지혜의 문이 될 것입니다. 온갖 내적 벽이 변하여 문이 되는 것 역시 회개의 은총입니다. 새삼 회개의 선택, 훈련, 습관을 위해 평생 매일 바치는 영성훈련이 공동체가 바치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성무일도와 미사 공동전례기도임을 깨닫습니다. 

 

셋째, 증인의 삶입니다.

사도들처럼, 성인들처럼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믿음고 사랑과 희망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와 기쁨을 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 우리를 이렇게 살도록 해줍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이자 사도들이 참 좋은 주님의 증인들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당부 말씀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부활의 증인, 회개의 증인, 용서의 증인으로 이웃에 활짝 열린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 베드로의 힘찬 고백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인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살리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얼마나 장쾌한 부활의 증인으로서 감동적 고백인지요!  예전에 주님을 부인하던 그 나약하고 겁많던 베드로가 아닙니다. 

 

샘솟는 용기의 사도,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 베드로입니다. 지난 수요일 일반 알현 때, 교황님의 가르침의 주제도 용기(fortitude)였습니다. 현명(prudence), 인내(patience,) 정의(justive)에 이은 용기(fortitude)란 주제였습니다. 은총으로 유지되는 용기가 날마다 우리를 도우며 해결을 강화하고 장애를 극복함을 강조했으며, ‘용기없는 신자들은 무용한 신자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교황님 역시 부활의 증인이자 용기있는 사도로써 베드로의 진짜 후계자답습니다. 부활의 증인, 요한 사도도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합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제물이십니다...누구든지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에게는 진리가 없고,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으로서 우리가 우선적으로 할 일은 그분을 한결같이 사랑하고 섬기며, 그분의 계명을, 말씀을 지키는 일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삶, 회개의 삶, 증인의 삶에 항구할 때, 말그대로 

 

무지의 벽은 지혜의 문으로, 

두려움의 벽인 평화의 문으로, 

미움의 벽은 사랑의 문으로, 

슬픔의 벽은 기쁨의 문으로, 

절망의 벽은 희망의 문으로, 

불신의 벽은 믿음의 문으로 

 

바뀔 것입니다. 바로 “벽이 변하여 문으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우리의 모든 내외적 벽들이 활짝 열린 하나의 문, 주님의 문으로 바뀔 것입니다. 주님은 벽이 없는 온통 문이신 분입니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요한10,9). 아멘 .

 

 

 

<왜 증인이 되어야 하는가?>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4-48)” 

 

여기서 “......을 해야 한다.” 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과부활은 ‘하느님의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성경에 기록된 대로” 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계획’대로 된 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리 정해져 있었던 어떤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일이라는 뜻은 아니고,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는 뜻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믿고 회개하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다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이 일의 증인이다.”는 “이 일을 증언하여라.”입니다.

신앙인은 메시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증언하는 증인입니다. 그 증언이 곧 복음 선포(‘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라신 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증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가 있는데, 마태오복음에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마태 28,20). 예수님을 ‘증언하는 일’과 예수님에 관해서 ‘가르치는 일’은 사실상 하나의 일입니다.>

 

1) 왜 증언해야 하는가? 

“그냥 조용히 성당에 다니면서, 나 혼자서 신앙생활을 하면 안 되는가?”

안 됩니다. ‘혼자서’가 아니라 ‘함께’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나 하나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벅차고, 나 하나의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힘들다. 다른 사람들의 구원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라고 말하는 이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과 사목자들이 ‘증언해야 한다. 증인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만 하고, ‘증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와 ‘증언을 해야 하는 이유’는 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증언을 해야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지나쳐서 압박과 강요로 보일 때도 있는데, 그것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마태 23,4) 바리사이들 같은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 덕분에 ‘모든 멍에와 짐’에서 해방되는 생활입니다(마태 11,28-30). 예수님 때문에 무거운 멍에에 묶이고 힘든 짐을 지는 생활이 아니라...... 이유도, 목적도 모르면서 증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증언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세상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증인이 되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니까, 내가 받은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함께 나누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눔’은 곧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은 신앙의 핵심이고 본질입니다. 따라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는 일은(선교활동은) 모든 신앙인이 당연히 실행해야 하는 본분입니다.

<사랑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만일에 의무감으로(억지로)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 사랑 없이 하는 것이라면 신앙생활이든 선교활동이든 무엇이든 모든 일이 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자신의 온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그 사랑으로 신앙생활과 선교활동을 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우선 먼저 자기 자신 안에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과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고 있어야 하고, 자기 자신의 부활도 믿고 있어야 합니다. 기가 믿지 않는 것을 증언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다고 생각하는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자신의 믿음을 위해서 인생 전부와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기쁨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합니다. 의무감만으로는 선교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기쁜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그 소식을 전해 줄 수 있습니다. 

<자기는 기뻐하지 않으면서 남에게 기뻐하라고 말하는 것은 ‘빈말’을 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살다 보면 고난과 시련을 겪을 수도 있는데, 그럴 때에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고 믿음과 사랑과 기쁨이 한결같이 유지되는 모습 자체가 ‘신앙의 증언’이 됩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변하고 흔들린다면, 아무것도 증언하지 못합니다. ‘신앙의 증언’은 말로 하기 전에 먼저 ‘삶으로’ 해야 합니다. ‘말’과 ‘삶’이 다르면 거짓 증언이 되어버립니다.

<남에게 신앙을 권고하면서 내 믿음이 더욱 단단해지고,‘신앙의 기쁨’을 나누면서 내 기쁨도 더욱 커지고, 주님의 사랑을 나눌 때 내가 더 큰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선교활동은 남을 위한 일이면서도 사실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고, 자기 자신에게 먼저 공로가 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로 하여금 부활의 신비에 더 깊이 참여하도록 이끌어줍니다.

제1독서에서는 사도 베드로가 성전 문 곁에 있는 앉은뱅이를 치유한 다음, 솔로몬 주랑에서, 예수님의 죽음으로 영광이 드러나셨음을 선포합니다.

곧 앉은뱅이의 치유를 예수님 부활의 징표로 들려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사도 요한이 온 세상의 속죄 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위해 변호해주신 분이심을 선포합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고 살아계시며, 여전히 우리를 위해 함께 하고 계심을 일깨웁니다. 

복음에서는 부활의 의미를 깨우치시고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주간 첫날, 엠마오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루카 24,34)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엠마오로 가다가 되돌아온 두 제자들도 그들이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 서시며 당신의 평화를 주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그러나 제자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습니다.

마치 바다를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서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루카 24,38-39)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증명하시기 위해 손발의 상처를 보여주시며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우리도 제자들처럼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당신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우리는 보고도 믿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치 히브리인들이 모세를 따라 홍해를 건너왔건만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목이 뻣뻣하여 믿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역시 매일의 삶에서 벌어지는 기적들을, 특히 성체를 매일 모시면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단지 보고 만져보라고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를 잡수시면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아계심을 증명해 보여주시기까지 하십니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단지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제자들과 여전히 친교를 이루고 함께 사신다는 사실을 드러내줍니다.

이처럼 보여주고, 만지게 하고, 함께 먹으며 친교를 나누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제자들은 차차 눈이 열려갑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진정 필요한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말씀'이었습니다.

 

믿음은 기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부터 오는 까닭입니다.

마침내 '성경말씀'을 들려주심으로써 제자들의 마음을 활짝 열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마태 24,45)

그렇습니다. 

눈도 귀도 마음을 열어주는 통로입니다. 

그러니 당신 말씀의 영으로 하여 그 통로를 열고 마음을 열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외적인 눈이 열리고, 마음의 눈이 열리고, 영의 눈이 열려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마음을 열지 않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부활의 신비입니다. 

막달레나 마리아도 예수님이 서 계셨지만 그분이 예수님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했고,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함께 걸어가면서도 그분이 예수님이심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부활의 신앙은 ‘믿음의 눈’을 떠야만 다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열리면’ 곧 부활입니다. 

눈이 열리어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부활의 신적 생명을 보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증인이 되는 일입니다. 

 

이는 부활신앙이 기적을 보는 데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말씀'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밝혀줍니다.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믿음으로 여는 열쇠임을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고 부활의 생명을 부어주십니다.

그 지고한 사랑을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소서.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당신 빛으로 말씀을 깨닫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

제 마음을 열어 주소서.

제 뼈에 새겨지고, 제 위장 속에 부어진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말씀으로 제 마른 뼈가 살아나고, 제 마음이 뜨겁게 타오르게 하소서.

당신 무덤의 문을 열 듯, 성소의 장막을 가르듯, 제 마음의 빗장을 벗기고, 저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부수소서.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통계청에서 발표한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이 2014년에 3.3%에서 2016년엔 2.8%, 2023년엔 1.4%였고, 국제통화기금(IMF)에서 잡기로는 2024년 올해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을 2.2%로 전망했었습니다. 2017년 우리나라 전체 실업율이 3.7%, 청년실업율 9.8%에서, 2023년 10월에는 전체 실업율이 2.1%에, 청년실업율 5.1%였습니다.

2023년 65세 이상 고령인구는 우리 나라 인구의 18.4%로 950만명에 육박하여, 2025년 20.6%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2035년엔 30%, 2050년에는 40%를 넘길 전망이라고 합니다. 2022년 65세 이상 노인고용율은 36.2%로 OECD 국가 중, 25.1%인 일본, 19.2%인 스웨덴, 18%인 미국에 비해 높은 편이지만, 노인빈곤율은 2021년 66세 이상 은퇴연령층의 상대적 빈곤율이 39.3%로 OECD 주요 국가에 비해 적게는 2배 많게는 10배 가량의 높은 치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노인 일자리의 질이 낮은 편이라고 평가됩니다.

국민들이 느끼는 상대적 빈곤율이 2016년 17.6%에서, 2022년엔 14.9%로 낮아진 반면, 가구처분가능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은 2016년 162.3%에서, 2022년에는 203.7%로 증가되었습니다. 이 두 가지 통계만 단편적으로 살펴보면, 우리가 빚으로 사는 사회처럼 비춰지기도 합니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발표에 따르자면, 낮은 출산율과 빠른 고령화 진행으로 인한 인구위기가 우려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2016년 6월 23일을 기점으로 인구 5천만이 돌파함으로써, 선진국 중에 7번째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임기 여성의 출산율이 1960년 6.0명 출산에서 1983년 2.06명이었다가, 2001년부터는 1.3명, 2016년 1.17명에서 2022년에는 0.78명으로, 한 여성이 한 명의 아이도 낳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최근 2030세대 청년들의 결혼에 대한 긍정적 태도 역시 남성이 30%, 여성은 25.4%로 감소되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2020년부터는 베이비붐 세대의 고령인구 편입으로 평균 고령화율이 심화되어 사회경제적 위기를 맞고, 2059년에는 생산가능인구 100명당 부양 인구 100명 이상이 되어, 2060년경에는 40.1%의 고령화율로 세계 최대가 될 예정이랍니다. 이와 관련하여 노후소득 감소와 그로 인한 노인빈곤이 노인질병 및 노인자살률을 부추겨 이미 지난 2009년부터는 노인자살률이 낙태율과 함께 OECD 국가 중 1위라고 합니다.

이러한 조사결과와 통계수치를 보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대한 아쉬움은 물론 걱정마저 됩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오늘 부활하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36) 라고 말을 건네십니다.

걱정거리뿐인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평화를 주신다고 하시는가?

어쩌면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과 우리가 처한 이 상황은 우리에게 암울한 감정을 가지게 합니다. 그러나 늙어간다는 것, 노인이 된다는 것이 죄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죽음이 가까워진다고 해서 슬퍼하거나 억울해할 일도 아닙니다. 자연스러운 것이 좋다면, 늙어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니 좋을 수 있습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38절)

언젠가 어느 노인 한 분이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노인이 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부끄러워하고 우울해하기도 하지만, 서쪽 하늘로 태양이 지는 노을을 바라보면 참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감탄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활활 타오르는 태양일 수 없지만, 그 대신 우리의 원숙하고 성스러운 삶으로 주님의 거룩하심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노년의 문제를 이야기하며 위기감을 느끼고 이에 대처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다가오는 위험을 예상하고,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나 노년은 위험을 맞이하는 순간만이 아니라, 우리가 원숙해지고 더욱더 거룩하여질 순간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주님과 맺었던 아름다운 추억들이 마침내 우리의 삶에 각인되는 순간이며,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39절)

그 동안 우리가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하지 못했던 주님의 좋은 말씀들과 믿음 안에서 이루고자 했던 아름다운 꿈들을 이러저러한 제한과 장애 없이 실현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비록 우리의 육신은 점점 약해지고 더 큰 한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우리가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가족과 삶의 여러 가지 의무들을 뒤로한 채, 우리의 영혼은 더욱 더 자유스러워져 우리가 마음속으로만 간직해 오던 아름다운 꿈들을 실현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44절)

이제 진정 거룩해질 수 있는 순간입니다. 이제 경건한 마음으로 주님께만 집중하고, 주님만을 선택하여 믿고 따를 수 있는 순간입니다. 이제 참으로 올곧은 마음으로 주님만을 따를 수 있는 순간입니다. 이것이 노년을 맞는 우리만이 선택하고 걸을 수 있는 특권이며 희망이 될 것입니다.

이제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으면서, 원없이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 육으로 활발하게 뛸 수는 없어도, 정신과 마음과 영으로 화살기도와 전구기도를 통해 형제자매들을 위해 봉사할 수 있습니다.

이제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사람들의 좋은 모습만 바라보고 좋은 모습만 기억해주고, 좋은 말을 해주고 격려해주고 칭찬해주고 믿어주면서 인격적인 덕을 쌓을 수 있습니다.

이제 어려서부터 성인전을 읽으며 꿈꾸어 왔던 그 성인 성녀처럼 우리도 매일 매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말씀 하나하나를 내 허약한 몸뚱어리로 직접 실현해 봅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46절) 내가 깨달은 만큼 실천하고, 내가 실천한 만큼 더욱 더 많이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내 마음과 생각 속에 숙제처럼 담고 있던 아름다운 성덕에의 길을 실제로 기적같이 이루어내기 시작하여, 주 하느님과 나와 형제자매들 사이에 하느님 나라를 만들어내는 거룩한 성인 성녀가 됩시다.

누군가는 말합니다. 나이가 들면 자연스럽게 너그러워진다고! 눈에 잘 보이지 않으니까, 먼지가 있는지 없는지. 청소를 잘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할 수 없으니, 그저 고맙기만 하다고! 젊은 이들을 봐도 잘하고 잘못하기를 따지기 전에, 그저 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예쁘고 반갑기만 하다고! ‘잃는 만큼 얻는다’는 말이 어쩌면 더욱 더 찐하게 다가올 수 있는 순간이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노년은 이념과 주의와 사상만으로 구성된 이론적인 목표가 아니며, 환상적인 꿈이나 허구적인 이미지로는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처절한 현실입니다. 아름답고 곱고 순박한 우리의 거룩한 이상은 하늘에 있지만 우리의 몸은 이 땅을 딛고 있기에, 참으로 우리 인격을 완성할 수 있는 마침내 귀하고 결정적인 기회요, 살아있는 희망이요, 진정한 목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47절)

우리에게는 세상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결정적인 꿈이 있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주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는 이 지상의 삶이 끝난 다음 마침내 주 예수님의 자비로 하늘나라의 아버지 집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요한 14,2-3)

우리가 육신으로는 노쇠의 길을 걷게 되겠지만, 영으로는 주 예수님께서 일러주시고 비춰주시고 펼쳐주신 생명의 말씀의 길로 꿋꿋이 걸어갑시다.

아울러 오늘 우리가 한국천주교 주교회의의 결정에 따라, 보편지향기도에서 바치게 되듯이, 세월호 10주기를 맞이하여, 사고 희생자들이 주님 품 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고, 유가족들이 주님 사랑의 위로를 받으시기를 간구합니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요한 14,4)

 

 

 

고통 속에 진실과 사랑이 들어난다.<루카24/35-48>4/14.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온갖 고통을 당하지 않으면 진실도 사랑도 모르고 지나갑니다. 10끼를 굶어보지 않으면 남의 배 고품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래전 광주신학교에 학장은 학생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한다고 하면 무엇 그가 짖 것 참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는가 하면서 병원이나 외출을 하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하고 고생한 다음부터 아프다고 하는 학생들에게 어서 병원에 가도록 허락해주었다고 합니다.

저기가 고통을 당해 보지 않으면 다른 이의 고통을 진실로 돌보지 못합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 안에 가시관 못밖히고 창으로 찔린 상처을 만저 보고 주님의 고통을 알아보고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의 인지능력은 자신이 당해보거나 당한 사람의 흔적을 보고 얼마나 고통의 현상을 이해하고 인정해 줍니다.

저는 40년동안 본당이나 밖에서 사목하면서 사람 사는 고통을 듣고 보고 체험함으로 상담에 임하여 이해하고 알아듣고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주기도 합니다.

매일 묵상글을 쓸 수 있는 것도 일어난 일이 현실성 과 사실이 떠오르고 약방문은 성서 안에 있어 기억 속에 필요한 내용이 성령의 힘으로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라.” 란 말도 저에게는 일하기전 기도 하라 란 말보다 모든 삶을 하느님과 대화 속에 이루어지도록 살아야 한다, 로 듣고 내가 지금 하는 일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행위인지를 알아보고 행동에 옮깁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나 어렵고 힘이 들어 기도 속에 멀리 해달라고 하시었지만 아버지의 뜻대로 이루어지도록 십자가를 지고 죽음의 길을 가셨습니다. 저는 신학교 7년 동안 배우고 수도자로 70년을 살면서 익히고 실천하는 삶이 믿음을 지혜롭게 하고 높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진실과 사랑의 하느님을 보고 익히고 체험이 주님 뜻 알아보고 따라 살게 하며 다른이도 살게 합니다. 이 나이에 수시로 전화 연락을 받고 상담성사와 글을 쓰는 힘은 제가 아닙니다. 모두가 성령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가금 기도하고 묵상한 내용으로 상담에 임하게 될 때 저는 혼자 놀랍니다. 엣날 예언이 있고 현실이 따라오는 일들을 생각하면서 하느님은 준비 없이 일을 시키지 않으시는 분이구나 생각해 봅니다. 글도 나에게 큰 힘이 되면서 다른 이들에게 진실과 사랑이 되도록 바라며 쓰고 굳히고 실천합니다. 그래서 내가 살았던 일과 현실을 연결하여 글을 쓰고 하루 종일 보고 전하고 살아가며 주님과 함께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 없이 부활의 영광이 없듯이 고통은 통해 진실과 사랑을 실천 되도록 기도합니다.

제 방에는 운동기구들이 많습니다. 헬스장 가는 것도 일이라는 생각에 혼자 할 수 있는 바벨이나 덤벨 그리고 그 밖의 운동기구들을 사들이다 보니 꽤 많아졌습니다. 사실 허리 다친 적이 있어서 운동을 평소에 하지 않으면 통증이 옵니다. 그래서 일상생활을 잘하기 위해 억지로라도 운동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새벽에 평소처럼 운동하다가 느낀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한 가지 운동을 하고 잠깐 쉬는 시간이 있습니다. 저의 경우 30~60초 정도 쉽니다. 그런데 힘든 운동을 마치고 하는 이 쉬는 시간은 꿀맛이면서 너무 짧게 느껴지고, 가벼운 운동을 마친 뒤에 하는 쉬는 시간은 오히려 길게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고통과 시련이라는 힘든 시간은 너무 길게만 느껴질 것입니다. 잠시의 즐거운 시간은 짧게 느껴지면서 고통과 시련의 크기가 너무 커 보입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더 활기찬 우리의 삶을 만들게 됩니다.

또 한 가지는 운동을 오랫동안 쉬다가 하면 너무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매일 운동하면 적당히 힘들면서도 몸이 상쾌해집니다. 고통과 시련이 적당한 삶의 무게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서는 안 됩니다. 매일 마주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말씀하시면서 나타나십니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통의 순간 뒤에 제자들은 어둠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이때 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평화였습니다. 고통과 시련에만 머물러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아닌, 평화를 가지고 세상에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 평화를 얻었기에, 제자들이 겪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커다란 은총이 됩니다. 그리고 제자들도 십자가를 짊어지고 기쁘게 주님을 따를 수 있게 됩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사명을 전해주십니다.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주님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하느님만이 아닌, 모든 민족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그리고 모든 민족에 대한 복음 선포입니다.

주님으로부터 받은 이 사명을 언제까지 지키고 따라야 할까요? 우리는 그날과 그때를 알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멈추지 않고 해야 합니다. 고통과 시련이 찾아와도 주님께서 주신 평화를 간직하면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별의 아픔 속에서만 사랑의 깊이를 알게 된다(조지 앨리엇).

 

균형감각 만들기.

저는 침대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말한다면 아주 간단합니다. 침대에서 자주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디 여행을 가서도 침대가 넓지 않으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침대는 이런 이유로 편하지 않은 잠을 자게 합니다.
보통 잠을 잘 때, 50번 이상을 뒤척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보통 일반 어른은 오른쪽과 왼쪽을 번갈아 가며 뒤척이지만, 아이는 한 방향으로 뒤척이기에 침대에서 종종 떨어진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몇 차례 떨어지면 몸이 기억해서 균형감각이 생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저는 왜 그럴까요?
솔직히 몇 차례 떨어지다 보니 특단의 조치를 많이 취했습니다. 이불 양옆을 침대에 묶어서 위로만 이불에 들어갈 수 있게 한 적도 있고, 지금처럼 침대를 치워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균형감각이 생기지 않았나 봅니다. 떨어져야 균형감각이 생긴다고 하는데, 이를 아예 피하려고만 했던 저였던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침대 위로 올라가서 균형감각을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됩니다.

고통과 시련도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삶의 활력소와 함께 자신을 더 성장할 수 있게 해줍니다. 삶의 균형을 맞춰줍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우선 먹고살아야 했으므로, 다시금 전에 종사하던 생업으로 복귀했습니다. 한 바탕 꿈이었나, 생각하며 다시금 갈릴래아 호수에서 그물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다들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토록 강렬했던 예수님과의 만남, 그분과 동고동락했던 공생활 기간을 어찌 잊을 수 있었겠습니까? 작업이 끝나면 제자들은 호숫가에 둘러앉아 생선을 구워먹으며, 스승님에 대한 걱정, 죄책감, 송구함을 주제로 두런두런 대화를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전해집니다. 엠마오 길에서 그분을 만난 두 제자는 신명이 난 나머지, 목소리를 높여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들 엠마오 제자들의 목격담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그 때, 누군가가 슬그머니 제자들 등 뒤에 나타났습니다.

돌아보던 제자들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세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습니다. 온화한 표정의 예수님께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두려워 떠는 제자들을 안심시키시며 더 가까이 다가서십니다. 의혹으로 가득한 제자들과 직접 접촉하십니다.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그래도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청하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제자들이 그분께 큼지막한 생선 소금구이 한 토막을 건네 드리자,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잡수셨습니다.

 

참으로 자상하고 친절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전혀 그럴 필요가 없는 하느님,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실 부활 예수님께서, 한 인간이 건네시는 구운 물고기 한토막을 드셨습니다. 아직도 의심과 불신으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부활의 기쁨과 영광을 전하기 위해, 한 인간과 마주앉아 인간의 음식을 드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겸손이요 크나큰 자기낮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제 부활 이전의 예수님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시고, 육의 세계를 넘어서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직도 갈길이 먼 제자들, 신앙의 깊이가 얕은 제자들을 영적동반하시기 위해 또 다시 자신을 낮추십니다.

인간들 사이로 육화하십니다. 아무 것도 아닌 존재인 인간들과 친히 접촉하시고 소통하십니다. 그들이 건네는 하찮은 물고기 한 토막을 맛있게 받아 드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요 불신자이며, 먼지요 티끌인 우리 인간 존재를 끝까지 존중하십니다. 함부로 대하지 않으시고 지극정성으로 사랑하십니다. 또 다시 우리를 당신 구원 사업의 파트너로 선택하십니다.

그런 그분의 뜨거운 사랑은 불신과 의혹 투성이인 제자들의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들의 나약함을 강건함으로 바꾸십니다. 마침내 그들을 주님 부활의 당당한 증인으로 서게 하십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정으로 만날 때 더 이상 우리 안에 어둠이 머물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낙담하거나 슬퍼하지 않게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활기찬 사랑에 힘입어 담대해지고 당당해집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서지 않고 뜨거운 마음으로 예수님 부활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 모든 변화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에 끼어드실 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 삶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될 때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체벌을 하면 안 되는 이유: 자녀는 어차피 부모를 닮는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부활을 믿게 하십니다. 당신이 영적으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부활하셨음을 믿게 하시기 위해 생선토막을 먹어 보이십니다. 그리고 성경을 설명해주시며 구약의 모든 예언이 당신을 통해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신약에서 완성되는 그리스도의 구원이 구약에 모두 예언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이렇듯 당신의 삶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삶’이었음을 밝히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사셨습니다. 구약의 모든 내용이 다 이것이라 굳이 예를 들 필요는 없겠지만, 아담과 요나의 예언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아담의 옆구리에서 갈비뼈를 빼내어 하와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옆구리에서 물과 피를 원하신다는 것을 아셨기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깨어난 것처럼 당신도 부활하실 것임을 믿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습니다.

요나 예언자가 니네베 사람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머물러야 했듯이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회개시키기 위해 땅속에 그렇게 묻혀계셨어야 했습니다. 결말은 니네베의 회개였습니다. 니네베가 교회라고 본다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회개한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으로 나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결정됩니다.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구약을 성취하기 위해 사셨다면, 우리는 신약을 성취하려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을 향한 아버지의 뜻이었고, 신약은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매를 아끼면 자녀를 망친다는 말이 많은 나라의 속담으로 존재합니다. 하지만 매를 때린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매를 때리지 않으면 부모의 말을 듣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나 매를 때린다는 말은 “넌 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야.”란 말이 들어있고, 그렇게 체벌을 많이 당한 아이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이렇게 자존감이 떨어지는 존재는 스스로 자신의 고귀함을 채우려 하는데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이 자존심은 돈이나 쾌락, 명예로 채워집니다. 

유대인 600만 명,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사상자를 내게 만든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는 어떤 부모에게서 자랐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아버지와 순종적이기만 한 어머니에게서 자랐습니다. 아버지는 사회적인 면에, 어머니는 가정적인 면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니 히틀러는 사회적으로는 폭력적으로, 대내적으로는 순종적으로 사람들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열등감을 극복하려 한 것입니다. 체벌은 절대로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차피 자녀는 부모를 닮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닮으려는 것은 ‘본능’입니다. 생존본능입니다. 만약 전갈이 개구리나 인간을 닮으려 한다면 어떨까요? 어디에서나 소외당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사랑을 받지 못하면 죽고 싶은 마음만 생길 것입니다. 따라서 무리 생활이 필요한 어떤 동물이건 자신의 부모를 찾아서 닮고자 하는 것은 생존본능입니다. 그러니 자녀가 말을 안 들으면 부모 자신이 모범을 보이는지 살펴야지 자녀 탓을 할 것은 아닙니다.

임영웅의 큰아버지는 2020년 3월 12일, 미스터 트롯 결승전에서 임영웅이 어떤 노래를 부를지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1995년 3월 12일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니 아버지의 애창곡인 ‘배신자’를 부를 것을 예상한 것입니다.
그런데 임영웅은 아버지가 5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의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의 애창곡을 부른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아버지가 옳았음을 증명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은 본능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춘기 전까지만 해당합니다. 그 이후에는 자녀들이 더는 부모를 닮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자신들의 참 창조자가 아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때 기필코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게 해야 합니다.

요즘 박수홍 씨 이야기가 뉴스에 많이 올라옵니다. 그는 결혼할 여자를 어머니께 데려갔는데 어머니가 반대를 하여 여자와 헤어졌습니다. 지인들에 의하면 둘이 잘 맞았고 헤어질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아직 육적인 부모에게 독립하지 못한 자녀는 결국 자신에게도 가족에게도 커다란 슬픔을 안겨줄 수밖에 없습니다. 자녀에게 주님이 참 부모임을 믿게 하지 못한다면 부모에게도 결국 손해란 뜻입니다. 

예수님도 ‘구약’, 즉 아버지의 말씀을 성취하며 사셨습니다. 우리가 성취하며 살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삶, 즉 신약입니다. 이 모범을 찾지 못한 사람은 부모 없이 늑대에게 길러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에게 어떤 예언을 주었을까요? 그는 아들 둘에게 사람들을 위해 어떤 좋은 일을 할 수 있을까만 생각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다 잘 될 것이라 믿게 한 것입니다. 희생을 통한 사랑만이 죄를 없앱니다. 큰아들은 학교도 제대로 안 가고 사람들을 도와주었고, 작은아들은 꼴찌 하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렇게 두 아들은 성장하여, 큰아들은 큰 사업가가 되었고 작은아들은 아버지처럼 하버드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자녀는 어쩔 수 없이 부모의 예언이 옳음을 증명하며 살기 때문에 항상 내가 이웃 사랑만이 유일한 진리로 가르치며 살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유다인들은 ‘하느님 중심, 회당 중심, 랍비 중심’으로 삽니다. 자신들은 하느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회당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고 모든 대소사를 랍비와 상의합니다.
우리 부모들도 자녀들을 하느님 예언을 실현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면 하느님을 아버지라 인정하게 하고, 이를 위해 성당 가까운 곳으로 이사하며, 사제들에게 하느님 뜻을 먼저 묻는 신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는 부모를 통해 자연적으로 참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고 분명 십자가를 거치겠지만 부활의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대양 6대륙’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래 전 지구는 하나의 대륙이었다고 합니다. 하나의 대륙은 두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대륙을 떠받치는 맨틀입니다. 맨틀은 하나의 대륙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대륙의 무게가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맨틀은 숨을 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감당할 수 없는 화산이 폭발했습니다. 오랫동안 화산이 폭발하면서 지구는 몸살을 앓았습니다. 지구 생명의 대부분이 멸종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생명 다양성의 문제입니다. 하나의 대륙은 갑작스러운 재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생태계는 사슬처럼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의 대륙에서는 재난이 발생하면 모든 생명체가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화산폭발과 소행성의 충돌 등의 원인으로 지구의 생명은 5번의 멸종을 겪어야 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대륙은 지금의 모습처럼 6대륙이 되었습니다. 6대륙이 되면서 바다의 생명도 풍성해졌습니다. 대륙마다 낮은 바다가 있었고, 낮은 바다는 생명이 살 수 있는 터전이 되었습니다. 지구의 맨틀도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6개의 대륙으로 나뉘어졌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화산이 폭발하지만 하나의 대륙에서처럼 오랜 시간 대규모의 화산폭발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재난과 질병이 발생하여도 6개의 대륙으로 나뉘어져있기 때문에 멸종에 이르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느끼지 못하지만 대륙은 지금도 매년 조금씩 이동한다고 합니다. 지금은 높은 산이지만 예전에는 깊은 바다였던 곳도 있습니다. 사하라의 사막도 예전에는 초원지대였다고 합니다. 고고학과 지리학은 지구의 역사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지구의 미래도 예측하고 있습니다. 하나의 대륙이 6개의 대륙으로 나눠진 것은 분열이 아니라 진화였습니다. 

2000년 전예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보여주셨고, 말씀에는 새로운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빵을 많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로마의 식민 통치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시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부와 권세를 얻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이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묶인 이와 갇힌 이를 풀어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율법과 계명을 따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왼뺨을 때리면 오른 뺨까지 내어주라고 하셨습니다. 누가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까지 주라고 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는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부와 명예 그리고 성공과 권력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기도, 따르기도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유다도 예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잡혀갔고, 제자들은 모두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었고, 모든 것이 허무하게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부터 이상한 소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소문의 시작은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들에게서 나왔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을 찾았으나 예수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천사들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여인들은 이 소식을 두려움에 떨고 있던 제자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빵을 나누었습니다. 제자들은 더 이상 두려움에 떨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를 새롭게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은 하느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서 이미 알려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허망한 죽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수치와 굴욕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는 사건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지만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의 이름은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절망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이 되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증인>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보여주신 대로

보고

본 대로

보여주며

 

들려주신 대로

듣고

들은 대로

들려주며

 

새겨주신 대로

새기고

새긴 대로

새겨주며

 

두려움에

숨지 않고

 

제 욕심에

나대지 않고

 

보여주신 분께서

나를 통해서

보여지시도록

 

들려주신 분께서

나를 통해서

들려지시도록

 

새겨주신 분께서

나를 통해서

새겨지시도록

 

늘 나를 열고

늘 나를 너머

 

온 누리

모든 이에게

 

쉼 없이

주저함 없이

나를 건넨다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복음(루카 24,35-48)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클레오파스와 다른 한 제자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만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그들의 마음이 타올랐다(루카 24,32)고 합니다. 이들은 즉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빵을 떼실 때 그분을 알아보게 된(부활하신 분께서 알려주신) 일을 열한 제자와 동료들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이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또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고”,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일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밝히기 위해 친근하게 인사하시고, 손과 발을 만져보라 하시고, 그들 앞에서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셨고, 성경(율법, 예언서,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면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고, 성령을 보내주실 테니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으라고 하십니다.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신 분”(루카 24,26)께서 불쑥 나타나 평화의 인사를 하신(요한 20,19-20) 것은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시고, 언제 어디든지, 항상 제자들과 함께하시는 분(마태 28,20)이심을 말합니다. 토마스에게 하셨듯이(요한 20,25), 유령이 아니고, 제자들도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주시기 위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육체적이며 감각적으로 당신을 보여주십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셔서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나신(1코린 15,44)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당신의 썩지 않는 강하고 영적인 몸체를 보여주신 것입니다(1코린 15,35-44). 그러나 “하늘에 속한 그분의 모습”(1코린 15,49)을 볼 수 있게 해주실 때에만 인간은 부활하신 분의 “영적인 몸”(1코린 15,44)을 우리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부활의 삶은 신비이기(1코린 15,51) 때문에 부활하신 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우리도 그분 안에 머무른다는 것을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께서 알려주실 때에만 가능합니다(1요한 3,24; 4,13). 이렇게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모든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미리 증인으로 선택하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고, 그들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셨습니다.”(사도 10,41)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굼뜬 제자들에게(루카 24,25.2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하셨던 것(루카 9,22.44; 17,25; 18,31-33)과 당신에 관하여 기록된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 말씀(루카 22,37)을 들어서 가르치십니다. 전파능력이 탁월한 여인들(루카 24,1-12)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루카 24,13-35)을 통해서도 알려주었건만, 의심만 가득했지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아시고 또 나타나셔서 구약성경의 모든 말씀이야말로 모두 당신께 대한 기록임을 강조하십니다. 살아 계실 때 하셨던 것처럼(루카 9,1-6)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대해 가장 완고했던 이들이 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당신께서 걸어오신 길을 가르치어 사람들이 당신의 길을 걷게 하라고(이사 2,1-3) 파견하십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루카 3,3)를 선포하고, “죄를 용서받아 구원됨을 주님의 백성에게 깨우쳐주라는 것입니다.”(루카 1,77)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갖춰야 할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이사 32,15; 루카 1,35; 사도 1,4-5; 2,2-4)으로 무장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머무르면서 오로지 말씀(구약과 예수님의 가르침)에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제1독서(사도 3,13-15.17-19)는 예수님을 죽인 유다인들에게 회개와 돌아섬을 강조합니다.
베드로는 장터(솔로몬 주랑)에서 유다인들을 상대로 그리스도교의 기본이 되는 선언을 증언합니다. 유다인들의 조상들부터 믿어온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인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영광스럽게 하셨고, 베드로의 업적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전 문 곁에 있는 불구자를 하느님께서 치유하셨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만일 유다인들이 구약성경을 잘 이해했더라면 결코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유다인들이 하느님을 믿는 것과 아는 것이 다르고, 율법을 지키는 것과 실제 삶이 다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결국 유다인들이 모세오경과 예언서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느님을 올바로 믿을 수 없었고,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도 없으면서도 율법만 형식적으로 엄격하게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생명의 영도자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표현을 그대로 끌어들이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하느님의 종”,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 “생명의 영도자”, “고난을 겪으시는 메시아”로 부릅니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유다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면, 그리고 하느님께로 돌아서기만 한다면 하느님의 아드님을 죽인 죄를 용서받는다는 핵심적 가르침을 반복합니다.

제2독서(1요한 2,1-5ㄱ)는 말로는 수긍하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신앙생활을 지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빛이시고(1요한 1,5)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내주신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요한 8,12)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느님의 계시로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잘 알기 때문에 빛 속에서 사는 이들과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기 때문에 어둠 속에 사는 이들로 나뉘어져 있다고 합니다. 단순한 흑백논리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구원이 필요함에도 요한의 공동체를 뒤흔드는 사람들은 마치 자기들이 의로운 이들이고, 이미 구원받은 이들처럼 행세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죽음과 우리를 씻어주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를 변호해주시면서 하느님 아버지와 친교를 맺게 해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신데도 그분을 통한 구원을 배척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공동체의 아버지로서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빛이신 하느님께 봉헌되었으므로 빛 속을 걸어가라고 가르칩니다. 자기 죄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쉽게 자주 떠올리게 되는 나쁜 생각들과 행실들을 떨쳐버리려고 애써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친교를 위해 빛 속에 머무르려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잘 알고, 그대로 살려고 애쓰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합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영과 육을 분리시키려는 당시의 그리스 사상에 맞서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성을 강조하면서 부활이 실제로 있었던 사건임을 매우 실질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뵈었다는 것은 그분께서 당신을 스스로 드러내실 때에만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뵈려면 먼저, 그분께 돌아서야 하고, 그분을 믿고, 그분에 대하여 잘 알아야만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한결같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처음에는 몰라 뵈었지만 구약성경은 물론 살아계실 때에 들려주신 말씀을 기억하고 나서야 주님을 즉시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요구됩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고난을 겪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다면 예수님께서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을 믿지 못한다면 그분을 알 수 없습니다. 먼저 주님을 믿어야 알 수 있지만, 성경에 기록된 주님을 안다면 주님을 더욱 잘 믿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분을 모른다면 우리도 역시 유다인들처럼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잘못을 또 저지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을 열어주셨고, 당신께 대해 증언하는 성경말씀을 깨달아서 뜨거운 마음이 타오르게 하시고, 당신께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당신의 가르침을 온 세상에 선포할 것을 원하십니다. 결국 우리도 열린 마음으로 성경을 읽을 때, 그리고 그분께서 당신의 신비를 열어주실 때 그분을 구세주로 알아볼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분을 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식구조에서 믿는다는 것과 안다는 것은 항상 함께 작용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앙 안으로 들어온다면 믿는 것과 아는 것과 사는 것이 갈라집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앎은 그분을 믿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1요한 4,16), 예수님을 믿는다면 그분을 사랑하게 됩니다(호세 2,22; 1요한 4,8). 비록 서툴고, 때로는 놓치는 일이 있더라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가르침을 알고 지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요한 8,55; 1요한 5,3). 그런데 믿음과 앎과 말씀을 지키는 일이 갈라진다면 그분을 통하여 드러난 진리(요한 1,17) 안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의 친구가 될 수 없고(요한 15,14), 예수님처럼 세상을 이기거나,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요한 17,3; 12,50).
어둠 속에서 사는 이들의 “살과 피는 하느님 나라를 물려받지 못하고,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물려받지 못합니다.”(1코린 15,50) 그러나 우리가 빛 속에서 살아간다면, 믿음의 내용인 말씀을 잘 알고, 지키려고 애쓴다면 우리가 부활하게 되는 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몸체를 주실 것입니다(1코린 15,38.40).

 

 

 

육체를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

     서용운 미카엘 신부님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육체의 생생함을 지니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에 대하여 잠심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육체적 생생함에 대해 숙고하면서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토마시 할리크 신부님의 “고해 사제의 밤” 이란 책을 접하게 되었고, 저의 고민을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여 소개하고 있어서 그 일부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테야르의 진단은 이러하다. 20세기가 시작되면서 그리스도교는 ‘비인간화’ 되었다. 한때는 강렬한 영적 흐름을 고취할 수 있었던 그리스도교가 이 무렵 새로운 가치들을 흡수하지 못한 채 주저하며 내향적으로 변했다. 특히 현대 인본주의와 새로운 자극에 대한 열망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현대인들의 종교적 열정에 응답하지 못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가 더 이상 ‘전염력’을 지니지 못하게 되자 사람들은 다른 길을 찾았다.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인류의 공동 이상이 아니었고 생산력을 잃었다. 이는 세상을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 영적 실천은, 물질과 창조를 부정한 마니교의 이원론, 자연스러운 인간 행동을 향한 비관적 태도와 병적 금욕주의를 보이고 원죄에 집착한 얀센주의 같은 낡은 이단들로 절름발이가 되었다.

현대의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과 세상의 역동성을 모두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우주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이해는 틀에 박혀 있었고, 이런 이유로 경직된 신관과 편협하고 사적인 구원관을 갖게 되었다”(분도출판사, 토마시 할리크, 고해 사제의 밤 55p).

저자는 테야르의 사상을 인용하며 “땅의 충실성”을 강조합니다. 이는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인간의 이성, 감성, 과학, 정치, 경제, 문화 등)의 그 구체적 육체성을 사랑하며, 그 구체적 육체성 안에 숨어계신 하느님을 찾고자 투신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충실성을 위한 숙고와 사랑으로 통합하려는 헌신을 통해서만 예수님 부활의 생생한 체험과 증언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육체의 생생함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땅의 모든 일을 사랑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절절한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이 충실한 사랑의 마음을 지니지 못한다면 우리의 증언은 세상과 사람들의 삶에 동떨어지거나 오히려 영적인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삶에서 부딪치는 구체적 문제들에 자유와 해방의 구원을 가져다주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고 증거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사명을 부여하시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부활 제3주일>(2021. 4. 18.)(루카 24,35-48)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루카 24,36-40).”

 

이 이야기는,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다. 결코 그분의 유령을 만난 것이 아니다. 그분은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셨고, 유령이 아니라 그 몸 그대로 되살아나신 분이셨다.” 라는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사도들이 만난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었다는 말에는, 예수님께서 ‘몸 없이’ 영적으로만 나타나신 것은 아니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신 그 예수님이시고, 그 몸 그대로 되살아나신 분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서를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나타나셨다가 갑자기 사라지시는 일을 반복하셨습니다. 그 모습은, 단순히 되살아나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뒤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움직이시는 것으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바꾸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존재 방식을 바꾸신 이유는, 시공을 초월해서 신앙인들과 함께, 신앙인들 가운데에 살아 계시기 위해서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도 자격을 갖추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부활도 유령 같은 존재가 되는 일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처럼 그대로 되살아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물론 지금의 이 몸을 똑같이 가지고서 부활하는 것은 아니고,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1코린 15,42-44).>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고서 무서워한 것은 예수님께서 갑자기(유령처럼) 나타나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제자들이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직접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의 증언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왜 놀라느냐?” 라는 말씀은, “나는 유령이 아니니 무서워하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라는 말씀은, “나를 직접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왜 못 믿느냐?” 라고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마르코복음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열한 제자가 식탁에 앉아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그리고 그들의 불신과 완고한 마음을 꾸짖으셨다. 되살아난 당신을 본 이들의 말을 그들이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마르 16,14).”>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한 것에 대해서 제자들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이라는 일 자체가 너무나도 놀라운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일들은 부활이 아니라 죽음이 잠시 연기된 일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을 완전히 물리치신 일이고,그래서 그 일들과는 전혀 다른 사건입니다.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우리 자신의 부활도 단순한 수명 연장이 아니라, 죽음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4-48)”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고난과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고, 그래서 그들이 성경의 예언들을 깨닫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긴 한데, 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 하신 설명의 내용은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이 자리에 기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어린양’으로서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서 당신의 목숨을 제물로 바치신 일이라는 것은(요한 1,29) 사도들의 서간문에도 기록되어 있고, 교리로도 정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힘이 없어서 당한 일도 아니고, 우발적으로 벌어진 일도 아니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에 의한 일이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설명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역시 하느님의 인류 구원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모든 일이 다 미리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일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은 미리 잘 짜놓은 각본이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부활과 승천으로 마무리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의 제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 계획, 섭리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그게 바로 그것이었구나.” 라고 깨닫게 되는, 그런 일입니다.

<각 개인의 인생에도 언제나 항상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난과 시련이 무의미한 고통처럼 느껴질 때가 많고, 억울할 때도 많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믿는다면, 지금의 고난이 영원한 영광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한 단련이라는 것도(1베드 1,7)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인내할 수 있고, 끝까지 희망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온 세상에 증언하라는 명령이고, 또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사도들에게만 하신 명령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에게 하신 명령입니다(마태 5,13-16).

‘증언’과 ‘선포’는 모든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평화는 아기가 엄마와 떨어져 두려움을 겪다 엄마 곁에서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모습, 되찾은 엄마 곁에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마음의 평정을 되찾고 누리는 아기의 마음상태이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낙향하던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길동무가 되어주셨다. 평소에 말씀하신 것을 재생하여 들려주시던 때의 뜨거운 감동을 받을 때, 생명의 살아있는 빵이라며 길동무가 그들과 저녁무렵 빵을 떼어 나눌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는다.

예수님께서 제자에게 하신 말씀의 재생, 생명의 빵인 성체의 재생,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님의 만남, 살아계신 하느님을 뵙는다. 함께 하나가 됨, 죄의 용서, 회한의 눈물, 재 탄생, 성장으로 이어감, 그때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 인사하신다.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순간일까? 제자들은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깊은 잠에 빠진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고 인사하셨고,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그리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하고 물으셨고, 제자들이 건넨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잡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해주셨고, 제자들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는 것을 알려 주셨습니다.

 

사실 제자들의 경우 주님의 부활의 소식을 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뻐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의혹과 두려움이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러한 제자들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고, 또한 성령을 전해 주셨고, 또한 식사도 하면서도 함께 머무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모든 일의 증인, 곧 사도로서의 사명을 부여하셨던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주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가끔 자신의 일상의 삶 속에서는 주님이 살아계시지 않는 듯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던 제자들처럼 의혹과 두려움 속에 살아가고, 또한 다시 고기잡이를 나갔던 제자들처럼 인간적인 일상의 바쁨 속에서 자신의 사도적 사명마저도 잊어버리고 살아가곤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진정 그분의 제자요 사도라면 오늘 복음의 부활하신 주님의 모습처럼 부활을 살아가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싸여 있는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역시 세상 속에서 온갖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가 평화를 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곧 그들을 외면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을 찾아가고 다가가 평화를 전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살과 뼈가 있음을 보여주시고 만져 볼 수 있게 하시고 함께 음식을 나누셨던 것처럼 생각과 말로서가 아니라 진실한 행동으로서 사랑을 실천하고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령을 전해주셨던 것처럼 우리도 역시 만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시길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성경 말씀을 풀이해 주셨던 것처럼 내가 만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 바로 주님의 제자요 사도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고, 증인으로서의 삶을 이루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너희는 모든 일의 증인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의 Good News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구약성경 모세율법 시편 예언서 내용들의 목적은 예수부활 예언입니다.
구세주란 뜻은 이점을 중점으로 깨닫고 만민에게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바로 이 일의 증인이란 점을 강조하시며 굳게 다짐하십니다.

예수님부활이라는 엄청난 이 소식은 만인이 꼭 알아야할 중대뉴스지요.
굿 뉴스(Good News)란 인류의 복음 신약성경의 목적이며 골자입니다.
이 사실을 믿게 하려는 기초 첫 걸음이 가톨릭교리 배움의 이유입니다.

그러니 가톨릭교리는 믿거나말거나 듣거나 안 듣거나 자유가 아닙니다.
만민에 속한 인간이라면 인류사의 굿 뉴스는 당연히 꼭 알 기본입니다.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은 오늘 우리 신앙인들에도 해당됩니다. 바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당신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는 증인역할을 해달라고 당부하십니다.

우리는 ‘자기복음화’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남을 복음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복음의 사람의 되어야 하듯 자신 스스로가 먼저 죄의 용서를 받아 그분의 사랑과 자비의 체험이 있어야 또한 타인을 용서하고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바라보는 회개로 이끄는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는 갈릴래아 첫 전도에서 하신 말씀인 ‘회개와 복음’의 선포가 부활하신 후에도 계속 제자들에게 거듭 재확인 됩니다. 회개와 복음의 선포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핵심 메시지이며 당신의 부활을 통해서 온세상에 더욱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와 복음의 선포’는 그리스도 신앙의 알파요 오메가이며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닮아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우는 성 프란치스코는 바로 이 주님의 메시지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기에 수도회 창설 초기에 다른 이들에게 불리워지기를 바랐던 수도회 이름은 ‘아시시의 회개자들’이었던 것입니다. 성인은 죽음을 앞둔 유언에서 먼저 언급한 것은 회개입니다. 이 회개체험이 곧 복음의 체험이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깊이 만나고 사랑하게 되면 자신의 죄를 인식하여 회개를 하지 않을 수 없고 그 회개체험을 다른 이들과 나누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초대교부들이 얘기했듯이 죄는 죽음이 원인이 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를 통한 죽음의 상태가 칼라너가 얘기한 것처럼 영혼의 시작이며 인간이 자유로이 자신의 현존재를 전체적으로 완성하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지난날의 잘못이나 죄에 대해서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죄를 바라보기 보다는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인간은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이 죄인임을 보게됩니다. 이사야 예언자도 하느님을 뵙고 나서야 자신의 비참함과 불순함을 고백합니다. 사랑으로 말미암은 회개체험을 하게 됩니다.

초기 사막교부들이 바라본 것처럼 죄를 ‘사랑이신 하느님께 입혀드린 상처’로 보게 될 때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고 자기비관이나 절망이 아닌 사랑과 희망의 통회롤 하게 됩니다. 이때 평화와 기쁨과 사랑의 체험을 하게 되는데 이것이 복음의 체험이고 이 복음은 그분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을 체득하게 됩니다.

 

 

 

기쁨에로의 초대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경 속에 드러나는 베드로의 다양한 모습에 공감할 때가 있습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물을 치자  고기가 많이 잡혀 두려움에 주님께 떠나 달라고 청하는 모습, 물 위를 걸어오시는 스승님을 유령으로 착각한 나머지 두려워하는 모습, 거룩한 변모 때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초막 셋을 지어드리겠다고 호기롭게 말씀드리는 모습, 스승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사양하다가 손과 머리까지 씻어 달라고 하는 모습, 최후 만찬 때 자신은 스승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하는 모습, 예수님을 잡기 위해 들이닥친 이의 귀를 칼로 내리치는 모습,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는 모습, 그리고 그분 말씀이 떠올라 슬퍼하던 모습, 이른 아침 주님의 무덤에 달려가는 모습, 예수님의 죽음에 절망하며 물고기를 잡으러 가는 모습, 물고기를 잡던 중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호수로 뛰어드는 모습,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세 번의 질문에 슬퍼하며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라고 답하는 모습….

호언장담, 슬픔과 분노, 두려움과 절망 같은 인간적 감정을 잘 알고 있던 베드로의 모습이 낯설지 않게 느껴집니다. 그 모습이 우리와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제1독서(사도 3,13-15.17-19)에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동조했던 유다인들을 향해 예수님은 메시아시라고 선포합니다. 주님의 죽음 앞에 절망했었지만, 그분 부활을 체험한 뒤 부활의 기쁨 속에서 살게 된 베드로입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 장면에서 베드로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다른 제자들 틈에서 그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유령으로 착각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승님께서 당신의 손과 발을 직접 보여 주시고 식사를 하시자, 그제야 베드로를 포함한 제자들은 마음을 놓게 됩니다. 이처럼 베드로의 인간적 모습과 함께 기쁨에 넘쳐 용기 있게 복음을 선포하게 된 모습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봅니다.

베드로처럼 우리도 일상에서 슬픔과 분노, 두려움과 절망을 느낍니다. 주님을 향한 미지근한 마음으로 하루를 보낼 때도 있고,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냉담의 길을 걷거나 아예 신앙에 무관심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간적이고 나약한 모습은 그 자체로 용서받지 못할 모습은 아닐지 모릅니다. 바닥을 치는 순간, 스스로 완전히 돌아섰다고 느끼는 순간, 이제 희망은 없다고 절망하는 순간, 바로 그 순간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각자의 십자가에 짓눌려 신음할 때, 당신 부활의 기쁨에로 초대하십니다. 이 기쁨을 향한 초대에 여러분은 어떻게 답하고 계십니까?



경쟁자에서 동료로
     예진호 마르첼리노 (생활성가 가수)
모태 신앙이었다가 직장 발령으로 인한 타지의 낯선 성당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방황하던 저는 지인을 따라 우연히 가게 된 한 성당의 성가대에 입단함으로써 마침내 냉담을 풀고 다시 행복한 신앙생활을 이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저도 점점 나이를 먹어갔고, 청년회에서 영원히 활동할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현실이었습니다. 30대 중반에 들어서니 또래 단원들은 하나둘 퇴단을 하기 시작했고, 저 역시 자연스럽게 다음 진로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마땅한 길을 찾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제 나이가 청년 성가대에 계속 남아 있기에는 다소 많고, 성인 성가대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어린, 애매한 나이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에 제 머릿속에는 “나이 등 다른 제한 없이 평생 즐겁게 성가를 부르며 활동할 수 있는 단체는 없을까?”라는 고민이 끊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또 한 번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지금 활동하는 성가대에 저를 소개해 줬던 형이 곡을 써줄 테니 cpbc 창작생활성가 제에 나가보지 않겠냐며 권유하였고, 저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성가 제에는 성가를 부르는 분들이 많이 오시겠지?”, “이곳에서 나를 알리면 나에게도 계속 성가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 거야.”라는 확신이 들었고, 주님께서 주신 소중한 기회를 잘 살리기 위해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다행히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에 진출하여, 며칠 후 본선에서 선의의 경쟁을 할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워크숍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 워크숍의 기억은, 지금도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선의의 경쟁을 앞둔 총 11팀의 경쟁자들은 함께 모여 나눔을 하고 찬양을 하며, 자연스럽게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찬양하게 될 동료로 서로를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함께 마음을 모아 성가를 부르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고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헤어졌습니다. 얼마 후 성가 제에서 다시 만난 저희는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라 동료였고, 성가제가 끝나면 다시 뭉쳐서 함께 찬양을 하자는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결국 하나의 팀 ‘열일곱이다’의 탄생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이 넘는 시간이 흐른 지금, ‘열일곱이다’에는 마음이 맞는 다양한 탈렌트가 있는 새로운 멤버들도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또, 많은 고마운 분들의 도움 덕분에 꾸준히 찬양을 하는 팀으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며 매월 17일, 새로운 성가로 신자 분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기적 같은 일들이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저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꾸준히 찬양하고 싶다는 저의 꿈을 주님께서 ‘열일곱이다’를 통해 이루어 주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고 있기에 앞으로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 활동을 이어 나가려고 합니다.

 

 

 

한현택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미사 중에 성체를 나눠드리다 보면 성체를 정성껏 받으시는 분들의 손을 보게 됩니다. 제 출신 본당처럼 시골 본당에서 성체를 분배할 때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딱딱하고 상처나고 두꺼운 손을 보게 됩니다.

아무 꾸밈없는 투박한 손이지만, 성실히 일하셔서 가정을 이끄시고 자녀들을 키우신 분들의 거룩한 손입니다.

사람은 영혼만도 아니고 몸 만도 아닙니다. 사람은 영혼과 몸의 합일체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영혼만이 아니라 몸도 구원하실 것입니다.

이 희망을 확증해주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입니다. 부활할 이들의 맏이이신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있을 부활의 모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에는 삶의 모든 기억이 담겨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님의 몸을 보고 예수님을 알아보았듯이, 우리가 지상에서 눈으로 보고, 손으로 쓰다듬어주고, 입으로 서로 대화를 나누었던 관계는 우리가 죽고 부활한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상처가 부활한 육신에도 남아있었듯이, 우리가 현세에서 사랑을 위해 감내해야 했던 아픔의 흔적들도 우리의 현생이 끝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사랑을 추구했던 삶을 드러내주는 영광스러운 징표로 남아있을 것입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조용국 프란치스코 신부님

찬미 예수님

1.아름다운 꽃들도 찬란하지만 새롭게 돋아나는 새순들도 꽃들 못지 않게 우리의 마음을 감동스럽게 합니다.

2.모든 동물이나 식물들은 그 새롭게 태어날 때 참으로 이쁘고, 아름답습니다.. 집에서도 아기가 태어나면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다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저의 친구들도 어느샌가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는 나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쩌다 그들을 만날 기회가 있으면 주된 화제가 손자, 손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핸드폰에는 아기들의 사진이 주된 배경사진이고, 핸드폰에 있는 아기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자랑하느라고 시간가는 줄 모릅니다. 하도 반복되는 손주들 자랑에 식상한 친구들이 자랑을 하려거든 벌금을 내고 하라 하면 실제로 벌금을 내면서 자랑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3.새로운 생명은 참으로 그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연록색의 잎들도, 이쁜 새끼 강아지도, 아기들도 새로운 생명 그 자체로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또 때로는 황홀하게 하고, 환희로 가득차게 합니다..

4.해마다 이때쯤 되면 먼저 남편이나 아내,또는 부모나 자식들을 하늘나라로 보낸 사람들은 우울하다고 합니다.. 봄이 되면 자연 만물은 새롭게 다시 살아나는데 먼저 가신 분들은 여전히 우리의 마음속에서 그리움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살아 있을 때는 미워도 하고, 사랑도 하지만 죽음이후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아프고 힘들게 하는 사람들도 역시 살아 있다는 것이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5.다시는 태어날 수 없는 삶,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버리는 듯한 우리의 삶이 한스럽고, 우울하게 느껴지는 것도 이 봄에 우리가 견뎌야 하는 삶의 십자가가 아닌가 합니다.. 살아 있을 때 좀 더 잘 할걸,, 좀 더 친절하게 할걸,,,원하는 바를 들어줄 걸,,,등등의 후회스럽고,미안하고, 죄스러운 복잡한 마음이 이 찬란한 봄에 더 우리의 마음속에 깊이 깊이 스며들기도 합니다..

6.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생명이 돋아나는 이 봄에 부활하시는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7.제자들은 마음이 참담했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버리고 무너져 버린 듯한, 마치 세상이 어둠과 죽음으로 가득 찬 것만 같은 마지막 절망감을 체험했습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깊고 깊은 체험이었습니다.. 그들의 허무감과 상실감 그리고 그로 인한 고통은 아마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의 예수님께 대한 기대는 그야말로 철저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삶에 대한 의지도 방향도 모두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어둠과 죽음 그 자체였습니다..

8.어느날 그들은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머리로는 이해가 가지 않지만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났음을 직감하게 됩니다.. 여기저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한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의 마음은 확신이 가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는가? 어떻게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을까? 그들의 마음은 의심과 의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9.그런 두려움, 의심, 의혹의 마음 한 가운데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십니다... 그들 가운데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십니다...

10.제자들은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지금 뭘 보고 있는거야? 도대체 저 분은 누구지? 내가 헛 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내가 마음이 혼미해져서 유령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11.예수님께서는 차분하게 말씀하십니다.."왜 놀라느냐? 어째서 의혹을 품고 있느냐? 자 봐라, 바로 나다. 내 손과 발을 보아라,,

12.제자들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이게 뭐야? 여전히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13.황당한 일에 멍해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생전의 친숙한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생선 한토막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잡수십니다...

14.아주 익숙한 모습이었습니다.. 바로 생전의 예수님 바로 그 모습이셨습니다...

15.예수님께서는 담담하게 구약의 예언들을 설명해주시면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십니다... 마음이 열려야 새로운 사실들을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의미도 설명해 주십니다..

16.제자들의 마음에 가득 찼던 두려움, 의혹이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 희망이 솟아 오르고, 뭔지 모를 기쁨이 용솟음 치기 시작합니다... 바로 눈앞에 계신 예수님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아 바로 그분이구나, 진짜 그분이 다시 살아나셨구나,,, 의혹은 확신으로,, 두려움은 용기로,, 절망감은 희망으로 어리석음은 깨달음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어둠은 빛으로, 죽음은 새로운 생명으로, 억압되었던 마음은 자유로운 마음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17,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만에 되살아나셨고,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죄가 용서된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선포해야 한다..

18.부활의 증인,, 어둠을 뚫고, 죽음을 뚫고 그분께서는 부활하셨음을 증언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우리 삶의 절망을 뚫고, 고독을 뚫고,, 좌절과 실의를 이겨내는 것이며, 우리의 어둔 마음속에 빛과 희망을 주는 것이며,, 두려움속에서 용기를 주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우리의 죽음에서 새로운 부활로 나아감을 선포해야하는 것입니다..

19.여전히 삶의 무게로 고통스러워 한다면,, 여전히 두려움에 잡혀 있다면,, 여전히 미워하고 분노하고,, 좌절하고 있다면 우리는 아직도 부활 이전의 제자들의 그 참담한 모습속에 있는 것입니다..

20.우리는 어떤 상황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말고, 확신 속에서 우리 삶의 어둠을 이겨내고, 우리 마음의 좌절과 분노와 상처들을 이겨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활의 삶이며,, 우리는 바로 그 부활의 증인이 되야 하는 것이며,, 우리안에서 이뤄지는 부활을 선포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21.부활, 그것은 참으로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우리 안에 부활에 대한 확신과 체험이 없다면 우리는 살아있어도 여전히 죽은 목숨이며,, 산다 해도 헛사는 것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의 생명, 살아야 하는 이유와 가치 역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22.부활은 우리의 삶속에 체험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어둠과 죽음이 극복될 수 있음을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미움이 용서로, 우리의 절망이 희망으로, 우리의 두려움이 용기로 바뀌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23.살아있을 때 부활은 체험해야 실제로 우리의 죽음앞에서도 우리는 부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살아있을때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의혹과 불신과 미움과 분노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결코 죽어서도 부활할 수 없을 것입니다...

24.부활은 먼 훗날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이뤄져야 하는 하느님의 사랑의 결정판인 것입니다...

25.지금의 내 삶안에서 부활은 체험되어야 하며, 우리는 그 사실을 만방에 선포해야 하는 예수님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26."그리스도는 고난을 겪으시고 사흘만에 죽은 이들가운데서 부활하셨으니,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를 그분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알렐루야" 아멘...

 

 

 

감사제의 거행

    성 유스티노 순교자의 그리스도인을 변호하는 ‘제1호교론’에서 (Cap. 66-67: PG 6,427-431)

우리가 가르치는 것을 진리라고 믿고, 죄의 용서와 재생을 부여하는 세례의 물로 씻음받으며, 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사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감사제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보통의 빵과 음료로 받아 모시지 않습니다. 도리어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육화되셨고 우리 구원을 위해 살과 피를 취하신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담고 있는 감사의 기도를 바칠 때의 음식, 즉 변화되어 우리 살과 피를 양육하는 그 음식도 육화되신 예수님의 살과 피라는 것을 배워 왔습니다.

복음서라고 하는 해설집에서 사도들은 예수께서 그들에게 다음과 같은 분부를 남기셨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빵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여라. 이는 내 몸이다.’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드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 피이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그들에게만 나누어 주셨다.”라고. 그때부터 우리는 이것을 항상 서로 서로 상기시켜 왔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가진 이들은 없는 이들에게 도움을 주며 서로 항상 일치되어 있습니다. 봉헌물을 바칠 때마다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하여 만물의 창조주께 찬미를 드립니다.

그리고 “태양일”이라고 하는 날(주일)에는 도시와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집회를 열고 사도들의 해설집이나 예언자들이 글을 시간이 허용하는 데까지 읽습니다. 독서가 끝나면 그 다음엔 주례자는 방금 들은 아름다운 교훈들을 우리 생활에서 본받도록 권고하고 격려합니다.

그리고 나서 함께 일어나 기도를 바칩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기도를 끝낸 후에 빵과 포도주와 물을 가지고 옵니다. 주례자는 온갖 정성을 다해 기도와 감사송을 바칩니다. 그 다음에 감사의 기도를 바친 그 음식을 분배하여 참석자가 각기 그것을 받아 모시며 참여치 못한 이들에게는 부제들을 통하여 그것을 보냅니다.

재물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원하면 자기가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대로 바칩니다. 이 봉헌물은 모아서 주례자에게 맡겨집니다. 그는 이것으로 고아와 과부, 질병과 어떤 이유로 궁핍한 이들, 또는 갇힌 이들과 여행하는 이들을 도와줍니다. 한마디로 주례자는 어려운 이들을 돌보아 줍니다.

태양일(주일)에 우리가 모두 함께 모이는 이유는 한 주간의 첫 날인 이날, 하느님께서 어둠과 물질을 회전시키신 후에 세상을 만드셨고 또 이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토요일 전날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토요일 다음날 곧 태양일(주일)에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여러분이 생각해 보도록 말씀 드린 것을 그들에게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 회개, 만남, 사랑, 증언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수도자는 누구인가?” 날마다 묻는 자가 수도자라 합니다. 비단 수도자뿐 아니라 누구나 참으로 살고자 하는 자는 날마다 “나는 누구인가?” 물어야 할 것입니다. 참으로 무의미하고 허무한 삶이 아니라 행복한,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예나 이제나 자주 튀어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답답할 때 절로 나오는 질문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 제목입니다. 30년전 왜관 수도원 종신 서원 미사때 강론 제목이었고 얼마전 강론 제목입니다. 저뿐만 아니라 신문기사를 보면 여러 필자들이 답답한 마음에 ‘어떻게 살아야 하나?’ 질문에 대해 제각기 답을 말합니다만, 결국 각자 찾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수녀원 피정지도시 수녀님들 감사인사에 대한 제 답변이 생각납니다.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변입니다.

 

“오늘로 피정이 끝났네요. 끝은 시작입니다. 그러나 끝은 없고 늘 새로운 시작이 있을뿐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사시기 바랍니다.”

 

다음 두 경우 역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질문에 대한 답을 줍니다. 한 자매의 질문입니다.

“남편은 저에게 진실된 삶을 살라합니다. 어떻게 진실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자매님은 진실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진실은 사랑입니다. 가까이에서부터 사랑하며 사시면 바로 진실한 삶입니다.”

 

다리가 불편한 농장 수사님과의 대화도 잊지 못합니다.

“무릎 불편한데 농장 일할 수 있습니까?”

“내가 아니면 누가합니까? 해야죠.”

말문이 막혔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이 되겠습니다. 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구체적으로 제자리에서 제몫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것이 진실이자 사랑이요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나라 안팎이 코로나로 인해 뒤숭숭한 시절입니다. 16일 현재 전 세계 코로나 19 누적 사망자는 300만명, 확진자는 1억4천만명을 돌파했다 합니다. 웬지 모를 불안과 두려움이 미세먼지처럼 마음을 어둡고 우울하게 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절실한 물음의 현실입니다. 답은 가까이 있습니다. 파스카의 주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신록의 아름다움 눈부신 파스카의 4월 축제시기, 바로 파스카의 신비,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평화, 파스카의 행복을 사는 것입니다.

 

첫째, 회개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 대한 최상의 응답이 회개입니다. 날마다 평생 회개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 안 제자리로 돌아가 늘 새롭게 시작하는 회개의 삶입니다. 밖으로는 산같은 정주에, 안으로는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같은 삶을 살게 해주는 수행이 바로 끊임없는 회개입니다.

 

인간 마음의 고질병인 무지에 대한 유일한 처방도 참된 회개뿐입니다. 회개를 통한 진실과 겸손이요 지혜입니다. 솔로몬 주랑에서 설교하는 사도행전의 베드로 사도가 강조하는 바 역시 회개입니다. 마치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사실 예나 이제나 변함 없는 인간의 부정적 성향입니다.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시간 회개하고 돌아와 우리의 죄가 지워지게 하는 은총의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새삼 회개의 일상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도와 일이 잘 조화된 일과표가 고맙습니다.

 

둘째, 만남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파스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의 은총입니다. 회개를 통해 만나는 주님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준비되어있을 때, 주님은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순전히 주도적인 주님의 은총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과 만남의 체험담을 나누며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는 결정적 순간에 주님은 제자들의 공동체에 나타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부활하신 파스카 예수님 자체가 평화와 기쁨의 선물입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평화와 기쁨이 영육의 건강에 최고의 백신이자 선물입니다. 파스카의 기쁨, 파스카의 평화입니다. 이보다 더 귀한 보물은 없습니다.참으로 이런 평화와 기쁨을 지닌 자가 내적부자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참 신기하고 신비로운 것이 부활하신 주님은 똑같은 영혼과 육신을 지니셨으면서도 자유로우시고 영원하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는 벽이 없고 온통 문이며 어디에나 현존하십니다. 어제 복음의 참 고마운 말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로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님 부활상 아래 바위판에 새겨진 성구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다(I AM)’는 바로 탈출기 모세에게 계시된 하느님 이름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그대로 하느님의 현존임을 깨닫습니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I AM with you)’, ‘나는 너희를 위해 있는(I AM for you)’ 하느님인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복음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나다’ 바로 부활하신 파스카의 주님은 하느님의 현존임을 말해 줍니다. 늘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 파스카의 주님의 평화와 기쁨이 인간의 근원적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을 말끔히 몰아내고, 인간 영혼의 고질적 질병인 무지와 허무를 치유합니다. 그러나 치유보다는 예방이 백배 낫습니다. 그러니 평소 아프기전 건강할 때 파스카의 기쁨과 평화로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 영육의 건강에는 제일입니다.

 

셋째, 사랑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만남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사랑은 무사한 이타적 아가페 사랑입니다. 우리의 형제적 사랑은 이런 깨끗한 아가페 사랑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변호자 파스카 예수님께 대한 감동적인 모습에 저절로 감사하게 됩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깨닫는 자라면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분의 말씀을 지킬 것이고 형제들을 사랑할 것입니다. 이어지는 요한 사도의 말씀에 그대로 공감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 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의 완성됩니다.-

 

사랑의 계명입니다. 사랑의 말씀입니다. 사랑의 진리입니다. 사랑이 빠진 삶, 그대로 유령같은 헛것의 삶입니다.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의 삶입니다. 늘 허기虛氣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새삼 미사시 형제자매들이 가난한 빈 손으로 주님 성체를 모실 때의 아름다운 장면이 생각납니다. 이처럼 가난하고 겸손한, 순수하고 진실한 모습을 세상 어디서 볼 수 있겠는지요! 성찬전례가 없는 말씀전례뿐의 미사라면 그 영혼들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하겠는지요! 바로 주님의 성체를 모실 때, 우리는 그대로 주님의 사랑이, 주님의 평화가, 주님의 기쁨이, 주님의 생명이 됨을, 주님과 하나됨을 결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넷째, 증인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회개, 만남, 사랑은 복음 선포의 열매로 드러나야 합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파스카의 주님을 닮아 하나가 되어갈 때 최고의 복음 선포요 주님 증인의 삶입니다. 부활하신 제자들에게 주는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일의 증인이다.”

 

사도들처럼 죄의 용서을 위한 회개가 주님의 이름으로 이웃에 부단히 선포될 수 있도록 우리 또한 한결같이 내 삶의 자리에서 주님 부활의 증인의 삶에 충실해야 하겠습니다. 사도행전의 베드로가 그 좋은 모범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부활하신 파스카의 예수님과 하나될수록 우리는 주님의 충실한 증인이 되고 복음선포도 저절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답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습니다. 바로 각자 제 삶의 자리에서 부단한 회개와 만남, 사랑과 선포의 삶을 통해 주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 파스카의 주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고맙게도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의 파스카 삶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주님, 저희 위에 당신 얼굴 밝은 빛을 비추소서.”(시편4,7ㄷ). 아멘.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성경의 의미를 깊이 각인시켜 주십니다.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루카 24,36)실의에 차 엠마오로 낙향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제자들이 동료들과 만나 서로의 체험을 나눕니다. 바로 그때,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평화의 축복을 베푸십니다.

"바로 나다."(루카 24,39)놀라고 두려워 믿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바로 당신 자신이심을 계시하십니다. 제자들이 깨닫도록 당신을 만지게도 하시고 무언가 잡숫는 모습까지 보여주시면서 그들의 완고하고 움츠린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그리스도교 신자라고 늘 하느님 이야기만 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대화가 가장 그리스도인답고 신앙인의 본질에 가까운지 오늘 복음은 알려줍니다. 세상사, 인간사에 훨씬 더 기울어진 이들은 복음이나 신앙체험 이야기를 쑥스러워하거나 불편해하고 오히려 세속적 관심사와 자랑, 험담을 더 익숙해 하지만, 우리가 신앙과 말씀에 대해 나눌 때 바로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현존하십니다. 당신 이야기를 하는데 그분이 빠지실 리 없으니까요. 그래서 혹 스스로 하느님 체험이 없다고 여긴다면, 자신이 얼마나 하느님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경청하는지 돌아보면 이유가 보일 듯합니다.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예수님에 대해서는 사실 유다인이 목숨처럼 믿고 지키는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그 모든 내용의 실현이시고, 또한 말씀 자체이시며 완성이시니까요. 다만, 마음을 열고 보아야 보이고, 또 귀를 열고 들어야 들립니다. 그래야 깨닫지요. 그분은 새로움을 거부하는 마음으로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지혜이십니다.

하느님과 성경 말씀에 대해 진솔히 나누는 자리에는 예수님께서 계시면서 더욱 깊은 통찰력으로 당신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지혜가 지혜를, 선이 선을, 영적 성장이 성장을 부르지요.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 진다'(마태 13,13 참조)는 말씀이 딱 들어맞습니다.

제1독서에서 베드로는 예수님과 성경 말씀의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사도 3,18)베드로는 유다인들이 이방인의 손을 빌려 죽인 예수님이 성경에 기록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구세주이심을 명백히 합니다. 성경을 잘 안다고 자부하였지만 결국은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으니 이제는 회개하여 죄가 지워지게 하라는 격려로 설교를 끝맺지요.

제2독서에서 요한 서간의 저자는 말씀과 우리의 관계를 알려 줍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말씀을 듣고 믿는 이, 말씀에 머무르고 사랑하는 이, 말씀이 원하시는 바를 실천하는 이 안에는 주님께서 현존하십니다. 오매불망 말씀을 품고 당신을 바라는 이를 그분은 결코 외면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과 함께하는 이는 어떤 굴곡진 삶의 현장을 지나더라도 말씀을 품고 있기에, 그의 삶 가운데에는 평화의 축복을 베푸시는 예수님께서 항상 현존하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어 가지요.

비록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도 하느님의 사랑이 존재 안에서 완성되어 가는 이는 神化(Deificatio)의 여정 안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되어 갈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담고 그분을 닮아갑니다. 그렇게 하느님이 되어 가지요. 말씀과 하나됨으로, 말씀이신 분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 저희에게 성경을 풀이해 주소서. 저희에게 말씀하실 때 저희 마음이 타오르게 하소서."(복음환호송)우리가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읽고 듣고 품으며 형제자매, 이웃과 나눌 때 바로 그 자리에, 우리 가운데 주님께서 오시어 우리 마음을 불타오르게 해 주십니다. 사랑으로 뜨겁게 타오르는 마음으로 더 깊이 말씀을 깨닫게 되고, 그 깨달은 말씀이 우리를 사랑으로 변모시킵니다. 점점 더 사랑이 되어가는 이는 성삼위 하느님 안에 일치로 녹아들어가지요. 그가 말씀과 분리될 수 없듯이, 주님과 그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말씀을 나눔으로써 우리 가운데 부활하신 주님을 맞이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조금 낯설고 쑥스럽고 생뚱맞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어쩌면 누군가 먼저 시작해 주기를 바랄지도 모릅니다. 말씀 안에서 함께 풍요로워져 가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말씀이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일찍이 시메온은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안고 성모님 앞에서 예언의 말을 하였습니다.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루카 2,34)

 

예루살렘은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유래에 없이 시끄럽고 혼란스러웠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겠지만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문제가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습니다. 실망하며 흩어졌던 제자들은 하나 둘 한 자리로 모입니다. 그 분이 무참히 죽고 무덤에 갔던 여인들이 빈 무덤이었고 그분은 살아있다는 이야기이며, 엠마오로 가시던 주님을 만나보았다고 하는 소문이 또 그들을 숭숭하게 만듭니다.

 

루카 복음은 무덤을 찾았던 여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루카 24,10) 그들이 무덤에서 천사 둘로부터 주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듣고 제자들에게 달려가 이 소식을 전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제자들은 여인들의 말을 ‘헛소리’로 일축하며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무덤 안을 들여다보지만 여전히 스승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이야기에서 큰 주제 중에 하나가 ‘왜 이토록 주님의 부활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입니다.1) 그러던 차에 주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소문도 있기는 했지만 막상 죽었던 주님이 나타나셨으니 반가움보다는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겠어요? 그러한 제자들 앞에 주님께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하시며 정다운 인사를 하십니다.

 

그래도 믿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자들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8-39)라고 하시며 직접 당신 손과 발의 상처를 보여주십니다.2)

 

주님께서는 한편 기뻐하면서도 미심쩍어 하는 제자들에게 먹을 청하고 그들이 드린 생선 토막을 그들 앞에서 잡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토라와 예언서, 특히 시편에 기록된 말씀이 당신에게서 성취되었음을 다음과 같이 입증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 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주님의 사도들은 스승의 부활을 체험한 후에서야 주님 살아생전에 가르치셨던 말씀과 특히 예언서와 시편에 표현된 ‘수난 받는 메시아’를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서 그 예언들이 성취되었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군중 앞에서 당당하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사도 3,18-19)

 

사도 베드로는 백성이 무지해서 죄 없는 사람을 십자가에서 죽게 했지만 이제라도 자신들의 잘못을 회개하고 죄의 속박에서 벗어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요한 서간의 저자는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속죄제물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체험한 사도들은 그 기쁨과 희망을 교회에 전해 주었습니다.

교회의 후계자들은 제자들처럼 주님 죽음과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그 모든 것을 전승해왔습니다. 그래서 교우들은 ‘보지 않고 믿는 이의 복됨’(요한 20,29)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부활에 대한 그 믿음을 전해 받고 있습니다.

때로 부활의 기쁨을 맞았지만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의구심을 가진 것처럼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아직 그 부활의 의미를 온전히 나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 말씀을 받아들이며 우리자신의 게으름과 소극적인 믿음에 대해서 회개해야 할 때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부활의 증인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요?

인간은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듯이 죄의 그늘에서도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십자가에서 당신 자신을 봉헌하시고 죽음을 맞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비록 제자들에게 두려움이었지만 그 부활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대로 약속의 성취 였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믿은 이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이며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물론 우리도 사람들에게 부활의 의미를 전해야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의 삶이 부활로 열려 있어야 하고 이웃에게 ‘죽음에서 생명’의 의미를 증명해야합니다.

작은 것이라도 새로워지는 것이 먼저 우리의 부활의 증인의 모습이겠습니다. 각자가 처지에서 진정으로 변화되기 위해 먼저 우리 자신을 회개하며 우리의 낡은 삶을 벗고 새로움으로 거듭 나야 하겠습니다.

----

 1)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유대인들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스도교 안에서도 몇 가지 어려움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먼 옛날 엘리야 예언자가 시돈에 있는 사렘타 마을의 한 과부의 외아들을 살린 기적의 이야기(1열왕 17,21)를 성경을 통하여 유대인들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본인 스스로가 죽었다가 스스로 되살아난 예는 없었다. 물론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사실 받아 들인다해도 유대인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라도 무덤에서 부활을 생생하게 목격한 군인들을 돈으로도 매수해야 할 정도였습니다.(마태 2812)

 

 2)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예수님 부활에 대한 문제가 생긴다. 영지주의의 영향을 받아 예수님의 육체 부활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단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 사실을 ‘그리스도의 가현설(假現說)’ 또는 ‘도케티 (Docetism)’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데 그 내용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인간의 육체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교회 역사의 초창기부터 이러한 이단들에 의해서 공동체는 혼란을 겪었고 또 반박한 흔적을 볼 수가 있습니다. 마태오와 루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수난과 죽음, 부활을 전하고, 요한복음은 서두에서부터 '말씀이 사람이 되심'을 선언 (요한 1,14)하고 서간에서는 그리스도의 육체를 부정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까지 표현한다.(2요한 1,7)

 

 

 

깨닫게 하시는 주님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오늘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백성들에게 설교하는 내용인데 그는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라고 전혀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백성들에게 얘기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그런데 이렇게 얘기하는 베드로가 사실은 이 백성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곧 마찬가지로 무지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고 도망쳤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니 이 말은 나는 잘못이 없는데 너희가 예수를 죽였다는 남탓이 아니라 자기도 같은 사람이라는 공동 죄 인식에서 한 얘기이고 그래서 베드로는 백성들을 "형제 여러분"이라고 부릅니다.

 

아시다시피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베드로는 제자들 중 예수님의 정체를 제대로 안 유일한 존재였고 그래서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라는 고백에 예수님으로부터 그것은 인간 누구가 알려준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께서 알려주신 것이라는 칭찬도 받고 베드로를 반석 삼아 당신 교회를 세우겠다는 약속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은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시자 그럴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가 '너는 사탄'이라는 호된 질책을 받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베드로는 예수가 그리스도인 것까지는 알았지만 그 그리스도가 힘 없이 그리고 비참하게 죽을 운명이라는 것까지는 몰랐고 그래서 예수께서 맥 없이 죽게 되셨을 때 배반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배반하고 죄책감과 절망감에 빠져있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당신이 죽은 그 예수이고 그러나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려고 갖은 애를 쓰시는 내용, 곧 당신의 손발을 보여주시고 빵도 같이 잡수시는 내용이 오늘 복음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의 주님은 제자들이 깨닫게 하시려고 갖은 애를 쓰시고, 이런 내용의 복음을 우리가 지나쳐 읽지 않고 찬찬히 읽는다면 깨닫게 하려고 애쓰시고 공들이시는 주님의 사랑을 우리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니,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오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깨닫게 하시려고 애쓰시는 주님 사랑에 우리가 해야 할 마땅한 응답은 우리의 마음을 열고 깨닫는 것이고 그래서 부지불식간에 생명의 영도자를 다시 죽이는 일이 없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베드로가 무지하여 주님을 죽였다고 나무라는 예루살렘 백성들처럼 우리도 생명의 영도자를 죽일 수 있습니다.

물론 알고서 원수 죽이듯 죽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깨닫게 하시려고 그리도 애쓰시는 주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이 또 다시 죽이는 것임을 모르고 그럴 수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깨닫게 하시려는 주님의 사랑에 우리의 마음을 열 것이고 수난과 부활의 주님 사랑을 느낄 것이며,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라는 오늘 주님의 마지막 말씀처럼 주님 사랑의 증인, 수난과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함승수 신부님

본당 청년들 중 제 강론에 대해 항상 좋은 피드백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말씀이 마음에 너무 와닿고 나아갈 길을 알려주어서 감사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멋모르던 새신부 때 였다면 그런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져 제가 잘난줄 알았겠지만, 다행히 지금은 그러지 않습니다. 제 능력으로 그들에게 감동과 깨달음을 준 게 아님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기에 깊은 감동을 받은 것입니다. 제가 제시하는 복음적 삶의 방향을 충실히 따랐기에 그 삶이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지만, 그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보다 더 정확히 표현하면 그분이 어떤 존재인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기들 눈 앞에 떡하니 서있으니 '유령'으로 생각되어 무서울 법도 합니다. 더구나 그 대상에게 잘못한 바가 있어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상황이라면, 자기들에게 '복수'라도 하려고 오셨나보다 생각되어 그 두려움은 더 커지겠지요.

제자들이 그런 오해에 빠진 것은 마음이 굳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어떤 대상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단단하게 굳어져 있으면 그 생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음을 알고 있었고, 무덤에 묻혀 계시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날 수 없다는 '상식'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과 '상식'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게 가로막았습니다. 마음은 열지 못한 채 머리로만 예수님을 바라보니 아는게 병이 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제자들이 어떻게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드러나는 사건의 순서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 몸에 난 상처들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시는 행동이나, 제자들 앞에서 음식을 드시는 행동으로 인해 제자들이 오해를 바로잡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런 외적인 표징들은 예수님께서 유령이 아니며, 온전한 육체를 지닌 상태로 부활하셨음을 머리로 이해하는데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마음을 연 것은 내적인 요인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은 죽는게 두려워서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지만, 제 안위를 챙기고자 고통과 모욕을 겪으시는 그분을 외면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비난하거나 단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두려움에 빠진 제자들을 진심으로 걱정하며 평화를 빌어주셨습니다. 그런 그분의 따뜻하고 자상한 마음이 제자들의 마음을 연 것입니다.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어도, 마음을 열지 않으면 부활의 신비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주님께 마음을 연다는 것은 그분의 뜻을 받아들이고 순명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영적인 눈이 틔어서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과 삶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어떤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바라보며 희망을 지닐 수 있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은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 말씀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섭리를 알아볼 영적 시야를 일깨우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조건없는 사랑과 한없는 자비로 우리 마음을 여시어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해 주셨으니, 힘들고 괴로운 이 세상에서도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기쁘게 살 수 있는 법을 알려주셨으니, 우리는 즉시 죄를 뉘우치고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되돌려야 합니다. 또한 모든 민족들이 회개하고 죄를 용서받아 구원에 이를 수 있도록, 사랑과 자비의 실천으로 그들을 하느님께 이끌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증거자'로서의 소명입니다.

 

 

 

행복을 위하여 여기 왔습니다. <황금동 성당 120주년에 초대되어서 4월 18일 주일 강론입니다.>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찬미 예수님, 행복하세요! 저를 이 자리에 불러주신 본당 신부님에게 감사합니다. 시간이 벌서 40년이 지났네요. 제가 여기 왔을 때 이렇게 크고 아름다운 성전도 아니고, 사제관 생활은 연탄불로 식사 준비하던 시대였습니다. 여기서 사목 생활을 하면서 행복했었습니다. 120년, 저와의 관계는 3년을 빼면 120년은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내게는 잠깐과 같은 그 시간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를 이 자리에 초대해 주셔서 행복합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합니다. 4번이나 지난 시간, 시간을 초월하여 어제가 오늘이 되고 내일이 오늘의 희망으로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한결같이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하느님을 찾아 만나고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3년간 하느님을 찾아서 만나고, 기쁨을 알려주고, 함께 행복했던 기억이 이 나이 88에 봄의 새싹처럼 새록새록 일어납니다.

지난날 행복했던 기억이 오늘과 겹쳐서 행복을 지금 느낍니다. 오늘 복음에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실망과 절망으로 슬픔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주님의 말을 듣고 빵의 나눔을 통해 주님을 알아보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같이 초대에 응하여 여기서 만남의 현실은 주님 부활의 기쁨만큼 기쁘고 행복합니다.

행복이란? 희망에서 나옵니다. 앞으로의 더 큰 행복을 위해 오늘이 있으며 오늘의 만남은 더 큰 희망을 품게 하며 만들어낼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듣고 알아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실천하셨듯이 우리도 믿음 안에 일어나는 고통을 극복하도록 알려주는 사제와 지도자들의 말이 기초가 되어서 주님과 함께 행복이 이어지고 여기 머무는 모든 이가 하느님을 만나서 행복해지도록 기도합니다.

지금 황금동 성당의 역사는 김천 지역의 역사입니다. 물론 황정, 서무 터의 옛 순교자들이 신자들의 공로였지만 선택된 땅이며 하느님이 자리 잡은 곳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 살 때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그때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황금동 성당과의 인연은 1964년 평화동 보좌로 부임하고, 그 당시 김남수 루가 신부님의 부탁으로 지례, 부황. 대덕. 황점, 서무 터 곳곳을 일주일 판공성사 주면서 돌아본 일로 시작합니다.

그 당시 중고등학교 학생들과 산간학교를 통해 산과 들과 강가로 집중적 신앙교육을 체험하던 학생들이 자라나 아이들이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어 사회의 큰 자리를 차지하신 모습 보며 행복합니다.

청년들은 지금 할아버지가 되고 본당의 주춧돌이 되어 있습니다. 또한, 사목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던 어르신들, 40대 청년 사제를 돌보아 주시던 분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주님 품 안에서 행복하게 영원히 살고 계실 분들을 영상으로 보듯이 비록 나이 들어 무감각하지만, 눈앞에 새록새록 떠오르고 그 행복이 메아리쳐 마음이 설렙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행복하세요. 저는 지금껏 기도했지만, 이곳 신앙의 돗자리에서 일하실 분들 위해 천년만년 길이 주님과 함께 살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당신 몸에 만족하십니끼?

     아르헨티나 문한림 주교님

“당신 몸의 품위”를 발견하십시오!

당신의 몸에 대해 어떤 생각과 어떤 느낌을 갖고 계십니까? 있는 그대로 만족하십니까? 관리는 잘하고 계십니까? 단순히 매력 발산이나 즐김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섬김을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상상하지 못했던 몸에 관한 엄청난 가치적 측면을 밝혀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그분 부활하심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령을 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손과 발에 못 자국 난 상처를 보여주시며 유령이라면 살도 뼈도 없을 것이라고 하시며 당신이심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의문을 품자, 그분께서는 그들이 내미는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그들 앞에서 드셨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유령을 본 것도 환상을 본 것도 아닌 실제 육체를 지니셨음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예수님의 몸은 이미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무셨기 때문에 죽음 이전의 몸과는 절대적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물질적 장벽을 넘어 자유롭게 나타나시고 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는 이를 “영광스러운 몸(필리 3,21)” 또는 “영적인 몸(1코린 15,44)”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허물렸어도 사흘 만에 자신을 통해 세워질 성전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바로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자신의 몸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참조, 요한 2, 18-22).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진정한 육체이신 이 성전에서 우리는 하느님 아버지와 친교를 나눕니다.

[승천하신 후의 예수님의 몸]

그러나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더 이상 그분을 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그분의 진짜 몸인 “이 새 성전”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그분께서 빵과 포도주를 통해 우리에게 남기신 몸과 피의 성체성사 안에서 만나 뵐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미사 전례 안에서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내 피의 잔이기 때문이다”라고 전례를 거행합니다.

그럼 우리가 그분의 몸을 받아 모시고 그분의 피를 마실 때마다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됩니다.

· 그리고 그분 안에서 우리 서로 한 몸을 이룹니다(참조, 1코린 10,16).

· 이렇게 우리는 세례 성사 이후 이미 몸에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와또 우리 상호 간의 친교를 돈독히 합니다.

[당신 몸에 관한 기쁜 소식]

그렇다면 오늘, 우리 몸에 관한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몸을,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에 합침으로써 우리 몸은 하느님이 거하시는 “성스러운 성전”으로 변화됩니다 (참조, 1코린 6,19). 따라서 우리는 우리 몸 안에서 우리 자신과 매일의 일상을 봉헌함으로 인해 그분께 영광을 드립니다(참조, 1코린 6,20) (참조, 로마 12,1).

-----------------------------------------------------------------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당신의 몸은 단순히 살과 뼈의 집합체가 아닙니다. 당신이 아름다운 몸매를 가지고 있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당신의 몸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가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하느님의 성전”이고, 이미 당신의 몸이 영적이고 썩지 않으며,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과 완전한 통합을 향해나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매일 주님께 간구하십시오. “주님 당신 눈에, 저의 몸과 영혼이 값지고 소중하다는 것을 체험할 수 있는 은혜를 제게 주십시오"(참조, 이사 43.4). 그러면, 당신은 매일 하루가 다르게 부활하신 주님의 행복한 증인이 될 것입니다! 아멘.

 

 

 

신앙의 매너리즘 극복하기

     황중호 베드로 신부님

복음을 묵상할 때 좋아하는 구절을 만나면 신이 납니다. 하지만 너무 잘 알고 있기에 묵상을 하면 계속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게 되고 늘 하던 대로 기도하게 됩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듯, 게으름과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것이지요. 그러다 보면 열정은 무기력과 함께 식어버리고, 감동이 없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약속된 땅을 향해 떠났듯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말이죠. 다 내려놓고 비워내면 주님의 빛은 순간의 번쩍임만으로 우리 삶을 다시 가득 채웁니다. 제자들은 스승님의 죽음에 절망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유령을 보는 줄 알고 무서워 떨었습니다. 그들의 지난 깨달음과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차근차근 다시 말씀을 풀이해주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루카 24,45) 주님의 두드림으로 열린 마음은 우리의 편협한 생각들을 비워내고, 비워진 그 자리에 하느님 말씀이 쌓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주시어 보이는 것 너머의 신비로 이끌어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루카 24, 36)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평화는
하느님의
뜻이다.

부활은
평화에
동참하는
평화의
삶이다.

하느님의
힘은 참된
평화로
드러난다.

평화는
평화가 필요한
우리를
향해 있다.

평화는
십자가를
되찾아준다.

십자가의
수난으로
일구어낸
참사랑이다.

십자가 없는
평화는
가짜이다.

평화는
우리의
가면을
벗겨낸다.

십자가의
여정이
평화의
여정이다.

평화는
묶여있던
이 모든 것을
풀어준다.

평화는
하느님의
현존이다.

예수님
삶 자체가
살아있는
평화
그자체이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평화를 이루는
삶이 참된
사랑의 삶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함께하는
평화이다.

평화는
새로운
삶이다.

삶으로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부활의 삶은
평화의 삶이다.

십자가와
부활을
하나로
이어주는
평화가
우리들
가운데 있다.

그 평화를
기쁘게 나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