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61,9-11
내 백성의 9 후손은 민족들 사이에,
내 백성의 자손은 겨레들 가운데에 널리 알려져
그들을 보는 자들은 모두 그들이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알게 되리라.
10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11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51
41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42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43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44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45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46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
47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
48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49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50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51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애타게 찾은 부모에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신다(복음).
☆☆☆☆☆☆☆☆☆☆☆☆☆☆☆☆☆☆☆☆☆☆☆☆☆☆☆☆☆☆☆☆☆☆☆☆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민족들에게 널리 알려져, 주님께 복 받은 종족임을 모두 알게 되리라고 예언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 되던 해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가 율법 교사들과 토론을 하신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아낸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한다(복음).
☆☆☆☆☆☆☆☆☆☆☆☆☆☆☆☆☆☆☆☆☆☆☆☆☆☆☆☆☆☆☆☆☆☆☆☆
이사야 예언자는 구원의 기쁜 소식을 노래한다. 이사야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그의 영혼은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한다. 그분께서 구원과 의로움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모든 민족들 앞에 의로움과 찬미가 솟아나게 하시리라(제1독서). 예수님의 소년 시절의 모습이다.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토론하고 있는 소년 예수님을 부모가 황급히 찾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느냐고 반문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며 지내셨고, 마리아께서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다(복음).
오늘의 묵상
해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으로 향하던 성가정의 발걸음은 오늘 복음에 나오는 동사 “가곤 하였다.”(루카 2,41)가 암시하듯 되풀이되는 경건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던 해에 이 익숙한 리듬은 새로운 전환을 맞게 됩니다. 유다 전통에서 ‘성인의 책임’을 묻는 나이에 가까운 열두 살에 예수님께서는 유다 전통의 익숙함을 끊고 성전에 머물기를 ‘선택’하십니다. 이는 부모의 실수라기보다는, 성년의 문턱에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드러내시고자 하신 예수님의 결단이지요.
부모가 예수님을 찾아 헤맨 ‘사흘’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이의 시간인 ‘사흘’을 미리 보여 줍니다. 성전의 율법 교사들 사이에 앉아 계신 소년 예수님의 모습은 뒷날 수난 직전 성전에서 펼쳐질 율법 교사들과의 논쟁을 미리 보여 주며, 주님 수난의 큰 슬픔을 마주하게 될 독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듯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질문은 슬픔이나 고통 너머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이 질문은 애타게 아들을 찾던 부모에게는 차갑지만, 믿는 모든 이에게는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혈연을 넘어 신성한 하느님의 자리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이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신앙의 원형을 보여 줍니다.결국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그 ‘사흘’의 시간을 통하여 저만치 멀리 계신 하느님께서 우리 삶 한가운데로 오셨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는지요.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는 다시 나자렛으로 내려가시어 부모에게 순종하시며 일상을 보내십니다. 가장 신성한 순간과 가장 평범한 순종이 교차하는 지점, 그곳이 바로 우리의 삶이고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하느님 현존의 자리입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오늘 교회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념합니다. 예수님의 성심이 우리의 죄로 상처 입으신 마음과 인간에 대한 무한하신 사랑을 뜻한다면, 성모님의 성심은 하느님을 향한 순명과 인간을 향한 깊은 사랑을 뜻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의지와 온전히 일치하시고, 그리스도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시면서, 인류의 구원을 간절히 바라십니다.
성모님의 성심은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세상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닮은 사랑은 자녀를 향한 어머니의 사랑일 것입니다. 자녀를 위해서 조건 없이 무엇이든 다 내주는 그 마음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닮았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어머니로서 온 삶을 아드님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치셨고, 지금은 그 사랑으로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을 보살피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께 풍부한 은총을 청하여 얻어 주시기에 우리는 삶의 어려움이 닥칠 때, 성모님의 모성에 호소하며 전구를 청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육체적, 심리적, 정서적, 지적인 면에서 제대로 잘 성장하려면 아버지와 더불어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신앙 안에서도 모든 인간은 모성적인 사랑과 돌봄이 필요합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저마다 아버지요 어머니이신 하느님의 부성적이고 모성적인 사랑에 자신을 맡기지만, 성모님의 모성적 돌봄을 통한 전구도 청해야 합니다. 그러한 사랑의 체험이 우리 신앙을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렇게 성모님의 돌봄을 체험하면서, 우리는 성모님의 인류를 향한 거룩한 마음을 닮아 갈 것입니다. 세상을, 특히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돌보시고 그들을 위하여 밤낮으로 전구하시는 성모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
어제 우리가 예수님의 성심을 기억하였다면, 오늘은 그분의 어머니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기억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성심에 당신의 마음을 동화시키시려고 일생을 노력하신 분이십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한 잉태 소식! 이해하기도 믿기도 어려운 소식이었지만, 성모님께서는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1,38).
오늘 복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두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성전에 남아 율법 학자들과 토론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들을 찾은 어머니는 속상함을 토로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성모님께서는 아마도 “잘못하였습니다.” 하는 아들의 대답을 기대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어리둥절해하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처럼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탄생과 유년 시절의 사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합니다. 이해하지 못하셨던 것은 성모님께서도 마찬가지셨습니다.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이 모든 신비를 마음속 깊이 간직하십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성모님께서 보여 주신 모습은 예수 성심에 동화되고 성화되기를 열망하는 모든 신앙인에게 요구되는 자세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마음 바깥으로 밀쳐 내기보다 성모님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 마음도 예수님의 성심에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여 봅니다.
성모님의 성심이 받아들임에서 시작되었듯이, 우리 마음의 성화도 받아들임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을, 우리 주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안에는 좋고 쉬운 것만 있지 않고, 싫고 어려운 것도 있기 마련입니다. 특히 인간 관계가 그러합니다. ‘저 사람만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겨지는 이웃이 어쩌면 우리를 성화로 이끄는 신비일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받아들임으로써 우리 마음이 사랑의 꽃을 피우고 그리스도의 향기를 퍼뜨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정천 사도 요한 신부)
☆☆☆☆☆☆☆☆☆☆☆☆☆☆☆☆☆☆☆☆☆☆☆☆☆☆☆☆☆☆☆☆☆☆☆☆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위해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을 잉태하실 것이라는 가브리엘 천사의 말에,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에 기꺼이 따르십니다. 어머니의 모범적 모습은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가시는 그 길에 소리 없이 협력하심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서 차지하는 어머니의 큰 역할에 비하여, 복음서에 어머니의 말씀은 거의 전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중요한 순간에 어머니께서는 ‘곰곰이 생각하시고’(루카 1,29 참조),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셨다’(루카 2,19; 2,51 참조)고 하십니다. 이렇듯 성모님께서는 좋은 일이든, 섭섭한 일이든, 일희일비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시고 곰곰이 되새기신 성모님을 통해서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에 품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품어 내신 성모님의 마음을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이라 부르고 기억합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신앙의 모범으로 바라보며, ‘천주의 성모님’, ‘하늘의 여왕’, ‘지극히 거룩하신 동정녀’ 등 영광스러운 호칭을 드립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러움을 가능하게 하셨던 성모님의 밑바탕에는, 말씀을 곰곰이 생각하시고 마음속에 간직하시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말씀의 육화는 이러한 성모님의 마음으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성모님을 우리 신앙의 모범으로 삼고 공경합니다. 입으로만 외치는 공경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어머니께서 지니셨던 ‘곰곰이 생각하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마음을 닮고자 노력한다면, 티 없이 깨끗하신 어머니의 마음을 기념하는 좋은 길이 될 것입니다.(박형순 바오로 신부)
☆☆☆☆☆☆☆☆☆☆☆☆☆☆☆☆☆☆☆☆☆☆☆☆☆☆☆☆☆☆☆☆☆☆☆☆
사제품을 받고 나니 제 어머니의 귀가 세 배는 커지신 것 같고, 아버지의 시력도 두 배는 좋아지신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본당에서 어떤 강론을 하였으며 요즘에는 무슨 일로 바쁜지,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았는지 속속들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또 아들 신부에게 누가 될까 봐 행동과 말도 늘 조심하십니다. 한번은 수도자나 성직자들이 주로 바치는 성무일도를 어떻게 바치는지를 물어보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부르심을 받아 사제가 된 것이지만 부모님도 덩달아 그 삶의 일부를 떠안고 계시는 듯합니다.
사제의 부모가 살아가야 하는 이러한 숙명과도 같은 삶을 생각해 보면, 왜 교회가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날 성모님을 기억하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모님 역시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늘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시고 예수님의 길에 함께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런 성모님의 생애를 상징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잃어버리십니다. 성모님께서 세상 사람들의 길을 따라 걸으시는 동안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러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을 찾아나서십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을 때만이 삶의 의미가 있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머무르셔야 할 자리에 함께 머무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마치 사제의 부모가 사제가 머물러야 할 하느님의 현존에 함께하듯이 말입니다.
성모님께서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시어 자식을 바라보며 사셨기에 예수님의 길을 함께 걷게 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께서는 그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닮은 분이 되셨습니다. (한재호 루카 신부)
☆☆☆☆☆☆☆☆☆☆☆☆☆☆☆☆☆☆☆☆☆☆☆☆☆☆☆☆☆☆☆☆☆☆☆☆
성모님께서는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영혼의 표상입니다. 구원의 옷과 의로움의 겉옷을 입고 계시는 그분의 모습은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포르투갈의 파티마에서 발현하신 성모님의 모습은 이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시던 해에 성모님께서는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시고 나자렛으로 하룻길을 돌아가시다가 소년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애를 태우며 찾아 나서셨습니다. 요셉 성인과 친척들 가운데 있으리라고 찾아 나서신 성모님께서는 사흘을 헤매신 뒤에야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과 토론하시는 예수님을 찾아내실 수 있었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께서는 원망과 걱정, 반가움으로 소년 예수님께 말씀하십니다.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소년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성모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속에 이 말을 깊이 간직하며 새기십니다. 예수님의 정체와 구원의 섭리를 성모님의 티 없이 맑은 마음은 알아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번민을 잘 알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죄인의 회개와 구원을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평생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며 구원의 어머니 자리에 계신 그분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끊임없이 전구하고 계십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보호하시고 예수님께 인도하십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
가톨릭 신앙에서 성모님은 모든 신심의 중심에 서 계십니다. 하지만 천주교 신자라면 한번쯤은 성모님을 무시하려는 개신교 신자들을 만나 당혹감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지를 그들에게 납득시키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외로 답은 간단합니다. 복음서를 통틀어서 예수님의 인격을 가장 가깝게 느끼고 사신 분이 누구였는지 물으면 됩니다.
성모님은 인간이 하느님의 신비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 주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잃은 아들 예수를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고, 다소 퉁명스러운 예수님의 대답을 듣습니다. 이럴 때 보통의 우리라면 적지 않게 당혹했을 겁니다. 하지만 성모님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으면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예측하지 못했거나,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당혹감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와는 달랐습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신비를 깨달으려면 우리가 분주하게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멈추어 돌아보는 묵상과 관상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 주신 분입니다. 복음서는 성모님에 대해 아주 짧은 이야기만 남겨 두었지만, 사실 성모님의 모습 속에는 하느님의 섭리를 들여다볼 수 있는 티 없이 맑은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 모습, 하느님의 뜻을 찾아 평생을 기다리며 사신 분. 그런 분을 공경한다는 것은 우리가 따라야 할 가장 큰 신앙의 모범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
교회는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지냅니다. 이 신심은 1917년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발현하신 성모님을 통하여 오늘의 우리에게 더욱 절실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은 우리에게 더없는 위로입니다.
오늘 복음이 알려 주듯, 성모 성심은 예수님에 대한 모든 일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시는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은 누구보다도 우리의 죄와 고통과 번민을 아시고 그것을 품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울고, 기대고, 그리고 다시 구원의 빛을 향할 용기를 얻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을 특별히 공경하는 오늘, 우리는 무엇보다 우리의 무너진 마음을 바라보고 기억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기 자신의 우울한 마음으로 절망에 빠진 많은 이를 성모님의 마음에 맡겨 드리고 싶습니다.
은사 신부님이 번역한 로마노 과르디니 신부의 『우울한 마음의 의미』라는 책을 새 신부 시절에 읽은 적이 있습니다. 특히 ‘우울한 마음’이라는 말이 긴 여운을 주었습니다. 은사 신부님은 사제로서 사람들을 만나며 얼마나 많은 ‘선량한 사람들, 아주 좋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우울한 마음으로 신음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이 겪는 ‘남몰래 아파하는 시간들이 얼마나 길고 불안하고 고독한지’를 안타깝게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기를 바라며 이 책을 번역하였다고 밝힙니다.
역자 신부님의 이러한 말씀에 그때는 큰 공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제로 살아가면서, 또 이제 본당 사목자로 지내면서, 무너진 마음을 안고 사는 많은 사람에게서 우울한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를 절감하고 있습니다.
과 르디니 신부는 우울한 마음에 위대한 것이 깃들 수 있다고 말합니다. 우울함은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동경, 누구보다 더 고귀한 사랑의 동경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울한 마음, 무너진 마음이 일어서려면 사람의 노력만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이 스며들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는 오늘, 성모님의 옷자락을 잡으며 그분의 전구를 간절히 청합니다.
☆☆☆☆☆☆☆☆☆☆☆☆☆☆☆☆☆☆☆☆☆☆☆☆☆☆☆☆☆☆☆☆☆☆☆☆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마리아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범이 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성모님을 통하여 시작되었고, 성모님께서는 이 사업에 협력자가 되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믿음과 사랑이 충만하시어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이시고, 말씀대로 생활로써 실천하셨습니다. 마리아께서 거룩하신 어머니〔聖母〕로 불리게 되신 것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낳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시고, 그대로 실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성모님을 본받아 깨끗하고 온순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에 따라 충실히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세례 받은 모든 신자는 온전히 주님을 믿고, 그분의 뜻에 충실하고, 그분만이 어지러운 세상에 참행복과 평화를 주실 수 있는 분이심을 온몸으로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성모님께서는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시고, 세상 사람들에게 선포하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성모님은 모든 신앙인의 거울이십니다.
☆☆☆☆☆☆☆☆☆☆☆☆☆☆☆☆☆☆☆☆☆☆☆☆☆☆☆☆☆☆☆☆☆☆☆☆
안젤라 씨는 신혼 초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남편의 잦은 외박에 신경이 예민해졌던 겁니다. 직장 때문인 줄은 알고 있지만 별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어느 날 무심코 성당에 갔다가 마당에 있는 성모상 앞에서 엄청 화를 냅니다. ‘어찌 이럴 수 있습니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겁니까?’ 남편이 오지 않는 날이면 늘 그렇게 성모상에 화풀이를 했습니다. 설마, 성모님께서 듣는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소리를 듣습니다. 늘 그 자리에 서 있던 성모상에서 “참아라!” 하는 소리들 들은 것입니다.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며 살아 계시는 성모님을 그 순간 느꼈다고 합니다. 하지만 어찌 그 한 사람뿐일는지요? 성모님을 통해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자신만의 이야기이기에 입을 닫고 있을 뿐입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상대를 탓하지 않는 어머니의 목소리입니다.성모님의 마음을 표현하는 몇 안 되는 성경 구절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이렇듯 열려 있습니다. 어른이 되어 부모 곁을 떠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언제나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성모님의 마음도 그렇습니다. 믿는 이들이 희망으로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모님께 나아가 평화를 안고 돌아갔는지 모릅니다.
☆☆☆☆☆☆☆☆☆☆☆☆☆☆☆☆☆☆☆☆☆☆☆☆☆☆☆☆☆☆☆☆☆☆☆☆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그러나 소년 예수님의 답변은 의외였습니다.“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미안하다는 말도 상냥한 어투도 아니었습니다.
부모는 그의 말을 못 알아들었다고 하는데, 정말 그랬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듣는데 그분들이 못 알아들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의 행동은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했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소년 예수님은 왜 부모가 찾는 줄 알면서도 성전에 남아 토론을 벌였을까요?
세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 개성이 강한 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의 뜻을 공통분모로 하여 서로 일치하며 살았습니다. 서로가 충돌할 때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자신의 뜻을 접었습니다. 그러기에 성가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가족 안에서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럴 때 질책하기보다는 그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으려는 자세가 앞서야 합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는 가운데 성가정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 아닐는지요.
“인간은 평생 자기 뇌의 10%도 쓰지 못한다.”
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맞는 말일까요? 학창 시절에 선생님께서 이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아인슈타인은 자기 뇌의 15%를 써서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뇌의 1%만 더 써도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지요.
아마 지금도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알츠하이머의 경우 손상하는 뇌가 10~20%에 불과합니다. 그렇다면 정상적인 뇌의 부분이 80~90%나 되는데 정상적인 활동이 불가능한 것일까요?
사실 모든 사람은 자기 뇌의 100%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만약 뇌의 10% 정도만 사용하게 된다면 생존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의 말은 잘못입니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잠재력입니다. 자기가 가진 잠재력의 10%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뇌를 100% 활용하고 있습니다.
잠재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잠재력은 뇌의 활동량과 상관없습니다.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노력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은 얼마나 쓰고 있을까요? 한 10%는 쓰고 있을까요? 하느님의 뜻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뜻을 실천하는 것이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잠재력일 것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순명하고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철저히 동참하신 성모님의 순결하고 거룩한 마음을 묵상하는 날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발견합니다.
소년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가 사흘 만에 다시 찾습니다. 성모님께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라고 말씀하시자,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부모보다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그분의 뜻이 우선임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성모님께서는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순명하십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라고 복음은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성모님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 앞에서도 하느님을 애타게 찾고, 그분의 신비를 함부로 판단하지 않으며, 삶의 모든 사건을 기도로 마음속에 간직하는 거룩한 마음을 높여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완벽한 협력자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슬픔은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며, 행복은 하느님을 향해 열린 시선입니다. 회개는 거창한 것이 아니라 그저 시선을 아래에서 위로 옮기는 일, 눈길을 살짝 들어 올리는 일이면 충분합니다(성 카를로 아쿠티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린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예수님을 잃어버린 뒤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 길은 걱정과 근심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아버지의 집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명을 드러내는 선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정에만 머무는 아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신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마리아는 더 깊은 고통을 겪습니다. 예수님이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지만,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비난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미쳤다.”라는 소문까지 듣게 됩니다. 걱정하는 마음으로 찾아갔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 나의 어머니이고 형제입니다.” 이 말씀 또한 마리아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 말씀도 가슴에 품었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간직하고, 아파도 받아들이는 것이 성모님의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합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드님이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것을 인간적으로는 원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기에 그 길을 받아들이셨고,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아드님의 고통을 지켜보며, 그 모든 것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마음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으로 채워진,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모님께서는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이후, 여러 발현을 통해 우리에게 신앙의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다섯 가지 당부가 있습니다. 첫째, 묵주기도를 정성껏 바치라는 것입니다. 묵주기도는 단순한 반복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탄생, 공생활, 수난, 부활을 묵상합니다. 다시 말해서 묵주기도는 예수님의 삶을 함께 걸어가는 기도입니다. 우리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고통을 예수님의 삶과 연결하는 기도입니다. 그래서 묵주기도는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의 마음으로 바꾸어 줍니다. 둘째, 성경을 자주 읽으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식은 자주 듣고,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이 들으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말씀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생각을 배우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 고백성사를 자주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알게 모르게 죄를 짓습니다. 그 죄가 쌓이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집니다. 고백성사는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자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는 자리입니다. 한 달에 한 번의 고백성사는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고, 다시 하느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은총의 통로입니다. 넷째, 미사에 충실히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주일 미사는 물론이고, 가능하다면 평일 미사에도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미사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에 참여하는 가장 거룩한 시간입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말씀을 듣고, 성체를 모시며, 예수님과 하나가 됩니다. 우리의 신앙은 미사를 중심으로 살아갈 때 더욱 깊어집니다. 다섯째, 단식과 절제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끊임없이 더 많이 가지라고, 더 많이 누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 반대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단식은 단순히 음식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욕망을 다스리는 훈련입니다. 절제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이 아닌 것들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더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다섯 가지는 특별한 신앙인의 길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이 걸어야 할 기본적인 길입니다. 그리고 이 길은 결국 성모님의 마음, 티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우리를 이끌어 줍니다.
세상의 어머니들은 자녀의 건강과 성공을 바랍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그것을 넘어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아드님을 놓지 않으셨고, 끝까지 함께하셨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의 이 마음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믿고, 고통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선택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하루, 성모님의 다섯 가지 당부를 마음에 품고 실천하면 좋겠습니다. 작은 실천이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우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이끌어 줄 것입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어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마음속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비운
마음속에
신비 넘치네
열린
마음속에
믿음 스미네
찾는
마음속에
희망 샘솟네
고운
마음속에
사랑 영그네
참된
마음속에
진리 머무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파스카축제 때 예루살렘에서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사흘만에 성전에서 찾은 대목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하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 중요한 것이 성모님의 모습처럼 하느님의 뜻을 곰곰히 생각하고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하느님의 뜻을 무심히 지나치기도하고 때로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그 이외의 것들을 곰곰히 생각하고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곤 한다는 것입니다.
잔잔한 호수에 온 세상이 드리워지듯이 마음을 전잔히 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의 참된 구원의 빛이 드리워집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성모님의 모습처럼 하느님의 뜻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성모 성심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믿음의 자리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나뉘지 않은 오로지
깨끗한 마음입니다.
참된 지혜는
깨끗한 마음 안에
깊이 간직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이유는
성모님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을
가장 닮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가장 깊이 품고
세상에 전해 준 마음이
바로 성모 성심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성모 성심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을 향해
온전히 열려 있는
인간 마음의
완성된 모습입니다.
그 어떤 순간에도
절망에 머물지 않고
고통을 사랑과 희망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원망보다 감사로,
조급함보다 기다림으로,
집착보다 내어맡김으로
살아가는 삶어
성모 성심의 삶입니다.
사랑으로 실천하는
맑은 마음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계획이나 욕심을
결코 앞세우지 않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순명함으로써
가장 큰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으로 상처를 품으시는
하느님으로 가득 찬
마음이십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는
마음에서
모든 관계는 새로워집니다.
성모 성심은
하느님의 말씀을 익혀 가는
믿음의 밭입니다.
성모 성심과 함께
신뢰와 희망의 길을
걸어갑시다.
배우자와의 잦은 다툼으로 이혼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지금 얼마나 힘든지를 친한 친구에게 말했는데, 그 친구가 집단 상담을 권유합니다. 그곳에 한 다섯 번만 나가보고서 결정하라는 것이었지요.
집단 상담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모두 자기의 어려움을 인정해 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그래서 이혼할 수밖에 없음을 맞장구 쳐 줄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반응은 자기 생각과 달랐습니다. 그들 대부분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이유로도 이혼해요? 자매님이 더 잘못했네요.”
뜻밖의 대답에 자기를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자기 배우자에게 문제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더 문제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자기 이야기만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말을 듣는 상대방은 이야기의 확장이 싫어서 그냥 맞장구만 쳐 줄 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함께 이야기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보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야 상대를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마음을 갖기 위해 우리가 모범을 삼아야 하는 분이 있습니다. 결코 자기 생각을 내세우지 않으셨던 분,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은 관습에 따라 파스카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고 다시 돌아가다가 당시 열두 살이던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지요. 그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 율법 교사들과 토론하고 있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 보세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마음이 얼마나 새카맣게 변했을까요?
더군다나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날 만도 합니다. 그런데 성모님께서는 자기 애타는 마음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이에 대해 복음은 이렇게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나 중심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나만 옳고 너는 틀렸다는 마음을 품는 순간, 상대의 뜻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물론 내 안에서 활동하시는 주님의 뜻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그 마음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오늘의 명언: 나에게 두 다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었다(제니퍼 브리커).
성모님과 예수님 사이에 이루어진 특별한 소통 방식!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파스카 축제는 다른 그 어떤 축제나 명절보다 의미가 큰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께서 자신들을 파라오의 압제에서 벗어나게 해 주신 것에 대해 기억하고, 마음에 간직했습니다. 깊이 감사드리며 세세대대로 축제를 거행했습니다.
따라서 파스카 축제가 다가오면 운신이 가능한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축제를 지내러 이스라엘로 올라갔습니다. 이러한 관습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축제 전후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고, 그날이 오면 가정마다 파스카 음식을 차리고 예식을 거행하고 있습니다.
전통과 율법에 충실했던 모범적인 유다교 신앙인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도 파스카 축제가 다가오면 매년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다녀오곤 했습니다. 소년 예수님께서 12살되던 해 파스카 축제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해도 성가정 구성원들은 어김없이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순례 기간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작지만 꽤 난감한 사건이 하나 발생합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때, 소년 예수님이나 마리아 요셉이나 양측 다 실수랄까 과실을 저질렀습니다.
12살 소년 예수님께서 축제가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홀로 남아버린 것입니다.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말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의 책임도 만만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부모로서 귀가길에 인원 점검을 했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는 소년 예수님께서 또래들과 어울려 잘 돌아오겠지, 하고 나자렛을 향한 하룻길을 걸어와 버린 것입니다. 나중에야 그 사실을 인지한 마리아와 요셉은 당혹해하며 사흘내내 아들 예수님을 찾아 사방팔방을 헤매다닌 것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갖은 걱정과 후회와 탄식 끝에 사흘만에 아들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에서 찾아냈습니다. 놀랍게도 소년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둘째가면 서러워할 율법학자들 사이에 앉아 너무나도 태연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놀라기도 하고, 당혹스럽기도 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기도 했던 마리아는 애써 분노를 내리누르며 아들 예수님께 말을 건네고, 소년 예수님도 거기에 대한 대답을 하시는데, 이 부분이 오늘날 우리 가정의 대화와 소통 방식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소년 예수님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무럭무럭 성장한 예수님께서 12살 정도 되니, 슬슬 메시아성이 드러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들 예수님에게 건네는 말 한마디도 늘 조심스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의 양육자로서 책임감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어차피 메시아시니, 알아서 하시겠지? 당신이 뭐라고 말씀을 하시든, 다 맞는 말일테니, 내가 이래라 저래라 할 필요가 있겠어?’라고 단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소년 예수님의 어머니로서, 그의 영적 인간적 메시아적 성장을 책임진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서 하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입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 48)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정말이지 특별한 한마디 말씀을 던지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 49)
보십시오. 소년 예수님은 슬슬 자신의 메시아성을 드러내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머니에게도 넌지시, 이제 제가 부여받은 인류 구원이라는 사명 수행을 위해 떠나갈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표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반응에 마리아께서 보인 태도를 보십시오.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조금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그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였습니다. 침묵과 기도 속에 말씀에 담긴 참된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셨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입장에서 정말이지 억울하기도 하고 이해하기 힘든 소년 예수님 12살 체험이었지만, 예수님의 태도를 또 한번 보십시오. 하실 말씀을 하셨지만, 더 이상 과하게 어머니를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소년 예수님께서는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또 다시 20년 세월을 침묵과 기도 속에 살아가셨습니다.
마리아와 소년 예수님 사이에 오간 대화와 소통 방식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얼마나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지 모릅니다. 때로 분노가 일기도 했겠지만, 결코 분노하지 않으면서 편안하게 하고픈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성모님은 상호 동반자로서, 상호 교육자로서 두 분 사이에 언제나 넉넉한 완충 지대를 건설했습니다. 두 분 사이에 아버지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심을 확신하며, 매사에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좋은 나무에는 좋은 열매가 열리고, 나쁜 나무에는 나쁜 열매가 열린다.” 비슷한 말씀으로 밀과 가라지의 비유가 있습니다. 농부가 밭에 밀을 심었는데 밀밭에 누군가 가라지를 심었다고 합니다. 농부는 밀과 가라지를 구분하지 않고 키운다고 합니다. 가라지를 뽑으려다 밀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추수의 때가 되면 가라지는 버려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숨’을 불어 넣어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 하느님의 숨을 받은 사람은 분명 좋은 나무입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은 사람은 분명 알곡을 맺는 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서 좋은 나무인 하느님의 숨을 나쁜 나무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유의지에 따라서 밀인 하느님의 숨을 가라지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반도체와 같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은총의 불이 켜집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총의 불이 꺼집니다.
아직은 그 실체가 잘 규명되지 않지만, 미래의 세계를 주도할 수 있는 학문 중의 하나가 ‘양자역학’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는 물질은 어느 한 공간과 시간에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물질이 존재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합니다. 관찰자가 바라보면 물질이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시선을 돌리면 물질이 사라지기도 합니다. 양자컴퓨터와 인공지능이 만나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세계를 볼지도 모릅니다. 사람의 마음은 물질로 계량화할 수 없습니다. 무게를 잴 수도 없고, 부피를 알 수도 없고, 크기를 측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이 사람을 좋은 나무로 만들기도 하고, 사람을 나쁜 나무로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음이 알곡을 맺는 밀이 되기도 하고, 쭉정이로 버려지는 가라지가 되기도 합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 상황이 바뀌기도 합니다. 긍정의 마음을 가지면 극한의 환경에서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부정의 마음을 가지면 풍족한 환경에서도 근심의 어둠이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제 마음을 잘 드러내는 말이 있습니다. ‘잘했네! 잘될 거야!’ 저는 입버릇처럼 하는 말인데 그렇게 하면 엉킨 실타래가 풀리듯이 어려운 문제들이 해소되곤 했습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 3번씩이나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혼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니면 평범하게 직장을 구하고, 좋은 여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셨을까요?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면서 살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셨을까요? 예전에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 있던 친구들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데모했고, 데모하는 과정에서 형사들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수배자가 되었고, 감옥에도 가게 되었고, 학교에서 제적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직장은 구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이 그렇게 바랐던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많은 학생은 아직도 고문의 후유증을 겪고 있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식의 건강, 성공, 출세, 결혼을 바랄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어떤 아들은 세상 것들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일,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였던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억울하게 비참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아드님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으신 마음이라고 말합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복되시고 영화로우신 동정녀여!’
<지금은 마음으로 당신을 품습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지금은
그럴 수밖에
없기에
마음으로만
당신을
품습니다
언젠가
이 마음이 곧
내가 되리라 믿기에
마음으로만
품을 수밖에 없음에
슬퍼하지 않고
마음으로나마
품을 수 있음에
고마움과 기쁨으로
살며시
한걸음 뒤로
물러서서
지금은
마음으로 당신을
품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에서 소년 예수님을 잃고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찾게 됩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부모에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고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부모가 사흘 만에 자식을 찾았는데 그렇게 찾은 부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어머니 마리아는 조금은 인간적으로 야속하게 느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던 것입니다
마리아가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는 의미는 곧 예수님을 통하여 벌어지게 되는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재차 되새기며 받아 들이셨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사다난하게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집니다. 거기에는 인간적인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들이 하느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부모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으셨던 것처럼 언제나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모든 의미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우리 삶의 참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하느님의 어머니, 우리 어머니
류지인 야고보 신부님
일행 중에 소년 예수가 있으려니 하는 마음으로 걸었던 성모님의 하룻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아들 예수를 찾아내기까지 벙어리 냉가슴처럼 사흘이나 침묵이 흘렀습니다.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칭호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는 성모님께서 침묵을 깨셨던 단 한 번의 사건을 이렇게 적습니다.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루카 2,48)라고 물으며 애써 찾은 안도감도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라는 적반하장격의 반문 앞에서 성모님께서는 다시 깊은 침묵에 빠져드십니다. 이렇게 구세주 예수님의 공생활은 성모님의 완전한 침묵 속 순명으로 표현됩니다. 모든 뜻을 이해했기 때문에 침묵이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알 수 없기에 눈 감고 고요를 지켰던 것도 아닙니다. 성모님께서 지니셨던 침묵은 이성의 이해를 초월한 하느님 신비를 마주하는 인간 자세의 모범입니다. 가늠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을 신앙의 영역으로 맡겨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리아는 하느님을 따르는 공동체 앞에서 덕행의 모범으로 하늘에 올림을 받으셨고, 아드님께 그러하셨듯 말없이 하늘에서 기도하시며 당신의 자녀들을 도와주고 계십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는 오늘 우리의 ‘변호자, 원조자, 협조가, 중개자’가 되셨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함승수 신부님
어제 예수성심 대축일에 이어지는 오늘은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따르는 성모님의 티 없이 깨끗한 마음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이 날을 기념하면서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 속에 계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아울러 주님께서 마리아의 마음 안에 머무르도록 섭리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우리 자신도 주님의 가르침과 뜻을 따르는 성실한 생활로 그분께서 내 안에 머무르시는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이끌어주시라고 성모님께 전구를 청하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하는 복음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잃어버리셨다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다시 찾으시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일련의 과정들이 신앙생활 하면서 주님의 현존과 뜻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다가 신앙의 기본인 기도와 순명으로 되돌아가 다시금 주님을 찾고 힘을 얻는 우리 모습과도 닮아 있습니다. 몇 가지 특징적인 부분들을 짚어봅니다. 첫째, 성모님이 예수님을 잃어버리신 것은 그분께서 당신과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 일에 정신이 팔려서는 그저 지레짐작으로 ‘어딘가 계시겠지’라는 안일한 마음을 품었던 겁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는 그 기본을 망각한 채 하느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들에 더 신경을 쓰기에, 그러면서도 주님께서 어딘가에 계시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그런 내 마음상태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기에 주님을 잃어버리는 것이지요.
둘째, 성모님이 예수님을 다시 찾으신 곳은 ‘성전’ 안 입니다. 꼬박 사흘 동안 예루살렘 곳곳을 다 찾아다니셨지만, 그곳엔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셔야 할 곳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현존과 사랑으로 충만한 그분의 집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성모님은 예수님을 성전에서 다시 찾으신 후에야 그 점을 상기하셨지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살아가지만 우리가 마음으로 머물러야 할 곳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가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과 섭리 안입니다. 뭔가 이득될 것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세상 속을 헤매는 중에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 없습니다. 성전 안에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주님의 현존과 뜻에 집중할 때 비로소 그분께서 나와 함께 계심을 온전히 느낄 수 있게 되지요.
셋째, 성모님은 당신을 걱정시키고 고생시킨 아들 예수님을 무턱대고 비난하지 않고 먼저 그렇게 하신 이유와 뜻을 물으셨습니다. 또한 그에 대한 예수님의 설명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셨음에도 기꺼이 수용하고 존중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그래야만 하지요. 팍팍한 세상살이에 치이다보면, 여러가지 고통과 시련들을 겪느라 지치다보면, 나도 모르게 주님께 대한 원망과 서운함이 튀어나오기 마련이지만, 그것들을 입 밖으로 내뱉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와 뜻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알게 된 뜻을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렵더라도 그분 뜻이니 일단 받아들이고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되새김질을 한참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 ‘아 그래서 그러셨구나’라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이 오지요. 그리고 그 때 주님께 대한 나의 믿음이 한층 깊어지고 단단해집니다. 그러니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삶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과 섭리를 믿음으로 읽어내고 순명으로 따라야겠습니다.
김준수 신부님
“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 2,48~51)
자식을 낳고 키우면서 부모는 자식을 통해서 자신들의 과거를 바라보게 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를 잊어버리기에 자녀들의 성장 과정에서 자녀들과 갈등을 겪게 됩니다. 자녀들이 일정한 나이(=사춘기)가 되면 ‘자의식’이 생겨나면서부터 부모의 말에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기 시작하는데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부모는 막무가내로 부모의 말에, 말대꾸한다, 고 야단을 칩니다.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이는 부모에 대한 불순종이나 말대꾸가 아니라 어엿한 한 사람으로 깨어나는 과정에서 단지 걸러 지지 않은 채(=이성적인 사고가 정립되지 않음)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곧 엄마의 모태에서 일차적으로 육신적 탯줄을 끊고 태어난 자녀가, 이제 성장해서 이차적인 심리적 탯줄을 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성장의 아픔이 동반하는 민감한 시기입니다. 이미 경험한 부모들이기에 따뜻하게 지지해 주고 격려해 주면서 성장통을 함께 나누기(=친구가 되어주기와 대화하기)보다는 야단이나 핀잔만 한다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과 사이에 간격과 간극 만을 넓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성장에 따른 부모와 자녀 사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년 예수의 언행은 이제 어엿한 한 사람으로서 가족들과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이며, 자기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깨닫게 되었다는 선언과도 같습니다. 물론 겉으론 당황스럽고 혼란스럽게 보이지만 그림의 내면은 아주 간단합니다. 이젠 예수는 더 이상의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당당하게 자기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는 성모님의 표현에는 아직도 자기 아들이 어엿한 한 사람이라기보단 어린아이로 자신들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하는 사고 의식이 남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반문은 어머니의 의도에 대한 반항의 표현이기보다 분리의 선언이고 성인이 되었음을 통보하는 것이고 선언의 성격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라는 말의 이면에는 “당신들이 제게 삶의 본으로 보여 주었고 이제 때가 되어 저 역시도 제가 있어야 할 곳에 머물고자 하는데, 아직도 이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계십니까.”라는 응답이라고 봅니다.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고 그런 맥락에서 예수님은 오히려 자신의 어머니에게 반문과 함께 그 진정한 해답을 넘기신 것입니다. 이는 곧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이라는 표현’처럼 예수님은 이제 부모님으로부터 가르침 받았던 신앙 교육을 이해했고, 그 깨달은 바를 때가 돼서 실행한 것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이 말은 예수님께서 12살 때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어머니 마리아도 내심 놀라고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아니 벌써 내 아들이 이렇게 어른이 다 되었나. 더 이상 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다, 는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따른 당황스러움! 예상하셨겠지만 너무 빨리 그때가 온 것에 대한 당황스러움, 이것이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자식이 부모의 품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분리의 아픔입니다. 홀로서기의 순간입니다. 이젠 예수님은 더 이상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실 자식은 부모의 소유가 아닙니다. 자식은 하느님의 선물이기에 때가 되면 자식은 자신이 태어날 때부터 불린 소명을 성취하기 위해 부모 곁을 떠나야 합니다. 자식은 하느님의 것이기에 하느님께 봉헌되어야 하며, 이런 점에서 참된 부모의 역할을 본으로 보여 주신 분들이 바로 아브라함과 성모님이십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모범처럼 자식의 말을 따지지도 말고 추궁하지도 말고 단지 이 모든 일을 묵묵히 마음에 간직하여 그때를 기다리는 자세가 필요하리라 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순례하신 성모님과 요셉처럼 세상의 모든 부모는 자식들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는 순례의 길에 있습니다. 그 길에서 자녀들을 잃고 방황할 때, 그리고 자녀들을 다시 찾을 때, 자녀들이 우선 하느님의 뜻인 참된 자신이 되어가고, 자기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느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정향定向할 수 있도록 함께 머물러 주고, 함께 아파하면서 그때가 될 때까지 늘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기다려 주어야 하리라 봅니다. 분리의 아픔이 곧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때부터 어머니 마리아의 마음은 침묵 가운데 아들 예수와 동행하면서 어머니인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살아가도록 기도하고 마침내 십자가 밑에 서 계신 그 순간이 바로 성심이었습니다.
제가 좋아서 사제가 되었지만, 제 어머니는 저로 인해 사제의 어머니로 말 못할 어려움과 힘듦을 기꺼이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끌어안고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어머니의 가슴에 평생 대못을 박아드렸음은 미안하고 또 감사합니다. 저는 어머니가 저보다 더 참된 사제라고 믿습니다. 모든 사제와 수도자의 어머니는 다 사제입니다. “주님 안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실 날이 오리라 믿습니다. 아멘.”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전삼용 요셉신부님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에 소년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그것도 모르고,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하룻길을 갔다. 그런 다음에야 친척들과 친지들 사이에서 찾아보았지만, 찾아내지 못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그를 찾아다녔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 그는 율법 교사들 가운데에 앉아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고 그들에게 묻기도 하고 있었다(루카 2,41-46).”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랐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루카 2,48)”
1)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자녀의 사랑은 원초적인 본성이고, 그 자체로 순수하고 단순한 것입니다. 그 사랑에 대해서 무슨 복잡한 신학적인 설명이나 성서학적인 해석을 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고, 필요하지도 않은 일입니다. 어린 예수님을 잃어버렸을 때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애타게’ 찾아다닌 것은, 사랑했기 때문이고,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과 걱정을 길게 설명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자녀를 잃었을 때 그렇게 애타게 찾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오늘날에도 그렇게 ‘애타게’ 우리를 찾고 계십니다.
<‘성모 성심 기념일’을 맞아서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어머니의 슬픔과 고통을 묵상하면서 회개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주님을 떠나는 것과 같고, 주님과 성모님 입장에서는 자녀 하나를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애타게’ 우리를 찾으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여러 곳에서 발현하실 때마다 계속 눈물을 흘리시면서 인간들의 회개를 호소하신 것은, 인간들이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라도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잃어버린 자식이 아니다.” 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기 입으로 주장하는 것 자체가, 바리사이와 같은 교만이고 위선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교만과 위선도 큰 죄입니다.
성인 성녀들 중에는 “나는 죄인이 아니다. 나는 성인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성인 성녀들은 끊임없이 회개한 분들입니다.
오늘날의 우리 주위에도 분명히 주님과 성모님께 큰 기쁨이 되는 훌륭하고 거룩한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자처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한 점들을 끊임없이 살피면서 회개를 멈추지 않는 분들입니다.
2) 카인이 아벨을 죽이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창세 4,8), 그들의 어머니인 하와의 심정은 어땠을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크게 겪었을 것입니다. 아벨의 죽음은 당연히 큰 고통과 큰 슬픔이 되었을 것이고, 살인자가 되어서 하느님 앞에서 쫓겨난 카인의 처지도 하와에게는 큰 고통과 큰 슬픔이 되었을 것입니다. 둘 다 하와에게는 사랑하는 아들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형제간의 갈등이라는 점만 보면, 야곱과 에사우의 일은, 카인과 아벨의 일과 비슷합니다.
야곱과 에사우의 어머니 레베카가 야곱에게 한 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레베카는 큰아들 에사우가 한 말을 전해 듣고는, 사람을 보내어 작은아들 야곱을 불러 놓고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의 형 에사우가 너를 죽여서 원한을 풀려고 한다. 그러니 내 아들아, 내 말을 듣고 일어나 하란에 있는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달아나라. 네 형의 분이 풀릴 때까지, 얼마 동안 그분 집에 머물러라. 너에 대한 네 형의 분노가 풀리고, 네가 형에게 한 일을 형이 잊을 때까지만이다. 그러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너를 그곳에서 데려오게 하겠다. 내가 어찌 한날에 너희 둘을 다 잃을 수 있겠느냐?’(창세 27,42-45)”
이 말은, 어머니의 심정과 어머니의 사랑을 잘 나타냅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아들들 중에 누가 더 잘못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둘 다 똑같이 사랑하는 아들들일 뿐이고, 둘 다 똑같이 지켜야 할 아들들일 뿐입니다.
<여기서 둘 다 잃을 수 없다는 말은, 하나라도 살기를 바란다는 뜻이 아니라, 둘 다 살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3) 지금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들을 보면, 카인이 아벨을 죽인 일과도 같고, 에사우가 야곱을 죽이려고 했던 일과도 같습니다.
성모님의 입장에서는 ‘누가 죄인이냐?’는, 또는 ‘누구의 죄가 더 크냐?’는 중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을 죽이는 이 상황 자체가 성모님의 큰 고통일 것이고, 큰 슬픔일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성모님께서는 인류의 모습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계실 것입니다.
<전쟁은 무조건 중단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사는 교회는(신앙인들은) 전쟁 종식을 위해서 계속 기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내 편, 네 편을 가르기만 하고, 누가 더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기만 하면서, 내 편이 아닌 사람들을 전부 다 죽여서 제거해버리면, 참 평화를 누리게 될까? 참 평화를 누리기는커녕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데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6항)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
특히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493항)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를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 나셨습니다.
언제나 야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신을 ‘하느님 뜻’ 안에 가두시고,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 (루가 2, 51)
이토록 믿음을 품으셨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피앗(fiat)’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성모님의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 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티 없으신 성모 성심이여!
믿으셨으니 참으로 복되십니다.
당신께서 오로지 당신 아드님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셨듯이,
저희도 오로지 당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만 믿음과 희망을 두게 하소서.
오, 어머니시여!
당신 아들 예수님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희를 받아들이시어
저희도 당신 아들의 성심 안에 흠뻑 젖어들게 하소서.
오늘 제 형제들을 당신 성심의 가슴으로 끌어안게 하소서.
아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24/06/08 토요일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문득 성 마리아 막달레나가 생각납니다. 성녀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받아 다 누리면서도, 자신들의 원의를 더 이상 들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자신들이 하자는 대로 해주지 않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급기야는 사체에 향유라도 바르려고 무덤으로 갔지만, 그나마 사체마저 없어진 사실을 보고는, 분에 복받쳐 울부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는, 그 일이 더욱 더 한스럽기만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시고 진정시켜 주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서 끝나신 것이 아니라, 새생명으로 부활하셔서 오셨다는 사실을, 그제야 믿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저 빨리 하느님께서 데려가시도록 기도해주세요.” “이 한 맺힌 세상에서의 기구한 삶을 마치도록 도와주세요.”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덤 앞에선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의 기쁨을 안겨주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어깨를 두드리시며, 주 예수님의 구원을 향한 희망에 마주서도록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듯합니다. ‘생은 귀한 것이란다. 생은 기쁜 것이고, 행복하게 살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란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라.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고 곧 오실 것이란다. 아직 지상 생애에서 남은 것을 채우고 기다리면서 주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거라. 그리고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생애를 기쁘고 희망차게 보내라.’
성모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보듬어 주시고, 주 예수님께 펼쳐주시고 보여주시는 구원의 길로 더욱 더 깊이, 더욱 더 찐하고 기쁨에 충만하게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님, 당신은 하느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셨나이다.”(루카 2,19 참조)
잃은 것은 잃은 곳에 가야 찾을 수 있다.<루카2/41-51>6/8.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산에서 잃은 것을 바다에서 찾을 수 없으며 바다에서 잃은 것을 산에서 찾는 사람은 없습니다. 잃어버린 장소에 가야 찾을 수 있으며 방향감각이 없으면 길 눈이 어두어서 길도 못찾고 해매이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잃고 삼일이나 길에서 해매던 요셉과 마리아에게 주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줄 모르셨습니까?” 하시었듯이 성전에서 잃은 아들을 성전에서 찾아야하지 삼일동안 친척이나 길에서 해매며 찾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일로 모든 것을 잃고 마음의 상처를 받고 살아갈 때 잃은 마음을 찾아야할 곳은 마음을 잃게한 것에서 찾아야 하지 세상의 다른 가치를 찾아 해매면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작은아들의 비유에서도 아무리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어도 모든 것이 한계가 있어 없어진 다음 이런 일 저런 일 하면서 마지막 되지 치는 일까지 했지만 되는 일이 없어 “아버지 집으로 가자.”하고 길을 찾아 아버지 집을 찾아 가서 모든 것이 바로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마리아는 일어난 일을 다알 듣지 못하였자만 그모든 것을 마음에 간작하었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살다 보면 많은 것을 잃고 많은 사람을 잃고 살아갑니다. 그 모든 것을 자기 마음속에서 찾지 않으면 영영 잃어버리게 됩니다.
잊을망 바쁠망 자는 마음 심자에 망할 망자가 붙어 있습니다. 바쁜 일로 잃고 잊으려고 잃으면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지 남의 탓이 아닙니다.
어떤 이가 바람피우는 남편을 버리려고 할 때 자기 탓이 없는지 자기반성부터 시작하며 잃은 것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일자리에서 돌아온 신랑을 달갑게 맞이하지 않거나 웃는 얼굴이 아니라 짜증나는 얼굴이면 정이 떨어져 다른 것을 찾아 가게 됩니다. 내 탓이요 하고 자기마음을 찾아 올 바로 살면 되돌아옵니다.
우리는 알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릴 때 누구 탓이냐 하지 않고 자기탓으로 생각하면 문제를 쉽게 풀지만 남의탓을 찾아 해결하려면 점점 문제는 꼬이고 엉키고 풀 수 없는 일이되어버립니다. 우리는 길을 바로 찾고 잃은 것을 바로 찾으려면 내마음부터 바로 잡아야 합니다. 마음이 마음을 바로잡는 길은 하느님 중심으로 사는 사람은 어떤 풍파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오늘하루 허락된 날 행복하고 즐겁고 기쁜 날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문제를 성모님 마음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아갑시다.
사랑이란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야 합니다. 생각만 해서는 사랑이 드러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종 자신의 사랑을 몰라주냐면서 화를 내는 분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아버지가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충격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아들을 위해 해줄 만큼 해주었다고 생각했고 항상 아들이 잘되기를 기도하고 있었는데, 아들이 “아버지가 제게 해준 것이 뭐 있는데요?”라고 말한 것입니다. 요즘 일이 잘 안 풀려서 그 화풀이를 아버지에게 한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이 말에 아버지는 너무 서운했고 슬펐습니다.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힘든 상태에서 정신 상담을 받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상담 선생님께서 이렇게 질문하시는 것입니다.
“아드님께 ‘사랑한다’라는 말을 해보셨습니까?”
이 형제님께서는 “꼭 사랑한다고 말해야 사랑을 압니까?”라고 말하면서, 자신의 사랑을 알아주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원망만 늘어놓았습니다. 왜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을까요? 혹시 모른 척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사랑이 아닌 당연한 부모의 의무 정도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사랑을 알 수 없었습니다. 사랑은 구체적인 말과 행위가 드러나야 상대방이 알 수 있습니다.
루카 복음 15장에 나오는 방탕한 아들에 대한 복음 말씀을 아실 것입니다. 그는 깊이 뉘우친 뒤에 아버지께 갑니다. 이를 “그는 일어나 아버지에게로 간다.”(루카 15,20)라고 루카 복음은 전해줍니다. 일어나는 것은 하나의 행위입니다. ‘돼지 치는 일’을 그만두는 것도 하나의 행위였습니다. “이제 아버지께 돌아가야겠다.”(루카 15,18)라는 생각을 행위로 드러냈을 때, 아버지와 아들이 기쁘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행위로 사랑이신 아버지를 만나고 사랑을 더 뜨겁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알고 계시지만, 우리의 진지한 결단이 담긴 말과 행위가 꼭 필요함을 깨닫습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고 그 안에서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모범을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성모님께서 보여 주십니다.
성모님께는 세상의 관점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많이 찾아왔습니다. 예수님 잉태 소식부터 시작해서 오늘 복음에 나오듯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 장면 역시 이해하기 힘든 장면입니다. 그런데 우리처럼 불평불만으로 이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루카 2,51 참조).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에 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범을 보여 주신 성모님의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자기 뜻보다 하느님의 뜻을, 불평불만보다 사랑의 마음으로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진정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싸움이란 질 때도 있는 거지, 그걸 극복해야 챔피언이 돼(영화 '밀리언 달러 베이비').
잔소리와 조언을 구분하셨던 성모님!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한 그룹의 아이들이 2박 3일간 피정을 끝내고 돌아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런 게 좋았다, 저런 게 좋았다, 재잘재잘 말들이 많았습니다. 한 아이가 그랬습니다. “엄마 아빠 잔소리 안 들으니, 처음에는 너무 이상했지만, 정말 좋았다.”
생각해보니, 우리는 이 짧은 세상 살아가면서 쉼 없이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퍼붓고, 또 반대로 잔소리를 듣게 되는 것 같습니다. 나이 먹어감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는 잔소리와 진심 어린 조언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잔소리 듣는 것 엄청 싫어하는 데, 어린 자녀들이 제일 듣기 싫어하는 것이 잔소리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 역시 아들 예수님을 잘 동반하신 것으로 추정됩니다. 성경 안에서 우리는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어떻게 동반하셨는지 부족한 자료를 통해서나마 어느 정도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성모님의 동반은 신중하고 사려 깊은 동반이었습니다. 예수님이 12살 무렵, 예루살렘 성지 순례를 갔다가, 귀갓길에 소년 예수를 잃어 버렸습니다.마리아와 요셉이 길을 거슬러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 사이에 끼어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당혹스러웠던 성모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세게가 아니라 넌지시 나무랐습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이 특별한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방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 나이 또래 소년에게 필요한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12살 무렵 부터 메시아로서 탁월한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셨습니다.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언변이 얼마나 뛰어났던지 경탄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를 향한 답변이 엄청 강도가 높았습니다. 아주 세게 나온 것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 순간, 성모님께서는 직감했습니다. 아, 예수님께서 서서히 준비를 하고 계시는구나. 하고 거기다 더 이상 또 다른 잔소리를 퍼붓지 않으십니다. 침묵 속에 예수님 말씀의 진의를 찾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그런 성모님의 노력에 대해 루카 복음사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을 향해 할 말씀을 하셨지만, 듣기 싫은 잔소리로 넘어가지 않으셨습니다. 강약 조절을 하신 것입니다. 어린 예수님을 위해 방관하지 않으시고, 적절히 개입하시고, 그러나 지나치지 않으시고, 그렇게 균형잡힌 동반을 하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며칠 전 한 어린아이의 기도를 읽었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서로 싸우지 않게 해 주세요. 착한 누나는 스마트 폰 너무 보지 않고 책을 가까이 하게 해 주세요.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은 떨어지지 않게 용기와 힘을 주세요.” 저는 한 번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엄마가 늘 그랬던 것처럼, 예수님도 당연히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아이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의 아픔을,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였습니다. 어릴 때 불렀던 동요가 있습니다. ‘파란마음 하얀마음’입니다. 가사의 내용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여름엔 여름엔/ 파랄 거예요/ 산도 들도 나무도/ 파란 잎으로/ 파랗게 파랗게/ 덮힌 속에서/ 파아란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겨울엔 겨울엔/ 하얄 거예요/ 산도 들도 지붕도/ 하얀 눈으로/ 하얗게 하얗게/ 덮힌 속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자라니까요”
어제는 ‘예수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어제 저는 예수님의 마음은 ‘순종’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마음은 ‘연민’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들, 아픈 이들, 슬퍼하는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과 희생’의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늘 ‘겸손’을 강조하셨습니다. ‘희생’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면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순종, 연민, 겸손, 희생’의 마음을 가진다면 우리들 또한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성심 대축일 다음 날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로 정하였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성모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을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배려와 양보, 헌신과 봉사’의 마음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삶입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 발현한 곳을 찾아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기적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적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보여주시는 표징입니다. 내가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산다면 굳이 다른 기적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미사참례 열심히 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면서 사시는 분들에게는 다른 기적이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를 드리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요구하고, 유대인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겸손의 길, 사랑의 길, 순명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참된 진리입니다. 이 길이 성모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마음 안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성모님 마음 안에
아들 예수 늘 계시듯
그리스도인 내 마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 늘 계시니
성모님 마음 안에
아들 예수 늘 품듯이
그리스도인 내 마음 안에
그리스도 예수 늘 품으리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에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49)
성모님의 발현성지를 방문하면 성모님의 하시는 일이 있다. 순례객들을 미사성제로 안내 하셨고, 성체현시된 성당 제단으로 안내하셨다. 특히 프랑스 루르드 성모발현 성지가 그랬다. 성모님의 성지는 순례자들로 넘쳐났고 묵주의 기도를 드리며 행렬지어 주님께로 안내하시며 순례자들의 바람을 하나 하나 살피며 전구하고 계셨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보았다. 성당 벽에 치유의 기적에 감사드린다는 감사의 글이 붙어 있었다.
나는 또 포르투칼의 파티마 성모발현 성지를 순례하면서도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마음으로 읽었다. 모든 성인들 중에 으뜸이신 ‘복되신 동정 성모 마리아의 성심’을 공경한다.
멕시코의 과달루페에서 발현하신 성모님 발현성지를 순례했다. 멕시코와 스페인 사이의 가로놓인 장벽을 허물고 예수님께로 모두를 이끌어 주신 성모님을 보았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성심’을 본다.
예수님의 열두 살 때에 부모와 과월절 축제를 드리러 예루살렘에 찾았을 때, 부모는 아들 예수를 잃어버렸다. 성전에 계실 예수님이지만 부모는 거리중천에서 찾고 있었다. 성전에서 아들 예수님을 찾아내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그가 부모에게 말하였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2,49) 그 후로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집에 계시다는 것을 알고 그때부터 우리를 제단 앞으로 모여들게 하신다. ’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은 오늘도 우리를 주님의 제단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성당 밖 장승처럼 서 계신 성모님께 인사드리면 ’그래 들어가 보거라‘ 하시고 미소짓고 계시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주님을 모신 성심은 얼마나 아름다우신가? 저희도 성모님 닮아 주님께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부모는 파스카축제 때 예루살렘에서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렸다가 사흘만에 성전에서 찾은 대목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하고 이야기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리고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성모님의 모습 중에는 곰곰히 생각하고 마음 속에 간직하는 모습이 드러나십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 중요한 것이 그렇게 하느님의 뜻을 곰곰히 생각하고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종종 그 하느님의 뜻을 무심히 지나치기도하고 때로는 하느님의 뜻보다는 그 이외의 것들을 곰곰히 생각하고 떨쳐버리지 못하고 살아가곤 한다는 것입니다.
잔잔한 호수에 온 세상이 드리워지듯이 마음을 전잔히 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우리 삶의 참된 구원의 빛이 드리워집니다.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오늘 복음의 성모님의 모습처럼 하느님의 뜻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성모 성심에 대한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노르망디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의 노력 등으로 점점 보편화되었습니다. 성모 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이 신심은 별도의 날을 정하여 기념하던 19세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왔습니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8월 22일이었으나,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로 옮겨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님은 부끄럽게도 아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히고 찾아나선 나머지 사흘만에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고 계신 것을 발견합니다. 성경은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루카 2,47)라고 전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라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48절) 그러자 예수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라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그런지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50절)고 합니다. 그 후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고,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라고 전합니다.
기도하면서 문득 인간적인 생각이 하나 들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을 두실만한 사람을 하나 정도는 안배하지 않으셨을까?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아 처먹을 것만 받아먹고, 뒤돌아서는 예수님을 고발하고, 배반하고, 외면하고, 버려두고, 도망가버리는 세태에서 적어도 한 명 정도는 예수님 편을 안배하지 않으셨을까? 주 하느님께서 인간 세계에 내려가서 활동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을 이해하며, 예수님의 생각과 행동을 지지해주며, 예수님을 믿고 따라주며, 예수님이 오해받고 박해받을 때 힘으로는 안 되더라도 마음만이라도 안타까워하며 변호하며 감싸줄 사람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으셨을까? 아마도 그렇게 안배하는 분이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실까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에, 영원한 예수님의 편이신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며, 주님 보시기에는 여러 면에서 실망스러운 저이겠지만, 내 아버지와 어머니, 내 남편과 아내, 내 아이들, 내 친지, 동료, 이웃들에게, 나 자신이 죄가 아닌 면에서 거룩한 편이기를 성령께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다짐하고 기도하며 기대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함승수 신부님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심정은 겪어보지 않으면 절대 모릅니다. 낯선 곳에 홀로 떨어져 걱정과 두려움 속에 울고 있을 자식의 마음을 생각하면 억장이 무너집니다. 대체 어디서 잃어버린건지 어딜 가야 찾을 수 있는지 막막하기에 눈 앞이 하얘집니다. 혹시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의 손에 붙들려 큰 곤경이나 죽을 위험에 처해있는건 아닌지 걱정되고 불안하여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린 성모님이 그런 심정이었을 겁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감정들에, ‘내가 어린 아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해 이런 일이 생겼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져 속이 타들어갔을 겁니다. 그런 참담한 심정으로 온 예루살렘을 이잡듯 뒤진 시간이 무려 사흘입니다. 그 시간이 성모님께는 지옥 그 자체였겠지요.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성전에서 아들 예수님을 찾아냅니다. 그리고는 왜 가족들과 떨어져서 이곳 성전에 있는지 그 연유와 사연을 들어볼 요량으로 ‘왜 이렇게 하였느냐’고 물으시지요. 그런데 아들 예수님의 답변이 참 기가 찰 노릇입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보통의 어머니였다면 그 대답을 듣자마자 아이를 자기 무릎 위에 엎어놓고 엉덩이를 때려줬을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썽을 부려서 엄마 속을 썩이느냐’고 아이를 원망하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성모님은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아들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일단 그 마음을 헤아리려고 하셨습니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라는 마음으로 바라보며 비난하고 원망하는게 아니라, '니가 그렇게 한데에는 분명 어떤 이유와 뜻이 있겠지'라는 마음으로 그것을 아실 때까지 더 큰 이해와 포용과 사랑으로 품어주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아셨기에 아들 예수님도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부모님을 따라가 그분들께 순종하며 지내신 겁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성모님의 깨끗한 성심입니다. 상대방을 바라봄에 있어 내 기준과 선입견과 고집을 거쳐서 보지 않고, 그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바라보며 그가 하는 말을 소중하게 내 마음 안에 담는 태도. 상대방을 바라보는 시선에 그 어떤 사심의 ‘티’도 묻어있지 않은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 우리는 그런 마음과 시선으로 삶을, 세상을, 그리고 주님을 바라봐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당신에게 일어나는 그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십니다. 눈앞의 상황이나 당장의 기분에 휩쓸려 일희일비 하지 않으시고 일단 마음에 담아두신 후 하느님의 뜻 안에서 그 의미를 차분히 곱씹으십니다. 그처럼 너른 품을 지니셨기에 온 세상의 구세주를, 그 전능하고 크신 분을 당신 안에 품으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런 성모님의 깨끗하고 너른 마음을 닮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뜻은 ‘진국’입니다. 사골은 솥 안에 담고 오래 끓여야 깊은 맛이 올라오는 것처럼, 하느님 말씀과 뜻은 내 마음 안에 담고 오래 실천해야 그 참된 의미와 뜻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성모님처럼 하느님 말씀과 뜻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깁시다. 그 참된 맛이 내 삶 안에서 우러나도록!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성모님의 사랑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성심은 예수성심과 긴밀히 결합되어 있는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을 일컫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의 뜻에 순응하여 성령으로 성자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으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의 지상에서의 구원 여정에 침묵 가운데 사랑으로 함께하셨습니다. 그분은 또한 하느님의 충실한 여종이자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그리스도의 뜻에 온전히 일치한 신앙인이셨습니다. 이처럼 성모 성심은 예수 성심과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어린 예수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혼자 예루살렘 성안에 남게 됩니다. 아들을 잃어버린 마리아와 요셉은 사흘 동안 아들을 찾느라 애간장을 태웠을 것입니다. 아드님 예수님을 찾으신 성모께서는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2,48) 하고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뜻밖에도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2,49) 하고 말씀드립니다. 그런 대꾸 앞에서 예수님의 부모들은 시므온의 예언대로 이때 이미 성모님께서는 가슴이 찔리는 듯한 아픔을 겪으셨을 것입니다. 성모께서는 구원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아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성모님은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2,50) 이 점이 바로 성모님의 탁월한 점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바로 알아차리지도 다 이해할수도 없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일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버리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 앞에서 자신의 힘으로 의미를 찾으려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면서 하느님에 의해 뜻이 드러나리라 믿고 기다리신 것이지요. 구원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다가오거나 기적처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이사 6,11) 서서히, 때로는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짐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우리도 성모님처럼 사랑으로 기다리는 법을 알았으면 합니다. 그분처럼 말하기에 앞서 사랑으로 들을 줄 아는 마음을 지녀야겠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성급하게 판단하거나 단죄하지 않고 주님께 맡기는 법을 배웠으면 합니다.
또한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 안에 담긴 하느님의 깊은 뜻을 내 힘으로 내가 원하는 대로 밝히려 하기보다는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면서 그분께서 원하시는 뜻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해야 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사랑 없이는 어려울 일일 것입니다. 오늘도 하느님과 인간을 향한 성모님의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에게 다가가는 사랑의 날이 되길 바랍니다.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
불을 밝혀 주시는 주님….
성녀 모니카의 눈물 어린 기도가 있습니다.
모니카 성녀는 17살 때 집을 나간 아들 아우구스티노를 위해서 20년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결국, 성 아우구스티노는 어머니 모니카 성녀의 눈물 기도로 회개하고 변화되어 주님의 종이 되어 성인품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하느님의 놀라운 섭리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특별히 어머니들에게 기도의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어머니들이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면서” 눈물을 흘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 자녀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2절에 보면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싸우고 또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섭리와 능력, 하느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은 기도를 통해 내려오는 것입니다. 아멘.
오늘 교회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맞이합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는데, 예수님은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그리고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모는 성전에서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먹지도 자지도 않고 사흘 밤낮을 헤매다닌 끝에 겨우 소년 예수님을 찾게 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아들을 되찾았다는 기쁨도 컸지만, 태연히 성전에서 율법 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년 예수님을 보고 있노라니 놀라웠지만, 한편으론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소년 예수님에게 말합니다.
“애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부모가 된 도리로서 어린 자녀가 행방불명되었는데, 아이를 찾아 헤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년 예수님은 당돌하게도 이렇게 대답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소년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서 소년 예수님 하셨던 말은, 언젠가 자기는 부모님의 곁을 떠날 것을 미리 암시합니다.
오늘 저희는 성모님의 태도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그런데 성모님은 아들 예수님으로 인해 많은 고통을 겪으신 분이십니다.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고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 오해도 엄청나게 받았습니다.
그때마다 성모님은 인간적 섭섭함과 아쉬움은 들었지만, 하늘을 향해 하느님의 뜻을 찾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자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끊임없이 자신을 비우고 낮춥니다.
이런 성모님이었기에 기도하는 신앙인의 모범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아멘.
사랑하는 고운님들!
네덜란드 화가 ‘헤리트 반 혼토르스토’의‘그리스도의 소년 시절’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요셉 목공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예수님이 끌과 망치로 나무를 다듬고 있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양초를 밝혀 들고 있습니다.
그 불빛은 요셉의 얼굴을 환히 비추고 있는데, 두 천사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화가는 촛불을 들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 오셔서 불을 밝혀 주시는 주님을 증언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늦었더라도 예수님을 찾기 위해 돌아설 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성전을 찾아올 때, 성전에서 고운님들을 기다려주시고 만나 주실뿐만 아니라 고운님들의 힘들고 고달픈 삶의 자리로 내려오시어 함께하시고 도와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전을 찾은 고운님들과 어려운 상황으로 성전을 찾지 못하지만, 마음으로 예수님을 모신 고운님들에게 어두운 삶에 등불을 비추시고 밝혀 주시는 은총을 베풀어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조 두레박 사제도 성모님의 모범에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면서, 몸과 마음이 아픈 고운님들과 아픈 이들을 돌보는 고운님들, 그리고 고운님들의 자녀에게 주님의 치유와 회복의 은총이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세상을 살다가 답답하고 억울한 일로 힘들 때마다 성모님처럼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담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으면서 치유와 회복의 은총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 성자와 성령께서는 고운님들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걱정을 뛰어넘는 믿음
유상혁 세례자요한 신부님
어릴 적에는 자주 어머니를 떠나고 싶어 했던 것 같습니다. 당신을 돌아보지 않고 앞만 좇는 아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마음이 어떠하셨을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넌지시 꺼내면 어머니는 아들을 믿었기에 걱정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지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근심이 가득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리아는 아들 예수를 잃어버립니다. 두 마음이 느껴집니다. 하나는 아들에 대한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아들에 대한 걱정입니다. 몇몇 어머니들은 자녀를 믿지 못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녀를 여전히 미숙한 어린이처럼 생각하고 돌보려 합니다. 그 옛날 저희 어머니는 제가 길을 잃어버리면 찾아다니시기보다 집으로 가셨습니다.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믿음 뒤에는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두려움과 걱정이 있었겠지요. 우리가 본받아야 할 성모님의 마음은 온갖 두려움과 걱정을 이겨내는 온전한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먼저 곰곰이 생각하고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시다. 삶에서 일어난 기적들 속에서 우리의 두려움과 걱정을 이겨내는 믿음을 가졌던 일들을 되새겨봅시다. 모든 것을 잃은 듯한 순간에 예수님은 반드시 우리에게 돌아올 것입니다.
하느님을 잃은 사람 기도로 찾아야 한다.< 루카2/41-51>6/17.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은 소중하게 여기던 것을 생각하나 잘 못해서 잃어버리거나 다른 일에 정신을 놓고 소중한 것을 잃를 수 있습니다.
없도 될 것이 있는가 하면 절대로 필요한 것이 여서 븐 듯이 찾아야 할것이 있습니다.
오늘 요셉과 마리아는 천하에 귀한 아들을 성전에 잃어삼일동안이나 해매다가 성전에서 찾아 얻고 근심 중에도 기쁨을 체험하게 됩니다.
두분은 찾아야 할곳에 찾지않고 처음에는 요셉은 주님이 마리아와 함께 있겠지 하고 남자들만 나가는 문으로 나가고 마리아는 요셉하고 함께 있겠지하고 여인들만 나가는 문으로 나가 함께 만나는 곳에 주님이 서로 없진 것을 알고 혹시 친착중에 있는가 하고 여기저기 찾다가 성정에가서야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주님은 왜 아버지 집에서 찾지 않았습니까? 하고 주님을 찾아야 할 곳이 어딘지 알려주십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인간적 처지만 믿고 찾는 것과 기도하며 하느님 뜻을 따라 찾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느 주일 날 점심 먹다가 어머니와 의견충돌로 서로 등을 돌리고 화를 내면서 나 오늘부터 성당에 안가요 하고 오후 성체강복을 궐하고 어머니는 성당에 가시고 저는 집에 있으면서 한심만 짖고 있다가 갑자기 기도 해야겠다 하고 묵주기도 환의를 시작하고 5단에서 성전에서 예수님을 일은대목과 주님이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순종하며 지냈다.”를 목상하다가 나의어리석음으로 주님도 잃고 어머니도 잃을번한 저를 깨우쳐 주시며 이렇게 지극이 높으신 주님이 부모님에게 순종하시며 사셨는데 나의생각 나의 지식이 그리 큰 것도 아닌데 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어머니 성당에서 오시지 마자 무릅끊고 용서를 청하며 다시는 어머니 뜻을 거스리지 않고 하느님 잃어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며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지금것 지키고 있습니다.
그후부터 하느님 거부하지 않고 어머니 사랑을 거스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우리는 머리로만 아는 것과 현실을 파학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식이 모든 것을 해결하지 않고 마음이 모든 의문을 해결합니다.
어느 신학자가 하느님의 현존에 대하여 좋은 책을 많이 쓰고 그 책을 보는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지만 자신이 어느 날 내가하는 말이나 지식이 참으로그런가 하고 “ 참으로 하느님은 존재하는가?” 하고 의심이 생겨 본당신부를 찾아가 “ 참으로 하느님 계신지 의심이 생기었는데 설명좀 해주세요.” 하니 신부님 “ 내가 다 말하지 못하고 아무게가 쓴 책을 주며 이책을 보세요.” 했습니다. 내어준 책은 자기쓴 책이였습니다. 그신학자는 모든 것은 네 미음에 달려있다고 생각하고 기도와 묵상 중에 안정을 찾았다고 합니다.
주님을 떠날 시련이 오면 기도하며 주님을 아버지 집에서 찾으면 주님을 만나고 믿음 희망 기쁨 중에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무엇을
애타게
찾는지요.
간직하고
되새겨야 할
우리의
깨끗한
본마음을
찾습니다.
깨끗한 마음은
언제나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믿음은
사람의
길입니다.
사람의 길은
이 모든 것을
끌어안는
어머니의
사랑입니다.
어머니의 삶이란
사랑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건너가는
삶입니다.
사랑은 제 마음을
깎는 아픔을
동반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이와 같이
마음을 필요로
합니다.
마음이 있는 곳에
어머니도 계십니다.
마음 속을 비추는
믿음의 빛입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애타게 다시
부릅니다.
잃어버린 것을
너무나 기쁘게
찾게 됩니다.
애절하게
부를 한 사람이
바로 우리를
사랑하는
그 사람입니다.
마음 속에
애절한
그 이름을
품고 사는
사람은
아프지만
행복합니다.
담아야 할 마음과
놓아야 할 마음이
분명 있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통해
잃어버린 마음을
되찾는 은총의
시간 되십시오.
마음과 마음이
만나야 마음의
꽃밭이 되고
믿음의 꽃밭이
됩니다.
찾지 않고서는
만날 수 없는
마음의 신비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찾는 이 마음이
우리 마음밭을
향기롭게 합니다.
우리 깨달음의
전부는
지금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 어디에서
우리의
하느님을
찾아야 할지를
성모 성심은
잘 보여주십니다.
절실한 마음
애절한 마음
간절한 마음
우리의 마음입니다.
일상의
단순한 것에서
마음을 나누는
성모 성심의
기도와 실천입니다.
성모 성심이여
우리 마음을
환하게 비추어
예수님을 모실
마음의 빈자리를
마련하게
하여 주소서.
자존감이 높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위해 자기를 사랑해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많은 전문가가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사랑한다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 자신을 토닥이면서 “괜찮아. 잘 될 거야. 힘내!”라면 될까요? 사랑하는데 필요한 구체적 재료들을 제공하지 않으면 가냘픈 정신 승리에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뛰어난 무언가가 되어야 나를 인정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런 날은 절대로 오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작더라도 노력해서 성과를 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노력의 기억이 모이고 모여서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고, 이것이 나의 자존감을 높이는 것입니다.
작은 성취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실제로 이 작은 성취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기상벨에 맞춰서 벌떡 일어나기, 계획대로 하루 살기, 운동하기, 나의 발전을 위한 공부하기,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기도와 묵상에 집중하기…. 이렇게 따지고 보면 삶 자체가 자기 성취의 터전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다시 말하면, 나를 사랑할 이유가 자기 주변에 너무 많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사랑은 분명히 가능합니다. 나의 자존감은 누구보다도 높아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에 관련된 기념일이 참 많지요. 또 5월 성모의 달, 10월 로사리오 성월. 이렇게 1년 중에 두 달이나 성모님을 기억합니다. 이렇게 성모님께 높은 존경과 사랑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단순히 예수님의 어머니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 하나만의 이유를 꼽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려 하셨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인간적으로는 행복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하고, 예수님을 낳자마자 산후조리도 하지 못하고 이집트로 피신을 하러 가야 했습니다. 또한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고생해서 겨우 아들을 찾았지만, 아들로부터 ‘왜 자기를 찾느냐’는 무정한 말도 듣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자, 미쳤다는 소식도 듣게 되고요.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는 아들의 모습을 보셔야만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절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만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희망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에 대한 자존감을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일상 안에서 작은 성취를 이뤄나가야 하겠습니다. 성모님처럼 희망을 간직하면서 지금의 상황을 기쁨으로 바꿔야 합니다.
신중하되 천천히 하라. 빨리 뛰는 것이야말로 넘어지는 것이다(셰익스피어).
감사하는 마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글입니다. ‘감사’할 이유를 찾아보세요.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모든 삶이 즐거워지고 행복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얼굴이 못생겼다고 속상해하지만, 누군가는 몸이 아파서 병실에 누워있다.
내가 직장 생활이 힘들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기회조차 없이 고통을 받기도 한다.
내가 돈이 없다고 한탄하지만, 누군가는 하루살이처럼 힘들게 살아간다.
내가 부모가 밉다고 하지만, 누군가는 부모조차 모르며 외롭게 살아간다.
내가 불면증에 시달리지만, 누군가는 몸이 아파서 한시도 자지 못하고 살아간다.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속상해하지만, 누군가의 아이는 교통사고나 자살로 영영 이별을 하기도 한다.
나에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다는 것과, 먹을 수 있는 입이 있다는 것과,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코가 있다는 것과, 움직일 수 있는 두 다리가 있다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늘 감사하는 마음의 힘은 지치지 않고 꾸준히 가도록 도와준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실 첫 거처이자 지성소로서 가장 합당한 장소였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제 예수성심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과거 왕가에서는 왕의 부인이나 왕자의 부인을 간택할 때, 엄청난 숫자의 후보 규수들을 점지해놓고, 그 가운데서 고르고 또 골랐습니다.
평판이 좋은 가문의 여인들,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들, 가장 깨끗하고 흠없는 여인들 가운데서 심사숙고해서 선발한 것입니다. 건강하고 지적이며, 흠없는 왕손을 얻기 위해 그 어머니 역시 건강하고 흠없는 여인이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세속의 왕의 어머니가 될 여인도 그렇게 세심하게 준비시키는데, 하물며 만왕의 왕, 구세주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실 분을 아무런 준비없이 선택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심사숙고 끝에 당신 아들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여인을 고르셨는데, 가장 잘 준비된 분, 아무런 흠도 티도 오점도 없는 순결하신 분, 원죄에 물들지 않으신 분을 선택하셨는데, 바로 나자렛의 마리아였습니다.
평소 머릿칼보다 많은 일상의 죄 속에 깊이 파묻혀 살아가다보니, 티없이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좀 덜짓는다면, 우리가 좀 더 자주 고백소에 들어가면, 좀 더 순결하게 살아간다면, 티없이 깨끗함이 우리에게도 해당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좀 더 자주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좀더 하느님 안에 머무르며, 좀 더 하느님과 일치하며, 좀 더 하느님께 순종하며 살아간다면, 우리도 성모님처럼 깨끗하게 살아갈 희망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다음 주에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친히 우리 본당이나 우리 공동체를 찾아오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어디에다 모실 것입니까?
그 특별한 손님을 아무 방에나 모시지 않을 것입니다. 제일 전망이 좋은 특실, 가장 넓고 쾌적한 방에 모실 것입니다. 물론 몇 사람이 며칠간 달라붙어 침실이며 화장실이며, 번쩍번쩍 광채가 날 정도로 깨끗히 청소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 특별한 손님에 대한 합당한 예우일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갖고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을 바라보니 조금 이해의 폭이 생겼습니다. 인간을 위한 거처 마련에도 그렇게 공을 들이는데, 하물며 하느님을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더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에 육화강생하시는 과정에서 그분의 거처는 너무나도 당연히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거룩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은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머무실 첫 거처이자 지성소로서 가장 합당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티없이 깨끗하신 분이라는 것은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위한 하느님의 배려이자 구원계획의 성취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 공동체가 하느님 앞에 거룩하고 흠없으며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있기를 원하십니다. 이런 면에서 성모님은 새로운 하느님 백성이자 새로운 교회의 모델인 것입니다.
성모 성심 :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는 사제 성화의 날이기도 하면서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습니다.
사제는 아버지의 마음과 어머니의 마음을 동시에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다 내어주시고도 미안한 아버지의 마음’을 지니셨습니다.
그러면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다 봉헌하고도 죄송한 마음’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께서 성전에 계시며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하신 말씀을 듣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을 분명 봉헌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그런데도 그분은 이제 아버지의 소유임을 잠깐은 망각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십자가 밑에서까지 예수님을 따라가시며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십니다. 그러나 완전히 봉헌하지 못하고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하시며 어머니로서의 아주 미소한 집착을 내비치셨습니다.
부모를 잃은 자녀를 고아라 하고, 남편을 잃은 여인을 과부라 하며, 아내를 잃은 남자를 홀아비라 하는데, 자녀를 잃은 부모는 너무 슬퍼서 부르는 이름조차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잃어본 사람만 알 것입니다.
그러나 맡기셨던 것을 다시 찾아가시는 것에 불과한 일이 그런 고통을 가지는 것조차 죄스러운 마음이 성모 마리아의 마음이 아니셨을까 생각합니다.
아버지는 아내와 자녀들에게 더 못 줘서 미안하고 어머니는 남편에게 더 못 돌려드려서 죄송한 마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수녀님께서 감사하게도 당신이 수녀가 된 이유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허락은 받았지만, 누구신지 짐작이 갈 것 같은 내용은 조금 수정하여 말씀드리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다 봉헌하면서도 죄송하고, 그래서 행복한 성모님의 마음과 닮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심하게 자아와 인생에 대해서 고민하고 방황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철학과로 들어갔는데 3학년 때 또다시 제 영혼이 ‘삶이란 무엇인가?’의 딜레마에 빠져 방황하였어요. 그러던 중 형이상학 교수님이 개인적으로 저에게 철학 공부를 해보라고 하셨고 저의 정신적 멘토가 되어주셨어요. 그런데 교수님께서 급성 간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교수님은 어떤 신부님과 친구셔서 신부님께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으로 대세를 받고 선종하셨어요. 그때 성당에서 하는 미사라는 것에 처음 참석했죠.
교수님께서 마지막에 돌아가시기 전 제게 하신 말씀은 “내가 사제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였습니다. 그러시며 저에게 『천국의 열쇠』를 읽어 보라고 하셨죠(‘천국의 열쇠’는 헌신적으로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종교의 굴레보다는 사랑의 실천을 목적으로 살았던 치셤 신부와 고위 성직자가 되기만을 바라며 살아온 안셀름 주교의 두 삶이 대비되며 하늘 나라는 누구의 것인가를 묻는 내용입니다).
교수님의 죽음으로 저는 또 길을 잃고 죽음에 대한 사유로 가득했습니다. 도대체 진리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으로 휩싸여 캠퍼스를 돌며 도서관에서 수많은 철학자가 제시하는 해답을 읽으면서 방황했어요.
『천국의 열쇠』 책을 사러 가톨릭 서점을 다니면서 신학과 신앙 책을 읽게 되었고 제 영혼을 가장 강력하게 붙잡아주는 말씀이 저를 교회로 이끌었어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래서 저는 세례를 받기로 했어요. 하지만 교리 반을 다니면서도 자살 충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울증이 심했지 않았을까?’, 아니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던 것 같습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그래서 원했던 대학원 진학도 할 수 없었어요. 다만 성모님 기적 메달, 묵주, 성수 등에 매달리며 예비자 때도 매일 성당에 갔어요. 성체만 영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세례받기만을 기다렸죠.
그리고 길이 없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다. 진리를 찾는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진리다. 죽음으로 가득한 저에게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며 제 영혼을 구원해 주셨어요.
세례받고 제가 엄청나게 밝아졌어요. 자연스럽게 신앙 서적과 성경을 읽으면서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수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예수님을 만나니 나에게서 철학은 끝났다고 정리했어요.
마더 데레사 수녀님처럼 내가 그렇게 살 수 있을지 저 자신을 테스트해 보기 위해 수녀원 입회 전에 가톨릭 장애인 시설에서 숙식하면서 일했는데 매일 매우 피곤했음에도 성당에 가서 밤에 2시간 정도 성체조배를 했어요.
그때 예수님 환시 체험을 했어요. 십자가에 계시는 예수님이 살아서 몸을 비틀거리면서 너무 고통스러워하셨어요. 이런 환시는 수많은 날 오랫동안 계속되었지만,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혼자서 2시간 “예수님 사랑해요.”라고 기도하면서 그 고통스러운 예수님 바라보다가 성당에서 졸기도, 잠들기도 하고, 나중에는 예수님께 “예수님 죄송해요. 저 너무 피곤해서 갈게요.” 그러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살아 움직이며 몸을 비틀면서 못 박힌 손과 발, 계속 힘들어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숨소리를 들으며 나와야 했어요. 고통스러워하시는 예수님을 홀로 남겨두고 성당에서 나오는 마음이 너무나도 무거웠어요. 이 환시 체험은 계속되다가 종신서원 후에는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때 그 시설에 신학생 2명이 파견받아 봉사하고 있었는데 두 명 모두 저에게 결혼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농담이든 진담이든 저는 밤마다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수녀원에 갈 것이고 결혼할 마음이 없다고 말했어요.
저를 사랑하기에 받으시는 예수님의 고통에 저 자신을 바치는 것도 부족하다 여겼기 때문에 당연히 그 멋진 신학생들에게도 마음이 갈 수 없었어요.
지금도 저는 정말 행복하고 예수님 성체를 매일 모시면서 너무 흡족하고 바랄 것이 없는데, 성당에서 조배하고 예수님과 함께하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만족스러운데, 천국에 가면 얼마나 행복할까요...아멘."
저는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제가 버리고 온 것에 비해 주님께서 저에게 왜 더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을 가졌었습니다. 그런데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예수님의 한 마디로 오히려 죄송스러운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이렇듯 주님께 당신 자신을 다 봉헌하여 구원자의 어머니가 되셨음에도 주님의 은혜에 다 보답할 수 없는 마음에 미안하셨을 것입니다.
수녀님이 삶의 길과 참 진리와 생명을 찾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주신 것에 비해 당신은 그분의 곁을 떠나있는 것에 너무나 죄송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내가 가진 것,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나 자신을 주님께 바친다고 주님께서 주신 것보다 더 바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내가 바친다고 생각하는 것도 다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은 십일조가 아니라 당신의 온 존재와 당신의 아드님을 바치시고도 항상 죄송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미안함과 인간의 이 미안한 마음이 합쳐질 때 둘은 하나가 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역사를 영어로 ‘History'라고 합니다. ‘His + Story'로 나누어서 '그의 이야기’ 남자들의 이야기로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역사의 본뜻은 진실을 탐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historia’입니다. 그 어근인 ‘histor’는 '증인' 혹은 '진실을 밝히는 사람'이라는 뜻과 관련됩니다. ‘Diet'라는 말도 우리는 체중조절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곤 합니다. 그러나 본 뜻은 ‘식단, 식이요법’입니다. 성서는 하느님 구원의 역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을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느님의 백성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사무엘에게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어갈 지도자를 약속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을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의 잘못을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 고통 받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구원의 역사에는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여성들이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롯은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정성껏 섬겼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효성이 지극했던 롯을 사랑하셔서 축복을 주셨습니다. 롯은 다윗의 증조할머니였습니다. 수산나는 정결한 여인이었습니다. 욕망의 빠진 노인들의 덫에 걸린 수산나는 수치를 당하는 대신에 죽음을 선택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수산나의 정결함을 다니엘을 통해서 지켜주셨습니다. 에스테르는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스테르의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천사 가브리엘을 보내셔서 마리아를 부르셨습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명하였고, 예수님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기를 원하셨을 까요?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 3번씩이나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혼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셨을 까요? 아니면 평범하게 직장을 구하고, 좋은 여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셨을까요?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면서 살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셨을까요? 예전에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을 했고, 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할 수 있던 친구들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데모를 했고, 데모를 하는 과정에서 형사들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수배자가 되었고, 감옥에도 가게 되었고,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직장은 구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이 그렇게 바랐던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많은 학생들은 아직도 고문의 후유증을 겪고 있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은 자식의 건강, 성공, 출세, 결혼을 바랄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어떤 아들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기 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일,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였던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억울하게 비참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아드님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으신 마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복되시고 영화로우신 동정녀여!’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애타게 찾은 부모에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예전에 어릴 적 장애인 동생이 자전거를 타고 나가서 늦게까지 집에 안 들어오자 온 집안 식구가 동생을 애가 타게 찾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동생을 찾던 중에 어머니가 어떤 분으로부터 동생이 성당에 있다는 제보를 듣게 되었고 결국 성당에서 동생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 때 어머니가 동생에게 왜 성당에 있었냐고 묻자 동생이 “기도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지만 때로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에서 아무리 의미를 찾으려고 해도 그것은 결국 공허함만이 남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은 유한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인생의 순간 모든 의미를 주님 안에서 찾을 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바른 길과 참된 것과 영원한 행복을 전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성령의 거처가 되신 성모 마리아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성령을 충만히 입은 성모님의 거처에서 예수님께서 잉태하시고.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지나며 새롭게 탄생한 교회가 어머니의 교회로 성령의 거처가 되어 예수님을 무더기로 탄생시킨 사도들의 교회를 본다.
깜짝 놀랄만큼의 생명력을 지닌 교회는 자타가 믿어 의심치 않는 살아있는 교회였다. 사도행전의 전하는 복음전파 소식은 얼마나 활기찼으면 깜짝 놀랄만큼의 무더기 세례를 볼 수 있었겠는가?
우리가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본받는다면 오늘의 교회도 성령께서 충만하여 성모님의 역할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오소서 성령님, 새로나게 하소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이사야 예언자는 예루살렘 멸망과 유배로 인해 피폐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메시아에 대한 희망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예언자는 서두에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 하느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마음이 부서진 이들을 싸매어 주며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갇힌 이들에게 석방을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라는 희망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시온에서 슬퍼하는 이들’과 ‘맥 풀린 넋’에게 기쁨의 화관과 축제의 옷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메시아를 통하여 이스라엘이 더 이상 수모의 백성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 앞에서 영광스럽게 의로움과 찬미를 부르는 백성이 되게 할 것입니다.
구약의 표현 중에 극치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모습으로 나타냅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나’라는 인칭으로 바꾸어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것은 ‘시온’을 표현할 수 있고 또 구원받은 ‘사람’을 뜻할 수도 있습니다. 적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던 시온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종’을 통하여 영광과 기쁨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예언자는 이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이사 61,10)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시온을 “땅이 새순을 돋아나게 하고 정원이 싹을 솟아나게 하듯” 생명과 의로움으로 뭇 민족 앞에서 솟아나게 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곤경중에서 구원을 주신 하느님을 기리며 찬미를 드렸던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노래를 기억합니다.
“제 마음이 주님 안에서 기뻐 뛰고 제 이마가 주님 안에서 높이 들립니다. 제 입이 원수들을 비웃으니 제가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처럼 거룩하신 분이 없습니다. 당신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저희 하느님 같은 반석은 없습니다.”
어머니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을 노래했던 유대 여인들 중에 마리아도 하느님을 찬미하며 그 노래를 부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 뛰니 그분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과연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하리니 전능하신 분께서 나에게 큰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분의 자비는 대대로 당신을 경외하는 이들에게 미칩니다.”(루카 1,46-50)
하느님께서는 비천한 이를 높이시고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며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십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비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영원히 미치시며 구원의 역사를 펼치십니다.
열심한 유대인의 가정인 성가정은 요셉과 마리아와 함께 소년 예수님은 해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가곤합니다. 예수님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도 늘 하던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축제 기간이 끝나고 부모는 나자렛에서 올라온 가족들과 함께 돌아갔지만 소년 예수님은 그대로 예루살렘에 남았습니다. 이 사실도 모르고 그의 부모는 예수님이 친지들과 함께 가려니 하며 하룻 길을 가다가 아들을 찾아보았지만 보이지 않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사흘 뒤에야 율법 교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들을 발견합니다. 부모는 이 광경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반가움과 섭섬함의 마음으로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루카 2,48)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부모들이 미처 알아듣지 못하는 투로 아들은 그들에게 말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그 순간의 아들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하였지만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하느님과 인간’인 아들에게 한편 당혹감도 있고 또 한편 가브리엘의 지난 말에 대한 깨달음도 있었던 것입니다. 루카복음은 이 이야기의 마무리를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51절)
성모님께서는 아들이 영원히 자신의 아들로만 생각했지만 성전에서 보여준 아들의 모습은 자신만의 아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며 율법교사들과 성경에 대해서 토록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루카는 소년 예수님이 이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준비의 시간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드님을 잉태하여 나자렛에서 목수의 아내로 또 어머니로 지내신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과 사도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구원의 역사에 적극 참여하셨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성모님께서는 박해받는 교회와 함께 하셨고 병든이 고통의 그늘에 있는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한 삶에서 가장 외롭고 힘든 죽음의 시간에도 함께 계시고 위험과 고통에서 도움을 주시도록 교회는 끊임없이 성모님께 기도합니다. 자애와 사랑이 가득하신 성모님께서는 우리 죄인을 위해서 끊임없이 하느님 아버지와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구하며 죄인인 우리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성모성심께 우리 자신을 의탁하며 우리의 기도를 바칩시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주님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마리아의 모범을 통해 알려 두십니다.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요셉과 마리아가 소년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으셨다가 찾은 일은 의미심장합니다. 구원자의 잉태부터 소년 시기에 이르기까지 함께 살아오며 마음에 차곡차곡 품어온 신비를 예수님 입으로 직접, 명확하게 듣는 순간을 비로소 맞이한 겁니다.
"제 아버지의 집"
어린 예수의 표현은 명확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구심점인 성전이 바로 하느님 현존의 장소이니, 그곳이 곧 성자의 거처일 수밖에 없지요.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다."(루카 2,50)
복음사가는 요셉과 마리아의 상태를 진솔하게 이야기합니다. 부모는 알아듣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지요. 여기에서 요셉과 마리아의 진가가 드러납니다. 그들의 무지는 부끄러움이나 약점이 아니라,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구원에 협력한 신앙을 증거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마리아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구원 역사가 모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마리아의 마음속 크기와 깊이, 넓이와 길이를 누구도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지요. 그 놀라운 구원경륜의 신비가 모두 들어차 들어있으니 말입니다. 알아듣지 못했음에도 경청하고 품고 믿고 따르는 겸손하고 충실한 신앙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제1독서는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의 원형이 되는 이사야서의 한 대목입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61,10)
구원자를 반기는 이 환성 안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합니다. 하느님의 구원 약속이 개인과 민족에게 이루어짐을 환호하듯 들려주고 있지요. 예언자를 통해 전해진 이 해방과 구원의 기쁜 소식이 훗날 마리아의 목소리로 복음에 새겨집니다.
"주님 안에서 ... 하느님 안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에 관한 신비를 모두 마음 속에 간직한 동시에 그 자신이 온전히 하느님 안에 존재하였습니다. 그 안에서 기쁘고 즐겁습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감정이나 기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영의 기쁨과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신비를 마음속에 간직한 채 하느님 안에 머무르는 이의 영적 기쁨은 우리가 즐겨 부르는 마니피캇(루카 1,46-55)과 오늘 미사 독서의 화답송에도 잘 드러나 있으니 함께 머무르시면 좋겠습니다.
하느님 안에 있는 이는 아무리 세상이 할퀴고 짓누르고 무시해도 주저앉지 않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으로 인해 겪은 "칼에 꿰찔리는 고통"(루카 2,35 참조)도 이 기쁨과 즐거움을 앗아가지 못하였지요.
사랑하는 벗님, 지금 현실에 기쁘고 즐거운 일이 많으십니까? 주님께 감사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십시오. 삶이 힘겹고 버거우십니까? 주님 안에 머물러, 세상 것에 좌우되지 않는 영의 기쁨과 즐거움을 그분께 청하십시오. 어느 것도 구원받은 이로서 주님과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을 빼앗을 수 없답니다.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시련과 고난의 길 한복판에 있더라고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마음에 기대어, 그분처럼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절망과 두려움에서 고개를 돌려 기쁨을 선택한 순간, 성모님이 도와주실 겁니다. 또 말씀의 벗인 우리 모두 함께 서로를 응원하며 기도할 것이니 힘 내십시오. 화답송이 노래하듯 모든 것은 주님 손에 달려 있답니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예수님의 겸손은 당신의 신성을 보여 준다.
주님께서 해마다 피스카 축제 기긴에 부모님과 함께 예루살렘을 찾으신 것은 그분의 겸손을 보여 줍니다. 함께 모여 하느님께 영적 제사의 봉헌물을 바치고 자기들을 지으신 창조주의 마음을 많은 눈물과 기도로 자신들에게 돌리려 하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행동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가운데에 사람으로 태어나신 주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통하여 일러 주신 바 인간의 마땅한 본분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께서는 순수하고 단순한 인간인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명하신 바를 매사에 지켜야 함을 본보기로 보여 주시고자 당신께서 내리신 법을 몸소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본을 따릅시다. 그분의 거룩한 영광을 바라봄에서 기쁨을 얻는 사람이라면, 한평생 하늘에 있는그분의 영원한 집에 머물기 바란다면(시편 27,4 참조), 주님의 뜻을 알아 보고 그분의 거룩한 성전에서 보호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사악함의 바람에 영원히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우리는 주님의 집인 오늘의 교회에 자주 드나들며 순결한 청원의 제물을 바첩시다.
-존자베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성 라우렌시오 유스띠니아노 주교의 강론에서 (Sermo 8, in festo Purificationis B.M.V. Opera, 2, Venetiis 1751,38-39)
마리아는 읽고 듣고 본 것들을 모두 마음속에 간직함으로써 얼마나 그의 믿음이 자라고 공로가 쌓이고 지혜가 밝아졌으며 사랑의 불꽃으로 타올랐는지 모릅니다.
과연 마리아는 천상 신비를 받아들임으로써 기쁨에 충만하고 성신으로 풍요해졌으며 하느님께로 인도되면서도 스스로는 겸손한 모습을 지니도록 보호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마리아를 가장 낮은 데서 가장 높은 데로 들어 높이고 빛나는 모습에서 더욱 빛나는 모습으로 바꾸어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었음이 분명합니다.
성신이 내재하시며 가르치시는 대로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의 명령에 순종하였기에 동정녀의 마음은 참으로 복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뜻을 따라 멋대로 행동하지 않고 오직 내적으로 믿음을 위한 지혜가 지시하는 대로 외적으로도 육신의 봉사를 다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지혜는 몸소 거처하실 교회의 집을 지으시면서 계명을 지키고 마음을 깨끗이 하며 겸손의 규범과 영신적 봉헌의 모범을 지극히 거룩한 마리아 안에서 발견하도록 섭리하셨습니다.
신자 여러분, 마리아를 본받으십시오. 영신적으로 깨끗해지고 죄의 더러움을 씻기 위하여 마음의 장막으로 들어가십시오. 거기서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께서는 일보다 마음을 중시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관상의 노력으로 이성을 초월하여 하느님만을 섬기든지 덕행을 쌓고 권장되는 활동으로 이웃에게 봉사하든지 다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재촉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 듯에 맞는 영식적 봉헌이요, 손으로 지은 장막이 아니라 마음의 장막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며, 이 마음의 장막으로 주 그리스도께서 기꺼이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마음 안에>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음 안에
너를 품은
이가 있고
마음 안에
나만 사는
이가 있다
마음 안에
선이 싹 뜨는
이가 있고
마음 안에
악이 똬리를 트는
이가 있다
마음 안에
정성껏 품는
이가 있고
마음 안에
함부로 내치는
이가 있다
마음 안에
살리기 위해 죽는
이가 있고
마음 안에
살기 위해 죽이는
이가 있다
마음 안에
곱게 살아나는
이가 있고
마음 안에
밉게 죽어가는
이가 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함승수 신부님
어제가 하느님 아버지를 믿고, 인간을 지극히 사랑하신 예수님의 성심을 기념하는 축일이었다면, 오늘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순수하고 깨끗한 마음에 대해 묵상하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성모님의 마음에는 인간의 마음 안에 깊이 박혀 영혼을 병들게 하는 두 가지 ‘옥의 티’가 없었습니다.
첫째, 하느님의 말씀과 뜻을 의심하여 불안해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성모님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했습니다. 그 뜻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도무지 예측할 수 없고 이해하기 어려워도, 그 과정에서 자신이 크나큰 곤란과 어려움을 겪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태로울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하느님의 말씀이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셨습니다. 그런 희망이 있었기에 당신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채 죽어가는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을 끝까지 견디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불신 없이 희망으로 가득찬 마음, 성모 성심의 첫번째 특징입니다.
둘째, 내 뜻대로 하고자 하는 욕심과 고집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순종’만 있었을 뿐입니다. 순종은 하느님의 말씀을 ‘머리’가 아닌 ‘마음’에 간직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머리’에만 받아들이면 그것을 이해하려고 들기에 금새 벽에 부딪힙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인간의 이성과 논리로는 이해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내 행동과 삶이 그분 뜻에 따라 변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어머니는 자식이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자기 마음을 아프게 할 때 회초리를 들지만, 성모님은 예수님께 당신의 뜻과 기준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받아들여 간직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장 내 입에 쓰다고, 지금 이해하거나 납득하기 어렵다고 뱉어내시지 않고,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머금은 채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몇 번이고 곱씹으셨기에, 그 말씀이 지닌 참된 맛을 느끼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열심히 성경 말씀을 읽고 공부해도 삶이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받아모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내 마음을 내어드리지 않고 그분을 내 부족한 머리로 분석하며 이용하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주님을 닮은 거룩한 모습으로 변화되기를 바란다면,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간직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내 욕심과 고집을 버리고 하느님을 굳게 믿으며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노력이 우리의 영혼을 깨끗하게 정화시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 잃은 주님 찾아가자 <루카 2, 41-51> 6월 1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오늘 성전에서 아들을 잃고 3일간 길을 헤매던 마리아와 요셉은 성전에서 주님을 만났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잃으면 잃어버린 자리에 찾아가 살피며 찾아봅니다. 우리의 삶은 잃어버리고 잊고 떠나는 것으로 마음에 상처를 받고 괴로워합니다.
귀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도 찾지 않은 사람, 잃어버린 것을 잊고 사는 사람 등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목숨을 내놓고 투쟁하는 사람, 아니면 열정을 다하여 어디든지 찾아 나서는 사람입니다.
요사이 코로나 위기로 믿음을 잃으며 주님을 잃고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잃은 이유는 아버지 집을 떠난 작은아들과 같습니다. 시간이 없어서, 희망 없는 것에 희망을 두고 있어서, 재산을 가지고 힘깨나 쓰던 작은아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광야에서 헤매다가 ‘아버지 집으로 가자’하는 생각이 들어 찾아가서 아들인 자기를 되찾았습니다. 사실 잃는다는 것 중 가장 큰 잃음은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아버지 집에 가서 종이 아니라, 아들로서 권리를 되찾았습니다. 주님은 아버지를 떠나 세상에 오셨지만, 아버지 집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아버지의 영에 접근하여 당신의 사명을 반추하셨습니다. 연 3일이나. 그 열정을 우리도 따라 행하며 나의 사명을 찾아 실천하도록 해야 합니다.
아들을 잃은 사람, 병으로 사고로 악마의 손에 죽임을 당하면 당황하고 ‘잃은 아들을 어디서 만날까?’ 하지만 역시 아버지 집입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울면서 찾아와 죽은 아들을 걱정하며 자기도 죽어야 하겠다고 하기에 “아니, 죽은 아들이 어디에 갔는지 알고 있으면서 왜 없는 데서 찾고 수고하십니까?” 분명히 여기는 없으나 아버지 집에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비로우신 분으로 어떤 죄인도 당신 앞으로 부르십니다. 어떤 이는 “내 아들은 냉담하다 죽었는데요.” 하지만 지옥은 하느님을 직접 대항하고 반란을 일으킨 악마나 가는 곳이지 사람으로 태어나 모든 것을 모르고 실수나 유혹에 빠진 사람은 자비로 구하십니다. 아들 만나러 하느님 아버지에게 가시면 거기 있습니다. 아버지는 주의 기도문 안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부르면 “나 여기 있다.” 하시며 찾는 사람과 함께 현존하십니다.
어느 날 어떤 오래된 냉담자가 찾아와 “저는 살다 보니 이것저것 해야 하고 한눈팔고 살다가 주님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기도문을 놓고 시작부터 함께 기도하며 해설을 해주니 눈물을 흘리며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주님을 찾고 다시 교회 생활하겠다고 하면서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혹시 카톡 친구 중 그런 사람 있으면 지금 어떻게 사시는지 조용히 저에게 알려 주세요. 기도합니다.
믿음을 잃고 광야를 헤매는 사람 있으면 자비로운 아버지를 찾아 나서고, 만나서 성모님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살았듯이 기쁨의 삶을 살기를 기도합니다. 주의 기도는 아버지를 찾아 만나는 기도이며 기도 한번이 잃은 주님을 찾아 얻는 기회입니다. 아버지 집으로 가세요. 거기에서 우리의 참 사명이 주어집니다.
성모 성심, - 하느님 중심의 삶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6월 예수성심성월중 어제의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흡사 9월 순교자성월중 성 십자가 현양 축일(9.14)에 이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9.15)의 배치와 흡사합니다. 아드님 예수와 어머님 마리아가 얼마나 깊은 사랑 관계에 있는지 깨닫게 됩니다.
마침 며칠전 읽었던 일간신문 컬럼 일부도 생각납니다. ‘초록이 넘쳐나는 6월이면 한국전쟁의 상흔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이 계절에는 잊고 지내던 군가들이 생각난다. 군대 경험이 있는 이 땅의 사내들에게 가장 감동적인 군가는 무엇일까?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 마음’이다. 고된 훈련 중간의 휴식 시간에 조교들이 ‘노래 일발 장전’을 외치며 이 노래를 시켰다.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에 이르면 모든 훈련병들이 통곡을 하였다. 그야말로 모든 사나이를 울리던 노래였다.’
예수님과 성모님과의 관계는 그대로 우리와 또 다른 성모님이신 우리 어머니와의 관계를 생각나게 합니다. ‘한생을 주님 위해’ 라는 성모 성가(248장)도 생각납니다.
“한 생을 주님 위해 바치신 어머니, 아드님이 가신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고 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네.”
모전자전, 그 어머니에 그 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성모님의 삶을 보고 배우셨음이 분명합니다. 오로지 하느님 중심의 삶을 통한 거룩하고 순수한 마음, 성심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온마음을 다해 사랑하셨던 성모님이셨고 아드님 예수님도 타고난 하느님 사랑에 더해 성모님의 하느님 사랑을 보고 배우셨음이 분명합니다.
사랑의 열정과 순수는 함께 갑니다. 하느님을 찾는 구도자의 우선적 자질이 열정과 순수입니다. 열정이 있을 때 순수요,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은 사랑의 열정입니다. 참으로 죄가 없어서 순수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책감에 아파하기보다는 더욱 주님을 사랑함이 지혜로운 해결책입니다. 열렬한 사랑은 성덕의 잣대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찬미로 표현됩니다. 끊임없는 바치는 사랑의 찬미가 예수성심을, 성모성심을 닮게 합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평생 찬미와 감사의 공동전례기도를 바치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우리를 부단히 정화하고 성화하여 세상의 소금으로, 빛으로 살게 하는 하느님 찬미요, 이 하느님 찬미의 삶이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해 줍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아름다운 고백은 성모님은 물론 우리 모두의 고백처럼 들립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위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찬미하는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하느님의 한량없는 은총을 상징합니다. 오늘 화답송 후렴인 사무엘 상권에 나오는 한나의 노래는 하느님 찬미는 그대로 마리아 성모님의 노래를 연상케 합니다.
“저의 구원자 주님 안에서 제 마음 기뻐 뛰노나이다.”
바로 찬미의 기쁨이, 찬미의 사랑이 우리 마음을 정화하고 성화하여 날로 예수성심을, 성모성심을 닮게 합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소년시절 예화를 대하면서도 예수 마리아 요셉의 가정이 얼마나 하느님 중심으로 일치를 이룬 성가정인지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 예수님이 열두 살 되던 해에도 이 축제 관습에 따라 따라 그리로 올라갔다.’
그대로 일상화된 신앙의 성가정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복음의 첫 구절입니다. 이어 잃어 버렸던 아드님 예수를 성전에서 찾아낸 성모님과 예수님의 대화가 의미심장합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왜 저를 찾았습니까? 저는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미 아버지의 집인 성전은 예수님 삶의 중심에 확고히 자리잡고 있음을 봅니다. 새삼 하느님 중심의 삶에 가시적 성전이 얼마나 결정적 역할을 하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에서 성모님은 충격과 더불어 깊은 깨달음의 계기가 되었던 듯 합니다. 두분은 모자지간이지만 하느님을 찾는 여정에서 참 좋은 영적도반이기도 했음을 봅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대목이 깊은 울림을 줍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참 아름다운 성가정의 분위기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은 진위는 순종의 열매로 드러납니다. 성모님 역시 순종과 인내의 믿음으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깊이 새겼음이 분명합니다. 위대한 영혼의 특징은 담아두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순종으로 끝까지 담아 두고 되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찾아 내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내면이 얼마나 깊고 넓은지 깨닫습니다. 이런 마음은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이 아닌 인격적 응답을 합니다. 이렇게 담아두고 되새길 때, 부패인생이 아니 향기로운 발효인생이 됩니다.
문득 어제의 깨달음이 생각납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은 ‘바위와 흐르는 물’같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의 내면의 마음이 이러했을 것이며 우리 또한 이렇게 된다면 참 이상적이라 생각됩니다. 아픈 상처의 부정적 추억들은 즉시 흐르는 물에 새기고, 고맙고 좋은 아름다운 긍정적 추억들은 마음의 바위에 새겨 두는 것입니다. 이래야 마음의 건강, 몸의 건강입니다.
그러나 마음의 현실은 대부분 이와 반대로 전개되는 듯 보입니다. 감사의 좋은 긍정적 추억들은 흐르는 물에 새겨 말끔히 잊어 버리고, 아픈 상처의 추억들은 마음의 바위에 새겨 끊임없이 아파하고 괴로워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성모 성심의 마음으로 바꿔주시고, 부정적 추억들은 흐르는 물같은 마음에 새기고 좋고 아름다운 추억들은 바위같은 마음에 새기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름다운 본기도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하느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마음 속에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들으시어, 저희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아멘.
하느님을 만나는 곳
김용태 안드레아 신부님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찾아오면 전화라도 걸어 어떻게 지내는지 안부를 묻습니다. 만날 수 있다면 만나자는 약속을 하기도 합니다. 정말 보고 싶은데 아쉽게도 만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슬프게도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먼저 떠나간 사람들이지요. 그럴 때면 그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이나 물건을 바라보기도 하고 그 숨결이 느껴지는 장소를 찾기도 합니다. 때때로 하느님이 보고 싶고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분의 품에서 편안히 쉬고 싶은 마음, 내 속에 있는 응어리를 다 털어버리고 싶은 그런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어요. 그런데 막상 그때가 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사실 하느님은 가까운 곳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 일상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은 성당입니다. 그분의 말씀이 선포되고 그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죠.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고 싶다면 아버지의 집으로 가면 됩니다. 예수님처럼요.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아버지의 집으로 가면 됩니다. 늘 거기 계시니까요. 그리고 그 성전은 우리 자신이기도 합니다. 멀리 가지 마세요. 하느님은 바로 우리 곁에서, 내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 48)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아름다운
것은 어머니의
마음이다.
우리가 있기까지
어머니의 마음이
계셨다.
우리가 기쁘면
어머니께서도
기쁘시다.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은총의
시간이다.
마음은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어머니의 삶이란
끊임없는 사랑의
연속이다.
절절한
어머니의
삶이며
마음이시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마음을 지켜내는
일이다.
마음이 마음을
보살피고
마음이 마음을
씻어준다.
마음은 실천을
먹으며 살아간다.
티 없이 깨끗하신
기도의 삶이 있다.
어머니의
마음에서
희망의
실마리를
찾는다.
깨끗하신 마음은
깨끗한 실천을
낳으신다.
마음은 말씀을
실천할 때
거룩한 마음이
된다.
말씀으로
마음가짐을
새롭게 하는
티 없이 깨끗한
어머니의 아침이다.
너와 나의
관계안에
애타게 찾는
마음이 있었다.
마음자리는
말씀의
자리이다.
신학생 때 교수 신부님 중에서 강의 내용이 너무 어려운 분이 있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인지 알아듣기가 힘들어서 공부 잘하는 친구에게 설명을 부탁하곤 했지요. 친구의 설명을 들으니 그렇게 어려운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면 쉬운 내용도 어렵게만 들렸습니다.
그렇다면 이 신부님은 우리를 골탕 먹이려고 부러 어렵게 말씀하신 것일까요? 나중에 신부가 되어 이 신부님을 우연히 만날 수가 있었고, 이 자리에서 신학생 때 신부님 과목 때문에 너무 힘들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러자 은사 신부님께서는 두 눈이 커지면서 “왜?”라고 반문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은 최대한 쉽게 풀이했다고 하시더군요.
신학생들을 힘들게 하려고 일부러 어렵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분은 쉽게 말하는 것이 힘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일부러 어렵게 가르치신다고 생각하면서 부정적인 마음을 갖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남에 대해 자신의 잣대를 내세워서 판단하곤 합니다. 그리고 그 판단이 부정적이었을 때는 자신의 반대편에 그 사람을 놓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 잣대보다 상대방의 잣대로 바라봐야 온전히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자기 잣대만을 내세웠기에 반대했고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이 아닙니까? 상대방의 잣대, 무엇보다도 주님이라는 기준의 잣대가 우리 안에 필요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잣대를 절대로 내세우지 않았던 분이 바로 성모님이십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그리고 요셉 성인은 관습에 따라 파스카 축제 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고 다시 돌아가다가 당시 열두 살이던 예수님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성전에 율법 교사들과 토론하고 있는 예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마음을 생각해보십시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마음이 얼마나 새카맣게 변했겠습니까?
더군다나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화가 날 만도 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하신 당신의 권능과 영광을 말씀하신 것이지만, 아직 성모님께서는 이런 권능과 영광을 알아채기는 부족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성모님께서는 자신의 잣대를 세워서 예수님을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이를 성경은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라고 표현합니다.
끝까지 하느님 기준의 잣대를 간직했던 성모님의 마음, 이렇게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의 마음을 기억하고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옷감은 선과 악이 뒤섞인 실로 짜여진 것이다(셰익스피어).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제 머리가 상당히 좋다고 생각합니다. 강의와 미사 강론 때 원고를 전혀 보지 않는 모습 때문입니다. 절대로 아니라고 말씀드리면, 원고를 모두 외워서 하는 것을 보면 좋은 것이 분명하다며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라는 말씀까지 하십니다. 물론 아주 돌머리는 아니겠지만 그렇다고 썩 좋은 편은 아닙니다.
원고를 외우게 된 것은 저의 ‘눈’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실 원고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컴퓨터를 많이 해서인지 노안이 일찍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집중하지 않으면 글씨 읽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외우려고 노력하다 보니 외우는 요령도 생기고, 말을 하는데 여유가 생긴 것입니다.
잘 보이지 않는 눈이 단점이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저를 성장시켜주는 장점이 된 것입니다. 일찍 찾아온 노안 역시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단점이라 생각하는 것들, 고통과 시련들. 이것들이 제발 내게 오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그것 자체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의미를 찾으려고 애쓰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장점을 찾게 된다면 이것 자체를 넘어서는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성모님의 신비를 이해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질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돌아보니 한없이 부실한 내용이었지만 가톨릭평화방송과 성바오로 수도회가 공동 주관한 아레오파고스 성모님 편 열번의 강좌를 끝냈습니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크게 느낀 것 한 가지는 우리 가톨릭 신자들께서 지니고 있는 성모님에 대한 오해나 편견이 상당하다는 것입니다.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가 명확히 이해하는 것은 진정한 가톨릭 신자로서 살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일임을 다시금 재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 신심에 있어서 늘 주의해야 할 것은 성모님에 대한 지나친 과장이나 확대해석, 왜곡이나 그릇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성모 신심은 결코 단독 교과목이 아닙니다.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론과 결부시켜야 마땅합니다. 성모 신심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중심에 계시고, 그 옆에 성모님이 계십니다. 성모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성모님의 신비를 이해하면 할수록 예수님의 신비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깊어질 것입니다.
성모님이 공경받으실 때, 그것은 아들 예수님께 영광이 됩니다. 성모님이 찬미받으실 때, 그것은 아들 예수님께 영예가 됩니다. 두 분을 뗄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 속에 계십니다. 인류 구원 사업이라는 사명과 운명을 공유하신 분들이기에 그렇습니다.
척박한 산골 나자렛에서 태어나신 마리아께서 평생에 걸친 순명과 기도, 각고의 노력 끝에 영광스럽게도 하느님의 어머님이 되셨습니다. 성모님의 생애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각자에게도 큰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한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우리도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하느님의 큰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을 오늘 우리는 기억해야겠습니다.
어제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 우리는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보시는 것처럼 두분은 언제나 딱 붙어 계십니다. 성모님의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두 마음은 언제나 함께, 한 방향을 향해 나아갑니다. 두 마음은 언제나 굳게 결속되어 있습니다.
오늘 읍내 병원에 다녀오다가 특별한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면사무소를 지나오게 되면, 그 뒤로 저희 수도원까지는 차량 통행이 거의 없는 한적한 도로입니다. 분교 앞을 지날 때였습니다. 예쁘게 생긴 어미꿩의 인도에 따라 열마리나 되는 아기꿩들이 줄줄이 차도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녀석들이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도록 멀찌감치 차를 세우고, 진풍경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마음 속으로 녀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나쁜 사람 아니란다. 내가 지켜줄테니 다른 차들 오기 전에 빨리들 건너가거라!’
제가 갑자기 나타난 돌발 상황 앞에 어머꿩은 엄청 당황한 것 같았습니다. 도로 중간 쯤에서 앞으로 나아가려다가, 잠시 멈췄다가, 다시 생각을 바꿔서 아기들을 이끌고 나름 초스피드로 건너갔습니다. 부화한지 얼마되지 않은 아기꿩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어미꿩을 따라갔지만, 보폭이 짧은 탓에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아기 꿩들에 대한 걱정 때문에 노심초사하는 어미꿩의 모습이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모성이라는 것 정말 대단하다는 것을 새삼 느꼈습니다.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하고 나면 그 뒤로는 완전히 어미 자신을 잊습니다.
하루 온 종일 목숨까지 걸어가며 새끼들을 먹여 살립니다. 혹시라도 침입자가 새끼들을 공격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그렇게 힘든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성모님 역시 아기 예수님을 출산하신 이후의 삶, 보통 어머니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품에 앉은 성모님의 마음은 다른 어머니들보다 더욱 특별했을 것입니다. 더 조심스러웠고, 더 노심초사했고, 더욱 많은 신경을 쓰셨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날로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순간 순간 지켜보신 성모님은 혹시라도 나로 인해 아기 예수님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떡하나 걱정이 태산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성모님은 늘 묵묵히 예수님을 위해 엄마로서의 최선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에 늘 계셨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언제든지 응했습니다.
잠시도 떨어져있지 않고 예수님 주변만을 맴돌며,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예수님만을 연구하고, 예수님만을 관상했던 예수님의 사람이 바로 성모님이셨습니다.
교회의 어머니요, 세상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어머니이신 성모님께서는 아들 예수님을 향해 지니셨던 똑같은 마음으로 오늘 우리 각자를 굽어보십니다. 어린 새같은 우리가 걱정되서 늘 노심초사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런 탈없이 하루 하루를 지내기를, 아버지의 따뜻한 품을 떠나 방황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계십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찾는 마음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어제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그런데 그 앞에 ‘티 없이 깨끗하신’이란 수식어가 붙습니다. 죄가 없으시다는 뜻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원죄까지도 없으시기에 ‘죄에 물들지 않은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죄가 없는 마음이란 어떠한 마음을 말하는 것일까요? 어린이와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를 짓지 않게 만드는 분 곁에 있어야 합니다.
영화 ‘블랙 스완’에서 주인공은 어머니의 뜻을 따라주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여인입니다. 어머니가 자신을 낳기 위해서 발레를 포기하였기에 자신이 어머니의 꿈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도 누군가와 깨끗하지 못한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어머니가 원하지 않는 행동을 집에서 하게 됩니다. 아침이 되어 눈을 뜨니 어머니가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습니다. 너무나 화들짝 놀랐습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을 다 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어머니는 눈을 감고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밤새 자신의 침대 옆에 있었던 것입니다. 혹시 자신의 행위를 다 보았는지 몰라 주위를 살펴보니 아무도 없었습니다. 죄를 짓는 꿈을 꾼 것이었습니다. 죄를 짓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사람을 멀리해야 합니다. 반대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와 반대되는 뜻을 가진 분을 찾아야 합니다.
제가 어렸을 때 부산 외가댁에 처음으로 간 날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일단 어머니와 외가 친척분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투리를 처음 들어보았기 때문입니다. 잘은 알아들을 수 없지만 외삼촌들에게 저를 맡기고 가신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잘못 들었거니 했는데 다음 날 아침 일어났을 때 어머니가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여기저기 어머니를 찾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외할머니가 말씀하시기를 어머니는 밑에 층에서 목욕하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저를 버리고 간 줄 알고 무척 불안했었습니다. 외가댁은 목욕탕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를 찾던 제가, 어느 순간부터는 어머니를 더는 찾지 않았습니다. 죄가 커지는 사춘기 때부터였습니다. 어머니가 계시면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도 안 좋은 비디오를 보다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면 화들짝 놀라 테이프를 빨리 빼곤 하였습니다. 부모의 법이 아니라 내 안의 법을 따를 때는 이렇게 부모를 찾지 않을뿐더러 그분이 함께 있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죄가 커질수록 부모를 찾는 마음이 식어갑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죄와 반대되는 법을 가지신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예수님을 잃으셨습니다. 자녀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찢어지듯 아플 것입니다. 자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여길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에너지를 총동원해 자녀를 찾습니다. 이사야서의 이 말씀이 꼭 성모 마리아의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밤새도록 당신을 그리는 이 마음, 아침이 되어 당신을 찾는 이 간절한 심정! 당신의 법이 세상에 빛나는 때 세상 주민들은 비로소 정의를 배울 것입니다.”(이사 26,9)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몰라 밤새 찾고, 아침이 되어서도 찾으려는 마음. 이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죄와 반대되는 법이고 그 법대로 사는 것이 정의입니다.
오즈의 마법사에 자신에게 없는 심장을 찾겠다는 양철 나무꾼이 있습니다. 왜 심장을 찾으려고 했을까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이미 심장이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찾으려는 마음이 이미 거룩한 마음입니다. 눈이 보이지 않던 헬렌 켈러도 이 진리를 깨닫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햇살을 향해 얼굴을 들어라. 그러면 그림자가 안 보인다. 해바라기가 그렇게 한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죄의 어둠에 들지 않습니다. 죄로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기를 원하지 않아서 그분의 법만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이 하느님 나라에 이르게 하는 길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을 찾고 나니 결국 ‘아버지 집’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물으십니다.
죄에서 구원해 줄 예수님을 찾는 마음만 있다면 이미 죄에서 벗어나기를 원한 것이고 또 벗어나고 있는 것이고 어쩌면 이미 아버지의 집에 도달한 것입니다. 이 간절히 찾는 마음이 곧 성모 마리아의 마음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은 현충일이 6월 6일입니다. 그런데 미국의 현충일은 5월 마지막 월요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쉬는 날이 주말과 겹쳐지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처음 맞이하는 날이라서 착각했습니다. 같이 일하는 직원 중에도 한명이 착각하고 출근했습니다. 이왕 왔으니 오전만 근무하고 갔습니다. 지나치면 걱정이지만 살면서 착각은 웃음을 줄때도 있고, 긴장을 풀어주기도 합니다. 묵주기도를 하다가 착각하고 한단 더 할 때도 있습니다. 부모님께 생활비를 보내드려야 하는데 착각하고 한 번 더 보내드릴 때도 있습니다. 저도 선배 신부님의 착각 때문에 큰돈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본당으로 인사이동이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지구장 신부님께 새로 왔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지구장 신부님은 와서 점심이나 먹자고 했습니다.
저는 신부님을 찾아갔고 맛있는 점심을 먹었습니다. 식사를 마칠 무렵에 지구장 신부님이 쾌 큰돈을 주셨습니다. 저는 본당 신축하는 과정에서 빚이 남았는데 빚 갚는데 보태라는 걸로 알고 고맙게 받았습니다. 한 달 정도 지나서 지구장 신부님이 제게 전화를 했습니다. 착각했다고 합니다. 제가 새롭게 생긴 지구장 신부인줄 알았다고 합니다. 지구장으로 지내려면 활동비가 필요할 것 같아서 주었다고 합니다. 저는 이미 성당에 입금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신부님은 크게 웃으면서 그럼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인사를 잘 하니, 좋은 일이 생긴 것 같습니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착각, 공동체에 활력을 주는 착각은 가끔은 있어도 좋을 듯합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신부님께서 하느님나라에서도 기쁘게 지내시리라 믿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착각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잘못해도 용서해 주십니다. 우리가 또 다시 잘못할 걸 아시면서도 용서해 주십니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도 착각하십니다. 자식이 세상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여기십니다. 저의 어머니도 제가 가장 멋진 사제라고 착각하십니다. 자식이 힘들어하면 잘 할 수 있을 거라며 용기와 위로를 주십니다. 어머니에게는 자식의 직업, 능력, 학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에게는 그저 자식이니까 귀한 겁니다. 그저 자식이니까 사랑하는 겁니다. 성모님은 어린 예수님을 예루살렘에서 잃어 버렸습니다. 속에는 불이 났을 겁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겁니다. 예수님은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성전입니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모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합니다. 성모님께서도 ‘우리 아들 예수님이 최고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성모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모님의 마음을 어머니의 마음을 통해서 조금은 알 것 같습니다. 수녀님을 통해서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려와 양보, 헌신과 봉사’의 마음입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몸소 실천하는 삶입니다. 성모님께서 발현하신 곳을 찾아다니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성모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은 당신이 발현한 곳을 찾아다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던 것처럼 우리들 또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겸손하게 사는 것입니다. 기적은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기적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보여주시는 표징입니다. 내가 신앙 안에서 기쁘게 산다면 굳이 다른 기적은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표징이기 때문입니다.
매일 기도하고, 미사참례 열심히 하고, 이웃과 정을 나누면서 사시는 분들에게는 다른 기적이 필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를 드리고, 나쁜 일이 생기면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용기를 청하시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요구하고, 유대인들은 표징을 요구하지만 내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겸손의 길, 사랑의 길, 순명의 길이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는 참된 진리입니다. 이 길이 성모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주님은 비천한 이를 땅바닥에서 일으켜 세우시고, 가난한 이를 잿더미에서 들어 높이시어, 존귀한 이들과 한자리에 앉히시며,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게 하신다.”
하느님께 맡겨진 인생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우리는 태어나 살아 갑니다.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요? 나는 전능하신 분께 맡기고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자기 힘으로가 아닌 하느님께 모두를 맡기고 사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 앞에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분께 믿음의 사람들은 존경과 사랑을 드리며 경의를 표합니다. 하느님께 맡기고 인생길을 사셨기에 나도 그분의 마음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어느 날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그분께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했습니다. 그 응답으로 인생길이 새롭게 하느님 안에 이루어져 갔습니다. 결코 있을 수 없는 일 일 때라도 당신께 대한 응답에 충실하며 마음 속에 간직하고 살았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 중에 가장 복되신 분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손에 나를 온전히 맡긴 덕분입니다.
우리는 오늘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을 지냅니다. ‘성모님의 노래’에서 잘 표현된 마리아의 거룩한 마음을 봅니다. 내 힘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려 하지 않고 ‘주님의 종’ 하느님 손에 맡깁니다.’ 이해가 안 갈 때라도 마음 속에 간직하고 묵묵히 걸었습니다. 내가 오리무중일 때, 성모님 마음으로 저도 모두를 하느님께
맡기려 노력합니다.
오늘 지인과 함께 지냈습니다. 믿음의 사람입니다. 20년을 올곧게 살며 명품 브랜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의 영향으로 SOS 상황입니다. 위기는 기회입니다. 무슨 뜻인지 잘 살펴 이를 극복하자며 성모님 이야기를 꺼내 하느님 손에 맡기자고 했습니다. ‘주님의 종’ 주님께서 어여삐 보아주실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내 힘으로 살려하지 말고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그분은 기도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이야기 속에 성모성심으로 큰 위안을 받고 헤어졌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지인은 오늘 일이 힘들지만 곰곰히 생각하고 이루어 가겠다고 말해주었습나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가족은 파스카 축제 때 예루살렘으로 올라갔고, 축제 기간이 끝나고 돌아갈 때 소년 예수님을 잃어버리게 되어 찾다가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 때 성모님이 예수님께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고 복음은 전합니다.
성모님께서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다는 의미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고 하느님 안의 의미를 마음 속에 고이 간직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전에 영성지도 신부님께서 면담 중에 자주 이런 질문을 제게 던지셨습니다. ‘자네에게 벌어진 일들과 하느님과의 연계성은 어떻게 되는가?’ 사실 저는 당시 그 질문에 무척 당혹해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진정한 신앙인은 오늘 복음의 성모님의 모습처럼 자신에게 벌어진 일들 안에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늘 생각하고 마음속에 고이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할 수 있고, 그렇게 그분의 뜻대로 이루어진 시간 속에서 우리는 영원한 행복을 살아가게 될 것을 믿습니다.
“마리아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간직하였다.' - 성체성사의 실천 ⓺ 기억하고 다짐함
이기우 신부님
성모 성심을 공경하는 신심은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련스럽게 생겨났습니다. 이 신심의 전통은 성모 마리아를 기억하는 신자들이 살고 있었던 초대 교회 시절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신자들은 예수 성심의 주요한 고비들, 즉 강생의 신비와 십자가의 신비와 부활의 신비마다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셨던 성모 마리아께 공경하는 마음을 지니고자 노력하였고, 자신들도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 예수 성심을 닮으려고 노력하는 일이 신앙생활의 주요 부분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교회의 역사가 숱한 변화를 겪으면서 흘러갔어도 신자들 사이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근세기에 성모 신심을 공경하는 마음이 가장 뜨거웠던 곳은 영국과 프랑스 교회였고, 이곳 출신 선교사들이 조선 교회에 이 신심을 전해줌으로써 한국 가톨릭교회의 신자들도 성모 성심에 대한 뜨거운 공경심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특히 두 가지 사실(史實)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2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라우렌시오 앵베르(Laurent Joseph Marius Imbert. 한국명 범세형) 주교가 프랑스 남부 엑스(Aix) 교구의 마리냔(Marignane) 본당 관할 브리카르(Bricart) 출신이어서 각별한 성모 신심을 물려받아 전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께 대한 신심이 뜨거웠던 출신 지방 신자들의 영향으로 앵베르 주교는 자신이 박해 받던 조선교회의 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자, 조선천주교회의 주보성인으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로 정해줄 것을 교황청에 청원하였습니다. 이때가 1841년입니다. 이 신심이 믿을 교리로 정식 반포된 때는 1854년인데, 13년이나 앞서서 앵베르 주교는 이미 그 신심을 박해받던 조선 신자들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겁니다. 훗날 제8대 교구장 뮈텔 주교는 박해가 종식되고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나서 1898년에 명동성당을 축성할 때 조선천주교회의 주보성인이신 무염시태 성모께 봉헌하였습니다.
앵베르 이후의 선교사들도 박해시기 동안 매괴회, 성모회 등의 신심단체를 조직하여 성모 신심을 육성함으로써 대표적인 공적 신심으로 자리잡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성모 신심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활발해지게 된 계기는 레지오 마리애가 도입되면서부터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사실은 이 레지오 마리애를 아일랜드 출신의 선교사 모란 신부가 1953년에 목포 산정동 성당에서 첫 회합을 가짐으로써 도입하였고, 이후 전국 교구와 본당에 확산시켰다는 것입니다.
레지오 마리애에 속한 단원 신자들은 매주 회합 때는 물론 매일의 의무 기도를 통하여 까떼나에 적혀 있는 성모 찬송을 바칩니다. 이 기도에는 예수님의 파스카 과업을 기억하고 간직하려는 지향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바치는 성무일도에도 저녁기도 때마다 찬미가로서 이 성모 찬송을 바치게 되어 있습니다.
성모 찬송에서 마리아께서 하느님께 찬송을 드리는 파스카 과업은 세 가지 지향으로 되어 있습니다. “당신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시어 마음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도다.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올리셨도다.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셨도다.”
성령께서도 이사야 예언자에게 알려주셨고 예수님께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메시아가 수행할 파스카 과업의 방향으로 알려주신 큰 방향은, 마음이 교만한 자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방향 자체가 하느님 팔의 큰 힘을 떨쳐 보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권세 있는 자들이 아니라 미천한 이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의 육체적이거나 정신적인 고통을 치유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활동을 주로 하셨음은 그들을 끌어올리시는 일에 해당합니다. 처녀 시절 주님의 탄생을 예고받고 엘리사벳을 만난 자리에서 읊었던 이 노래는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에는 물론 마리아의 일생 내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다짐한 지향이었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느라 그들을 찾아다니시고 어울리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함께 잔치를 베푸신 활동은 주리는 이를 은혜로 채워 주시고 부요한 자를 빈손으로 보내시는 일에 해당됩니다. 이 지향 역시 예수님의 공생활 동안에는 물론 마리아의 일생 내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하고 다짐한 지향이었습니다.
이상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오늘 미사의 지향인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기념하는 일은 독서와 복음의 말씀을 조목조목 기억하는 것보다는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고 우리들의 성모 신심이 간직해 온 지향을 점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모 성심은 예수 성심을 본받기 위한 것이며, 특히 예수님의 파스카 과업을 기억하기 위한 것입니다.
일편단심一片丹心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어제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낸 다음 오늘 어머니의 성심 축일을 지냅니다. 이는 아드님의 축일을 지내면 어머니 축일도 지내야 한다는 교회의 전례 정신을 반영하는 것임에 틀림이 없지요.
그런데 두 분의 성심을 같이 축하하고 기념하지만 올해 저에게는 두 분의 마음이 다르게 다가옵니다.
물론 사랑의 마음이라는 면에서는 다를 바 없지만 주님 마음 안에는 우리 인간이 있는 데 비해 성모님 마음 안에는 성자께서 계신 것이 차이지요.
그래서 주님 마음은 피 흘리시는 마음인 데 비해 성모님 마음은 성자를 모시기 위한 깨끗하신 마음입니다.
물론 아드님을 봉헌하실 때 성모님 마음도 창에 꿰 찔리는 고통을 겪으실 거라고 시므온 노인이 예언한 대로 성모님도 피 흘리시는 마음이시지만 주님이 우리 인간 모두를 위해 피 흘리시는 것이라면 성모님은 일편단심 주님을 위해 피 흘리시는 것이 차이점이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모님 마음은 주님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 한 조각의 붉은 마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조각조각 나 있지만 성모님 마음은 한 조각입니다. 우리에게는 분심이 많지만 성모님께는 분심이 없고 오직 한 마음입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자녀들에게 일편단심이니 성모님은 더 그러시겠지요?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주님을 향한 마음 외에 다른 마음은 없는 것이요, 우리 마음에 주님 사랑 외에 다른 것들은 깨끗이 다 치워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마음이란 마음 안에 쓰레기들을 다 치워버린 마음입니다.
그렇다면 쓰레기들이란?
욕심, 근심, 걱정, 시기, 질투, 미움 등 우리 마음 안에 사랑 아닌 모든 부정적 감정들, 그리고 사랑일지라도 주님 사랑이 아닌 사랑들이 아닐까요?
<티 없이 깨끗한 마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티 없이 깨끗하신
당신을 모시려
내 마음을
티 없이 깨끗하게
티 없이 깨끗하신
당신을 모시니
내 마음은
티 없이 깨끗해지고
티 없이 깨끗하신
당신을 모신만큼
내 마음은
티 없이 깨끗하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성모 성심 공경은 17세기 프랑스 출신의 요한 외드 성인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는 예수 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것입니다. 성모 성심 공경은 19세기에 별도로 날을 잡아 기념하기 전까지는 예수 성심 미사에서 기억하는 형태로 전례 안에 들어왔습니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이 기념일을 온 교회가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8월 22일이 기념일이었는데, 1996년부터는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날로 옮겨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의 부모님은 부끄럽게도 아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히고 찾아나선 나머지 사흘만에 성전에서 학자들과 토론하고 계신 것을 발견합니다. 성경은 “그의 말을 듣는 이들은 모두 그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하였다.”(루카 2,47)라고 전합니다.
이어서 예수님의 부모는 그를 보고 무척 놀라서 예수님께 묻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48절) 그러자 예수님은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라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그런지 예수님의 부모는 “예수님이 한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50절)고 합니다. 그 후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고,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라고 전합니다.
기도하면서 문득 인간적인 생각이 하나 들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실 때, 예수님의 마음을 두실만한 사람을 하나 정도는 안배하지 않으셨을까?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아 처먹을 것만 받아먹고, 뒤돌아서는 예수님을 고발하고, 배반하고, 외면하고, 버려두고, 도망가버리는 세태에서 적어도 한 명 정도는 예수님 편을 안배하지 않으셨을까? 주 하느님께서 인간 세계에 내려가서 활동하시는 아들 예수님을 잘 알고, 예수님을 이해하며, 에수님의 생각과 행동을 지지해주며, 예수님을 믿고 따라주며, 예수님이 오해받고 박해받을 때 힘으로는 안 되더라도 마음만이라도 안타까워하며 변호하며 감싸줄 사람 하나 정도는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으셨을까? 아마도 그렇게 안배하는 분이 어머니 마리아가 아니실까 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에, 영원한 예수님의 편이신 어머니 마리아를 바라보며, 주님 보시기에는 여러 면에서 실망스러운 저이겠지만, 내 아버지와 어머니, 내 남편과 아내, 내 아이들, 내 친지, 동료, 이웃들에게, 나 자신이 죄가 아닌 면에서 거룩한 편이기를 성령께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다짐하고 기도하며 기대합니다.
성모 성심聖心의 삶, -사랑과 순수, 찬미와 감사, 겸손과 순종-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찬미의 기쁨, 찬미의 행복, 찬미의 아름다움입니다. 하느님 찬미의 기쁨, 찬미의 맛으로, 천상의 기쁨을 앞당겨 살아가는 찬미의 사람이 우리 수도자입니다. 성모 마리아님 역시 찬미의 여인이셨습니다. 아침 성모축일 성무일도 아름다운 찬미가 한연만 소개합니다.
“성모는 어좌로 나아가는 문/눈부신 하늘의 문이시로다 속량된 백성아 찬양들하라/동정녀 낳으신 영원한 생명”
어제 예수성심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성모성심 기념일입니다. 마음 같아선 성모성심대축일로 지내고 싶습니다만 겸손한 성모님은 기념 미사를 원하실 것입니다. 어쨌든 축일의 등급을 떠나 연이어 계속되는 기분 좋은 모자분의 축일입니다. 성모성심에 대한 신심은 예수성심을 공경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겨났고 19세기 전까지는 예수성심미사에서 기억되는 형태였습니다.
1942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의 파티마 발현 25주년을 맞아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께 세상을 봉헌하고 온 교회가 이 기념일을 지내도록 하였으며, 1996년부터 예수성심대축일 다음날로 옮겨 지내게 되었습니다. 성모님을 생각하면 곧 떠오르는 성가 248장입니다.
“한생을 주님위해 바치신 어머니/아드님이 가신 길 함께 걸으셨네 어머니 마음 항상 아들에게 있고/예수님 계신 곳에 늘 함께 하셨네.”
세상 누구보다 아드님 예수님을 사랑하셨고 하느님을 사랑하신 성모님이셨습니다. 늘 아드님과 또 하느님과 함께 하신 성모님이셨습니다. 사랑할 때 찬미요 순종이요 마음의 순수입니다. 죄없어 마음의 순수이기 보다는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은 예수성심처럼 그대로 지극히 순수한 마음을 반영합니다. 그처럼 아드님과 하느님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순수에서 샘솟는 열정의 사랑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산상설교의 참행복은 바로 예수성심은 물론 성모성심에 해당됩니다. 관상의 행복도 바로 여기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마음의 가난이요 마음의 깨끗함입니다. 하느님은 이런 이들의 마음을 성령의 거처로 삼으시고 당신의 성전이 되게 하십니다. 오늘 본기도를 통해 그대로 입증됩니다. 참 아름다운 기도문입니다.
“하느님, 복된 동정 마리아의 마음속에 성령의 거처를 마련하셨으니, 동정 마리아의 전구를 자비로이 들으시어 저희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게 하소서.”
기념, 기억할 뿐 아니라 우리 믿는 이들 역시 그대로 닮으라 있는 예수성심, 성모성심입니다. 참으로 우리도 아드님을 사랑할수록 예수성심이 되고 성모님을 사랑할수록 성모성심이 됩니다. 저절로 성령의 거처가 되고 주님의 성전이 됩니다.
사랑의 찬미입니다. 찬미의 기쁨을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랑으로 순수해진 마음에서 샘솟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살아가는 우리 수도자들입니다. 바로 오늘 이사야서의 아름다운 고백은 성모님은 물론 찬미의 사람들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들러 주셨기 때문이다.”
바로 찬미의 영적 은총을 상징합니다. 진짜 부자요 행복한 사람이 이런 찬미의 사람입니다. 인생광야에 꽃처럼 피어나는 찬미의 노래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샘솟는 찬미와 감사요, 찬미와 감사가 더욱 마음을 순수하게 합니다.
사랑의 찬미, 사랑의 순종입니다. 찬미의 아름다움이요 순종의 아름다움입니다. 참된 겸손은 순종을 통해 드러납니다. 사랑의 순종, 순종의 믿음입니다. 순종도 보고 배웁니다. 오늘 복음 마지막 부분이 깊은 묵상감입니다.
‘예수님은 부모와 함께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며 지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2,51)
예수님은 마리아 요셉, 성모님과 양부 요셉 부모의 순종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아니 서로 보고 배웁니다. 예수님의 부모 역시 아들 예수님으로부터 순종도 지혜도 보고 배웠을 것입니다. 세월의 나이와 저절로 함께 가는 순종이, 지혜가 아닙니다. 나이에 관계없이 참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 깨끗한 이들에게 선사되는 순종과 지혜의 은총입니다.
하여 수도생활의 직접적 목표는, 마음의 순수에 있고, 궁극의 목표는 하늘 나라에 있다 말합니다. 좌우간 모든 사랑의 수행이 목표하는 바도 마음의 순수와 자유입니다. 참으로 자발적 사랑의 순종을 통해 날로 깊어지고 넓어지는 마음은 그대로 성령의 거처가 되고 주님의 성전이 됩니다.
바로 성모성심이 그러합니다. 고결하고 위대한 영혼은 담아두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순종으로 깊어지고 넓어진 마음속에 이 모든 일을 간직한 성모님이셨습니다. 성전에서 말을 주고 받던 율법 교사들은 소년 예수님의 슬기로운 답변에 경탄했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와 더불어 예수님의 “왜 저를 찾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라는 말씀이 성모님의 평생 화두가 되어 평생 예수님과 함께한 삶으로 인도했음을 봅니다.
6월 예수성심성월은 예수성심을, 성모성심을 닮으라고 있는 참 아름답고 거룩한 초록빛 생명과 사랑으로 빛나는 달입니다. 사랑할 때 마음의 순수요, 여기서 샘솟는 찬미와 감사에 겸손과 순종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예수성심, 성모성심을 닮아 성령의 거처로, 당신의 성전으로 변모시켜 주십니다. 끝으로 오래 전 자작 애송시를 나눕니다. 아마 성모성심의 주님 향한 사랑이 이러했을 것입니다.
-“당신이 꽃을 좋아하면 당신의 꽃이
당신이 별을 좋아하면 당신의 별이
당신이 하늘을 좋아하면 당신의 하늘이
되고 싶다
늘 당신의 무엇이 되고 싶다”-(1998.12.25.). 아멘.
품고 기다리는 마음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사흘에 걸쳐, 잃었던 예수님을 겨우 찾았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하며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이십니다. 그런데 정작 더 놀라운 것은 이에 대한 성모님의 대응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아들을 꾸짖거나 그의 기를 꺾지 않으시고, 오히려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셨다고 하지요. 생각해보면, 상대를 들볶으며 답변을 재촉하다 관계가 틀어질 때도 있고, 또 지나치게 일을 서두르는 바람에 낭패를 볼 때도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당장 결과를 확인하고 싶은 조바심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이런 조바심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도 생기곤 합니다. 무언가 청하는 기도를 하고 그 즉시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거나, 이해할 수 없는 지금의 상황을 왜 나에게 허락하셨는지 당장 알고 싶을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씨앗에 싹을 틔우기까지 땅이 그 씨앗을 고이 품고 기다려야 하는 것처럼,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려면 그분의 때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아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까지 품고 간직한 성모님의 마음은, 그와 같이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기다리는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러한 성모님의 마음을 닮아, 우리도 품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사는 기쁨이 내게 가득하다.
최민석 신부님
행정구역은 담양이지만 생활권은 광주여서 일이 있어 광주시내에 나갔다가 빨리 자연생활관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담양 자연생활관에 누가 와 있는 것도 아닌데 마음이 자꾸만 곧 바로 돌아오고 싶어진다.
어제도 일을 마치고 곧 바로 집으로 돌아왔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지인께서는 “어디 또 다른 데 약속이 있나보지?” 하고 물었고 나는 짐짓 그런 약속이나 있는 것처럼 “네”하고 얼버무리고는 돌아왔지만 내가 한 일은 텃밭에 가서 풀 뽑고 밭 맨 것밖에 없다.
오후 내내 밭을 매면서 나도 혼자 생각해보았다. 누가 나를 부른 것일까? 낮부터 울어대는 소쩍새가 나를 부른 것일까. 꾀꼬리는 몸이 무거워진 암 꾀꼬리 둥지 옆에서 날개를 접고 오수를 즐기는지 아무 소리가 없고, 숲 건너 쪽에서 뻐꾸기만 한가하게 우는데 그 뻐꾸기가 나를 부른 것일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돌아오면 늘 잘 왔다는 생각을 한다. 자연생활관에 와 있으면 마음이 다시 청안해진다. 맑고 편안하다. 이 숲에 있는 모든 것들이 나를 부른 건지도 모르겠다. 너무나 돌아다니지 말고 같이 지내자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숲은 점점 녹음이 짙어지며 반짝반짝 생기가 돈다. 소쩍새 소리도 깊어진다.
야훼 하느님, 당신께서는 나를 환히 아십니다. 내가 앉아도 아시고 서 있어도 아십니다.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내 생각을 꿰뚫어 보시고, 걸어갈 때나 누웠을 때나 환히 아시고, 내 모든 행실을 당신은 매양 아십니다. 입을 벌리기도 전에 무슨 소리 할지, 야훼께서는 다 아십니다. 앞뒤를 막으시고 당신의 손 내 위에 있사옵니다.(시편 139,1-5)
그 아심이 놀라워 내 힘 미치지 않고 그 높으심 아득하여 엄두도 아니 납니다. 당신 생각을 벗어나 어디로 가리이까? 당신 앞을 떠나 어디로 도망 치리이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고 지하에 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에도 계시며, 새벽의 날개 붙잡고 동녘에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보아도 거기에서도 당신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이 나를 꼭 붙드십니다.(시편 139,6-10)
하느님이 아니 계시는 곳이 없다는 진실을 바로 알면, 비록 파도가 치고 전쟁이 일어나 총알이 빗발친다 하더라도, 거기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품이라는 사실을 알면 두려울 게 없다. 무엇을 바로 안다는 것이 이토록 중요하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뵙게 해달라니 무슨 말이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희는 믿지 않느냐? 믿지 못하겠거든 이 일을 보아서라도 믿어라.(요한 14,9-11)
아버지는 하느님과 하나 되는 길을 가르쳐 주고 보여 주려고 왔다. 그런데 하느님과 하나 된다는 말도 실은 어폐가 있다. 하느님과의 합일은 하느님과의 분리가 전제된 것이다.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있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다. 우리 인간 쪽에서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 쪽에서 보면 무엇과의 분리란 있을 수 없다.
나는 아버지를 등지고 떠났지만, 아버지에게 나는 여전히 품 안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 된다는 것은 하느님과 내가 본디 떨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새롭게 깨닫는 것이다. 역시 깨달음의 문제이다.
이 앎이라고 하는 것은 머리로 아는 지식의 차원이 아니라 몸으로 아는 것이기 때문에 곧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럼으로 하느님과 합일을 이룬다는 것은 곧 존재하는 모든 것과 내가 하나라는 사실에 근거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남이 없다. 남이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그 길을 가르쳐 주고자 오셨다는 말씀이다.
스승 예수님의 말씀이다. “나는 어디로 가는지 알지만, 너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 8,14) 어디서 왔는지를 안다는 말은 자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의 그 까마득한 생을 다 안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요한 9, 58) 이 말씀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는 우리로서는 예수님이 아브라함을 가르쳤다는 말씀이 이해가 안 간다.
나의 본질은 태어나지도 않고 소멸되지도 않는다. 태어나지 않으니 소멸되지도 않는다는 말이다. 태어났으면 소멸되는 것이다. 태어나면 죽는다. 그런데 예수님 자신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 영원한 생명을 그리스도를 믿는 나에게 허락하셨다.
이제 내가 어디를 가든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거기에 내 몸이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얼마나 엄청난 은총인가 내 몸이 나를 떠난 적이 없으시니 이제는 내가 내 몸을 떠나지 말아야 할 차례다.
그분은 바로 나인데 나는 아직 그분이 아니지만 내 몸의 참 주인이 나를 떠나지 않으시니 그 은총 덕분에 오늘도 하느님의 현존을 사는 기쁨이 내게 가득하다.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말씀을 통해 성모님의 마음을 만나는 날입니다.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입당송).
미사를 여는 이 말씀은 마치 예수님을 임신하신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셨을 때 노래한 성모 찬송의 '한 줄 요약' 같습니다. 미사의 시작부터 기쁨과 환희가 펼쳐지는 것 같네요.
사실 우리는 "성모성심" 하면 성모 칠고를 상징하는 칼 일곱 개에 심장이 찔리신 성모님 성화를 먼저 떠올립니다.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한 그분의 인생이 고통 투성이였고, 인류의 어머니로서 무수한 자식 걱정에 근심이 그칠 날 없는 숙명을 보여 주는 것 같지요.
하지만, 평생 사랑을 보람으로 여기고 살아온 이들에게 인생을 묻는다면, 늘 고통과 비탄 뿐이었다고 푸념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습니다. 대개는 입가에 옅은 미소가 피어오르면서 사랑하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소환해낼 것 같지 않나요? 마리아의 삶도 결코 평탄하지 않았고 침묵과 인내로 품어야 하는 슬픔과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았지만, 교회가 마리아를 기념하며 기쁨을 노래하는 이유입니다.
"사흘 뒤에야 성전에서 그를 찾아냈는데"(루카 2,46)
복음은 예루살렘 축제 후 소년 예수님을 잃었던, 부모로선 십년 감수했을 사건을 들려줍니다. 외아들을 찾아 헤맨 사흘은 죽음과 같은 시간이었겠지요. 사흘은 마리아께서 먼 훗날 예수님을 무덤에 묻고 견뎌야 할 고통의 사흘을 예비합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다행히 예수님을 찾긴 했는데, 예수님의 답변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요. 사흘 졸인 가슴에 사과는 커녕 영문 모를 당당함까지... 아마도 마리아는 어미로서 한계를 느끼셨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무엇을 마음속에 간직하셨을까요? 고통? 조바심? 두려움? 괘씸함? 한계? ... 놀랍게도 오늘의 말씀은 제게 '그건 기쁨이었다'고 속삭이십니다. 마리아의 성심 안에 가득 찬, 티없이 깨끗한 기쁨을요.
누군가 인생의 위기를 물을 때, "아, 정말 진짜 힘들었어요. 죽을 뻔했다니까요" 하며 사건의 초반부터 구구절절 한숨과 눈물을 섞어가며 과정 위주로 들려주는 사람도 있고, "그러게요 분명 어려운 순간이었는데 그럭저럭 지나갔어요. 견딜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하며 승화시킨 결과를 나눠주는 사람도 있지요. 아마도 전자는 고통과 슬픔이, 후자는 감사와 기쁨이 마음속에 더 짙게 간직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속에 간직한 것이 그의 성격이 되고 인격이 되고 영성이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이사 61,10)
제1독서는 이렇듯 마리아의 기쁨을 예언합니다. 풍요하고 순탄해서도 아니고 누리며 대접 받는 삶이어서도 아닙니다.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할 수 있는 자격은 주님의 축복과 구원과 의로움을 믿고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던져 의탁한 이에게 부여되는 상급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벗님은 마음속에 무엇을 간직하고 있는지요. 녹록치 않은 삶에서도 마음속에서 기쁨을 길어올리시는 성모님처럼, 믿음과 의탁으로 마음속에 기쁨의 자리를 마련하시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함승수 신부님
어제가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과, 그런 하느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순명하고 따르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에 대해 묵상하는 날이었다면,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은 어린 아이처럼 티 없이 깨끗한 마음자세로 주님의 뜻을 마음 속에 간직하며 되새기는 성모님의 맑은 심성에 대해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복음은 성모님께서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자 신앙의 선배로서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기까지 겪으셨던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과정을 차분히 묵상해보는 것이 우리의 영적 성장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과 그 가족이 파스카 축제를 맞이하여 예루살렘을 방문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축제가 끝나고 난 뒤 가족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에, 예수님은 가족들과 함께 가시지 않고 예루살렘에 그대로 남으시지요. 하지만 요셉 성인과 성모님은 그런 사실을 모른 채, 아들 예수가 "일행 가운데에 있으려니 여기며" 자기들이 갈 길을 갑니다.
바로 이 대목이 우리가 묵상해볼 첫번째 부분입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아들이 있는지 확인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출발한 것은 그전까지 자기들이 따로 챙기지 않아도 아들 예수가 알아서 일행을 잘 따라왔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자기도 모르는 사이 '관습'이라는 틀 안에서, 인간 사회의 기준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 주시려니'하고 그분께 기대하곤 하지요. 예수님의 마음과 뜻을 헤아리기보다는, 그동안 '의례적'으로 그렇게 했으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것들을 바라고 원할테니까'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기대와 바람을 일방적으로 주님께 투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우리의 일방적인 바람을 무조건 들어주시는 분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 과정에서 그분의 '부재'(不在)를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모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사흘 밤낮으로 예수님을 찾아 헤매야 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성전에서 아들을 찾게 되지요. 바로 이 부분이 우리가 묵상해볼 두 번째 부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그분에 대해 잘 모르기에, 그분의 뜻과 생각에 대해 잘 모르기에 엉뚱한 곳에서 그분을 찾을 때가 많습니다. 예루살렘을 이잡듯 다 뒤졌는데도 못찾았던 예수님을 성전에서 찾게 된 것은 '인간적'인 관점에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도 조금은 원망 섞인 말투로 예수님께 이렇게 질문하시지요.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는 당신이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시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에 어머님의 말씀에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왜 제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우리는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아야 합니다.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는다는 것은 인간적인 욕심과 바람을 무분별하게 주님께 청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대신 내가 찾아야 할 참되고 소중한 것, 주님께서 나에게 주고자 하시는 거룩하고 영원한 것을 그분께 청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주님의 바람과 우리의 바람이 서로 만날 때, '기도의 응답'이 주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주님의 바람과 뜻이 무엇인지를 찾고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많은 시간과 긴 인내를 필요로 하는 힘든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이 보여주신 마음자세, 즉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워도 그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는 자세가 필요하지요. 주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한다는 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 안에서 그 말씀이 나에게 무엇을 말하는지 항상 묵상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이 순간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 이 상황은 주님의 말씀과 뜻에 비추어볼 때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를 찾는 것입니다. 즉 "삶을 하느님 말씀으로 읽어내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하느님의 뜻과 내 뜻이 서로 부딪힐 때가 많습니다. 또한 당연히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함을 잘 알면서도 내 성공과 업적을 위해 내 뜻을 고집하고 싶을 때도 많지요. 그런 갈등과 고민의 시간에, 성모님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 속에 간직하여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만큼 주님의 뜻에 가까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잃은 것을 찾는 기쁨 <루카 2, 41-5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요셉과 마리아는 잃어버린 아들 예수를 잃은 지 사흘 뒤에야 찾으셨을 때 기쁨은 어떠하셨을까? 길을 잃고 헤매다가 길을 찾았을 때 환성! 귀한 것을 잃었다가 찾았을 때 그 기쁨은 말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잃은 것을 영영 찾지 못하는 경우는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잃어버렸을 때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주님의 말씀처럼 “아버지 집에” 있는 사실을 알려주는 예고도 됩니다.
수도원 아래층 성당에 수많은 선배 신부님 형제들의 영정사진을 보고, 사귀고 인연이 있는 분들이지만 어디 계신지 물어봅니다. “선배님 어디 계십니까? 하면 “아버지 집에 있지 어디에 있겠나?” 하십니다. 그 삶이 어떠한지 알고 싶기도 하지만 상식으로 알고, 성모님처럼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음이 얼마나 행복하고 기쁠지를 짐작합니다.
그러나 잃은 것을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하고 영영 잊고 사는 사람을 볼 때 답답합니다. 왜 저들은 주님을 잃었는데 찾지 않는가? 왜 그들은 주님을 잃게 되었는가? 주님을 잃고 사는 사람은 주님을 잃은 것이 아니라, 본인이 잃어진 불쌍한 양입니다. 양의 우리를 찾지 못해서 아니, 양의 우리를 떠나서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잃었다가 찾자 당신이 누구신지 알게 된 것처럼 예수님을 찾아야 자기 길을 알고, 생명의 빵을 먹고 영원한 생명의 길로 나갈 수 있습니다.
제가 나이 들어 죽음의 길을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양을 찾아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관 본당, 석전 본당에서 제가 세례 준 양의 우리에 있던 양들 길을 잃고 세상 험한 골짜기에서 헤매고 있어 찾아 나서야 합니다. 찾아오는 사람에게서 잃은 양을 보고, 찾습니다. 카톡으로는 바다에 그물을 치듯이 양을 이끌고, 가정 방문을 통해 만나고 이끌어 주님의 길을 가도록 해야 합니다. 며칠 전 제가 영세 준 부부의 점심 초대에 기쁘게 응한 것은 잃었던 양이며 사랑하는 형제자매였기에 맛있는 점심 위에 잃어버린 주님을 찾겠다는 약속을 듣고 그날 행복했습니다. 기화가 주어지면 망설이지 않고 나서야 하겠습니다.
본당 신부로 있을 때 여름 겨울 산간학교를 열어 함께하던 선생님들, 학생들 대부분이 주님을 잃고 살고 있다는 현실을 보고 마음 아프고 속이 저립니다. 내 탓이 크지만, 뒤의 사목 자들이 돌보지 않아서 아니, 사회적 부조리가 그렇게 만들고 있어 일어나는 일이지만, 잃은 양을 찾으시는 주님의 열정을 따르지 않아서 생긴 결과입니다. 이런 사회적 변화를 따라 오늘날 입맛에 맞는 교리 가르침, 조직 친교의 길, 그들의 고민 걱정거리에 귀를 기울이고 알아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며칠 전 가톨릭 신문에 “줄어드는 신자 수”란 내용을 보면서 걱정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성모님과 요셉이 찾아 나서는 모양 찾아 나서서 주님을 잃은 사람이 주님을 찾아 만나고 자기도 길을 찾아 주님의 품에 안기기를 기도합니다.
잃은 양을 묵상하다가 지금 감옥에 3년 이상 갇혀있는 박근혜 율리안나 전 대통령, 처음 본 때는 프란치스코 회 베다 신부님을 찾아갔을 때 몇몇 고등학교 학생들과 재미있게 이야기하며 놀던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런 행복을 가지도록 저는 기도합니다. “주님 곁으로 돌아오세요.“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시간은
자식을 향한
오롯한 사랑의
마음입니다.
언제나 자식을
향해 열려있는
사랑의 삶이며
기도의 삶입니다.
마음은
삶을 향하고
삶은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안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마음을
받아 주는 것은
언제나 같은
마음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마음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할지를
마음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성모님의
마음임을 믿습니다.
머리가 아닌
뜨거운
마음으로
살게하소서.
어머니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서로를 끌어안는
참된 회개임을
믿습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어머님,
우리의 죄와
혼돈을 위해
빌어주소서.
러시아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누군가를 미워하면 인생에 그 감정만큼 구멍이 난다.”고 했습니다. 사실 미움이라는 감정은 처음의 작은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웃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미움’이었는데, 나중에는 본인이 절대로 감당하기 힘든 수준으로 커지게 됩니다.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남편이 너무나 밉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편이 자기 옆에 있는 것도 싫을 정도였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편은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의 말을 전혀 들어주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들지 않으면 화부터 버럭 낸답니다. 집안일도 전혀 도와주지 않으면서 자신을 식모 취급만 하는 것 같아서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싸움의 횟수가 점점 늘었고 이제는 같은 공간 안에 있는 것조차 몸서리 칠 정도로 싫다는 것이었지요. 남편이 언제부터 이러했냐고 물으니 결혼 전부터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결혼하셨냐고 물으니 그때는 이것이 큰 문제인줄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왜 결혼 전에는 큰 문제인줄 몰랐을까요? 이 부분이 싫기는 했지만, 결혼 전 사랑을 나눌 때에는 ‘웃고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움의 감정이 점점 커질 대로 커져서 이제는 참기 힘든 미움이 된 것입니다.
가정에서만 그럴까요? 아닙니다. 모든 인간관계 안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모습입니다. 조그마한 미움의 감정이 기하급수적으로 커져서 견디기 힘든 상태까지 오는 경우가 가정은 물론이고, 직장이나 성당 안에서 그밖에 이웃과의 만남에서도 똑같이 계속됩니다.
미움의 감정은 상대방이 변해야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자신이 변해야 합니다. 부정적인 생각보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서, 상대방의 장점을 바라보려고 하고 또 칭찬도 많이 해줘야 합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은 생각하지 못하고 상대방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니 미움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모든 것을 마음속에 소중히 간직하신 성모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사실 부모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혼자 성전에 남아 있는 어린 아들 때문에 화가 나지 않으셨을까요? 당신을 애타게 찾은 부모에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말할 때는 더욱 더 화가 났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전해줍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51)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에도 성모님께서는 먼저 마음속에 간직하셨습니다. 그 결과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가 있었고, 하느님의 뜻에 맞게 생활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미움 등의 부정적인 마음이 들 때, 성모님의 모습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조용히 기도하면서 마음속으로 거룩함을 키워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우리가 기분 좋아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타인의 기분이 좋아지도록 돕는 것(캐머린 블룸).
사랑을 바라보세요.
셰익스피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프러포즈할 때 남자의 마음은 5월이지만, 결혼하고 난 뒤에는 12월이 된다.”
5월의 날씨처럼 마음이 화창하고 맑지만 결혼하고 나면 곧바로 겨울처럼 시리고 추워진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남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여자 역시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혼자 살 때에는 자유로움이 많습니다. 쉬고 싶을 때에는 맘껏 쉴 수도 있고, 하고 싶은 것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면 쉬고 싶다고 해도 쉴 수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어쩔 수 없이 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게 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함께 있는 것이 너무나도 좋고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다른 부족한 부분을 가리기에 충분합니다.
미국의 한 남자가 너무나 싫어했던 아내와 이혼한 후 결혼상담소에 가서 자기 이상형을 찾아달라고 했습니다. 결혼상담소에서는 그 이상형에 맞춰서 컴퓨터에 입력된 3만 명의 여성 중 한 여성을 골라주었는데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진을 보니까 얼마 전에 헤어진 자기 부인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배우자를 바꾸면 지금보다 더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행복하게 살려면 배우자를 바꾸기 전에 자기를 먼저 바꿔야 합니다. 사랑을 먼저 보고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자신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완벽한 상대를 찾아 헤매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을 바꾸면 그 부족한 상대가 사랑을 통해 완벽한 상대가 됩니다.
천국에도 뒷문이 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올봄 본의 아니게 성모님에 대한 졸저(拙著) 두권을 내게 되었습니다. ‘성모님과 함께라면 실패는 없다’와 ‘성모님을 사랑한 성인들’입니다. 제가 책을 낼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3년 간에 걸쳐 월간지 ‘생활성서’에 연재한 글들을 생활성서사 가족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 주신 책들입니다.
정작 책들이 나오니 성모님 앞에 참으로 송구스러웠습니다. 그분 앞에 언제나 큰 불효자라는 것, 그분을 향한 제 신심이 너무나 미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그래도 다시금 천천히 읽어보니, 큰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성모님을 향한 감사의 정이 샘솟았습니다. 참으로 보잘것 없는 책들, 말마디 그대로 졸저(拙著)들이지만, 성모님을 향한 작은 봉헌이라는 생각에 기뻤습니다.
솔직히 성모님이란 주제는 지극히 민감한 주제여서, 글을 쓸 때도 늘 조심스러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단으로 빠지기 십상이어서, 늘 살얼음판 걷는 듯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고를 쓸 때는, 초심자의 마음으로, 가급적 쉽고 편안하게 쓰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특히 성모님에 대해 크게 오해를 하고 있는 개신교 신자들이나 일반인들의 공격 앞에 가톨릭 신자로서 어떻게 대응할 수 있겠는지, 염두에 두고 원고를 썼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모님의 군사들이신 레지오 단원들께서 성모님이 어떤 분이신지 이미 잘 파악하고 계시겠지만, 좀 더 그분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책을 만들었습니다.
‘천국에도 정문과 뒷문이 있다’는 꼭지에 이런 글을 만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언젠가 이 땅을 떠나 천국 문 앞에 설 것인데, 문 앞에는 천국의 열쇠를 쥐고 계신 베드로 사도가 딱 지키고 서계십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레지오 단원들이 베드로 사도로부터 직천당 티켓을 받는 것이 아니라, 연옥행 티켓을 받는답니다.
그런데 천국의 문 근처에는 낯익은 분이 서성이고 계신다네요. 우리 레지오 단원들이 평생 그 이름을 불러왔던 성모님이십니다. 성모님께서는 연옥행 티켓을 받고 울며 애통해하는 레지오 단원들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붙잡고 어디론가 데리고 가신답니다.
그곳은 바로 천국의 뒷문입니다. 성모님께서는 혹시라도 베드로 사도가 보면 어떡할까 노심초사하시면서, “어여, 빨리 안으로 들어가라!”며 레지오 단원들을 천국의 뒷문으로 밀어 넣으신답니다.
이런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있는 레지오 단원들과 가톨릭 신자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농담 같지만 진담입니다. ^^
성모님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십니까? 성(聖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에 따르면 “성모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거울 같은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얼굴은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가장 맑고 투명하게 반영하는 거울입니다.”
바꿔 말하면 성모님의 얼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성모님의 삶 속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다는 말입니다. 결국 성모님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은 곧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오늘도 성모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향한 큰 측은지심으로 우리의 고통과 결핍, 우리의 상처와 눈물을 바라보십니다. 우리의 고통이 곧 성모님의 고통이요, 우리의 눈물이 곧 그분의 눈물입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을까, 노심초사하시고 고민하십니다. 언제나 예수님 옆에 바짝 붙어앉으셔서, 우리의 회개와 성화를 위해서, 우리의 구원과 영생을 위해 예수님께 집요하게 청하십니다. 이런 분이 바로 우리의 성모님이십니다.
오늘도 성모님께서는 어떡하면 우리를 예수님께 잘 소개해드릴까 고민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 앞에, 우리의 부족함 앞에, 성모님께서는 마치 우리의 전속 변호사처럼 이런 말씀을 예수님께 건네고 계십니다.
“그때는 애가 너무 어려서 그랬을 거예요. 그때는 애가 컨디션이 너무 않좋아서 그랬을 거예요. 그때는 여러모로 상황이 꼬여서 그랬을 거예요. 한번 더 기회를 주면 어떨까요? 아마도 앞으로는 잘 할거예요. 꼭 좀 부탁드립니다."
변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전삼용 요셉 신부님
얼마 전에 저보다 나이어린 신부님이 사제직에 대해 고민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에게 가장 크게 다가왔던 말은 ‘닮고 싶은 사제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닮고 싶은 사제가 없어 자신도 어떻게 사제직을 해 나가야할지 두려움만 앞선다고 했습니다. 저도 그 신부님에게는 한 명의 선배로서 닮고 싶은 사람이 되어주지 못한 것에 부끄럽기도 했고 또 한 때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서 공감이 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것이 사제직에 대해 고민하게 만들 핵심적인 문제인가?’라는 생각이 들고, ‘다른 더 큰 이유가 있는데 그런 것을 핑계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사제들의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내가 그분을 닮아 후배 사제들이 닮고 싶어 하는 사제가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하면 안 될까요? 마음만 있다면 모든 신부님들 안에서 내가 배워야 할 점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변해야한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으로는 변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런저런 핑계들이 생겨나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기념일입니다. 어제는 예수 성심 기념일이었습니다. 예수 성심은 ‘신랑의 마음’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는 마음입니다. 신랑은 신부를 위해 세상에서 피땀을 흘려 돈을 벌어옵니다. 신랑의 내어줌으로 신부가 사는 것입니다. 그 예로 어제 강론에서 자살하려는 한 시민을 살리기 위해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던 사람이 위험을 무릅쓰고 역주행까지 해가며 그 사람을 설득시킨 이야기를 소개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신랑으로서 교회를 위해 당신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우리는 예수성심을 청해야합니다.
미사 때마다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지는 계약은 바로 혼인계약입니다. 교회는 신랑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신부의 마음을 지녀야합니다. 신부는 신랑의 말을 가슴에 담고 순종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예수님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라고 말합니다. 성모님의 마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담긴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은 신부의 역할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임은 ‘순종’을 의미합니다. 순종은 말씀을 ‘머리’가 아닌 ‘가슴’에 간직할 때 일어납니다. 머리로는 이해하는 것으로만 끝나지만 가슴으로 받아들이면 행동이 변하게 됩니다. 그래서 신부는 신랑의 말씀을 가슴, 혹은 마음에 받아야합니다. 성모님의 마음이 티 없이 깨끗하시다는 뜻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어있었다는 뜻입니다. 성체를 영하고 성경을 읽어도 삶이 변하지 않는 이유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받아 모시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머리로 이해하더라도 삶이 변화하지 않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는 신랑이신 그리스도 앞에서 신부인 교회의 노래를 소개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이사 61,10)
신랑이 신부에게 관을 씌워주듯 패물로 단장했다는 말은 하느님께서 성모 마리아께 성령을 보내셨다는 뜻입니다. 그 성령으로 아드님을 잉태하셨는데 그 아드님이 바로 의로움의 겉옷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구원받았다는 기쁨에 언제나 주님을 찬미합니다. 그런데 이 찬미는 마음으로 그분께 순종하여 내 자신을 변화시키려는 이에게만 유효합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처럼 변화되려는 마음, 그것이 깨끗하신 마리아 성심입니다. 그 성심에 참여하는 이들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성모성심에 참여하여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면 성모님처럼 매 순간이 구원되었음에 기쁠 수밖에 없고 이렇게 성모님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내 마음 기뻐 뛰노나니 당신 여종의 비참함을 돌보셨기 때문입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축일의 유래: 요한네스 에우데스(Jean Eudes, 1601-1680)는 예수 성심과 성모 성심의 스승이요, 첫 번째 사도로 불리고 있다. 그는 예수 성심 축일을 지내기 20년 전부터 그의 제자들과 함께 이미 2월 8일을 마리아 성심 축일로 지냈다(1643년). 이후 교황 비오 7세는 성모성심을 축일로 지낼 수 있도록 청하는 모든 교구와 수도 단체에 허락하였다.
1942년 교황 비오 12세는 온 세상을 ‘마리아의 무죄한 성심’에 봉헌하면서 전례등급을 올렸고, 날짜를 성모승천 대축일의 제8부인 8월 22일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로마 전례 개혁은 다시금 지역에 따라 선택할 수 있는 기념일로 환원하고, 1996년부터 예수 성심 대축일 다음 토요일로 고정시켰다.
축일의 의미: 이 축일은 마리아의 깨끗하고 열절한 사랑의 마음속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찬미하고 주님현존의 기쁨을 축하하는 것이다. 아울러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마음에 주님이 거주하도록 안배하시어 거룩하게 하신 하느님을 찬미하며, 우리 자신도 하느님 영광의 살아있는 성전이 되도록 마리아께 전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성모 마리아의 사랑이 그 목표로서 우리도 마리아와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2,41-51: 소년 예수와 성모 마리아
오늘의 복음은 예수님의 어린 시절을 전하는 유일한 자료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단순한 유년기의 예수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것은 파스카 신비를 완성할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내는 루카에게 마리아가 이미 파스카 신비에 참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 이야기는 지혜와 파스카의 특징을 드러내는 그리스도론이다. 예수님이 지혜 자체이며, 파스카의 주인공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사건의 배경은 구약의 파스카 축일이다. 구약의 파스카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지내기로 되어 있었다. 또 어느 정도 나이가 되면 의무적이었는데, 아마 12살이 그 규정 나이였던 것 같다.
성전에서 학자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는 광경은 구약의 파스카 예식에서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이 파스카 예절에 관한 것을 질문하고 가장 연장자가 파스카의 역사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 여기서는 학자들이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시는 것이, 예수께서 신약의 파스카의 주인공임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율법학자들을 경탄하게 하는 지혜의 스승, 지혜자체로 보인다.
또 파스카적 용어를 통하여 마리아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신비의 고통과 기쁨을 미리 체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부활사건과 공통점이 있다.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다”(2,41; 22,8.13), “사흘이라는 시간”(2,46; 24,46),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이룰 필요성”(2,49; 24,7)과 “이해하지 못하였다”(2,50; 24,25)는 것이다.
여기에서 사흘이라는 시간 개념은 성서에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야 산으로 사흘 길을 걸었다. 요나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고래 뱃속에 사흘간 머물렀다.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사흘간의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이 개념은 고통의 최대치를 드러낸다. 사흘이란 의인들의 최대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마리아와 요셉이 사흘간 소년 예수를 찾아 헤맸다는 것은 의인으로서 최대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이를 잃어버린 다른 어머니처럼 극한의 고통을 겪으셨다는 것을 뜻하며, 훗날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는 예수의 고통을 미리 겪으셨다는 것을 아울러 미리 보여주고 있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성전에서 발견하고 꾸짖는 가운데 요셉을 아버지로 언급하는데 대해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언급하고 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 이 말은 예수께서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느님의 아들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였지만,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51절ㄴ)는 진술은 신앙의 길을 걷는 마리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알아듣지 못함’은 지혜의 결핍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려있음, 내맡겨져 있음을 드러낸다. 이러한 신앙의 자세는 목동들이 다녀간 이야기에도 나타난다(2,19). 거기에는 이 신비를 간직한 것만이 아니라, 깊은 묵상의 자세를 보여주는 표현으로 “간직하였다”는 말이 덧붙여지고 있다. 또 이 이야기에서는 ‘찾다-발견하다.’는 신앙의 도식을 볼 수 있다. 불 신앙인은 찾아도 얻지 못하지만 신앙인은 찾으면 얻게 된다는 것이다. 주님을 열심히 찾는 마리아의 신앙을 묵상하게 한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한 마리아의 신앙을 다른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리아와 요셉도 예수님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그러니 우리의 신앙생활도 너무나 자주 하느님을 잃어버리고 나 홀로 방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는 그것을 나 홀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으면서 나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우리는 마리아의 모습을 보아야 한다. 마리아는 사흘간의 고통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다시 찾는다.
이것은 우리도 잘못하여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에, 즉시 다른 곳에서 주님을 찾지 말고 하느님의 뜻으로, 하느님께로 되돌아가야 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으로 다시 돌아갈 때에 비로소 주님을 다시 만날 수 있고 맞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마리아를 따르는 자세이다.
마리아의 신앙을 본받고 따르도록 노력할 때에 우리는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성심을 따라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께 대한 더 완전한 사랑을 드릴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은총을 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도록 하자.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예수님께서 열두 살이 되시던 해에 성모님과 성 요셉 성인은 예루살렘 순례를 마치시고 나자렛으로 하룻길을 돌아가시다가 소년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애를 태우며 찾아 나서셨습니다. 요셉 성인과 친척들 가운데 있으리라고 찾아 나서신 성모님께서는 사흘을 헤매신 뒤에야 예루살렘 성전에서 율법 학자들과 토론하시는 예수님을 찾아내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보시고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하고 물어보셨는데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열두 살 된 소년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했다는 것에 우리는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곧 루카복음에서 처음으로 어린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대목이며 지혜가 충만해진 예수님께서 이제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자각하시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이 아버지의 집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아버지의 집에 머무르게 될 때 우리는 아버지로부터 진정한 평화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는 어린 소년이었지만 그 아버지의 집에 머물고 계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집을 먼저 찾지 않으셨던 부모님께 질책이 담긴 말씀을 하신 것은 아닐지 생각이 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루카 2, 41-51)
김성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모성심 기념일입니다. 어제가 예수 성심 대축일이었고, 오늘은 그 예수 성심을 가장 잘 알고 사랑하시는 성모님의 성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수녀원의 축일이기도 한 오늘 우리는 복음에서 어린 예수님을 사흘이나 지난 뒤에 성전에서 찾고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라는 반문에 놀랐던 성모님을 떠올려봅니다. 복음 마지막 구절에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였다.’ 라고 복음사가는 보도합니다.
이 모든 일을 마음 속에 간직하신 깊은 묵상 중의 성모님을 모습을 따라 우리도 우리 삶의 신비를 깊이 간직하면 어떨런지요? 오늘 수녀원의 축일을 맞아서 이해인 수녀님의 ‘성모님과 함께’ 라는 시를 선물로 드립니다.
성모님과 함께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기에
네 라고 응답할 수 있으셨던 성모 마리아
구세주의 어머니, 우리의 어머니
구원의 문을 연 당신의 겸덕을
새롭게 찬미하며 촛불 밝힌 저희에게
오늘도 조용히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처럼 주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듣는
깊고 높은 믿음의 사람으로
순명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때로 존재의 뿌리를 흔드는
불신과 두려움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슬픔에 지쳐 울고 있을 때
꾸준히 올라야 할 삶의 층계를
희망으로 오르지 못하고
절망과 근심 속에 서성일 때
하느님께는 무슨 일이든 불가능한 것이 없단다
이르시며 가까이 다가오시는 어머니
저희에게 다시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성령의 놀라운 힘으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집'이 되신 어머니
사랑은 시련의 아픔을 받아들여
더욱 귀한 보석이 되는 것임을
저희가 오늘 다시 기억하게 해 주십시오.
'기뻐하소서, 은총을 입은 이여,
주님께서 당신과 함께 계십니다'
천사가 당신께 무릎 꿇고 드렸던 이 겸손하고
환희에 찬 인사말을
저희도 가장 가까이 함께 사는 이들에게
멀리서 사랑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때로는 용서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먼저 사랑으로 건넬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주십시오
지상에 머무는 동안 저희가
서로 더욱 사랑하고 고마워해서
마음속엔 이미 기쁨의 날개가 돋아나는
지상의 천사들이 되게 해 주십시오.
'당신 말씀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 바랍니다'
하느님의 거룩한 뜻을 받아 안아
더욱 거룩해지신 성모님
저희도 이제 당신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침묵 속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을
가슴에 깊이 담아 새기면서
저희도 고요하고 평화롭게
어머니와 함께 구원의 먼 길을 떠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건강검진을 받았습니다. ‘시력, 심전도, 폐활량, 혈압, 안압, 청력, 초음파, 신체계측, 혈액, 위장’에 대한 검사를 받았습니다. 어떤 곳은 양호하다고 합니다. 어떤 곳은 지켜보자고 합니다. 어떤 곳은 추적 검사를 하자고 합니다. 자세한 결과는 2주 후면 알 수 있을 거라고 합니다. 건강을 위해서는 몸의 각 지체가 기능을 잘하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건강을 위해서는 건강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몸의 지체들은 마음에 영향을 받기 마련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서 감사드리고,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개선하려는 마음을 가지면 됩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길을 잃어버렸던 이야기를 하시곤 합니다. 어머니와 가족들은 모두 놀랐다고 합니다. 5살 때의 일이기에 저도 기억은 납니다. 저는 큰길에서 버스를 탔고 어딘가에서 내렸습니다. 당연히 돌아가는 버스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길을 걷다가 파출소로 들어갔고, 다음날 아버님께서 저를 찾으러 오셨습니다. 이것이 저의 기억인지, 부모님께서 제게 들려주신 기억인지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제가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이고, 제가 파출소에서 하루 지냈다는 것입니다.
몸의 건강은 건강검진을 통해서 돌볼 수 있습니다. 목적지는 지도와 내비게이션이 있으면 찾아갈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입니다. 마음이 길을 잃어 방황하는 때가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되었으면 우리의 마음에 주님께서 함께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은 다른 곳을 찾아서 헤매곤 합니다. 재물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기도 합니다. 명예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기도 합니다. 권력에 우리의 마음이 머물기도 합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 우리의 마음에 들어와 있으면 주님께서 함께하실 자리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마음 앞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걱정 때문에, 근심 때문에, 불안 때문에, 욕심 때문에, 시기심 때문에 마음의 문이 닫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크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온 세상에 가득하지만, 우리의 마음이 닫혀 있으면 들어오시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과 함께하셨습니다. 성모님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요? 성모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십자가의 무게가 무거워 3번씩이나 넘어지면서도 끝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옆구리를 창에 찔리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제자들도 다 도망가고, 혼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하시기를 원하셨을까요? 아니면 평범하게 직장을 구하고, 좋은 여자 만나서 가정을 이루기를 원하셨을까요? 손자, 손녀들의 재롱을 보면서 살기를 원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의 마음을 헤아려서 그렇게 고난의 길을 가셨을까요?
예전에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좋은 대학교에 입학했고, 졸업만 하면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할 수 있던 친구들입니다. 그런 친구들이 민주화를 외치며, 데모했고, 데모하는 과정에서 형사들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학생들은 수배자가 되었고, 교도소에도 가게 되었고,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좋은 직장은 구할 수 없게 되었고, 그들이 그렇게 바랐던 민주화는 이루어졌지만 많은 학생은 아직도 고문의 후유증을 겪고 있으며,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 학생들의 어머니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식의 건강, 성공, 출세, 결혼을 바랄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생각입니다. 하지만 어떤 아들은 세상의 것들을 추구하기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 불의한 일에 저항하는 일,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을 합니다.
성모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먼저 하였던 예수님을 위해서 기도하였습니다. 억울하게 비참하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아드님을 가슴에 묻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모님의 마음을 티 없으신 마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천주의 성모님,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소서! 복되시고 영화로우신 동정녀여!’
마음의 순수, -성모 성심의 사랑-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의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일입니다. 예수 성심이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였다면 성모 성심은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모범, 사랑의 모델입니다.
흡사 사랑-사람-삶이 같은 어원에서 기인한 듯 생각됩니다. 사랑의 삶을 살 때 비로소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티없이 깨끗하신’이란 오늘 기념일 서두 말마디와 더불어 떠오르는 마태복음의 참행복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흡사 오늘 기념하는 성모님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티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입니다. 마음의 순수는 우리 수도자들의 직접적 목표이고 궁극 목표는 하늘나라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이 우선적으로 목표하는 바 깨끗한 마음, 마음의 순수입니다. 마음이 순수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요 매력적입니다.
마음의 순수는 고정적 현실이 아니라 유동적 현실입니다. 죄가 없어서 마음의 순수라기 보다는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바로 성모 성심의 사랑이야 말로 우리의 영원한 사랑의 모범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께 대한 사랑에서 성모님을 능가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도 이런 성모님의 사랑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어제 금요강론 중 예로 든 사막교부 안토니오에 대한 일화가 생각납니다.
-세 제자들이 해마다 복된 안토니오를 방문하곤 했다. 그들은 안토니오와 그들의 생각과 영혼의 구원에 관해 토론하곤 했으나, 한 제자는 늘 침묵중에 머물렀고 안토니오에게 하나도 묻지 않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안토니오 압바는 그 제자에게 말했다. “너는 자주 나를 보러 여기 왔는데, 결코 나에게 어느 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자 그 형제가 대답했다. “사부님, 저에게는 사부님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 제자는 말이 아닌 안토니오 스승의 삶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사막교부들의 공통적 주장은 지시하는 자가 되지 말고 삶의 모범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성모님의 삶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베네딕도 전기에 나오는 베네딕도 성인에 대한 묘사입니다.
“실상 성인께서는 당신이 사신 것과는 다른 어떤 것도 도무지 가르칠 수 없는 분이셨다.”
진정 사막교부들의 후예에 손색이 없는 베네딕도 성인의 삶입니다. 무엇보다 우선 예수님은 성모님으로부터 하느님 찬미의 삶을 배웠을 것입니다. 성서의 가난한 사람들, 아나뷤들에게 유일한 희망과 위로와 힘의 원천은 하느님 찬미였습니다. 우리 수도자들처럼 성모님도 분명 하느님 찬미의 기쁨으로 사셨을 것입니다.
사랑의 찬미와 더불어 깨끗해 지는 마음입니다. 마음의 순수에 미사와 시편 성무일도를 통한 찬미의 수행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찬미와 감사기도를 통해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 위로와 치유를 받고, 평화와 기쁨을 선물로 받습니다. 더불어 마음은 끊임없이 정화되고 성화되어 온유와 겸손의 예수 성심을 닮아가게 되니 찬미와 감사의 은총이 얼마나 큰지요. 하여 저는 찬미와 감사를 영혼의 양날개라 칭하곤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찬미와 화답송 첫 구절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찬미가 그대로 성모님의 찬미와 일치합니다. 아마 성모님도 이들로부터 하느님 찬미를 배운 듯 합니다.
“나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고, 내 영혼은 나의 하느님 안에서 즐거워하리니, 신랑이 관을 쓰듯 신부가 패물로 단장하듯, 그분께서 나에게 구원의 옷을 입히시고, 의로움의 겉옷을 둘러 주셨기 때문이다.”
존엄하고 고귀한 품위의 하느님 자녀로서 살게 하는 찬미의 은혜가 참으로 큽니다. 찬미야 말로 사랑의 샘, 기쁨의 샘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한나의 찬미입니다.
“주님 안에서 제 마음이 기뻐 뛰고, 주님 안에서 제 얼굴을 높이 드나이다. 당신의 구원을 기뻐하기에, 제 입은 원수들을 비웃나이다.”
주님 안에서 끊임없이 바치는 사랑의 찬미, 기쁨의 찬미가 마음을 깨끗이 정화합니다. 이런 찬미의 열매가 침묵의 관상입니다. 사랑의 찬미에 이은 사랑의 침묵입니다. 얼마전 읽은 구절이 생각납니다.
“일일 필요 발설량이 있는 것 같다. 일일 발성량을 채우려고 성당에도 간다. 신심이 깊어서라기보다 성가 몇 곡을 부르면 하루 필요량을 대충 메꿀수 있기 때문이다.---어느 날 일일발성량을 채우러 간 성당에서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원죄는 듣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고 부활은 그 능력을 회복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소리로, 노래로 성무일도를 바치는 수도자들은 일일발성량을 훨씬 능가하기에 저절로 침묵이요 일상에서 잘 들을 수 있는 능력도 지니게 됩니다. 사실 할말은 미사전례나 시편성무일도 전례에 다 담아 바친다면 일상에서 침묵중에 귀기울여 듣는 경청도 훨씬 용이할 것입니다.
찬미와 침묵과 경청은 관상가의 기본적 자질입니다. 바로 이런 관상가의 모범이 성모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말마디가 깊은 울림을 줍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을 요약합니다. 마음 깨끗할 때, 텅 빈 마음의 넉넉한 내적공간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진정 고귀한 영혼들은 담아 두는 능력에 있다 합니다. 성모님은 내적 용량이 참으로 커서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하느님의 뜻을 찾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 깊이 담아두고 되새겨야 조건반사적 ‘감정적 반응’에서 벗어나 ‘인격적 응답’이 가능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런 성모님의 사랑의 찬미, 사랑의 침묵등 관상가의 전반적 모습을 보고 배웠음이 분명합니다. 보고 배울수 있는 참 권위가 있을 때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순종의 삶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을 찬미하는 우리 모두를 위로하시고 치유하시며, 평화와 기쁨을 선물하시고, 우리 마음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하십니다. 아침 성무일도 즈가리야 노래 후렴이 성모님의 위상을 알려줍니다.
"하와로 말미암아 닫혀진 문이 성모 마리아를 통해 열렸도다." 아멘.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루가 2, 41-51(연중 9주 토): 티 없으신 성모 성심 기념일
우리는 어제 예수님의 성심을 기린 데 이어, 오늘은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을 기립니다.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님 성심”은 두 가지 의미로 묵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소명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이에 대해서 <교회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온전히 거룩하신 분, 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신 분”(56항)
특히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원죄 없으신 잉태).
“복되신 동정 마리아는 잉태되시는 첫 순간부터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과 특권으로 원죄에 물들지 않으셨다”
또한, 이를 <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493항).
“성모님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일생 동안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다”
<또 하나>는 믿음과 관련하여, 성모님께서는 티 없이 깨끗하십니다. 곧 성모님께서는 믿음에 있어서 한 점 의혹이 없는 갈림이 없는 마음, 온전한 마음으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을 지니셨습니다. 이를 <교회 헌장>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교회 헌장 56항 참조).
‘성모님께서는 온전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구원 의지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당신 아드님의 인격과 활동에도 당신 자신을 온전히 바치셨습니다. 그리하여 아드님 밑에서 아드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에 봉사하셨습니다.’
이처럼, 성모님의 마음 안에는 믿음이 가득 차서 희망을 노래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신명 나셨습니다. 언제나 야훼 하느님께 대한 갈망이 가득 차 있었고,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희망하셨습니다. 당신을 하느님 뜻 안에 가두시고, 말씀이 당신 안에서 이루어지기만을 고대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처럼, 비록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할 때마저도,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습니다.”(루가 2, 51)
이토록, 믿음을 품으셨습니다. 말씀을 품고 간직하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참으로, 믿음과 희망에 있어서 티 없이 깨끗하신 성심이셨습니다.
우리의 마음 역시 성모님의 티 없으신 성심으로 채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믿음의 ‘피아트’이 흘러나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니, 성모님의 ‘그리스도를 품으셨던 그 주물의 틀’에 우리가 가두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로지 말씀께 희망을 둘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의 뜻만을 간직하며 신명 나기를 바랍니다. 아멘.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어머니.
당신은 마음에 말씀을 품으신
도서관이셨습니다.
말씀을 펼쳐 읽으시며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가슴 속 품은
하느님의 뜻에서
희망과 믿음을 길러 올리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품었던 그 주물의 틀에
저를 품으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주님!
눈을 뜨고도 당신을 보지 못함은 당신이 아닌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바다 안에서 바다를 찾아다니는 우둔함을 멈추게 하소서.
찾는 것을 멈추고, 믿음으로 보게 하소서. 이곳이 아버지의 집임을!
춤추는 춤꾼과 춤이 분리되지 않듯, 제 안에서 저와 분리되지 않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주님의 순종 정신 <루카 2, 41-51>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사람으로 오신 주님은 “나자렛으로 내려가 그들에게 순종하시며 지내셨다.” 이 구절은 나를 변화시키는 구절입니다. 어느 날 세상을 더 배우고 아는 제가 어머니보다 낫다고 생각하고 언쟁하다가 어머니 고집을 이기지 못해서 화가 나서 주일날 성체강복 시간에 “저 성당에 안 다닙니다.”하고 집에 있었습니다. 성체강복 시간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 무료해서 묵주 기도를 드리는데 환희 5단을 묵상하다가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전능하시고 하고자 하시면 무엇이든지 하시는 분입니다. 나자렛에서 30세가 되실 때까지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며 사셨는데, 한껏 부족한 내가 머리에 먹물 좀 들었다고, 세상일을 다 안다고 어머니께 불순종하고, 몽니를 부리고, 그 귀한 성체 강복시간에 불참하고 멍청하게 있는 나의 모습이 비참했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어머니 돌아오시는 시간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사제가 된 다음에도 제가 잘못 사는 경우 “그렇게 살면 되겠느냐?” 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면서 살았습니다.
“너는 나보다도 못한 사람이야. 그래서 네 말을 들을 수 없어” 하며 이웃의 말을 무시하고, 저버리고, 자기 생각이 가장 현명하고 바르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주님께서 마리아에게 순종하신 삶을 따라 살기 위해서는 자기반성이 있어야 합니다. 어리석어 보이는 형제에게 진실과 정의가 있으면 답답해서 소리 지르는 그 소리에도 진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서로 사랑해야 하는 것같이 서로 순종의 삶을 살아 통일 한국, 평화스러운 나라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문득 성 마리아 막달레나가 생각납니다. 성녀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적을 받아 다 누리면서도 자신들의 원의를 더 이상 들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자신들이 하자는 대로 해주지 않는 예수님을 배반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고통스러워했습니다. 급기야는 사체에 향유라도 바르려고 무덤으로 갔지만, 그나마 사체마저 없어진 사실을 보고는 분에 복받쳐 울부짖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마리아에게는 그 일이 더욱 더 한스럽기만 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마리아를 부르시고 진정시켜 주십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셔서 끝나신 것이 아니라 새생명으로 부활하셔서 오셨다는 사실을 그제야 믿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끔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저 빨리 하느님께서 데려가시도록 기도해주세요.” “이 한 맺힌 세상에서의 기구한 삶을 마치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청하기도 합니다. 오늘 티 없이 깨끗하신 성모 성심 기념 미사를 봉헌하면서 무덤 앞에선 마리아 막달레나에 부활의 기쁨을 안겨주신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 어깨를 두드리시며 주 예수님의 구원을 향한 희망에 마주서도록 우리를 일으켜 세우시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시는 듯합니다. ‘생은 귀한 것이란다. 생은 기쁜 것이고, 행복하게 살라고 우리에게 주신 것이란다. 조금만 더 기다려라.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라.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고 곧 오실 것이란다. 아직 지상 생애에서 남은 것을 채우고 기다리면서 주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거라. 그리고 거룩하신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생애를 기쁘고 희망차게 보내라.’
성모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시고 보듬어 주시고 주 예수님께 펼쳐주시고 보여주시는 구원의 길로 더욱 더 깊이, 더욱 더 찐하고 기쁨에 충만하게 이끌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루카 2, 5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소리없이
사랑하시는
성모 성심을
만납니다.
성모 성심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음까지도
끌어안습니다.
성모 성심은
주님 말씀에
기반을 둡니다.
주님 말씀에서
힘을 얻습니다.
주님 말씀과 함께
깊어 가십니다.
주님 말씀으로
자라납니다.
성모 성심에서
무엇에도 비길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을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전부가 되는
마음입니다.
성모 성심에서
생명의 의미를
깨닫게됩니다.
마리아의 품에
안기셨던
예수님을 만납니다.
아플수록 빛나는
성모님의 마음입니다.
어머니가 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소중한 여정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늘도 티 없이
께끗하신 성모 성심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