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26년 6월 19일 (녹) 연중 제11주간 금요일

작성자John|작성시간26.06.19|조회수1 목록 댓글 0

제1독서

<사람들은 요아스에게 기름을 부은 다음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11,1-4.9-18.20
그 무렵 아하즈야 임금의 1 어머니 아탈야는
자기 아들이 죽은 것을 보고서는, 왕족을 다 죽이기 시작하였다.
2 그러자 요람 임금의 딸이며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살해될 왕자들 가운데에서,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를 아탈야 몰래 빼내어
유모와 함께 침실에 숨겨 두었으므로, 요아스가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3 아탈야가 나라를 다스리는 여섯 해 동안,
요아스는 유모와 함께 주님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4 칠 년째 되던 해에 여호야다가 사람을 보내어
카리 사람 백인대장들과 호위병 백인대장들을 데려다가,
자기가 있는 주님의 집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그는 그들과 계약을 맺고 주님의 집에서 맹세하게 한 다음,
왕자를 보여 주었다.
9 백인대장들은 여호야다 사제가 명령한 대로 다 하였다.
그들은 저마다 안식일 당번인 부하들뿐만 아니라
안식일 비번인 부하들까지 데리고 여호야다 사제에게 갔다.
10 사제는 주님의 집에 보관된 다윗 임금의 창과 방패들을
백인대장들에게 내주었다.
11 호위병들은 모두 무기를 손에 들고
주님의 집 남쪽에서 북쪽까지 제단과 주님의 집에 서서 임금을 에워쌌다.
12 그때에 여호야다가 왕자를 데리고 나와,
왕관을 씌우고 증언서를 주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임금으로 세우고 기름을 부은 다음,
손뼉을 치며 “임금님 만세!” 하고 외쳤다.
13 아탈야가 호위병들과 백성의 소리를 듣고
백성이 모인 주님의 집으로 가서 14 보니,
임금이 관례에 따라 기둥 곁에 서 있고
대신들과 나팔수들이 임금을 모시고 서 있었다.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는 가운데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서 아탈야는 옷을 찢으며, “반역이다, 반역!” 하고 외쳤다.
15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가 군대를 거느린 백인대장들에게 명령하였다.
“저 여자를 대열 밖으로 끌어내시오.
그를 따르는 자가 있거든 칼로 쳐 죽이시오.”
여호야다 사제는 이미
“주님의 집에서 그 여자를 죽이지 마라.” 하고 말해 두었던 것이다.
16 그들은 그 여자를 체포하였다.
그러고 나서 아탈야가 왕궁의 ‘말 문’으로 난 길에 들어서자,
거기에서 그 여자를 죽였다.
17 여호야다는 주님과 임금과 백성 사이에,
그들이 주님의 백성이 되는 계약을 맺게 하였다.
또한 임금과 백성 사이에도 계약을 맺게 하였다.
18 그 땅의 모든 백성이 바알 신전에 몰려가 그것을 허물고,
바알의 제단들과 그 상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었다.
그들은 또 바알의 사제 마탄을 제단 앞에서 죽였다.
여호야다 사제는 주님의 집에 감독을 세웠다.
20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였다.
아탈야가 왕궁에서 칼에 맞아 죽은 뒤로 도성은 평온해졌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9-23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20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21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22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23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여호야다 사제는 아하즈야 임금의 어머니 아탈야를 죽이고 바알의 제단을 허물고는, 주님의 집에 감독을 세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고 하시며, 그의 보물이 있는 곳에 그의 마음도 있다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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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야다 사제는 아하즈야 임금의 아들 요아스 왕자를 임금으로 세우고, 아탈야를 죽인 뒤 바알 신전을 허물고 주님의 집에 감독을 세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시고, 눈은 몸의 등불이라 눈이 맑으면 온몸이 환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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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즈야 임금이 죽자 그의 어머니 아탈야의 통치가 계속된다. 가까스로 죽음을 면한 요아스 왕자는 성전에서 숨어 지냈다. 아탈야의 유다 통치 칠 년째에 여호야다 사제는 방책을 꾸며 아탈라를 제거하며 개혁을 일으킨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하여 재물을 땅에 쌓기보다는 하늘에 쌓으라고 가르치신다. 또한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이 어두운 것처럼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신다(복음).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재물에 대한 도덕적 교훈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방향을 묻는 말씀입니다. “좀과 녹”(마태 6,19)은 당시 현실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이미지였지요. ‘좀’은 값비싼 옷감을 갉아먹고, 그리스 말에서 ‘먹어 치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녹’은, 곡식이나 금속이 썩고 변하는 것을 뜻합니다. 여기에 당시에는 흙벽돌로 집을 지었는데 도둑이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있었다는 사실도 덧붙여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표현에서 땅의 보화가 본질적으로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드러내십니다. 쌓아 두는 행위 자체가 언젠가는 잃어버릴 운명을 지녔다는 것이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반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6,20)라는 표현은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성전을 재건한, 이른바 제2성전기 유다 문헌에서 자주 나타나는 사상입니다(토빗 4,8-9 참조). 선행은 하느님께 드리는 보화이며, 마지막 때에 그 보화가 우리에게 드러날 것이라는 사상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시선은 미래의 시간을 향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마음이 어디에 묶여 있는지 물으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보물은 다만 소유물을 뜻하기보다 삶의 중심, 곧 욕망의 방향을 뜻합니다. 마음은 자기가 쌓아 둔 것을 향하여 기울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이어지는 눈의 비유 또한 같은 맥락으로 읽힙니다. 눈이 건강하면 온몸이 밝다는 말은 도덕적 은유이기도 합니다. 유다 전통에서 ‘좋은 눈’은 관대함을, ‘악한 눈’은 인색함과 시기를 뜻하였습니다. 결국 빛과 어둠의 문제 또한 시선의 문제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바라보는가가 존재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재물을 향하여 고정된 눈은 어두워지고, 하느님을 향하여 열린 눈은 밝아집니다.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있다가 없어질 것들에 우리 삶을 송두리째 맡길 수는 없지요. 사라질 것들을 너머 마지막까지 붙들 수 있는 가치에 우리 삶을 맡겨야 하지 않을까요?(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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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는 아탈야의 학살과 죽음을 전합니다. 아탈야는 엘리야 예언자의 오랜 원수인 아합과 이제벨의 딸입니다. 북 이스라엘의 공주였던 그는 남 유다 임금과 혼인하여 남 유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인 아하즈야 임금이 죽자, 아탈야는 남 유다 다윗 가문의 왕족들을 모두 학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왕권을 장악하여 스스로 남 유다의 임금이 되었습니다. 다윗 왕가가 멸족될 위기에서 아하즈야의 누이인 여호세바가 기지를 발휘하여 다윗 왕가의 마지막 핏줄인 요아스를 구출하였고, 6년 뒤에 여호세바의 남편인 여호야다는 아탈야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위에 앉힙니다. 이 사건은 야훼 신앙과 철저히 거리를 둔 오므리 왕조(아합, 이제벨, 아탈야)와 다윗 왕조의 대결이었고, 아탈야의 학살로 다윗 가문에게 주어진 왕권이 영원할 것이라는 주님의 약속이(2사무 7,11-16 참조) 물거품이 될 위기를 맞지만, 주님께서는 결국 당신의 약속을 지키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역사를 통하여 당신 약속에 성실하신 하느님과, 그 약속을 위하여 협력하는 여러 의인들을 보게 됩니다. 코로나 시기 이후에 교회에 오는 신자들이 줄고, 교회 활동이 움츠러들었습니다. 미사 참례자의 수도 줄고, 성소자 수는 몹시 줄었습니다. 교회의 머지않은 미래가 마치 명맥이 끊길 위험에 놓인 다윗 왕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며, 하느님께서는 당신 약속에 성실하시다는 희망을 놓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당신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고, 여호세바와 여호야다 같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들을 계속해서 보내 주실 것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의 삶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당신의 약속을 이루십니다.(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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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가지 보물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자신을 위하여 땅 위에 쌓은 보물이며, 다른 하나는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 쌓은 보물입니다. 땅 위의 보물은 좀과 녹으로 훼손되고 도둑이 훔쳐 가기도 하는 불완전하고 순간적인 것이지만, 하늘의 보물은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훔쳐 가지도 못하는 완전하고 영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라고 하시면서,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우리 삶 전체를 이끌어 간다는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우리 삶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현세의 것과 하느님의 것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보물을 찾으려면 온 마음과 온 정성과 온갖 노력을 다 기울여 ‘투신’해야 합니다. 하늘 나라의 비유를 전하는 마태오 복음 13장 44절에서도 밭에 숨겨진 하늘 나라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은 기뻐하며 돌아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밭을 산다고 전합니다. 한편 영원한 생명을 바라는 부자 청년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태 19,21)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던 청년은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주님을 떠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한 “눈은 몸의 등불이다.”라고 하시는데, 이 말씀은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 우리 몸 전체를 비추고 이끈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재물과 이기적인 욕심에 빠진 탐욕스러운 눈은 우리 몸을 어둡고 병들게 하며 우리를 고립시킵니다. 반면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형제들에 대한 애덕과 나눔으로 가득한 맑은 눈은 우리 몸을 밝고 따뜻하게 하며 주님의 생명으로 우리를 더욱 충만하게 해 줄 것입니다. 오늘 나는 무엇을 바라며 살고 있는지, 내 마음은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내 눈은 어디를 좇고 있는지 곰곰이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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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즈야 임금의 어머니 아탈야는 권력을 차지하려고 장애가 되는 왕족을 모두 죽이려고 하였지만, 아하즈야의 아들 요아스는 극적으로 목숨을 보존합니다. 그는 여섯 해 동안의 어두운 시절을 거쳐 여호야다 사제의 도움으로 왕권을 회복합니다. 그래서 요아스 임금은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사람이 됩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늘 빛 가운데 거닐며 주님의 눈에 드는 임금이 되려고 노력합니다. 

이 세상의 권력과 재물은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여 어둠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안에 권력과 재물은 사라집니다. 재물은 오래 가야 삼대를 간다고 합니다. 좀과 녹이 슬지 않는 보물을 간직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보물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곳, 곧 마음 깊은 곳에 있습니다. 

마음이 우울하여 어둠에 휩싸이면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마음에 빛이 넘쳐야 기쁨과 희망이 생깁니다. 진정한 빛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마음을 영원히 비출 빛은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입니다. 그 현존과 사랑이 썩지 않는 보물입니다. 

물질 만능의 시대에 그 빛을 보고 간직할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보답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선행과 죽음의 세력을 물리칠 지혜는 하느님을 의지하는 삶에서 옵니다. 외면으로 화려한 명예와 허영을 찾지 않는 삶은 우리의 욕심과 이기심을 정화시키는 하느님의 은총에서 옵니다. 우리를 거룩한 삶으로 부르시고 열정을 부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찬란히 빛나게 합니다. 주님의 빛 안에서 걷는 영혼은 하느님의 위로를 받으며 고난 가운데 참된 안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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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재산을 인정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내가 지닌 재산이 삶의 가치를 높여 줄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제한된 재화가 능력과 기회에 따라 제대로 분배되고, 노력과 열정이 정당하게 평가받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오랜 역사적 교훈과 시민 의식의 성숙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선진국은 재산이 많은 일부의 사람들이 잘사는 나라가 아니라, 모두에게 기회의 균등과 분배의 정의가 잘 이루어져 더불어 잘사는 복지 국가를 뜻합니다. 

어떤 경제학자가 자본주의야말로 인류가 계발해 낸 가장 훌륭한 경제 체제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더 나은 자본주의가 가능하려면 재화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과 보편적 윤리 의식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없어질 세상에 마음을 두기보다 영원히 썩지 않을 영적인 가치들을 인생의 보물로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썩지 않을 영적인 보물들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눈이 맑아지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란 말씀은, 내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 몸이 빛을 따라 걸을 수도 있고, 어둠 속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아는 만큼 본다고 하지만, 보는 만큼 살아가기도 합니다. 육의 눈으로 보는 것은 탐욕으로 흐르지만, 영의 눈으로 보는 것은 영적인 인간을 만듭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눈으로 볼 수 없지만, 영의 눈으로 느낄 수 있는 하늘의 보물들입니다.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땅의 재산입니까? 하늘의 보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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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빛’은 자신을 이끄는 존재를 일컫습니다. 빛은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생각과 가치관을 상징합니다. 우리 각자는 이 빛이 비추어 주는 곳을 바라보며 자신의 삶에 열정을 쏟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빛이라고 믿고 그것에 따라 인생을 살아온 것이 사실은 짙은 어둠에 불과하다면 어떻게 될까요? 겉으로는 화려할지 모르나 그의 삶은 조금씩 어둠의 심연으로 가라앉는 난파선과 같은 신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인생길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열정이 참된 빛으로 조명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빛은 다름 아니라 주님의 현존입니다.

스위스 태생의 위대한 영성가 모리스 젱델 신부는 너무나 자주 화려한 빛으로 보이고 우리에게 단단하게 붙어 있는 어둠을 ‘육의 욕정과 눈의 욕정과 재산의 자랑’(1요한 2,16 참조)이라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강조합니다. 그는 오직 빛이신 하느님의 현존으로 질서 잡히는 열정만이 진정한 삶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열정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현존을 통하여 그것이 품고 있는 위대한 덕의 가능성이 드러나야 합니다.

모리스 젱델 신부는 『나날의 삶을 하느님과 함께』에서 이렇게 확신합니다. “그가 하느님을 찾았다면, 그의 모든 열정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닻을 내립니다. 그 열정들은 하나의 형체를 가지게 되고, 성스러움으로 가는 수많은 부르심이 됩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 우리의 몸이, 우리의 길이 더욱 환해지는 것은 우리의 열정과 바람이 주님의 현존 안에서 질서를 찾고 깨끗한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첫걸음이, 오늘 복음에서 들은 것처럼, 세상의 욕망, 특히 재물에 대한 욕심의 허망함을 깨닫는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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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당신에게 재산 1호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면, 대개의 경우 ‘부모’나 ‘자녀’, ‘가족’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신의 꿈’, ‘자신이 하고 있는 일’ 등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보물은 단순히 재물만을 가리키지는 않을 것입니다.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나 일 등도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 러므로 보물을 땅에 쌓아 둔다는 것은, 이 소중한 것들을 세상의 관점이나 인간적인 관점으로만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만 대하는 태도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는 것은, 소중한 것들을 천상적인 관점, 곧 하느님의 관점으로 이해하고, 그러한 관점에서 대하는 태도를 가리킬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의 시선으로만 사랑할 때에 그 사랑은 오래가지 않아 좀과 녹이 슬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대할 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바라시는 뜻에 따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더욱 무르익어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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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세적 인간의 생활 속에서 하느님을 섬길 것인지, 재물을 섬길 것인지를 선택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하느님을 섬기자니 눈앞의 재물이 탐나고, 재물을 섬기자니 양심이 쉽게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부분 하느님보다는 재물을 선택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고, 재물은 눈앞에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생겨났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땅에다 쌓아 두지 말고, 하느님과 재물 가운데 양자택일하여 하느님만 주인으로 섬길 것을 명령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바로 그 가치관이 각 사람의 존재 방식, 생활 방식과 인생관을 결정하지요. 그렇다면 지금 나 자신에게 절대적인 가치는 무엇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재물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나눔과 섬김과 형제애를 발휘하시고, 정의로 인간을 자유롭게 하시고 살리십니다. 그러나 재산을 축적하는 일에 눈이 멀면 어떤 형태나 경로로든지 다른 사람을 억누르고 착취하거나 노예화하고, 또 더러는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렇게 얻어 낸 재산은 결국 우리의 인생이 다하는 날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말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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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나오는 ‘하늘에 쌓는 보물’은 무엇입니까? 공로입니다. 주님을 위해 애쓴 일들입니다. 사람들은 못 봐도 주님께서는 보시는 일입니다. 참고 인내하며 절제했던 것들이지요. 사람을 의식하고 일하면 피곤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면서 교회 일을 하면 더욱 피곤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일하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위해 교회 일을 하면 기쁨이 생깁니다. 하느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늘에 쌓는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셨습니다. 맑은 눈은 그 속에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빛은 하늘이 주는 기쁨입니다. 하늘의 보화가 땅의 기쁨으로 바뀐 것이지요. 어린이는 눈이 맑습니다. 부모의 사랑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른인 우리도 어린이처럼 살면 맑은 눈이 됩니다. 그러기에 주님께서도 ‘어린이의 마음’을 간직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눈은 맑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보지 못해도 그분께서는 보십니다. 화려한 겉모습을 뚫고 속내를 보십니다. 세상 편견을 넘어 참모습을 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눈빛을 닮아야겠습니다. 그분처럼 보기 시작하면 그런 눈빛이 됩니다.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눈빛이 됩니다. 두려움을 주는 눈빛은 주님을 닮은 눈빛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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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가 가장 많이 매장되어 있는 땅은 아프리카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19세기 초 세계 각지의 많은 사람이 한탕을 노리며 그곳으로 떠났습니다. 그들은 벼락부자의 꿈을 꾸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는 결코 만만한 대륙이 아니었습니다. 상상을 뛰어넘는 장애물 앞에 많은 사람이 죽어 갔습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몇몇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어린이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온 이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현존하는 가장 큰 다이아몬드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어마어마한 돈을 제시하며 그것을 구입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발견하여 가지고 온 이들은 팔지 않았습니다. 숱한 동료들의 삶이 서려 있는 보석이었기에 돈과 바꿀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그 다이아몬드를 나라에 기증하였고, 그래서 지금까지 영국의 박물관에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벼락부자의 꿈을 안고 험난한 땅을 찾았던 그들이 새로운 사람으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힘든 과정을 거치면서 사람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달은 결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 무엇이겠는지 우리 각자 묵상해 봅시다.

20대 청년과 70대 노인이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할까요? 아무래도 젊음과 힘이 있는 20대 청년이 더 행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70대 노인의 행복도가 더 높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일반적으로 행복도는 20대부터 하락하다가 40대에 최저점을 찍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50대가 되면서 행복도가 회복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찾기 위해 한 연구진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지금 당신이 누구라도 만날 수 있다면, 누구를 만나고 싶습니까?”

 

20대는 연예인, 기업가, 정치인, 운동선수 등 유명인을 원했습니다. 그런데 70대는 가족이나 친구 등 사랑하는 사람을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 결과를 통해 삶의 우선순위가 행복과 관련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즉, 20대의 젊을 때는 성취가 우선순위에 있었고, 나이가 든 70대는 관계가 우선순위에 있었습니다.

 

행복하기를 원하는 우리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 우선순위를 두는가가 중요합니다. 성취를 위해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집중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관계를 위한 사랑의 삶 속에 행복의 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마태 6,21)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마음은 자신이 가장 가치 있다고 여기는 궁극적인 대상의 상태에 묶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단순히 ‘가난하게 살아라’, ‘저축하지 말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대신 우리의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19.20)

 

땅의 소유를, 이웃을 향한 자선과 사랑, 무엇보다 하느님 뜻을 이루는 데 사용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우선순위를 하느님과 이웃과의 관계에 두고 있을 때, 사라질 세상의 부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결정적인 보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2.23)

 

이 말씀을 기억하면서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의 어둠에 눈이 멀지 않고,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가치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멀리에 있지 않습니다.

 

오늘의 명언: 100권의 책보다 한 가지 성실한 마음이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더 크다(벤저민 프랭클린).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방법!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세가 점점 들어가시는 형제자매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 얼마나 참된 진리인지를 뼈져리게 실감하게 됩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곰곰이 따지고 보니 도둑들, 날강도들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더군요. 천신만고 끝에 출산해서, 그 오랜 세월 애지중지 양육하고, 교육시키고, 그 숱한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세드신 부모에게 돌아오는 것은 너무나 참담함이었습니다.

아직도 멀쩡히 살아 숨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도둑들이 목청을 높이고 활개를 칩니다. 그들은 아들, 딸이요, 며느리, 사위에다 손주, 손녀들입니다.

그들의 행태는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기다리다 보면 세월이 흐르고 자연스레 유산에 대한 분배가 이루어질 텐데, 그걸 못 견디고 조속한 분배를 요구합니다. 조금이라도 더 챙겨가려고 기를 씁니다. 굶주린 하이에나 떼가 따로 없습니다.

땅에 쌓아두지 말라는 보물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대체 그 보물은 어떤 것일까요? 엄청난 은행 잔고? 잘 나가는 주식? 목 좋은 곳의 부동산? 아파트? 남부럽지 않은 건강, 사랑하는 사람? 재능? 자리?

사실 우리가 보물로 생각하는 대상들은 진정한 보물이 아니라는 것, 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진정한 보물의 특징은 영원성, 불멸성입니다. 세월이 흐르면 썩어 내려앉고, 허물어질 그런 대상이 아닙니다.

진정한 보물은 영혼과 관련된 것입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누군가에게 다가가 따뜻함과 친절함을 보이셨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로 인도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참된 보물을 얻은 것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누군가에게 내 선한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건넸습니까? 그로 인해 그가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도 나로 인해 미소를 되찾고, 고통 속에서도 기쁘게 살아갑니까?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보물을 하늘나라에 쌓은 것입니다.

 

 

 

칭찬이 독이 되는 사람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신다. 보물이 있는 그곳에 마음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의 빛이 눈을 통해 새어 나온다고 하시며 이렇게 물으신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깊겠느냐?"(마태 6,23) 그런데 빛이 어둠이 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빛이 어떻게 어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여기서 마음의 빛이란 내가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 곧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은 자기가 바라보는 것을 닮아 간다. 그래서 무엇을 빛으로 삼아 바라보느냐가 그 사람의 전부를 결정한다. 하늘을 빛으로 삼으면 그 사람 안이 환해지고, 세상 것을 빛으로 삼으면 빛이라 여기던 그것이 도리어 어둠이 된다. 빛이 어둠이라는 것은, 내가 빛인 줄 알고 좇는 그것이 실은 나를 삼키는 탐욕이라는 뜻이다. 옛 영성가들은 이를 세속과 육신과 마귀라 불렀고, 풀어 말하면 소유욕과 육욕과 지배욕이다.

이 어둠이 얼마나 교묘한지를 보여 주는 장면이 있다. 어느 반려견 훈련 프로그램에 순하기로 소문난 레트리버 한 마리가 나왔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겁을 먹고 드러누워 배를 보일 만큼 소심한 개였다. 그런데 그 착한 개가 유독 가족만은 물었다. 물고 나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무릎에 올라 재롱을 떨었다. 가족은 이 개가 본래 착한데 어떤 상처 때문에 그런다고 믿으며, 개가 화내지 않도록 행동을 조심했다. 심지어 개가 좋아하는 화분은 개가 없을 때만 몰래 닦았다. 보다 못한 훈련사가 말했다. 그것은 아이가 담배를 피우는데 "얼마나 힘들면 그러겠어" 하며 내버려 두는 것과 같다고.

이 개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랑도 받고 싶고 지배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물어서 가족을 두렵게 만들어 지배하고, 다시 애교로 사랑을 받아 냈다. 화분을 제 것으로 여겨 손대지 못하게 으르렁대다가, 자기 뜻대로 따라 주면 다시 예뻐했다. 이만큼만 받들어 주면 착한 개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다. 가족은 개를 키운 것이 아니라 개를 섬기고 있었다.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훈련사가 이런 개에게는 순종하기 전까지 결코 잘해 주지 말라고 한 까닭이 여기 있다. 어설픈 애정이 도리어 독이 되기 때문이다. 그 개에게 "앉아"를 시키면 한참을 버틴다. 자기보다 낮다고 여기는 사람 앞에 앉아 칭찬을 들을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칭찬이란 자기보다 높은 이에게 들어야 기분 좋은 법이니까.

성경은 이 어둠을 일찍부터 고발한다. 여호수아 시대에 아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하느님께서 봉헌물로 바치라 명하신 전리품 가운데, 그는 값진 외투 한 벌과 은과 금덩이를 보고 탐이 나 몰래 자기 천막 땅속에 묻어 두었다. "탐이 나서 가졌습니다"(여호 7,21 참조)라는 그의 고백이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그 작은 어둠 하나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아이 성 앞에서 무너졌다. 빛인 줄 알고 끌어안은 금덩이가, 실은 그를 삼킨 어둠이었던 것이다. 게하지도 그러하다. 스승 엘리사가 한사코 거절한 나아만의 선물을, 게하지는 몰래 뒤쫓아 가 받아 챙겼다. 그러자 나아만에게서 떠난 나병이 게하지에게 옮겨붙었다(2열왕 5장 참조). 소유욕이라는 어둠은 결국 제 몸에 병을 새긴다.

삼구의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절대 칭찬하면 안 된다. 예수님도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라고 하셨다. 세속과 육신과 마귀를 끝내 빛으로 고집하는 사람에게는 거룩한 진주가 들어가도 짓밟힐 뿐이다. 그런 이를 어설피 잘해 주어 성당으로 끌어들이면, 그는 하느님까지 가스라이팅한다. 자기가 잘나서 받는 줄 알지, 결코 순종하지 않는다. 세례를 받아도 합당하지 않게 성체를 모시는 자리에 머물고 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사람에게까지 당신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이다. 돈주머니를 쥐고 있던 유다에게도 당신 살과 피를 떼어 주시고 그 발을 씻어 주셨다. 그 유다는 끝내 스승을 발로 짓밟았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러셨는가. 그가 원하였기 때문이다. 원하는 자에게 주지 않을 수 없으셨기 때문이다. 마지막 한 조각까지 다 내어 주셨기에, 이제 그의 멸망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되었다. 우리가 본받을 자리도 여기다. 어둠을 빛이라 우기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와 잘해 줄 필요는 없으되, 그가 진정 원할 때는 끝까지 내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칭찬해야 하는가. 한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 학생들에게, 다른 사람이 자기를 두고 평하는 말을 엿듣게 했다. 한 사람은 줄곧 헐뜯기만 했고, 한 사람은 줄곧 칭찬만 했다. 또 한 사람은 헐뜯다가 끝에 가서 칭찬으로 맺었고, 마지막 사람은 칭찬하다가 끝에 가서 헐뜯음으로 맺었다. 사람들이 가장 호감을 느낀 상대는 누구였겠는가. 줄곧 칭찬만 한 사람이 아니었다. 처음엔 헐뜯다가 마지막에 칭찬해 준 사람이었다. 가장 미운 사람은 누구였는가. 줄곧 헐뜯은 사람이 아니라, 좋게 말하다가 마지막에 헐뜯은 사람이었다.

까닭은 이렇다. 마지막 말은 그 사람을 향한 기대를 담는다. 시종 좋은 말만 하거나 나쁜 말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한다. 그러나 부족함을 짚은 뒤에 건네는 칭찬은 "너는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안겨 준다. 다만 여기에도 분별이 필요하다. 소유욕과 육욕과 지배욕을 살찌우는 칭찬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칭찬은 상대를 나를 부리는 가스라이터로 키울 뿐이다. 우리가 칭찬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그 사람이 참 빛을 향해 한 걸음 내딛는 그 모습이다.

여기 합당한 칭찬의 본보기가 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한 장면이다. 까다롭고 오만한 강박증 환자가 한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려다 칭찬을 한 가지 해 보라는 청을 받는다. 그가 머뭇거리다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의사 말도 듣지 않던 자기가 약을 먹기로 했다는 것이다. 여인이 그게 무슨 칭찬이냐 되묻자 그가 답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요." 여인은 그것이 생애 최고의 칭찬이라 한다. 돈과 교만에 갇혀 있던 두 사람이, 서로를 탐욕에서 끌어내 주었다는 그 한마디에 마음을 연 것이다. 누군가를 소유욕과 지배욕에서 벗어나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것, 그보다 큰 칭찬은 없다.

그러니 공부를 잘한다, 돈을 잘 번다, 얼굴이 곱다, 머리가 좋다는 칭찬을 조심하여라. 그런 말은 나를 길들이려는 계략이거나, 나를 세속과 육신과 마귀에 더 깊이 빠뜨려 어둠으로 끌고 가려는 속삭임일 때가 많다. 우리가 주고받아야 할 참된 칭찬은, 어둠을 빛이라 여기던 사람이 참 빛을 향하도록 돌이켜 세우는 칭찬이다. 그러할 때 비로소 우리 안의 빛은 어둠이 아니라 빛으로 빛나고, 그 빛이 눈을 통해 흘러나와 또 다른 누군가의 어둠을 밝히게 될 것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제게는 탁상용 일정표가 있습니다. 미국에 와서부터 매년 일정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집무실에도 있고, 사제관에도 있고, 핸드폰에도 있습니다. 작년부터는 형제님 한 분의 도움으로 구글 드라이브 일정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와 핸드폰이 자동으로 연결되니 어디서든지 일정을 확인할 수 있고 수정할 수도 있습니다. 참 편리한 시대입니다. 그래도 저는 아직 탁상용 일정표가 정겹습니다. 손으로 직접 적어 내려가는 그 느낌 속에 지나온 시간과 만났던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사에 있을 때의 일정표를 보면 대부분 신문 홍보와 신문사 행사 일정이었습니다. 브루클린 한인 성당 미사 일정도 많았습니다. 성지순례 일정도 있었고, 동북부 ME 지도신부로 봉사하면서 봉사자들과의 일정도 많았습니다. 코로나 시절에는 신부님들과 함께하는 모임과 캠프 일정이 참 많았습니다. 지나고 보니 제가 도움을 주었다고 생각했던 일정들 속에서 오히려 제가 더 많은 도움을 받으며 살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도 있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조용히 저 자신을 돌아보는 기도와 피정의 일정은 많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달라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온 지도 어느덧 2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지금의 일정표에서 가장 우선되는 것은 미사입니다. 부주임 신부님이 3달 정도의 미사표를 정리해서 주면, 제 일정표에 먼저 기록합니다. 세례성사, 견진성사, 혼인성사와 같은 전례 일정도 있습니다. 사순 특강과 대림 특강, 성모의 밤과 같은 본당 행사도 있습니다. 중남부 꾸르실료 지도신부 일정도 있고, 북미주 한인 사목 사제 협의회 대표 신부로서의 일정도 있습니다. 때로는 이미 잡혀 있던 모든 계획을 내려놓고 가장 먼저 달려가야 하는 일정도 있습니다. 병자성사와 장례미사입니다. 어떤 일정은 저를 지치게도 하지만, 어떤 일정은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저를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교구 사제들과의 만남과 피정의 시간입니다. 그런데 돌아보면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누군가를 도와준 일정도 많았지만, 사실은 제가 더 큰 위로와 힘을 받은 시간이 많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주 단순하지만 우리의 삶을 깊이 흔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일정표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학생은 공부 일정표를 만들고, 회사원은 업무 일정표를 만들고, 부모는 자녀를 위한 일정표를 만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일정의 숫자가 아닙니다. 그 일정 안에 어떤 마음이 담겨 있는가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성공, 재물, 명예, 권력을 얻기 위한 일정표를 만듭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더 많은 돈,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살아갑니다. 물론 그런 노력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인생의 목적이 된다면 우리의 일정표는 땅에만 기록될 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에도 기록되는 일정표를 만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 시간, 아픈 사람을 찾아간 시간, 가족의 이야기를 들어준 시간, 용서하기 위해 참아낸 시간,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낮춘 시간이 바로 하늘에 기록되는 일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그런 삶을 알려주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삶입니다. 욕심과 욕망의 불을 끄는 삶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평화를 위해 일하며, 옳은 일을 위해 손해를 감수하는 삶입니다. 세상은 그런 삶을 손해라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그것이 가장 귀한 보물이 됩니다. 우주는 너무 넓어서 빛조차 수만 년을 달려야 하는 곳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속도와 선행의 속도는 빛보다 빠릅니다. 누군가를 위한 작은 희생과 진심 어린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행한 작은 선행 하나도 하늘에서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매일 일정표를 만들며 살아갑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바쁜 삶을 살았는가가 아닙니다. 하늘에도 기록될 수 있는 삶을 살았는가입니다. 오늘 하루의 일정 속에 기도의 시간이 있었는지, 누군가를 위한 사랑의 시간이 있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행운은 성공, 재물, 명예, 권력의 다른 이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희생, 나눔, 헌신,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러하시듯 벗에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 6,19-20)
더러울 수 있는
나의 눈이 아니라


늘 맑고 깨끗한
하느님의 눈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보물인
벗을


바라보게 하소서


거칠 수 있는
나의 손이 아니라


늘 부드럽고 따스한
하느님의 손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보물인
벗을


보듬게 하소서


멈칫할 수 있는
나의 발이 아니라


늘 생기 넘치는
하느님의 발로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보물인
벗에게


다가가게 하소서


탐욕스러울 수 있는
나의 마음이 아니라


늘 아낌없이 베푸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께서 주신
나의 보물인
벗을


품게 하소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보물처럼 여기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이 보물이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더 벌기 위해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자신의 가족이 보물이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가족을 위해 잘하려고 애를 쓰고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과연 인생의 무엇을 보물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렇게 세상의 수많은 보물들이 언젠가는 나에게서 사라지게 되고 또 내가 죽게 될 경우 가져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보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내가 하느님을 보물로 여기며 살아갈 때 어쩌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큰 것을 얻게 될 때 작은 것들은 다 따라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김웅태 신부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신실하신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또 한 번 새로운 하루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 안에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매일 수많은 것을 보고, 만지고, 소유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은연중에 우리가 가진 것들의 크기와 가치로 우리 자신의 안전과 행복을 평가하려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우리의 시선과 마음이 진정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아주 명확하면서도 따뜻하게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마태 6,19-20)

이 말씀을 들으며 오늘 우리는 잠시 멈추어 서서 자문하게 됩니다.

‘지금 내가 가슴 깊이 품고 있는 나만의 보물은 무엇인가?’

‘그리고 나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1. 땅의 보물과 하늘의 보물

오늘 제1독서인 열왕기 하권의 말씀은 우리에게 이 세상의 힘과 권력을 ‘보물’로 삼았던 한 인물의 참담한 결말을 보여 줍니다.

아하즈야 임금의 어머니 아탈야는 오직 권력이라는 이 세상의 보물을 차지하기 위해 왕족들을 모두 살해하는 끔찍한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녀는 자신이 움켜쥔 왕좌가 영원할 줄 알았고, 그것이 자신을 지켜 줄 최고의 보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과 재물이라는 보물은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결국 ‘좀과 녹이 망가뜨리는’ 유한한 것에 불과했습니다. 아탈야는 결국 비극적인 파멸을 맞이하였고, 백성들은 다윗 왕조의 정당한 후계자 요아스를 옹립하며 주님의 성전에서 기쁨과 평화를 되찾게 됩니다.

이 구약의 사건은 현대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우리가 그토록 밤낮으로 애쓰며 쌓으려고 하는 세상의 보물들, 곧 통장의 잔고, 높은 사회적 지위, 남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은 과연 우리 영혼에 영원한 평화를 줄 수 있을까요?

그것들은 우리가 조금만 방심해도 세월의 흐름이라는 ‘녹’에 슬어 빛을 잃고, 예기치 못한 인생의 시련이라는 ‘도둑’에게 한순간에 빼앗기기 쉬운 불안한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늘에 쌓는 보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 나라의 가치, 곧 사랑과 나눔, 희생과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향해 바치는 온전한 신뢰와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자비야말로 그 어떤 도둑도 빼앗아 갈 수 없고, 세월이 흘러도 결코 낡지 않는 영원한 하늘의 보물입니다.

 

2. 가방 하나에 담긴 인생의 보물

오래전, 요양원에 들어가시게 된 한 할머니 교우님의 이삿짐 정리를 도와드린 적이 있습니다.

평생을 살아오신 정든 집을 떠나며, 요양원에서 허락된 개인 공간은 오직 사물함 하나와 작은 가방 하나뿐이었습니다. 수십 년 동안 거실 가득 채워져 있던 화려한 그릇들, 장롱 속 고운 옷들, 아기자기한 가구들을 뒤로하고 할머니가 가방에 조심스레 담으신 물건은 아주 단출했습니다.

손때가 묻어 가죽이 닳은 성경책, 자녀들이 첫 영성체 때 선물해 주어 알이 군데군데 빠진 묵주, 그리고 세상을 떠난 남편의 빛바랜 사진과 아이들이 어릴 적 보낸 손편지 몇 장이 전부였습니다.

제가 묵직한 이삿짐들을 처분하며 미안해하는 표정을 짓자, 할머니께서는 오히려 제 손을 따뜻하게 잡으시며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신부님, 괜찮아요. 평생 이것저것 참 많이도 모으고 살았는데, 막상 떠나려고 보니까 다 두고 갈 것들이데요. 내 마음에 진짜 남는 건 이 손때 묻은 성경책 보며 바쳤던 기도랑, 내 가족들 사랑한 기억밖에 없어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그 할머니의 맑은 눈망울에서 저는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늘에 보물을 쌓은 이’의 평화와 자유를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분은 인생의 여정 끝에 진정 훔쳐 갈 수 없는 영원한 보물을 마음에 간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3. 눈은 몸의 등불: 맑은 눈으로 약속을 바라보기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후반부에서 우리의 시선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마태 6,22-23)

우리의 눈이 물질적인 욕망과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영적인 어둠 속을 헤매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눈이 맑아서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약속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전체는 은총의 빛으로 환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풍파에 흔들리고 외로울 때, 우리의 영적 눈은 쉽게 흐려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이 험난한 세상에서 홀로 마음을 지키며 살아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 곧 보호자를 보내 주시어 늘 우리 곁에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그 진리의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등불을 켜 주실 때, 비로소 우리의 눈은 맑아져 세상의 유혹을 물리치고 참된 보물이신 하느님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4. 맺으며: 오늘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보물은 오직 주님 한 분뿐이십니다.

세상이 말하는 임시방편의 보물들에 마음을 빼앗겨 눈이 어두워지지 않도록 늘 깨어 기도합시다. 매일 주어지는 일상 안에서 주위의 형제자매들에게 따뜻한 눈길 한 번 더 건네고, 격려의 말 한마디 더 건네는 작은 사랑의 실천들이야말로 하늘 나라의 창고에 우리의 진정한 보물을 쌓아 올리는 길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의 눈을 맑게 씻고 하늘을 바라봅시다. 그리고 내 안에서 조용히 속삭이시는 성령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봅시다.

주님께서 주시는 참된 평화와 기쁨이 여러분의 영혼을 환하게 비추어 주시기를 마음 모아 기도합니다.

잠시 묵상하겠습니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1)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를 궁금해합니다. 그래서 연애의 고수는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상대에게 말한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말에 자기 속마음을 슬쩍 얹어서 이야기하면 열이면 열 넘어온다는 것입니다. 사실 연애 때만 그렇겠습니까? 사기꾼들도 그렇다고 하지요. 자기 이야기만 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말해주면서 사기를 칩니다.

 

공감이 되지 않습니까? 저 역시 다른 사람의 말에 흔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하면서도, 누군가 저에 대해 말하면 귀가 쫑긋 세워지곤 합니다. 아마 저만 그런 것이 아닐걸요?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자기 SNS 계정의 글에 어떤 댓글이 달렸는지 계속해서 확인하면서 신경을 씁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는 이렇게 신경 쓰면서 정작 주님의 시선에는 신경 쓰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댓글을 달지 않아서일까요? 아니면 말씀을 직접 해주지 않아서일까요? 사실 계속 이야기하고 계십니다. 성경 말씀을 통해, 또 이웃을 통해, 무엇보다 자기 삶을 통해 직간접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나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만 신경 쓰다 보니, 주님의 시선을 외면하는 것이 아닐까요?

 

침묵 속에서, 또 기도와 묵상 안에서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워낙 다른 사람 말에 집중을 잘하는 우리이기에 조금만 노력한다면 주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에 충분히 담을 수 있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면 이웃이나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지요. 보물이 망가지지 않고 안전한 곳인 하늘에 마음을 둘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시선에 집중하는 삶입니다. 주님의 시선을 따르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귀한 보물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따라 우리 몸이 빛을 따라 걸을 수도 있고, 어둠 속을 걸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봐야 할까요? 주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일치할 수 있도록 주님 뜻에 따를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 것만을 바라보면서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삶은 이제 버리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일치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명언: 걱정 없는 인생을 바라지 말고 걱정에 물들지 않는 연습을 하라(알랭 드 보통).

 

 

 

다른 것은 속여도 이것은 절대 속일 수 없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있는 곳에 나도 머물게 됩니다. 돈은 썩어서 흙이 될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면 자신도 흙이 됩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로 떨어지는 얼음 위에 붙은 양의 사체를 먹겠다고 하다가 얼음에 들러붙어 죽는 독수리들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과 같습니다. 밑으로 가는 것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는 능력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바라고 믿고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그런데 이 지상의 것을 사랑하면 이 지상의 것과 함께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바라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하늘의 것을 바라는지, 지상의 것을 바라는지는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눈빛으로 알 수 있습니다.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눈은 마음의 창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여기에서 밝고 어둠은 하늘과 땅을 의미합니다. 눈빛이 맑으면 하늘의 것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탁하면 지상의 것을 욕망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건 다 속여도 눈빛은 못 속입니다. 마음을 바로 들여다볼 수 있는 육체의 유일한 문이기 때문입니다.

유튜브 ‘솔직한 여자TV: 키 작은 중국 재벌이 가난한 척하고 소개팅 나갔더니’란 중국 소개팅 프로그램을 보았습니다. 그냥 예상한 것 그대로였습니다. 여자는 돈과 외모를 밝히는 사람이었습니다. 남자는 돈만 바라보고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배제하기 위해 제작팀에게 자기 재산과 직업을 숨겨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여자 측에서는 키도 작고 옷 입는 감각도 없는 남자를 대놓고 싫어하고 무시합니다. 눈을 마주치지도 않고 빨리 가서 쉬고 싶다는 귀찮은 눈빛이었습니다. 그래도 남자는 끝까지 친절하려고 노력합니다.

여자가 하도 남자를 무시하니 제작진은 남자 몰래 그 사람이 호텔을 아버지로부터 인수하는 중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자 여자가 갑자기 돌변합니다. 눈이 빛납니다. 남자는 짙은 화장의 여자는 싫다고 했고 여자는 바로 립스틱을 지웁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종처럼 부려 먹던 남자를 위해 모든 것을 해 주려고 합니다. 허술한 남자는 이제 자기에게 호감을 느낀 것이라며 좋아합니다. 그러나 제작진은 솔직하게 돈 많은 사람임을 밝혔다고 말해줍니다.

어쩔 수 없이 여자의 마음을 알기 위해 따로 제작진이 말을 하고 이것을 남자가 듣게 했습니다. 만약 남자가 돈이 없었어도 선택했을 것이냐고 하자 여자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남자는 돌아서 가버립니다.

만약 남자가 돈 이야기할 때 눈이 반짝이는 사람과 결혼하면 어떻게 될까요? 돈을 못 벌어다 주면 끊임없이 구박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사람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돈을 사랑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낳아도 자신과 똑같이 돈만 욕망하는 자녀가 될 것입니다. 자녀 대부분은 엄마를 그대로 닮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각자가 생각하는 자기 수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수준은 목숨과도 같습니다. 사람을 사귈 때 자신과 비슷하거나 나은 수준의 사람을 만나려고 하는 이유는 나의 수준이 곧 목숨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과의 대화에서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되었는데도 그녀와 함께해서 멸망했습니다. 사람은 말이나 행동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눈빛은 절대 못 속입니다. 이것을 잘 알아챌 수 있어야 함께 땅으로 곤두박질치지 않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난한 흥부 네는 자식도 많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데, 아이들까지 많으니 흥부 네는 열심히 일해도 겨우 먹고 살기 바쁘기 마련입니다. 은행에서 대출받아 작은 가게를 시작했는데, 토네이도가 발생해서 건물이 부서졌습니다. 누구한테 하소연 할 수도 없고, 한숨만 나오기 마련입니다. 제게도 큰 행사가 겹쳐서 있었습니다. 본당 견진성사와 중남부 꾸르실료 교육이 겹쳤습니다. 둘 다 일정을 제가 잡지 않았습니다. 견진성사도 작년에 이미 날이 정해졌습니다. 꾸르실료 교육도 작년에 이미 날이 정해졌습니다. 제가 댈러스로 오면서 꾸르실료 지도신부가 되었고, 자연스럽게 꾸르실료 교육을 맡아야 했기에 일정이 겹친 겁니다. 견진성사는 주교님이 오시고, 본당의 큰 행사이니 당연히 있어야 합니다. 꾸르실료도 지도신부이기에 당연히 교육에 함께 해야 합니다. 주일 새벽에 꾸르실료 미사를 마치고, 본당으로 와서 견진성사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주교님이 떠나시고, 다시 꾸르실료 마침예식을 위해 갔습니다. 견진성사도, 꾸르실료 교육도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견진성사 미사를 하면서 주교님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겸손하고 검소하시고 소탈 하신 모습입니다. 작은 차를 손수 운전하고 오셨습니다. 장백의도 직접 입으셨고, 제의는 본당 것을 빌려 입었습니다. 공지사항 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교님이 오시니, 제가 순위에서 밀리네요?” 교우들은 웃었습니다. 주교님은 한국말을 이해 못하시니 나중에 교우들이 왜 웃었는지 궁금해 하였습니다. 주교님에게 본당 사제와 주교는 순위와 권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주교와 본당 사제는 직책이 다를 뿐이지 권위가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주교님은 점심 도시락을 드시고, 남은 건 가져갔습니다. 저녁에 드신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주교님의 모습이었습니다. 부주임 신부님에게도 자상하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30개월 임기를 연장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습니다. 그건 저와 부주임 신부님이 속한 서울대교구의 교구장께 먼저 청해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들에게도 관심을 보여 주시니 감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권위와 직책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아야 할 재물은 겸손과 단순함입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나눔입니다. 그것은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꾸르실료는 교육 특성상 내용을 미리 알려주지 않습니다. 꾸르실료 교육을 마친 사람을 꾸르실리스타라고 합니다. 3박4일 교육을 마친 형제님이 소감을 발표하면서 ‘꾸르실리스타와 바리스타’가 비슷하다고 하였습니다. 바리스타는 일정정도 교육을 받은 후에, 커피의 맛과 풍미를 내서 모르는 사람에게 전해 줍니다. 명동에 ‘하랑’이라는 커피 매장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일하는 분은 가톨릭 바리스타 협회를 통해서 교육을 받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자원봉사로 커피 매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의 봉사와 노력은 하늘에 재물로 쌓일 것입니다. 그분들의 봉사와 노력도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꾸르실리스타도 3박 4일 교육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의 맛과 풍비를 이웃에게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꾸리실리스타는 기도, 활동, 공부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어서 복음을 전하는 거라고 합니다. 형제님은 꾸르실료 교육의 목적을 잘 이해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하늘에 재물을 쌓은 것입니다. 저는 32년 꾸르실리스타로 지내고 있지만 그렇게 멋지게 설명하는 분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스타는 별이라는 뜻도 있고, 전문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번 3박4일의 교육에 15명의 봉사자가 함께 했습니다. 그분들 또한 하늘에 재물을 쌓았습니다. 그분들이 쌓은 재물은 누가 빼앗아가지 못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을 재산은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금, 다이아몬드, 고가의 미술품, 땅, 현금’은 아닐 것입니다. 하늘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 결코 남들이 가져갈 수 없는 재물, 사라지지 않은 재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인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늘나라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맑은 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 몸도 환하다.”(마태 6,22)


내 곁에
늘 그렇게
벗이 있거늘


스스로
가리지 않은
맑은 눈으로만
벗을 볼 수 있으니


맑은 눈에
벗이 깃들어
품에 고이 스미고


벗을 품어
무거워진 듯한
몸과 마음은 오히려
밝고 환하고 아름답지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먼저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보물로 생각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도 보물을 생각할 때 휘황찬란한 금은보화를 떠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정한 보물은 자신이 죽어서 가지고 갈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도 죽어서도 하느님 안에 영원히 간직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진정 하늘에 쌓을 수 있는 보물이 무엇인지 우리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하느님 안의 최고의 가치, 곧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사랑일 것입니다. 그 사랑만이 하느님 안에 영원한 행복을 주는 진정한 보물이될 것을 믿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여러분들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재물? 부동산? 집? 물론 적었던 세 가지도 보물이라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진짜 보물은 여러분 자신입니다. 바로 여러분이 하느님의 보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보물들을 악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 지금도 싸우십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보물인 우리가 세상을 향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며, 우리의 아버지는 하느님이십니다. 우리의 고향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고 이 세상에서 삶을 무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즉 하느님의 시선으로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하느님의 마음으로 길잃은 이들을 보듬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에서의 삶을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의 영적인 눈은 성하지 못하고 어둠에 묻혀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영적인 눈이 등불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어둠을 이기는 빛이 되는 방법은 항상 하느님의 보물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계십니까. 아멘!

 

 

 

『‘나중’이 아니라 ‘지금부터’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19-23)”

 

1) 여기서 ‘자신을 위하여’는 “다른 사람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하여”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내세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현세의 인생만을 위하여”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위하여’ 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의 말이 연상됩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로마 14,7-9).”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는다는 말은, 우리가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뜻에 합당하게 인생을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사람이고, 그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허무한 것들’은 모두 버리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려고 돌아가셨다가 부활하셨고, 우리는 그 생명을 받으려고 주님의 뒤를 따르면서 살아갑니다.>

 

2)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는 “현세의 인생에 대해서 집착하지 마라.”입니다. 또는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을 욕심내지 말고, 그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입니다.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는 “지상적이고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은 허무하게 사라진다.”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는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입니다.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는 “주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은 완전하고 영원하다.”입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는 “자기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으려고 추구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입니다.

허무한 것만 찾는 사람은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사라질 인생을 살 것이고, 영원한 것만 추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될 것입니다.

<안 믿는 세속 사람들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즉 주님 뜻에 합당한 인생관과 가치관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나중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시작되어서 ‘그날’에(종말의 날에) 완성됩니다. 신앙생활은 그날 완성될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이고, 동시에 지금 시작된 그 생명을 누리는 생활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는 “주님의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그 가르침대로 사는 사람의 인생은 ‘복음의 빛’으로 환하게 빛나고”입니다.

<구원을 향해서 나아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는 “복음을 외면하고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만 찾는 사람의 인생은 멸망을 향해서 간다.”입니다.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는 “구원의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라고 착각하는 사람의 인생은 남들보다 더 짙은 어둠 속에 빠진다.”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멸망을 향해서 간다는 것입니다.>

 

3)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여러분도 그분과 함께 영광 속에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콜로 3,1-4.9ㄴ-10ㄱ).”

신앙인은 세례성사를 통해서 새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땅에 속한 것과 낡은 것은 죽이고, ‘새 생명’을 얻어서 ‘새 인간’으로 태어났고, ‘위’를 향해서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4)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세상에서 온 것’이 사탄에게서 온 것일 수도 있고, 그냥 세속적인 것일 수도 있는데, 어떻든 세상에서 온 것은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에게서 온 것만을 추구해야 합니다. 지금부터.>

 

 

 

김준수 신부님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6,20)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안경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안경을 쓰기 전에는 가끔 길을 걷다가 동네 어르신들을 얼른 알아 뵙지 못하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지나칠 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시력이 약한 탓으로, 본의 아니게 예의가 없는 아이로 오해받았던 기억도 있을 만큼 어려서부터 시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눈에 관한 또 다른 기억은 늘 제 엄마는 제게 말했죠. ‘너는 눈이 예쁘다고!’ 저는 압니다. 제 얼굴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눈이라는 사실을. 그런 제 눈이 나이 들어오면서 사람-사물-사건을 뚜렷하게 보지 못한 채 살아오다가 백내장 시술 후에야 비로소 다시 세상을 밝게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많은 사람을 만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다 보니 때론 만나는 사람의 눈을 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때론 정말이지 그 사람의 눈을 보면 어느 정도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읽을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저를 만나는 사람도 저의 눈을 보면 저의 눈을 통해서 제 마음 상태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내 마음이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제 마음의 등불인 눈의 색깔도 다르게 비춰줄 것이며, 그 빛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잘 인도할 수도 있고, 걸려 넘어지게 할 수 있음을 기억합니다. 여러분의 눈은 몸의 등불처럼 훤히 빛나고 있나요. 당신의 눈이 맑으면 하느님을 볼 것입니다. 세상 것이 아닌 우리 마음의 시선을 올곧고 순수하게 주님께만 고정한다면, 하느님을 우리는 일상에서 보게 될 것이고, 하느님을 보는 그 자체가 행복이며 보물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눈이 곧 몸의 등불이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다.’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눈은 외부를 볼 수 있는 동시에 외부에서 눈을 통해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과 같습니다. 그러기에 눈이 맑으면 마음 역시 맑고 투명하리라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적인 눈의 상태를 통해서 내적인 영적 눈이 맑고 투명한 시선을 가져라, 는 말씀으로 들려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마태5,8)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깨끗하다는 뜻은 곧 올바른 마음의 지향을 의미합니다. 죄의 유무에 연관 지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깨끗하지 않은 마음이란 곧 빗나간 마음, 비뚤어진 마음입니다. 세상의 사물, 사건이나 사람을 볼 때 있는 그대로 순수하게 올곧게 바라보는 것이 곧 깨끗한 마음입니다. 흔히 표현하는 것처럼 돼지 눈에는 모든 것이 돼지로 보이지만 부처 눈에는 모든 것이 다 부처로 보인다고 하잖아요.

예수님의 위 말씀은 사실, 하늘과 땅에 상관없이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일뿐더러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일 것입니다. 주님의 눈과 마음으로 바라본다면, 모든 것이 다 이해되리라 봅니다. 왜냐하면 삶을 살아오면서 자신을 위하여 그토록 재물을 땅에 쌓아 두었지만, 세상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는 게 인생임을 뒤늦게 깨닫잖아요. 사라지는 것, 없어지는 것에 목숨 걸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어라, 고 경고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보물을 지상적인 귀한 것, 좋은 것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보다, 당신이 보여 주신 참된 인간 삶의 태도인 진복을 의미한다고 보면 훨씬 이해가 쉬우리라 생각됩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의 행복도 불행도 결정된다고 봅니다. 진복의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그리스도인 삶의 소중하고 아름다운 보물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삶의 가치를 최우선인 나의 삶의 보물로 여기고 살아간다면 그런 삶의 결실이야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는 것일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하늘이란 우리 마음을 가리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하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보물인 참된 행복은 땅이 아닌 우리 마음속에 쌓아야 합니다. 보물을 마음에 쌓아 두는 그런 사람의 보물은 진정으로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할 것입니다.”(6,20)

우리 삶의 참된 보물과 같은 진복의 가르침을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버릴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간직하고 그것을 하나하나 실천하는 것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마음에서 솟아나는 등불은 단순하고 소박하며, 자비롭고, 온유하고, 깨끗하고 평화롭고 의로운 빛을 비추지 않을까 싶네요. 과연 나는 내 마음속에 어떤 보물을 쌓아 두고 있는가? 내 눈에는 어떤 등불이 켜져 있는가, 라고 묻는 하루가 되고, 마음 살피기를 하는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우리가 사람-사물-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면, 우리가 바라보는 사람-사물-사건이 달리 보일 것입니다.“‘주님, 제 눈을 맑게 해주시고 제 온몸이 환히 빛나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제 마음을 깨끗하게 해 주십시오. 아멘.”

 

 

 

마음의 등불인 눈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님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무나 좋아 깜짝 놀랄 정도로 참 기가 막힙니다.
각자 보물이 무엇이며 어디에 놓을지 어떻게 관리할지까지 알려 줬죠.
보물을 땅에 쌓지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당연한 말씀 감격스럽습니다.

몸의 등불인 우리 눈에 대한 말씀 너무나 의미심장 감명 절로 납니다.
하늘식 밝은 눈으로 살아야 하는데 양심의 눈들이 너무나 어둡잖아요.
어두워 앞 못 보는 눈들로 세상 살면서 얼마나 나쁜 짓들 잘하는지요.

우리 눈 맑게 해서 세상을 환히 보며 예수님 가르침 대로 살아봅시다.
인간들이 원래 바라는 좋은 세상이 지금 여기 펼쳐지도록 노력합시다.

가톨릭알림 말: 양심의 눈을 떠서 하늘빛의 안내대로 살도록 해봅시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세 가지의 경건생활, 자선과 기도와 단식에 대해 말씀하신 다음, 보물과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보물’은 보석을 나타내는 문자적인 의미를 넘어, ‘주님을 경외할 줄 아는 지혜’(이사 33,6)를 상징하기도 하며, 또한 ‘이스라엘’에 견주기도 합니다(탈출 19,5; 신명 7,6). 

한편 ‘보물’은 획득하여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와 있으니 찾은 이에게 발견됩니다.

또한 발견하기만 하고 차지하지 못한 이도 있고, 그런가 하면 아예 찾아 나서지도 않은 이가 있고, 찾았으나 악용하는 이도 있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마태 6,1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둘 수도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둘 수도 있습니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위해 쌓아올린 보물이지만, 좀 먹고 녹슬고 도둑 받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하느님 앞에서 쌓아올린 보물이고, 영원히 남는 ‘의로움의 보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을 보면, 자신이 소중하고 중요하다고 여기는, 곧 값진 보물이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눈이 자신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을 보고 있는지, 자신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하느님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마음은 어디에 있겠는가?

당연히 주님의 마음은 분명 여기 저희 안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 마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당신의 보물인지라 당신의 눈은 지금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당신 목숨을 내어주고 얻은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제 마음에 와 있는 주님의 눈동자를 관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3)

그렇습니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해질 것입니다.

곧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이면, 환하고 투명하게 볼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볼 것'(마태 5,8)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눈이 맑아져야 할 일입니다. 

만약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눈이 성하지 못하면'(πονηροσ)은 직역하면 ‘악하면’으로, 곧 ‘악한 눈’을 뜻합니다.

그러니 보물의 처신이나 사용이 악하지 않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보물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자신을 어둠에 빠뜨리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 6, 22)

 

주님!

제 눈이 당신을 바라보게 하소서.

있는 것을 쓸모없다고 보는 불평의 눈이 아니라, 있는 것을 소중하다고 보는 축복의 눈이 되게 하소서.

보아도 보지 못하는 눈이 아니라, 모든 것 안에서 경탄과 탄성, 경배와 경외를 바라보게 하소서.

상처를 보되 그 속에서 구원을 볼 줄을 알고, 죄를 보되 자책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았음을 보는 맑은 눈이 되게 하소서.

진부함을 넘어 경이로움을 보고, 행위를 넘어 존재를 보는,

거부할 수도 거부될 수도 없는, 그 무엇도 떼어놓을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의 눈이 되게 하소서.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간략한 어른 입교식’을 통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렇게 묻고 대답합니다.

♱ 여러분은 하느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 신앙을 청합니다.

♱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 영원한 생명은 참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님으로 또 유형무형한 만물의 주님으로 세우셨습니다. ...... 그대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미 들었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으며 형제들과 일치하여 기도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신자가 되려고 행한 것입니까?

◎ 예,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신앙을 더 풍요하고 깊이 얻어 누리기 위해, 처절하게 애쓰고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 되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냥 주고 싶으면 주시겠지.’

또는 ‘나중에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라니, 죽을 때 가서 생각해 보자.’라고 생각하면서, 무심하게 지내고 있는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이란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하면서, 제쳐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봅시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은 자기 자신입니다. <마태오 6, 19-23> 6월 21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느님 모습으로 창조된 사람은 만물의 영장이며 나로서 나를 생각할 때 나보다 귀한 것은 세상에 없습니다. 나 없이는 세상도 없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나의 소중함은 세상에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나 없는 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소우주와 같아 내 안에 전 우주의 신비가 담겨있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인 것같이 나도 모든 것의 모든 것입니다. 사랑의 계명을 말씀하시며 이웃을 나를 사랑하듯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랑할 때 내가 나를 중요시하듯이 사랑하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자기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다른 이를 소중하게 여기지 못합니다. 나를 사랑하라고 산소가 있어 숨을 쉬며 태양의 빛과 열이 나를 감싸고 생명을 보존하게 합니다.

나는 진, 선, 미의 보고입니다. 내 안에 진실과 선과 아름다움을 간직하며 진리와 사랑의 보고입니다. 태어난 아이들에게 “도리도리 짝짜꿍”하며 머리를 흔들고, 손에 방아를 찧고, 손을 “잼잼”합니다. 머리는“진”, 방아는 “선”, 잼잼은 “미”이며 서로의 사랑을 드러내고 알려주는 놀이입니다. 이같이 진, 선, 미는 내 안에 자리 잡고 있으며 하느님을 닮게 창조된 나는 하느님의 거룩한 보물창고입니다.

그러나 진, 선, 미의 보물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하신 것은 보물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하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당하는 이들의 것입니다. 내가 진실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사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같이 너를 위한 것이지 나만 위한 것이 아닙니다.

볼 수 있는 눈, 들을 수 있는 귀, 말할 수 있는 입, 들 수 있는 손, 걸을 수 있는 다리, 생각을 할 수 있는 머리, 이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내 안에 주신 보물입니다. 내가 안락하게 살기 위해 있는 것만이 아니고, 진실한 사랑을 위한 것입니다.

그 외에 얼마나 많은 것을 몸 안에 받고 살고 있습니까? 온몸에 피가 돌도록 심장의 활동, 자다가 귀를 막고 심장 뛰는 소리를 들으며 감사 찬미 드립니다. 지구를 몇 바퀴 도는 만큼 긴 핏줄이 온몸에 혈액을 나누어주며 몸이 움직이도록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고 찬미 드리며 살고 있습니다. 내가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고 받은 것으로 살아갑니다.

하느님 없이는 나는 존재 의미가 없으며 주신 모든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어느 날 김천에서 오는 버스를 타고 자리가 없어 서서 가는데 앉아 있는 사람이 서 있는 저의 배에 대고 잠을 자기에 ‘배를 뺄까?’ 하다가 ‘여기 기대어 주무시는 분이 예수님이면? 아니다. 내가 힘이 드는데’ 하다가 제 눈을 주님의 눈으로 바꾸어 보니 주님을 보여서 대구까지 머리를 대게 해주고 간 일이 있었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면 하는 모든 일은 주님의 일입니다. 오늘도 하는 모든 일 안에 주님이 함께 계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함승수 신부님

우리나라 사람들은 ‘땅’에 대한 집착이 심한 편입니다. 주변국들로부터 자주 침략당하며 땅을 빼앗기곤 했던 아픈 역사 때문입니다. 땅이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기반이자 귀한 재산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구 수에 비해 가질 수 있는 땅이 너무나 작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땅땅거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부동산을 많이 소유한 이들은 ‘떵떵거리며’ 잘 삽니다. 그런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자기 조상들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요, 그 후손대대로 물려져 내려오는 소중한 ‘유산’이었습니다. 한 곳에 오래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생활을 오래 한 그들이었기에, 광야라는 척박한 공간에서 사십 년 동안 갖은 고생을 한 그들이었기에, 그들에게 땅은 하느님께서 자기 민족들을 위해 세우신 뜻과 계획이 실현되는 그분 사랑의 표징이었기에 그 땅을 소중히 여기며 집착하게 된 것이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그처럼 ‘땅땅거리며’ 살던 그들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땅만 쳐다보면서 살면 그 땅에 매인 존재가 되어 좀과 녹이 쓸고 먼지처럼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떵떵거리며’ 제대로 살려면, 하느님께로부터 진정으로 사랑받는다는 확신과 자부심 속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살려면 땅 말고 ‘하늘’을 보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계시는 그곳,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특별히 마련해주신 그 자리를 바라보며 살라고 하십니다. 하늘을 보며 산다는 것은 내 마음을,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와 희망을 하느님 나라에 두는 것입니다. 나의 보물을, 내가 진정으로 아끼며 귀하게 여기는 것들을 하느님과 그분 뜻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런 나를 어여삐 보시고 사랑해 주십니다. 그분께 내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보물’이 됩니다. 그러면 ‘하느님 나라’에서 살게 될 영원의 시간을 충만한 기쁨 속에서 행복하게 살게 됩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신 분께서 나를 ‘첫째’로 여겨주시니, 하느님 덕분에 ‘떵떵거리며’ 잘 살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이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들을 땅에서 욕망을 채우는데에 다 써버리지 말고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을 끊어내야 하지요. 우리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손바닥만으로도 하늘을 충분히 가릴 수 있습니다. 손바닥을 눈 앞에 바짝 대면 온통 그 손바닥만 보이기에 하늘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겁니다. 재물도 마찬가지지요. 재물에 집착하는 마음이 클수록, 그것만이 내 유일한 보물이라고 여길수록 점점 더 재물에 가까이 다가갈 것이고, 그러면 내 눈에 그 재물이 가득차서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무리 좋은 것들을 주시려고 해도 볼 수가 없으니 제대로 받을 수도 누릴 수도 없습니다. 재물의 그림자에 마음이 가려져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구원의 빛,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하고 죄의 어둠 속에서 깊은 슬픔과 절망에 빠져 불행하게 살게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뜻인 사랑과 자비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여 내 눈을 가린 재물을 치워버리고 하느님을 바라봐야 합니다.

 

 

 

보물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어떤 것이 생각나시나요? 밤에 잠이 들 때까지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이 있나요? 하루 중 유독 많이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요?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답을 할 수도 있을 테고, 누군가는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나 갖고 싶은 물건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렇게 자주 생각하고 떠올리다 보면, 그 대상은 어느새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 나를 이끌기 시작하기 마련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대상이 보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보물은 땅이 아니라 하늘에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이는 우리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을 갈망하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땅에 속한 보물이 나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다만, 그것으로는 우리 마음을 충만하게 채울 수 없다는 것이지요. 하늘과 맞닿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서는, 결국 우리 마음이 공허해질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이러한 까닭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듯, 어떤 것이 하늘에 속하는 보물인지, 땅에 속하는 보물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맑은 눈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 눈이 등불이 되어 우리를 이끌어갈 것입니다. 나의 보물은 어디 있는지, 그리고 그 보물을 맑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살피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보물입니다.

마음으로 살아가고
마음으로 성장하는
마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우리의
보물이 있습니다.

믿는 마음이
보물이
되어버리는
믿음의
진실한
시간들입니다.

그 어떤 것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의
마음입니다.

자꾸만 보물은
하늘로 향합니다.

보물이 가는 길이
바로 구원의
길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마음의 보물을
하느님께
기꺼이
봉헌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
봉헌하면서
보물처럼
사랑하는 법을
배웁니다.

서로를 보물로
바라보는 행복이
진짜 행복입니다.

서로를
보물로 만드는
행복이 참된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 하십니다.

바로 오늘이
하늘에 보물을
쌓듯 서로를
보물로
바라보고
보물로
받아들이고
닦아주고
지켜주는
보물의
오늘이길
기도드립니다.

보물과 하늘과
마음과 마음을
닮은 마음이
서로 만나는
여기에 참된
행복이 있습니다.

하느님을
다시
향하는
보물의 값진
마음입니다.

땅에서 비워내야
비로소
하늘에 쌓아지는
마음의 봉헌입니다.

철학자 스피노자는 그의 책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탐욕이란 부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이자 사랑이다.”

탐욕에 절제가 자리 잡을 수가 없습니다. 또 탐욕에는 중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끊임없는 갈망으로 그곳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갈증이 생긴다고 바닷물을 마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닷물의 높은 염도로 인해서 더 갈증을 느끼고 탈수 현상이 심해지기 때문입니다. 탐욕 역시 더 큰 탐욕을 일으키면서 우리를 주님 곁에서 벗어나 더 나쁜 곳으로 이끌게 됩니다.

어떤 청년이 취직되지 않는다면서 “최저임금을 받아도 좋으니 취업만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얼마 뒤, 자신의 바람대로 드디어 취업에 성공했습니다. 경력도 없고 학벌도 좋지 않아서 최저임금으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최저임금으로 만족할까요? 부족하다는 생각에 불평불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동차나 집을 구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전에 타던 차보다 못한 것을 사는 것이 아니고, 집은 전보다는 넓혀서 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실 탐욕은 늘 지금의 자리에서 계속 확장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지금의 자리에 만족하는 사람만이 탐욕에서 벗어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탐욕의 유혹을 이겨내고 어떻게 지금의 자리에 만족할 수 있을까요? 사실 세상의 기준을 따르면 절대로 불가능한 말입니다. 대신 주님의 기준에 집중한다면 탐욕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주님 사랑에 집중했었던 성인·성녀는 모두 세상의 것에 자유로웠습니다.

주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사람은 계속해서 세상의 기준을 따르면서 탐욕을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은 주님 사랑만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눈은 몸의 등불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이 맑다는 것은 단순, 정직, 솔직, 순수 등의 의미입니다. 특히 주님의 뜻만을 향하면서 주님께 눈길을 두고 있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맑은 눈을 통해서만 주님의 기준을 따르게 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라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의 보물은 과연 어디에 있습니까? 하늘입니까? 아니면 땅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도 동시에 알게 됩니다. 하늘입니까? 아니면 땅입니까?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 두면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자신이 되어라. 다른 사람은 이미 존재한다(오스카 와일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 길이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거짓말 같겠지만 매일 차곡차곡, 그리고 조용히 하늘에 보화를 쌓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많은 분들이 은행 잔고 불리고, 부동산 가격 상승하기를 간절히 기다리며 재물의 탑을 차곡차곡 쌓아 올리는 데 혈안이 되어있지요.

 

이런 물질만능주의 세상 속에서, 틈만 나면 어려운 이웃들과 신음하는 세상과 공동선을 위해 수시로 몸과 마음과 금고를 비우는 분들은 존재 자체로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표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에게 하나의 큰 도전으로 다가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오 복음 6장 19~20절)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는 예수님의 권고 말씀 앞에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는 쥐뿔도 없는 사람이라서 하늘에 보물을 쌓고 뭐고 할 능력이 없습니다. 뭐라도 있어야, 하늘에 보물을 쌓고 말고 할텐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걱정도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보물이 반드시 현세적 재물에 한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보물은 여러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깊은 슬픔을 붙들고 있는 이웃들에게 다가가 그 슬픔 함께 붙들어주는 것은 아주 훌륭한 방법으로 하늘에 보화를 쌓는 일입니다.

세상 쓸쓸히 홀로 걷고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 함께 길을 걸어주는 것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은 좋은 방법입니다.

하느님께서 손수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과 대자연, 생태계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데 앞장서는 마음으로 쓰레기 배출을 최소화한다든지, 어떻게든 단순하고 소박하며 청빈하게 살아가는 것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입니다.

사회 정의의 실천은 투사나 정치인들의 몫이려니 하는 생각을 떨치고 불의한 현실 앞에서 올바른 소리를 내며, 사회적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의 생존권 보장을 위해 기꺼이 연대하고 참여하는 일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참된 노력입니다.

 

 

 

칭찬이 독이 되는 인간: 마음의 빛이 어둠인 사람.

     전삼용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보물을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빛이 눈으로 나온다시며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 6,23)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네 안에 빛이 어둠이면”의 뜻은 무엇일까요? 어떻게 빛이 어둠이 될까요? 

 

‘개는 훌륭하다’에서 보호자들을 가스라이팅하는 리트리버에게 강형욱 훈련사도 손을 물린 적이 있습니다. 리트리버 리에는 다른 사람들이나, 산책하다 작은 강아지를 만나도 도망을 치거나 드러누워 배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겁이 많은 아이인데 가족은 다 뭅니다. 물론 물고 나서 가족 무릎에서 다시 재롱을 떱니다. 가족들은 리에가 본래 착한 개인데 어떤 상처가 있어서 그런 줄 압니다. 하지만 리에는 가족들을 가스라이팅하는 것입니다. 

엄마가 화분을 닦으려고 하자 순하디순한 리트리버는 으르렁대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보호자는 뒤로 물러섭니다. 화분을 언제 닦느냐는 질문에 보호자는 리에가 없을 때 닦는다고 합니다. 리에가 화내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워낙 착한 개이니까. 그러나 강 조련사는 “그거는 아이가 담배를 피우는데, ‘다 이유가 있겠지! 공부가 얼마나 어려우면!’이라고 하며 방치하는 것과 같아요”라고 따끔하게 말해줍니다. 

리에는 가족들을 자기가 살짝 물 때부터 가족들이 자기를 무서워하는 것을 압니다. 사랑도 받고 싶고 지배도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물면서 지배하며 애교를 부리고 사랑도 받으려 하는 것입니다. 가족들은 리에를 섬기고 있었습니다. 

 

세속-육신-마귀에서 마귀는 ‘지배욕’입니다. 지배욕이 있는데 소유욕이 없을까요? 리에는 화분을 자기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보호자가 화분을 만지려 할 때 화를 내는 것입니다. 내 것이니까 건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 따라준 주인에게 다시 애교를 부립니다. 이것만 지켜주면 착한 개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강 훈련사는 이런 개에게 잘 대해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일부러 화를 내게 만들어 강하게 제압합니다. 이 과정에서 손을 물리게 됩니다. 하지만 억지로 눕혀놓고 입마개를 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주인이 “앉아!”를 시켜봅니다. 리에는 앉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낮은 수준이라고 여기는 보호자에게 앉아서 굳이 칭찬을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칭찬은 높은 사람에게 들어야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결국엔 앉습니다. 강 훈련사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훈련하며 절대 순종하기 전까지는 잘해주지 말라고 합니다. 오히려 그런 애정이 독이 된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마음의 빛이 어둠이면’이란 ‘탐욕’을 나타냅니다. 세상은 어둠이고 하늘은 빛입니다. 마음의 빛은 내가 마음으로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의 빛이 어둠일 때는 마음이 하늘의 것이 아닌 ‘생존욕구’, 곧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탐욕-성욕-지배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어지는 내용에서는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라고 내버려 두라고 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리고 먼저 참 빛을 추구하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3-34)

 

만약 세속-육신-마귀를 계속 빛으로 여기는 이가 있다면 그에게는 말씀과 성체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세속-육신-마귀를 추구하는 이들은 아직 짐승의 수준에 머물겠다는 의지를 가진 이들입니다. 따라서 이들에게 잘해줘 봐야 하느님까지 가스라이팅합니다. 자기가 잘해서 받는 줄 알지 보호자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이에게까지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셨습니다. 돈주머니를 쥐고 있었던 유다에게까지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시고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을 발로 밟았습니다. 

 

예수님은 왜 그런 이에게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신 것일까요? 그가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원하는데 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다 주셨으니 그의 멸망에 대해 더는 예수님께서 책임을 지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쨌건 우리는 마음의 빛이 어둠인 사람, 곧 세상 것을 추구하고 세상 것에 집착하는 사람에게 잘해주며 성당으로 이끌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도 모령성체를 하게 됩니다. 

 

마음의 빛이 참 빛을 추구하는 이들을 초대합시다. 그들에겐 잘해주어도 됩니다. 그들에게 하는 칭찬은 훈련이 되고 성장의 기회가 됩니다. 하지만 다시 돈에 대한 욕구나 육욕, 그리고 지배욕이 커져 순종하지 않는다면 결핍을 느끼게 해야 합니다. 잘해주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칭찬해주어야 할까요? 미네소타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여학생 80명에게 남들이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엿듣게 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끊임없이 부정적인 말만 합니다. 한 사람은 끊임없이 긍정적인 말만 합니다. 한 사람은 부정적인 말을 하다가 긍정적인 칭찬으로 끝을 맺습니다. 마지막 사람은 긍정적인 말을 하다가 부정적인 말로 끝을 맺습니다. 

이 네 명 중 사람들이 가장 호감을 느낀 사람은 누구일까요? 시종일관 칭찬만 하는 사람이었을까요? 아닙니다. 부정적인 말을 하다가 마지막에 긍정적으로 칭찬해 준 사람입니다. 그러면 가장 비호감인 사람은 누구일까요? 끊임없이 부정적인 말만 한 사람일까요? 아닙니다. 좋은 말을 하다가 마지막에 부정적인 말을 한 사람입니다. 

 

마지막은 그 사람에 대한 상대의 기대를 나타냅니다. 계속 좋은 말만 하거나 계속 나쁜 말만 하는 사람은 아무런 희망을 주지 못합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말을 하다가 긍정적인 말을 한 사람에게는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기대를 줍니다. 

하지만 역시 세속-육신-마귀가 자라게 하는 그런 칭찬은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를 나를 지배하는 가스라이터로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참 빛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것을 칭찬해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이고 그 사람은 결국 비호감이 되거나 자신이 만든 가스라이터로부터 가스라이팅 당하며 살게 됩니다. 

 

여기 좋은 칭찬의 예가 있습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에서 나오는 장면입니다. 강박증 환자 잭 니콜슨은 레스토랑 종업원 헬렌 헌트의 사랑을 이 한마디 칭찬으로 얻어냅니다. 

“칭찬 한 가지만 해봐요.”

“정신과적인 문제가 있는데, 얼마 전부터 약을 먹기로 했어요. 약을 먹으면 좋아질 수 있대요.”

“그게 무슨 칭찬이에요?”

“당신은 내게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내 생애 최고의 칭찬이에요.”

 

돈만 알고 오만하기 짝이 없어서 의사 말도 안 듣던 잭 니콜슨은 헬렌 헌트 때문에 겸손해지기로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탐욕-소유욕-지배욕에서 벗어나게 했다면 그것만큼 큰 칭찬이 없습니다. 또 이런 칭찬은 헬렌 헌트의 마음도 사로잡았습니다. 그녀도 돈 때문에, 그리고 교만하여서 힘들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칭찬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공부를 잘한다고, 돈을 잘 번다고, 얼굴이 예쁘다고, 머리가 좋다고 하는 칭찬은 결국 나를 가스라이팅하기 위한 계략이거나, 아니면 나를 진짜 세속-육신-마귀에 빠지게 만들어 지옥으로 보내려는 사탄의 계략일 뿐입니다. 합당한 칭찬은 마음의 빛이 어둠인 사람이 참 빛을 추구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스마트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접이식 스마트폰이라 주머니에 넣기가 편했는데 접히는 부분에 줄이 가면서 화면이 꺼져버렸습니다. 보험을 들었기에 새로운 스마트폰을 마련할 수 있지만 일정금액을 지불해야 한다고 합니다. 구입한지 1년이 안 되었기 때문에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서비스를 신청했는데 한국에서 부품이 와야 한다고 합니다. 부품이 올 때까지는 기다려야 하기에 대리점에서 중고 스마트폰을 빌려주었습니다. 문제는 예전에 쓰던 스마트폰에서 정보를 옮겨와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존 쇼핑, 은행, 항공사, 유트브, 주차, 백신, 알람, 가계부 등등 옮겨야 할 것들이 20개가 넘었습니다. 정보를 옮기면서 생각하니 스마트폰이 제게는 보물창고였습니다. 갤러리에는 그동안 찍었던 추억의 사진들이 있습니다. 항공사로 들어가면 티켓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아마존으로 들어가면 쇼핑을 할 수 있습니다. 유트브로 들어가면 재미있고 유익한 동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은행으로 들어가면 송금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검색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공간은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저는 최근에 ‘씨알의 꿈’이라는 동영상을 듣고 있습니다. 미국의 이야기를 재미있고 쉽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검색만 하면 영어공부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성서를 들을 수 있습니다. 고전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음악도 들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동호회도 있었습니다. 취미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하고,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신부님과 목사님의 강론과 설교도 읽을 수 있습니다. 교리와 성경공부도 할 수 있습니다. 잘만 검색하면 인터넷은 보물창고에서 보물을 찾는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검색의 시대’에서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고, 쓰레기를 줍는 경우도 있습니다. 게임, 도박의 세계에 빠지기도 합니다. 범죄를 모의하기도 합니다. 욕설과 비방이 난무하기도 합니다. 인터넷의 악플 때문에 정신적인 상처를 받기도 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합니다. 검색의 시대에 유익한 정보를 식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아주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말씀입니다. 누구나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나 실천하지 못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좀도 쓸지 않고,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래서 홈쳐가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삶을 ‘산상수훈’에서 알려주셨습니다. 영적으로 가난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욕심과 욕망의 불을 꺼버리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며 목마른 삶을 사는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서 일하고, 하느님이 영광을 위해서라면 십자가와 죽음까지도 기꺼이 감수하는 삶입니다. 우주는 넓어서 빛으로도 몇 만 년이 걸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빛의 속도를 초월하는 곳입니다. 생각의 속도와 선행의 속도는 빛의 속도를 넘어 차원을 옮겨 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행운이라는 보물을 찾으려고 한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없습니다. 행운은 성공, 재물, 명예, 권력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행복이라는 보물을 찾으려고 한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습니다. 행복은 희생, 나눔, 헌신, 사랑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음 따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마음
가는 곳에
나와 더불어 너


내 마음
닿는 곳에
나와 더불어 너


내 마음
머무는 곳에
나와 더불어 너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놀란다.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당신은 암에 걸렸소! 얼마 살지 못합니다.' 청천벽력 같은 죽음의 소식에 놀라며 환자는 처음으로 하늘을 향한 천상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암 선고 판정에 어떤 사람은 보물을 평생동안 땅에 쌓아둔 사람도 있고, 또 다르게 하늘에 쌓아둔 사람도 있다. 처음 죽음에 직면하여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생겨나는데, 하나는 죽음으로 끝났구나 하고 체념하면서도 땅에 묻어둔 보물 때문에 악착같이 살려고 발버둥친다.

다른 하나는 죽음을 넘어 영원성을 떠올리며 하늘에 보물을 쌓고 살았기에 하느님께 자신을 내어 맡긴다. 죽음이 나에게 닥쳐도 자신을 죽음 밖으로 꺼내 주시는 하느님께 내어 맡긴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찾으시고 그런 사람을 죽음에서 꺼내 주신다.

보물을 어디에다 쌓아 놓느냐? 땅이냐? 하늘이냐? 에 따라 죽음의 양상은 극명하게 갈린다. 죽음으로 끝장이냐? 죽음을 통해 영원성이냐? 무덤에서 나오지 못하는 버려진 인간, 비참한 인간이냐?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무덤에서 밖으로 나오는 위대한 인간이냐가 갈라진다.

우리 눈의 방향이 어디인지? 맑은 눈으로 하늘 빛 향해 사는 사람이냐? 캄캄한 어둠으로 눈이 멀어 땅만을 향해 사는 사람이냐? 눈이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나는 어느 쪽인가?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19-21)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2-23)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것을 보물처럼 여기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은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이 보물이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더 벌기 위해 애를 쓰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가 남편이나 아내가 보물이라고 여긴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잘하려고 애를 쓰고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라며 기도할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과연 인생의 무엇을 보물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참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렇게 세상의 수많은 보물들이 언젠가는 나에게서 사라지게 되고 또 내가 죽게 될 경우 가져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히 나에게서 사라지지 않는 보물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보물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내가 하느님을 보물로 여기며 살아갈 때 어쩌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의 모든 것은 나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곧 아버지의 것이 나의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큰 것을 얻게 될 때 작은 것들은 다 따라오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작은 것을 얻기 위해서 큰 것을 날려버리는 실수를.......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십니다. 대신 보물을 도둑이 뚫고 들어와 훔칠 수 없는 하늘에 쌓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누구를 위한 것일까요. 복음에서 보듯이 나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의미는 보물, 즉 모든 것을 세상의 논리로 세상의 계산 법으로 또한 세상의 시각으로 보지말고 하느님의 시각으로 하느님의 계산 법으로 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이 세상의 계산 법으로 산다면 우리들의 보물은 세상에 두는 것이며 언젠가는 도둑이 우리들의 보물을 훔쳐 갈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으로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의 논리에 세상의 상식으로 살아가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하느님의 눈으로 또한 종교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종교인으로서 우리들 개개인의 관점과 세상의 관점과 받아들임이 같다면 굳이 우리들에게 종교라는 것이 더 나아가서 하느님이 필요할까요? 예수님께서는 눈을 강조하십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배풀고 나누라고 하십니다. 세상의 계산 법으로 하느님을 받들어 모실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은 신앙인이며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은 돈을 꾸어주면 이자를 꼭 받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정당한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누군가가 달라고 하면 꾸어달라고 하면 그냥 주라고 하십니다.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인 것이지요. 세상과 함께 갈 수 없음을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통해 강조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논리대로 살아가는 경우가 있지요. 보물을 땅에 쌓아 두고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나의 가치관이, 자신이 생각하는 옳고 그름이 세상과 같다면 눈은 빛이 아니라 어둠이며 동시에 몸도 어둠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눈이 하느님의 눈인지 세상의 눈인지 빛인지 어둠인지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아멘!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 -땅에 보물을 쌓지 마시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마태5,8)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사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하늘에 보물을 쌓을 기회는 널려 있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까? 땅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까? 참으로 엄중히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저에겐 20년 이상 치아를 관리해 주는 좋은 신자 치과 의사 형제가 있습니다. 1998년 치료받은 이후 지금까지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잘 받고 있습니다. 30대 중반의 나이였는데 이제 60대에 접어든 아주 한결같은 치과 의사 형제로 눈빛은 여전히 맑고 얼굴도 맑게 빛납니다. 감사한 마음에 써놨던 “어느 치과 의사 예찬”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다

 욕심없어

 마음 또한 맑고 깨끗하다

 최소한도의 의식주로 만족하는 이다

 식물성이라

 그 곁에선 품냄새가, 하늘 향기가 난다

 시詩를 좋아하는

 섬세한 감성을 지닌 이다

 부드러움 중에

 강인한 의지가 빛처럼 배어나오는 이다

 그의 일은 하나의 예술이다

 때로 쉬는 날 그는 진료 봉사를 한다

 쉴 틈이 별로 없는 그다

 몸으로 사는 게 아니라 정신으로 사는 이다

 평상심平常心의 도道를 살기에

 외로움도 그를 슬며시 비켜간다

 그러니

 그는 예술가이고 세속 안에 수도자이다

 내 좋아하는

 어느 치과의사이다”-2005.4

 

무려 17년 시가 말씀 묵상중 순간 떠올라 인용하니 참 신기합니다. 예나 이제나 참 한결같이 성실하고 순수한 믿음 깊은 치과의사 형제입니다. 치과 의사 중노동에 힘들거나 체력의 한계를 느끼지 않느냐는 말에 대한 답변도 잊지 못합니다.

 

“몸에 익숙해져서 그대로 행하는 데는 별로 문제가 없습니다.”

 

60대, 70대가 되어도 배밭일을 하는 신자 자매들 역시 평생 몸에 밴 일이기에 어려움없이 한다는 것입니다. 30대 중반의 자매들도 이젠 60대를 넘어섰습니다. 배밭일을 하러 아침 일찍 올 때도 묵주기도를 바치며 오는 자매들입니다. 제가 70대 중반에도 이렇게 한결같이 강론을 쓸 수 있는 것도 몸에 뱄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내가 강론을 썼고, 다음엔 강론이 강론을 썼고 이제는 은총이 강론을 씁니다. 이게 진솔한 제 고백입니다. 영성생활은 이처럼 좋은 습관임을 깨닫습니다.

 

말 그대로 치과 의사를 비롯해 한결같은 믿음의 자매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사는 이들입니다. 땅의 현실에 살되 마음은 하늘에 두고 사는 분들입니다. 그러기에 눈빛 또한 여전히 맑고 밝습니다. 진짜 힘인 내적 힘도, 영적 힘도 이런 하늘에 보물에 쌓는 삶에서 나옵니다. 이런 이들에게서는 풀냄새가 하늘 향기가 납니다. ‘풀냄새’ 하니 산책 때 자주 부르는 “푸른 잔디”라는 아름다운 동요가 생각납니다. 

 

“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워 새파란 하늘가 흰구름 보면

 가슴이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불러요.

 

 우리들 노래소리 하늘에 퍼져 흰구름 두둥실 흘러가면은

 모두가 일어나 손을 흔들며 즐거워 즐거워 노래 불러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 때 저절로 부르게 되는, 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부추기는 동요입니다. 오늘 복음은 짧지만 아주 강력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 땅에서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오늘 이 복음을 깊이 마음에 새기고 묵상하시며 사시기 바랍니다. 참 기쁨과 행복도 하늘에 보물을 쌓을 때 선물처럼 주어집니다. 하늘 은행에 선행善行을 차곡차곡 저축해 놓는 참 지혜롭고 착한 분들입니다. 제 주변에도 이런 이타적 사랑과 봉사, 봉헌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분들이 많습니다. 

 

각자 삶의 자리에 지극히 충실하면서도 수도원을 물심 양면 돕는 분들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분들입니다. 혼탁한 와중에도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는 것은 묵묵히 소리없이 보이지 않는 곳곳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분들 덕택德澤입니다. 

 

우리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 마음도 있습니다. 하늘 보물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눈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마음이 맑으면 눈도 맑습니다. 그러니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이들과 땅에 보물을 쌓는 이들의 눈빛이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눈빛은 마음의 반영이요, 눈빛을 보면 어디에 보물을 쌓는지 당장 드러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이들은 성형 수술이 필요없습니다. 전혀 외모에 신경 안써도 됩니다. 내면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은 밖으로 인품의 향기처럼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눈에 앞서 마음 관리가 우선입니다.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죄가 없어 마음의 순수가 아니라 끊임없는 무사한 사랑, 아가페 사랑의 실천과 함께 가는 마음의 순수요 맑은 눈빛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우리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습니까! 이런저런 영육의 병도 줄을 이을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이들의 육신은 저절로 영혼을 따르고, 땅에 보물을 쌓는 이들의 영혼은 저절로 육신을 따르게 되니 빛과 어둠의 삶이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 하권을 읽으며 사필귀정의 하느님 섭리를 봅니다. ‘천망회회 소이불루天網恢恢 疎而不漏’의 진리를 배웁니다. 악명 높은 아합왕과 이제벨에 이어 여호람과 아탈야의 경우가 흡사합니다. 아합왕의 딸인 아탈야의 폭정이 극에 달했고 마침내 여호야다 사제의 등장으로 아탈야는 죽음을 당했고 여호야다 사제의 개혁이 시작됩니다. 

 

무죄한 나봇을 살해 한 죄는 마침내 아합으로부터 시작되어 아탈야의 죽음으로 완전히 비극적 결과로 끝납니다. 모두가 하늘을 잊고 탐욕에 눈이 멀어 땅에 보물을 쌓은 자업자득의 결과요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여호야다 사제의 개혁이 참 신속합니다. 백성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도록 질서를 바로 세우며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땅에 보물을 쌓는 삶을 상징하는 바알의 제단들과 상들을 산산조각으로 부수고 바알의 사제 마탄을 제단 앞에서 죽이고 주님의 집에 감독을 세웁니다. 

 

이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으로 시스템을 완전히 정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온 나라 백성이 기뻐하였고 도성은 평온해졌다 합니다. 참 기쁨과 평화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서 가능함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십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온맘과 온몸이 환한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알렐루야 복음 환호송이 복음을 요약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아멘.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의
마음으로
시선을 돌리는
시간이다.

가치 있는
삶으로
초대하시는
사랑의
주님이시다.

첫째로
주님께
마음을
여는 것이

무엇보다도
가치 있는
삶의 새로운
시작이다.

우리의
마음이 맑으면

우리 삶의
열매도 따라
맑아진다.

올바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복음의 참된
삶이다.

마음이 깨어지면
그 어떤 것도
담을 수 없다.

마음은 물질로
결코 채워질 수
없다.

참된 사람의
도리는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의 삶이다.

올바른
마음의 방향이
신앙의 참된
정체성이다.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는
회개의 시작이다.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할
진짜 보물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마음이
있는 곳에
서로를 살리는
사랑이 있고

보물이
있는 곳에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의 보물은
마음이며
마음의 보물은
맑은 사랑이다.

복음은 마음이
향해야 할
사랑의 기쁜소식
마음의 실천이다.

일상의 실천이
참된 보물이다.

천연두라는 병을 아십니까? 일명 마마라고도 불렸던 이 병은 지금이야 지구상에 완전히 사라진 질병으로 알려져 있지만 1970년대까지 사망률이 매우 높은 무서운 병이었다고 하지요. 다행히 천연두에 걸렸다가 낫는다고 해도 얼굴에 흉한 마마자국을 남겼습니다. 어렸을 때를 생각해보니 얼굴에 곰보인 분들이 꽤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옛날, 한 소녀가 어렸을 때 천연두에 걸렸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병을 이겨내서 낫기는 했지만 얼굴에 마마 자국이 남아서 곰보가 된 것입니다. 이 소녀는 자신의 얼굴에 대한 열등감이 점점 심해졌습니다. 거울을 보면 저절로 눈물이 나오면서 삶의 의욕을 점점 잃었습니다. 이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어머니께서 어느 날 딸의 손을 꼭 잡고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 얼굴의 곰보 자국 때문에 실망스럽지? 그런데 너무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사실 네가 어렸을 때 이 동네에서 3명이 천연두에 걸렸단다. 그런데 두 명은 죽었고 너만 살았어. 그래서 나는 네 얼굴의 곰보 자국이 부끄러운 자국으로 보이지 않고 하느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자국으로 보이는구나.”

 

어머니의 이 말씀에 이 소녀는 다른 마음을 가질 수가 있었습니다. 곰보 자국이 하느님께서 주신 벌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이렇게 나를 구해주신 하느님의 따뜻한 손길 자국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그러다보니 삶을 다르게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가득한 특별한 삶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지금의 삶에 대해서 절망적으로 대하는 것 같습니다. 돈이 없어서, 능력이 없어서, 건강하지 못해서, 외모에 자신이 없어서... 등등의 이유를 말하면서 삶의 의욕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이렇게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면 계속해서 실망하고 절망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관점은 순간의 만족만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희망과 기쁨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관점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충만하고 완전한 만족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땅에 보물을 쌓아 두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대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의 보물이라고 할 수 있는 돈이나 귀금속 등을 하늘에 가져갈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늘에서는 전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물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죽어서 가져갈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에서의 보물은 이 세상의 물질적인 보물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행하는 우리의 사랑 실천으로 완성이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다른 어떤 것보다 먼저 추구해야 할 목표입니다. 바로 이 목표를 기억하면서 사랑을 실천하는 우리가 될 때, 바로 우리의 보물이 하늘에 차곡차곡 쌓여질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삶이 있는 한 희망이 있다(키케로).

 

깨끗한 나의 모습

탈무드에 나오는 한 랍비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굴뚝을 청소한 두 소년이 굴뚝 밖으로 나왔다. 한 소년은 굴뚝의 그을음이 묻어 얼굴이 더럽고, 한 소년의 얼굴은 깨끗했다. 그렇다면 누가 세수를 하겠는가?”라고 랍비가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얼굴이 더러워진 소년이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랍비가 말합니다.

“그렇지 않다.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다. 상대의 더러워진 얼굴을 보고 자신도 더럽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소년이 함께 굴뚝에 들어가서 청소를 하였는데 한 사람은 깨끗하고 한 사람만 더러워질 수는 없다. 두 사람 모두 더러워졌기에 둘 다 세수를 할 것이다.”

우리의 삶 역시 굴뚝 속에서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두 깨끗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은 분명히 더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나만 깨끗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을 쉽게 판단하고 단죄를 내리는 것은 아닐까요?

남의 더러운 모습을 보고서는 스스로를 깨끗하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남의 깨끗한 모습을 보고서는 그 모습을 나도 간직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역시 씻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으로 깨끗한 나의 모습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어장 관리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전 세계 어디 가나 저희 살레시안들이 지니고 있는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숨길 수 없는 유머 본능입니다. 형제들이 몇명 모였다하면 즉시 웃음잔치가 벌어집니다. 최근 있었던 재미있는 에피스드들, ‘아재 개그’들이 끝도 없이 펼쳐지면서, 한 바탕 웃음꽃이 피어납니다.

  

오늘도 형제들과 함께 차를 타고 가면서 오랜만에 원없이 웃었습니다. 프로 낚시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대로 된 꾼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한 가지 특징이 있답니다.

  

프로들이 장소에 도착하면 제대로 된 첫수 손맛을 보기 위해 사력을 다한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전사(戰士)보다도 더 집중해서 찌끝을 바라봅니다. 이윽고 까딱까딱하는 어신(魚信)이 오면 그야말로 초집중 상태입니다.

  

그리고 최적의 순간 강력한 챔질, 그리고 고기와의 사투(死鬪), 그리고 마침내 끌려온 월척...만면에 더 이상 좋을 수 없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은 다음, 월척은 커다른 살림망 속으로 ‘철퍼덕’ 하고 던져집니다.

  

이미 살림망 속으로 들어간 월척은 그걸로 끝이랍니다. 프로에게 있어 이미 살림망 속으로 들어간 고기는 더 이상 안중에 없습니다. 또 다른 월척을 향해 눈을 부릅뜨고 새롭게 초집중을 합니다.

  

그렇게 열댓마리 월척을 한 프로가 있었는데, 그렇게 열심히 잡은 고기들‘철퍼덕 철퍼덕’ 살림망 속으로 던지기만 했지,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고기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는데, 나중에 집에 가려고 살림망을 들어보니, 힘센 녀석들이 얼마나 요동을 쳤던지, 다 뚫고 나가고 빈 살림망이었답니다.

  

결론은 바깥의 물고기도 중요하지만 망 속으로 들어온 물고기 관리도 중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보니 오늘 우리 교회, 수도회에도 정말 큰 교훈이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죽기 살기로 전교 활동에 전념한 나머지, 수많은 사람들 입교시키고, 예비자 교리반 인도하고, 세례를 베푸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망 속으로 들어온 물고기에 대한 관리, 다시 말해서 신자 재교육도 엄청 중요한 것입니다.

  

각 교구, 수도원, 수녀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많은 수의 입회자, 신학생들을 끌어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후의 후속작업, 평생 양성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제자들 재교육, 평생 양성, 지속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큰 마음 먹고, 큰 결단을 내려, 예수님의 제자단에 가입한 사도들이었지만, 아직도 한발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제자 공동체에, 다른 한발은 오랜 세월 익숙했던 옛생활에 두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직도 제자들은 한발은 지상에, 다른 한발은 천상에, 그렇게 양다리를 걸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향해 주님께서는 어떻게서든 신속히 이쪽으로 건너오라고 크게 외치신 것입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오 복음 6장 19~22절)

  

우리들이 ‘눈’ ‘시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요즘 사람들의 눈을 보면서 섬뜩해질 때가 많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의 눈이 무척이나 싸납습니다. 살기 등등한 야수(野獸)의 눈빛입니다. 미움과 원망, 복수심으로 가득합니다.

  

그런 눈, 그런 시선으로는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주님을 주님으로, 한 존재를 진정한 존재로, 이웃을 주님께서 충만히 현존하시는 고귀한 장소로 바라볼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우리 시선의 정화(淨化) 작업입니다. 삐딱한 시선, 못마땅한 시선, 꼬인 시선, 선입견으로 가득 찬 시선, 부정적 시선에 대한 대대적인 정화 작업이 필요합니다.

  

어제의 그는 어제의 강물에 흘려보내야 마땅합니다. 어제의 그는 오늘 아침 자비하신 주님 은총으로 용서받은 새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침이면 아침마다 가장 가까운 존재들인 가족들, 형제들, 동반자들을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선물로 받아들이는 그런 시선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판단력 부족의 원인

     전삼용 요셉 신부님

20여 년 전 책을 한 권 잘 못 읽었습니다. ‘건식식사’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사람 몸 안에 수분이 적어야 면역력이 높아진다는 전제에서 쓰여진 책입니다. 토끼도 물을 안 먹고 야채만 먹어도 살 수 있듯이 인간도 음식 안에서 충분한 수분을 섭취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토끼는 물을 많이 마시면 면역력이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아기들은 체내에 수분이 90%이기 때문에 면역력이 떨어지고 어른은 70%, 죽을 때는 수분이 체내에 50%정도만 남게 된다고 합니다. 물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살이 쪘고 잔병치례를 많이 한다고 합니다. 체내에 수분이 많으면 같은 용적 안에 백혈구 수가 적어져서 잔병에 걸려도 잘 낫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도 감기 걸려 오래 고생하는 사람에게 물을 마시지 말아보라고 했더니 이틀 만에 감기가 낫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렸을 때 키우던 개가 아플 때 며칠 동안 물과 식음을 전폐하고 죽은 것처럼 누워 있다가 어느 날 갑자가 벌떡 일어나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장례를 지낼 때 3일장, 5일장이 생기게 된 것도 암과 같은 병으로 죽은 사람이 체내에 수분이 줄어들면서 암세포가 죽게 되어 다시 살아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을 때 바로바로 관에 넣어 묻었는데 관 속에서 살아나서 관을 긁다가 다시 죽은 사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드라큘라와 같은 이야기도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유럽은 아프면 열을 식히기 위해 물을 많이 마시고 몸을 차갑게 하지만 동양은 반대로 더 뜨겁게 하여 땀을 빼내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저도 감기 걸렸을 때 그렇게 땀을 뺐더니 바로 감기가 나았던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서양에서는 물을 많이 마시라고 하는 반면 동양은 물을 빼내는 것이 좋다는 식의 이론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저는 이 이론을 철저히 믿었습니다. 거의 일주일 동안 물을 안 마셔본 적도 있고, 어떤 은퇴한 의사 분을 설득시켜 삼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게 한 적도 있습니다. 그분은 탈수증으로 앰뷸런스에 실려 가셨습니다. 큰일 날 뻔 한 것입니다.

그리고 저에게 남은 것은 현재 통풍입니다. 소주를 마시면 취하기 때문에 맥주만 마셨는데 통풍이 걸렸습니다. 맥주에서 나오는 요산을 빼낼 물을 마시지 못해서입니다. 물은 알코올을 분해하는데도 필요하고 노폐물을 빼내는데도 필요한데, 물을 안 마시며 술과 고기를 많이 먹으니 그 노폐물이 쌓여 통풍이 걸리게 된 것입니다. 물론 이건 저의 결과론적 추측입니다.

지금은 많은 지인 분들이 한약도 갖다 주시고 양배추 즙도 주시고 신경을 써 주셔서 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면 물을 많이 마시는 것이 가장 큰 효과가 있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강의 2시간을 하더라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던 제가 이제는 틈만 나면 물을 마시려합니다. 그러니 금방금방 목이 말라서 저절로 물을 많이 마시는 습관이 들여졌습니다.

 

제가 물을 안 마시는 습관이 생겼던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다 하는 것을 좀 거슬러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건강을 챙기는 방식 반대로 하더라도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특별해지고 싶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의 명예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욕망이 있으니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려워진 것입니다. 욕망이 있으면 그것을 채우기 위해 자신과 남에게 해를 입히게 되고 심하면 범죄를 저지르기까지 합니다. 세상을 좋아하는 마음이 곧 나의 눈을 어둡게 만드는 어둠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고 하시며 그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고 그 마음이 세상 것을 향하여 있으면 눈이 어두워진다고 말씀하십니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 몸도 어두워질 것이라고도 하시는데 이것은 자신에게도 해가 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유일한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직 그분만을 바란다면 마음과 몸이 빛으로 가득차고 그 빛으로 세상을 보니 판단이 흐려질 리가 없습니다. 세상 것을 많이 바랄수록 그 사람의 판단은 오류가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따르고 싶다면 세상 것을 좋아하는 사람을 쫓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나의 보물을 이 세상 것으로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요즘은 ‘블루투스’ 기능을 많이 사용합니다. 차량에도 블루투스 기능이 있어서 운전하면서 통화를 하기도 합니다. 휴대전화에 있는 음악을 듣기도 합니다. 이어폰에도 블루투스 기능이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선과 연결하지 않아도 되기에 편하게 통화하거나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블루투스로 연결하면 인터넷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블루투스 기능은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블루투스가 가능할 수 있도록 연결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같은 주파수를 공유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이어폰의 블루투스가 작동하지 않아서 휴대전화를 살펴보니 블루투스 기능이 꺼져 있었습니다. 한쪽만 주파수를 맞추면 블루투스는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블루투스를 사용하면서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알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소통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우리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열면, 재물과 성공에 마음을 열면, 시기와 질투에 마음을 열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소통하기 어려우실 것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우리의 마음을 다시 하느님께로 연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것들과의 연결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은 그것을 ‘회개’라고 부릅니다.

 

명동성당 지하광장에는 서점이 있습니다. 가끔 시간을 내서 서점을 둘러봅니다. 새로 나온 책을 보는 것은 멋진 곳을 여행하는 것만큼이나 설렘입니다. 지난주에는 ‘세 종교 이야기’를 샀습니다. 한 뿌리에서 갈라진 세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통해서 인류 문명과 세계 역사의 흐름을 통찰한다는 내용입니다. 일반서점이지만 고맙게도 성직자들에게는 10% 할인해 준다고 합니다. 다 읽으면 소감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대학에서 강의하시는 교수님이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했다고 합니다. 학교로 가는 길에 한 노인이 집 앞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수님은 출근길에 노인과 잠시 대화를 나누기도 하였고, 주말에는 노인의 집 정원의 잔디를 깎아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2년을 지내면서도 노인의 가족은 누구인지, 노인이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잘 몰랐다고 합니다. 2년이 지났을 무렵, 학교로 가는데 노인이 없어서 궁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노인의 가족들이 교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러면서 노인의 유언을 전해주었습니다. 그 노인은 세계적인 기업인 코카콜라의 회장님이셨다고 합니다. 노인은 2년 동안 친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교수님에게 자신의 유산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노인이 남겨준 유산은 우리 돈으로 2500억 원이랍니다. 덤으로 노인께서는 회사의 주식 5%를 교수님에게 넘겨주셨다고 합니다. 교수님은 상대방이 누구인 줄 몰랐지만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엄청난 선물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재물을 대학의 발전 기금으로 기증을 하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대학 총장이 된 교수님은 엄청난 재산이 있었지만 늘 같은 시간에 학교로 출근을 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지냈다고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라.’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하늘에 쌓을 재산은 무엇일까요? 하늘에서 가장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은 무엇일까요? 책을 통해서 얻은 인류의 지성과 문화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와 묵상을 통해서 찾아낸 삶의 의미와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보물은 누군가 가져갈 수도 없고, 없어질 것을 두려워서 감춰둘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귀하게 여기는 ‘금, 다이아몬드, 고가의 미술품, 땅, 현금’은 아닐 것입니다. 하늘에서 귀한 대접을 받는 재물, 결코 남들이 가져갈 수 없는 재물, 사라지지 않은 재물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따뜻한 마음입니다. 그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이웃에 대한 사랑입니다. 사랑의 결실인 희생, 봉사, 나눔입니다. 이것은 누구나 실천할 수 있지만 아무나 하지 않은 일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 하늘나라에 우리의 재물을 쌓아 보시는 것은 어떠하신지요?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마라.”(19절)고 하신다. 이것은 무슨 의미이냐? 마음이 진흙 속에서 뒹군다면, 그 마음이 어떻게 깨끗할 수 있겠는가? 마음이 하늘을 향해 있다면 그 마음은 깨끗할 것이다. 하늘에 있는 것은 모두 깨끗하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끝까지 지킬 수 없는 것은 사실이며, 결국 남의 손에 넘겨주는 것이다. 이것에 마음을 쓰고 온통 신경이 거기에 가 있게 되면 마음이 재물에 사로잡혀 어두워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 때에 우리는 참으로 우상숭배자가 된다. 하느님보다 그 재물이 우선하고 그 재물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원할 것에 대하여 생각하고 생활을 위해 노력하라고 하시며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20절)고 하신다. 여기에 나오는 하늘은 “하늘은 주님의 하늘”(시편 115,16)에 나오는 하늘이다. 우리는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 영원히 계속되는 것에 마음을 두고 그것을 보물로 삼아야 하므로, 여기서 말하는 하늘은 영적인 하늘이다. “첫 번째 하늘과 땅은 사라질 것”(묵시 21,1)이기 때문이다.

 

유대인들 사이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모노바즈라는 사람은 흉년이 들었을 때에 그의 모든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의 형제들은 사람들을 보내어 “그대의 조상들은 재산을 모았고 그들의 유산에 재산을 더 보태었는데, 이제 그대는 그대의 재산과 조상의 재산을 모두 흩어 버렸도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나의 조상은 땅을 위하여 재산을 모았고 나는 하늘을 위하여 보화를 모았다. 우리 조상은 사람의 손이 다스릴 수 있는 곳에 보화를 쌓았으나, 나는 사람의 손이 통치할 수 없는 곳에 보화를 쌓아 놓았다. 나의 조상들은 이 세상에 보화를 모았고 나는 장차 올 세상에 보화를 모았다.”고 했다.

 

우리는 우리가 갖고 있는 재물이 일시적으로 창조주 하느님께로부터 받아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것임을 알고, 창조주 하느님의 뜻에 맡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우상숭배라는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진정으로 흠숭 받으셔야 할 하느님의 자리에 재물이 차지하게 되는 것이 우상이다.

 

예수님께서는 “눈은 몸의 등불이다.”(22절)라고 하신다. 눈은 우리의 정신을 가리킨다. 눈이 어두워지면 다른 지체들도 기능이 약해지듯이, 정신이 타락하면 우리의 삶은 악으로 가득 찰 것이다. 우리가 육신의 눈을 건강하게 지키려 하듯이 늘 건전한 정신을 지키려 해야 한다. 우리의 분별력이 무너지면 모든 행위들이 뒤죽박죽이 된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23절) 하신다. 모든 것을 올바로 보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맑은 눈으로 빛을>

    상지종 신부님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아

한 걸음도 내딛을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이라도

어둠이 집어삼킨

실낱같은 빛을 찾을 때까지

온 신경 두 눈에 모아

때로는 가늘게

때로는 크게

두 눈을 뜨는 거야

어둠 가득한 그곳에도

분명 빛이 있나니

맑은 눈으로 정성껏 모으고

두 눈 머금은 여린 빛으로

온 몸과 온 마음 가득 밝혀

또 다시 한 걸음 내딛는 거야

 

 

 

천국체험. -하늘에 사랑의 보물 쌓기-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제의 잊지 못할 천국체험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진천 태령산 기슭에 소재한 한국순교복자수녀원 무아의 집 피정집에서 10여일간의 피정지도를 끝내고 홀가분하게 떠날 때의 체험입니다. 세상살이 마치고 때가 되어 홀가분하게 떠날 때도 이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피정지도가 끝났는데도 갈곳이 마땅치 않아 계속 머문다면 얼마나 답답하고 궁색하겠는지요.

 

인생무대에서 배역이 다 끝났는데도 갈 곳이 없어 떠날 때 떠나지 못하고 어기적거리며 구차하게 머무는 경우의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러나 저에겐 천국을 상징하는 주님의 집, 수도원이란 갈곳이 있었습니다.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여 대기한 수사님이 흡사 천국의 사자처럼 생각되었습니다. 세상살이 끝나고 떠날 때 천국의 사자가 기다렸다 안내하는 것도 이와 같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수도원에 도착하여 제자리에 돌아오니 마치 잠시 세상에 파견되어 살다가 사명을 다한 후 천국의 원래 제 소속의 제자리에 온 듯 생각되었습니다. ‘아, 우리 믿는 이들의 인생도 잠시 세상에 파견되어 사명을 다한후 본향집인 천국의 제자리에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이것이 제가 체험한 간접적 천국체험입니다. 

 

그러나 인생배역의 역할이 다 끝나고 떠나야 하는 데 마땅히 갈곳이 없다면 얼마나 난감하겠는지요. 여행이 아름다운 것은 돌아 갈 집이 있기 때문이란 어디선가 읽은 글도 생각이 납니다. 갈곳 없는 난민難民을 생각하면 더욱 실감이 날 것입니다. 궁극의 갈곳인 하느님 없이 사는 사람들 어찌보면 ‘영적난민’과 같습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예화도 있습니다. 믿지 않았던 절친이 죽어 수의를 곱게 차려입은 모습을 보자 저절로 새어 나온 친구의 탄식입니다.

 

“아, 옷은 잘 차려입었는데 갈 곳이 없구나! 갈 곳이 없어, 어디로 가나?”

 

지금도 생생한 충격적 말마디입니다. 하여 지금부터 천국의 본향집을 향한 하늘길을 잘 닦아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 열왕기하권의 내용이 참으로 복잡하고 혼란합니다. 엘리야의 예언대로 아합과 이제벨의 악행으로 인한 살인 폭력의 악순환이 계속되는 지옥을 방불케 합니다. 

 

아탈야의 악행은 그대로 이제벨을 연상케 합니다. 아탈야의 6년 유다통치로 유다는 쑥대밭이 되다시피 됩니다만 혜성같이 등장한 여호야다 사제의 대청소와 같은 개혁으로 완전히 질서를 회복합니다. 하느님과 백성들간의 관계가 회복되니 다시 하늘길이 환히 열린 듯 합니다.

 

바로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영혼의 대청소 시간과 같습니다. 주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여 하늘길을 환히 내는 복된 시간이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마라. 땅에는 좀과 녹이 망가뜨리고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들이 들어오지도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여러분은 어디에 보물을 쌓아두고 있습니까? 땅에 쌓습니까? 하늘에 쌓습니까? 하느님이 마지막 심판 기준은 하늘에 쌓아둔 보물입니다. 땅에는 가득한데 하늘에는 텅 비어 있다면 그 인생 얼마나 허무, 허망하겠는지요. 세상 무지한 탐욕의 사람들은 지금도 땅에 보물을 쌓느라 여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은 텅 비어 있어도 하늘엔 보물로 가득하다면 얼마나 충만한 내적기쁨의 삶이겠는지요. 한 번에 쌓을 수 있는 하늘 보물이 아닙니다. 지금부터 꾸준히 날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합니다.

 

“사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 바로 하늘길을 내는 것이요 주님과의 관계를 깊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늘 보물을 쌓을 수 있습니까? 사랑의 행위 모두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이며 이때 저절로 마음은 하늘처럼 맑고 순수해집니다. 참행복 선언중 다음 말씀 기억하실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바로 이런 이들이 하늘에 보물을 쌓아 놓은 사람들입니다. 부단한 사랑의 실천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이들이 진정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들이요 마음이 겸손하고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맑고 밝은 심안心眼으로 하느님을, 하늘길을 봅니다. 결국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의 실천이, 사랑의 수행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길이요 저절로 마음은 정화되어 눈도 몸도 맑고 밝아질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수행은 바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이요 하늘길을 환히 내는 일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눈은 몸의 등불입니다. 눈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마음이 맑고 밝아야 눈도 몸도 맑고 밝습니다. 답은 하나입니다. 끊임없이 사랑의 실천으로, 사랑의 수행으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바로 성인들입니다. 세상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인생허무, 인생고해에 대한 유일한 처방입니다. 

 

이렇게 하늘에 보물을 쌓으면서 주님과의 관계는 날로 깊어질 것이며, 환히 열린 하늘길에, 내외적치유와 기쁨과 평화와 더불어 마음도 눈도 몸도 날로 맑고 밝아질 것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모두 하늘에 사랑의 보물을 쌓는 시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모든 일상에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랑의 수행에 매진邁進토록 해 줄 것입니다. 아멘. 

 

 

 

나의 보물 1호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 '눈이 몸의 등불'이라는 말은 곧 한 사람이 제대로 살아가려면 그 안에 빛이 있어야 하고, 그 빛은 '눈'의 상태에 의존한다는 뜻"입니다. 맑은 눈을 가진 사람은 관대한 사람이요, 성하지 못한 눈을 가진 사람은 질투심 많은 인색한 사람입니다. 관대한 마음을 가질 때 몸 안이 빛으로 가득 차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이 되고, 인색한 마음을 가질 때 어둠 속에 싸이게 됩니다. 이기적인 보물에 집착하는 돌 같은 마음을 살 같이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켜 주시길 청합니다.

 

나의 보물 1호는 무엇인가요? 그 보물을 이 지상의 삶이 끝났을 때 가져갈 수 있나요? 장례행렬 뒤를 따라가는 이삿짐 트럭을 본적이 없답니다. 천상을 그리워하면서도 마음은 세상에 고정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요? 보물1호가 무엇인지 중요합니다. 그것에 마음을 빼앗길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예수님으로 족합니까? 감히 '예'라고 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예수님으로 족하다면 그분께서 남겨주신 공덕을 가져갈 수 있을 것입니다. 남에게 베푼 것, 곧 사랑, 애덕, 섬김, 인내, 양선함, 다정함.....이것들이 얼마나 큰 보물인지요!

 

이 시간 맑은 눈을 가진 관대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감히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서로를 지배하고 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서로를 피곤하게 합니다. 서로를 섬기면 기쁨과 평화가 넘치게 되지만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아버지 하느님께 순종하심으로써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믿는 이의 삶은 당연히 예수님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머리로는 아는데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 해도 꿰어야 보배인데 바보처럼 결심만 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21) 하신 예수님의 의중을 살펴 부디 맑은 눈으로 주님을 닮을 수 있는 은총의 날이 되길 희망합니다. 한 점 욕심이 없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면, 보이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귀한 선물이요, 모든 것이 기쁨입니다. 주님의 눈으로, 주님의 마음으로 볼 것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의 문은 여기 삶의 자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큼 인색함으로 세상에 매이지 말고 마음이 늘 하늘의 보물을 향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6, 19-23(연중 11주 금)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대당문제와 세 가지의 경건생활에 대한 의로움을 말씀하신 다음, 보물과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자신을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마라”(마태 6, 1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마태 6, 20)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둘 수도 있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둘 수도 있습니다. 땅에 쌓아둔 보물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위해 쌓아올린 보물이요, 좀 먹고 녹슬고 도둑 받을 수 있는 보물입니다. 하늘에 쌓는 보물은 하느님 앞에서 쌓아올린 보물이요, 영원히 남을 보물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의로움의 보물이라 알아들어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쌓아올리고 있는가? 아니면 하느님 앞에 의로움을 쌓아올리고 있는가? 썩어 없어질 땅의 보물을 쌓고 있는가? 영원이 남을 하늘의 보물을 쌓고 있는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 21)

 

그렇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을 보면, 자신이 보물이라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의 눈이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의 눈이 사람들 앞에 드러난 자신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 앞에 드러난 자신을 보고 있는지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의 마음은 분명, 여기 제 안에 와 있습니다. 당신의 보물이 있는 곳에 당신 마음이 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당신의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당신 목숨을 내어주고 얻은 소중한 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제 마음에 와 있는 주님의 눈동자를 관상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의 눈은 나를 향하여 있는데, 내 마음의 눈은 어디를 향하여 있는지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몸의 등불”인 “눈”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네 눈이 맑으면 온몸도 환하고,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마태 6,23)

 

그렇습니다. 눈이 맑으면 곧 편견과 고정관념이 없는 깨끗하고 순수한 눈은 환하고 투명하게 볼 것입니다. 산상설교에서 “마음이 깨끗하면 볼 것”(마태 5,8 참조)이라고 했듯이 말입니다. 곧 보물을 땅에 쌓을 것인지 하늘에 쌓을 것인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유경환 시인의 “호수”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호수가 산을 다 품을 수 있는 것은 깊어서가 아니라, 맑아서이다.

우리가 주님을 안을 수 있는 것은 가슴이 넓어서가 아니라 영혼이 맑아서이다”

 

한편, “눈이 성하지 못하면”(πονηροσ)은 직역하면 ‘악하면’으로 곧 ‘악한 눈’을 뜻한다고 합니다. 곧 보물의 처신이나 사용이 악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것이 아무리 보물이라 할지라도 악하게 사용되면 오히려 자신을 어둠에 빠뜨릴 것입니다. 아멘.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간략한 어른 입교식’을 통해,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이렇게 묻고 대답합니다.

♱ 여러분은 하느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 신앙을 청합니다.

♱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 영원한 생명은 참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님으로 또 유형무형한 만물의 주님으로 세우셨습니다. ...... 그대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이미 들었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으며 형제들과 일치하여 기도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 신자가 되려고 행한 것입니까?

◎ 예,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신앙을 더 풍요하고 깊이 얻어 누리기 위해 처절하게 애쓰고 있는지?

아니면, ‘어떻게 되던 주님께서 주시는 것이니까,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니 그냥 주고 싶으면 주시겠지.’ 또는 ‘나중에 죽어서 완성되는 것이라니 죽을 때 가서 생각해 보자.’ 라고 생각하면서 무심하게 지내고 있는지.

아니면, ‘영원한 생명이란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하면서 제쳐 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짚어 봅시다.

 

 

 

빛은 빛을 낳고 어둠은 어둠을 낳는다. <마태 6, 19-23>

     이석진 신부님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없으나 어둠이 있는 곳에 빛이 없으면 어둠뿐입니다. 눈이 병들어 보지 못하면 어둠 속에 살게 되고, 눈이 맑으면 빛 속에 살 수 있습니다. 무엇이 눈을 어둡게 합니까? 하늘을 보지 않고 땅만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땅에 보물을 쌓아두려고 동분서주하는 사람입니다. “나는 기도할 시간이 없다. 나는 성당에 갈 시간이 없다. 나는 선을 행할 시간이 없다.” 이는 세상에 쌓아야 할 것들을 돌보고 그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 뒤에는 어둠만 찾아오고 그 이유로 여유 없는 삶을 살며 주위를 돌아보지 못하여 눈이 어둠 속에 갇혀 살고 있습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사람은 빛 속에 사는 사람이며 그들은 언제나 열린 마음으로 나가고 들어오는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촛불이 주위를 비추며 자기 몸을 태우는 것처럼 자기를 위해 사는 사람이 아니라 언제나 남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어떤 보수나 상을 받으려 하지 않고 가난한 마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려고 빛을 비추며 살려는 사람은 이기심에서 선이나 진리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이타심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요사이 자유한국당이 폭삭 망하여 갈 바를 모르고 완전히 어둠 속을 헤매고 있습니다. 대책 회의를 하면서 자기 이권이나 챙기려고 하고 자기를 내려놓을 줄 모르는 사람만 있으면 끝내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의 사람으로 남아있게 됩니다.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그들 중에 빛이 되려고 자기를 불태우는 사람이 나와야 합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빛이 되어 어둠을 비추려고 하면 사랑의 정신을 말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사랑이란 벗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사람입니다. 해방 후 70년에 최빈국에서 세계 10번째 나라가 된 것은 그 뒤에 숨어 있는 희생이 있어서입니다. 지금 우리가 현 상태에 안주하고 서로 꾀를 부리면 나라가 희망이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아 빛이 되는 사람이 늘어나도록 기도합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 21)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하늘에 채워야 할

우리의 마음입니다.

 

복음은 지나친 

세상의 욕심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보물과 마음이

맞닿아 있습니다.

 

보물이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우리

마음이 문제입니다.

 

하느님을 위한 마음이

실은 우리를 살리는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진정한 보물이

되어야합니다.

 

우리 마음이

향해야 할 곳은

언제나 하늘입니다.

 

하느님을 찾는

마음이 진정한

보물이 되어야

합니다.

 

다시금 

예수 성심을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배우고 깨치는 여정이길

기도드립니다.

 

보물과 마음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하느님을 향할 때

보물도 마음도

등불처럼 환하고

밝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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