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26년 6월 20일 (녹) 연중 제11주간 토요일

작성자John|작성시간26.06.20|조회수2 목록 댓글 0

제1독서

<너희는 성소와 제단 사이에서 즈카르야를 살해하였다(마태 23,35 참조).>
▥ 역대기 하권의 말씀입니다. 24,17-25
17 여호야다가 죽은 다음, 유다의 대신들이 와서 임금에게 경배하자,
그때부터 임금은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다.
18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겼다.
이 죄 때문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진노가 내렸다.
19 주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그들에게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이 예언자들이 그들을 거슬러 증언하였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20 그때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서서 말하였다.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주님의 계명을 어기느냐?
그렇게 해서는 너희가 잘될 리 없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1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임금의 명령에 따라 주님의 집 뜰에서 그에게 돌을 던져 죽였다.
22 요아스 임금은 이렇게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그의 아들을 죽였다.
즈카르야는 죽으면서,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하고 말하였다.
23 그해가 끝나 갈 무렵, 아람 군대가 요아스를 치러 올라왔다.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들어와
백성 가운데에서 관리들을 모두 죽이고,
모든 전리품을 다마스쿠스 임금에게 보냈다.
24 아람 군대는 얼마 안 되는 수로 쳐들어왔지만,
유다 백성이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을 저버렸으므로,
주님께서는 그토록 많은 군사를 아람 군대의 손에 넘기셨다.
이렇게 그들은 요아스에게 내려진 판결을 집행하였다.
25 아람 군대는 요아스에게 심한 상처를 입히고 물러갔다.
그러자 요아스가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을 죽인 일 때문에,
그의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그를 침상에서 살해하였다.
요아스는 이렇게 죽고 말았다.
사람들은 그를 다윗 성에 묻기는 하였지만,
임금들의 무덤에는 묻지 않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24-34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25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26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27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28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29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31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32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33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34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말씀의 초대

요아스 임금이 자기에게 충성을 바친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를 죽이자,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임금을 살해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시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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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는 우상을 섬기던 요아스 임금과 유다 백성에게 주님의 경고를 전하다 죽는다. 아람 군대가 쳐들어 온 뒤 요아스는 신하들의 모반으로 살해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내일을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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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아스 임금은 주님께 돌아오라는 즈카르야의 충성스러운 말을 듣지 않고 오히려 그를 돌로 쳐 죽인다. 마침내 그도 주님의 벌을 받아 신하들의 모반으로 살해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라고 가르치신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를 찾으려는 노력을 하면 하느님께서는 먹고 입을 것을 마련해 주신다는 것이다(복음).

 

 

 

오늘의 묵상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예수님께서는 권위 있는 어조로 인간의 가장 깊은 불안을 들추어내십니다. “목숨”은 먹고 살아야 하는 구체적 생존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히 낙관적으로 생각하라는 것이 아니라, 불안으로 삶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삶에 대한 염려는 삶을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축소시켜 버립니다. 
새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삶의 자세를 보여 줍니다. 새는 씨를 뿌리지도 거두지도 않지만, 하늘의 아버지께서 먹이시지요. 여기서 초점은 노동을 부정하며 요행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먹이고 입히는 주체가 누구인지 묻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6,27)라고 물으십니다. 불안과 걱정은 우리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고 우리 삶을 소진할 뿐입니다. 
이방인들과는 다르게 제자들은 참된 것을 찾아야 합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6,33)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의로움은 마태오 복음서의 황금률이 정확히 알려 줍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7,12). 
신앙은 주어지는 오늘을 건네받는 태도입니다. 오늘, 우리 삶은 나의 노력이나 걱정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의 근원이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입니다. 누군가가 먹고 입는 문제로 힘들어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을 만드신 하느님의 의로움을 우리 서로가 챙기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주어지는 오늘을 걱정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아야겠습니다. 적어도 먹고 입는 것 정도는 걱정하지 않게 서로 챙기면 좋겠습니다.(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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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섭리’에 대하여 분명하게 가르치십니다. ‘섭리’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지혜와 힘으로 세상에 있는 모든 사물과 사건을 믿는 이의 구원을 위하여 이끌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힘이 우리를 이끌고 있으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섭리는 진지한 삶의 태도를 먼저 내세웁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인간에 대하여 이해가 깊은 이들은 개인의 내적인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운명의 흐름을 결정짓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래서 섭리는 믿음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두고, 하느님 나라와 거룩한 정의를 먼저 바라는 믿음으로써 주위에서 진행되는 일들이 질서를 찾게 됩니다. 사물, 인간, 상황, 운명과 같은 주변 세계는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생각과 방식에 따라 형태를 갖춥니다. 
믿음으로 질서 잡힌 삶을 살아가면,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 (로마 8,28)라는 말씀이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을 얻게 됩니다. 곧 믿는 이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의 구원에 도움이 됩니다.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까지도 삶의 궁극적인 목표에 이바지하게 됩니다. 섭리에 대한 가르침은 결코 가볍지 않은 요구를 합니다. 하느님 나라의 추구를 첫자리에 놓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요구는 우리에게 위대한 약속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믿음을 가진 이에게 ‘구원으로 이끌리는 삶’을 마련하여 주실 것입니다 (로마노 과르디니, 『예비 기도 학교』, 154-158면 참조).(최정훈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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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섬기는 대상이 결국 우리를 다스리고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반복되며 귓가에 맴도는 주님의 말씀은 “걱정하지 마라.”입니다. 이 말씀의 근거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자녀들을 잘 아시고, 우리를 돌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곧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며 생명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분께서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하게 여기시는 당신 자녀들의 어려움과 고통, 눈물과 아픔을 잘 알고 계시기에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걱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늘의 우리 아버지께서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시고, 우리에게 몸소 마련해 주시며 우리를 보살펴 주십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하느님 우리 아버지에 대한 굳은 믿음입니다. 

좋으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소중한 아드님마저 기꺼이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환호송처럼, 부유하시면서도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유한 자녀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임마누엘 주님’으로 우리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예수님을 더욱 닮아 가고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화답송이며 주님의 종 다윗에게 전해진 시편의 “영원토록 그에게 내 자애를 베풀리니”(시편 89[88],29)라는 말씀은 하느님 아버지의 귀한 자녀인 우리를 향한 주님의 변함없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십니다. 날마다 무거운 수고와 힘겨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서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이민영 예레미야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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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기자,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합니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즈카르야를 거슬러 음모를 꾸미고, 요아스 임금의 명령에 따라 돌을 던져 그를 죽입니다. 요아스 임금은 하느님의 벌을 받아 모반을 일으킨 신하들에 의해 침상에서 살해당합니다. 

이 세상에서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교만하기 쉽습니다. 이 세상의 재산과 명예와 권력이 많은 사람일수록 걱정이 많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이 줄어들까 봐, 자신의 권위가 손상될까 봐, 자신의 위상이 추락할까 봐, 걱정하며 사람들을 감시하고 억압합니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은 모두 평등하며 이 지상에서 귀중한 삶을 살 권리가 있습니다. 참새를 먹이시고 들꽃을 입히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본 의식주를 보장해 주십니다. 그러나 자주 인간의 탐욕과 권력의 쟁탈전으로 소중한 삶을 살 권리와 기회들이 박탈되며 위험 지대로 밀려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의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말씀을 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권고는 무엇보다도 당연히 가져야 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을 위한 말씀입니다. 한숨과 탄식 속에 사는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말씀입니다. 걱정이 많아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지 못하며 방황하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약하여 하느님을 원망하고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류한영 베드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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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살기 힘들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한숨과 탄식이 주변에 그치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할까요? 우리는 행복할 수 있는 능력마저 잃은 듯합니다. 

만일 먹고 살기 힘든 사람에게 하느님과 재물 가운데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적지 않은 이들이 재물을 택할지도 모릅니다. 보이지도 않고, 계신지 확신도 안 되는 하느님, 아무리 기도해도 들어 주지 않으시고, 불의를 묵과하시고, 공평하지도 않으신 듯한 하느님보다는 당장 내 삶을 윤택하게 해 줄 재물을 원하는 것이 어쩌면 인간의 본능일지도 모릅니다. 

현대인에게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라고 합니다. 어떤 학자는 스트레스가 없으면 인간이 30년은 족히 더 살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살면 좀 상대적 빈곤감으로부터 해방되어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이 지혜가 담긴 두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 됩니다. 언제일지 모르지만, 떠나게 될 이 세상에 집착하기보다, 매일이 은총의 시간임에 감사하고, 긍정적으로 기쁘게 살려는 결심으로 충분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채워 주실 것입니다. 그건 믿음의 영역입니다. 단지 내가 필요로 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내게 필요로 하시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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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서 기도하는 노인의 모습을 그린 그림을 기억하시는지요? 이 그림은 한 노인이 식탁 앞에 앉아 빵 한 덩어리와 찻잔을 앞에 두고 머리를 숙인 채 두 손을 모아 기도드리는 모습입니다. 원래 엔스트롬(Enstrom)이라는 미국 사진작가가 찍은 사진을 그의 딸이 보고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엔스트롬이 처음 기도드리는 노인을 보았을 때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이 노인은 세상의 재물은 많이 갖지는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가졌다. 왜냐하면 그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졌다 해도 감사할 줄 모르면 그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나 가난하지만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채워 주신다고 믿으며 사는 사람은 참으로 부자입니다. 하느님을 품고 살기 때문입니다.

시골 본당의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아 저는 주방 도우미도 없이 스스로 밥을 해 먹고 지냅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만 이제는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혼자서 밥을 먹을 때면 가난한 식탁에서 기도드리는 그림 속 노인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저의 식탁 위에 놓인 음식이 그림 속의 식탁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모르겠습니다. 그저 감사드릴 따름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는 말씀이 늘 마음속 깊이 와 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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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여러 가지 걱정거리가 오히려 주님을 믿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한 사업가가 있었는데 그는 고민과 걱정이 많아 늘 불안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걱정에서 벗어나 살 수 있는 방법이 뭐 없을까?’ 하고 고민하다가 좋은 착상이 떠올랐습니다. ‘걱정 상자’를 만들어 걱정거리가 생길 때마다 그 내용을 적어서 상자에 넣어 두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매주 수요일을 ‘걱정의 날’로 정하고, 그날 한꺼번에 걱정거리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수요일, 그는 상자 속의 메모지를 살펴보다가 이러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상자에 넣을 때만 해도 큰 걱정거리로 여겼던 그것을 이제 다시 읽어 보니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지나친 걱정이 오히려 행복한 삶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인도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많은 사람에게 삶의 교훈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합니다. 

“그대가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바꾸면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대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걱정한다고 해서 그것이 바뀌지 않을 테니까.”

그 렇습니다. 너무 지나치게 걱정에 시달리다 보면 어느새 재물에 집착하게 됩니다. 마치 재물이 그것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만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정 마음을 써야 하는 것은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곰곰이 헤아리는 자세입니다. 그 나머지는 주님께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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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이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불현듯 그동안에 지은 잘못에 대한 죄책감이 가슴 깊이에서부터 밀려듭니다. 지은 죄들의 대부분은 ‘무엇을 마시고, 먹고, 입을까? 어떻게 살아갈까?’ 등 순전히 일상생활에서 오는 욕심들에서 출발합니다.

그저, 주님께서 주신 능력을 은혜롭게 생각하고 감사드리며, 매일을 최선을 다해 살아갈 생각을 감히 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이든 남보다 앞서고, 최고의 것을 가져야 한다고만 생각하며 살다 보니, 몸은 생각을 따라오지 못했고, 그래서 더더욱 짜증을 부리면서 힘겹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하시면서,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라고 하십니다.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던 솔로몬도 결국 쓸쓸히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 일, 곧 형제애와 나눔과 섬김에 바탕을 둔 인간관계를 키워 가는 일을 앞세우지 않으면, 끝없는 생활 걱정과 미래 걱정에 쫓겨 인간다운 삶을 살지 못하게 되지요. 주님께서는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하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느님 나라의 의로움을 추구하다 보면, 생활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도 자연히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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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재물에서 ‘하느님의 능력’을 찾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하느님의 능력’을 찾고 있습니다. 재물에 ‘주님의 능력’이 있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착각을 깨야 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하고 말씀하십니다. 의식주에 관한 두려움을 접어야 주님의 능력에 눈뜰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어렵습니다. 우리 삶의 태반이 의식주에 얽힌 고민인데 어떻게 털어 낼 수 있을는지요? 

고민을 하되 신앙인답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걱정한다고 없는 쌀과 의복이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많은 이는 고민부터 먼저 합니다. 걱정으로 삶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두르지 않으십니다. 필요할 때에는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미리 애태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의로움은 그분의 애정입니다. 들풀을 입히시고 하늘의 새를 먹이시는 그분의 선하심입니다. 그 의로움을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내일 일을 너무 걱정해서는 안 됩니다. 걱정으로 자신의 앞날을 어둡게 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가을을 ‘천고마비의 계절’이라고 말합니다. 즉,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가을이 좋은 계절이라는 뜻일까요? 당연히 가장 좋은 계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천고마비(天高馬肥)’의 어원은 당나라 시인 두심언(杜審言)이 지은 시 ‘증조관기(贈趙管記)’에 등장하는 추고새마비(秋高塞馬肥)라는 구절에 유래한다고 합니다. 그 뜻은 가을 하늘이 높고 변방의 말이 살이 찐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구절은 좋은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가장 좋은 계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힘든 시기를 의미합니다.

 

당나라와 국경을 마주했던 흉노족은 가을만 되면 말을 타고 쳐들어와 곡식을 약탈하고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이 때문에 북방 변방에 사는 당나라 사람들은 가을만 되면 언제 흉노가 침략할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결국 ‘가능 하늘이 높고 변방의 말이 살이 찐다’라는 말은 흉노가 쳐들어올 시기가 되었으니 경계하고 대비하라는 말입니다.

 

그 누가 ‘천고마비’를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볼까요? 하지만 원래는 가장 걱정되는 계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실제는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향한 노력이 필요하고, 섣부르게 판단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지혜를 끊임없이 말씀하십니다. 특히 세상을 살아가며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 하느님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않고 온갖 걱정을 하며, 해야 할 것을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됨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라고 하십니다.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의 종은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섬김에 있어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느님과 재물을 적당히 양립시키는 타협을 합니다.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기에 물질이 주는 가짜 안정감에 노예처럼 얽매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걱정하다’라는 말은 ‘마음이 나뉘다, 찢어지다’라는 어원을 가진다고 합니다. 따라서 걱정은 하느님을 향해야 할 신뢰가 세상의 불안으로 인해 여러 갈래로 찢어지고 흩어진 영적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모으는 방법을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라고 하십니다. 당연히 우리 일상의 필요를 무시하고 정당한 노동을 폄하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신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의 우선순위를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걱정 없이 기쁘게 사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당신의 모든 희망을 하느님께 두십시오. 그분으로 채워지기 위해 그분을 필요로 하는 존재임을 깨달으십시오. 그분 없이는 무엇을 가지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당신을 공허하게 만들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주님 나라는 그분의 힘,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건설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걱정의 바탕에 어떤 감정이 존재하는지 묵상해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먹을 양식이 떨어지면 어떡하지? 마실 음료가 없으면 어쩌나? 내 편안한 안식처가 사라지면 어떡하지? 내가 더 나이 들어가면서 병고가 찾아오면 어쩌지? 내가 지금 버티고 있는 무대에서 밀려나면 어쩌나?

결국 우리가 느끼고 있는 두려움, 그 가장 근저에는 나란 존재의 소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수시로 등장하는 하느님의 음성이 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과 반드시 쌍으로 붙어 다니는 표현이 있습니다. 내가 항상 함께 하겠다!

정녕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세상 재물이 사라지는 것,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지상의 평화와 안녕이 붕괴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두려워할 것은 우리 영혼 구원과 관련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과 멀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 인간의 근심과 걱정,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 그분의 자비와 사랑으로 건설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공포심이나 불안한 마음과 더불어 찾고 추구해서도 안됩니다. 진심으로 하느님을 찾는 사람의 마음 안에는 이미 하느님께서 현존하고 계시기에, 그는 이미 하느님 나라에 속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육체와 재물 자체를 단죄하거나 의식주의 필요성을 부인하신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분께서 제자들과 오늘 우리 각자를 향해 특별히 경고하시는 바는 목숨과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요 탐욕입니다.

매일의 안정적인 의식주 해결을 위한 경제적 기반은 더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지나침입니다. 미래를 위한 재물의 축척도 어느 정도여야지, 너무 지나칠 때 인간은 재물의 노예가 되고, 언젠가 그 지나친 재물이 오히려 큰 재앙으로 다가올 것입니다.

결국 최종적으로, 진정으로 추구할 보물은 하느님이요, 하느님의 나라요, 그분의 다스림입니다. 내일에 대한 지나친 근심 걱정을 모두 말끔히 내려놓으면 좋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열심히 노력하고 나머지는 한없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두 손에 우리들 인생을 몽땅 맡겨드리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자체 해결해 버리고자 기를 쓰면, 그분께서 활동하실 여지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2023년 ‘Chat GPT’가 세상에 나왔을 때입니다. 컴퓨터가 사람과 대화하는 기능을 보여주었습니다. 복잡한 프로그램을 몰라도 친구와 대화하듯이 질문하면 컴퓨터가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이제 ‘검색의 시대’가 저물고 ‘대화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인공지능과 함께 어느덧 3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도움을 받은 것은 ‘번역’이었습니다. 한국어 강론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든 작업입니다. 하지만 인공지능에 부탁하면 실시간으로 제가 하는 번역보다 더 자연스럽고 매끄러운 번역을 보여주었습니다. 교구의 공문이나 영문으로 오는 메일도 실시간으로 번역해 주었습니다. 저는 번역으로 인한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었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습니다. 여행 계획과 일정 정리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굳이 검색하지 않아도 여행 계획을 질문하면 교통, 숙박, 장소를 정리해 주었습니다. 사목에도 도움을 받습니다. 성경 말씀을 찾아 주기도 하고, 제가 쓴 글을 요약해 주기도 합니다. 지도 대신 내비게이션, 운전 대신 자율 주행이 있듯이 인공지능은 이제 우리 삶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2029년이 되면 ‘에이전트 인공지능’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의 인공지능이 질문에 응답하는 수준이라면, 앞으로의 인공지능은 ‘비서’ 역할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기업의 임원에게는 부속실이 있습니다. 부속실 직원은 임원의 일정을 정리하고 필요한 자료를 준비합니다. 앞으로의 인공지능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병원 예약도 대신해 주고, 건강 관리도 도와주고, 은행 업무도 처리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세상과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분들,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 어려운 분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기 마련입니다. 인공지능 때문에 일자리를 잃을 수 있다는 걱정도 있습니다. 개인정보와 사생활이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기술은 늘 양면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칼은 사람을 살릴 수도 있지만 해칠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도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상속에 대해서 미국은 한국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상대적으로 덜 하는 것 같습니다. 잘 키워주고 독립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그것으로 부모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합니다. 자식들도 부모의 재산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독립하면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자식이 재산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제가 만난 이민 2세대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재산은 부모님의 것이니 부모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했습니다. 재산을 자녀에게 남길 수도 있고, 기부할 수도 있고, 여행을 위해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님의 선택입니다.

저의 부모님은 세상의 재물을 많이 물려주시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더 귀한 것을 물려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신앙입니다. 부모님께서는 말보다 삶으로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부모님은 건강하게 사시다가 하느님의 부르심 속에 선종하셨습니다. 저는 그것이 가장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봅니다. 자녀들에게 부모의 신앙이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이유로 신앙 교육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그릇과 같습니다.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되고, 보석을 담으면 보석함이 됩니다. 돈과 성공만 담으면 불안과 경쟁으로 가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믿음과 희망을 담으면 우리의 삶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먼저 담아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인공지능은 편리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좋은 자동차와 좋은 집도 삶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돈도 필요합니다. 건강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삶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우리 삶 안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편리함이 커질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많은 정보를 얻을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그리고 세상이 빠르게 변할수록 더욱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남겨야 할 것은 단지 재산이 아니라 신앙의 유산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붙들어야 할 것도 단지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이라는 그릇 안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과 사랑을 가장 먼저 담을 수 있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늘 사랑이 먼저이지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사는 것이
먹는 것보다
먼저이지요


먹기 위해 사는 듯한
사람이 많더라도


사람이라면
먹기 위해 살지 않고
살기 위해 먹어야지요



사랑하는 것이
사는 것보다
먼저이지요


살기 위해 사랑하는 듯한
사람이 많더라도


사람이라면
살기 위해 사랑하지 않고
사랑하기 위해 살아야지요



사는 것보다 먼저인
사랑하는 것이
사는 것보다 다음인
먹는 것보다
먼저이지요



사랑이
먼저이지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걱정이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은 다가오는 미지의 상황에 대한 불확실함으로 인해 두려움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앙인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이들과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걱정해야 할 것이 있다면 내가 지금 얼마나 하느님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그분과 연락을 취하고 있는가 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진정 자비 지극하신 분이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분과 함께라면 우리는 어떠한 시련과 역경이 다가온다 하더라도 헤쳐나가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오늘 하루를 오롯이 하늘 아버지께 맡겨 드리는 지혜

      김웅태 신부님

1. 시작하며: 일상으로의 초대

찬미예수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매일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도록 초대받는 연중 시기 한가운데 서 있습니다. 연중 시기는 특별한 축제의 분위기만을 살아가는 때가 아니라, 우리가 받은 은총을 일상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를 배우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그런데 성령 강림의 은총을 되새긴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성령의 불길로 마음을 새롭게 했던 우리가 막상 현실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다시 이런저런 걱정과 불안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곤 합니다.

“이번 달 카드 고지서는 어떻게 해결하나?”

“아이들 학원비와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하지?”

“몸이 자꾸 아픈데 혹시 큰 병은 아닐까?”

이처럼 수많은 근심에 휩쓸릴 때, 우리는 주님께서 약속하신 고아가 아닌 삶을 잊어버리고, 마치 홀로 버려진 사람처럼 허덕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런 약함과 흔들림을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다정한 위로와 단호한 사랑의 목소리로 우리를 참된 평화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2. 우리가 섬기는 참된 주인은 누구인가?

오늘 제1독서인 역대기 하권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경종을 울립니다. 요아스 임금은 자신을 돌보아 주었던 여호야다 사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주님의 뜻에 따라 나라를 올바르게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여호야다가 죽은 뒤, 유다의 대신들이 찾아와 임금에게 경배하자 요아스는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기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당신께 돌아오게 하시려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가 하느님의 영에 사로잡혀 백성 앞에 나섭니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2역대 24,20 참조)

그러나 요아스 임금과 백성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은혜를 원수로 갚듯, 주님의 집 뜰에서 즈카르야를 돌로 쳐 죽이는 비극을 저지르고 맙니다.

평화로울 때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시험의 순간이 오자 요아스는 하느님이 아니라 세상의 권력과 욕망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비참한 모습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깊이 맞닿아 있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마태 6,2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겪는 근심의 뿌리를 정확히 꿰뚫어 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걱정으로 가득 차는 이유는, 입으로는 하느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재물과 소유를 더 든든한 주인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물론 먹고사는 문제는 중요합니다. 가족을 돌보고, 미래를 준비하고, 건강을 챙기는 일은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이 삶의 필요를 넘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될 때입니다.

내 삶의 안전을 하느님께 두지 않고 재물과 소유에 두기 시작하면, 그것이 부족해 보이는 순간마다 걱정은 파도처럼 밀려옵니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새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상의 기준 앞에서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3. 아버지의 손을 잡은 아이의 평화

교우 여러분, 몇 해 전 어느 대형 마트에서 보았던 한 가족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젊은 부부와 대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장을 보고 있었습니다. 마트 카트에는 고기와 채소, 생필품,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까지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계산대에서 아버지가 지갑을 열고 카드를 꺼내는 순간, 그 아이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눈은 마트 천장에 매달린 풍선과 알록달록한 진열대에 가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아이는 지금 카트에 담긴 물건값이 얼마인지 걱정하지 않는구나. 아버지의 통장 잔고가 충분한지 계산하지 않는구나. 오늘 저녁에 먹을 것을 살 돈이 부족하지는 않을지 단 한순간도 염려하지 않는구나.’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아버지가 지금 곁에 있고, 자기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함께 있으면 필요한 것은 마련될 것이라고, 아이는 의심 없이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걱정에 눌리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나리꽃을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마태 6,26)

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마태 6,30)

하늘의 새들과 들풀까지 돌보시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녀인 우리를 어찌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의 숨결을 받아 생명을 얻은 존재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세상에 던져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부르시고 품어 주시는 자녀들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계시고, 우리 곁에는 보호자 성령께서 함께하십니다.

그 크신 사랑의 아버지를 곁에 모시고도 늘 불안해하고 근심에 사로잡혀 산다면, 우리는 마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있으면서도 계산대 앞에서 돈이 부족할까 봐 울상을 짓는 어린아이와도 같을 것입니다.

 

4. ‘오늘’이라는 하느님의 선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마태 6,34)

이 말씀은 삶을 대충 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미래를 준비하지 말라는 무책임한 방임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은 미래의 불안을 앞당겨 쓰느라, 정작 하느님께서 오늘 선물로 주신 하루를 근심으로 낭비하지 말라는 자애로운 당부입니다.

미래는 우리의 손안에 있지 않습니다. 미래는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신앙적인 일은 지금 눈앞에 주어진 하루를 성실히 사는 것입니다. 오늘 만나는 이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오늘 해야 할 일을 정직하게 해내며, 오늘 주어진 십자가를 주님과 함께 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 안에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마태 6,33)

우리가 재물과 소유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을 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을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식으로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오늘 하루 걱정과 불안이 밀려올 때마다 잠시 멈추어 보십시오. 깊이 숨을 고르고,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해 보십시오.

하늘 아버지, 제가 오늘도 당신의 자녀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걱정과 불안이 밀려올 때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오늘 하루를 당신 손에 온전히 맡겨드리게 하소서. 세상의 어떤 풍파 속에서도 우리를 품어 안으시고 길러 주시는 하느님의 자애로우신 눈길 안에서, 오늘 하루도 참된 자유와 하늘의 평화를 맛보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은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단호히 말씀하신다(24). 재물은 인간을 종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를 “마음의 노예가 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재물이 마음을 지배할 때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잃고자신도 모르게 세상의 노예가 된다.(De Civitate Dei, 10,13 요약따라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재물을 두려워하거나 섬기지 말고그것을 올바르게 관리할 줄 아는 주인이 되라고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하늘의 새와 들꽃을 예로 들어“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30)라고 말씀하신다자연은 하느님의 섭리와 사랑을 보여 주는 거울이다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를 이렇게 해석한다“자연의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선을 베푸시려는 신비로운 방법이다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마련하셨음을 믿는다면걱정할 필요가 없다.(Homiliae in Matthaeum, 62,1 요약하느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우리가 먼저 하늘의 가치와 의로움을 추구할 때필요한 것을 더해 주신다.(33)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33인간의 궁극적 선은 하느님과의 관계와 그분의 뜻을 실천하는 데 있다일상의 필요와 세상의 재물은 부차적이며하느님께 대한 신뢰 안에서 충분히 공급된다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영혼의 구원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 모든 인간 활동의 최상 목표이며물질적 필요는 이에 따라 자연스럽게 충족된다.(Summa Theologiae, II-II, q.188, a.2 요약)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34)라는 말씀은 불필요한 미래 걱정을 내려놓고현재 하느님께 의지하라는 초대이다마음이 하느님께 향할 때우리의 일상적 필요와 영적 필요 모두가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진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재물이나 걱정에 사로잡히지 않고하느님을 주인으로 삼고 세상의 재물은 종으로 삼는 삶이 신앙인의 삶이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우리 마음과 행동을 조율하라는 신학적·영성적 가르침이다재물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하늘의 보물과 의를 우선하며하느님 안에서 현재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참된 자유와 평화를 누리는 길이다우리가 매 순간재물을 주인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하느님을 주인으로 삼는 삶을 선택할 때모든 필요와 걱정은 자연스럽게 하느님의 손안에 맡겨지게 된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 6,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내일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삶은 언제나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라는
이 자리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도 하느님의 것이고,
내일도 하느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으로
오늘의 삶을 잃어버리지 말라고
초대하십니다.

내일을 염려하기보다
오늘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때,
내일에 대한 두려움은
신뢰와 희망으로 바뀝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지나온
수많은 날들도
우리의 힘만으로 살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하느님의 손길이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걱정은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을 소모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우리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오늘을 온전히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을 살아갈
힘과 은총을
주십니다.

내일에 대한 걱정을
내려놓는 것은
하느님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은총의 하루하루를
하느님의 선물로 여기며
감사로 살아가는
오늘 되십시오.

내일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하는
오늘입니다.

어떤 야구선수가 한 기자와 인터뷰했습니다. 이 선수는 오랜 시간 야구를 한 베테랑이었는데, 기자는 관중석에서 상대 팀 팬들이 야유를 많이 보내지 않냐면서 이때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면서 “전 그런 말을 듣지 않아요.”라고 말합니다. 기자는 그렇게 크게 울려 퍼지는 소리를 어떻게 듣지 않을 수 있냐면서 다시 그 비법을 물었습니다. 그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면 지는 겁니다.”

 

프로야구 선수에게는 승리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지는 방법이 아닌 이기는 방법만을 선택하려고 합니다. 힘든 훈련도 이기기 위한 것이고, 이기기 위해 때로는 미신과 같은 징크스를 만들어 실천하기도 합니다. 요즘 인기를 끄는 최강야구의 김성근 감독은 2만 개가 넘는 징크스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 역시 이기기 위해서입니다. 야유에 흔들린다면 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따라서 그런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이런 야유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놀리거나 험담의 말, 부정적인 말 등…. 과연 이 말을 듣고 흔들린다면 삶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이런 말을 듣고 마음에 새기는 사람은 늘 걱정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말에 흔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가다듬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도 끊임없이 자신을 흔들려는 말을 들으셨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버지의 뜻에만 집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기억하면서, 걱정하지 말고 하느님 뜻에 집중해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도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걱정을 너무 많이 하는 우리를 향해 하시는 따뜻한 말씀이었습니다. 걱정은 참으로 다양하게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걱정, 자기 명예에 대한 걱정, 무엇보다 세상에서 자기에게 주어지는 각종 말과 행동에 대한 걱정도 너무나 큽니다. 이런 걱정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자신 있게 살 수 없습니다. 이기는 삶이 아닌, 지는 삶입니다.

 

이기는 삶은 세상 것에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에 중심을 두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커다란 선물입니다. 주님께 중심을 두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 걱정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닌, 필요한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우리가 필요한 것을 모두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 뜻에 중심을 두는 삶입니다. 진정한 승리의 삶입니다.

 

오늘의 명언: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느 쪽을 향해 가고 있는가를 파악하는 일이다(올리버 웬들 홈스).

 

 

 

어제는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내일은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마태 5, 29-29)

시골에 살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과 마음으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때만 되면 그 끈질기고 왕성한 잡초들 사이로 여기저기 피어나는 청초하고 어여쁜 들꽃들이 있습니다. 나리꽃이며, 구철초며, 개망초며...

비싼 값의 씨앗을 따로 뿌리지도 않았습니다. 힘들게 허리 굽혀가며 모종을 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절기만 되면 약속이라도 한 듯이 화사한 얼굴을 드러냅니다.

셀수도 없이 많은 야생화들이 무리 지어 피어나지만, 가끔 걸음을 멈추어 딱 한 송이 들꽃만을 바라봅니다. 그 자태가 얼마나 예쁜지, 그 작은 얼굴이 오목조목 갖출 것 다 갖추고, 정말이지 신비스럽습니다.

우리 각자를 바라보는 하느님의 표정도 비슷하리라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들여다볼 때, 때로 한심하고, 정말 못 나 보이고, 때로 너무 비참하다는 생각에 고개를 흔들지만, 하느님 입장에서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다 비슷하고 다 거기서 거기 같지만, 하느님 시선으로 바라보실 때는, 우리 각자 한명 한명이 다 소중하고, 다 특별하며, 다 나름 사랑스럽습니다.

남은 날들에 대해서 너무 걱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좋으신 우리 주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다 섭리하시고 돌보아 주실 터인데, 미리 앞장서서 근심하고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매일 반복해야겠습니다. 어제는 주님 자비의 손길에 맡기고, 내일은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고, 오늘은 자비하신 주님의 충만한 현존 안에 편안히 머물러야 하겠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팬데믹이 시작되고, 뉴욕의 상황이 심각했을 때입니다. 한국에서 안부를 묻는 전화가 왔습니다. 다행히 저는 큰 어려움 없이 팬데믹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 텍사스에 토네이도와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비바람이 있었습니다. 뉴스를 접한 분들로부터 안부를 묻는 전화가 있었습니다. 텍사스가 워낙 큰 지역이기에 제가 속한 동네는 큰 피해는 없었지만, 천둥과 벼락을 동반한 강풍으로 ‘전기’가 나갔습니다. 전기가 있을 때는 그 고마움을 몰랐습니다. 전기가 없으니 답답한 것이 많았습니다. 서랍을 열어보니 초가 있어서 급한 대로 불을 밝혔습니다. 다행히 전기는 3시간 있다가 복구되었습니다. 전기는 늘 우리 곁에 있어서 우리가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공기와 같습니다. 전기가 없으면 우리의 생활에도 큰 불편함이 있을 겁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올림포스의 불덩이를 훔쳐다 인류에게 전해주었고, 그 불로 인해 인류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신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기만큼 현대의 인류 문명을 만들어 낸 에너지도 없을 것입니다.

 

전기 없는 시간을 보내면서 나의 삶에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먼저 하느님의 뜻을 찾으십시오. 그러면 모든 걸 아시는 하느님께서 채워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먹고 입는 것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가족을 이루고,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먼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하늘을 나는 새도, 들의 꽃도 다 먹이고 입히시는 분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기 때문에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많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어린아이가 소의 고삐에 달린 줄을 잡고 걸으면 커다란 소는 아무런 저항 없이, 어린아이 뒤를 따라가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으면 재물, 권력, 업적은 마치 소가 어린아이를 따라가듯이 주어질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하느님의 뜻은 찾지 않고 먼저 재물, 권력, 업적만을 쫓기에 재물이라는 램프 안에, 권력이라는 램프 안에, 업적이라는 램프 안에 갇혀 사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의 3가지 질문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습니다. 3가지 소원은 아니지만 3가지 질문에 충실한 사람은 3가지 소원이 아니라, 원하는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언제인가? 나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에게 가장 중요하게 할 일은 무엇인가?’를 성찰하는 것입니다. 톨스토이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며,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고,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만나는 이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1997년 8월과 9월에 두 분의 여성이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한 분은 시골의 소녀에서 영국 황태자의 아내가 되었던 ‘다이애나 황태자 비’였습니다. 다른 한 분은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평생을 가난한 이들의 친구가 되어 주었던 ‘마더 테레사 수녀님’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마더 테레사는 더욱 많은 사람에게 위로를 주고,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이애나 황태자비를 기억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외모, 막강한 권력, 엄청난 재물을 지녔던 분은 점차 기억에서 사라져 갑니다. 주름진 얼굴, 가난한 삶, 겸손한 마음을 지녔던 분은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있습니다.

 

인생은 늘 밝고 맑은 날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인생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련의 때에는 그것을 디딤돌로 삼아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것입니다. 힘이 있을 때는 그 힘을 더불어 사는 이웃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한 마음, 한 몸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이 땅은 곧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이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열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인은 바로 그런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걱정하는 사람>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마태 6,25)


먹을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모자랄지언정


먹일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먹을 것이
차고 넘치지요


가질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가진 것이
모자랄지언정


나눌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가진 것이
차고 넘치지요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이룬 것이
모자랄지언정


살릴
걱정하는
사람에게는


이룬 것이
참고 넘치지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 무엇을 마실까?’,‘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요한 복음 6장27절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리고 바로 이어서 제자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수많은 인간적인 근심 중에 살아갑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자비 지극하신 분이십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 복음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시간을 가져봅시다. 먼저 예수님의 거룩한 말씀을 들어보지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느님과 세상을 함께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에 열심한 사람은 여러 걱정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현재 삶의 모습을 보고 비유가 아닌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십니다.


먼저 예수님의 말씀대로 우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그리고 어떤 옷을 입을까 매일 걱정하지요. 이어서 자기 수명에 대해서 많은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의 시대에도 이러한 걱정을 하는 이들이 많기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걱정을 하는 이들은 다른 민족들이 하는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즉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하는 걱정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슬퍼하며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이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이 하는 말과 행동을 하니 말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걱정이 많으십니까. 사실 저도 걱정을 많이 합니다. 일본에서 사목자로서 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그런데요. 현재를 기준으로 과거를 보면 걱정했던 것이 나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은총으로 인해 걱정이 해소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배고플 때 먹었고 옷이 없을 때 입혀 주셨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예전에 비해 많은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책임감이 강하시고 자녀들을 입히시고 먹여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걱정하지 맙시다. 설령 누군가 아프더라도 걱정하지 맙시다. 또 마음에 병이 생겨도 걱정하지 맙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우리가 주님께 의지하면 모든것이 해결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내일 점심은 무엇을 먹지? 걱정이네!!!! 아멘!

 

 

 

김준수 신부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6, 32~34)


제가 저 자신을 바라볼 때 세상에서 참 좋은 몫을 택했다고 봅니다. 사실이지 제게 무슨 심각한 세상적인 걱정이 있겠습니까? 흔한 말로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에 걱정이 없으며, 명퇴나 정년퇴임이 없는 종신 직장에다 보험도 든든하고 노후 걱정도 없으니, 자식 걱정이나 부모님들도 이미 돌아가셨으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제 팔자가 정말이지 상팔자인데 왜 세상 사람들은 저와 같은 신분(=수도자)으로 살려고 하지 않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네요. 아마도 제가 모르는 그 무슨 비밀을 세상 사람들은 알고 계시듯 싶습니다. 도대체 아무도 가르쳐 주시지 않는군요!

어느 종교를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없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저마다 각기 다른 걱정과 근심을 지닌 채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의 인생살이란 과거에 대한 후회와,  현재에 대한 근심과 걱정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살아간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후회와 근심과 걱정 그리고 불안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뻔히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려드는 게 인생이고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대한 압박일지 모르겠습니다. 저도 가정이 있고 가족이 있다면 저인들 별도리가 있을 수 없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아니 훨씬 더 무거운 근심과 걱정에 휩싸여 살아가리라 봅니다.

성서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든 아니면 지나쳐 버리든 각자의 선택이고,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자신의 몫이라고 봅니다. 암튼 걱정에 관한 오늘 복음의 가르침은 한 문장으로,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6,27)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걱정이란 말은 본디 근심한다, 염려한다, 관심을 가진다고 하는 뜻입니다. 걱정은 근심이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에 관해서 수많은 한계를 지닌 존재입니다. 가장 극단적인 것은 죽음이잖아요. 뻔히 죽을 것 알면서 그 죽음에서 어떤 누구도 자유롭지 못하다, 는 한계 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적 한계 현실입니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근심과 불안이 생겨날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이를 수용하고, 수용하지 않으냐에 따라 인생관과 인생에 대처하는 삶의 태도가 결정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걱정하며 살아가는 걸까요? 주님은 이렇게 처방전을 줍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 오늘 피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들꽃도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야 얼마나 더 잘 입히시겠느냐? 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이방인들이 찾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신다.”(6,30-32)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걱정은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적기 때문에 생긴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믿음이 약하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결국 하느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이 하느님 언약의 말씀을 믿지 못할 때 믿음이 없는 사람이 되며 그런 사람의 마음속에 근심 걱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약속을 붙들고 싸우는 것입니다. 약속을 믿는 만큼, 의탁하는 만큼 자유의 폭은 정비례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때론 예기치 않은 시련이나 환난 그리고 고통을 당하더라도 담대한 이유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에 의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신실하시며 언제나 자기의 영광을 위해 반드시 그 말씀대로 이루시기 때문에 말씀을 믿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서도,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하더라도 두려움이 없는 것입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말라!” 또한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는 신앙은 약한 믿음입니다. 인간의 걱정은 하느님의 능력을 의심하면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능력을 믿는다면 우리의 모든 염려에 대하여 하느님께 맡기고 하느님을 의탁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걱정에 대한 성서적인 해답은 그 걱정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베드로 사도는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베1서 5,7) 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잘 알고 계시며 걱정을 알아서 해결해 주신다고 했으니, 결론은 오직 한 가지뿐입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6,33)라는 말씀을 믿고 살아야 합니다. 이 가르침은 매일 그리고 생애를 거쳐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삶의 원칙이며 명제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명심하고 최우선적인 삶의 가치로 살아갈 때, 우리의 필요를 아시는 하느님으로부터 “다른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6,33) 그러니까 하느님의 모든 축복의 비밀은 이 짧은 말씀에 온전히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며 목표입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대의 일이 그대의 목적과 늘 일치하기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흔히 사용하는 목적이란 영어 purpose는 의도하다, 는 propose(=pro+pose; 앞에 두는 것)에서 파생한 단어라고 합니다. 우리의 매일의 의도하는 일이 항상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과 일치해서 살아간다면 매일의 삶이 분명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으로 넘쳐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 목적을 위해 부르심 받았기에, 이 목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명이며 축복받은 삶입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라고 하신 당신 말씀처럼 당신의 섭리에 맡기고, 다만 오늘 이 순간 제 삶의 자리에서 살아야 할 이유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 지를 자각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소서. 아멘.”

 

 

 

『모두 함께, 걱정을 서로 나누어야 합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1)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하느님만 사랑하고, 하느님만 섬겨라.” 라는 명령입니다.

재물을 사랑하면서도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말은 거짓말입니다.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아닌 것들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만 사랑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다하여”, 즉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마태 22,37)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이 끼어들 수가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권고를,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라는 말씀에 대한 설명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1티모 6,7-10).”

“현세에서 부자로 사는 이들에게는 오만해지지 말라고 지시하십시오. 또 안전하지 못한 재물에 희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시어 그것을 누리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희망을 두라고 지시하십시오. 좋은 일을 하고 선행으로 부유해지고, 아낌없이 베풀고 기꺼이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십시오. 그들은 이렇게 자기 미래를 위하여 훌륭한 기초가 되는 보물을 쌓아, 참생명을 차지하는 것입니다(1티모 6,17-19).”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라는 말은, 이천 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진리’입니다.>

 

2)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이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에 대해서, “만일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함부로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이라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런 상황은 ‘먹을 것이 있는 사람들’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또는 공동체에게 맡겨진 과제입니다.>

믿음이 부족하니까 걱정하는 것이라고 야단치기 전에 먼저 먹을 것부터 주는 것이 옳습니다.

하느님의 섭리와 자비에 대한 믿음을 가지라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금방 믿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먹을 것을 나누어 먹는 ‘나눔’을 실천하는 사랑에서 믿음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말만 하고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 사랑도 ‘죽은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도 같은 권고를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내가’ 실천하는 사랑을 통해서 실현됩니다.>

 

3)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하신 말씀에(마태 10,9-11) 연결됩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빈손’으로 떠났는데, 그들을 맞아들여서 숙식을 제공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먹을 것을 하늘에서 직접 내려 주신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그 일에 대해서 사도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고 물으셨을 때, 사도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걱정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각 개인의 인생살이에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이 말씀을, “하느님께서 먹여 주시니까 일하지 않아도 된다.”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지시하고 권고합니다. 묵묵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벌어먹도록 하십시오(2테살 3,10.12).”>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길일까? 

어떻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24)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주장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 숭배요,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가, 아니면, 다른 피조물,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에 속하며, 자기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르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 이는 당연히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이신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성취나 자신의 편리나 이기, 자신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찾기’를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곧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혹 내가 지금 물질이나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다면,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있음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자신의 입을 것이나 먹을 것 등 자신의 처지나 형편만을 탓하고 걱정하고 있다면,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믿고 따르며 섬겨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

 

주님!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재물을 섬기느라, 저 자신을 섬기느라, 주인이신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가 아니라 당신이 재물의 주인이요, 저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질 것이 아니라 진정 있는 것, 이미 선물로 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아멘.

 

 

 

심흥보 베드로 신부님

언젠가 한 번 국제도서전시회에 간적이 있었습니다. 전시회에서 이 책 저 책 보고 있었는데, 어떤 분이 와서 자기 출판사에서 만든 도서목록을 건네주셨습니다. 제가 "무거워서 들고 다니기가..." 했더니, 그분께서 제게 "열심히 만들었거든요!"하셨습니다. 열심히 했다고 해서 남들이 다 받아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 정성이 갸륵해 받아 들고 나왔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그분의 말은, 제게, 자신의 노력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마치 자기 자신을 선사하는 듯한, 진실함을 표현하는 말마디로 들렸습니다. 부러웠고 고마웠습니다. 그분이 지금도 행복하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1-34)

오늘 우리가 먹고 살며 하는 모든 일이, 비록 내 일고 어디 드러낼만한 일이 아니더라도, 나만의 일이 아니라, 이 사회에 선과 성숙에 기여하는 것이기를, 그리고 주님의 뜻을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한치라도 이루는 데 기여하는 것이기를 간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가 기쁘고 행복한 것처럼, 우리의 일상과 작은 일들 하나하나가, 주님께 봉헌하는 선물이 되기를 빌면서, 행복하게 살아갑니다.

 

 

 

모든 것을 바로 알면 근심 걱정에서 벗어난다. <마태 6, 24-34> 6월 22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모든 병은 근심 걱정으로 생기고 사람의 몸은 이런저런 병에 걸려서 고통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삶의 근본은 만족을 기대하며 살면 지나친 욕심이나 욕망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밤과 낮을 자연에 의탁하여 밤이면 밤, 낮이면 낮으로 적응해서 살게 됩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것이지 빨리 가거나 늦게 가도록 할 수 없습니다. 시곗바늘을 돌린다고 4시가 5시로 되지 않습니다. 시간을 다스리는 사람도 없고 계절을 다스리는 사람도 없습니다. 기차가 철로 위를 달리며 갈 수 있으나 철로를 벗어나면 달릴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 하늘에서 정해놓은 길을 따라 살아야지 진실을 벗어나고 뜻을 거슬러 산다면 더 큰 근심에 싸이게 됩니다.

저는 수도회의 규칙 속에 살다 보니 자유를 만끽하고 순리대로 살고 있습니다. 가야 할 길을 가고 해야 할 일을 하며 지나치지 않고 낮은 자세로 온유하게 사는 것이 걱정을 없애줍니다.

앞서가려고 하지 말고 뛰지 않고 서둘지 않으며 하느님 뜻을 따라 살고 있으니 걱정 없이 평화와 기쁨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불쑥 어떤 걱정거리가 생겨도 무덤에 들어가 있는 후배와 선배를 생각하며 그들이 살던 것처럼 살고 어떤 걱정도 사라집니다. 죽음은 세상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세상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희망을 주고 희망은 사랑을 살게 합니다. 믿음은 죽음까지도 받아들입니다. 부활의 희망을 품게 하고 부활은 영원한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존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고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인 것을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은 그림자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주님 안에 있고, 우리의 바람도 주님 안에 있으며, 주님의 사랑 안에 산다는 것보다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운 것은 없습니다.

오늘 모든 근심 걱정 주님 안에 맡기고 모두 행복한 시간 보내기를 기도합니다.\

 

 

 

첫 단추

     박재형 미카엘 신부님
첫 단추를 잘 끼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고, 이를 따를 때 나머지도 잘 진행된다는 의미이지요. 달리 표현하면, 우선순위를 잘 알아야 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첫 단추”를 분명히 알려주십니다. 바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지요. 그리고 이를 먼저 찾을 때, 다른 모든 것들까지도 곁들여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나라란 물리적인 영토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상태를 말하고, 그분의 의로움이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의 뜻을 찾는 것이 “첫 단추”여야 한다고 강조하신 것이지요. 간혹 우리 삶이 뒤죽박죽되었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 사이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었을 때 그런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질서가 깨져서 혼돈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지요. 그럴 때마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의식하고 그분 뜻이 무엇인지 겸손하게 여쭙는 “첫 단추”를 다시 잘 끼울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이끌어가시도록, 그분께 첫 자리를 내어드리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 6,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오늘과 내일의
하느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소중한 오늘
이 순간을

감사롭게
즐기며
걸어갑니다.

아직 오지 않은
내일과 다투지
않습니다.

내일을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오늘은
늘 오늘로
더 소중하고
더 귀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오늘이며
내일입니다.

하느님 없는
오늘과 내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소중한 목숨을
입혀주시고
먹여주시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걱정은
버리지 못하는
의심에
더 가깝습니다.

이것저것을
모두
기웃거려 보지만
남는 것은 우리의
근심과 걱정뿐입니다.

오늘은 이겨야 할
상대가 아니라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선물의 시간입니다.

오늘은 오늘을
살아가는
투명해지는
감사의 길이
있습니다.

감사가
무너진 자리에
감사를
다시 쌓으시는
들풀의
하느님이시며
나리꽃의
하느님이십니다.

더 귀한 것을
알기에
먼저 찾아야 할
오늘의
하느님 나라이며
오늘의 의로움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나머지는
하느님께서
채워주십니다.

제 무릎에는 커다란 상처 자국이 하나 남아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서 생긴 상처인데, 넘어졌을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어이가 없습니다.

동창 신부와 자전거를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가 앞서가고 있었는데, 돌부리 위를 휙 지나가는 것입니다. 저 역시 동창 신부처럼 휙 지나가려고 했는데, 순간적으로 겁이 났습니다.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결과는 예측대로 이곳에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걸려 넘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겁이 나서 손으로 브레이크 레버를 확 잡았을 때 미끄러진 것입니다. 자전거에 제 몸을 온전히 맡기지 못했습니다. 자전거를 믿지 못해서 작은 돌부리에도 겁을 낸 것이었습니다.

인생이라는 삶 안에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두려움 속에 살게 됩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함께하시는데도 주님은 보지 않고 작은 돌부리와 같은 장애물만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믿음의 눈으로 주님께 시선을 떼지 말아야 합니다. 나를 넘어지게 하는 쓸데없는 두려움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서 “걱정하지 마라.”라고 강조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이는 단순히 무심함이나 무관심해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모든 근심 걱정에서 해방해 주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 걱정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늘의 새들과 들에 핀 나리꽃들을 예를 드시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알아서 해결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의 의로움을 떠올리면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사람은 굳은 믿음을 통해 걱정하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만을 바라보면서 삶의 방향을 정확하게 알기 때문입니다.

여전히 많은 걱정과 두려움 속에서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걱정하고 두려움을 간직하고 있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더 힘든 시간의 연속성 안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걱정과 두려움은 하느님 나라를 바라볼 때 별것 아님을 깨닫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데 더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 노력을 통해 조금씩 하느님을 보고 하느님 나라에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걱정과 두려움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세상의 가면을 벗기고 모든 것에서 하느님을 드러낸다(샤를 드 푸코).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근심 걱정이 참 많았던 젊은 시절, 피가 마르고 살아 마르고 그래서 지금보다 몸무게가 20킬로그램은 덜 나가던 시절, 제 마음속에는 언제나 강력한 희망 사항이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잔잔한 호수 같은 마음의 평화,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고요함...

 

나이가 좀 더 많이 들면 괜찮아지겠지, 세월이 좀 더 필요하겠지, 하고 기다렸지만, 그게 나이 먹는다고 자동으로 바뀌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전히 다양한 근심 걱정, 특히 전혀 신경쓰지 않아도 될 의미 없는 근심 걱정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습니다.

 

“근심 걱정은 목숨이 일곱 개라는 고양이도 죽게 만든다.”는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돌아보니 현대인들은 걱정이 필수인 사회에서 참으로 많은 걱정의 파도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느긋하기로 유명한 티벳 사람들은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진다면 걱정이 없겠네.”

 

갖은 걱정 속에 속전속결로 늙어가고 있는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조언도 명심해서 들어야겠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오 복음 6장 27절, 34절)

 

걱정 때문에 잔뜩 얼굴 찌푸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심리학자 어니 젤린스키는 이런 위로의 말씀을 던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걱정의 40%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그 걱정의 30%는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걱정거리의 22%는 일어나도 별 볼일 없는 사소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걱정의 4%는 우리의 영역 밖의 일입니다. 결국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걱정거리는 전체 걱정의 4% 뿐입니다.”

 

수도자 초년병 시절 저 역시 갖은 걱정거리로 온 몸을 칭칭 감은 채 살아갔습니다. 참으로 걱정이 많았습니다. 내가 과연 수도생활 잘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 동료 수도자가 혹시라도 나를 힘든 존재로 여기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 수도원에서 쫓겨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남겨두고 온 가족들은 어떻게 지내나 걱정, 앞으로 밟아나가야 할 수많은 단계에 대한 걱정...그러다보니 몸과 마음의 병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게 하루는 선교사 할아버지 신부님께서 한 가지 조언을 주셨는데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한국에 오래 사셨어도 한국 말씀이 많이 서투셨던 신부님께서는 큰 목소리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걱정? 왜 걱정? 아무 걱정 말고 주님께 모두 맡겨!”

 

갖은 스트레스와 근심걱정꺼리를 이고 지고 살아가는 이웃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는 위로의 천사로 다가서야겠습니다. 그리고 크게 외쳐야겠습니다.

“제발 그 무거운 짐들 좀 내려놓고 살아가십시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즉시 모든 근심 걱정을 하느님께 맡겨드리십시오. 걱정 대신 기도하십시오. 근심 대신 찬양하십시오. 걱정하기보다 일상 안의 소소한 기쁨을 찾고 만끽하십시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한국과 미국의 문화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기부와 상속에 있어서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미국의 부자들은 ‘기부’에 인색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명예와 부를 얻었지만 그것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기 때문입니다. 미국 유수의 대학들은 대부분 부자들의 기부에 의해서 설립되었고, 운영되고 있습니다. 엄청난 부를 이루었던 록펠러는 50이 넘으면서 회복될 수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가족들과 지인들은 록펠러에게 이왕 죽게 된다면 이웃에게 나누면서 죽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록펠러는 자신의 재산을 이웃에게 나누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록펠러는 나누면서 건강을 회복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건강해진 록펠러는 그 뒤로 40년을 더 살았고 97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비단 록펠러뿐만 아니라 미국의 부자들은 학교, 도서관, 공연장, 미술관 등의 설립에 엄청난 기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기부문화는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미국 문화의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부자들도 요즘은 이런 기부문화에 동참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상속에 대해서도 미국은 한국과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부모도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줄 생각을 많이 하지 않습니다. 잘 키워주고 독립할 수 있도록 해 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들도 부모의 재산에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독립하면 스스로 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보와 자식이 재산으로 묶이는 것이 아니라 존경과 사랑으로 묶이는 것입니다. 제가 만나본 이민 2세대들도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부모님의 재산은 부모님의 것이니 부모님이 알아서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재산을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자식에게는 세상을 살아갈 지혜를 물려주는 것이 더 좋을 것입니다. 상속 때문에 형제들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상속 때문에 형제들이 갈등과 불화가 생기는 것도 보았습니다. 부모의 재산은 전적으로 부모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으로 기부를 한다면 그것도 부모의 선택입니다. 그것으로 여행을 다닌다면 그것도 부모의 선택입니다.

 

다행히도 저의 부모님은 세상의 재물은 물려주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형제들이 상속 때문에 머리 아플 일도 없었습니다. 감사드릴 일입니다. 그러나 부모님께서는 다른 것을 물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신앙’입니다. 부모님께서는 기도로서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생전에 많은 대자와 대녀를 두셨습니다. 대부와 대모로서 신앙인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자식들에게 신앙을 물려줄 수 있다면 그것보다 더 값진 상속은 없을 것입니다. 부모님 모두 건강하게 사시다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선종하였습니다.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식들에게 부모의 신앙이 전해지지 않는 것입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성공해야 한다는 이유로 신앙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릇은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 쓰레기를 담으면 쓰레기통이 될 것입니다. 보석을 담으면 보석함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도 그릇과 같습니다. 무엇을 담아야하는지 늘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가 담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무엇을 걱정하시나요?>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무엇을 먹을까?”
걱정하겠지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무엇을 먹일까?”
걱정한답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어떻게 가질까?”
걱정하겠지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어떻게 베풀까?”
걱정한답니다


재물을 섬기는 사람은
“누구에게 기댈까?”
걱정하겠지요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은
“누구를 품을까?”
걱정한답니다

 

 

 

세상 걱정과 하느님의 나라

     윤병훈 베드로 신부님

세상 걱정은 끝이 없다. 걱정한다고 안 되는 것도 되는 것도 없다. 삶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다르지 않게 연장일 뿐아다. 중요한 것은 오늘을 충실히 사는 일이다.

 

오늘은 이렇게 계산한다. 하루를 마치고 돌아와 휴식과 잠을 청한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나 살고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잠을 청한다. 이것이 오늘이고 하루이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오늘과 하루를 살며 세상 걱정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일이다. 나도 숨어계신 하느님을 끊임없이 찾지만, 하느님께서도 나를 제대로 살게 하시려고 찾으신다. 우리 안에 들어 오시려고 밖에서 서성이신다. 하느님께서 내 안에 들어오시도록 나는 문을 열어드려야 한다. 이 일을 충실히 하면 모든 것을 곁들여 받게 된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6,34) 그날이 오늘이다. 오늘은 예수님의 삶, 즉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충실히 살면 된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이용현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예전에 어느 냉담하는 형제와 면담을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 형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는 것이 많이 힘드시지요,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하시고 하느님 안에 더 힘 얻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러자 그 형제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글쎄요. 지금은 제 코가 석자라 성당에 나가기가 그렇습니다. 좀 여유가 생기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그 이야기를 듣고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형제의 입장에서 정말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며칠 후 당황스러운 것은 며칠 지나니 SNS에는 그 형제 가족들 모두가 호화스러운 팬션에 놀러간 사진이 올라가 있었습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가장 큰 유혹이 상황이 좋아지면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돈이 생기면, 힘이 생기면, 여유가 생기면,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가 소유하는 모든 것들도 하느님께서 허락하실 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 순서를 망각하고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을 추구할 때 우리는 점점 하느님과는 멀어지고 그러한 욕심의 노예가 되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구할 때 그 모든 것은 곁들여 받게 된다는 말씀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송진욱 도미니코 신부님

걱정과 믿음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이 말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는 걱정이 없습니다.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재물을 주시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진리를 알고 있지만 우리들은 그럼에도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필요한 것은 단 하나 그분이 우리들을 지켜주고 먹여주고 입혀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여기에서 우리들이 봐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먹는 것, 입을 것” , “몸, 목숨”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것과 하느님의 것을 구분하십니다.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몸과 목숨 즉 하느님의 창조물인 우리들 자신임을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는 창조자로서 우리들을 잊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걱정을 하는 이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예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우리들은 뿌리고 거두어들이고 모아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먹여주시고 돌봐주심을 믿지 않는 우리들을 발견합니다. 세상에 대한 걱정이 너무 커서 스스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를 청하기 전에 아버지로서의 하느님을 먼저 찾고 그 분의 의를 생각하여 그분의 자녀답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사실 저도 걱정을 많이 합니다. 인간으로 걱정을 안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걱정이라는 구덩이에 빠져버린다면 길을 잃게 마련인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복음에서처럼 생명을 연장할 수 있을까요? 스스로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인 우리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아버지로서 하느님께서 우리들을 먹여 살리신다는 믿음인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내일의 걱정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내일의 일은 하느님께서 미리 준비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걱정과 믿음은 함께 갈 수 없다고 초반에 말하였습니다.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걱정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맙시다. 오늘 하루도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위해 준비를 하셨다는 것을 믿고 그 믿음을 통해서 기쁜 하루를 지내면 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아멘!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觀想的 삶. -섬겨라, 보라, 믿어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라틴어 짧은 세 격언을 기억할 것입니다. 

1.메멘토 모리(memento mori); 내 죽음을 기억하라.

2.아모르 파티(amor fati): 내 운명을 사랑하라.

3.카르페 디엠(carpe diem); 내 현재를 잡아라.

 

내 죽음을 기억하면, 내 운명을 사랑하게 되고, 내 현재를 잡고 본질적 깊이의 참 절박한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 철저할 때 저절로 깨달아 살게 하는 진리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은 삶의 목표이자 방향이요, 삶의 중심이자 의미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의 근원적 불행은 하느님을 잊음에서 기인합니다. 최근 썼던 두편의 짧은 고백입니다.

 

-“갈곳이 없다

 가고 싶은 곳이 없다

 

 만나뵐 분이

 만나고 싶은 분이 없다

 

 오늘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만나는

 주님이시다”-2022.6.12

 

-“외로움도

 그리움도

 기다림도 없다네

 

 늘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만나는

 함께 하는

 주님이시기에”-2022.6.16

 

이런 글은 제 소망所望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한결같이 오늘 지금 여기서 만나는 주님과의 관계를 중시한 고백들입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 대해 참 좋은 가르침을 줍니다.

 

첫째, “섬겨라!”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섬기는 것입니다. ‘섬긴다’는 우리 말이 참 좋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삶의 중심이 둘 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재물,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정말 힘든 것은 중심이 둘일 때 마음이 갈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를 택하여 우선순위를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복음 말씀이 분명합니다.

 

“아무도 주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불행의 근원은 하느님이 아닌 세상 우상이, 재물이, 돈이 삶의 중심이 될 때 시작됩니다. 열왕기 하권의 제1독서가 오늘 갑자기 역대기 하권으로 바뀌니 어제의 독서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악순환의 반복같습니다. 조선시대 사화士禍의 모습이 오늘의 정치 현실에서도 양상만 달리하듯 그대로 반복되듯 말입니다.

 

여호야다 사제의 개혁으로 맑게 갠 날씨 분위기가 오늘은 폭풍우 치는 험한 날씨로 변했습니다. 배은망덕하게도 요아스 임금이 유다 대신들의 꾐에 빠져 주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의 집을 저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다른 우상들을 섬깁니다. 주님은 예언자들을 보냈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마침내 요아스 임금은 즈카르야의 아버지 여호야다가 자기에게 바친 충성을 기억하지 않고, 충언하던 그의 아들 예언자 즈카르야를 죽입니다. 이로 인해 그의 신하들이 모반을 일으켜 요아스 임금을 침상에서 살해합니다. 사람들은 그를 다윗성에 묻기는 하였지만, 임금들의 무덤에는 묻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하느님 중심을 떠난 자업자득의 업보입니다. 삶의 중심인 하느님을 망각할 때, 그 중심 자리에 하느님 대신 어김없이 자리 잡는 우상이나 세상 것들을 섬길 때 여지없이 반복되는 악순환의 역사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한결같이 섬기는 일이 얼마나 본질적인 일인지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영성이 있다면 ‘종servant과 섬김service’의 영성이 있을 뿐이요, 직무와 권위가 있다면 단 하나 섬김의 직무와 섬김의 권위가 있을 뿐입니다. 새삼 우리 믿는 이들의 본질적 업종은 ‘서비스업’임을 깨닫게 됩니다.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섬기듯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성 베네딕도 역시 그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로 정의합니다.

 

둘째, “보라!”입니다.

경청의 들음도 중요하지만 있는 그대로의 실재를 직시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감사도 행복도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에서 발견의 기쁨, 발견의 새로움, 발견의 놀라움입니다. 참으로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발견할 때 저절로 놀랍고 새롭고 좋습니다. 그대로 관상의 삶입니다. 예수님 역시 볼 것을 강조하십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느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 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못하였다. 오늘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예수님의 자연성서 렉시오 디비나 묵상이 정말 깊고 참신합니다. 인간의 불행은 자연에서 떠난 결과요 이런 관상적 눈의 상실에서 기인합니다. 감사와 감동, 감탄을 잃어버려 많은 영혼들이 병든 세상입니다. 그리하여 눈만 열리면 신비롭고, 놀랍고, 새로운 기적들로 가득한 세상인데 이 걸 못보고 지내는 것입니다. 새처럼, 꽃처럼 자유롭고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 예수님이요, 예언자이자 신비가이요, 관상가이자 시인인 예수님입니다. 관상적 차원이 너무나 결핍된 오늘날의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셋째, “믿어라!”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철석같이 믿는 것이요 걱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 부재를 드러내는 걱정과 두려움, 불안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천둥같은 가르침이자 깨우침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기도와 사랑뿐 아니라 믿음 역시 초보자인 우리임을 깨닫습니다.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입니다. 평생 믿음을 배워가면서 주님과 깊어지는 우정의 사랑입니다. 참으로 탓할 것은 우리의 부족한 믿음이요 청할 것은 단하나 좋은 믿음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십시오. 하느님 중심의 관상적 삶을 늘 새로이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필요한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입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입니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과 함께 하늘 나라를 살라는 말씀입니다. 토니 드 멜로 신부는 말합니다. 

 

“당신은 지금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행복은 발견이자 선택입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발견하고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이렇게 오늘 행복을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행복할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주님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늘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행복을 살도록 도와주십니다. 아멘.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함승수 신부님

살기 위해 먹는 것과 먹기 위해 사는 것중 어느 쪽이 더 행복한 삶일까요? 그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먹는건 맛있는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무미건조하게 사는거 같아 썩 내키지 않습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는데 다른 것들에 치여 정작 먹는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억울한 기분이 들겠지요. 그렇다고 먹기 위해 사는 것은 내가 참된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또 내키지 않습니다. 인간이라면 삶의 고귀한 목표를 세우고 달성하여 자아를 실현해야 제대로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드니까요. 한편, 이런 질문도 있습니다. 옷에 몸을 맞추는 것과 몸에 옷을 맞추는 것 중 어느 쪽이 나 자신에게 더 바람직한 일일까요? 옷에 몸을 맞추자니 내가 옷보다 못한 존재가 된 것 같아 기분이 나쁘고, 몸에 옷을 맞추자니 예쁘고 멋진 옷들을 입는건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아 또 속이 상합니다. 선택과 집중, 포기와 비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면 살면서 만나게 되는 이런 수많은 ‘딜레마’들 때문에 고민하고 걱정하며 눈치보고 스트레스 받느라 삶의 기쁨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과 하느님 사이에, 물질적이고 유한한 것들과 영적이고 영원한 것들 사이에 양다리를 걸치고 어정쩡하게 서 있지 말라고 하십니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나아가는 양자 모두에 다리를 걸치고 있다가는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 가랑이가 찢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원하는 모든걸 다 선택하여 가질 수 없기에, 우리 삶엔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는 포기해야 하는 ‘기회비용’이란게 어김없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선택의 기로마다 나에게 더 이롭고 유익한 것들을 지혜롭게 잘 택하고, 나머지 하나는 과감하게 포기할 줄 알아야 하는 겁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을 택한다면 당장의 삶은 조금 윤택해질지 모르나 하느님과의 관계에 소홀해져 슬픔과 후회 속에 영원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 뜻에 맞는 영적이고 고귀한 가치들을 택한다면 영원토록 참된 행복을 누리리라는 희망 덕에 지금부터 마음 든든하고 기쁘겠지만 당장의 궁핍과 괴로움, 내일을 장담할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을 견뎌내야 하는 어려운 숙제가 주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양자택일이란 참으로 어려운 것이지요.

 

주님은 그런 우리에게 분명한 선택의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노력하면 가질 수 있는 음식보다는 하느님께서 주셔야만 누릴 수 있는 목숨이라는 선물이 더 중요하고, 원하면 얼마든 내맘대로 맞출 수 있는 옷보다는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대로 흘러가는 몸이 더 소중하다는 겁니다. 선택의 여지를 내가 쥐고 있겠다고 고집부리지 않고 하느님 손에 맡겨드린 후 따라가면 그 어렵던 문제들이 단순해지고 명확해지는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 신앙인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자 혜택입니다. 유명한 음식점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우리 목숨이 연장되지 않습니다. 비싸고 화려한 명품 옷을 걸친다고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름다워지고 고귀해지는게 아닙니다. 내 목숨줄을 쥐고 계신 분이 누구인지, 나를 아름답고 귀한 존재로 만들어주시는 분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알고 따라야만 그럴 수 있겠지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이는 그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자기가 다 끌어안고 삽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입니다. 믿고 따르며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는 주님 손에 맡겨드리면 그뿐입니다. 아무리 걱정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에 매이면 걱정거리만 더 커집니다. “야훼 이레” 우리 삶에 정말 중요하고 꼭 필요한 것들은 굳이 걱정하지 않아도 하느님께서 알아서 당신 손으로 다 마련해 주십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다. <마태 6, 24-34> 6월 18일

     이석진 그레고리오 신부님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주님은 그 안에 있는 것을 주님의 자비로 모든 생명에게 지혜롭게 나누어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하신 말씀은 세상의 것을 버리고 주님만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라, 모든 것은 주님 안에 있고 주님의 것이니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며 이루어지도록 살아야 세상의 질서가 바로 서고 주님의 영원한 자비가 각 생명의 필요에 따라 사용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하셨습니다.

어떤 이가 대기업에 취업이 되어 기업 발전을 위해 일하면 그 기업의 발전과 운영과 연관되어 필요한 것을 받고 생활하게 됩니다. 그런데 만일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욕심을 찾으면 기업도 망하고 자기도 일자리를 잃게 됩니다.

얼마 전 은행의 자금 책임자가 고객의 예금액을 600억이나 횡령해서 자기 돈처럼 외국에 땅도 사고 다른 곳에 투자도 하다가 감사에 걸려 곤욕을 치르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맡겨진 것을 잘 관리만 하면 안전하게 살 것인데 교도소에 들어가고 온갖 곤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주님은 삶에 필요한 것은 걱정하지 말고 구하고 청하고 두드리는 사람에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하느님은 청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제때 주신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원해주실 때 길을 떠나 많은 난관을 만났을 때 물로 가로막은 홍해에 길을 내주시고,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을 때 만나와 메추리를 보내주시고, 물이 없으니 바위를 지팡이로 쳐서 물이 나오게 하셨습니다. 걱정보다 하느님 뜻에 믿음으로 의지하는 사람에게 다 채워준다고 하십니다.

저는 부유한 집에 태어나지 않았지만, 88년 사는 동안 생명을 보존한 것은 온전히 주님의 진실한 자비에서 이루어졌음을 믿고 살아왔습니다.

며칠 전 수련장 신부와 외출했다가 내비게이션을 보니 도착 시간이 저녁 6시경으로 나와서 둘이서 저녁 기도에 참석하려면 어렵겠다고 하면서 적어도 5시 50분에 도착해야 하는데 그래서 제가 “주님 저희가 5분만 일찍 도착하게 해주세요.” 하고 차를 운행하는데 고속도로에서 나와서 신호등이 계속 빨간 등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어 더 강하게 신호등 파란 등으로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하니 조금 빨리 파란 등으로 바뀌어 결국 5시 50분에 수도원 도착하여 기도 시간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수도 생활은 시간과 장소에 대한 정확한 현존입니다. 종소리가 하느님의 부르심이라 말하고 공동체가 하나같이 제시간, 제 장소에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 수 있습니다. 오늘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오지게 즐겁게 늙는 비법

    남창현 토마스데아퀴노 신부님
재미있는 제목의 책이 우연히 눈이 띄어 읽게 되었습니다. 책의 제목은 ‘오지게 재밌게 나이듦’입니다. 한 시사고발 전문 다큐멘터리 감독이 노모의 친구분들과 웃으면서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에 영화 한 편을 제작합니다. 그 영화가 바로 ‘칠곡 가시나들’인데 그 제작과정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 칠곡 깡촌의 할머니들이 생애 처음으로 한글을 배워 쓰는 이야기, 할머니들의 소박한 일상과 행복한 생활의 비결, 다양한 삶의 질곡들을 참 푸근하고 따뜻하게 담아 놓은 책이었습니다. 그중 할머니들의 생애 첫 번째 습작 시들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행복한 날도 있고 / 슬픈 날도 있지요 / 하지만 누구든 사람들은 비슷비슷합니다”(김차덕 할머니의 ‘행복’ 중에서) “서른일곱에 혼자 되고 / 죽자 살자 살다 보니 / 구십이 되었잖아 내가 진짜 구십인가 / 젊은 사람들에게 이 말 하고 싶어 / 걱정마라 죽을 일이 나면 살 일도 생긴다”(황용연 할머니의 ‘내 속이 시원해요’ 중에서) 삶의 수많은 풍파를 겪으면서 살아오셨음에도 작은 들꽃 하나에 활짝 웃을 수 있는 할머니들의 시 한 편 한 편이 어쩌면 예수님의 오늘 복음과 그리도 꼭 닮아 있는지 경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마태 6,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걱정하는
이 마음을 통해
진정 우리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보게 된다.

좋으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또 내일을
주신다.

오늘을
주신 것같이
내일을
우리에게
주신다.

오늘을 건너갈
힘을 주시고
내일을 살아갈
용기를 주신다.

걱정이 아니라
믿음을 배우는
삶의 모든
시간들이다.

우리의 삶이란
소중함을
되찾는 여정이다.

소중함과
존귀함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에서
자라난다.

믿음의 길이
존귀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들에 핀
나리꽃들과
들풀까지도
입히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이다.

만남을 통해
드러나는
믿음의 다양한
빛깔들이다.

믿음이
씨앗이고
열매이다.

먼저 찾아야
할 것은
가장 좋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다.

하느님의
의로움으로
이 모든 것은
제자리를
찾게된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는
우리의
일상이 된다.

필요한 것을
아시고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으로
충분한 삶의
은총이다.

우리의 삶으로
하느님을 알게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이 모든 것이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사랑임을 깨닫게 된다.

오늘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고

내일도
하느님을 향한
감사이다.

견디고
헤쳐나갈
힘을 주시는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우리의 오늘이며
우리의 내일이다.

걱정이 아니라
깨달음이며
생각이 아니라
차려주신 오늘을
차려주실 내일을
맛보고 만나는
만남이다.

걱정을
손 잡아주는
하느님과의
만남이다.

그날로 충분하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세상에서는 황당한 법이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절대로 실행될 수 없을 것 같은데, 그 나라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실행되고 있는 황당한 법을 몇 가지만 보겠습니다.

 

저녁 식사 때에 먹은 음식이 좋지 않은 지 계속해서 속이 좋지 않습니다. 결국 밤 11시에 화장실에 가서 일을 보았습니다. 일을 보고서 변기의 물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웃주민의 신고로 벌금을 내고 말았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저녁 10시 이후에는 변기 물 내리는 행동이 불법입니다. 일본에도 황당한 법이 있습니다. 바로 비만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40~74세의 시민들은 규칙적으로 자신의 허리 사이즈를 재야합니다. 그리고 남자들은 허리 사이즈가 85cm를, 여자들은 90cm를 넘으면 안 된다고 하네요. 참고로 비만인 사람들이 감옥 가는 것은 아니고, 대신 건강 교육 프로그램을 받아야만 합니다. 이런 것은 어떻습니까? 운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코가 간질간질해서 손으로 코를 만졌습니다. 그런데 벌금이 날아왔습니다. 자그마치 우리나라 돈으로 82만원. 싱가포르에서는 운전할 때 코를 만지면 벌금 82만원입니다.

 

그밖에도 태평양 근처에 있는 사모아 섬에서는 아내의 생일을 잊어버리면 하룻밤 감옥에 가야한다는 법, 남편이 바람을 피우면 죽일 수 있다고 되어 있는 홍콩의 법도 있습니다. 단, 맨손으로 죽여야 한다고 하네요. 아프리카 말라위에는 길거리나 공공장소에서 방귀를 뀌는 것을 구속하는 황당한 법도 있습니다.

 

환경과 문화의 차이에 따라서 이런 법들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그런 거야?”라고 말하면서 인정하지 않고 또 따르지 않는다면 어떨까요? 그 황당한 법의 처벌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그 나라에서 추방당할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이 나라에서는 이렇구나.’라면서 그냥 인정하고 따르면서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면 그만인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법규는 간단합니다. 그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세상과 다른 점은 무조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합니다. 말이 안 된다고 하면서 그냥 거부하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러한 결정을 뭐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당신의 나라에 맞지 않으니 나가라고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곧 하느님의 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이 안에서 커다란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하느님의 법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 한 가지.

사람은 인정받을 때 행복을 느낀다고 합니다. 어린 딸이 아빠에게 “아빠! 나는 커서 아빠 같은 남자와 결혼할래요.”라고 말하면 너무나 기쁘다고 합니다. 그만큼 자신을 인정해주고 있다는 것이니까요. 주님께서는 어떠하실까요? 당신의 법을 인정하고 따르는 우리들을 얼마나 예뻐하시겠습니까? 더 커다란 사랑과 은총을 주실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인정은 가슴에 남는 기억이다(안데르센).

 

감사합니다.

어제 우편물 하나를 받았습니다. 신학교의 은사 신부님께서 보내신 우편물이었습니다. 이 안에는 ‘본당 신부 하루 일과표’가 코팅이 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뭐지?’라는 의문을 가지고 일과표를 보다보니 맨 위에 저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입니다.

대학원 1학년 때, 사목신학 시간에 교수 신부님께서 과제로 내주셨던 ‘본당 신부 하루 일과표’인 것입니다. 은사 신부님께서는 예전의 마음을 기억하라면서 제게 보내주신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제가 쓴 일과표이지만 참으로 성의 없이 그리고 잘 몰랐을 때 썼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도 이를 보면서 예전의 순수했던 마음을 기억하게 됩니다. 사제로 열심히 살려고 했던 마음, 그 마음을 다시금 새기면서 안일하고 나태하게 살고 있는 지금의 제 모습을 다시금 추슬러 봅니다.

이렇게 기억은 지금을 더욱 더 잘 살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그냥 단순히 과거를 후회의 시간으로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을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으로 과거를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오랫동안 제자들의 과제물을 소중히 간직해주신 신부님께 감사드리면서, 아울러 이번에 원로사목자가 되시는 신부님께서 영육간에 늘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들도 신부님을 위해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신부님은 수원교구 손골성지에 계시는 윤민구(도미니코) 신부님이십니다.

 

 

 

명품 신앙인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자연 속에 아름답게 수놓아진 당신의 창조물들을 통해 감동적인 가르침을 당신 제자들에게 선사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서정시인(抒情詩人) 저리가라입니다.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을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마태오 복음 6장 26~29절)

  

“왜 옷 걱정을 하느냐?”는 예수님 말씀에 백배 공감이 갔습니다. 저희 공동체 6층 옷방에 가면, 각종 옷들이 수두룩합니다. 선교사로 떠난 형제들, 유학 떠난 형제들, 돌아가신 형제들, 다른 곳으로 소임 받고 떠난 형제들이 두고 간 옷들입니다.

  

계절이 바뀌고, 옷이 궁할 때 마다, 너나할것 없이 들어가, 필요한 옷을 챙깁니다. 때로 재수 좋으면 제대로 된 메이커에 딱 맞는 옷도 있지만, 조금 헐렁하다든지, 꽉 낀다든지, 유행이 지나 좀 촌스럽다 해도 별 상관없이 입고 다닙니다. 그런 형제들의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럽고 멋져보입니다.

  

예수님 말씀 따라 더 이상 옷 걱정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이상 ‘명품’에 집착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대신 존재 자체로 명품이 되어야겠습니다. 품격있는 행동거지, 품위있는 언어구사, 기품있는 신앙생활로 명품 영혼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점차 먹고 입고 즐기는 것으로부터 초월해나가야겠습니다. 대신 내 안에 하느님 나라, 복음, 이웃 사랑의 실천, 더 가치있고 의미있는 보물들의 영역이 확장되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드러나는 외적인 것에만 신경쓴다 할지라도, 우리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존재로 살아가야겠습니다. 돈보스코, 아르스의 성자 비안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가 그랬듯이 한 가난하고 고통받는 영혼을 구하는데 몰두한 나머지 나 자신을 잊고 살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생각을 끊으면 걱정도 끊긴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데일 카네기의 ‘자기관리론’에 ‘마음속에서 걱정을 몰아내는 법’이란 내용이 나옵니다. 강연을 많이 했던 데일 카네기가 더글라스라고 하는 사람이 했던 강연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더글라스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의 두 번에 걸친 비극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첫 비극은 다섯 살짜리 딸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자신이 무너지면 아내도 견딜 수 없을 것 같아서 이를 물고 참았습니다. 하늘은 또 하나의 생명을 선물해주었지만 그 아이도 역시 하늘나라로 가고 말았습니다.

매일 밤을 눈물로 지새우며 휴식도 취할 수 없었습니다. 의사들이 처방한 약을 먹어보고 여행도 떠나보았지만 그의 슬픔은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찾아온 친척들 중 한 조카아이가 자신에게 배를 만들어달라고 청했습니다.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고 할 힘도 없었지만 더글라스는 조카를 위해 장난감 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종이배를 만드는 동안 슬픔에서 잠시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집 안의 작은 소일거리들을 찾아보았습니다. 고쳐야 되는 목록이 무려 242개였고 2년 동안 자신의 손으로 모두 수리를 하였습니다.

“걱정할 틈이 없다.”

이 말은 세계 제2차 대전 중 하루 18시간 일을 했던 윈스턴 처칠이 한 말입니다. 전쟁 중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에 온전히 뛰어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웅평 대위가 넘어올 때 진짜 전쟁이 나는 줄 알았습니다. 저희 집이 미군 비행장 옆에 살았기 때문에 전투기들이 뜨고 사이렌과 방송이 나올 때 어머니는 전쟁 나면 어디로 찾아오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정말 전쟁이 나면 어떻게 하나?’

그 당시 저는 실제 2차 세계대전을 치르고 있었던 윈스턴 처칠보다 전쟁에 대한 걱정을 더 많이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은 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평화모드로 정세가 흐르고 있습니다.

걱정을 하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걱정을 하지 않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걱정은 마귀가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마귀가 있는데 자아라고 합니다. 자아와 대화하는 것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생각하면 걱정을 하게 돼 있습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면 걱정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걱정하지 않으려면 생각을 접고 무언가에 열중하면 됩니다. 대학에 떨어질 걱정을 하면 무엇 합니까? 걱정하지 말고 공부에 몰입하면 됩니다. 직장에서 잘릴 걱정을 하면 무엇 합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일에 열중하면 됩니다. 그러면 절대 잘리는 일이 없습니다. 걱정하며 아무 일 안 하는 사람이 잘립니다. 걱정은 일이 잘되게 만들지 않고 그 걱정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만듭니다. 왜냐하면 걱정이 믿음이 되고 믿으면 믿는 일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신학교 때 잘리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하던 같은 반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는 일은 왠지 잘릴 위험성 있는 것만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다 결국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잘린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신부 안 되면 누가 되겠어?’

이 생각은 교만이라기보다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잘리면 프란치스코처럼 살지 뭐.’라는 계획도 있었습니다. 걱정하지 않으니 크게 걱정스러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걱정해서는 절대로 이 세상에서 잘 살 수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내일의 주관자는 인간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대신 걱정하라고 맡겨버리라는 뜻입니다. 걱정은 우상숭배입니다. 왜냐하면 자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주관자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나를 믿는 것이 우상숭배이고 나를 믿으면 생기는 것이 걱정과 두려움입니다. 나에게 사로잡히면 될 일도 안 됩니다. 그리고 안 돼봐야 별게 없습니다. 우리는 환상을 만들어놓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어차피 사라질 것인데 그 사라지는 것을 잡기 위해 걱정하는 것입니다.

걱정하게 만드는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가장 크게 걱정하게 만드는 적은 자아입니다. 생각을 끊어야합니다. 어차피 지나가는 세상입니다. 믿는 대로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행복하게 살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 이 세상입니다. 그것만 배워 가면 됩니다. 믿고 노력하며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이 세상에서부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명동에는 ‘틈새라면’이라는 식당이 있습니다. 일반 라면집과는 달리 독특한 맛, 특히 매운맛으로 손님들이 찾는 곳입니다. 벽에는 식당을 찾았던 사람들이 적은 메모지가 가득합니다. 저도 가끔 매운맛이 생각나면 찾곤 합니다. 다른 식당들은 따라가기 힘든 곳이기에 손님들이 찾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분도 자신만의 독특한 사업으로 성공한 분들이 계십니다. 의료용 로봇, 산업용 로봇을 개발하신 분입니다.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지금은 독창적인 기술과 신용으로 발전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 한 분은 아파트형 공장으로 성공하셨다고 합니다. 이 또한 다른 분들이 시도하지 않았던 사업이었다고 합니다. 역시 처음에는 고생하였지만, 많은 사람이 찾는 회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분들의 특징은 자신들만의 길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논문을 쓸 때입니다. 저는 강론에 관심이 많았고, 특히 어린이 강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개신교회는 말씀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강론에 대한 논문이 많았지만, 천주교회에는 강론에 대한 논문이 많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쓰지 않았던 논문 주제였기에 처음에는 자료를 모으는 것도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번 준비하니까 많은 도움이 되었고, 처음 시도하는 것이라서 지도 신부님들도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도움을 주셨습니다. 강론에 대한 논문을 쓴 신부님이 없었기 때문에 신학교에서 강의하는 기회도 주어졌습니다. 다른 분들이 많이 쓰는 주제로 논문을 정했다면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둑에서 중요한 것은 포석입니다. 이 포석으로 중요한 곳을 차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포석이 잘된 바둑은 쉽게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이익을 찾는 사람은 포석을 소홀하게 여기곤 합니다. 작은 전투에서는 소득이 있지만, 바둑이 끝날 무렵에는 상대방에게 지는 게임이 되고 맙니다. 그만큼 바둑에서는 포석이 중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인생은 작은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더욱 큰 꿈이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바로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고, 하느님이 의로움입니다. 이것을 추구하는 사람은 뿌리 깊은 나무와 같아서 고난과 역경이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샘이 깊은 물과 같아서 가뭄이 와도 쉽게 마르지 않습니다.

 

지난 지방 선거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울산의 모 후보는 8번 같은 곳에서 출마했다고 합니다. 8번 낙선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9번째 출마를 했고, 이번에는 지역 주민들의 지지를 받아서 당선되었다고 합니다. 그분이 8번씩이나 떨어지면서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세상의 기준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9번째의 도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소신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거에서는 패배했지만, 가족들을 사랑했고, 해야 할 일들을 충실하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기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창조하실 때, 많은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굶주리지 않고, 헐벗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조건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될 때입니다. 우리가 모두 한 마음, 한 몸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이 땅은 곧 하느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이 실현될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열어야 합니다. 교회는, 신앙인은 바로 그런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겨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주인이라고 하시는데, 그 재물이 주인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사용되는 용도가 사악하여 인류에게 너무나 많은 불행을 가져오게 하는 주체가 된다는 의미이다. 재물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으로 하느님을 떠나게 되어 하느님의 자녀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복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예수께서는 그래서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24절)라고 하신다. 이 재물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마력을 발휘하거나 역신(逆臣)으로 둔갑하여 인간을 온통 지배한다. 이 마몬은 인간이 섬겨야 할 상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부려야 할 종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이 재물에게 압도되어 종이 될까봐 제자들에게 포기하라고 하셨고, 그것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목숨을 부지하려고 걱정하지 마라.”(25절)고 하신다.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는 손해 때문이다. 우리가 입을 수 있는 해는 재물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그 재물 때문에 그 재물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리 던져버려 구원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재물의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되어 그 재물을 부릴 줄 알아야 한다. 그 재물을 잘 사용하는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새와 들에 핀 나리꽃들과 들풀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30절)고 하신다. 자연 속에 있는 모든 것도 그렇게 보살피시는 분이시다. 그분은 우리에게 영혼을 주셨고, 육신을 지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창조계의 모든 것을 만드셨고, 우리를 위해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며, 율법을 주셨고, 표현할 수 없이 많은 좋은 것들을 이루어 주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의 외아들까지 내 주셨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이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33절)이는 우리의 궁극적인 선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이다. 어떤 일을 하던 이것을 위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늘 나라에 이르기 위해 싸우고 있으며, 여기에서도 필요한 것이 충족되어야 하므로 곁들여 받게 된다고 하신 것이다. 먼저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는 일을 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그 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34절) 우리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선을 행해야 한다. 우리의 선행이 완전한 행위가 될 때에 우리가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알맞은 때에 얻게 된다. 열심히 선행을 행하자.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고 하신 것이다.주님께 완전히 신뢰하는 우리가 되도록 하자.

 

 

 

연중 제11주간 토요일(마태 6, 24-34)

     김성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떤 신부님이 바쁜 일이 있어서 차를 급하게 몰았습니다.

"호르륵!"

'아뿔싸! 교통경찰이 바로 그 자리에 서 있을 줄이야.

“속도를 위반하셨습니다.” 

“제가 좀 바빠서 그랬습니다.” 

머리를 긁적이며 신부님이 대답했다.

"아니 , 신부님이시네요."

그 경찰관도 신자였던 것이다.

경찰은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경찰관은 신부님께 고해소에서나 들을 수 있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신부님, 보속으로 묵주기도 다섯 단 하세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지금의 세상은 자본주의가 승리한 세상입니다. 신자유주의, 신자본주의라고도 부르는 현재의 세계는 공산주의와 자유주의를 대변했던 소련과 미국의 냉전 상태를 깨고서 자본주의를 거의 모든 나라가 받아들이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자본주의라는 것은 자본, 즉 돈의 힘이 모든 다른 가치와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놀라운 세상입니다. 사실 화폐의 힘이 발휘된 것은 중세의 권력과 신분제를 무너뜨리는 신흥자본가로부터 시작됩니다. 그 시작은 기존의 권력과 신분제를 넘어서는 진보적인 가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돈의 힘이 온 세상을 아우르는 절대반지의 힘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하느님이냐 맘몬이냐? 즉 하느님이냐 재물이냐? 하고 묻는 것이 참 싱겁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제 세상은 경제, 즉 돈의 힘 앞에 다른 가치를 이야기하는 것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무소유를 지향하는 우리 수도생활도 공동의 재화는 얼마나 많습니까? 개개인의 수도자는 가난하지만 수도회 자체는 부자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이냐 재물이냐의 양자택일 식 말은 이제 사람들의 관심밖에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재물의 올바른 활용에 대해서 이야기해야하고, 하느님적인 가치 추구를 이야기해야 조금 먹힐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우리 수도자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하느님적인 가치가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소중함을 진정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집, 멋진 차, 그리고 많은 재산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가치. 진실과 선함과 아름다움과 거룩함이라는 것을. 아주 소소하지만 인간을 진정으로 살아있게 하는 친절과 배려와 미소와 따스함이라는 것을 우리는 전해 주어야 합니다. 반대로 질투와 시기와 모함 등의 어둠의 농간은 정말로 인간을 병들게 하는 것임을 또한 분별하여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제가 수련을 받을 때, 헝그리 수녀님들이라고 우리가 불렀던 예수회 작은 자매회 수녀님들이 생각납니다. 청바지 소재로 된 옷을 즐겨 입는 수녀님들이었는데, 가끔 수련소에 와서 미사를 함께하곤 했습니다. 이분들은 가난을 참 철저하게 사는 분들이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한 분들도 있었는데 학교에서 근무하고 유치원에도 계시다고 해서 아 선생님을 하시는구나했더니 그분들의 직업은 학교 청소부, 유치원 주방 보조 이런 것이었습니다. 

공동체 규칙이 좋은 직업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은 연말이 되면 공동체의 모든 재산을 0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 보아도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까? 참 놀라울 뿐입니다.

 

정말로 하느님께 맡기고 산다는 것. 초기의 사막 교부들. 가톨릭 수도생활의 시초가 된 그분들은 목숨까지 그분께 맡기고 광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 선배 순교자들도 저 영원한 세상을 위해 초개와 같이 재산과 명예를 버렸습니다. 저는 한참 멀었습니다. 아직도 재물을 잘 활용하면 하느님께 더 봉사할 수 있다는 생각을 못 떨치겠습니다. 아직은 하느님적인 가치를 재물을 이용하여 더 일굴 수 있다는 일리를 못 잊겠습니다. 우선 순위의 문제로 보는 관점을 포기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언가 그분이 제 안에 전부로 자리한다면, 재물도 명예도 심지어 목숨도 바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져봅니다. 오직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자 의로움이 될 날이 올 수 있으리라 믿어봅니다. 소소한 이유로 형제자매들에게 상처주지 마십시오. 정말로 후회하는 날이 올 수 있습니다. 사랑하기에도 모자란 시간 허비하지 마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믿음의 힘. -하느님 중심의 삶-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믿음의 힘은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나옵니다. 진정 힘은 믿음의 힘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오늘 복음은 두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앞부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과 뒷부분은 ‘걱정하지 마라’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삶에 중심이 둘 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둘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둘 다 섬기려 하기에 정체성의 혼란입니다. 중심이 둘이기에 마음이 갈릴 때 이보다 힘든 것은 없습니다. 몸이 약해도 살 수 있지만 마음이 갈리면 살기 힘듭니다. 

 

제가 강론 주제중 참 많이 다룬 주제가 ‘삶의 중심’입니다. 믿는 이들에게 삶의 중심은 하느님뿐이라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에 하느님 아닌 그 무엇도 두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삶의 중심 자리에 하느님 아닌 것이 자리 잡았을 때 바로 우상이 됩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역대기 하권의 피비린내 나는 폭력의 악순환도 하느님 대신 우상들을 섬김으로 어리석은 인간들이 자초한 재앙임을 깨닫게 됩니다.

 

삶의 중심에 따라 형성되는 삶의 꼴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 때 은총처럼 뒤따르는 마음의 순수와 열정입니다. 바로 제 좌우명 자작시 ‘하루하루 살았습니다’의 첫째 연이 수도자의 삶은 하느님 중심의 정주의 삶임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定住)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1년생 작은 나무가 

이제는 30년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 받으소서.-

 

제 사제서품 25주년 은경축 상본의 성구, 바오로 사도의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라는 말씀도 생각납니다. 제 동료 사제의 서품상본 구절인데 그 일화를 수차례 나눴을 것입니다. 세상 유혹이 올 때마다 그리스도 대신 다른 탐나는 대상을 넣어 봤다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여자가 생의 전부입니다.”

“나에게는 돈이 생의 전부입니다.”

“나에게는 부귀영화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 무엇을 넣어도 마음이 허전하더라는 것입니다. 마침내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고백에서 마음의 안정과 평화를 찾았고 성소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이라는 것은 삶의 우선 순위를 말하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모두를 상대화하여 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여 저는 노년의 품위를 위해 늘 다음의 우선순위를 강조하곤 합니다. 첫째가 하느님 믿음, 둘째가 건강, 셋째가 돈이라는 것이며, 이 우선순위가 바뀌어 건강이나 돈이 첫째 하느님 자리에 와선 절대 안된다는 것입니다. 또 제가 자주 드는 적나라한 예도 있습니다.

 

“물보다 진한게 피이고 피보다 진한게 돈이고 돈보다 진한게 하느님 믿음이다.”

 

정말 자녀를 사랑한다면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 믿음을 유산으로 남겨주라 합니다. 사실 보고 배우는 부모의 믿음보다 더 좋은 유산은 없을 것입니다. 언젠가 세상 친구의 방문도 생각납니다. 장시간 자랑을 늘어 놓았고 저는 듣기만 했습니다. 

 

요약해보니 돈자랑, 자식자랑, 건강자랑이었습니다. 셋은 저에게 없는 것이고 하여 제 자랑은 무엇인가 생각했더니 절로 떠오르는 것이 하느님 자랑이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하느님만을 찾는 우리 수도자들이기에 매일, 평생, 끊임없이 공동전례기도를 통해 하느님 찬미와 감사로 하느님 자랑에 여념이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 중심의 수행이 삶의 중심을 확고히 해주고 날로 주님과의 관계를, 믿음의 관계, 희망의 관계, 사랑의 관계를 깊이 해줍니다.

 

바로 주님과의 관계가 세상 걱정에 대한 답입니다. 하느님 중심의 믿음이 불안과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느님 중심의 삶에서 나오는 믿음의 힘은 바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믿음이 약할수록 점증하는 세상 걱정, 세상 두려움입니다. 수도원 십자로의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도 주님께 대한 믿음만이 두려움에 대한 유일한 답임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하여 주님은 다시 하느님 중심의 삶을 강조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하느님을 찾는 본질적 삶에 충실할 때 부수적인 것들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수도원의 성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수도원에서 쟁점이 되는 것이 셋입니다. 1.하느님을 찾는 수행, 2.사람(성소자), 3.재정(돈) 셋인데 하느님을 찾는 본질적 수행에 충실할 때 성소자도 돈도 은총처럼 부수적으로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의 사람들은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찾는 일에 집중하는 현실주의자들입니다. 과거는 지났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며 사실 이들은 우리 영역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루하루 살면서 오늘 지금 여기서 주님을 만나 기쁘게 감사하며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감사는 은총을 담는 그릇입니다. 이런 우리를 격려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

 

참으로 지혜로운 처신으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 주시어 우리 모두 이렇게 하느님만을 찾는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게 해주십니다. 아멘.

 

 

 

온전히 의탁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일상을 살아가면서 근심걱정 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겉으로 평화로워 보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남모르는 걱정을 안고 살아갑니다. 사실 모두가 근심걱정을 하지만 결정적으로 무엇을 걱정하느냐가 다를 뿐입니다. 걱정해 봤자 소용없는 것을 걱정하는 어리석음은 그만둬야 하겠습니다.

  

한 통계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 22%는 사소한 사건들,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이랍니다.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사건이라고 합니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시편저자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여라. 그분께서 네 마음이 청하는 바를 주시리라.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4-5).하였습니다. 결국 믿음을 가진 사람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걱정거리를 가지고 있지만 어떤이는 주님께 의탁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못하여 근심을 끌어안고 삽니다. 그러나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입니다. 믿고 맡기며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는 주님의 처분을 기다릴 뿐입니다.

  

루카복음에 보면 시중드는 일로 분주한 마르타에게 주님께서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루카10,41-42). 하시며 주님의 말씀을 듣는 마리아의 위치를 확인해 주셨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 머물면 쓸데없는 일로 바쁘지 않을 것이요, 또 괜한 걱정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유지하기위한 음식과 몸을 보호하기위한 의복의 걱정에 앞서서 그보다 더 가치 있는 것에 마음을 두어야 하겠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변함없이 주님을 선택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고, 주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공중의 새나 들판의 꽃들조차도 하느님의 안배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인간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존재로 ‘만물의 영장’입니다. 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우주 만물을 다스릴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하느님의 돌보심을 믿고 신뢰하며 모든 근심걱정을 송두리째 맡겨야 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 입을까?’ 이러한 물음은 인간적인 걱정입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노력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 거기에 행복이 있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노력도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헛된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인생여정에 우선적인 선택이 주님이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 의탁하고 섭리에 맡기면 모든 일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모든 걱정을 그분께 내 맡기십시오. 그분께서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1베드5,7). 하느님께서 나를 선택하신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의 영원한 생명에의 약속에로 이끌고 계시다는 확신 속에 뽑아주신 좋으신 분께 대한 응답으로 오늘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최선에 최선을 다하고 주님께 온전히 의탁할 때 영원한 새 삶이 시작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마태 6, 24-34(연중 11주 토) 

오늘도 우리는 신앙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신앙인의 길일까? 어떻게 사는 사람이 신앙인일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마태 6, 24)

 

그렇습니다. 신앙인은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아무나 섬기는 사람이 아니라, 주인이신 한 분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 등의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거나, 자기의 판단이나 주장이나 뜻을 섬기지 않고 주인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뜻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은 우상숭배가 되며, 하느님을 업신여기는 일이요 모독하는 일이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강력한 형태의 두 가지 우상숭배를 만납니다. 곧 물질 만능의 물신숭배와 자기중심적 개인주의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섬김’은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느냐의 신원과 정체성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주님께 속하며, 주님을 믿고 따르는가? 아니면, 다른 피조물, 곧 물질이나 자기 자신에 속하며, 자기 뜻과 생각을 주인처럼 섬기고 따르는가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먼저 우리가 주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음을 깨닫고 믿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 33)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에 속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곧 자신의 성취나 자신의 편리나 이기, 자신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에 앞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찾기’를 삶의 본질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곧 그 모든 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혹 내가 지금 물질이나 자기 자신을 섬기고 있다면, 하느님을 업신여기고 있음을 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자신의 입을 것이나 먹을 것 등 자신의 처지나 형편만을 탓하고 걱정하고 있다면, 주님이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찾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항상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믿고 따르며 섬겨야 할 일입니다.

 

하오니, 주님!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재물을 섬기느라, 저 자신을 섬기느라, 주인이신 당신을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제가 아니라, 당신이 재물의 주인이요, 저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있다가도 없어질 것이 아니라, 진정 있는 것,

이미 선물로 준 당신의 나라와 의로움을 찾게 하소서! 아멘.

 

 

 

<외길>

     상지종 신부님

님 향해 벗들과 함께 걸어온 길

돌아보니 외길입니다

무수히 갈래 친 얼기설기 엮인 길

때로는 한걸음 물러서 주춤거리고

때로는 섣불리 내딛어 당황해하고

때로는 선뜻 한걸음 딛기 어려웠던 길

잠시 긴 숨 쉬며 돌아보니

두꺼운 아집의 껍질 벗는 자유와

벗들과 더불어 함께 하는 기쁨과

작은이 보듬어 살리는 사랑으로

곱게 단장한 외길입니다

때로는 자신만 돌보라 유혹하고

때로는 더 가지라 속삭이며

함께 삶이 아니라 홀로 죽음을 재촉하는

짐짓 화려하고 달콤한 길들 물리치고서

님 향해 벗들과 함께 걸어갈 길

외길이어야 합니다

 

 

 

섬김과 다스림 <마태 6, 24-34>

     이석진 신부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하느님은 생명을 보존하려면 주님은 섬기고 세상은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생명을 보존하려면 창조된 피조물이 필요하고 어떤 조직에 예속되어 어울려 살아가야 합니다. 시간과 공간 안에 살게 하시는 주님을 잊거나 싫어하면서 생명을 보존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물질적 풍요로움이 아니라 나와 나의 진실과 사랑입니다. 북쪽은 핵을 갖고, 국제사회가 북쪽이 가진 핵을 인정하고, 핵에 의지하여 평화를 얻으려고 하는 한 너와 나의 평화가 유지되지 못합니다. 무엇이든지 가진 것을 사랑과 진실로 다스리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가진 것이 미움과 저주와 거짓과 사기라면 결코 자기를 지켜주는 주인이 되지 못합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세상의 권력이나 재력이나 명예에 의지하면 되리라고 믿는 사람은 그것들에 의하여 폐망합니다.

카톡으로 받은 이야기인데 미국의 큰 부자가 암에 걸려 죽게 되었는데 어느 날 툭툭 털고 일어나 회사에 출근하여 사람들 놀라게 했습니다. 이유는 병석에서 죽을 걱정보다 하느님께 감사 기도를 하면서 지금껏 살아있는 것부터, 지금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자기 주위에 있는 공기 음식 햇빛 등 모든 것에 감사하고, 죽든지 살든지 주님께 감사한다는 기도를 드리며 살다 보니 몸의 암이 모두 없어졌다고 합니다. 이는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에서 감사 기도하고 세상에 주신 모든 것에 감사하면서 주님을 섬김으로써 자신의 목숨이 귀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것을 목숨을 내놓고 섬기며 그것들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권력의 자리가 뭐라고 서로 미워하며 정권을 쟁취하려고 하고, 재력에 마음을 빼앗겨 돈의 노예가 되어 죄를 짓고 거짓과 착취로 죄인이 됩니다. 주님은 모든 자연이 각기 살길을 모든 피조물에게 주셨습니다. 

우리도 내일 걱정을 버리면서 오늘 주신 것을 잘 다스리고 보존하는 삶을 통해 오로지 하느님만이 주인이심을 믿고 따라 살기를 기도합니다.

 

 

 

심홍보 베드로 신부님

연중 제 11주간 토요일(하느님나라를 찾는 과정에서 느끼는 하느님 사랑)

6/23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시몬 부제 강론

독서 : 2역대 24,17-25

복음 : 마태 6,24-34

교회일치와 이웃종교 체험-체험 속에서 느낀 감사함-하느님 나라를 찾는 과정에서 느끼는 하느님의 사랑

찬미예수님, 오늘 하루 주님의 은총 속에 행복한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3)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찾기 위해(?) 저는 지난 수, 목, 금 3일간 가톨릭을 더욱 잘 알기 위해, 타 그리스도교와 이웃 종교체험을 하고 왔습니다. 제가 간 곳은 총 5곳입니다. 내분을 없애고 화합을 이루려는 정교회, 오해와 차별로 힘든 이슬람교, 100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한국에서 4번째로 커진 원불교, 내부의 폐단에도 여유를 잃지 않는 불교(특히 조계종),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닮은 교황대사님이 계시는 교황 대사관까지 각 종교의 특징이 각각의 책임자에게서 잘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 곳의 책임자(저희로 따지면, 주임신부님이죠.)를 뵙고, 각 예배소에 들어가 보고, 밥도 얻어먹고 왔습니다.

체험을 하면서 방문에 감사하다는 이야기를 매번 들었습니다. 저 또한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먼저 한국 사회 안에 다양한 종교와 천주교가 서로를 배척하기보다는 존중해주는 모습이 참 고마웠습니다. 그런 존중이 있었기에 저희의 방문을 각 종단에서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 밥이나 차를 내 주시는 곳도 있었고, 저희가 던지는 곤란한 질문에도 대부분 쉽게 잘 설명해 주셨습니다. 질문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한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교단의 설명을 들으며, 그렇다면 저를 돌아보게 되고, 나의 종교는 어떤 종교인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고, 다시 한 번 마음 속 깊이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저 스스로를 돌아보았을 때, 저는 천주교의 부제였습니다. 사실 제가 천주교의 부제가 아니면, 어떻게 다른 종교를 만나 환대를 받을 수 있었을까요? 내가 천주교가 아니였다면, 섬기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하느님을 이렇게 찾으려 했을까요? 하느님을 찾으려 하지 않았다면, 하느님께서 저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저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그 과정을 저에게 주셨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 사람을, 사랑을 알도록 하십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 저를 가까이 하게 하시려고 사제의 길로 불러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연수를 통해 하느님 나라와 그 분의 의로움을 찾으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더욱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무엇일까 궁금해 하지만 말고, 스스로 하느님 나라와 그 분의 의로움을 실제로 찾으려 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모습이 하느님 나라인지, 어디에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나는지 찾아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하느님께서는 분명 우리에게 무엇인가 가르쳐 주십니다. 제가 하느님 나라를 찾는 길 안에서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 또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조금씩 가르쳐 주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하신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마태 6, 34)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하느님께서 주신

오늘이고 내일입니다.

 

오늘이 있기에

내일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무거운 걱정을

내려놓으라 하십니다.

 

믿음과 걱정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우리들 삶입니다.

 

믿음이란 

오늘과 내일을 

우리게 주시며

우리를 끝까지

돌보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심을 우리가

이제 믿는 것입니다.

 

걱정이 아니라

감사가 필요합니다.

 

매순간이 생명의

새로운 순간들입니다.

 

걱정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뜨거운 눈물의

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오늘과

하느님의 사랑을

결코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하늘의 새들도

들에 핀 나리꽃들도

하느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오늘을 놓치지

마십시오.

 

내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늘이며 

내일은 결코 우리의

영역이 아닙니다.

 

근심과 걱정이 아닌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의 의로움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삶을 

우리의 오늘을

주님과 함께

맘껏 즐기고

맘껏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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