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2일 (갑인) 맑음. 계본에 대한 회답回下 18통 및 영의정, 우의정(정탁鄭琢)의 편지와 자임子任(이축李軸) 영공의 답장이 왔다.
군량을 독촉할 일로 아병牙兵 양응원은 순천과 광양으로, 배승련裵承鍊은 광주와 나주로, 송의연宋義連은 흥양과 보성으로, 김충의金忠義는 구례와 곡성으로 정해 보냈다.
삼도 중위장 성윤문, 김완, 이응표李應彪가 견내량으로부터 돌아와 적이 물러갔다고 보고했다.
배 수사는 밀포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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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방진 작성시간 26.06.12 와! 과연 소통의 달인, 인맥의 달인이십니다. 4월 12일 (갑인) 맑음. 旣 써 올린 장계에 대한 회답回下을 18통을 받고 , 영의정 류성룡, 우의정 정탁, 자임 이축의 답장이 왔다. 과연 이들이 누구인가? 류성룡이야 말할 것도 없고, 우의정 약포 정탁(鄭琢)은 갑오년엔 종1품 찬성, 을미년엔 정1품 우의정, 병신년에는 정1품 영중추부사(사실은 행지중추부사)로 벼슬이 바뀌는 모습으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진휼사(賑恤使: 흉년이 들었을 때에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앙에서 임시로 파견하던 관리. 정승이나 대신이 이 일을 일시적으로 맡아보았다.) 였다. ‘이순신옥사의(李舜臣獄事議)’가 그냥 나온게 아니었습니다.자임 이축(李軸)은 태종대왕의 현손(玄孫), 양영대군의 고손(高孫)으로 당대의 영향력 있는 대신이었다. 이축(李軸)은 이순신의 장례(국장(國葬)에 준하는 예장(禮葬: 임금의 예관파견, 사제문(賜祭文), 증시치부(贈諡致賻), 관비장사(官庀葬事) 등이 이루어지며 그밖에 자손등용, 사우건립, 문집발간, 영정제작 등 은전혜택)시 예관으로 사제문을 가지고 내려와 치제하였던 인물이다. 이순신의 인맥은 의정부 6조 3사, 도승지 등 조정의 쟁쟁한 실력자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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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상유 작성시간 26.06.12 대단하신 이순신장군님의 나라를 지켜내기위한 소통노력이네요!
방진님의 설명을 보니 더욱 와 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해를 돕기위해 AI가 정리한 그 시기의 상황정리는 다음과 같아요!
임진왜란 당시 **을미년(乙未年)**은 서기로 1595년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임진왜란 발발 시점부터 을미년까지의 흐름을 간단한 연표로 정리해 드릴게요.
임진왜란 초기 주요 연도
1592년 (임진년): 임진왜란 발발 (왜군 침략 시작)
1593년 (계사년): 계사재란 (진주성 2차 전투 등 치열한 공방전)
1594년 (갑오년): 명나라와 왜군 사이의 본격적인 강화 회담 진행 (전선 소강상태)
1595년 (을미년): 강화 회담이 길어지면서 대규모 전투는 없었으나,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사로서 한산도 등에서 군사를 훈련하고 식량을 모으며 장기전을 대비하던 해입니다.
역사 팁: 60갑자는 60년마다 돌아오기 때문에, 임진왜란 때의 을미년(1595년)으로부터 정확히 300년 뒤인 1895년 을미년에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과 '을미개혁'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