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비로 길들여진 수행 풍토서는 선지식이 나오기 어렵다.”
“한국불교는 문중 파벌에 갇혀 지나치게 폐쇄적이다.”
“시자가 대필하는 앵무새 같은 법어라면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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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가을, 지리산 자락에서는 조계종을 발칵 뒤집을 ‘쓴소리’가 쏟아져 나온 일이 있다. 남원 실상사에서 열렸던 야단법석에서였다. 당시 ‘야단법석’이라는 범상치 않은 이름의 행사를 열어 불교계에 일대 센세이션을 몰고 왔던 향봉 스님(익산 사자암 주지)은 그 후로도 한차례 더 야단법석을 개최해 한국불교의 변화를 주도한 바 있다. 8월 4~7일 장성 백양사에서 있을 세 번째 야단법석을 준비 중인 향봉 스님을 만났다.
향봉 스님이 주지로 있는 미륵산 사자암은 백제시대 사자사가 있던 곳으로 전해지는 절터이다. 미륵사지 뒤편에 위치한 이곳에서는 1993년 ‘사자사(師子寺)’ 명문이 있는 기와가 출토됐다. <삼국유사>에는 “백제 무왕과 왕비(선화)가 사자사로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해 그 인연으로 미륵사를 세웠다”고 전한다.
스님은 최근 야단법석 세 번째 마당을 열기에 앞서 자신이 체특한 불교사상을 풀어낸 <일체유심조>와 독특한 선기로 선문답을 풀어 쓴 <선문답>, 시집 <행복을 위한 자유를 위한>을 펴내기도 했다. 사자암 마당에서 책 소식과 함께 안부를 건넨 나그네에게 향봉 스님은 “앞으로 20권은 낼 예정이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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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마흔에 철들어
향봉 스님의 어린 시절은 가난했다. 스님은 초등학교 5~6학년 때 가난을 이유로 동진출가했다. 10대부터 해인사에서 지냈던 스님은 불교신문사와 종단의 중심에서 10여 년간 소임을 봤다. 이 때를 향봉 스님은 “잘못된 인연으로 학문과 수행할 기회를 놓친 시기”라고 표현했다.
잘못된 인연(?)으로 방황하던 스님이 제대로 공부를 하게된 계기가 있었다. 나이 마흔이 지나 내장사 주지를 지낼 때였다. 속가 부친이 돌아가셨다. 장례를 위해 속가를 찾았더니 어머니가 봉투를 건네며 “아버지의 49재를 내장사에서 지내 달라”고 말했다. 누나들도 말을 보탰다. “아버지가 극락왕생할 수 있게 도와 달라”고.
향봉 스님은 포교부장 소임도 지냈지만 말문이 막혔다. “영혼이 존재하는지, 49재 공양을 한다고 해서 살아생전의 업장이 소멸될 수 있는 것인지. 내생이 존재하는지 등 많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스님을 괴롭혔다.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들이 향봉 스님을 철들게 했다. 스님은 무작정 바랑을 메고 인도로 떠났다. 향봉 스님은 영어를 못해 의사소통도 안되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두어 달이 채 못돼 가져갔던 1000달러를 모두 써버렸다. 돈이 없어 방을 구할 수도 없었다. 향봉 스님은 이 공원, 저 공원을 돌며 노숙을 했다. 말라리아 등 풍토병에 걸려 죽을 고비도 넘겼다.
이를 보다 못해 속가 형인 정다운 스님이 유학생숙소를 잡아 주고, 약도 보내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무(無)자 화두를 들고 있던 때였다. 약과 함께 담긴 작은 포켓 달력을 보고 있었다. 우연히 달력을 넘기는데 환하게 불이 켜졌다. 조명이 켜진 것이 아니라 어떤 빛이었다. 스님은 그 ‘빛’을 본 종교적 체험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향봉 스님은 이게 뭔가 싶어 어리둥절하다가, 정다운 스님이 예전에 보내주었던 <천수경> 강의집을 펴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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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口)’ 아닌 것 없다
<천수경>은 그 시작에서 구업을 강조한다. 신ㆍ구ㆍ의(身口意) 삼업 중에서도 악구(惡口, 악담), 양설(兩舌, 이간질시키는 말), 기어(綺語, 꾸미는 말), 망어(妄語, 거짓말) 등 구업으로 짓는 업은 네 가지로 가장 많다.
향봉 스님은 “코는 국 냄새 맡는 입이고, 눈은 보는 입이고, 귀는 듣는 입이다. 우리 몸에는 다스려야할 입이 아홉 개나 된다”며 “정구업(淨口業)의 바른 해석은 몸과 마음을 맑게 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금강경> 사구게 가운데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에 대해서도 해석을 달리 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구절을 ‘마땅히 머무는바 없이 그 생각을 내라’라고 해석한다.
향봉 스님은 “이것은 ‘한 생각이 일어났거든 마땅히 그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라’로 바꿔보자”고 말했다. 생노병사는 모두 집착에서 온다. 스님은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는 하루에 천만가지 생각을 한다. 때문에 너무 피곤하다. 생각이 일어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갖으려고 하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중생이 앓고 있는 모든 원인이 집착 때문이라는 스님의 설명은 <금강경>에 설해진 수자상(壽者相)의 수(壽)를 ‘목숨 수’가 아닌 ‘누릴 수’로 봐야한다는 말로 이어졌다. 수자상은 삶에 대한 애착ㆍ집착이 아니라, 중생이 앓고 있는 고통의 모든 원인이 집착에 있다는 말이다.
향봉 스님은 “나만 ‘목숨 수’가 ‘누릴 수’의 의미도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중국 고어에서 보면 둘의 쓰임이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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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식 중도 이해는 잘못
팔만대장경의 핵심은 중도(中道)와 연기법칙이다.
향봉 스님은 “많은 스님들이 중도(中道)를 잘 모르고 헤매고 있다. 중도는 좌우에 치우지지 않는 균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특히 “중도를 유교의 중용과 같은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중용(中庸)>은 인(仁) 의(義) 예(禮) 지(知) 신(信)을 생활의 기본 덕목으로 삼아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온당하게, 또는 지나치거나 모자람 없이 알맞게 덕과 도의 균형과 조화를 강조하는 가르침이다. 예와 지 등 무엇 하나 지나치면 화를 부르기 때문이다.
향봉 스님은 “불교의 중도사상은 중용과 근본을 달리한다”며 “중용이 양변불락(兩邊不落)사상이라면 중도는 양변무애(兩邊無碍)이자 무변중심(無邊中心)사상이다”라고 말했다. 불교의 중도에는 좌우가 없을 뿐만 아니라 변두리도 없다는 설명이다.
스님이 나그네에게 물었다.
“어디서 어디까지가 동쪽입니까?”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서쪽입니까?”
"나그네가 답했다.
“내가 서 있는 곳부터 해 뜨는 방향이 동쪽입니다. (내가 서있는 자리에서) 해가 지는 방향이 서쪽입니다.”
향봉 스님은 다상을 탁!하고 치며 “맞다”고 말했다.
“동서남북의 구분은 자기로부터 시작됩니다. 항상 중앙에는 ‘내’가 있습니다. 모서리에 앉아도 ‘내’가 앉으면 그곳이 중앙입니다. 세상 어느 곳에 서 있더라도 내가 세상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며 세상의 주인인 것입니다.”
스님은 “내가 세상의 중심이고 주인이니 내가 곧 부처인 것이요, 내가 서있는 자리가 곧 정토이다”라고 말했다.
향봉 스님의 말에 따르면, 임제 선사의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계진(立處皆眞)’은 불교의 중도를 설명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게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비롯해 즉심시불(卽心是佛) 심외무불(心外無佛) 등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가르침과 법등명(法燈明) 자등명(自燈明)의 최후의 유훈이 이를 뒷받침한다. 불조의 혜명을 꿰뚫은 이같은 가르침을 <법화경>은 ‘번뇌가 보리요 중생의 곧 부처’라고 했다.
향봉 스님은 “오늘이, 금생이 제일 중요하다. 불교는 오늘의 종교”라면서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나다. 내가 죽으면 끝이다. 우울하다거나, 돈 없다고 불평하면 안된다. 살아있다는 자체가 ‘나’는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성경>에는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라고 써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구하지 말라, 구할 수록 마음이 어지럽다’고 했습니다. ‘두드리지 말라. 언제나 문을 열려있다’는 말입니다. 이 얼마나 훌륭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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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윤회한다
향봉 스님은 “고정관념을 깨로 관점을 바꾸고 마음이 열려야 세상이 열린다”고 말했다. 목탁소리에 의해 운명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생각이 바뀌어야 운명이 바뀌고 삶이 바뀐다는 말이다. 스님은 “참회한다고 업장이 녹지 않는다. 우리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향봉 스님은 “한국불교는 브라만(우주)을 통한 창조설은 믿지 않으면서 아트만(거짓된 나)은 믿는다”고 지적했다. 불교는 ‘나’를 이루는 안이비설신의 등은 모두 연기(緣起)에 의한 것으로 ‘나’는 없다고 설한다. 향봉 스님의 주장은 부처님이 ‘무아(無我)’라고 설했음에도 유독 한국불교는 ‘나’의 허상을 깨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님은 “한국불교가 아트만을 부정하지 못하는 것은 사찰경제와 연관됐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나’가 있다고 해야 49재의 공양을 받을 주체도 있고, 참회기도를 통해 구원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옥야여경(玉耶女經)>에는 어머니 같은 아내, 누이 같은 아내, 친구 같은 아내, 며느리 같은 아내, 종 같은 아내, 원수 같은 아내, 도둑 같은 아내 등 일곱 가지 아내가 나온다.
향봉 스님은 “많은 사람들이 전생의 업장 운운하며 선업을 닦아야 좋은 아내를 만난다고 말한다”면서 “사실은 한 여자에 일곱 가지 모습이 있는 것이다. 사람을 하나를 두고 내 마음의 윤회에 의해 일곱 가지 모습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육도윤회도 죽어서 나고 죽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떻게 열리고 닫히느냐에 따라 금생에서 겪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때문에 한두 시간 목탁소리에 의지해 일생의 업장을 녹이려는 행위는 이치에 안맞는다는 주장이다.
얼마 전, 사자암에서는 논란이 있었다. 조계종에서 멸빈된 정다운 스님이 사자암 법당을 빌어 재(齋)를 봉행했기 때문이었다. 향봉 스님의 주장대로라면 부질없고, 하지말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뭘까. 스님은 “출가자에게도 부모ㆍ형제가 있다. 종단서 감찰국장을 하면서 형인 정다운 스님의 징계를 먼저 요청했던 나이지만, 할아버지가 된 형이 법당을 빌려달라는 청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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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리씩 하면서 ‘방하착’하라 해서야
한국 선원 대부분은 짜여진 정진시간표에 의해 죽비소리로 앉고 서기를 반복한다.
향봉 스님은 “한국 선원은 좌선의 뿌리가 너무 깊게 박혀 있다. 50분 좌선하고 10분 쉬는 형식주의에 빠져서는 마음 열린 도인이 출현하기란 요원하다”고 탄식했다.
무문관도 잘못된 수행 풍토라 지적했다. 독방은 만들어 두되 문을 열어둬야 한다는 것. 대자유를 얻겠다는 출가자를 사육하듯 가둬두는 것 아니냐는 일각의 비판과 상통하는 말이었다.
스님은 “출가 51년 동안 어느 조실ㆍ방장스님이 후학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이판이나 사판이나 모두 자리에 연연하며 집착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향봉 스님은 “이판사판에서 모두 한자리씩 하는 스님이 TV에 나와 ‘방하착(放下着; 모두 내려놓으라)’하라하니 아이러니하지 않냐”고 말했다. 스님은 “10~20년 선원을 다녀도 마음이 열리지 않는 상태에서 몇 안거 성만했다는 경력이 자랑거리가 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스님은 최근 한 스님의 장례에 조문을 다녀왔다.
그곳에서 좋은 차만 통과시켜주는 바람에, 트럭을 타고 간 향봉 스님은 겸연쩍은 경험을 해야했다.
스님은 “상여ㆍ만장 등 유교문화의 잔재도 문제지만, 출가자의 장례를 5일, 7일씩 하는 것은 재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향봉 스님은 한국불교에서 법거량이 사라졌음을 한탄했다. 2년 전 지리산에서도 외쳤지만 소용없었다. “(법을 논하는 자리라면) 누구든 찾아오라”, “어디든 부르면 가겠다”고 외쳤지만 정작 법거량을 하자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스님은 <선문답>을 펴냈다고 했다. 책으로라도 남겨두면 언젠가 눈 밝은 이가 찾아와 법거량을 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성역 없는 쓴소리는 계속된다
향봉 스님은 조계종이 추진 중인 자성과 쇄신의 5대결사에도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스님은 총무원장스님이 결사와 민족문화수호운동 추진 6개월 여 만에 청와대를 찾아간 것을 “백기를 들었다”라고 표현했다. “절망감을 느꼈다”고 토로했다.
향봉 스님은 “(이런 상황에서) 조계종이 5대결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하겠다는 것은 바람이 모두 빠진 풍선을 두고 대중에게 바람을 불어넣으라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
사바세계에서 누군가에게 쓴소리를 한다는 것은 좋은 사람으로 평가받길 포기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향봉 스님은 쓴소리를 멈추지 않는다. 그 이유에 대해 스님은 “온몸이 상처투성이인데 상처를 덮어만 두면 더 큰병이 온다”고 설명했다. 스님의 쓴소리는 동진출가해 오늘의 자신을 있게 한 한국불교에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이었다.
향봉 스님은 “방장ㆍ선원장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도 내가 최초”라고 말했다. 이어 “2009년 야단법석에서 이슈가 됐던 고액의 해제비 부분만 해도 일정액이 넘는 것은 승려노후복지기금으로 사용하기로 선원수좌회가 결정했다”고 말했다. 스님은 “조계종 선원수좌회가 편찬한 <선원청규>에 ‘방장 등은 승납과 안거수를 따지지 말자’고 명문화한 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이룬 것”이라고 자평했다.
향봉 스님의 쓴소리는 성역이 없었다. 미륵산 중턱 사자암에 앉아 너른 익산평야를 한눈에 내려보듯 스님의 견해는 한국불교의 막힌 곳곳을 꿰뚫고 있었다. 한국불교에의 충절이 담긴 스님의 법문은 8월 4~7일 백양사 야단법석에서 만날 수 있다.
■향봉(香峰) 스님은…
동진출가해 1962년 사미계, 1967년 구족계를 수지했다. 불교신문사 편집국장ㆍ주필ㆍ주간ㆍ부사장을 역임했다. 조계종 총무원 조사국장 감찰국장 포교부장 총무부장과 중앙종회 사무처장, 종회의원을 역임했다.
조계종 경승단 초대단장과 청평사ㆍ보광사ㆍ내장사 주지를 지낸 스님은 인도 네팔 티베트 중국에서 15년을 머물기도 했다. 1973년 9월 <현대시학>을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사랑하며 용서하며>, <겨울장마>, <움직이는 것은 아름답다>, <사람의길> 등 20여 권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