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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 명법문┃

참고 견뎌라. 최선을 다할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다 / 문화부장 탁연 스님

작성자地藏行者|작성시간12.04.21|조회수105 목록 댓글 6

   

1962년 통합종단 출범이후 비구니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소임을 맡게 된 것은 41년이 흐른 뒤였다. 조계종 문화부장 탁연(卓然) 스님이 그 주인공이다. 역사적으로 한국불교에서 여성의 지위는 높았지만 통합종단 이후 여성의 종단 참여는 불가능처럼 보였다.


제31대 총무원장 법장 스님의 선거공약과 시대적 변화의 요청에 따라 2003년 비구니 대표로 탁연 스님을 임명했다. 스님의 역할은 막중했다. 스님이 처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국 불교역사의 방향이 달려있었다.


하지만 조계종단 내 반발은 거셌다. 21세기 한국 사회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탁연 스님은 특유의 뚝심과 배짱, 지혜와 대화로 문제를 풀어갔다. ‘탁연’이라는 한 개인의 자리가 아니라 한국불교 비구니 전체를, 그리고 재가 여성불자 모두를 대변하는 자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스님의 행정능력은 생각 외로 높이 평가됐다. 스님은 2005년 문화부장을 연임, 2008년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선거관리위원으로 선출, 2010년 조계종 제15대 중앙종회의원으로 선출되기에 이른다. 만해 NGO 우리함께 빌딩 종교와젠더연구소에서 탁연 스님을 만났다. 예전에 비해 여유로워진 스님은“정신없이 바쁠 때가 좋았다”고 회고했다.
 

진주사범대 합격통지서를 들고 찾은 곳은 대학이 아닌 절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출가 동기가 되겠네요. 친할머니께서 불심이 대단히 높으셨는데, 한국전쟁으로 20살에 미망인이 된 제 어머니를 이 절 저 절 데리고 다니시며 큰스님을 친견하게 하셨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24살에 발심하여 출가를 하셨습니다. 할머니께서 저를 키우셨지요. 그 덕분에 저는 스님들을 만날 기회가 많았고, 자연스레 법문을 들을 기회도 많았습니다. 많은 인과법문과 함께 스님이 되어 수행을 잘하면 생사를 초월한다는 말을 듣고,‘ 나고 죽음이 없는 세상에 나도 한번 가보자’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사별한 어머니의 아픔, 어머니와의 이별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늘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결국 죽음을 두려워했던 게지요. 스님이 되면 철저한 생활 속에 나날이 긴장의 연속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겨울 방학 때 젊은 스님들의 강원 생활과 경전 공부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활이 정말 재미있게 들렸어요. 또 선생님이 되겠다던 나의 꿈을 출가하여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기쁨은 신선한 충격이 되어 하루라도 빨리 출가해야겠다고 마음을 굳히게 되었죠. 졸업하자 마자 출가하려하였는데. 뜬금없이 예비고사 제도가 생겨 졸업전에 시험을 치뤄야 했습니다.

 

만약 예비 고사에 불합격하면 대학에 떨어져서 출가했다고 할것이니 그것은 자존심이 용납을 안했어요. 몇 개월 동안 죽기 아니면 까무라치기로 공부를 해서 운 좋게 합격통지서를 받게 되어, 가벼운 마음으로 출가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절에 가서도 공부를 계속하셨습니까.

 

-제가 출가했을 때 성철 스님께서 백련암에 계실 때였기에 자주 친견을 하게 됐습니다. 큰스님께선 죽을 힘을 다해 좌선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강원에서 강사스님이 되면 좋겠다는 말씀을 한번 드렸다가 크게 꾸중을 듣고 좌선공부를 하려고 했는데 그만 허리를 다쳐 앉아서 정진을 할 수 없게 됐습니다. 계속 이런저런 병치레를 하는 저 때문에 은사스님께서 고생을 많이 하셨습니다.

 

척추 디스크와 싸우며 뒷방에서〈치문〉한 권을 다 배웠고, 출가한지 5년 만에 완치되지 않은 몸으로 겨우 강원을 가서 민폐도 많이 끼쳤습니다. 그래도 강원생활은 정말 재미가 있었어요. 강원 졸업 후 얼마 뒤에 비구니 대학이 설립되어 다시 글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비구니대학을 다니면서 접어두었던 강사의 꿈을 조금씩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불교학 연구가 우리나라보다 앞서 있던 일본서적이 공부에 도움은 주었지만 짧은 일본어가 커다란 걸림돌이 되어 앞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일본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어느 어른스님께서 앞으로 살아가는데는 외국어 하나쯤은 능통해야 되니 일본어를 배우고 와서 강사가 되는 것이 어떠냐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크게 용기를 내 일본으로 갔습니다. 처음엔 2~3년을 계획하고 갔습니다만, 조금 지내다보니 그곳에서 학비와 숙식 문제가 해결이 되고, 또 젊은 학생들 속에서 공부를 하는 것도 정말 재미 있었습니다. 어차피 늦게 시작한 공부 끝까지는 해보고자 하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결국 박사과정을 끝내고 10년 만에 귀국을 하였으니 결국 출가해서 계속 글 공부를 한 셈이 됩니다.

 

탁연 스님은 1969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해인사 국일암에서 현오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6년 수원 봉녕사 강원을 졸업하고, 1983년 중앙승가대학을 졸업, 1986~1996년 10년간 일본 도쿄(東京)의 리쇼(굤正)대학에서 불교학 석ㆍ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수원 봉녕사 승가대학에서 강사를 역임했다.


학위를 받고 대학으로 갈수도 있었지만 스님은 원래 꿈인 강원 강사의 길을 선택했다. 스님은 한동안 봉녕사 강사 소임에만 충실히 임했다. 2003년 3월 봉녕사 강사 휴식년을 맞아 벽해 스님이 계시는 산청 심적사로 내려가던 중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 소임을 맡아 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수원 봉녕사 강사로써 6개월간의 휴가를 받았던 기간이었기에 그 기간 동안만 살겠다는 조건으로 소임을 맡겠다고 했다. 조계종 종단 최초로 여성으로서 지도자급 임명이었다.


조계종 31대 총무원장 법장 스님은 총무원장 선거공약으로 비구니부 신설을 내세웠다. 법장 스님은 공약대로 비구니부를 신설하려고 했으나 갖가지 어려움에 부딪혔고 대신 문화부장에 비구니를 임명하게 된다. 비구니 임명은 파격적이었다. 조계종단에 여성의 진출은 사회 이슈가 됐다. 하지만 종단 내부에서는 이를 두고 충돌이 이어졌다.

 

나고 죽음 없는 세상 꿈꾸며 출가 결심
대학 떨어져 출가했단 말 싫어 공부 끝에
진주사범대 합격 통지서 받고 출가해

 

비구니를 최초로 부장에 임명한 것은 파격적이었기에 반발도 심했다고 하던데요.

 

-종단에서 부장 소임은 본사 주지급이라고 합니다. 본사 주지격인 자리를 비구니한테 준다는 것은 그 당시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될 일이라고 생각했던 스님들이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비구니에게 주기에는 아까운 자리라고 생각했고, 조계종단은 비구스님만이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걸핏하면 팔경계법을 들어 말문을 막게 하려던 비구스님들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행정상에 서열을 따지자면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고 철없이 자리만 믿고 비구니가 기고만장할까봐 염려도 됐을 것입니다. 모두가 종단을 사랑하는 애종심의 발로였고, 또 세간법과 출세간법의 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벌써 9년 전 이야기네요. 그때와 지금은 또 달라졌어요. 보는 눈도 높아지고 듣는 귀도 많이 열려 엄청나게 변화 됐다고 봅니다.

 

   

▲ 2005년 조계종 총무원 문화부장에 연임된 탁연 스님이 총무원장 법장 스님에게 임명장을 받고 있다. 〈현대불교 자료사진>

 

가벼운 마음으로 임명장을 받기위해 서울로 올라오는 길. 기자들의 축하 전화가 쇄도했다. 스님은 “보통이 넘는 자리로구나”라고 생각했다. 일부에서는“(총무원에)들어오기만 들어와 보라”며 협박하는 이들도 있었다.


탁연 스님은 총무원에 들어갔다가는 뼈도 못 추리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임명장 수여식 당일 새벽 1시 “임명장 수여 시간인 아침 9시까지 우선 기다려 보고 (총무원에) 갈 때는 누구라도 대동하고 같이 가라”는 전화가 왔다. 오전 10시가 가까워서야 임명장을 받으러 오라는 총무원 측의 독촉 전화를 받았다. 스님은 여차하면 달아나야 하니까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신분증과 비상금, 손에는 가사장삼만 든 채 총무원에 들어섰다. 다행이 총무원은 조용했다. 총무원장 스님 접견실에는 수십 여 명의 기자들이 모여 있었다.

 

문화부장 재직 중 현 조계종 총무원 건물인 불교문화역사박물관 공사를 마무리, 문화재 발굴, 보존 등의 행정능력을 높이 평가 받으며 비구니를 인정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최근 문화부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비구 스님에게도 문화부장을 개방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폐쇄한 적이 없기 때문에 개방도 폐쇄도 없습니다. 제가 잘 살았다고 하는 것은 비구니가 처음으로 들어갔으니까 각 부실장 스님들이 많이 도와주셨기 때문입니다. 문화관광부나 문화재청 등 정부 예산심의 과정 등의 일을 비구니 혼자서 하기에 벅찰 때는 다른 부장 스님들의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행정은 처음 접하는 일이라 항상 묻고 의논을 했어요. 어떤 일이든 부서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지혜를 모아서 처리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습니다. 가끔은 배짱이 필요하기도 했습니다. 설명이 부족해 문제를 만들기 전에 대화의 창을 넓혀서 즐거운 마음으로 충실히 일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노력했었기에 과분한 평가를 받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화부가 확대되었기 때문에 비구니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아무리 커진다고 해도 주어진 일을 감당 못할 비구니는 없습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일지라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좀 모자라는 부분은 서로 보완해주고 모르는 것은 깨우쳐주면서 서로가 힘을 합하면 세상에 못할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로만 화합해야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 진정한 화합의 모습을 아량이 넓은 비구 스님들께서 먼저 실천
해 보이시면 어떨까싶습니다. 아무리 한 부서가 커진다 해도 종단안의 일이기에 종단 스님들이 상생을
하겠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초로 비구니가 총무원의 부서장으로 임명은 받았지만 비구니라는 대명사앞에 가로놓인 큰벽은 21세기라는 시간앞에서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스님은 복장 터질 옛 이야기를 쏟아냈다. 지난 일을 추억
하기 보다는 많은 일을 겪으면서 생긴 지혜와 아쉬움도 함께 털어놨다.

 

2006년의 일이다. 스님은 문화부장으로서 3ㆍ4급 승가고시를 준비하는 비구·비구니에게 성보관리에 대한 강의를 하게 됐다. 강의를 하기 위해 강의 장소까지 갔는데 “비구니에게만 강의를 하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비구가 비구니에게 예를 갖추고 강의를 들을 수 없다는 율사 스님의 반대 때문이었다. 탁연 스님은 납득 할 수 없었다. 율법에는 어긋날 수 있어도, 조계종법에 따라 총무원 집행부의 문화부장으로서 문화에 대한 강의를 하러간 것이기에 제지를 당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비구니에게만 해야하는 강의라면 못하겠다고 돌아와 버렸단다. 스님은 “대학에서는 비구니 교수한테 강의를 듣고 학점을 따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고, 문화부장이 성보관리에 대해 강의를 하는데 그것을 듣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형평성에도 어긋나는 일이다”고 질타했다.

 

탁연 스님은 이 문제를 몇몇 비구 스님들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그냥 가볍게 대꾸했다. 처음 사과라도 받겠다던 생각도 포기했다. 대신 이런 부분이 ‘21세기에 걸맞지 않는 조계종법이구나’라고 넘어가고 말았다. 탁연 스님은 “지금 생각해보면 비구니 스님들에게라도 강의를 하는 것이 이기는 길이었다. 그때만 해도 젊어서 참기가 어려웠다. 우리 종단엔 종법과 율법이 섞여서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처음 임명장을 받았을 때 총무원장스님과 함께 해인사 종정 스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그랬고, 교구본사 주지 스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도, 중앙종회의원 상임분과위원장 스님들의 모임에서도 역시 총무원장스님이 비구니부장을 임명한 것을 놓고 질타의 목소리가 있었다. 스님들은 종헌종법에 ‘비구’라는 단어 옆에‘(니)’를 넣어‘비구(니)’라고 개정을 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결과를 초래했다고 야단들이었다. 함께 자리하고 있는 탁연 스님도 곱게 보지는 않았다.

 

어떤 스님들은 “임명은 원장스님께서 하셨지만 소임을 살고 못사는 것은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고 했다. 또“강원에서 강의만 했으니 무슨 행정을 알겠느냐”는 등 무시와 비아냥거리는 말들을 거침없이 했다. 스님은 몇 번이고 벌떡 일어서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가고 싶었지만 최초 비구니 부장이라는 그 막중한 책임감 때문에 참고 또 참았다.

 

구성원간 대화 통해 지혜 모으면
아무리 조직 커져도 일 못할 비구니 없다
비구니부 설립은 한국불교 발전에 도움돼

 

사회 여성에 비해서 비구니의 종단 내 위상은 10여 년 전과 같습니다. 큰 변화가 없는 이유는 무엇인지요.

 

-아마도 처음 출가 때 부터 오직 한 마음 다스려서 깨달음을 얻겠다고 모든 것을 다 던지고 들어온 것이 제일 큰 이유일 것입니다. 다 버리고 왔는데 새삼스레 무엇인가를 하겠다고 하는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이 두 번째의 이유가 아닌가합니다.


굳이 율법과 종법이라는 큰 울타리가 가로막고 있는데 힘겹게 그 벽을 부수고 넘고 싶은 욕심도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 것이지요. 관습을 파하려면 일단은 깨고 부딪히면서 누군가가 자신을 희생하며 앞장을 서야하는데 아직은 그런 마음들을 일으키지 않았기 때문에 조용히 각자의 길만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1994년‘비구니 위상정립을 위한 대토론회’를 개최하는 등 노력을 했으나 성과가 미비한 것으로 보입니다. 종단법개정특위가 만들어지는 등 종헌법의 개정을 종단 자체적으로 준비하고 있는데, 비구니 스님들께서는 개정과 관련한 어떤 제안을 준비하고 계시는지요?

 

-종헌종법을 개정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일반 세속의 세간법과 달리 출세간법에서는 종단을 운영하기 위한 종법과 성직자로서 지켜야하는 율법이 있습니다. 시대에 맞게 종법을 개정하려하면 율법을 들어 반대를 하기도 하니 법을 개정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부처님께서도 그 시대와 지역에 맞게 법을 개정하라고 하셨으니 현 시대에 맞춰서 율법과 종법을 놓고 크게 저촉이 되지 않는 한도 내에서 개정할 수 있는 것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워낙 예민한 일이라. 비구니 종회의원 스님들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으고 있습니다.

 

비구니의 위상에 비구니부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비구니부가 설립이 되면 안으로는 총무원의 한 부서장으로 자리매김하여 종무행정에 가교가 될 것 입니다. 밖으로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비구니의 특성을 살려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검토하여 개인의 적성에 걸 맞는 교육과 수행과 포교의 영역을 넓혀 간다면 비구니의 위상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1994년부터 이런 주장들은 있어왔지만, 많은 비구니스님들의 대부분이 전국비구니회에서 비구니에 관한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는데 무엇 때문에 다시 비구니부가 설립되어야 하느냐고 반문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구니부가 설립되면 우선 안정적으로 총무원 집행부내에서 종단이 돌아가는 여러 모습을 직접 보고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종단차원에서 비구니의 역할을 찾아 활동영역을 넓혀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한 부서를 운영하는데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문제점이 대두되기 때문에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닌 듯합니다.

 

재가자가 왜 나서서 출가자의 일을 이야기하느냐고도 합니다.

 

-종단을 이끌어가는 구성원은 사부대중인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입니다. 조계종단이라는 하나의 단체를 더불어 함께 이루어 가는 구성원으로서 종단의 발전을 도모함에 있어 문제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시정을 요구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출가와 재가라는 엄연한 구분이 있으니 서로가 지킬 선을 지키면서 정확한 문제점과 그 해결방안에 대해 논의를 하자는데 무작정 반대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비구니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후배 비구니들이 교단 내에서 지도자로 성장하기 위한 중요한 것들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각자가 “나 답게 살아야 된다”고 봅니다. 스님은 스님답게, 스승은 스승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살아갈 때 누군가를 이끌어 갈 지도자가 되리라 봅니다. 수행자로서의 면목을 갖추고 쉼 없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하여 진정한 인격체가 갖춰질 때 자연히 지도자가 되리라 봅니다. 올곧은 신심으로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여성지도자로서 현대를 살아가는 불교여성들에게 지혜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부처님은 현실주의자이십니다. 과거는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다가오지 않았으니 지금 현재 이 시점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라고 하셨습니다. 내일 더 잘하겠다고 미룰 것이 아니라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면 어제도 최선을 다했을 것이고 내일도 최선을 다하게 될 것이니 언제 어디서 되돌아보아도 최선을 다하며 사는 삶이 되겠지요. 최선을 다할 때 가장 아름답고 행복합니다. 그것은 참고 견딤으로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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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無涯心 | 작성시간 12.04.21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 작성자다보탑 | 작성시간 12.04.21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 작성자다정불심 | 작성시간 12.04.21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 작성자dlruddo | 작성시간 12.04.21 _()_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
  • 작성자태백산선녀 | 작성시간 12.04.22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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