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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종단 분규 - ②종정과 총무원장의 첫 대립

작성자獨覺山人|작성시간11.03.02|조회수107 목록 댓글 4

 정화의 주역이었으며 통합 종단 발족 후 종단의 중요 소임을 맡아 불교현대화, 승려교육, 포교 활성화 등 종단 주요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했던 청담스님과 경산스님. 방향이 옳았고 크고 높은 이상을 품었지만 종단 현실이 뒷받침 되지 않아 결국 갈등을 빚어야했다. 1958년 종정 동산스님과 함께 좌우로 선 청담스님과 경산스님. 
 
 정화주역 - 종단발전 힘 모았던 청담 · 경산스님 ‘갈등’
     
1967년 7월25일 해인사에서 제16회 임시 중앙종회가 열렸다. 이 종회는 해인사를 총림으로 지정하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종회였다. 그런데 종회가 열리자마자 종정 청담스님이 총무원장 경산스님의 사퇴를 요구했다. 종회가 열리기 전 종단중진협의회가 열렸다.

 

종단중진협의회는 중앙종회의원이나 총무원 소임이 없지만 대표성을 띠고 있는 스님들이 종단 현안을 놓고 논의하는, 조계종 대표자들이 총망라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을 소집한 것은 종정 청담스님이었다. 종회에서 논의할 사항을 미리 토의하고 조율하자는 취지였다. 1965년 6월12일 통합종단을 이탈한 일부 인사들이 제기한 ‘종헌 결의 및 무효확인 청구 소송’이 원고측의 승소로 결론나자 이에 대처하기 위해 범어사에서 처음 소집된 뒤 1년 만에 열린 회의였다. 비상사태가 발생했다는 의미다.
 
6월23일 열린 종단중진회의에서는 해인사 총림 지정, 승려 재교육, 포교사 양성, 역경, 의제, 가사 등 주로 정화이념을 계승ㆍ발전하고 종단의 발전과 관련된 중요한 안들이 논의됐다. 이 안들은 임시종회에서 모두 다뤄졌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안건은 종정 청담스님이 제기한 총무원장 사퇴였다.
 
청담스님은 중진회의에서 경산스님이 사퇴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청담스님이 경산스님 사퇴를 들고 나온 표면적인 이유는 경산스님이 동국대 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면서 진 빚 4170만원 때문이었다. 재단 이사장과 총무원을 운영하면서 진 빚과 이자였다. 청담스님은 빚 문제를 들어 사표를 요구했고 경산스님은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원장직을 수행해야 한다며 맞섰다.

 

 

청담스님은 이에 대해 그 빚을 갚기 위해 요청한 유임기간이 만료됐으니 더 이상 요청을 들어 줄 수 없다고 했다. 이 안건은 6월25일부터 열린 종회로 넘어가 종회에서 이 문제를 놓고 논의가 오갔다.
 
반드시 사표를 제출해야 한다는 청담스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젊은 스님들을 중심으로 상당수 종회의원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경산스님에 구산스님 녹원스님 등이 사절단을 꾸려 종회의원들의 뜻을 전달하고 연말까지 보류하자는 의견을 제출했다. 그러자 청담스님은 당신이 종정을 사퇴하겠다는 초강수를 둔다. 결국 청담스님의 뜻을 돌리지 못하고 경산스님이 동반 사퇴하는 것으로 결론 맺는다.
 
<사진> 1967년 종정과 총무원장 동반 사퇴라는 초유의 사건을 보도한 당시 불교신문(사진 오른쪽).
 
이 과정을 묘사한 당시 불교신문 보도의 일부분이다. “23일 저녁 8시반부터 중진회의가 시작되자 종정 청담스님은 이번에 총무원장 경산스님이 스스로 물러날 것을 바랐고 그것이 불가능하면 종회에서 법적 절차를 밟아서라도 원장을 물러나게 함으로써 현 종단이 처한 난국을 수습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경산스님은 “내가 원장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야만 종단 빚을 갚을 수 있고 종단의 발전도 가져올 수 있으니 나는 물러날 수 없다”는 태도였고 또 많은 중진 스님들이 경산스님을 두둔하고 나섰다. 그래서 조건부로 유임시킬 것에 대체적인 합의를 본 스님들은 종정의 제1차 배알에서 실패하자 경산스님의 신상발언을 듣고자 했다.
 
신상발언에 나선 경산스님은 두어마디 말을 하다가 그만 구슬같은 눈물을 흘리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 경산스님은 가사자락으로 눈물을 씻고 단물로 목을 축인 다음 중진 스님들과 일반 방청객들로 꽉 찬 회의장 맨 앞에 나아가 ‘죄송합니다’라고 하면서 합장한 채 큰 절을 거듭 세 번했다. 그리고서는 중론에 따라 그 길로 녹원스님, 구산스님과 함께 청담스님을 찾아가 금년말까지 유임키로 하였다는 중진회의의 뜻을 전했으나 종정스님은 결국 사표를 제출하고 행방을 감추어 버렸다.<불교신문 1967년 7월30일자>
 
청담스님이 사표 의사를 종회에서 표시한 것이 25일 오후였으며 다음날 26일 결국 비밀 투표에 붙여 출석의원 43명 중 찬성 23표, 반대 20표 기권 1표로 종정과 총무원장의 사표는 수리된다. 이어 곧바로 제3대 종정에 윤고암스님, 총무원장에 박기종스님을 선출한다. 이날 종회에는 부산 초량동 우체국 소인이 찍힌 이른바 괴문서가 나돌았는데 모두 청담스님을 비방하는 내용이었다. 당시부터 괴문서가 종단을 어지럽혔음을 알 수 있다.
  

1967년 해인사종회서 종정<청담스님>, 총무원장 <경산스님> 사퇴 요구하다 동반 퇴진
 
경산스님 동국대이사장 종단 수장 재직 중 진 빚 거론 퇴진 요구  
종단 발전 의욕 컸지만 현실 뒷받침 되지 않아 무리수 인해 좌초  
제2대 종회부터 화동파 둘러싼 파벌간 갈등도 분쟁의 한 몫 작용
 
그러면 청담스님이 문제를 제기한 빚 4000여만원에는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해야 할 일은 많은데 돈이 없어 무리하게 사업을 벌이다 생긴 빚이었다.

 

종단은 1964년부터 종단 3대사업을 펼치기 시작한다. 종비생, 역경원 설립 등 3대사업을 본격화 한다. 하지만 자금이 없었다. 종단은 의욕에 찬 중흥 사업을 구상한다.

 

1965년 연말 제11회 중앙종회에서 결의한 사업은 웅대하고 의욕에 찼다. 기획위원회가 야심차게 제시한 사업들에는 불교총본산 건립, 승가대학 설립, 전국 각지 포교소 건립, 불교중앙센터 설립, 방송국 설립, 신문사 설립, 역경사업, 사회복지 사업 등 11가지였다.

 

불교중앙총본산은 정릉에 2만8500평 부지위에 승가대학, 법당, 회관, 기숙사, 종정실 등을 두는 총림 격이었다. 예산만해도 48억원에 달했다. 그해 종단 예산이 1200여만원이었다. 게다가 불교센터 건립에 15억원, 방송국 신문사 50억원 등으로 11대 사업에 들어가는 재원이 모두 119억원에 달했다.
 
청담스님 경산스님을 비롯한 당시 모든 종단 중진스님들이 종단 중흥과 발전을 위해 여러 불사를 펼쳐야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당시 불교계는 물론 한국 사회 전체가 가난에 허덕일 때였다.

 

사찰은 재정이 없어 하루 세 끼 끼니도 제대로 해결 못할 정도로 궁핍했다. 게다가 대처 측과 소송으로 인해 종단과 주요 사찰 재정이 대부분 소송비로 탕진됐다. 책정된 예산마저 사찰에서 협조를 하지 않아 종회 단골 안건이 분담금 독려였는데, 기존 사찰 재정으로는 어림도 없는 사업을 구상한 것이다.

 

어쨌든 1966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진행될 이 야심찬 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자금 조달 방안이 나왔다.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거론된 것은 전국 사찰이 보유하고 있는 사찰림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중앙종회에는 각 사찰 영림계획 안을 통과시키며 종단이 구체적인 계획을 입안 하지만 정부의 조림(造林)사업과 맞서 실현이 어려워졌다. 서울 시내 각 산사를 이을 케이블카 건립 구상도 나왔지만 계율에 어긋난다고 해서 포기했다.
 
이런 저런 구상이 나왔다가 최종 확정돼 중앙종회에서 통과한 안이 전국 500만 불교신도를 조직화 하는 방안이었다. ‘중흥불사’안이라는 이름으로 1965년 11월27일 제11회 중앙종회에서 통과한 이 내용의 핵심은 신도회 조직 정비였다. 신도회를 조직해서 어떻게 3대사업 예산을 마련하겠다는 것일까. 신도들은 전국신도회라는 이름으로 뭉쳐있었다.

 

당시 기획위원회에서는 그 수를 대략 60만으로 잡고 있었다. 이를 10년 동안 720만으로 늘여 조직화 하는데 우선 1966년 5월 즉 5개월간 집중적으로 조직화해 300만으로 늘인다는 구상을 했다. 5개월 안에 신도수를 240만명 늘린다는 것이다. 이들 신도들이 내는 회비로 자금을 마련한다는 구상이었다.

 

특별회원은 500원 이상, 평신도 회원은 20원씩, 그리고 특별찬조금 등으로 구성한다는 방안이었다.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방향은 옳았다. 신도 수를 늘여서 이들이 내는 보시금으로 돈을 마련한다는 기본 계획은 종교다운 발상이었다. 조직화를 위해 열성 신도들로 이루어진 재건위원회와 신조대원(信組隊員)을 채용하고 이들이 강습회를 개최하고 조직 선전을 하며 교육을 실시해서 조직을 강화하겠다는 방안이었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12명의 전형위원을 선출하고 본사주지 스님 전원을 당연직으로 하는 60명의 중진 스님을 선출해 신도회 조직을 후원토록 했다. 이 사업은 종회의장 청담스님과 총무부장 경산스님이 합심해서 만들었다. 두 스님은 정화 주역으로 3대 사업을 추진하는데 뜻을 같이했다. 적어도 이때까지 두 스님은 정화 주역으로 머리와 마음을 함께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일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됐다. 700만 불교도 조직을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고 불사를 위해서는 당장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사업체를 인수하는 등 무리수를 두게 된다. 그 과정이 비밀리에 진행되다 보니 종회의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종회의원들은 중대 사업이 종회도 모르게 비밀리에 진행된다며 불만을 제기했고 부실기업을 인수하려다 종회의 반대로 무산되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제2대 중앙종회부터 화동 움직임이 본격화해 대처 측에 중앙종회의 상당수를 할애한다.
 
이로 인해 종회 구성에 변화가 일어났다. 당시 종회의원 51석 중에서 정화를 추진한 청담스님을 따르는 이른바 선학원 계열이 12석, 비구측이면서 청담스님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던 통도사를 중심으로 한 의석이 20명, 화동파가 18명이었다. 화동파가 어느 쪽과 손을 잡느냐에 따라 종단 주도권의 향배가 결정 나도록 이루어 진 것이다. 이 문제는 이후 1969년 청담스님의 종단 탈퇴라는 엄청난 사건으로 비화된다. 이런 가운데 신도회 조직화를 통한 재정 확보 사업이 결국 사고를 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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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地藏行者 | 작성시간 11.03.02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 작성자다정불심 | 작성시간 11.03.02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 작성자無涯心 | 작성시간 11.03.04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 작성자크시티가르바 | 작성시간 13.07.25 나무 지장보살 마하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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