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 좌선에 대하여
선(禪)은 언어(言語)를 초탈(超脫)하고 온 몸과 마음으로 불교(佛敎)의 진실(眞實)과 만나는 실천적(實踐的)인 가르침입니다. 선불교(禪佛敎)가 가장 중시(重視)하는 것은 깨달음입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철저(徹底)한 참선수행(參禪修行)을 통(通)해서 구현(具現)됩니다.
오늘도 수(數)많은 선방(禪房)스님들이 불철주야(不撤晝夜) 정진(精進)하고 있는 그 절대적(絶對的)인 목표(目標) 역시(亦是) 깨달음이며 그 깨달음을 얻기 위(爲)한 전통적(傳統的)인 수행방법(修行方法)이 바로 좌선(坐禪)입니다.
우리는 보통(普通) ‘참선(參禪)’이라고 넓게 말하지만 그 구체적(具體的)인 실천형태(實踐形態)는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좌선(坐禪)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6년 고행(苦行)과 보리달마(菩提達摩)의 9년 면벽(面壁)은 불교수행(佛敎수행)의 상징(象徵)으로 표현(表現)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좌선(坐禪)이란 무엇입니까? 좌선(坐禪)이란 선불교(禪佛敎)의 전통적(傳統的)인 좌법(坐法)에 의(依)해서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화두(話頭)를 참구(參究)하는 수행법(修行法)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학식(學識)이 밝다고 하더라도 좌선(坐禪)으로 닦여진 투철(透徹)한 수행력(修行力)이 없다면 입으로만 참선(參禪)을 하는 것일 뿐 진정(眞正)한 수행력(修行力)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선원(禪苑)의 규칙(規則)을 서술(敍述)한《선원청규》 8권에 수록(收錄)된 <좌선의(坐禪儀)>에서는 “선정(禪定)이 힘이 없다면 죽음의 문(門)에 이르러 눈이 어두워지고 공(空)이나 무(無)에 떨어져서 생사(生死)의 세계(世界)에 유랑(流浪)하게 된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수행자(修行者)는 선정(禪定)의 힘으로 닦여진 지혜(知慧)가 있어야만,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자신(自信)을 감당할 수 있는 안목(眼目)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경전(經典)에 대(對)한 지식(知識)이나 말을 잘 한다고 하더라도 마침내는 미혹(迷惑)과 공포(恐怖) 속에서 갈팡질팡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좌선의(坐禪儀)>에서는 ‘좌선(坐禪)이란 안락(安樂)의 법문(法問)’이라고 합니다. 좌선(坐禪)은 몸과 마음의 안정(安定)을 얻는 방법(方法)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선(坐禪)을 하기에 앞서 몸과 마음의 조화(調和)가 필요(必要)합니다. 몸과 마음을 바르게 가지는 것은 결국(結局) 바른 몸가짐과 마음가짐, 음식(飮食)과 수면(睡眠)에 대(對)한 절제력(節制力)을 갖춘 생활(生活)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나 실제(實際)로 올바른 좌선(坐禪)과 화두(話頭)공부를 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발심(發心)을 했거나 선(禪)에 관심(關心) 있는 불자(佛子)들은 무엇보다도 먼저 선지식(善知識 : 스승)을 찾아뵙고 선수행(禪修行)의 기초(基礎)부터 철저(徹底)하게 다져야 합니다.
흔히 우리는 좌선(坐禪)을 번잡(煩雜)한 세속(世俗)에서 벗어나기 위(爲)한 선승(禪僧)들의 명상(冥想)이거나 세속(世俗) 자체(自體)를 부정(否定)하고 홀로 고고(고고(孤高))함과 청정(淸靜)을 즐기는 신선(神仙)놀음으로 생각(生角)합니다. 또는 일종(一種)의 정신건강법(精神健康法)으로 생각(生角)합니다.
그러나 좌선(坐禪)은 불도(佛道)를 깨닫고 실천(實踐)하기 위(爲)해서 닦아야 하는 불교(佛敎)의 가장 기본적(基本的)인 수행덕목(修行德目)입니다. 결코 세속도피(世俗逃避)를 위(爲)한 명상(冥想)이 아니며 세속(世俗) 자체(自體)를 부정(否定)하는 독선적(獨善的)인 수행법(修行法)이거나 단순(單純)한 건강법(健康法)도 아닙니다.
(일지)
“왕초보, 불교박사 되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