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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차 세계대전

작성자셔틀콕|작성시간08.12.20|조회수47 목록 댓글 0
First World War, Great War라고도 함.
유럽 국가 대부분과 러시아, 미국, 중동 및 그밖의 지역에 있는 나라들이 대거 참여한 국제적인 전쟁(1914~18).
[개요]

제1차 세계대전중의 유럽과 지중해
동맹국(주도국은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과 연합국(주도국은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일본이며 1917년부터 미국도 가담)이 맞서 싸운 이 전쟁은 동맹국의 패배로 끝났고, 4개의 거대한 제국(독일·러시아·오스트리아-헝가리·터키)의 몰락을 가져왔다. 그결과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났고, 유럽의 불안정은 제2차 세계대전의 불씨가 되었다.


[전쟁의 발발]

1910년까지 유럽의 주요국가들은 독일·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3국동맹이나 프랑스·영국·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3국협상에 가맹함으로써, 잠재적 적대관계에 있는 2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일어났다.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남부 슬라브족의 '해방'을 위해 사라예보를 순방중인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것이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최후 통첩을 보내 굴욕적인 조건을 제시하고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경우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했다. 이같은 결정의 배후에는 독일이 러시아의 개입을 막아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7월 25일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의 요구를 거의 다 받아들였지만, 2가지만은 거부했다. 세르비아 관리 해임권을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넘기라는 요구와 세르비아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반(反)오스트리아-헝가리 저항조직을 오스트리아-헝가리 관리들이 직접 고발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가 그것이다. 세르비아는 이 문제를 국제 중재에 맡기자고 제의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세르비아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부분동원령을 내렸다. 실제로 선전포고가 이루어진 것은 7월 28일이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 포병은 이튿날 베오그라드에 대한 포격을 개시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항하여 부분동원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러시아와의 접경 지역에 동원태세를 갖추자 7월 30일 총동원령을 내렸다. 7월 31일에 독일은 동원령 중지를 요구하는 24시간 시한의 최후 통첩을 러시아에 보냈고, 프랑스에는 러시아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 경우 중립을 지키겠다고 약속할 것을 요구하는 18시간 시한의 최후통첩을 보냈다. 러시아와 프랑스는 예상대로 이 요구를 묵살했다. 8월 1일 독일은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러시아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자 프랑스도 총동원령을 내렸다. 8월 3일에 독일은 프랑스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8월 3~4일 밤, 독일군이 벨기에를 침공했다. 그러자 영국이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영국은 세르비아와 아무 관계도 없었고 러시아나 프랑스를 위해 싸울 의무도 없었지만, 벨기에를 지키겠다는 뚜렷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 8월말까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와 일본 및 벨기에에 대한 전쟁 선포를 끝냈고, 세르비아와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했으며, 프랑스와 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해, 그리고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에 대해 선전포고했다. 루마니아는 중립을 유지했다. 이탈리아는 1912년에 독일 및 오스트리아-헝가리와 3국동맹을 맺었으나 침략전쟁일 경우에는 지원할 의무가 없을 뿐더러, 영국에 대항하는 경우에는 어떤 동맹에도 가담할 의무가 없었다. 1914년 9월 5일 러시아·프랑스·영국은 동맹국과 개별적으로 단독 강화조약을 맺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런던 조약을 체결했다.

1914년 8월에 전쟁이 일어나자, 애국심의 물결이 유럽 전역을 휩쓸었다. 유럽 강대국들 사이에 벌어진 이 전쟁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고 또 얼마나 엄청난 재난을 가져올 수 있는가를 상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대다수는 이 전쟁을 국가적 필요성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참여한 방어전으로 생각했거나, 폭력에 맞서서 정의를 지지하고 조약의 신성함과 국제적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라는 이상주의적 견해를 갖고 있었다.

연합국은 전체 인구와 산업 및 군사적인 면에서 동맹국보다 훨씬 많은 자원을 갖고 있었으며, 대서양을 끼고 있어서 중립국(특히 미국)과 교역하는 데도 훨씬 유리했다. 반면에 동맹국은 독일의 우월한 군사기술 덕분에 초반의 수적 열세를 만회했다(연합군 병력은 통틀어 300만 명이 넘었지만, 동맹군의 총병력은 230만 명 정도였음). 따라서 1914년 8월에는 동맹국과 연합국 사이에 거의 세력 균형이 이루어져 어느 쪽도 신속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해군력에서는 연합국이 동맹국보다 거의 2배나 우세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독일의 우수한 기술 덕분에 영국 해군의 수적 우세를 상쇄할 수 있었다. 독일은 거리측정기와 탄약고 방호물, 탐조등, 어뢰·수뢰 따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은 우세한 해군력으로 독일을 봉쇄할 수 있었고, 이 봉쇄는 해외물자 수입을 방해하여 독일의 군사력을 차츰 약화시켰다. 전쟁 기술의 발전은 양쪽의 작전 계획과 수행에 영향을 주었다.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 이후 전쟁 기술의 향상으로 개발된 주요무기는 기관총과 속사 야포였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표1. 교전국의 국력, 표2. 교전국의 지상군(1914.8)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전쟁의 초기 단계]
  • 초기 전략
  • 슐리펜 계획

    1914년에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오래전부터 독일은 동쪽(러시아)과 서쪽(프랑스)의 두 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고 있었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병력을 합치면 동맹국 전체의 병력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기 때문이다. 1891~1905년에 독일군 참모총장을 지낸 알브레히트 폰 슐리펜 백작은 러시아군의 느린 기동력과 비효율성을 이용한 독특한 전략을 개발했는데, 동부전선에서는 동원 속도가 느린 러시아군을 최소한의 병력으로 막는 방어전만 펴는 대신, 프랑스와 대치하고 있는 서부전선에 거의 모든 병력을 집중하여, 프랑스 북쪽의 중립국 벨기에를 뚫고 신속하고 결정적인 선제 공격을 취한다는 전략이었다. 서쪽과 남쪽으로 신속히 진격하면 독일은 몇 주일 만에 파리를 점령하여 프랑스를 굴복시킬 수 있을 것이고, 서부전선에서 안전을 확보한 다음에는 병력을 동쪽으로 이동하여 러시아를 쳐부술 수 있으리라는 것 이 전략의 주안점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개전 초기에는 순수한 형태로 적용되지 않았다. 슐리펜의 후임자인 헬무트 폰 몰트케는 공격력을 대폭 줄였기 때문에, 독일이 초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것이 그의 책임이라는 비난을 자주 받는다.

    동부전선 전략

    러시아령 폴란드는 서쪽의 독일령 폴란드와 남쪽의 오스트리아령 폴란드(갈리치아)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동맹국의 협공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그 취약한 지역을 서둘러 침공할 생각이 없었다. 반면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러시아의 공세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선수를 쳐야 한다면서 당장 전투에 착수할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몰트케는 오스트리아군과 독일군이 각각 동서 양쪽으로 양동작전(陽動作戰)을 편다는 데 동의했다. 독일군이 프랑스 쪽으로 공세를 취하는 동안 오스트리아군은 북동쪽의 러시아령 폴란드를 침공하여 러시아의 발목을 잡아둔다는 전략이었다. 러시아는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오스트리아 전선에 집중하고, 동원을 끝낼 때까지는 독일에 대해 어떤 조치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독일의 압력을 받고 있던 프랑스는 동프로이센의 독일군과 갈리치아의 오스트리아군에 대해 공세를 취하도록 러시아를 설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런 공세를 벌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서부 연합국 전략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군 고위 사령부는 독일과 다시 싸우게 될 경우, 예기치 못한 침공에 대하여 초기에는 일단 방어 태세를 취한 다음 반격에 나선다는 전략을 세워두고 있었다. 그러나 1911년에 참모총장에 임명된 J.-J.-C. 조프르 장군은 공세적 전략인 제17계획을 수립했고, 프랑스는 이 계획에 따라 1914년 전쟁에 임했다. 그러나 제17계획은 몇 가지 맹점을 지녔다.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경우 독일의 전력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했으며, 다가올 공격의 방향과 대상 지역도 잘못 판단했다. 또한 이 계획에 의하면,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할 경우 벨기에를 통해 들어올 것이며 아르덴을 지나는 경로를 택할 것이기 때문에 독일군의 병참선을 쉽게 공격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즉각적이고 전반적인 공세가 유리하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제17계획에 따르면 프랑스는 로렌 지방으로 들어가 자르 지방으로 진격하기로 되어 있었지만, 독일의 막대한 병력이 프랑스군의 왼쪽(북쪽) 날개 지역을 겨냥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 1914년의 서부전선
  •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연합군의 이동(1914. 8∼9)
    독일군은 8월 4일 아침에 국경을 넘어 벨기에로 쳐들어갔다. 프랑스와 독일 접경 및 프랑스와 벨기에 접경에서 초기에 벌어진 프랑스군과 독일군의 충돌을 통칭하여 국경전투라고 부른다. 8월 14일부터 9월 6일의 제1차 마른 전투까지 계속된 이 일련의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의 가장 규모가 큰 전투였을 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최대 규모의 전투였다. 이 전투에는 양쪽을 합하여 200만 명이 넘는 병력이 참가했다. 프랑스군이 초기에 로렌 지방의 모랑주-사르부르 전투에서 패배한 뒤, 9월초에 프랑스 정부는 보르도로 피난했고, 파리는 포위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으며, 군인들은 10~12일 동안 마른 강까지 퇴각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러나 조프르 장군은 위험을 무릅쓰고 반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결과 벌어진 것이 제1차 마른 전투이다. 그후 3년 동안 서부전선의 전형적 특징이 된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영국 원정군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군은 대규모 진격으로 신속하게 완승을 거둠으로써 프랑스를 분쇄하려는 독일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 승리 덕분에 파리는 독일군의 점령을 피할 수 있었고, 독일군은 65~80km나 후퇴했으며,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다는 프랑스의 자신감이 되살아났다.

    서부전선에서 진정한 참호전이 시작된 것은 제1차 엔 전투 때였다. 양쪽은 당장 정면공격에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기 때문에, 정면공격 대신 병력을 옆으로(이 경우에는 북해와 영국해협 쪽으로) 전개하여 적군의 측면을 에워싸는 것이 유일한 대안임을 알아차렸다. 이리하여 '바다로의 경주'가 시작되었다. 양쪽의 참호망은 순식간에 북서쪽으로 뻗어나가 벨기에 해안 바로 안쪽에서 대서양에 이르렀다. 연합군과 독일군의 다음 번 격돌은 벨기에 서부의 이프르에서 벌어졌다. 이 대결은 교착상태에 빠진 채 1917년까지 계속되었다. 1914년말까지 프랑스는 38만 명의 전사자와 60만 명의 부상자를 냈고, 독일군은 그보다 약간 적은 수의 병력을 잃었다. 긴장과 피로에 시달린 양쪽은 참호전에만 전념했다.

    ▷상세한 정보를 보시려면 표3. 영국과 독일의 해군(1914.8) 도표를 참조하십시오.


  • 1914년의 동부전선과 그밖의 전선
  • 동부전선

    동부전선(1914∼17)
    동부전선은 서부전선보다 길고 양쪽의 장비와 능력이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교착 상태에 빠진 서부전선과는 달리 전선이 유동적이었다. 독일군은 타넨베르크(지금의 폴란드 스텡바르크) 전투(1914. 8. 26~30)에서 일찌감치 승리를 거두었다. 프랑스는 독일군에 대해 공세를 취할 것을 러시아에 거듭 촉구했다. 러시아군 총사령관 니콜라이 대공은 이 요구에 충실히 따랐지만 시기가 너무 일렀다. 러시아의 복잡한 전쟁 기구가 미처 준비를 갖추기도 전에 동프로이센에 대한 협공을 시작했던 것이다. Ya. G. 질린스키 장군의 총지휘 아래 P. K. 렌넨캄프 장군과 A. V. 삼소노프가 이끄는 러시아의 2개 야전군이 8월에 독일의 동프로이센을 침공했다. 렌넨캄프는 8월 20일에 굼비넨(지금의 러시아 구세프)에서 공격에 성공했지만, 삼소노프와 연락을 유지하는 데는 실패했다. 독일군 사령관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막스 호프만 중령이 수립한 작전 계획에 따라 모든 병력을 투입하여 타넨베르크 바로 남쪽의 우즈도보 근처에 고립되어 있는 삼소노프를 공격했다. 삼소노프는 그후 며칠 동안 병력의 절반가량을 잃고 퇴각했으며, 9월 중순까지는 모든 러시아군이 동프로이센에서 쫓겨났다. 10만 명의 러시아군 병사가 포로로 붙잡혔고, 절망에 빠진 삼소노프는 총으로 자살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러시아가 동프로이센을 침공해준 덕분에 마른 강으로 다시 진격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침공을 막기 위해 독일이 서부전선에서 2개 군단을 빼내어 동프로이센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동프로이센에서 러시아의 위협이 사라지자 독일은 대다수 병력을 폴란드 서부로 돌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8월 20일에 선제 공격을 가한 오스트리아군이 러시아의 반격에 밀려 퇴각한 상태였다.

    세르비아 전투

    세르비아를 침공한 오스트리아군은 처음에는 수적으로 열세였고, 세르비아의 유능한 사령관 라도미르 푸트니크는 체르 산(8. 15~20)과 샤바츠(8. 21~24)에서 승리하여 오스트리아의 첫번째 침공을 초기에 막아냈다. 그후 푸트니크는 북쪽으로 진격을 계속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이 세르비아의 서부전선에 대한 2번째 공격을 개시했기 때문에 북진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몇 주일 동안 교착상태가 계속된 뒤 오스트리아군은 3번째 공격을 개시하여 콜루바라 전투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고, 결국 세르비아군은 11월 30일에 베오그라드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세르비아군은 반격에 나서 12월 15일에는 이미 베오그라드를 탈환했다.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했고, 세르비아는 그후 오랫동안 오스트리아의 공격권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스만 투르크(지금의 터키)가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한 것은 독일의 전시 외교가 거둔 커다란 성공 가운데 하나였다. 청년 투르크당의 지도자 엔베르 파샤는 독일과 동맹을 맺는 것이 투르크에 가장 유리하고, 특히 보스포로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을 저지하는 보호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8월에 투르크는 독일이 오스트리아-헝가리편에 가담해 러시아와 싸운다면 독일편에 가담하겠다고 은밀히 약속했다. 그러나 뜻밖에 영국이 독일에 맞서서 참전했기 때문에 투르크는 겁을 먹고 주춤거렸다. 그러다가 독일 전함 2척이 다르다넬스 해협에 도착하자 투르크는 영국 선박들을 억류하기 시작했고, 그밖에도 영국에 대한 도발에 가담했다. 이윽고 투르크 함대는 오데사를 비롯한 러시아 항구들을 포격했다(10. 29~30). 러시아는 11월 1일에 투르크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고, 11월 3일에 투르크가 다르다넬스 해협의 바깥쪽 요새들을 비효율적으로 포격하자 11월 5일에 연합국도 러시아의 뒤를 이어 투르크에 선전포고를 했다.

    1914~15년의 해전

    개전 당시 가장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두 나라는 영국과 독일이었다. 그러나 두 맞수는 어느 쪽도 상대와 직접 대결하기를 원치 않았다. 영국은 주로 교역로를 보호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고, 독일은 기뢰와 잠수함 공격으로 영국의 수적 우세를 차츰 파괴하여 동등한 조건에서 대결할 수 있게 되기를 원했다. 두 나라 해군이 처음으로 치른 중요한 교전은 1914년 8월 28일에 헬골란트 섬에서 벌어졌다. 영국의 해군 제독 데이비드 비티 경이 함대를 이끌고 독일 해역에 들어와 여러 척의 독일 경순양함을 침몰시키거나 파괴했다. 그후 몇 개월 동안 독일 해군은 유럽이나 영국 해역에서 잠수함 전투에만 의존했다. 독일 해군은 영국 교역로를 오가는 상선만이 아니라, 인도와 뉴질랜드 및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유럽이나 중동으로 가는 병력 수송선도 위협했다. 교전국들은 전투만이 아니라 적국의 교역을 방해하는 데도 많은 해군력을 투입했다. 개전 직후 영국은 외국에서 독일에 공급되는 모든 물자를 차단하기 위해 독일에 대한 경제 봉쇄를 전개했다. 1915년 1월 30일 독일은 일본의 정기여객선 2척을 사전 경고 없이 어뢰로 공격하여 전투를 한 단계 더 진전시켰다. 2월 4일 독일은 이 해역 내의 모든 연합국 상선을 파괴할 것이며 이 해역에 들어오는 모든 선박은 적이든 아니든 상관 없이 무차별로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어서 독일은 영국의 주변 해역을 2월 18일부터 전쟁지역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제한적인 성과밖에 거두지 못했다. 작전을 시작한 첫 주에 연합국 소속이나 연합국으로 향하는 선박 11척이 공격을 받아 그 가운데 7척이 침몰했지만, 1,370척이 무사히 항해했다. 영국의 광범위한 대잠수함 조치는 독일 해군의 U-보트 부대를 끊임없이 괴롭혔다. 독일의 잠수함 공격으로 독일에 대한 중립국들의 적개심이 차츰 높아졌다. 이것은 독일로서는 영국의 어떤 대책보다 더 나쁜 결과였다. 연합국의 정기여객선 2척이 침몰하고 미국이 여기에 항의한 뒤, 1915년 봄에 독일은 앞으로 정기 여객선을 공격할 경우에는 우선 승객의 안전을 확보하겠다고 약속했다. 독일은 또다른 정기 여객선 1척을 어뢰로 공격한 뒤, 미국을 더이상 자극하지 않으려고 영국해협과 영국제도 서쪽에서의 잠수함 작전을 중단했다.


    [교착기]
  • 1915~16년의 전략 경쟁과 다르다넬스 작전
  • 양쪽은 제각기 교착 상태를 타개할 수 있는 해결책을 모색했고,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타개를 시도했다. 1914년 9월에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의기소침한 몰트케의 후임으로 독일군 참모총장이 되었다. 1914년말 그는 최종 결전을 벌이게 될 무대는 서부전선이겠지만 가까운 장래에 실제로 작전을 벌일 수 있는 무대는 동부전선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소모전에 대비하여 팔켄하인은 독일의 자원을 개발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독일은 참호 파는 기술을 어느 나라보다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또한 예비병력의 측면 이동을 위해 군용철도를 확장했다. 독일은 군수품 보급문제와 군수품 제조를 위한 원료조달문제에 정력적·포괄적으로 달려들어 1915년 봄부터는 충분한 물량을 확보했다. 이런 경제조직과 자원활용은 독일이 영국의 경제 봉쇄에 저항할 수 있었던 힘의 비결이었다.

    연합국은 전략을 둘러싸고 두 진영으로 분열되었다. 조프르는 프랑스에 있는 독일 참호선을 계속 공격하자고 주장했다. 독일의 전략을 지배한 것은 점령한 땅을 계속 지키려는 욕망인 반면, 프랑스인들을 지배한 것은 잃은 영토를 되찾고 싶은 욕망이었다.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영국이 제안한 해결책은 전술적 목적과 전략적 목적으로 나뉘어 있었다. 전술적 목적의 해결책은 기관총의 공격에도 끄떡없이 참호를 넘어갈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하여 참호 장벽을 뚫는 것이었다. 이런 기계를 발명하면 공격력에 대한 방어력의 새로운 우세 때문에 뒤집힌 전술적 균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이런 기계에 대한 착상은 1916년에 탱크라는 무기가 개발됨으로써 열매를 맺었다. 반면에 영국의 일부 전략가들은 난공불락인 독일의 서부전선을 돌파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발칸 반도를 통해 공격하거나 독일의 발트 해안에 상륙함으로써 동맹국 군대의 배치를 바꾸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략을 둘러싼 논쟁은 결국 프랑스측의 승리로 기울어졌고, 연합국은 서부전선에 노력을 집중했다.


  • 1915년의 서부전선
  • 서부전선의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더글러스 헤이그 경이 이끄는 영국 제1군은 1915년 3월 10일에 뇌브샤펠에서 새로운 전략을 시도했다. 제1군 포병대가 우선 1,800m 전방에 집중 포격을 퍼부은 다음, 35분 뒤에 사정거리를 늘려 2번째 포격을 시작했다. 영국군 보병대는 이 2번째 포격의 엄호를 받으며 첫번째 포격으로 초토화된 참호를 공략할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확실한 전략적 잠재력을 갖고 있었지만, 탄약 부족으로 2번째 엄호사격이 불충분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보병대의 공격개시가 5시간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독일군은 저항할 병력을 다시 모을 수 있었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는 대체로 방어태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1915년 4월 22일 독일군은 이프르에서 서부전선에서는 처음으로 염소 가스를 사용했다. 이 공격은 제한된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1915년에 이루어진 연합군의 공격은 대부분 실패로 끝나, 연합군에 막대한 손실을 안겨주었다. 실패한 이유는 주로 연합군이 오랫동안 포격을 퍼부은 다음에 기습할 기회를 놓쳤기 때문이고, 예비병력의 지원이 너무 늦게 도착했기 때문이다.


  • 1915년의 동부전선
  • 1915년에 러시아는 북쪽과 갈리치아 지역의 측면을 강화한 다음 서쪽의 슐레지엔으로 다시 진격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독일군 사령관 루덴도르프는 동프로이센에서 갑자기 동쪽으로 진격하여 아우구스토프 숲에서 러시아군 4개 사단을 포위했다. 오스트리아군은 갈리치아 전선에 대한 압력을 줄이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 달라고 요구했고, 팔켄하인은 전반적인 소모전 전략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오스트리아군을 기꺼이 지원하고자 했다. 그의 소모전 전략은 러시아에 끊임없는 공세를 취함으로써 결정적 승리를 거두고 싶어하는 루덴도르프의 야심과 이미 갈등을 일으키고 있었다. 최종 계획안은 고를리체에서 투추프까지 29km에 이르는 전선을 공격함으로써 갈리치아의 두나예츠 강 지역에 있는 러시아군의 중앙부를 강타한다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원수가 지휘한 고를리체 공격은 5월 2일에 시작되어 예상밖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5월 14일에 독일군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바로 인접한 폴란드 동남부의 산 강 유역에 이르러 있었다. 공세를 강화하기 위해 서부전선에서 빼돌린 지원 병력이 도착했고, 이들은 프셰미실과 렘베르크(지금의 우크라이나 리보프)를 공략하여 러시아 전선을 둘로 나누었다. 러시아군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 마켄젠을, 그리고 나레프 강 유역에는 힌덴부르크를 오랫동안 묶어놓았기 때문에 아직 봉쇄되지 않은 틈을 통해 러시아군의 주력부대는 동쪽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이리하여 동맹국은 러시아의 전투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 그밖의 전선(1915~16)
  • 카프카스 전선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에 형성된 카프카스 전선은 2개의 전투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서쪽의 아르메니아였고, 또하나는 동쪽의 아제르바이잔이었다. 진격한 러시아군은 1915년 1월에 사라카미스와 아르다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러나 보급품이 충분하지 못한 상태에서 카프카스의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있던 투르크군은 전투보다 추위와 체력 소모로 훨씬 많은 병력을 잃었다. 1915년 9월에 러시아의 니콜라이 황제는 숙부 니콜라이 대공을 다시 러시아군 총사령관 자리에 앉혔다. 대공은 카프카스에 있는 부대를 지휘하러 떠났고, 1916년 1월에 N. N. 유데니치 장군과 함께 투르크령 아르메니아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개시했다. 이 공격의 성공으로 러시아는 에르주룸과 트라브존 및 에르진잔을 점령했다.

    영국군이 1914년 11월 페르시아 만으로 강물이 유입되는 곳에 위치한 투르크 항구 바스라를 점령한 것은 페르시아 남부의 유전과 아바단 정유소를 보호해야 한다는 필요성 때문에 전략적인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영국군은 1915년 5, 6월에 티그리스 강을 거슬러 알쿠르나로 진격했다. 그러나 작전을 개시하기 전에 실제상황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결과를 충분히 계산했어야 했다. 영국군은 진격을 계속하여 바그다드로 향했지만, 11월말에는 진격을 중단하고 알쿠트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16년 4월 29일, 영국군은 투르크군의 포위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이집트 전선

    영국군은 갈리폴리에서 철수한 뒤에도 이집트에 25만 명의 병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영국은 투르크가 팔레스타인에서 시나이 산맥을 가로질러 수에즈 운하를 위협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러나 T.E. 로렌스의 반격으로 투르크에 매우 중요한 헤자즈 철도가 끊길 위험에 처해졌다. 그러자 영국군은 1916년 12월에 대규모 공세를 취하여 시나이 사막에 있는 투르크의 전초 기지 몇 군데를 점령했다. 그러나 영국군은 투르크가 가자에서 항복하려던 때인 1917년 3월에 소심하게도 가자에서 철수해버렸다.

    이탈리아 전선

    영국·프랑스·러시아는 1915년 4월 26일에 이탈리아와 비밀리에 런던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을 통해 연합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 일부를 이탈리아에 떼어주는 대신, 이탈리아는 3국동맹의 의무를 버리고 연합국편에 가담한다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1915년 5월 23일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이탈리아군 사령관 루이지 카도르나 장군은 동쪽 공격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1915년 5월말의 첫번째 진격은 이손초 강의 홍수 때문에 곧 중단되었고,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카도르나는 진격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끈질긴 공격을 거듭했다. 이 일련의 공격을 이손초 전투라고 부른다. 처음 4차례의 전투(6. 23~7. 7, 7. 18~8. 3, 10. 18~11. 4, 11. 10~12. 2)에서 이탈리아는 28만 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소득은 전혀 없었다. 8월 28일에 이탈리아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후 3개월 동안 이손초 강에서는 아무 성과도 없는 3차례의 공격이 거듭되었다. 1916년말까지 이탈리아는 50만 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여전히 이손초 강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살로니카 원정

    오스트리아는 1914년에 세르비아 침공을 3차례 시도했지만, 세르비아의 반격으로 여지없이 격퇴당했다. 1915년 9월 6일 동맹국은 세르비아 영토를 일부 떼어준다는 미끼로 불가리아를 끌어들여 조약을 맺었다. 불가리아는 러시아의 최후 통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10월 11일에 세르비아 동부를 공격했다. 연합국은 중립국인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지방에 있는 항구도시 살로니카를 통해 지원군을 보내기로 서둘러 결정했다. 그러나 불가리아군은 스트루마 강 동쪽에 있는 마케도니아 지방을 휩쓸었을 뿐만 아니라, 모나스티르(지금의 마케도니아 비톨라)를 거점으로 하여 마케도니아의 플로리나 지역을 침공했다. 연합군은 반격을 개시하여 1916년 11월에 모나스티르를 탈환했지만, 1917년 3~5월에 벌인 좀더 야심적인 작전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연합국은 살로니카 전선에 약 50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음에도 실질적으로 동맹국을 전혀 괴롭히지 못했다.


  • 1916년의 중요한 전개
  • 서부전선

    서부전선의 주요전투(1916)
    영국이 새로운 병력을 계속 보충하고 군수품 공급이 점점 늘어난 것은 그 어느 때보다도 대규모로 공세를 벌여 참호전의 교착 상태를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1915년 12월에 프랑스·영국·벨기에·이탈리아의 군부 지도자들은 러시아군과 일본군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조프르의 사령부에서 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1916년에 프랑스·영국·러시아·이탈리아가 동시에 총공격을 개시한다는 원칙을 채택했다. 그러나 독일의 군사 행동 때문에 이 계획은 혼란에 빠졌고, 결국 영국군의 공격만이 제대로 시행되었다.

    1915~16년 겨울에 이르자 팔켄하인은 러시아를 무력한 존재로, 그리고 이탈리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여기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프랑스에 대해 적극적인 군사 작전을 전개할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했다. 프랑스가 무너지면 영국은 유럽 대륙에 효율적인 군사동맹국을 전혀 갖지 못하게 되며, 따라서 육상 작전보다는 잠수함 작전으로 영국을 굴복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팔켄하인은 서부전선에서는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전선을 돌파할 필요가 없고, 결정적인 공격 지점을 선택하여 프랑스군의 병력 손실을 노려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베르됭과 그 주변에 집결된 요새들을 선택했다. 베르됭은 독일군의 주요수송로를 위협하고 있었으며, 프랑스 전선의 돌출부로서 수비대의 행동 반경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스군 수뇌부는 독일의 작전 계획에 대한 경고를 무시했고, 1916년 2월 21일 개전 이래 최대의 독일군 포격이 베르됭 주변의 참호들을 초토화시켰다. 베르됭 전투는 제1차 세계대전중 가장 길고 가장 격렬하며 가장 피비린내 나는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독일군의 진격은 6월말까지 계속되었지만, 연합군은 1916년 7월 1일에 마침내 솜 강 연안에서 반격을 개시했다(→ 제1차 솜 강 전투).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솜 강 북쪽에 펼쳐진 34km의 전선에서 정면공격을 시작했을 때, 독일군은 안전하게 참호를 파고 전략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1주일 동안 포격을 퍼부은 뒤 영국군 보병대는 '참호를 빠져나와' 과감한 공격을 전개했지만, 사실상 난공불락인 독일군 진지를 공격하다가 차례로 총에 맞아 쓰러졌다. 영국군은 공격 첫날 6만 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다. 9월에 영국은 새로운 무기인 탱크를 처음으로 전쟁에 도입했지만, 이 탱크는 전투에서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 솜 강 공격은 차츰 소모전으로 변했다. 그러나 연합군은 베르됭에 대한 독일군의 압력을 줄이는 데 성공했고, 덕분에 프랑스군은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다. 12월 중순까지 프랑스군은 포르두오몽과 포르보를 탈환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 함대와 독일 함대 사이에 벌어진 전투 중 유일하게 중요한 것은 1916년 여름 덴마크 유틀란트 반도 앞바다인 북해 어귀의 스카게라크 해역에서 벌어졌다.

    영국 해군 정보국은 독일의 리하르트 셰어 제독이 5월 31일에 '대양함대'를 이끌고 출항했다는 사실을 영국 해군 제독 존 러슈워스 젤리코와 데이비드 비티에게 알렸다. 전투 순양함들로 구성된 정찰함대를 이끌던 비티는 프란츠 폰 히퍼 제독 휘하의 독일 정찰함대를 발견하고 추격했다. 독일 정찰함대는 주력 함대 쪽으로 달아났다. 오후 4시경 양쪽은 포격을 개시했다. 영국군은 심한 손실을 입고 주력 함대 쪽으로 후퇴했다. 독일 함대가 그 뒤를 추격했다. 오후 6시경, 양쪽의 주력 함대가 마주쳤다. 다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다. 해질녘에는 영국군이 유리해졌고, 셰어는 곧 젤리코와 마찬가지로 뱃머리를 돌렸다. 그러나 독일 함대가 본국으로 가려고 다시금 뱃머리를 돌렸을 때, 영국 함대와 정면으로 맞닥뜨렸다. 양쪽 함대가 서로 엇갈려 지나갈 때 충돌이 일어나 더 많은 배가 침몰했다. 양쪽은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했다. 독일이 승리를 주장한 것은 이 전투에서 영국의 손실이 더 컸기 때문이고, 영국이 승리를 주장한 이유는 북해의 제해권을 계속 장악했기 때문이다.

    동부전선

    1916년 7월 러시아군은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다. 이 공격은 사실상 제정 러시아 최후의 군사 작전이 되었다. 이 작전을 지휘한 A. A. 브루실로프의 이름을 따서 브루실로프 작전이라고 불린 이 공격은, 초기에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에 어떤 저항에도 끄떡없이 '증기 롤러'처럼 밀고 나아가는 러시아의 뚝심에 대한 연합국의 환상이 되살아났을 정도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공격은 러시아 제의 죽음을 알리는 종을 울린 것이었다. 6월 4일에 브루실로프는 우선 타르노폴과 체르노비츠 지구에서 오스트리아군의 허를 찌르는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체르노비츠를 점령했다. 그러나 전선의 다른 지역에 있는 무능한 지휘관들과 러시아 군부 내부의 빈약한 연락망 때문에 러시아군은 계속 승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버렸다. 9월초에 이르자 여름에 거둔 승리를 이용할 수 있는 기회도 사라졌다. 브루실로프는 러시아군 병력 가운데 100만 명을 잃었다. 이 손실 때문에 러시아군의 사기와 전력이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브루실로프의 공격은 간접적으로 중요한 결과를 낳았다. 우선 이 공격 때문에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최소한 7개 사단을 빼낼 수밖에 없었고, 그결과 베르됭 전투와 솜 강 전투에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크게 줄어들었다. 둘째, 이 공격은 루마니아의 불행한 참전을 촉진했다. 루마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영토 일부를 떼어 주겠다는 연합국의 유혹에 넘어가 1916년 8월 27일에 오스트리아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다. 또한 루마니아는 동맹국이 다른 전선에 몰두하느라 루마니아의 공격에 재빨리 대응하지 못하리라고 믿었다. 동맹국은 8월말에 루마니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트란실바니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12월 6일에 부쿠레슈티를 함락했다.

    강화교섭 노력과 미국의 정책

    1916년에 이르자 평화가 찾아올 가장 큰 가능성은 오직 강대국의 두 지도자(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독일 총리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태도에만 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1916년 12월 8일, 윌슨은 교전중인 양대 진영에 대해 '전쟁의 목적'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어서 1917년 1월 22일 윌슨은 국제화해와 '승리 없는 평화'를 호소했다. 영국은 윌슨의 중재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은밀히 밝혔다. 오스트리아-헝가리도 역시 평화 제의에 귀가 솔깃했겠지만, 독일은 이미 잠수함 전투에 너무 깊이 말려들어가 있었다.

    독일의 전략과 잠수함 전쟁

    독일의 해군 전략은 군사 목적과 민간 목적으로 나뉘어 있었다. 셰어 제독과 팔켄하인 장군은 작전을 제한하는 한 잠수함 전투에서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했다. 강화 교섭에 기대를 걸고 있던 베트만을 비롯한 정치가들은 비록 짧은 기간이나마 무제한 잠수함 전투를 연기할 수 있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군사적 승리에 집착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의 봉쇄 때문에 독일은 군사적 승리를 얻기 전에 굶주림으로 무너져버릴 위기에 놓여 있었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곧 자신의 뜻을 관철했다. 1917년 2월 1일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전투를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 1917년의 전개
  • 1917년 1~5월의 서부전선

    1916년에 이루어진 연합군의 공격은 실망스러운 결과를 낳았고, 이때문에 요직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바뀌었다. 영국에서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H. H. 애스퀴스의 연립정부를 대신하여 영국 총리가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로베르 조르주 니벨 장군이 조프르를 대신하여 총사령관이 되었다. 니벨은 1917년 봄에 아라스와 샹파뉴에서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는데, 둘 다 참패로 끝났다. 5월에 니벨이 물러나고 필리프 페탱 장군이 프랑스군 총사령관 자리에 앉았다. 페탱은 상황이 바뀌어 공격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질 때까지는 방어에만 전념하는 것이 유일한 합리적 전략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미국과 탱크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충고였다. 탱크는 뒤늦게야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했는데, 페탱이 이처럼 탱크를 강조한 것은 기계가 대규모 보병 대신 전투의 주력으로 등장했다는 인식이 태동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미국의 참전

    윌슨은 1917년 2월초에 독일과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2월말에 '치머만 전보' 사건이 발생하자, 독일과 싸우자는 요구가 미국 전역에서 불길처럼 일어났다.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르 치머만은 1917년 1월 16일에 멕시코 주재 독일 대사에게 암호 전문을 보냈는데, 미국이 독일에 맞서 참전하면 멕시코도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하여 텍사스 주와 뉴멕시코 주 및 애리조나 주를 되찾을 것을 멕시코 정부에 제의하라는 내용이었다. 영국 정보부는 이 전보를 가로채어 암호를 해독한 다음, 2월 24일에 윌슨에게 전보 내용을 전달했다. 3월에 윌슨은 독일 잠수함 U-보트 공격으로부터의 자위수단으로 미국 상선들의 무장을 지시했다. 독일 잠수함이 3월에 미국 상선 3척을 침몰시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4월 6일에 미국은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미국의 참전은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것은 독일의 궁극적인 패배를 가능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연합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식료품·무기·보급품·신용대부)는 군사원조 못지 않게 중요했다. 존 J.퍼싱 장군은 유럽에 파견된 미국 지원군을 지휘했다. 미국이 참전했을 때 미국 해군은 세계에서 2번째로 막강했고, 독일 잠수함 U-보트의 공격으로부터 연합국 선박을 지켜야 할 필요성이 절박했기 때문에 잠수함을 추격하는 구축함과 구잠정(驅潛艇)을 만드는 일에 모든 노력을 집중했다. 미국의 선전포고에 뒤이어 쿠바·파나마·아이티·브라질·과테말라·니카라과·코스타리카·온두라스도 독일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그밖의 남아메리카 국가들은 독일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러시아 혁명과 동부전선

    1917년 3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 러시아에서는 전제군주정이 끝나고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1917년 혁명). 군사적으로 보면, 러시아 혁명은 연합국에는 재난이고 동맹국에는 천금 같은 기회처럼 보였다. 러시아군은 여전히 전쟁터에서 동맹국과 싸우고 있었지만, 사기는 크게 떨어져 있었다. 러시아 국민은 제정 러시아 정부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아무 준비도 갖추지 않은 채 독단적인 이유로 시작한 전쟁에 싫증이 나 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지도자들은 전쟁에 대한 인식이 분명했다. 독일이 승리할 경우 러시아에 불리하다고 생각했고, 연합국에 대한 의무를 자각했다. 한편 러시아 전역에는 무정부 상태가 확산되고 있었다. 일찍이 러시아 제국에 속해 있었지만 러시아인이 아닌 수많은 민족들이 잇따라 자치나 독립을 요구하고 나섰다. 그 요구는 자발적인 경우도 있었고, 그 지역을 점령한 독일인의 부추김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1917년말에 이르자 핀란드인·에스토니아인·라트비아인·리투아니아인·폴란드인은 제각기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인·그루지야인·아르메니아인·아제르바이잔인도 제각기 민족주의 운동을 시작했다. 1917년의 혁명은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블라디미르 레닌이 이끄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인 볼셰비키의 집권을 가져왔다. 이 혁명을 계기로 러시아는 전쟁에서 발을 뺐다. 11월 8일에 레닌은 모든 교전국에 대해 협상을 제의했지만 병합과 배상문제를 협상대상에서 제외시켰고, 전쟁에 관련된 모든 민족의 자결권을 강화 교섭의 조건으로 요구했다. 11월 26일 볼셰비키 정부는 마침내 동맹국과 투르크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단하라는 일방적인 명령을 러시아 군부에 내렸다. 레닌의 러시아와 동맹국은 1917년 12월 15일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휴전협정을 맺었다.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1916년 8월에 프레더릭 스탠리 모드 경이 영국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리고 1년도 지나기 전에 그는 메소포타미아 전선을 절망의 무대에서 승리의 무대로 바꾸어놓았다. 1917년 2월에 그는 알쿠트를 탈환했고, 9월에는 바그다드를 점령했다. 모드가 11월에 세상을 떠나자 윌리엄 마셜 경이 후임자가 되었다. 영국군 사령관 에드먼드 앨런비 경은 투르크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전선으로 떠났다. 팔켄하인도 시나이 반도로 돌파할 계획을 세웠지만 영국군이 선수를 쳤다. 앨런비는 10월 20일에 가자를 맹렬히 포격하기 시작했고 베에르셰바를 장악했다. 그는 아부후레이라를 돌파했으며, 12월 9일에 영국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1917년 6~12월의 서부전선

    1917년 6월에 영국군 원수인 더글러스 헤이그는 플랑드르 지방의 메신 능선에서 선제 공격을 전개하여 성공을 거두었다. 자부심이 강한 헤이그는 진격을 계속했다. 그러나 8월 폭우로 이 지역은 거의 지나다닐 수 없는 늪지대로 변했다. 한편 독일군은 7월에 제3차 이프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헤이그의 가을 공세는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채 32만 5,000명의 병력을 잃었지만, 독일은 그와 비교할 만한 손해는 입지 않았다. 8월에 M. L. A. 기요마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제2군은 마지막 베르됭 전투에서 1916년에 독일군에 빼앗겼던 영토의 나머지를 모두 되찾았다. 10월에 제10군은 말메종 전투에서 슈맹데담 능선을 빼앗았다. 11월에 영국군은 캉브레 근처에서 최초의 대규모 탱크 공격을 전개하여 독일군을 깜짝 놀라게 하고,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깊숙이 적진 속으로 침투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줄리언 빙 경은 초기 공격에 모든 병력과 장비를 투입한 뒤 병력과 장비가 적절히 증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격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영국군은 독일군의 반격에 밀려 얻은 땅의 3/4을 도로 빼앗겼다. 그러나 캉브레 전투는 기습과 탱크가 참호 장벽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

    동아시아 지방

    1917년에 중국이 연합국 쪽에 가담하여 참전한 것은 동맹국에 무슨 불만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쟁이 끝난 뒤 동아시아 문제가 협상 안건으로 상정될 때 1914년부터 참전하고 있는 일본이 연합국의 호의를 독점할지 모른다는 베이징 정부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1917년 3월에 중국은 독일과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 그리고 8월 14일에 중국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중국이 전쟁에 이바지한 것은 거의 무시해도 좋을 정도였다.

    해군작전

    이제 무제한 잠수함 전투에 전념하고 있는 독일의 U-보트들은 1917년 4월에 무려 430척의 배를 침몰시켰다. 연합국은 상선을 보호하기 위해 마침내 호송(護送)체제를 채택했다. 호송체제에서 상선단은 주위를 빙 둘러싼 구축함과 그밖의 해군 호위함의 엄호를 받으며 항해하게 되었다. 호위함을 갖춘 호송체제로 인해 U-보트가 상선을 침몰시키려면 반격당할 위험을 무릅써야 했고, 이로써 연합군은 U-보트의 수를 줄이는 기회를 맞았다. 연합국은 또한 대(對) 잠수함 기술(예를 들면 수중 청음기나 수중폭탄 따위)을 개발했고, 지뢰 부설 해역을 확대했다. 이런 모든 조치가 누적된 결과 U-보트 작전은 차츰 견제를 받았고 결국에는 실패했다.

    공중전

    항공기는 개전 초기에는 주로 정찰에 이용되었다. 그러나 1915년에는 기관총을 장착한 전투기가 등장했다. 전술 폭격과 적의 공군 기지에 대한 폭격도 차츰 도입되었다. 전략 폭격은 개전 초기에 이미 이용되었다. 영국은 폭격기를 대부분 U-보트 기지 공격에 이용했지만, 독일은 주로 잉글랜드 남동부를 폭격하는 데 이용했다. 그후 독일 고타 폭격기의 공습을 받은 영국인들은 전략 폭격을 좀더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고, 독자적인 지휘 체계를 갖춘 별개의 공군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1918년에 창설된 영국 공군(RAF)은 세계 최초의 독립된 항공 부대가 되었다.


    [마지막 공세와 연합군의 승리]
  • 1918년 3~9월의 서부전선
  • 서부전선에서의 독일군 공격(1918. 3∼7)
    독일은 동부전선에 배치했던 사단들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켜 서부전선의 전력을 꾸준히 증강시키고 있었다(러시아가 전쟁에서 발을 뺐기 때문에 동부전선에는 더이상 병력을 배치할 필요가 없었음). 따라서 연합군의 주요문제는 미국에서 대규모 증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독일군의 임박한 공격을 어떻게 견디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루덴도르프의 관심은 미군 파병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일시적으로 형성된 우세를 이용하여 공격하는 것이 었다. 제2차 솜 강 전투, 또는 생캉탱 전투(1918. 3. 21~4. 5)라고 불리는 이 공격에서 독일군은 영국군의 허를 찔렀고, 1914년말 이후 서부전선에서 일시에 가장 많은 영토를 얻었다. 독일이 이처럼 많은 땅을 얻었는데도 연합군의 전선은 구부러졌을 뿐 돌파되지는 않았다. 4월에 독일군은 프랑스 영토를 가로질러 진격하기 시작했고, 마른 강변에서 성공적으로 진격을 끝냈다. 그러나 루덴도르프의 성공은 결국 값비싼 대가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공격을 전개할 때마다 너무 멀리 들어갔고 너무 오랫동안 강행했기 때문에, 군인들은 지치고 물자는 바닥나곤 했다. 그래서 다음 공격까지의 간격이 지나치게 길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게다가 루덴도르프는 선제 타격 부대를 이 공격에 다 써버렸고, 나머지 부대는 수준이 훨씬 떨어졌다. 독일군은 1918년의 이 대공세에서 8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연합군은 이제 매달 30만 명의 미군 병력을 보충받고 있었다. 독일의 다음 공격은 7월에 벌어진 제2차 마른 전투였다. 그러나 이 공격은 헛수고로 끝났다. 주도권을 되찾은 연합군은 이 우세를 잃지 않기로 작정하고, 다음 번 공격대상으로 다시 솜 강 주변의 전선을 택했다. 독일군 수개 사단이 연합군의 공격 앞에 맥없이 무너졌다. 따라서 이 아미앵 전투는 연합군 쪽에는 전력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눈부신 승리였다. 루덴도르프는 상황이 더 나빠지기 전에 평화협상을 시작해야 한다고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와 정치 지도자들에게 알렸다. 독일군 수뇌부는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빼앗은 영토를 그대로 보유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렸고, 이제는 그저 항복을 피할 수 있기만 바랄 뿐이었다. 이때부터 연합군 사령관 페르디낭 포슈는 여러 지점을 잇따라 재빨리 공격하면서 길게 뻗은 독일군 전선을 강타하기 시작했다.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지점은 초기의 반동력이 사라지자마자 무너졌다. 9월초에 독일군은 힌덴부르크 선(線) 뒤로 퇴각했다.


  • 1918년의 발칸 전선
  • 연합국의 공격(1918. 7∼11)
    9월에는 살로니카에서 연합군의 승리가 계속되었다. 이 전투를 이끈 사람은 L. F. F. 프랑셰 데스페레였다. 영국군은 동쪽에서 밀고 들어가 9월 26일에 스트루미차를 점령했다. 그러자 불가리아는 평화 조약을 맺자고 요청했다. 프랑스 기병대가 발칸 전선의 가장 중요한 교통 요충지인 스코폐를 점령한 9월 29일, 불가리아는 살로니카 휴전협정에 조인하여 연합군이 내건 조건을 수정 없이 받아들였다.


  • 제국들의 몰락
  • 오스만 제국

    팔레스타인에서 오스만 투르크와 대치해 있던 앨런비는 책략과 견제로 투르크를 유인하여 서부전선에 배치한 병력을 줄이게 한 다음, 1918년 9월 19일에 투르크군보다 10배나 많은 병력으로 서부전선을 강타했다. 이 메기도 전투에서 영국군 보병대는 혼비백산한 수비대를 옆으로 밀쳐내고 기병대가 나아갈 길을 열어주었다. 이튿날에는 아풀라와 베이산 및 나자렛이 영국군의 손에 들어왔다. 이 작전은 알레포와 바그다드 철도 접속점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났다. 투르크 동부가 무방비상태인 것을 알고 있는 오스만 정부는 불가리아가 무너진 뒤 이제 연합군이 서쪽에서 수도 이스탄불을 향해 진격해올 것을 두려워하여 항복했다. 10월 30일 무드로스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 협정에 따르면 투르크는 연합군에 해협을 개방하고 군대를 해산하며, 연합군이 요구하는 전략 지점은 어디든 점령할 수 있도록 허락하게 되어 있었다. 또한 투르크의 모든 항구와 철도를 이용할 권리를 주고, 아라비아와 시리아 및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는 나머지 수비대에 항복을 명령하도록 되어 있었다. 수세기 동안 내려온 오스만 제국은 이리하여 막을 내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개전 초기부터 합스부르크 왕가의 이 군주국은 이중성을 뚜렷이 드러냈다. 오스트리아 의회는 1914년 3월에 활동이 정지되어 그후 3년 동안 한 번도 소집되지 않은 반면, 부다페스트에 있는 헝가리 의회는 전쟁중에도 회의를 계속하여 군부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을 과시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1918년에 마침내 해체되었다. 10월 24일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분리·독립과 평화를 제창하는 헝가리 국민의회가 부다페스트에서 창설되었다. 10월 28일에 체코슬로바키아 위원회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공인'했고, 이와 비슷한 폴란드 위원회는 갈리치아와 슐레지엔 지방을 통일된 폴란드로 통합했다. 10월 29일 자그레브의 크로아티아인들은 슬로베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및 세르비아인으로 이루어진 국가수립을 요구했다. 10월 30일 오스트리아 의회 의원들은 빈에서 게르만족의 독립국가 오스트리아의 수립을 선포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연합국에 휴전 협정을 간청했고, 양측의 휴전 협정은 1918년 11월 3일에 빌라주스티에서 조인되어 11월 4일부터 발효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은 1914년 8월 이후에 점령한 모든 영토만이 아니라 티롤 남부와 타르비시오, 이손초 계곡, 고리치아,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 카르니올라 서부 및 달마치야에서도 철수할 것을 요구받았다. 모든 독일군은 15일 이내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에서 추방되거나 억류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또한 연합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국내의 모든 수송수단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전함을 대부분 소유하게 되었다.

    대(對) 독일 전쟁의 종결

    미국의 대통령 윌슨의 평화 캠페인은 독일 국민의 전의를 무너뜨리는 동시에, 독일 정부가 1918년 10월에 강화 교섭을 자청하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독일인들은 오로지 윌슨하고만 예비 강화 교섭을 가졌다. 그결과 맺어진 1918년 11월 11일의 최종적인 휴전협정은 형식에서 윌슨의 유명한 '14개 조항'과 그밖의 선언에 바탕을 두고 있었지만, 공해에서의 자유항해권과 전쟁 배상금에 관해 영국과 프랑스가 제시한 조건이 딸려 있었다.

    1917년부터 독일 총리였던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은 불가리아가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맺고 영국이 서부전선에서 대규모 공세를 편 날인 1918년 9월 29일에 사임했다.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는 당장 강화 교섭을 시작해도 좋다는 황제의 동의를 얻어냈다. 10월 3일 온건하고 정직하기로 유명한 바덴의 막시밀리안 공이 독일의 신임 총리가 되었다. 그날 밤 독일은 '14개 조항'에 바탕을 둔 휴전협정과 강화 교섭을 요청하는 각서를 윌슨에게 보냈다. 미국은 10월 8일에 회답을 보내어 독일이 우선, ① 윌슨의 원칙을 실행하는 협상을 수락할 것, ② 연합국 영토에서 독일군을 철수시키는 것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10월 20일에 독일은 다시 각서를 보내어, 윌슨이 독일의 자존심을 결코 모욕하지 않으리라 믿고 휴전협정과 군대 철수의 조건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에 동의했다. 윌슨은 연합국에 기꺼이 휴전협정을 제의하겠다고 밝혔지만, 그 조건은 독일이 다시는 전쟁 행위를 되풀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연합국은 2가지 조건을 붙여 휴전협정에 동의했다. 그 2가지 조건이란, 연합국은 윌슨의 '14개 조항' 가운데 2번째 조항(공해에서의 자유항해권)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손해 배상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독일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나라 전체가 뒤흔들리고 있었다. 발단은 10월 29일에 킬에서 수병들이 일으킨 반란이었다. 이 소요 사태는 날로 확대되어 11월 4일에는 혁명으로 발전했다. 11월 7~8일 밤, '바이에른 민주사회주의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에 있던 막시밀리안 공은 빌헬름 2세의 황제 칭호와 프로이센 왕의 칭호를 박탈당했다. 이리하여 호엔촐레른 군주국은 종말을 맞았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막시밀리안 공의 뒤를 이어 독일 총리가 되었다.

    휴전협정

    독일은 벨기에와 프랑스, 알자스로렌 지방 및 라인 강 서쪽 연안 전역에서 철수할 것과, 네덜란드와 스위스 사이에 있는 라인 강 우안을 중립화할 것을 요구받았다. 동아프리카의 독일군은 항복해야 했고, 동유럽의 독일군은 전쟁 이전의 위치로 후퇴해야 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과 부쿠레슈티 조약은 무효화해야 했다. 독일은 모든 전쟁 포로를 본국으로 송환하고, 막대한 양의 전쟁 물자를 연합국에 인도해야 했다. 한편 연합국은 독일에 대한 봉쇄를 계속할 작정이었다. 독일측 대표단은 붕괴 직전의 독일에서 볼셰비즘의 위협이 심각하다고 호소하여, 이런 조항을 어느 정도 완화하는 데 성공했다. 연합국은 봉쇄를 늦출 수도 있다고 암시했고, 인도해야 할 전쟁 물자를 줄여주었으며, 동유럽의 독일군은 당분간 현지에 주둔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후방에서 혁명의 위협이 심각한데다 설상가상으로 서부전선에 포진해 있는 연합군의 공격이 임박하지 않았다면, 독일은 보다 많은 양보를 받아내기 위해 좀더 버텼을지도 모른다. 연합군은 11월 14일에 마지막 공세를 펼칠 계획이었다.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휴전협상에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되었을지 여부는 결코 알 수 없는 일이다. 마지막 공세 전인 11월 11일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어 제1차 세계대전이 드디어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군인이라기보다 민간 정치가인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가 독일측 대표단을 이끌었다는 사실은 '배반행위'의 소문을 낳게 하는 데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독일군은 '전쟁터에서 결코 패배하지 않았는데' 민간인에게 배신당했다. 즉 전쟁에 싫증이 나고 패배주의에 젖은 민간인과 그 지도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군대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다는 것이 이 소문의 요점이다. 이는 독일 역사에 기록될 만큼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또한 독일의 우익정치 선동가들은 전쟁의 막바지 단계에 연합국이 독일 국내에서 벌인 선전 때문에 민간인의 사기가 떨어졌다는 주장과 함께 이 소문을 퍼뜨렸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런 정치 선동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주장하기를, 독일이 군국주의와 팽창주의 정책을 채택하면 전쟁에서 당한 패배를 만회하고 적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으며 나아가서는 유럽을 지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참전국들이 낸 사상자수는, 그 이전의 전쟁에서 나온 사상자수와 비교할 때 엄청나게 많은 것이었다. 연합국은 50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2,2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고, 동맹국은 330만 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1,500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전쟁 때문에 죽은 민간인 사망자수는 군인 전사자보다 더 많아서 약 1,3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민간인은 굶주림이나 헐벗음, 질병, 또는 대량 학살 등으로 목숨을 잃었다

     

    출저:다음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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