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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오적(新五賊) 언론은 거듭나야 한다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6.06.23|조회수52 목록 댓글 0

신오적(新五賊) 언론은 거듭나야 한다[사상계 칼럼] 신오적, 마피아를 해부하다!⑤
언론은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가

  • 기사입력 2026.06.22 13:20
  • 최종수정 2026.06.22 13:21
  • 기자명이명재/시민언론 민들레 대표)

 

<뉴스M>은 <사상계>와 콘텐츠 제휴에 따라 <사상계> 통권212호, 재창간 7호(2026년 5-6월호)에 게재된 '특집: 신오적, 마피아를 해부하다!' 중의 일부 칼럼을 공동게재합니다. 이 특집 시리즈에는 사법마피아, 원전마피아, 기독마피아, 재벌마피아, 언론마피아 등 한국 사회 5개 분야의 '마피아'를 해부하고 비판하는 3~4개씩의 칼럼이 실려있습니다. <뉴스M>은 이 가운데 분야별로 1개의 칼럼을 게재하며, 나머지 칼럼은 <사상계>에서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비어 있는 권두언

1959년 2월, 《사상계》의 권두언 난은 비어 있었다. 단지 제목 6자만 적혀 있었다. “무엇을 말하랴”. 그뿐, 내용은 빈 칸이었다. 4·19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 이승만 정부의 전횡과 억압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절이었다. 빈 지면은 독재권력의 검열과 독재에 대한 가장 강력한 항의였다. 발행인 장준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말하고자 했다. 무엇을 말하랴, 그 여섯 글자와 텅 빈 여백은 어떤 웅변보다 더 많은 것을 독자에게 전달했다. 60여 년이 지난 지금, 우리 언론은 정반대 상황에 놓여 있다. 언론사는 많아졌고, 말이 넘쳐난다. 활자가 폭포처럼 쏟아지고, 뉴스가 분초 단위로 뜨며, 유튜브 채널마다 말의 성찬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 말들의 홍수 속에서 정작 말해야 할 것이 말해지고 있는가. 장준하의 빈 칸이 침묵으로 진실을 가리켰다면, 오늘의 언론은 넘치는 말로 진실을 가린다. 그것이 지금 한국언론의 초상이다.

한국언론의 현실에 대해 영국작가 찰스 디킨스의 소설 『두 도시 이야기』의 첫 문장을 빌어 얘기해 보자. “최고의 시절이자 최악의 시절이었으며, 지혜의 시대이자 어리석음의 시대였다.” 19세기의 상충하는 모순을 디킨스는 이렇게 서술했듯, 지금 한국에는 두 개의 상반된 나라가 공존한다. 한편에는 선진국 반열에 오른 나라, 그러나 그 이면에는 최악의 나라라는 그늘이 있다. 그리고 이 대립하는 양가성이 집약된 곳이 바로 한국언론이다.

한국언론의 상황을 보여주는 두 개의 장면이 있다. 하나는 12·3 비상계엄 쿠데타 이후 수개월간 광장에서 촛불과 응원봉을 든 국민이 외친 구호다. 이들이 손에 쥔 피켓에 쓴 건 ‘윤석열 탄핵-김건희 구속’, ‘검찰개혁’, 그리고 다름 아닌 ‘언론개혁’이었다. 다른 하나는 최근 벌어졌던 오보에 대한 사과 요구에 방송사 노조가 거세게 반발한 일이었다. 조폭 연루설 오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방송사에 당시 피해자였던 현직 대통령이 공개사과를 요구하자 방송사 노조가 성명서를 내면서 규탄했다. 노조는 ‘언론 길들이기’ ‘언론자유에 재갈을 물리는 행위’라고 성난 목소리를 냈다. 이 성명에서 특히 눈길을 끌었던 것은 대통령에 대해 권력자로서의 자신의 위치를 잊지 말라고 한 대목이었다. 그것이 드러내는 건 언론이 스스로를 본질적으로 비非권력적 존재이며 약자로 보고 있는 인식이었다. 대통령이 하나의 권력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방송사 노조가 그 자신에게 동시에, 또는 상대를 향하기 이전에 먼저 스스로에게 던져야 했을 질문도 바로 그것이었다.

 

‘독獨’하려면 ‘립立’부터 해야

자신이 갖는 권력에 대해, 스스로 그 권력의 행사에 문제는 없었는지에 대해 먼저 물어야 했다. 이 두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광장의 시민들의 언론개혁 요구 분출은 한국의 언론이 중요한 개혁대상으로 간주된다는 것, 다시 말해, 문제해결자―최소한 해결기여자―가 돼야 할 언론이 그 자체로 ‘문제’가 돼 있다는 것이다. 방송사 노조의 성명은 ‘언론은 자신의 힘과 권능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이 노조의 성명에 깔린 건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일 것이다. 언론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대원칙과 전제가 당연하고 중요하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데 여기서 한국언론이 빠지는 함정은 그 독립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지, 또 단지 외부로부터의 독립인지에 대한 부족한 탐색에서 비롯된다. ‘언론독립’은 주로 외부권력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이해된다. 정치권력으로부터, 자본으로부터, 광고주로부터 편집권을 지킨다는 것, 이 원칙은 물론 항상 중요하다. 그 외부에 대한 독립을 스스로 얼마나 지키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여기서 따지지 않기로 한다. 부당합병, 경영권 불법승계 등 혐의를 받은 삼성 회장에게 무죄가 선고됐을 때의 언론 보도는 굳이 여기서 얘기하지 않기로 한다. 한국경제를 위기에서 구원해 줄 구세주의 ‘강림’을 영접하는 듯했던 언론보도의 홍수는 차치하기로 한다.

다만 언론의 독립은 오로지 바깥 힘으로부터의 독립만이어선 안 된다. 그것은 또한, 아니 더더욱 자신의 오만과 선입견과 무지로부터의 독립을 또한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외부로부터의 독립의 전제다. ‘독립獨立’의 ‘독獨’이 외부의 부당한 간섭과 압력에 대한 차단과 거부라면, ‘립立’은 그 자신이 스스로 설 수 있는 능력과 의무인 것이다. 그러므로 언론의 독립과 자유는 한편 자기 자신에 대한 엄격한 구속과 통제여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갖는 권력을 무책임하게 행사하고 싶은 충동으로부터의 독립, 자신의 보도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살피고, 조직내부의 관행과 압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포기하는 나태와 안일로부터의 독립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실은 그렇게 스스로 서야[立] 외부의 힘으로부터도 자신을 지켜낼[獨] 수 있다.

‘독獨’ 이전에 ‘립立’을 보여줘야 하는 한국언론. 그 현주소는 몇년째 세계 나라별 언론 신뢰도 평가에서 최하위에 고정된 데서도 드러난다. 더구나 스스로를 언론으로 세우지 못하는 언론의 홍수는 지금의 한국언론 상황을 풍요 속의 빈곤으로 내몰고 있다. 언론사는 많지만, 언론은 없다.

 

지난 2014년 개봉한 영화 '슬기로운 해법'의 포스터. 한국 언론의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다.

진실을 덮는 신오적新五賊 언론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 포고령에는 언론과 관련해 ‘모든 언론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라고 하며, 이를 위반하면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수색을 할 수 있으며’ ‘계엄법에 의해 처단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만약 12·3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상당수 기자가 체포·구금·압수수색과 함께 ‘처단’되었을지도 모른다. 그 고통과 억압의 시간을 저지하고 뒤집어놓은 것은 언론이 아니었다. 광장에 나온 시민들이었고, 계엄을 막아낸 국회였다. 언론이 자유를 누리는 지금 환경은 시민들의 저항과 투쟁의 산물이다. 언론은 수혜자이지, 변화의 주역이 아니다. 언론은 국민이 만들어준 언론 유의 회복에 상당 부분 얹혀 그 수혜를 누리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단지 계엄사태 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의 발전과 개혁의 순간들에서 언론이 과연 어떤 역할을 했는가에 대한 질문과 연결돼 있다. 한국사회의 발전과 성숙은 대체로 ‘언론과 함께’ ‘언론에 힘입어’라기보다는 ‘언론에도 불구하고’라고 해야 마땅할지 모르겠다.

한국의 ‘언론자유지수’가 급락했던 때가 있었다. 2024년 열다섯 단계나 추락해서는 2025년에도 60위권에 머물렀다. 한국의 언론자유가 2년 연속 ‘문제 있음’의 60위권으로 떨어진 것은 무엇보다 윤석열정권의 강압적 언론정책 때문이었다. 그렇게 한국의 언론자유가 퇴행했을 때 국민은 적잖은 고통을 받았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인 한국언론에는 그 같은 고통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한국언론 일부에게 수난과 고초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주류 언론은 그런 환경에 불편해하고 고통받기보다 적응하고 익숙해지는 쪽을 택했다. 그 고통과 퇴행조차 사실은 다수의 주류 언론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다. 윤석열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고 대통령으로 밀었던 것은 물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3년 동안 비판과 견제는커녕 미화와 비호로 거의 일관했다. 차마 입에 올리기 부끄러운 찬미가를 불러댔다. 그가 ‘종북 반국가 세력’ 운운하며 야당과 시민세력을 탄압할 때도 주류 언론은 장단을 맞췄다. 경제와 민생의 파탄 위기에서도 많은 언론들은 찬송가를 불러댔다. 언론이야말로 윤석열의 내란 망상의 중요한 원천이었다.

내란청산은 그러므로 쿠데타 세력의 단죄와 처벌과 함께 언론에 대해서도 ‘거듭나기’라는 시험대가 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내란청산에 대한 보도를 보면 다수의 언론은 이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지 않은 듯하다. 내란세력 가운데 처벌받은 이는 거의 없었던 상황이지만 “내란 청산은 이제 그만하자”라는 말이 언론으로부터 나왔다. 이들에게 청산할 것은 내란이 아니라 오히려 ‘내란청산’인 듯했다. 어느 신문은 “이제는 내란청산에 그만 매달리고 국가 미래를 설계하는 의제에 매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래설계가 과거를 제대로 정리 청산하지 않고 가능한 일인가? 과거청산이 곧 미래설계이기도 하다는 것을 무시한다. 〈계엄의 밤 1년,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 기사에서 “국격 추락까지 불러온 ‘그날’의 1년을 앞두고 있지만 여전히 진실은 밝혀지지 않았다”라고 했다.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고 했지만, 명백하게 밝혀진 진실마저 언론이 제대로 다루고 있는지 의문이다. 아니, ‘언론은 과연 진실을 밝혀내는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덮고 있는가’라는 의문이 나올 법하다. 위의 기사 제목처럼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고 했지만, 언론 자신이 바로 그 어둠을 드리우고 있는 건 아닌가.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 앞에는 ‘굽히지 않는 펜’이라는 이름의 언론자유 조형물이 서 있다. 하늘을 향해 꼿꼿이 치솟은 그 거대한 펜은 한국 언론자유 운동의 상징물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언론의 현실에서, 그 펜 앞에서 시민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한국언론의 자유는 누구의 자유인가? 언론은 과연 그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가? 2026년 신오적新五賊 언론이 답해야 할 근본적인 질문이다.

[필자소개]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사회에 발을 내디딘 지 어느덧 3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사회를 배우는 ‘영원한 학생’이라는 자각 속에 살고 있다. 이미 배운 것보다 앞으로 배워야 할 사회의 이면이 더 많다는 것을 늘 확인한다.

신문사와 국가인권기구 등을 거쳐 현재는 시민언론 《민들레》에 몸담고 있다. 기성 언론의 한계를 넘는 ‘대안언론의 대안’, 그리고 권력에 맞서는 ‘대항언론’으로서의 《민들레》 창간 작업부터 함께했다.

언론인으로서 일의 본질은 단순히 사실을 옮기는 ‘기記’에 있지 않다고 본다. 그 이전에 현상의 본질을 꿰뚫는 눈인 ‘관觀’을 바로 세우는 일이 선행돼야 한다고 믿는다. 나이가 들수록, 경력이 쌓일수록 명확한 ‘관’을 갖추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음을 실감한다. 다만 사회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불가피한 현실’을 ‘불가피하지만은 않은 사정’으로 치환해 논의의 장을 넓히는 일, 그것이 학생으로서 더욱 배워야 할 과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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