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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정리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을 배우며: 심령이 가난한 자

작성자다윗|작성시간19.08.07|조회수1,324 목록 댓글 0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을 배우며


할렐루야!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 새벽에 먼저 일을 하고 맛있는 점심을 조금 일찍 먹게 하시고 시원한 강남의 삼성 도서관에서 산상수훈을 배울 수 있게 은총을 베풀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제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서 산상수훈을 배우는 과정을 잘 기록하게 도와주셔서 모든 사람이 성령을 받고 성령의 인도로 복음도 잘 전하고, 성경의 이해도 잘하고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으로 잘 성장하게 하소서! 경은 사사로이 풀지 말라고 하셨고, 산상수훈의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마태복음이 작성된 이래 아직도 그 의미를 온전히 설명하기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 배우게 하시고 배우는 과정을 온 세상의 사람과 함께 나눌 수 있는 크신 은총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과 존귀를 돌립니다. 우리 주님께서 산에서 많은 무리와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마태복음 5장의 말씀으로 시작을 해서 7장까지 말씀하신 내용이 산상보훈, 혹은 산상수훈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이 내용에 대해서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같이 계실 땐 제자들이 주님의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물어서 궁금증을 해소할 수가 있었는데, 이제 주님께서는 부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시니 이 말씀의 내용을 잘 가르쳐 달라고 이 말씀의 내용을 잘 이해하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리오니 우리 주님께서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응답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새로운 내용을 밝힌다는 과욕보다는 겸손한 자세로 성령의 충만을 늘 기도하면서 성령의 조망에 따라서 이해를 하고자 합니다. 말씀을 배우는 즐거움이 우리에게 이 무더운 여름 모든 주님의 백성에게 충만하게 하시고, 특히 성령을 받은 사람들의 말씀을 배우는 일에 도전을 주고 맹렬히 공부하고픈 열정을 불어넣어 주소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늘 함께 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샬롬! 오늘은 가장 더운 날입니다. 어젯밤에도 너무나 더워서 에어컨을 켜고 잤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터가 코엑스로 바뀐 관계로 코엑스로 와서 동료와 같이 옷 매장의 청소를 하셨습니다. 아침을 거르고 온 관계로 점심을 봉은사역 주변에 있는 광동제약 앞 솔향기에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 한식 뷔페집은 최근에 약 한 달간 점심을 먹는 곳인데 모든 반찬이 너무나 맛이 있습니다. 주변의 동료에서 자신 있게 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성 주민 센터에서 운영하는 도서관에서 이렇게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에어컨이 잘 나아와서 너무나 시원한 곳입니다. 책도 많이 있어서 참고를 할 수가 있습니다. 코엑스에도 무료 도서관이 있는데 참으로 많은 책이 비치가 되어 있고 이렇게 더운 날 시원하게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입니다. 서울에서 30년을 살았는데 이렇게 좋은 공부 할 공간이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새벽에 청소를 하기 위해서 이렇게 들어오지 않았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곳에서 공부하고 그리고 점심은 솔향기로 오시면 참 좋은 집 밥과 같은 점심을 드실 수가 있습니다.


성경을 여러 번 통독도 하고 그리고 성경을 읽고 간단하게 틈틈이 정리를 한 지도 20년이 넘었는데 산상수훈에 대해선 그렇게 주목을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8복이 있는데 그 복이 어떤 복인지 늘 말씀의 앞자리만 보면서 외려고 했습니다. 심애온의, 긍청화의로 말입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성경의 정리를 하다 보니 제가 2년 전에 해 놓은 마태복음 정리 자료를 보니 분명하게 산상보훈이 5-7장으로 되어 있는데도 8복에 대해서만 늘 그 복을 순서대로 외려고 하지 산상수훈의 5-7장의 내용 전체를 이해를 했다거나 공부하려는 마음도 없이 그냥 주기도는 주기도대로 다른 말씀들은 말씀대로 단편적으로 조금 이해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산상수훈에 대해서 설명하라 혹은 논하라 한다면 최근까지 이 부분의 성경 이해의 수준으로 거의 쓸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이곳에 와서 일을 하면서 또다시 정의의 문제가 너무나 중요하며 정의의 문제에 대해서 모든 믿는 분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기도하고 연구를 해야 함이 실제의 제 생활을 통해서 너무나 강하게 다가와서 8복중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와 의를 위해서 핍박을 받는 자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배우려고 심령이 가난한 자, 팔복, 산상수훈 등으로 검색을 해서 이 부분의 설명을 읽다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마음이 집중이 되고 이와 관련된 설명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요 며칠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이 공부가 너무나 재미있기 시작했습니다. 우선 8복뿐만 아니라 산상수훈이 5장 7장까지의 말씀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해선 아직까지 정설이 없이 다양한 사람이 다양한 주장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도 성령을 받은 사람으로 당연히 이 분에 즉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과연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알고픈 욕망이 강하게 일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공명심 같은 것도 제 속에서 작용이 되고 있기에 늘 성령의 도우심을 구했고 지금도 구하고 있습니다. 어떤 경우는 쉽게 이해가 되는 경우도 있는데 산상수훈에 대해서는 그렇게 속히 이해가 일어나지 않았고 그래서 많은 분들의 글을 읽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주교에 계신 분의 글도 읽고, 믿지 않는 분들의 글 특히 불교에 계신 분들도 설명을 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리고 개신교 분들의 글도 상당히 여러분의 글을 잘 읽어보았습니다.


그리고 불신자분 중에서 헬라어를 공부하셔서 헬라어를 번역해서 마가복음과 대조를 해서 설명을 하신 것도 보았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제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우선 산상수훈의 8복과 다른 부분 즉 산상수훈의 남은 부분이 관련이 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다른 7복의 내용과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관련이 되어서 설명이 되어야 한다. 산상수훈은 너무나 유명한 예수님의 가르침의 진수이다. 산상 수훈은 보통 사람이 실천을 하기에 절대로 쉽지가 않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중복되는 부분이 있으니 서로 보면서 연구를 해야 된다. 그리고 각자마다 가자의 주장이 있음도 보았는데 어떤 통일된 정설이 없는 부분이 특히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정말 마음에 들고 다시 반드시 읽고 싶은 심령이 가난한 자에 대한 설명을 하신 분이 천주교에 계셔서 이 분의 글을 즉시 복사를 해서 저장을 분명하게 했는데 나중에 아무리 제 컴퓨터를 찾아보아도 찾을 길이 없고 다시 인터넷 검색을 해서 찾아보아도 결국은 찾지 못하고 이분의 글을 찾으려고 할 수없이 다시 검색된 내용들을 하루에 걸쳐서 잘 읽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약 일주일을 보내다 보니 제게도 제법 글을 쓸 만한 내용들도 보이고 마음도 생기게 되었습니다.


산상보훈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던 상태에서 다른 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이해가 증진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 마음에 또 많이 드는 개신교분의 글이 있었는데 이 분의 글도 카피가 되지 않았는데 구름과 불기둥의 바울이라는 분이 쓰신 글이었는데 제 마음에 너무나 든 글입니다. 통합 측에 계신 목사님 같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공부를 하는 과정을 통해서 제 나름대로의 산상수훈에 대해서 특별히 가난한 마음에 대해서 조금 같이 은혜를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남은 부분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기에 따로 제가 또 많이 쓸 내용도 없기에 제목도 산상수훈을 배우면서라고 정한 것입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부분이 산상수훈을 누구에게 말씀을 드렸냐 하는 것입니다. 듣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아야 그 내용도 잘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경을 보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분도 제가 잘 모르고 있던 부분이기에 어떻게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이면 예수님 사역의 초기의 사역이라 생각이 들었고 아직 예수님의 수난도 없었고 죄의 문제가 해결이 되지 않은 시점인데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셨나 생각을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도 의롭게 살면 천국에 가는가 막연히 생각도 해 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번에 이 내용을 이해를 해야 하겠다 생각이 드니 이 부분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게 되었습니다. 실로 배움은 도전이 있어야 하는데 제가 이곳에 글도 올리고 남에게 전하고 있는데 제가 거의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 다른 분들이 이미 저보다 너무나 잘 이해를 하고 있으면 제가 모르는 부끄러움과 함께 이 분과같이 잘 배워야 하겠다는 마음 즉 도전의식이 생기고 이런 의식이 이렇게 즐겁게 그리고 열심히 공부를 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가는 성경을 보시면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1. 산상수훈의 대상: 제자들, 건강한 사람들, 그리고 병든 사람들



마태 5:1.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2.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


1. Now when he saw the crowds, he went up on a mountainside and sat down. His disciples came to him,


우선 이 귀한 말씀을 예수님의 육성으로 직접들을 복을 누리신 분들은 예수님께서 보신 무리와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의 제자들은 12제자들이 될 것이고 이분들은 나중에 유다를 제외하고 모두가 성령을 선물로 받은 분들이십니다. 그리고 무리를 보셨다고 했는데 이 무리가 누구인지 5장을 통해서는 알 수가 없으니 4장의 말미로 가보겠습니다.


마 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종 병에 걸려서 고통 당하는 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그들을 고치시더라.

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 강 건너편에서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


24. News about him spread all over Syria, and people brought to him all who were ill with various diseases, those suffering severe pain, the demon-possessed, those having seizures, and the paralyzed, and he healed them.

25. Large crowds from Galilee, the Decapolis, Jerusalem, Judea and the region across the Jordan followed him.


예수님의 눈에 보인 무리는 병든 자와 이들을 데려온 온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갈리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그리고 유대와 요단강의 건너편 즉 이스라엘 사람이 아닌 사람들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서 모여든 것입니다. 이들이 예수님께 보인 무리들이고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예수님께 나아와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치유집회가 열리면 강사가 능력이 있다고 하면 아프신 분과 이분들의 가족이 나아와서 집회에 참석하며 말씀을 귀를 기울여 경청을 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모든 병자를 고치시는 분이시니 이분들이 다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서 귀를 쫑곳 세우고 예수님의 한마디도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로 잘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의 내용이 일반인에게는 쉽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구절은 이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시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 6: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마 7:11.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자 이제 모인 무리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많은 무리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서 그리고 요단 건너편에서도 왔습니다. 제자들이 있고 건강한 사람도 있고 그리고 병든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이들 모두가 예수님의 한 마디 한 마디를 경청합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은 스승께서 가르치는 것이고, 병든 사람과 그 친구와 가족들은 병든 사람을 분명하게 예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믿고 온 것이기에 그 분 앞에서 경거망동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이 마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도 없이 그냥 후대에 이 말씀을 사람의 글로 보는 사람은 어떤 학문에 능해도 절대로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적어도 여기 모인 무리와 같은 마음으로 이 말씀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잘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을 7장 말미에 기록해 두었습니다. 이들은 놀랐습니다. 제자들뿐만 아니라 모인 사람 모두가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리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자신들이 늘 듣고 배우는 당신의 율법학자와는 다른 권위가 있었고 이에 놀랐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 말씀이 이렇게 권위가 있게 들려와야 할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은 권위를 이미 이 시대에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배우면서 조금씩 이해를 하고 있고 지금까지 그냥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권위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도 있었을 것이고 또 자신의 말씀을 듣는 제자들과 모인 무리 중에서 병을 고침을 받고서 혹은 이런 이적과 가르침을 보고 듣고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나중에 제자가 될 사람도 분명하게 있었을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나중에 자신의 피 흘리심과 십자가의 죽으심이 그들의 죄로 인함을 알게 되고 이를 믿고서 성령을 받으면 이들이 이 말씀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일이 가능할 줄로 믿고서 하셨기에 권위가 있는 가르침이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군중 모두 앞에서 하시는 말씀인데 너희 아버지라는 표현과 예수님으로 인해서 핍박을 받게 된다는 표현은 예수님과 한 가족과 같이 된 밀접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시대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씀은 글자 한자 틀림이 없이 그대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으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듣고서 이 말씀 앞에 왔고, 어떤 이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와 있고, 또 어떤 이는 말씀의 의미가 궁금해서 와 있습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말씀을 배워서 가르쳐야 하기에 와 있기도 합니다. 저는 궁금하기도 하고 또 전해야 하기도 하기에 와 있기도 하지만 하나님께서 저를 이 말씀 앞으로 초대를 해 주셔서 말씀의 의미를 배우고 있습니다.




2. 심령이 가난한 자란?



우리는 때론 지금 시대 제일 유명한 BTS와 같은 사람들의 관심과 인기를 끌고 싶어 합니다. 이들과 같이 되기를 너무나 간절하게 바라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달리지 말고 자신에게 기대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주님이 주시는 평강과 기쁨을 누리길 원하십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참 기쁨이요, 잠 소망이요, 참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제게도 여러분 모두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주님께 기대 봅시다.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성령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그리고 성령의 충만을 위해서 기도하고 마음의 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자신의 욕구도 접어두고 세상의 휘둘림에도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힘으로 절대로 가능한 경지가 아니니 주님께 의지하고 성령의 충만을 반드시 구해야 할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너무나 간단하게 천국에 들어갈 자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다 하시는 말은 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자를 먼저 산상수훈에서 바로 가려낼 수 있습니다. 즉 심령이 절대로 가난하지 않은 사람을 바로 분별할 수가 있습니다. 보시겠습니다.


마 5:2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율법에 대해서 말씀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학자입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율법의 모든 조문을 그대로 지켜야 의를 얻는다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보다 의가 더 나아야 천국에 가지 그렇지 못하면 갈 수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킬 것을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선 깊이 생각을 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또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 5:2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또 행하는 사람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과 같이 지혜로워서 창수가 나도 집이 부서지지 않는다 했습니다. 또 뜻대로 행하지 않는 사람은 불법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당연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들은 다 심령이 가난하지 아니한 사람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즉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여기에서 의가 바리새인 보다 더한 사람,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행하는 사람, 형제에 대해서 노하지 않고 형제를 라가라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다시 설명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심령이 반드시 가난해야 하는데 이런 사람이 복 있다 행복하단 말씀입니다.


저는 많은 분들이 심령이 가난하다는 뜻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란 말을 여러 가지로 설명을 했습니다. 우선 마음의 상태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겸손한 사람이 심령이 가난하다고 설명하시는 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또 마음에 결핍이 있는 분즉 마음이 비워진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설명을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외에 소망이 없는 사람 즉 하나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사람을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설명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을 예를 들면서 실제로 가난한 사람을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배계층으로부터 소외당한 모든 것이 부족한 사람들 가난하고 병들고 핍박받는 사람들을 가난한 사람으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이 가난한 심령의 사람이라고 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이 말에 저는 너무나 공감을 합니다.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 앞에서 의인이라고 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이들은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따라서 회개하고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모두가 회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려고 오신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려 오셨는데 이들은 모두가 예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모두가 그리고 회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제자가 되었습니다.


반면에 바리새인이나 율법학자는 스스로 의롭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회개할 것이 없는 스스로 믿기를 의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율법을 잘 알고 있어서 율법의 의를 이루고자 율법을 지키고 그리고 죄에 대해선 짐승의 제사를 지내기에 그들의 죄가 이를 통해서 용서를 받았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날마다 배우고 잘 알고 잘 지키고 그리고 죄를 지으면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율법에 따라서 잘 지냈기에 흠이 있을 수가 없던 사람입니다. 바울도 여기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자발적으로 예수님께 천국에 대해서 잘 배우면 그 주인이 옛 보물과 새 보물을 자신의 창고에서 꺼내 나누어주는 것과 같이 될 수가 있는 사람들이었는데 절대로 스스로 나와서 배우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의롭다 굳게 믿고 있는데 사람의 모습을 한 목수의 아들이 위선자들아 회개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이 너무나 미운 죽이고 싶은 존재이지 무슨 말이든지 배우고 싶은 존재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이들과 달리 율법을 이스라엘 민족의 사람이어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고 그리고 지키기도 했지만 세례자 요한의 외침에 순종해서 요단강에 나가서 세례를 받았고, 그리고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도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거나 혹은 예수님께 받았거나 회개를 했다는 것입니다.


극명히 다른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과연 이들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한쪽은 심령이 가난한 사람으로 인정을 받을 수가 있고 한쪽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는 심령이 가난하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이라고 믿는 사람과 자신이 회개할 것이 너무나 많은 죄인이라고 믿는 두 부류의 사람입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온 것입니까? 의인이라고 믿는 바리새인들이 착각한 것은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드리는 피의 제사와 그 제사법을 제정하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심을 알지를 못한 점과 그리고 자신들이 부지런히 드리는 그 제사를 언제부터인가 하나님께서 받지 않고 계셨다는 것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부분 성경을 보시겠습니다.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하시는 제사를 여전히 드리기는 하지만 하나님의 열납이 없기에 즉 아직 죄가 사함이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들 즉 하나님 보시기엔 죄인인데 이들이 스스로 의롭다 하기에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위선자들아 말씀하시고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는 사람은 역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이런 제사를 드리고 있는데 스스로 의롭다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즉 너는 죄인이니 회개하라 하니 즉시 순종을 했다는 것입니다. 평소에 이런 제사를 드리면서도 하나님 앞에 여전히 죄인임을 인식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많고 가진 것이 많습니다. 아무리 죄를 지어도 속죄할 짐승을 사는데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돈이 없습니다. 죄를 지으면 속죄할 길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조항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도 행하기 어려운 분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죄를 짓는 즉시 짐승을 잡아서 해결할 길이 있다고 믿고서 죄를 짓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자비의 하나님께서 정하신 율법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고 죄를 지으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어쩌면 마가복음의 실제로 가난한 사람) 속죄 제물을 사지 못하기에 죄를 짓는 일은 곧 속죄를 받지 못하는 일이 되는 사람입니다.


또 두 부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짐승의 피를 흘리게 하고 짐승의 죽음과 희생에 대해서 짐승이니 뭐 마음 쓸 것 있냐 하는 사람들입니다. 도무지 죄에 대해서 아픈 마음이 없고 용서만 받고자 하고 그 길이 율법에 있으니 그대로 하고자 합니다. 역시 죄를 짓고 짐승하나 피를 흘리고 죽는 것 아무것도 아니고 내 죄만 법적으로 용서받으면 된다 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이 모든 정성을 키운 가축이 자신의 죄로 인해서 피를 흘리고 대신 죽습니다. 너무나 자신의 잘못이 마음이 아픕니다. 그리고 자신의 가축의 자신의 죄로 죄 없이 죽는 것이 또 마음이 아픕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기를 너무나 간절히 바라면서 삽니다. 가축을 키우는 사람은 자신의 가축을 비록 때가 되면 잡아도 먹고 또 팔기도 하지만 너무나 아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단지 물질을 보장하고 돈을 벌어주어서가 아니라 자신을 따르는 가축 그 자체가 아깝고 그리고 자신의 노력과 땀이 들어간 것이 귀합니다. 이래서 짐승의 죽음을 너무나 안타깝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죄의 삯은 어제나 오늘이나 사망입니다. 반드시 피를 흘러야 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세상의 사람에 대해서 그냥 자신의 죄에 대한 벌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시행하시지만,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 이렇게 자신이 키우는 너무나 소중한 짐승의 피를 통해서 그 사람의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지 않고 용서를 해 주시는 계약을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이스라엘 민족만 선택을 해서 체결한 것입니다.


두 부류의 사람이 같이 똑 같이 죄를 짓습니다. 한쪽은 너무나 뻔뻔합니다. 도무지 죄에 대한 각성이 없이 죄를 너무 가볍게 여깁니다. 반면에 또 한쪽은 너무나 죄에 대해서 어렵게 아프게 그리고 민감합니다. 어떤 마음이 가난한 마음입니까?


한 마음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그 가르침을 귀로 듣습니다. 그리고 한 귀로 흘리지 않습니다. 반드시 실천을 합니다. 모든 것을 다 배운 후에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의 죄를 지시고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부활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또 승천하시는 것을 봅니다. 그리고 모든 명령에 순종을 하는데 마지막 가장 중요한 예수님의 명령에 또 순종을 합니다.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행 1: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산상보훈에 참가했던 제자들과 그리고 100여 명의 사람 합하여 120명이 이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에 그대로 순종을 합니다. 보시겠습니다.


행2: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이들이 다 성령을 한 사람도 빠짐이 없이 다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래와 같은 사람이 됩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리고 이들은 산상보훈의 모든 말씀을 잘 이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됩니다. 왜 이런 사람은 그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이들은 자신이 죄로 인해서 반드시 피를 흘리고 죽어야만 하는 존재임을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틀림없이 자신들이 보는 앞에서 피를 흘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것을 또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부활하셔서 하늘에 오르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꿈에도 꾸지 못한 예수님의 약속대로 오신 성령을 선물로 받고 권능을 받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이들이 믿고 있습니다. 이들이 자신들 모두가 예수님과 과거에 원수임을 분명하게 알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앞에 도저히 설 수가 없는 죄인의 신분임을 분명하게 알았습니다.


그런데 용서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천국을 소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님께서 내가 네가 죄로 인해 네가 나의 원수일 때 나의 피 흘림과 죽음을 통해서 너를 용서했다 너는 의롭게 되었다. 그리고 너는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다 그리고 권능을 받아서 내 증인이 될 것이다. 라고 하시며 원수를 용서해라, 원수를 사랑해라, 내가 너를 사랑한 것과 같이 원수를 사랑해라, 내가 너를 용서한 것과 같이 원수를 용서해라 하시니 어떻게 해서든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가고자 할 것이고 지키게 될 것이 분명한 사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전 자신의 죄인이었으며, 하나님과 원수였던 모습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틀림없이 회개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의 세례를 받았고 이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사함을 받게 됨으로 의롭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대로 성령을 기다려서 성령을 또 선물로 받게 되어 능력까지 받은 존재가 되었음을 너무나 또 잘 알뿐 아니라 잘 믿었습니다. 죄와 허물로 죽은 인생, 죽어야만 하는 소망이 없던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보혈의 공로로 완전히 과거와는 다른 새로운 창조물(피조물)이 되었음을 확인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과거에 죄를 짓기 전의 아담과 같은 완전한 새로운 피조물로서 삼위 하나님의 작품이 된 것을 또 확실이 알고 믿었습니다. 성령의 낙관(인)까지 찍여서 이젠 하나님의 인정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국의 소망이 생기고 영생이 시작이 되었음을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또 믿었습니다.

이런 너무나 엄청나게 변한 자신의 모습을 너무나 분명하게 잘 알고 믿는 이 즉 용서를 받은이, 하나님과 원수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화목하게 된 자신의 구원에 대한 온전한 의미를 너무나 분명하게 알고 또 잘 믿었습니다.


이렇게 된 새 창조물, 하나님의 작품이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원수를 용서하지 못한다면 구원의 은혜를 어떻게 갚을 수가 있겠습니까? 모든 것을 다해서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해야 할 신분의 사람 은혜를 받은 사람의 의무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따라옴을 잘 알기에 산상수훈의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어기지 않고 잘 지키려 할 것이라 저는 굳게 믿습니다.

 

나아가 성령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서 시도 때도 없이 도우심을 성경을 통해서 잘 알 수가 있습니다. 하여 가능한 일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산상수훈과 예수님께서 하신 사역은 시간적으로 차이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이해를 못 하고 잘 따르지 못했다가도 이렇게 모든 일이 완성된 후 이 말씀을 다시 보면 이제는 지키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이렇게 길게 설명을 해 봅니다. 많은 분이 제 스승이 되셔서 이렇게 저를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늘 기도했습니다. 성령의 충만과 성령의 능력을 기도했습니다.


어떤 분의 글은 제 이런 글과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그분들의 글이 이렇게 저를 이런 글을 쓰게 하는데 인도를 하셨습니다. 제 글이 또 많은 분에게 이런 역할을 하기를 바랍니다.


자 이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요약을 해 보겠습니다.


우선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신 분은 심령이 가난하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당시에 제자들이 분명합니다.

이들은 회개한 사람입니다.

이분들은 죄 사함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로 인정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가르침을 잘 배운 분들이십니다.

이분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피 흘리심을 잘 보신 분들이십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장사됨과 부활과 승천을 보신 분들이십니다.

이분들은 예수님을 잘 믿는 분들이십니다.

이분들을 마지막 명령 성령을 기다리라는 명령에 순종해서 성령을 받으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을 능력을 받아서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사는 분들입니다.

이분들은 날마다 성령의 충만을 기다리는 분들이십니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말을 성령의 충만을 날마다 기다리는 마음으로 정리를 해봅니다.

성령이 소멸하는 것을 죽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십니다.

성령의 인도로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날마다 사는 분들이십니다.


천국은 이런 분들의 것이라고 믿습니다.




3.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만들어진다.



제가 위와 같이 정리를 하고 보면 처음부터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었지만 처음에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이 예수님을 너무나 싫어하는 바리새인이요, 율법으로 흠이 없던 자칭 의인이었습니다. 천국에 갈 가능성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직접 그 앞에 나타나셔서 변화를 시킵니다. 자신의 죄인임을 알게 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의롭다 하던 분이 죄인의 괴수라고 스스로를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아나니아로부터 성령세례를 받고서 구약의 자신이 알던 내용들이 예수님에 대한 글임을 알게 되고 그의 서신서에서 이제는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과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일생을 통해서 전하게 되고 핍박도 아울러 받게 됩니다.


그리고 언제나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해야 한다고 전하게 되었습니다. 의인 바리새인이 죄인의 괴수임을 알게 된 것은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고 그를 변화를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세례와 충만을 사모하는 자로서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능력도 받게 되었는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으로 우뚝 서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역사상 이렇게 천국이 허락된 사람의 면면을 보면 스스로 심령이 가난해서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증인으로 쓰임을 받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입니다(의인 욥, 고넬료, 에녹 등). 반드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는 우리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음에 큰 힘이 되는 내용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이렇게 한량없이 부어진다 해도 이렇게 은혜 받은 개개인이 역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온 열심을 다해서 말씀을 배우지 않고, 그리고 자신의 십자가에 매달려 죽음을 알지 못해서 자신을 죽이지 않고,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지 않고 자의로 산다면 이도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는데 큰 장애가 될 것이라 봅니다.


따라서 천국을 소유하게 되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만들어지는 사람이요, 또 하나님의 이런 은혜를 체험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성령을 사모해서 선물로 받고서 성령의 인도를 늘 받으면서 예수님의 증인의 삶을 잘 살고 그리고 날마다 또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는 사람이다라고 설명해 봅니다.


그리고 또 언제나 한결같은 신앙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복을 받으면 변절하는 사람, 핍박에 넘어지는 사람, 성령으로 시작해서 육으로 끝나는 사람이 절대로 되어서는 아니 되고 우리 모두가 서로를 격려하며 선한 길을 가도록 기도해주고 서로 책망하면서 끝까지 사랑하며 함께 천국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은총을 베푸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심을 통해서 이런 결론에 도달했음을 믿습니다. 아울러 많은 분들의 글은 제가 이렇게 글을 쓸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부분 부분 온전하지 못한 곳도 많겠지만 더 깊고 온전한 진리의 세계로 나아가는데 제 글이 작은 도움과 즐거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산상수훈의 남은 부분에 대해서 같이 연구를 해 보겠습니다. 모든 분이 더운 여름에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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