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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08 여름 일본 북알프스 5박 6일(I am a TNT)

작성자fairy|작성시간24.03.09|조회수54 목록 댓글 0

`08 여름 일본 북알프스 5박 6일(난 이 산행에서 폭탄이었다. I am a TNT) *****

 

방학으로 종일 집에 있는 내게 작은아들은 여름 여행 결정 났냐며 매일 묻는다. 엄마가 집에 있는 것보다 여행 다녀오는 게 아들로서 훨씬 맘이 편하고 좋은 모양이다. 여행을 간다면 경비까지 보조해 주겠다면 여행을 권한다. 그런데 예약했던 상품들이 오리무중 상황이다. 마침내 `08년 여름 여행을 결정하기에 너무도 많은 마음의 요동이 있었으나 이제 좀 사그라뜨려지기 시작했다. 유럽이냐 티벳이냐를 두고 예약만 네다섯 군데를 하였으나 확정이 나지 읺은 상황으로 우연히 네이버 커뮤니티에 접속하였다. 싱글차지 문제도 있었지만 혼자 가긴 어려운 티벳 지역은 조인할 사람을 찾는대도 문제가 많았다. 그런데 [함께 떠나요]를 클릭해 보니 뜻하지 않게 동행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난 아직 이런 곳에 들락거려 본 적이 없어 심사숙고해야만 했다. 사이트를 연결하여 내용을 본 순간 "아~ 이거다"라는 생각과 함께 이거 믿을 수 있는 건지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그동안 배낭 학교나 인터넷을 통한 유명여행사를 이용하였기에 별걱정 없었지만, 이 등산 트레킹은 동호인 중심의 개인사이트로 미안한 맘이지만 사기를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맘만 조급했다. 직접 해당 사이트(나우트레킹: 가림등산클럽)에 접속하여 이곳저곳 샅샅이 둘러보았다. 참고로 2024년 현재는 사업 종료인 듯. 하지만 나름대로 밤새고 웹서핑 후 믿음과 확신이 서서 작은아들과 여행 결정전 상의했다. 가능하면 같이 가자고 동행을 권하고 싶었지만, 본인의 의사를 존중해 주기로 하였다. 아들은 여러 차례 망설이더니만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맘은 함께 하고 싶은데 이번엔 엄마 혼자 다녀오세요."라고 하는 모습이 의젓하기도 했지만 안쓰럽기도 했다. 2008년이면 아들이 졸업과 동시에 임용고시 합격 후 첫 부임을 받았던 해이다. 7월 23일 날이 밝아 아침 식사를 하면서 다시 한번 권했는데 집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면서 이번 기회에 등산 장비와 의류를 장만하라고 한다. 오후엔 같이 쇼핑하지며 연수받으러 간다. 맘이 깊은 아이다. 난 학교 내 컴실의 식물에 환기와 물을 주고 여권사본을 팩스로 보내기 위해 학교엘 갔다. 폰뱅킹으로 765,000을 입금(신한: 331-04-009444)하고 나니 맘이 홀가분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께름직했다. 홀로 남겨질 아들 때문이다. 아들은 이번 주말엔 선배들과 금산엘 가기로 했고 친구들과 필리핀 여행을 계획 중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선입금(765,000원) 후 날아온 북알프스 트래킹 5박 6일 확정서

 

2008년 7월 28일 북알프스 산행 출발 전 정오 일기

 

이번 기회에 등산 장비를 챙기라며 뭐든 필요한 거 있으면 사 두라는 작은 아들. 골프웨어가 등산복으로 둔갑한다고 뭔 일 나겠냐마는 이번 등정이 3,200고지까지 하루 10시간 이상의 전문가들의 종주인 거 같고 또 하나는 잠깐이긴 하지만 사계절을 동시에 맞이해야 하기에 맘의 부담이 좀 있다. 목요일 서울서 큰 애가 왔기에 엄마의 여행 이야기를 대충 해 두었더니 잘 결정했다며 카메라와 핸캠 사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고 그동안 찍었던 핸캠의 자료들을 모두 노트북에 옮겨 주며 포맷도 하고 충전도 해준다. 그리고는 "엄마 이 손전등 잊지 말고 꼭 가져가세요."라고 챙겨준다.

 

금요일 작은아들은 연수 가고 큰아들이 친구를 만나러 나간 사이 난 등산복 판매장으로 가서 무릎보호대와 상하의 등산복을 한 벌 샀다. 돌아오는 길에 작은아들이 끝날 시간쯤 되었기에 문자를 보내어 데리러 갔다. 쇼핑한 물건들을 보여주며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해외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은 최 선생에게 운을 떠보기도 하지만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한 건지 안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최 선생의 생각은 그토록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난 그 속이 오리무중이다. 그저 나 편할 대로 내가 알아서 생각하면 된다. 난 큰아들에게 엄마의 이번 여행을 아빠에게 말해야 할지를 물었다. 그래도 말해야 하지 않겠냐며 꼭 말씀드리고 여행 가라고 한다. 남들이 보면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부부는 예사 부부들과 좀 남다른 데 가 있다. 각자의 일 외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믿어서인지 아무튼 묻지도 않고 특별히 간섭하지 않는다. 좋게 말하면 서로 믿고 존중해 준다고 볼 수 있는 일이지만 이런 생활이 길들지 못한 난 가끔 불만이 생긴다. 이거 부부 맞아? 하다가도 어쩔 땐 친구만도 못하다 하다가도 진정한 인간관계는 이래야 해. 내가 봐도 참 변덕이 죽 끓듯 하지만 맘을 비우면 이편이 훨 맘 편하다. 겉으론 맘의 자유를 실컷 누리며 당당해 보이지만 솔직한 심정으로 안타깝기 그지없고 못내 아쉽고 하물며 외롭기까지 하다.

 

금요일 저녁부터 월요일 아침까지 두 아들이 있기에 보통 때보다 반찬도 여러 가지 준비하고 간식도 열심히 챙기며 넉넉한 주말을 보냈다. 때마침 최 선생이 싱싱한 전복을 한 상자나 가져왔기에 전복회/버터구이/전복삼계탕/전복미역국 등 신선한 채소와 함께했기에 가족들의 분위기가 좋을 수밖에 없었다. 부드러운 분위기이긴 하지만 난 선뜻 입 밖으로 여행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TV 뉴스에서 뜸 들이듯 북경 올림픽과 티벳 이야기가 나와 "내가 올해 티베트 여행하려면 청도에서 칭장 열차를 타야 하는데 올림픽 때문에 위험이 있어 모객이 어렵다."는 말까지 했는데도 최 선생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동의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허락을 받자는 것도 아니며 통고하는 것도 아닐 성싶다. 그냥 말 안 하고 여행 떠나는 게 아니라, 말 못 하고 여행을 다녀와야 할 것 같다. 최 선생의 보직으로 주말부부가 된 터라 닷새 후 금요일에 집에 돌아오면 내가 여행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될 거고 혼자서라도 석가헌에 간다면 내가 없는 흔적을 느끼게 될 것이다. 출발도 전부터 미리 심사 뒤틀리게 할 이유가 뭐 있겠는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다시 월요일에 가서 금요일에 돌아오면 최 선생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짤막하게 "여행 잘 다녀왔는가?"라고 할 것이다. 만약 사고라도 난다면 오늘 아침 일주일 먹을 음식들을 바리바리 싸주고 문 앞에서 배웅해 주었던 게 마지막이리라. 두 아들도 떠나고 최 선생도 없는 지금 내 기분이 싸아~하다. 그래도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다." 어느 사람에게도 의지하려 하지 말고 두 발로 버티고 선다. 이제 여행 배낭이나 챙겨야겠다.

 

2008년 07월31일 : 첫날_광주에서 부산 국제여객선 터미널로 가기

2008년 08월01일 : 둘째 날_오사카항 도착 후 다카야마로 이동

2008년 08년02일 : 셋째 날_다카야마에서 가미코지 이동 후 요코오 산장

2008년 08월03일 : 넷째 날_호다카다케 – 오크호다카 정상 후 가미코지로 하행

2008년 08월 04일 : 다섯째 날_ 오사카 시내와 오사카성

2008년 08월 05일 : 여섯째 날_ 오사카항 - 부산항 - 광주로 귀가

지도 출처: 일본 북알프스 야리가다케(槍ヶ岳), 오쿠호다카다케(奥穂高岳), 니시호다카다케(西穂高岳)..|작성자 노마지지

 

2008년 7월31일:첫날_북알프스를 향하여 부산 국제여객선 터미널로 가기

 

혼자 남아 있을 아들을 위해 몇 가지의 밑반찬과 간단하게 조리해 먹을 수 있도록 미역국과 김치찌개를 해 두기 위해 새벽 5시에 기상을 했다. 전날 저녁 버스 예약(부산 사상 7시 50분 발_13,000원)을 해 두었기에 최소 7시 10분에는 집에서 나가야 한다. 집 앞에서 버스터미널까지 1000번 공항버스를 타면 되지만 아들은 굳이 차로 배웅하겠다 한다.

 

핸캠, 디카, MP3, 스틱 등등 준비물을 잘 챙긴 큰 배낭(45리터)과 보조 사이트 배낭을 챙기고 전날 아들이 사 준 모자를 쓰고 맘은 무겁지만, 몸은 가벼운 상태로 터미널로 갔다. 터미널 내에는 피서객 인파로 몹시 붐비고 부산 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버스는 시간 되자 움직이기 시작한다. 11시가 되어 부산 사상에 도착하여 지하철로 국제여객선 터미널을 찾아가야 한다. 터미널 앞 지하로 가서 편도 2구간 1,300원짜리 티켓을 끊어 2호선을 타고 가다가 중간 서면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야 한다. 중앙동에서 내려 지하철 방향으로 걸어가다가 오른쪽으로 좌회전하여 쭉 걷다 보면 국제여객선 터미널 팻말이 보인다. 모이기로 한 장소에 도착한 시간은 1시 전이었지만 바쁠 게 없다는 생각에 3층에 있는 가야 식당으로 들어갔다.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은 후 가방을 식당 주인에게 맡기고 항만 주변을 둘러보고 터미널 안으로 들어갔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만나 새로운 곳으로 여행. 불안할 것도 바쁜 것도 없어 편안한 맘으로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박상도 대장(010-4840-1694)에게서 2층에 있는 그린마운틴 팻말 앞으로 오라는 전화가 왔다. 그곳은 지난 5월에도 봤던 출국장이고 일본과 중국으로 가는 인파로 가득했고 북알프스를 동행할 일행들도 산재해 있었다. 처음 본 박 대장은 작고 다부진 체격이긴 하지만 알피니스트라기보다는 해외 트래킹 사업가로의 모습이 컸다. 박 대장에게 여권을 맡기고 등산 일정표와 등산지도 그리고 [그린마운틴]이라는 단체 표시기를 받았다. 나는 한쪽 구석에 앉아 관심 없는 척하면서 같이 이동할 일행들을 살펴보았다. 처음 대하는 사람들이라 낯설기는 하지만 그저 평범한 아저씨 아줌마들로 거의 내 또래로 그저 만만해 보였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들은 모두 등산 전문가(?)들이었다.

 

시간이 되어 현지 가이드인 정 차장에게 승선권과 여권을 받았다. 입국 절차를 마치고 승선하여 배정된 7225호 침실을 찾았다. 떼거지 다인실인 줄 알았는데 바다 쪽으로 창이 나 있고 실내에 화장실이 완벽하게 갖춰진 5인실에 3인이 배정된 스위트 룸 급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동행 28인 중 단체 일행이 9인조, 7인조, 5인조, 2인조, 나를 포함한 각 1인이 3명과 가이드, 그리고 대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각자 1인이 온 사람들을 모아 특별 예우를 해준 대장의 배려(?)였다. 대장은 팬스타 사장과 고교 동창으로 선박 권을 확보하는데 여행사 사장으로 나름 자부심이 컸다. 나를 이어 침실을 찾아 들어온 아줌마 한 분이 침실을 찾아 들어왔다. 부드럽고 고운 이미지를 가진 진정한 불자의 인상으로 6일 동안 내내 나와 함께 하였다. 나이 서른에 홀로되어 아들 한 명을 잘 키워 장가를 보내고 두 손자와 함께 5인 가족을 이뤄 잘 살고 계시는 직장인(현대해상)으로 53년생으로 언니라 부르기에 불편하지 않은 분이었다. 짐을 대충 정리하고 갑판으로 나와 출항하는 항만 주변을 살피며 집 떠나온 자유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비행기를 이용해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또 다른 맛이다.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수평선과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시원한 바람. 배 갑판의 낭만을 그대로 전해주는 나무 의자. 난간에 걸쳐 있는 부표와 여행자들. 직장 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방학이 있어 틈만 나면 훨훨 여행을 다닐 수 있는 내가 좋다. 이왕 이렇게 집을 떠나 나름으로 여행 시작한 거 만끽하며 즐기고 싶다.

 

7월 31일 15시 20분 출항하여 바다 위 선상에서 하룻밤을 새우고 다음 날 10시경 입항하게 되는 18시간의 긴 항해이다. 흔히들 비행기 삯에 비해 선박값이 훨씬 싸기에 가난한 여행쯤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 경험으로 보아 그건 아닌 듯싶다. 난 그동안 국내에서 출국 때 비행기로만 해외여행을 다녔는데 이번 5월 후쿠오카와 오사카행의 기회로 유람선 여행의 묘미를 확연히 느끼게 되었다.

 

2003년의 노르웨이와 덴마크를 연결하는 실자라인 크루즈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땐 멋도 모르고 영화로만 봐 왔던 바다에 떠다니는 도시, 실자라인 내부에서만 구경하기 바빴었다. 그리고 아테네에서 카이로를 건너갈 때는 갑판에 자리 차지하고 침낭 속에서 잠자는 것만 했었다. 그래서인지 그 당시의 여행 사진에는 바다를 항해하면서 찍혀진 사진이 거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촌스럽기 그지없지만 그사이 나름 노하우가 생긴 것 같다. ㅎㅎ. 시간적 여유만 있다면 배를 이용한 드넓은 바다에서 느낄 수 있는 확 트인 시야와 맘의 여유 있는 긴 시간에서 지루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또 다른 여행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좋다.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고 기내에서처럼 좁은 공간에 가둬 둔 기분이 들지 않아 좋다. 또 하나 좋았던 것은 기내에선 있을 수 없는 동행인들과의 대화이다.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난 혼자 여행할 때 의자에 가방을 두고 자주 찍는 편이다. 그리고 손을 길게 뻗어 나를 향해 직찍 한다. 이런 나의 모습을 본 일행 중 한 여자분이 빙그레 웃으며 내게 와서는 자신도 나처럼 의자와 가방 사진을 찍겠다며 날 찍어주겠다고 카메라를 달라고 한다. 그녀는 일행은 있었지만 내게 기꺼이 자신의 카메라를 건너 주며 자신 모습도 찍어 달라고 한다. 이래서 낯선 사람들과 가까워지기가 쉬운 게 크루즈여행이다.

 

오사카항으로 가는 팬스타 써니호에서는 저녁 식사 후 레스토랑에서 승선자를 위한 쇼가 벌어졌다. 룸메이트인 언니와 갑판에 나와 이런저런 이야기꽃을 피우며 사진도 찍고 넋 놓고 바다를 바라보다 박 대장을 만났다. 셋이 배 내부 간이 의자가 놓인 곳에서 캔 맥주 세 개를 사서 담소를 나누었다. 나의 룸메이트는 서울부터 동행인 중 유일한 총각 폴리스와 박 대장이 함께 KTX를 타고 왔기에 스스럼없어 보였다. 대충 그린마운틴의 회사와 박 대장의 소개를 마치고 사소한 얘기를 나누다 침실로 돌아가려는데 룸메 언니가 레스토랑에 들러 보자고 한다. 마침 노래와 퀴즈 쇼가 끝나고 마술 쇼가 시작되는 시간이었다. 내 보기엔 마술사의 마술 솜씨가 서툴러 보이지만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마술쇼는 그런대로 성황리에 마쳤다. 우린 다음 날을 위해 잠자리에 들게 되었다.

 

 

2008년 08월01일 : 둘째 날_오사카항 도착 후 다카야마로 이동

 

팬스타 페리 내의 아침 뷔페를 먹고 나니 선내 방송에서 간사이 지방의 섬들을 연결하는 육교를 관람하라는 안내 멘트가 나온다. 우리나라 한강 철교와 별 차이 없어 보이지만 부산서 오사카로 가는 중간에는 네 개의 커다란 연륙교가 있다고 한다. 어제 밤하늘에 시모노세키와 연결되는 보석 같은 철교가 보였는데 새날이 밝아 보이는 육교는 내 눈엔 그저 그렇게 보였다. 그래도 남들이 하는 인증샷도 찍고 10시쯤 되어서야 오사카항에 입항하게 되었다. 오사카항에는 여러 개의 컨테이너와 이를 옮기는 기중기들이 많이 있다. 여기서 또 다른 발견은 일본은 여러 곳에 철교와 함께 대 관람차가 있어 위치를 가늠하기에 도움이 된 듯하다. 오다이바에서도 그랬고 시모노세키에서도 오사카에서도 멀리 대관람차가 보였다. 오사카 항만을 배경으로 비치는 선창에 내 모습을 직찍 하려는데 혼자 온 특수 기동대 소속 젊은 청년이 사진 찍어주겠다며 한 장 찍어주는데 사진 구도 잡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침실에서 잃은 물건 없이 가방을 잘 챙겨 페리 밖으로 나와 일본 입국 수속을 위해 팬스타 전용 버스를 이용해 입국장에 왔다. 입국장에는 한국 관광객이 그리 많은데도 통과해야 할 문을 여섯 개 중 네 개만 열려 있어 더딘 통과로 날씨는 더운데 짜증 나게 했다. 거의 12시가 넘어서야 오사카항 앞에 대기 중이던 전용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우리 일행 28명은 같은 클럽 동호인들끼리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결속력을 과시했다. 난 누가 누군지 어떻게 그룹이 이뤄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처음부터 눈에 띄는 두 남녀가 왠지 어색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많은 사람 중에 부부가 온 사람은 두 사람이었다. 내가 소망하기는 나이가 들고 늙어 힘이 없을지 때 부부가 함께 여행 다니는 것인데 아직은 모두 젊어서일까? 아무튼 홀로 나온 한국의 아줌마들의 힘은 대단했다. 각자 개성들이 뚜렷하고 말로든 미모든 빠지는 이가 없어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 근사한 빨간색 버스를 이용해 항만 가까이에 있는 오사카 푸드 아울렛으로 갔다. 참 신기한 것은 이용객이 거의 없는데도 너무나 큰 음식점들이 즐비하다는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2층에 있는 싱가포르와 중국식의 씨푸드점으로 [ASIA CIRCUS]는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평상시 차려준 음식을 먹겠다며 외식의 경우 뷔페 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차려진 음식들을 두루 섭렵하며 원 없이 먹고 숙소로 이동하기 위해 다카야마를 향했다. 차 내가 어찌나 더운지 아줌마들이 모두 한마디씩 한다. "기사님 에어콘 입빠이데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밖의 날씨가 너무 더워 입빠이(풀가동) 틀어도 더 이상 시원하게 할 수는 없단다. 일본 고속도로변 풍경은 우리 내 풍경과 별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지진이 많은 땅으로 삼나무와 향나무 대나무들이 가득하고 집집이 허름해 보이긴 하지만 지진에 대비해서 안전하게 설계된 집이며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정원을 최우선으로 하며 부의 척도가 되기도 한단다. 도로 상태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못하면서도 통행세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대신 철도사업에 투자를 많이 하는 일본경제다. 우린 두어 시간쯤 가서야 1,709m의 히루가노 고원 휴게소를 들르게 되었다. 다카야마로 6시간의 이동으로 우리들의 숙소인 하나호텔에 도착하게 되었다. 짐을 차에 두고 호텔 가까이에 있는 일본 다케야마 음식전문점에서 저녁을 먼저 먹기로 하였다. 호텔 앞의 작은 장식 화분을 보고 피곤을 풀고 작은 신사를 지나 식당을 찾아갔다. 밖에서 본 식당은 의외로 아담하고 품위 있어 보여 기분 좋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겠다 싶었다. 히다 다케야마의 문화가 교토와 에도 문화를 합쳐서 발전된 거라면 이 두 문화를 합쳐 또 다른 히다 다케야마만의 독특한 향토 요리를 만들어 내는 식당이란다. 마른 목련 잎에 된장과 채소 그리고 쇠고기를 얹어 만든 [호바미소스테이크]라는 음식은 개인 화덕에 개인 음식이 나오는 이곳 다카야마의 향토요리이다. 모든 이의 입에 짠 음식으로 그리 호평을 받지는 못했지만, 요리의 맛보다 식당 내부가 아름답고 여주인들의 친절함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저녁 식사 후 다카야마 거리는 상점들이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서인지 한산하기 그지없으며 자기 상점 앞을 청소하는 주인들만 가끔 보였다. 맘 같아선 구석구석 돌아보고 싶었지만, 차에 실린 짐들을 침실로 옮겨야 하기에 내 맘대로 행동할 수가 없었다. 호텔과 식당 사이에 있는 작은 하나(花)와 신사에 들러 예식을 하는 것을 보긴 했지만 무엇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난간 한편에는 중년의 부인 열댓 명이 한 손에 방울이 달린 촛대를 흔들며 찬송과 함께 예를 올리고 있었다. 다카야마는 작은 교토라 불리는 웅대한 자연과 역사가 숨 쉬는 곳으로 도쿄에서 특급 열차로 4시간이나 소요되는 곳이다.

 

박 대장은 숙소가 형편없을까 봐 걱정이 태산이었다고 한다. 난 언제부턴가 자유 배낭여행으로 게스트하우스나 유스호스텔 아니면 도미토리에서 기거했기에 이곳 시골 다카야마의 하나라는 숙소는 과분할 만큼 고급이었다. 특히 기분 좋았던 것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화장대 위의 종이로 접어진 작은 공작새와 환영 인사가 적힌 글이 내 마음에 와닿았다. 우린 가끔 작은 것에 감동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긴다.

 

오늘도 역시 양정옥 여사(마지막 날 주소를 주고받으면서야 알게 된 이름)와 함께 방을 쓰게 되었다. 팬스타 페리에서도 자신의 살아온 얘기를 스스럼없이 모두 하셨다. 혼자서 황산과 백두대간을 등반한 이야기 등등. 나이 서른에 10살 아들과 홀로되어 지금껏 살아오다가 느지막이 좋은 사람 만났는데 세 번을 만나고 사고사를 당한 인연에 관한 얘기를 하였다. 정말 안타까운 영화 같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가끔 손자 녀석들 이야기만 하면 두 눈이 보석처럼 빛난다. 양 여사님의 맘속에 ’내가 왜 혼자 다닐까‘ 궁금할 것인데 상대의 말을 다 듣고 내 말은 한마디도 안 한다는 게 얄미울 거 같았다. 내 성격상 거짓말은 못 하고 대충 얼버무렸다. 내일부터 등산을 위한 가방 분리를 해야 했다. 차에 두고 갈 것과 최대한 가벼운 산행을 위해 산장에서 1박 2일을 함께할 것을 정리하다 보니 밤 12시가 훌쩍 넘어 버렸다.

 

다음 날 아침 5시에 기상하여 5시 30분에 가미코지를 향해 출발하여야 한다. 새벽 일찍 나와 호텔 앞에서 좌우로 펼쳐진 길을 보니 도로가 오래되어 갈라져 있긴 하지만 듣던 대로 길 양옆에는 한 대의 차도 노상 주차되어 있지 않았다. 우리나라와 비교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서 정말 신기했다.

 

 

2008년 08년02일: 셋째 날_다카야마에서 가미코지 이동 후 요코오 산장

 

다카야마의 호텔 하나에서 5시 30분에 출발하여 가미코지를 향했다. 간간이 현지 가이드인 정 차장의 설명을 들으며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이동했다. 이곳 가마고지는 환경파괴의 근간이 되는 모두를 사전에 차단한다는 의미로 경유를 넣은 자동차는 현지까지 올라갈 수 없고 전기 자동차로 갈아탄다. 한두 시간쯤 지나 우리 일행은 가마고지 산장에 도착하였다. 이미 일찍부터 산행을 위해 도착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정 차장이 예고한 것처럼 일본 현지인들도 이번 주말이 휴가 절정인지라 식당과 산행이 붐빌 거라 했다. 산장에서 병풍처럼 펼쳐진 북알프스 산들을 우러러보고 멋진 품세에 감탄을 연발했다. 예상대로 날씨가 추워지고 배낭에서 모두 두꺼운 옷으로 갈아입고 미리 준비된 산장 2층의 식당으로 이동했다. 식당 내부에는 네팔의 안나푸르나와 에베레스트 등정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한해 전에 작은아들과 등정한 곳이라 친숙한 모습에 시선이 머물렀다.

 

일본의 북알프스는 3개의 지방인 기후, 나가노, 도마야 현에 걸쳐 있는 산맥이다. 나의 흐릿한 기억으로 나가노는 언젠가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기도 하다. 북알프스는 일본에서 세 번째로 높은 오쿠호다카다케(奥穂高岳, 3,190m)와 다섯 번째로 높은 야리가다케(奥穂高岳, 3,180m)를 포함한 해발 2,500~3,000m급의 산들이 70킬로 이내에 12개나 줄지어 있다고 한다더니만 이곳 가미코지라는 곳에선 그 웅장함을 올려다볼 수 있는 곳이었다. 봄에는 잔설, 여름에는 고산식물, 가을에는 단풍을 즐길 곳으로 일 년 중 다섯 달 정도만 개방된 곳이라 한다. 너무나 가파르고 위험할 뿐만 아니라 고산으로 오르면 기상이 돌변하여 해마다 사고가 끊이지 않는다 한다. 국내산 1년 정도 돌면서 등산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위험한 곳이라 한다. 가미코지에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도시락과 간식 주머니를 챙겨 넣었다. 요오코로 가는 길 중간에 도쿠사와 산장과 나이무라바시 산장이 있어 간식을 먹으며 잠시 쉬었지만 길은 차가 통과할 수 있을 만큼 넓고 평탄하였다. 산책길처럼 편안하긴 하지만 지루하게 생각될 때쯤 되면 계곡에 잔설을 안고 있는 먼 산의 풍경과 계곡의 시원한 물소리, 그리고 길섶에 줄지어 날 봐달라고 서 있는 갖가지 야생화들이 다시 힘을 나게 했다. 난 내가 야생화에 대해 남들보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행 중 동행하신 상지대 의대 교수님(연세가 60이라는데 동안에 술을 즐기시는 듯_산을 오를 당시만 해도 직업이 뭔지 궁금_6일 동안 함께 했어도 이름 한 자도 모른다)은 야생화의 이름을 나보다 많이 알고 계신 듯했다. 사실 난 평상시 등산을 많이 하지 않았기에 사전에 겁도 많이 먹었지만 멋모르고 별 두려움 없이 따라나서기 시작한 산행이다.

 

지치기 시작할 무렵 내 뒤에서 함께 한 동숙자(당시만도 이름도 성도 몰라 그냥 언니라 했다. 내 성격상 처음 본 이에게 선 듯 나오지 않은 명칭이지만 나도 모르게 부르게 되었다)의 격려로 일행들과 약속한 점심 장소에 다다랐다. 일행들의 수고와 격려와 친절로 열무김치와 깻잎장아찌까지 얻어 점심 도시락을 다 먹었다. 계곡의 흐르는 물에는 손도 씻지 않는다는 일본인들. 우린 발도 담그고 손도 씻으며 심하게는 목욕도 하지만 그 분위기에서 우리도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난 조심스레 페트병에 물을 담아 카페라떼를 만들어 먹었는데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다. 어찌나 시원하고 달콤했던지. 남들은 일찍 도착하여 꽤 오래 쉰 것 같지만 동숙자와 난 식사를 끝내자마자 다시 산행을 이어가야 했다. 산에 오르던 중 나의 엉덩이에는 좌골신경 통증의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잔설을 넘어 경사에 이르니 양쪽 다리 안쪽 사타구니가 아프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을 갑자기 무리하게 사용해서 일어난 일이리라. 한참을 두들기면서 꾸~욱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내 몸에 맞는 산행으로 무리는 말아야겠다고 맘을 먹었기에 불안하거나 초조하지는 않았다.

 

어느덧 눈앞에 눈 계곡이 펼쳐지고 우린 그곳을 질러가야 했다.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노르웨이 송네 계곡의 피오르를 보는 듯했다. 눈이 많이 쌓인 계곡 주변의 식물들은 이제야 나무줄기에 움이 트기 시작하고 조금 멀리 떨어져 있는 같은 식물은 이미 꽃을 한창 피우고 있어 세 개의 계절을 동시에 본다. 그런데 황산과 백두산까지 혼자서 등반했다는 동숙자는 나를 밀어 올리듯 하였지만 고산병에 시달리는 듯했고 난 왼쪽 발에 쥐가 나기 시작하여 종아리 근육이 뭉쳐 걷기가 어려웠다. 멀리 보이는 산은 아득하기만 한데 난 무리하지 않고 쉬기로 했다. 동숙자는 고산증이라며 발을 위로 치켜들고 눕고 난 등산화를 벗어 버리면 다시 신기 어려울 것 같은 기분도 들었지만, 계속되는 근육경직으로 신발을 벗고 맘 편히 쉬기로 했다. 일행 중 가장 늦게 뒤처져 4시간여 동안 걸어 요코오 산장에 도착하였다.

 

요코오 산장에 도착하자마자 선행한 사람들은 왜 이렇게 늦었냐며 걱정 반 노함 반의 모습을 보인다. 일행들에게 내가 폭탄이었지만 사실대로 말해야 했다. 다시 한번 난 산행 경험이 없어 양 사타구니가 아프고, 다리에 쥐가 나서 늦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 신경 쓰지 말고 산행을 하라고 가이드와 등반대장에게 말했다. 그랬더니 일행 중 연세가 65세인 아주머니가 수지침을 꺼내면서 사혈을 빼줄 거냐 묻는다. 난 예전에 수지침을 배워서 알기에 소독하지 못 한 점이 아쉽긴 했지만, 종아리를 내주며 허락하였다. 그 아주머니는 노련한 솜씨로 조금 아플 거라 하드만 다다다다닥!! 예닐곱 여덟 군데 아니 열 곳을 찍어대더니 두 손에 힘을 다해 사혈을 뽑아내기 시작하였다. 그도 부족했던지 엄지와 가운뎃발가락 발톱 밑을 따서 피를 내준다. 남의 냄새 나는 발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흔연 덕스럽게 처치해 주는 그 분은 산에서 나의 의사 선생님이었다. 비상시를 대비해서 봉사하려고 수지침을 챙겨서 다닌다는 건 쉽지 않다.

 

요코오 산장(1,620m)와 가라사와 산장(2,310m) 사이의 풍경은 말이 필요 없는 장관이다. 꼬막 같은 텐트를 대여하거나 직접 가져와 멋진 텐트촌이 이뤄진다. 텐트의 크기에 따라 3인 5,000엔부터 6인 8,000엔까지 대여 가능하다. 그냥 이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도 없이 내 주제도 모르고 발 가는 대로 따라나섰다. 게다가 대장에게 등행 코스를 물으며 이곳으로 내려오느냐 물으니 전혀 아닌 곳으로 내려간다고 하여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일본에는 "하야다치 하야츠키(早發早着)" 즉 이른 출발과 이른 도착이라는 기본 사항이 있다고 한다. 우리처럼 새벽 6시나 5시 반경에 시작하여 오후 2시나 4시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일본산이 오후에 날씨가 급변하며 여름엔 뇌우가 많다는 것이다. 날씨뿐만 아니라 오후에 등산 사고도 자주 일어나는 곳으로 피곤해서 발을 헛딛거나 탈진에 빠지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대부분 일본인이나 나 같은 일반인들은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마땅하다. 짐을 풀고 산책하며 산 자체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난 별생각도 없이 일행들의 뒤를 따라야만 한다는 생각으로 일행들의 뒤꼬리를 물어야 했다.

 

난 산행하면서 바위와 잔설 사이사이에 펼쳐져 있는 야생화를 보면서 스스로 에너지를 보충했다. 다리만 아프지, 정신과 기분을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내 눈앞의 일행들은 이미 멀찌감치 손톱만큼 보이지만 마음이 초조하진 않았다. 몇 걸음 가고 쉴 때마다 카메라를 들고 요코오 산장을 향해 사진 한 장 찍고 발아래 놓인 야생화도 찍었다. 흰 눈 속에 피어나는 에델바이스는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기까지 하고 내 입에는 에델바이스 노래까지 흥얼거렸다. 하지만 맘 한편으로 저기까지 언제 오를까 심란한 마음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절대 무리하지 말고 쉬고 싶을 때 쉬어가자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하며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내디뎠다. 집에서 출발 전부터 정상에 오를 생각을 하지 않고 멀리 두고 보려고만 했는데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내가 대견했다. 한참을 올랐건만 일행들의 꼬리는 보이지 않고 내 뒤로 올라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한참을 오르다 몸을 누일만한 바위가 나타나 두말할 것도 없이 들어 눠 버렸다. 검은 구름이 몰려오니 불안함도 함께 밀려왔다. 해가 떨어지면 등산이 어려워진다. 멀리 요코오 산장을 보니 아직 까마득하다. 지금 이렇게 오른 것처럼 서서히 오르면 된다는 생각과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라는 생각,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 등등 오만 생각을 다 하며 오르는데 멀리서 박 대장이 소리를 친다. "광주댁 힘내세요. 이제 다 왔어요. 십 분만 올라오면 돼요."라고 소리를 치지만 그 박 대장이 있는 곳까지 가는데도 족히 30분은 걸릴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험난한 산을 이리 높이 올라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격려하며 박 대장이 있는 곳까지 올랐는데 박 대장은 내게 배낭을 달라고 한다. 예전에도 자신은 일행들 배낭을 세 개씩 들고 올랐다 한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 난 절대 줄 수 없다며 다시 허리춤을 움켜잡았지만 나와 함께 오른 동숙자는 대뜸 배낭을 박 대장에게 넘겨준다. 차라리 다행이다 싶다. 이후 아주 경사진 곳을 아슬아슬 오르는데 내 생각에 이곳 산은 우리나라의 산과 사뭇 다른 것들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선 이쯤 되면 난간과 계단을 만들어 오르는 이들을 안전하게 오를 수 있게 할 텐데 여긴 그러한 시설이 거의 없었다. 오르는 정도의 표시로 바위에 동그라미 표시만 있을 뿐 그리고 급경사인 곳에 쇠사슬만 있었다. 자칫 발하나 잘못 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이니 정신을 바짝 차릴 수밖에. 직각으로 세워진 쇠다리를 지나 한참을 걸어 올라가다 보니 정상인 듯 한 곳에 깨알 같은 무리가 보였다.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아직도 그곳까지 가려면 한 시간은 더 걸어야 할 것 같다. 그즈음 정 차장이 내려와 나의 배낭을 달라고 한다. 난 서럽기도 하고 오기도 나서 괜히 가이드 정 차장에게 내 자존심 건들지 말라며 기어코 배낭을 내 주지 않았다. 끝까지 내 힘으로 매고 가리라 맘먹으니 오히려 힘이 났다. 남들은 9시간 정도면 주파할 수 있는 산행을 난 11시간을 걸러 숙소인 호타카다케 산장(穂高岳 山莊, 2,983미터) 드디어 도착했다. 몇 킬로를 걸었는지는 기억이 없다. 호타카다케 산장 입구까지 노란색과 흰색의 난쟁이 꽃이 내게 마지막 힘을 주면서 키보다 높은 빙벽을 지나 기다리던 일행들과 합류할 수가 있었다. 올라오느라 수고 했다면 문밖까지 나와 주었던 일행들과 멋쩍은 기념 촬영을 하고 숙소에 들어서는데 20여 명이 넘는 일행들이 모두 일어서서 박수를 쳐 주는데 어찌나 미안하고 고마웠던지. 그럼에도불구하고 희한하게 더 배고픔을 느낀 난 정말 다행이었다. "박 대장님 배고파요" 하는 나의 말에 박 대장은 한 시름 놓았다며 고산병만 아니면 좋다고 하였지만 나의 동숙자는 고산병으로 나보다 훨씬 지쳐 있었고 입술 가장자리에 하얀 백태가 끼어 있었다. 그녀는 밥맛이 없다며 거의 먹질 못했다. 난 그 와중에도 내 몫의 밥을 다 먹고 된장국도 한 그릇 더 먹었다.

 

토요일 저녁이고 일본인들의 휴가 절정 시기라 산장의 방은 독 나고 없어 28명이 한 개의 방에서 자야 했다. 남들보다 늦게 오르고 밥도 늦은 터라 나의 잠 자릴 내 의지대로 할 여지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한 개의 방은 한쪽은 2층으로 되어 있어 1층 좌우에 열 명과 2층에 8명이 잘 수 있었고 일인용 요 크기에 두 명씩 칼잠을 자야만 했다. 몹시 춥다니 여러 겹의 옷을 껴입고 과연 잠을 잘 수 있을지 모를 일이지만 산장 주인이 담 날 산행을 위해 9시에 불을 끈다니 모두 그 전에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그러던 중 함께 잠자리했던 동숙자는 담요 두 장을 들고 방 밖의 통로로 나가고 난 밤새껏 코 고는 소리와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날 밤을 새워야 했다.

 

 

2008년 08월03일 : 넷째 날_오크호다카 정상 등정 후 가미고치까지 하행.

 

호타카다케 산장에서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허리만 펴고 나왔다는 표현이 맞다. 산에 오르기 전부터 가이드는 정상에서 날씨가 좋아서 일출을 보게 된다면 올라올 때의 힘든 것이 모두 풀릴 것이란다. 정상에서 일출이 환상이라며 자랑에 침이 말랐었다. 너무나 큰 기대를 했기 때문일까? 뭐 그냥 일출일 뿐이긴 해도 나의 소원을 빌고 사진을 찍었다. 일출에 비친 산장의 모습이 아름답게 빛났다. 이곳 산장은 모두 개인 것으로 성수기 하룻저녁에 500명도 넘게 수용한단다. 박 대장의 말에 의하면 산장의 위치가 좋아 1인당 10만 원(1박3식)으로 돈을 많이 번다고 한다. 우리 옆에는 일본 현지인의 중년층이 여러 명 왔었는데 모두 아침 체조를 하고 나더니 자고 난 자리의 이불을 개키고 정리를 하는데 우린 그대로 두고 나선다. 내가 박 대장에게 어찌해야 하느냐 물으니, 숙비를 많이 주었으니 그냥 두고 가자고 한다. 그들만의 방식이 있을 테지만 허~얼~~

 

정상에 오르면 더욱 춥다니 복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여름인데 싶어 얇은 티셔츠를 두 개 껴입고 윈드 파카를 입었다. 바지 속에는 두터운 스타킹 같은 내복을 입으려다 다시 벗어 버렸다. 아침 식사에 생달걀이 나왔다. 난 슬그머니 옆 사람 그릇에 옮겨 두었다가 아니다 싶어 다시 가져왔다. 엉덩이에 뿔 나도 별수가 없다. 평소에 달걀을 즐기지 않지만, 흰 밥에 달걀을 깨트려 후르륵 먹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우린 식당에서 이른 아침을 먹고 도시락을 챙겨 산장 앞 전망대에서 가볍게 몸풀이를 한 후 오쿠호다카다케(奥穂高岳)로 향했다. 박 대장은 오르는 길이 몹시 가파르니 스틱을 사용할 수 없고 발 딛기를 조심하라고 이른다. 난 하행 길이야 별걱정 없으리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고 정상을 향해 올랐다. 그런데 오르는 경사가 정말 장난아니다. 90도 경사의 경우에만 쇠사다리가 있고 거의 7~80도의 경사를 두 발과 두 손 무릎까지 동원하여 기어올라야 했다. 난 얼마 오르지도 않았는데 다리에 힘이 빠진 듯 어지러웠다. 이러다 죽겠구나 싶어 긴장까지 하니 더욱 힘들었다. 사전 준비도 없이 난생처음 이렇게 높은 산에 오른다는 경험이 그다지 좋은 건 아니지만 완주한다면 대단하다는 생각은 들었다. 위로 올라와서 보니 산장은 바람통과 태양열을 이용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높은 곳에 물이 있을 만한 곳이 없는데 어떻게 물을 공급하는지 궁금했다. 혹시 저 만년설로??? 아마도….

 

북 알프스 호타카산군은 산세가 수려하고 험준하여 당연히 일본 최고의 산들이다. 최고봉 호타카 산군의 오쿠호다카다케(奥穂高岳, 3,190m)는 후지산과 남알프스 기타다케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이다. 한 시간가량을 오르다 보니 남북으로 약 75킬로의 대 산맥을 형성하고 있으며 그 중심은 3,000미터 이상의 연봉으로 호타카 산군이 이어져 있었다. 박 대장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하는 트레킹코스는 북알프스의 남부지역이고 북알프스의 북부지역은 츠르기다케, 다테야마, 시로우마다케로 비와 안개 등 기후 변화가 심해 돌발 상황이 많이 일어나고 진정한 산꾼들이 다닐 수 있다고 하며 해마다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한다. 오쿠호다카다케는 일본의 100대 명산 중 15개가 산재해 있고 3,000m급 산들이 즐비하다더니만 정말 그런 산들을 발아래로 내려다볼 수 있는 곳으로 올랐다. 이곳에 오르는 이마다 3,190고지의 팻말 앞에서 인증샷을 찍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정상을 표시하는 돌탑이 있을 텐데 이곳 일본산에는 산신을 모시는 조그마한 집이 있었고 나무판에 간단하게 표시되어 있으며 들고 찍을 수 있는 표지판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정상에는 방위를 나타내는 표지 동판에 각 봉우리가 이름과 함께 표시되어 있었다.

 

나보다 빨리 오른 일행들은 마에호다카다케(3,090m)까지 이미 들러온 모양이다. 내겐 마에호다카다케로 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가미코지까지 시간 안에 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맘을 날아가고 싶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고 특히 등산화 끝부분이 바위에 걸려 여러 차례 자빠질 뻔할 뿐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다리가 풀려 발을 잘못 디뎠던 것이 꼬리뼈를 다치게 해 순간 눈앞에 별이 만화에서나 보는 것처럼 휭휭 휘돌았다. 비명이 나올 만큼 아팠지만, 뒤에 오는 일행들이 있어 이를 악물고 참아야 했다. 그나마 이때만 해도 일행들과 함께 오르고 내려오는 순간들이었다. 한참을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자갈밭 길을 걷는데 어디선가 새 소리가 들려왔다. 한발 앞서 먼저 가는 동숙자는 "어머나 어미 새가 새끼를 몰고 다닌다." 하며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내 보기엔 꿩 같이 보이고 대여섯 마리의 새끼를 몰고 다니며 먹이를 구하는 것처럼 보였다. 또 가다가 이름 모를 야생화도 보이고 바위 틈새를 뚫고 나오는 나무 한 그루 한그루가 멋진 분재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제 오를 때만큼 감동은 느낄 수가 없었다. 꼬리뼈를 다친 상황이라 어디든 앉는다는 게 쉽지 않고 발가락의 엄지발톱마저 통증이 온몸에 짜릿하게 전해졌다.

 

북알프스 등정 전에 인터넷으로 두 개의 등정기를 사전에 읽은 적은 있었지만 두려움보다는 그냥 여행 떠난다는 기분으로 왔었다. 또 하나는 그 등정기와 일본 여행의 달인 님의 말에 의하면 날씨만 받쳐 준다면 멋지고 좋은 여행이 될 거라 했다. 정말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이건 내게 행운이었다. 어제 오를 땐 구름으로 태양열을 가려 주더니 오늘은 멀리 후지산의 봉우리가 눈앞에 다가왔다. 산을 돌며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헬리콥터 소리가 계속 들려 와서 난 우리나라처럼 주말이라 정찰 나온 것으로 생각하여 그 와중에도 두 팔을 들어 좌우로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더니 가까이 오다 다시 멀어진다. 열 살쯤 돼 보이는 어린 두 아들과 함께한 어느 일본인 남자는 탁트인 전망의 바위에 앉아 핸드폰을 들고 집에 있는 아내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눈 앞에 펼쳐지는 산들의 능선 경사를 보니 정말 아찔하다. 내가 이런 곳까지 올라와서 내려가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아름다웠다.

 

가도 가도 끝이 없어 죽을 것만 같았던 하행 길. 오를 땐 누구든 그곳 산장에서 밤을 지새워야 하니까 내가 늦게 오르는데도 그토록 미안한 맘은 없지만 내려올 땐 상황이 다르다. 우리 가이드와 대장을 포함한 일행 27명은 나 땜에 모두 가미코치에서 기다려 줘야 한다. 내 맘 같아서 모두 계획한 온천장까지 내려갔으면 싶었지만 그럴 순 없는 일이란다. 그런데 아까 봤던 헬리콥터가 또 나타났다. 내 눈앞에서 배회하더니 헬기장으로 마련된 부분에 내려앉는다. 일본 등산객이 사고를 당해 추락하였다고 한다. 들것에 실려 한번 나르고 다시 돌아와 두 번이나 실려 갔다. 당시엔 무슨 일이었는지 몰랐으나 정신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그걸 본 탓인지 내가 사고 안 저지른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순간이긴 하지만 가미코치까지 내려가는 길은 정말 멀고도 멀었다. 게다가 아침을 5시 반에 먹은 상황이라 배도 고프고 힘도 없었다. 하지만 나를 기다릴 사람들을 생각하면 싸서 간 도시락을 먹을 시간을 아껴야 한다. 이때쯤이면 개울이 나올 거 같은데 속고 속기를 반복하니 나중엔 절망이 계속되어 울음까지 나오려 했다. 풀썩 주저앉고만 싶었지만 나보다 연배이신 동숙자가 끝까지 동행해 주었다. 나의 동숙자가 없었다면 진즉 꼬꾸라졌을 것을 예상보다 한 시간 20분을 더 소요하고 일행들이 있는 버스까지 올 수가 있었다. 얼마나 미안하고 창피했던지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이번에도 이쪽저쪽에서 격려와 박수를 보내준다. 우리 일행은 가미코치 부근에 있는 온천장으로 이동하였다. 여자들은 긴 시간 온천을 원했지만 나 때문에 한 시간 정도만 하는 아픔도 있었고 식당가서 저녁 먹을 시간이 부족하여 저녁도 도시락으로 때워야 했다. 동행인들에게 미안해서 어쩔 바를 모를 지경이었으나 모두 내색하지 않고 대단하다고 격려를 해주어 더욱 미안한 맘이 가득했다. 짧은 시간이나마 등산의 피로를 풀 수 있었기를 바라며 온천욕을 마치고 다음 숙소인 오사카까지 6시간 30분 동안 버스 이동을 하였다. 본래 일정이 이런 건지는 모르겠으나 미안한 건 미안한 거다. 흔들리는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어서인지 소화가 되질 않아 가슴이 답답함을 느꼈다. 오사카 코니텔 숙소에 들러 씻고 정리 후 룸메와 함께 근처의 편의점에 들러 맥주 캔과 우유를 사서 먹고 나서야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다섯째 날:2008년 08월 04일 오사카 시내인 신사이바시와 오사카성

 

우리 일행들은 오랜만에 아침 늦게까지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기상 시간이 연일 새벽 5시였다가 오늘은 9시란다. ㅋㅋ 오래간만에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려 했는데 평상시대로 눈을 뜬 5시경에 두 손발은 절절거리고 온몸이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져 꿈쩍할 수가 없었다. 이러다 큰일 나겠다 싶어 혼자 숨죽이며 내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조금 나아지고서야 욕실에 앉아 다시 반신욕을 하며 한 시간 이상 마사지를 하고 나서야 평상시와 비슷해졌지만, 걷는 것부터 앉고 서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다. 함께 잤던 나의 동숙자는 아무렇지도 않다는데 젊은 내가 왜 이러냐도 싶었지만 다시는 이런 무모한 일은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침이 되어 묵직한 몸으로 배낭을 챙겨 호텔 프런트로 나갔다. 별로 테나지 않게 걸으려고 하지만 나 말고도 다른 사람들도 장난 아니게 아픈 모양이다. 보는 사람마다 다리 아프지 않냐며 묻고 아픈 게 정상이라며 찬물에서 풀고 내일은 더 할 거라 한다. 난 하행 시 다친 꼬리뼈를 어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동숙자가 준 케토톱만 계속 붙이고 다녔다. 아침 식사를 메트로 21에서 배불리 먹고 신사이바시를 둘러보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아침 10시부터 한 시간가량이 주어졌지만 내가 찾고자 하는 스포츠 대형 매장은 11시에 개점으로 대부분이 개점 전이었다. 아쉽고도 아쉽다. 꼭 내 아들 민수에게 더없이 좋은 스포츠웨어를 선물하고 싶은데 둘러보고 또 둘러봐도 나이키 매장까지 문이 닫힌 상태이다. 돌아보다가 패션 가게 앞에서 너무나 신기한 모습의 머리를 한 소녀를 만나게 되었다. 밝은 미소로 웃으며 다가가 "뷰티퓰~~ 헤어스타일!" 하며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워주니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한다. 기념사진을 몇 커트 하고 헤어지니 그도 개점부터 기분이 좋은지 어쩔 줄 몰라 한다. ㅎㅎ 이러다 정해진 한 시간 다 지나겠다 싶어 동네를 돌다가 방금 개점한 다이마루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스포츠 매장이 6층에 있는 거 같아 바로 올라가 보니 백화점 매장이 정말 컸다. 필요할지 어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서운한 사람들에게 선물하려고 골프용품 판매장으로 들어가 소품 몇 가지를 사서 돌아왔다. 난 항상 물건을 살 때마다 심사숙고하지만 잘한 건지 못 한 건지 구분이 안 된다. 남에게 줄 선물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이었으면 좋겠다.

 

13여 년 전에 난 광주시교육청에서 정보화교육 선진지 시찰로 8박 9일간 일본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도쿄에서부터 오사카 교토 나라까지 신칸센으로 오가며, 학교와 명승지를 둘러본 터라 그 당시에도 오사카성을 둘러봤었다. 이런 경우 혼자 하는 자유여행이라면 신사이바시를 좀 더 둘러보고 싶었지만, 혼자서 떨어져 다닐 수 없어 일행들과 행동을 같이했다. 오사카성의 주차장으로 가기까지 성에 대한 유래를 이야기하는 가이드의 말을 듣다 보니 어느덧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아직 12시가 되지 않았는데 13시까지 여객선터미널로 가야 한다며 점심을 먹어야 한다니 솔직히 왕짜증이다. 아침을 9시가 넘어 먹어 점심 먹을 맘이 전혀 없었는데도 가이드가 시키는 대로 식당에 들어가 우동 정식 몇 가닥만 먹고 나와야 했다. 음식 쓰레기 만드는 걸 거의 하지 않는 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식당 바로 앞에는 오사카성을 볼 수 있는 뷰포인트로 입간판 인형이 있었고 조금 옆으로 성을 둘러싼 연못이 있었다.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 성의 전망대까지는 갈 수 없었고 동숙자와 함께 선물 가게에 들어갔다. 동숙자는 손주들과 회사직원들에게 줄 선물을 고르는데 매우 심사숙고하셨다. 난 별로 살 것도 없었지만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하고 나도 수제품 주머니를 한 개 샀다.

 

0805일 오전엔 자유시간과 오사카성을 방문하고 점심 후 오사카항으로 13시 20분까지 집결하기로 하여 버스는 일행들을 태우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미리 출국 수속이 늦어질 거라며 항만에 들어서면 개찰구 쪽으로 배낭부터 순서대로 줄을 지어두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 항만 창에 비친 컨테이너들은 수출 수입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고 뭔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난 가이드가 말한 대로 눈치껏 배낭의 줄을 세워놓고 북새통인 터미널을 빠져나와 3층 전망대로 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탔다. 나와 동숙자였던 양여사님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3층에 올라 유리판과 철제빔으로 된 창밖을 바라보니 [PORT OF OSACA]가 눈에 들어오고 중국으로 떠나는 배에 화물 컨테이너를 실어 넣고 멀리 오사카항 주변을 볼 수 있는 전망대였다. 첨엔 밖으로 나갈 수 없은 줄 알고 안에 앉아 사진기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일행들이 떼거리로 몰러 온다.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삼삼오오 앉아 얘기꽃을 피우며 일본 등정 이야기가 나왔다. 내겐 이번 등산 행이 무리였고 여러분께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더니 그건 아니라며 오히려 나더러 대단하다고 말들 하신다. 그린마운틴 박 사장은 내게 감사장을 줘야 한다느니 그건 좀 뭐하고 3,190m 등행 성공 수료증을 만들어 줘야 한다느니 우스갯소리로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어느덧 시간이 대략 된 듯싶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는데 나의 동숙자가 그제야 나타난다. 난 다시 3층으로 올라와 전망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기념 촬영을 하였다. 나의 동숙자는 항만 입구에서 길거리 장사를 하는 사람에게 두 손자의 운동화와 참기름을 샀다고 자랑하신다. 천상 살림꾼이신 거 같다. 우리 가이드와 박 대장은 항만 문밖의 참기름이 유명하다며 필요하다면 사라고 권한다. 난 손자는 아직 없으니, 운동화는 필요 없고 참기름은 시어머니 표가 많이 있다며 사양했다.

 

출국 수속을 하려고 신고서를 작성하는 데스크가 나왔는데 그곳에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쓰여 있는 낙서 문구를 보고 가슴 뭉클했다. 얼마나 기가 막히고 염원했으면 저렇게까지 낙서했을까. 으음~~ 승선 과정을 다 마친 후 우리에게 배정된 방을 찾아가는데 가이드는 모르는 일행으로 아가씨 두 명이 함께 할 것이라고 귀띔을 해준다. 7225호를 찾아 가방을 풀고 자릴 정리하는데 꽃같이 이쁜 아가씨 둘이 들어왔다. 난 한눈에 대학생 아니며 특히 나서지 않고 점잔은 품새가 임용에 2~3수를 한 선생일 거라는 생각이다. 15시 20분에 출항을 하기 위해 올 스탠바이를 하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꼬박 새우고 오사카에서 부산으로 오는 시간은 거의 스무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날 밤 있었던 흐지부지 쓸데없는 일들은 모두 부산항에 하선하는 11시 30분에 손과 머리에서 사라졌다. 몇 개의 전번만 남기고.

 

사실 이전의 산행 중 네팔의 안나푸르나 산행은 안나푸르나 영봉이 보이는 곳 2,000m를 전후한 곳까지 아들이 동행하여 모든 짐을 다 들어 주었고, 인도의 마날리와 라다크까지는 히말라야 고산 5,000m까지 넘나들긴 하지만, 지프를 타고 걷는 산행이라서 진정한 산행이라 말하긴 어렵다. 그러던 중 개념 없이 일본의 지붕 간사이 지방 북알프스 3,190m를 3박 4일 종주하다니. 세상에 겁도 없는 무모한 도전이었음을 솔직한 심정으로 인정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일생일대의 큰 획을 그은 정말 대단한 일을 하고 왔다. 

 

 

2024년 3월 9일 재정리

거문고선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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