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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20140026_금요일 저녁 영화 EBS/KBS1_두 편보기

작성자fairy|작성시간14.09.27|조회수181 목록 댓글 0
[ 스파르타쿠스 ]
지난주에 이어 후편 상영
커크다글라스와 마지막 장면이 매우 인상적인 영화. 리비아 광산의 노예에서 검투사가 된 스파르타쿠스! 억압과 폭정은 노예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마침내 로마제국을 뒤흔든 노예들의 반란이 시작된다!

▲EBS <고전영화극장-스파르타쿠스> / 19일 오후 10시 45분 1부

■방송일시: 2014년 9월 26일 (금) 밤 10시 45분 (97분) 2부
■감독: 스탠리 큐브릭
■주연: 커크 더글러스, 로렌스 올리비에, 진 시몬스, 피터 유스티노프
■나이등급: 15세

원로원 내에서 크라수스와 팽팽히 대치 중인 그라쿠스는 크라수스의 세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크라수스의 심복인 글라브루스의 부대를 노예군 토벌대로 보내고 대신 자신의 제자인 시저에게 로마 수비대를 맡겼지만 글라브루스의 군대는 전멸하고 크라수스는 모든 공직에서 물러납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진압에 성공하면 제1집정관으로서 독재권을 준다는 조건으로 크라수스에게 진압을 의뢰합니다.

한편, 크라수스의 노예였던 시인 안토나이누스는 스파르타쿠스의 부대에 합류, 참모를 맡습니다.

스파르타쿠스의 계획은 해적의 배를 입수해 노예들을 모두 고향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라쿠스의 주선으로 노예군에게 배를 제공하기로 한 해적들이 크라수스에게 매수되고, 고립된 노예군은 크라수스군과 정면으로 대치, 궤멸당합니다.

스파르타쿠스를 찾지 못한 크라수스는 바리니아와 그녀의 아기를 데리고 옵니다.
6,000명에 이르는 포로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마지막 안토나이누스와 함께 있는 자가 스파르타쿠스임을 직감한 크라수스는 그 둘에게 사투를 벌이게 합니다.

BC 1년, 리비아 광산의 노예 스파르타쿠스(커크 더글라스 분)는 쓰러진 동료를 구하려다 이를 제지하는 로마군 병사와 싸움을 벌여 부상을 입힌다. 이미 여러 차례 말썽을 일으킨 전력이 있는 스파르타쿠스는 사형당할 위험에 처하지만 때마침 광산을 찾은 검투사 양성소의 주인 바티아투스(피터 유스티노브 분)의 눈에 띄어 죽을 위기를 모면한다. 몇몇 동료들과 함께 검투사 후보생으로 팔려온 스파르타쿠스는 본격적인 검투사 수업을 받는다. 하지만 검투사가 된다는 것은 귀족들의 노리개가 되어 언제 죽음을 맞을지 모르는 비참한 삶이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훈련교관은 스파르타쿠스의 반항적인 태도를 예의주시하게 된다. 하루하루 실전을 방불케 하는 고된 훈련이 이어지는 가운데 후보생들에게 하룻밤 지낼 여자노예들이 주어진다. 스파르타쿠스는 여기서 만난 바리니아(진 시몬스 분)와 사랑에 빠지지만, 이를 눈치 챈 훈련교관은 바리니아를 일부러 다른 후보생의 방으로 들여보내는 잔인한 짓을 한다.

어느 날, 로마 최고의 권력가라 일컬어지는 크라수스(로렌스 올리비에)는 일행과 함께 양성소를 방문, 스파르타쿠스를 비롯한 4명의 후보생을 골라 검투시합을 시킨다. 동료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끊거나, 자기 목숨이 끊기는 절박한 상황. 스파르타쿠스는 비장한 각오로 싸움에 임하지만 동료의 손에 목숨을 잃을 처지가 된다. 위에서 지켜보는 귀족들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지만 동료는 그를 죽이는 대신 무기를 들고 귀족들에게 달려들다 비장한 최후를 맞는다. 뿐만 아니라 바리니아는 크라수스에게 팔려가는 신세가 되고, 훈련교관은 더욱 집요하게 스파르타쿠스를 괴롭힌다. 결국 분을 참지 못한 스파르타쿠스가 교관을 살해하면서 노예들의 반란이 시작된다. 스파르타쿠스를 중심으로 군대를 이룬 이들은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고 해적들과 규합해서 그들의 배로 탈출한다는 계획을 세우는데...


<스파르타쿠스>는 로마 제국을 뒤흔든 노예 반란 사건을 다룬 제작비
1200만 달러의 스펙타클 고전 명작으로 초호화 배역진으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갈망과 뜨거운 사랑이 서사 영웅담으로 다채롭게 펼쳐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통적인 영웅담 안에 패배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1950년대 할리우드는 그 스스로의 부피와 무게로 사멸 직전에 이른 공룡이 돼갔습니다.
규모의 경제학만이 이곳을 지배하는 유일한 지침이었으며,
공룡이 제국의 비유가 된다면 제국은 다시 할리우드의 비유가 됐습니다.



할리우드가 사로잡힌 것은 크기의 강박관념이었습니다.
그때 그곳에서 모두가 ‘시대극’을 찍기 위해
한결 같이 모여들었던 것은 정말 우연이 아닙니다.
할리우드 황금시대의 절정기에, 뉴 프런티어 정신의 낙관주의가 시작하는
그곳에 도착한 스파르타쿠스는 패배를 향해 달려갑니다.

그는 비록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결코 멈출 수 없습니다.
큐브릭은 한 번도 낙관적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스파르타쿠스>는 역설적으로 큐브릭이 진보적 자유주의자의 낙관주의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를 증명하는 영화입니다.

[감상포인트]

스탠리 큐브릭은 개인적으로 <스파르타쿠스>를 자기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스튜디오의 호된 간섭 하에서 제작됐고 그 자신의 생각을 마음대로 펼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태가 이렇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제작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의 제작 통제와 장면 삭제가 결정적이었습니다.
매카시즘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던 <스파르타쿠스>의 시나리오 작가 달턴 트럼보에 따르면 당시 유니버설 사장 에드워드 뮬은
이 영화가 스펙터클이 아니라 제작비 3-400만 달러의 역사물이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원로원 안의 갈등을 현실 정치에 빗대 표현하는데 관심이 많았고,
결과적으로 <스파르타쿠스>에 1,200만 달러나 쏟아 부을 줄 몰랐던 것입니다. 주연 배우이자 기획자였던 커크 더글라스의 생각은 또 달랐습니다. 그는 로맨스와 노예 반란이 절반씩 들어간 영웅담을 원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스탠리 큐브릭은 로마 제국을 무너뜨릴 수도 있던 노예 반란군의 역사를 제대로 그릴 수 없었고, 로마군과의 전투 장면이 대폭 줄어들었습니다.

영화 연구자 던컨 L. 쿠퍼는 <시네아스트>에서 이 영화의 감독판은 스파르타쿠스의 노예 군대가 승리하는 전쟁 장면들을
새로 찍어 넣어야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나마 202분 분량의 <스파르타쿠스> 마지막 시사본은
1975년 유니버설에 의해 폐품 처리됐고
198분 버전이 남아있는 가장 긴 편집본이 됐습니다.
1960년 당시 이 영화의 상영시간은 184분, 7년 뒤 영화는 161분으로 더 줄었습니다.
그리고 1991년 로버트 A 해리스가 컬러와 사운드를 보완한 198분 편집본을 부활시켰습니다.

해리스의 편집본에는 로렌스 올리비에가 토니 커티스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하는 유명한 장면이 되살아났습니다.
이 장면은 제작 당시 동성애를 암시한다는 이유로 삭제됐던 것.
올리비에가 “난 굴(여자)과 달팽이(남자) 양쪽 다 즐기지”라고 말하는 이 장면은
그의 사후에 복구된 탓에 앤서니 홉킨스가 목소리 연기를 대신했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지만 <스파르타쿠스>는 후대에 새로운 평가를 받았습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 감독, 스탠리 큐브릭

1928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스탠리 큐브릭은 아버지의 다양한 취미 덕분에 13세 때 생일 선물로 받은 카메라를 만지면서 사진과 영화에 매료되기 시작했습니다. 16살 때 큐브릭이 플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서거를 찍은 세트사진이 화보잡지 'LOOK'에 실리게 돼,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곧 'LOOK'에서 사진기자로 채용됩니다.

보도사진 기자를 하면서 큐브릭은 틈나는 대로 근대미술관의 필름 라이브러리에 드나들면서 영화를 봤습니다.
이때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그는 6년간의 사진 기자직을 마치고 16분짜리 단편 <시합의 날>(1950)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1953년 <공포와 욕망>로 데뷔했으며 이후 <킬러스 키스)>(1955)와 <킬링>(1956) 등의 스릴러를 통해 주목받게 됩니다.

그가 탄탄한 입지에 오른 것은 커크 더글라스 주연의 전쟁영화 <영광의 길>(1957)을 완성한 후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을 배경으로 군내부의 심리적 갈등을 통해 반전을 주장한 이 작품은 아카데미 여러 부문에 노미네이트 되며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어 큐브릭은 다시 커크 더글라스와 함께 로마 시대 노예의 반란을 그린 서사극
<스파르타쿠스>(1960)로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게 되지만, 그 자신은 스튜디오의 간섭이 짙었던 작품이라 하여 이를 외면합니다. 이후 중년남자의 애정행각을 그린 그의 최초 영국영화 <로리타>(1961)를 만들고 연이어 영화를 발표하면서 탁월한 테크니션으로 인정받게 됩니다.
<스트레인지러브 박사>(1963)는 핵의 위협을 다큐멘터리 수법으로 그린 흑백영화로 큐브릭은 뉴욕비평가협회 감독상을 수상했고, 4년 만에 완성한 <스페이스 오딧세이>(1968)는 SF영화의 고전으로 남는 걸작이 됐습니다.

이후 세뇌와 사상통제로 인해 기계장치처럼 변모한 인간을 추적한 <시계태엽 장치 오렌지>(1971)로 논쟁을 끌어냈습니다.
이어 18세기 영국 상류사회를 배경으로 한 <베리 린든>(1975), 스티븐 킹의 소설을 옮긴 <샤이닝>(1980), 베트남전에 관한 비판적 시선 <풀 메탈 쟈켓>(1988)을 완성하며 여전한 재능을 뽐냈습니다.

이후 10년 넘게 공백을 가진 그는 <아이즈 와이드 셧>(1999)을 유작으로 남기고
1999년 3월 7일 영국 런던 하트퍼드셔의 자택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습니다.



[ 천일의 스캔들 ]
영국 황실의 실화

평점: 7.9평점보기
장르:로맨스/멜로,시대극,드라마
국가:영국
그외 정보 1515 개봉일2008.03.20 | 러닝타임115분

줄거리
왕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두 자매의 위험한 유혹이 시작된다!

볼린 가의 아름다운 딸 앤 볼린(나탈리 포트만)은 영국의 국왕 헨리 8세를 유혹하여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동생 메리 볼린(스칼렛 요한슨). 왕은 당차고 도전적인 성격의 앤과 달리 순수함과 관능미를 가진 메리에게 빠져들고 그녀를 궁으로 불러들이게 된다. 메리는 집안의 이익과는 상관없이 왕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고 권력과 명예를 중요시하는 앤과 갈등을 일으키게 된다.
이후 왕의 아이를 임신하게 된 메리가 왕과의 동침이 불가능해지자, 동생에 대한 질투와 증오로 기회를 엿보던 앤은 동생을 밀어내고 왕을 유혹하기 시작한다. 앤이 점차 다가올수록 그녀의 요부 같은 섹시미에 빠져드는 헨리 8세는 그녀를 갖기 위해 애를 쓰지만, 앤은 그와의 잠자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고 더 큰 권력을 가진 ‘왕비’가 되길 원하는데…



천일의 스캔들의 원제는 '또 다른 불린 여인'이다. 이 이야기는 사생활이 문란하고 잔혹하여 아내를 다섯번이나 들인 헨리 8세의 이야기 중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앤 불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헨리 8세는 불린 가문의 두 딸을 모두 취했는데 이 영화는 그것에 중점을 두고, 앤 불린의 욕망으로 인한 불린 가문의 비극에 초점을 맞춰 "또 다른 불린 여인"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세계적으로(특히 한국에서) 인기있는 드라마 '튜더스, 의 인기를 의식해서 비슷한 발음으로 '천일의 스캔들'이라는 제목을 한국에서 붙인 것 같다. 앤 불린이 3년간 왕비로 재위했으니 '천일의 스캔들' 이란 표현도 일리가 있다.
천일의 스캔들의 원제는 '또 다른 불린 여인'이다.
이 이야기는 사생활이 문란하고 잔혹하여 아내를 다섯번이나 들인 헨리 8세의 이야기 중 그의 두 번째 아내인 '앤 불린'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헨리 8세는 불린 가문의 두 딸을 모두 취했는데 이 영화는 그것에 중점을 두고,
앤 불린의 욕망으로 인한 불린 가문의 비극에 초점을 맞춰 "또 다른 불린 여인" 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그러나 세계적으로(특히 한국에서) 인기있는 드라마 '튜더스, 의 인기를 의식해서 비슷한 발음으로 '천일의 스캔들'이라는 제목을 한국에서 붙인 것 같다. 앤 불린이 3년간 왕비로 재위했으니 '천일의 스캔들' 이란 표현도 일리가 있다. 천일의 스캔들' 또 다른 볼거리: 초상화로만 보여지던 중세 영국의 의상들을 매우 아름답게 재현했다는거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앤이 아닌 메리에게 반하게 된다. 앤 때문에 낙마한 헨리를 치료하는 메리에게 "내가 어제 왜 당신을 못 봤지?" 하고 묻자, 메리는 "항상 언니가 주목받으니까요." 하고 답한다. 헨리는 "첫째에게 모든 칭찬을 빼앗기는 기분은 내가 잘 알아." 라고 말해준다. 메리는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준 헨리를 사랑하게 된다. 헨리의 왕비인 캐서린의 시녀로 들어가게 된 앤과 메리. 귀족들에게 왕족의 시녀가 되는 것은 명예로운 일이었다. 메리를 가까이 두기 위해 헨리는 메리의 남편에게 추밀원의 직책까지 내린다.

메리가 임신한 사이 프랑스 여왕의 시녀로 가 있던 앤이 헨리의 마음을 차지하기 위해 돌아온다. 그녀는 헨리를 사로잡는데 성공하고, 앤에게 반한 헨리는 메리와 자신의 아이를 버리게 된다.

두자매는 영국의 정식 왕비가 되는 데 일조한 메리 때문에 왕의 총애를 다투었던 것을 잊고 화해한다. 더군다나 앤은 왕비가 되었지만 문란한 헨리가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기에 앤은 점점 헨리를 두려워하게 된다. 그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앤은 시골로 떠나려는 메리를 곁에 붙잡아 두지만 아이는 결국 유산이 되고만다.

* 영화의 배경

1. 헨리가 "첫 째에게 모든 칭찬을 빼앗기는 기분"을 아는 까닭은?
헨리 8세는 장자가 아닌 차남이었다. 세자인 형이 14세에 죽는 바람에 헨리 8세가 왕이 될 수 있었다. 당시 11세였던 그는 11년간 형에게 모든 칭찬을 빼앗겼을 것이다.

2. 캐서린 왕비의 첫 번째 결혼이 무효인 이유는?
아라곤의 캐서린은 당시 무적함대를 거느린 최강국 스페인의 왕녀다. 영국의 왕세자와 약혼을 한 뒤 거액의 지참금을 갖고 세자와 친해지기 위해 어려서부터 영국으로 건너와 살았고, 헨리 8세는 형수와 어렸을 때 부터 친해질 수 있었다
약혼만 했지 왕세자와 잠자리를 갖이 하지 않은 캐서린은 헨리 8세와 결혼할 자격이 있었다. 당시 왕은 경제적 이유에서 지참금을 돌려주기도 싫었했고, 정치적 이유에서 스페인같은 강국의 왕녀를 반드시 왕비로 갖고 싶었을테니....

3. 캐서린 왕비가 정무에 참견하는 왕비였나?
당시 스페인의 자객이 헨리 8세의 친척을 살해했기 때문에 영국과 스페인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캐서린 왕비는 그런 면에서 여러가지로 스페인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4. 캐서린 왕비는 왜 이렇게 자식이 없는가?
왕비는 유산이 잦았다.

5. 헨리 8세는 왜 이렇게 자식이 없는가?
앤 불린을 만난 당시 헨리는 이미 50에 가까웠다. (그 나이에 자식 낳는 것이 쉽지는 않았겠지)
캐서린 왕비와 20년간 금슬이 좋았으므로 캐서린 왕비가 유산만 하지 않았어도 자식이 들끓었을 것이다. 헨리가 아들을 원했다면 20년이나 지나기 전에 다른 여자를 들였어야 했다.

6. 헨리 8세는 왜 이렇게 아들을 원하는가?
튜더 가문이 왕족이 된 것은 30년간 있었던 장미전쟁에서 그의 선조가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때까지의 튜더 가문에서 가장 이름 높았던 헨리 5세는 프랑스가 이겨가던 100년 전쟁의 판도를 영국쪽으로 돌린 전쟁영웅이었다.(즉, 튜더가는 전쟁영웅집안) 잔다르크의 등장으로 다시 영국이 힘을 잃었기에 헨리 8세는 전쟁영웅이 되고 싶어했고, 아들을 통해 그 꿈을 이루고 싶어했다

7. 정말로 왕의 정부는 공작이나 후작에게 시집갈 수 있나?
사실이다. 당시 왕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아내를 바치는 귀족이 상당수 있었다.(어느 나라나 다..)
그리고 여자에게는 작위를 내리지 않는 법칙 때문에 정부의 남편에게 작위를 주는 방법으로 은총을 내렸다.
귀족들은 '왕의 총애를 잃지 않은 정부'라면 자신의 가문에 편입시켜 떡고물을 받으려고 할 것이다.
프랑스의 황후가 된 죠세핀 역시 나폴레옹 상관의 정부였다가 부인에게 바람피운 것을 들키게 되자 나폴레옹에게 떠맡겨진다.^^;;

8. 앤 불린은 정말 근친상간의 죄로 죽었는가?
왕은 이미 제인 시모어를 사랑하고 있었고, 아들을 낳지 못하는 앤 대신 제인을 왕비로 세우고 싶어했다. 그러나 똑똑한 앤은 이혼거리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래서 근친상간이라는 죄목을 씌운 것이리라.(영화 보면 나온다)
헨리는 앤에게 죄목을 인정하고 이혼해 주면 살려주겠다고 했으나 앤은 캐서린 왕비처럼 자신의 딸인 엘리자베스의 왕위계승권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선택한다.

9. 제인 시모어는 누구?
헨리의 정부로 그의 3번째 왕비가 된다.
덕이 있는 여자로 메리와 엘리자베스를 잘 돌보지만 너무 일찍 타계하여 헨리가 4번째 아내를 들이게 된다.

10. 앤 불린의 딸 엘리자베스는 누구?
앤 불린의 딸로, 앤 불린 덕택에 왕위계승서열 2위(1위는 블러디 메리)를 지키게 되어 튜더가가 배출한 마지막 왕이 된다. (지금 영국 여왕인 엘리자베스와는 이름만 같고 가문은 다르다.) 그녀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치고 해상권을 장악하여 영국을 빅토리아 시대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드는 기초를 닦는다. 헨리 8세가 그렇게 원하던 '전쟁 영웅이 될 아들'이라는 희망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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