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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을 이끈 국왕_ 카를로스 1세_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작성자fairy|작성시간19.05.29|조회수826 목록 댓글 0

카를로스 1세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을 이끈 국왕

[ Charles V ]

요약 카를로스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지낸 조부 막시밀리안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또한 중남미 신대륙을 최초로 식민지화한 스페인 카스티아-레온의 여왕인 외할머니 이사벨의 왕권을 물려받아 유럽과 중남미, 아프리카에 걸친 거대한 영토를 세습받았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가톨릭을 수호하고자 종교개혁의 물결과 맞섰고,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튀르크와 종교 전쟁을 벌였다. 또한 제국의 운명에 따라 광대한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주변 강대국과 잇단 영토 전쟁을 해야 했고, 내부에서는 스페인의 봉건귀족들의 반란에 직면했다. 스페인 왕과 신성 로마제국 황제를 퇴위한 후에 유스테 수도원에서 여생을 마쳤다. 카를로스 1세는 통일된 최초의 스페인 왕이었으나 ‘외국 출신 왕’으로 스페인보다는 신성로마의 이익에 봉사하였다. 그러나 아들인 펠리페 2세가 온전한 스페인 왕으로 책무를 완수할 수 있도록 스페인에서 관료제 기초를 닦아놓은 왕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은 ‘카를로스 1세’를 대표하는 업적이다.
카를로스 1세

카를로스 1세원본보기

왕가합스부르크 왕가 ▶
외국어표기Carlos
공식칭호스페인 카를로스 1세(Carlosde España)
신성로마제국 칼 5세(Karldel Sacro Imperio Romano Germánico)
별칭카이사르(el Cesar)
지역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영토, 저지대국가들, 프랑크 공국, 부르고냐, 나폴리, 시칠리아, 중남미대륙, 아프리카 일부
재위기간에스파니아 왕: 1516년 3월 14일 ~ 1556년 1월 16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1519년 6월 28일 ~ 1556년 8월 27일(1558년 2월 24일 사임 추인)
출생 - 사망 1500년 2월 24일 ~ 1558년 9월 21일
가족관계부친 : 펠리페 1세(미남왕 필립, Felipe el Hermoso, 1478년 ~ 1506년)
모친 : 후아나 1세(광녀 후아나, Juana la Loca, 1479년 ~ 1555년)
계보전임자 : 가톨릭 공동왕(Los reyes católicos, 아라곤 왕국의 페르난도 왕과 카스티야-레온의 이사벨 여왕)
후임자 : 펠리페 2세(Felipede España, 1527년 ~ 1598년)

유년기와 왕위계승 과정

카를로스 1세는 저지대 국가1)2)

펠리페 1세가 스페인 거주 1년 만인 1503년 초에 ‘세련되고 세속적인’ 저지대 국가로 홀로 귀국하자 스페인 왕위계승자인 후아나 1세 역시 어머니의 반대를 물리치고 남편을 따라갔다. ‘가톨릭 공동왕’ 중 이사벨 여왕이 먼저 사망하자 스페인 왕위는 우여곡절 끝에 이사벨 여왕의 남편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과 후아나 1세, 펠리페 1세의 공동왕위로 계승되었다. 궁정과 코르테스(의회)에서는 이들 세 명을 각각 적법한 왕위계승자로 지지하는 분파가 생겨났는데, 펠리페 1세가 병으로 죽자 페르난도 왕은 딸 후아나 1세를 제 정신이 아니라는 이유로 토르테시야스 성의 수녀원에 유배시켰다.

1510년 이해 당사자들의 협약으로 페르난도 왕이 단독으로 스페인 왕국을 다스리는 권리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6년 후 1516년 1월 22일, 페르난도 왕은 유언을 통해 자신의 딸 후아나는 지배능력이 없기 때문에 외손자 카를로스 1세가 어머니 후아나 1세를 대신하여 스페인의 왕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선언하였다. 1월 23일 페르난도 왕이 사망하자 카를로스 1세는 자신이 스페인의 왕권을 문제없이 계승할 것으로 생각하고 3월 14일 스스로 스페인 왕위계승을 천명하였으나 외국 출신의 왕을 원하지 않는 스페인 귀족들의 생각은 달랐다.

따라서 1517년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왕위계승을 위해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왔고, 1517년 11월 4일, 12년 만에 만난 어머니 후아나를 설득하여 스페인 카스티아-레온 왕국의 어머니의 모든 권리를 대리할 것을 허락받았다. 이듬해인 1518년 2월 9일 카스티야 왕국의 귀족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으면서 실질적인 왕권은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카를로스 1세에게 돌아갔다.

아라곤 왕국의 상황은 더욱 복잡했으나 결국 카를로스 1세는 1516년부터 1519년까지 4년에 걸친 지난한 과정을 겪어 통일된 에스파냐의 첫 번째 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3)

아버지인 페르난도 왕의 사망 사실도 모른 채 토르테시야스에 유배되어 있던 후아나는, 오히려 이 모든 일이 ‘자신을 아끼는 아버지’의 사려 깊은 지시에 의한 것으로 믿었고, 자신의 자식인 카를로스 1세의 교묘한 왕권 찬탈도 알지 못한 채 1555년 4월 12일 사망하였다.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의 실질적 왕권을 누리기 시작한 지 3년 후인 1519년 6월 28일, 가톨릭 유럽을 대표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교황에 의해 신성로마제국 황제관을 수여받는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카를로스 1세의 통치

카를로스 1세는 조부 막시밀리아노 1세의 뒤를 잇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라는 타이틀과 더불어 스페인은 물론이고 나폴리, 시칠리아 등 현재의 이탈리아와 저지대 국가들, 부르고뉴 등 친가와 외가로부터 유럽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상속받게 되었다. 즉 영국과 프랑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서유럽 영토와 아프리카 일부, 그리고 중남미 대륙을 차지하게 되면서 스페인은 카를로스 1세가 받은 상속령만으로도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이 되어 유럽 역사의 변방에서 최강국으로 신데렐라처럼 드라마틱하게 등장하였다.

카를로스 1세 시기 유럽의 스페인 영토

카를로스 1세 시기 유럽의 스페인 영토연두색이 카를로스 1세의 영토이다.

그러나 카를로스 1세가 통치하는 거대한 제국은 ‘근대’라는 시간과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공간의 두 축에서 필연적인 모순에 직면했다. 제국 곳곳에서 들리는 파열음은 막 통일 왕국을 이룬 스페인으로서는 견디기 벅찬 일이었다. 카를로스 1세는 40년의 스페인 왕으로 재위하는 동안 스페인을 일곱 번만 방문 통치했을 뿐이며, 스페인의 이익보다는 신성로마제국의 이익에 종사하여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스페인의 금과 은을 수많은 전쟁에 쏟아부었다. 평화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모신 스페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우선 가톨릭을 대표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라는 자리 때문에 카를로스 1세는 유럽 외부로는 이슬람 세력인 오스만 튀르크 제국과의 전쟁을, 유럽 내부로는 마틴 루터로 대변되는 종교개혁 세력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은 주로 지중해에서 이루어졌으며, 카를로스 1세는 1535년 튀니지를 점령하기도 하였다. 오스만 튀르크와 스페인의 전쟁은 카를로스 1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펠리페 2세 시기에 ‘레판토 해전’으로 정점을 찍었다.

루터파와의 전쟁은 1517년 루터의 종교개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오스만 튀르크의 유럽 침공으로 1526년 일시적으로 루터파를 인정한 카를로스 1세는 1529년 슈파이어 의회를 소집하여 다시 루터파를 금지하였다. 이에 항의하는 루터파 제후와 도시의 결의 때문에 이후 개신교는 ‘항의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프로테스탄트’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이들 개신교 세력과의 전쟁은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평화조약으로 끝을 맺었다. 이 화의는 제후에 의한 종교 선택을 규정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종교 선택 자유의 시작이기도 하다.

한편 스페인에서는 일찍이 계약에 의한 강력한 입헌적 자치 전통을 유지한 의회 입헌주의가 이미 12세기에 유럽 최초로 발달하고 있었다. 지역별로 차이가 있었으나 동시대의 어느 유럽보다도 발달된 자치의 전통은 가톨릭 세력의 800년에 걸친 ‘재정복 운동’(레콩키스타)으로 인해 더욱 공고화되었다. 따라서 1516년 ‘외국 왕’인 카를로스 1세가 에스파냐의 왕으로 오고, 그의 대리인이 증가하여 과중한 세금이 부과되자 스페인의 각 공동체는 반란을 일으켰다. 예를 들어 1521년 4월의 코뮤네로스 반란은 왕권에 대항한 카스티야 공동체의 마지막 반란이었다. 카를로스 1세는 이를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후계자를 위한 중앙집권의 길을 열어놓았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로스 1세는 3단계에 걸쳐 제국정책을 실시하는 과정에서, 특히 유럽의 주도권을 두고 프랑스와 무려 6차례 전쟁을 벌였다. 카를로스 1세와 프랑수아 1세의 전쟁은 대를 이어서 펠리페 2세와 앙리 2세의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특히 1527년, 르네상스를 상징하는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7세와 프랑스 프랑수아 1세가 코냑 동맹을 맺고 카를로스 1세의 신성로마 군대와 맞섰는데, 이때 신성로마 군대는 교황령의 수도인 로마를 약탈하였다. 이 전투에서 스위스 용병 근위대는 전멸에 가까운 희생을 보이면서도 용맹한 저항으로 교황을 피신시켰고, 이 사건은 현재까지 바티칸 교황청을 스위스 근위대가 지키는 전통의 시초가 되었다.

카를로스 1세는 선대의 아메리카 신대륙 점령을 계속 이어갔다. 정복자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부하였던 에르난 코르테스는 독립적으로 멕시코의 아즈텍 제국을 점령(1519년)하였으며, 코르테스의 친척인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페루의 잉카 제국을 점령(1533년)하였다. 카를로스 1세에게 식민지인 중남미 신대륙은 이단세력에 맞서기 위한 전쟁 자금의 마르지 않는 수원지였다. 따라서 그는 본국인 에스파냐의 골치 아픈 자치제 전통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처음부터 신대륙을 국왕의 중앙집권적 관료제 체제로 재편하는 데 성공하였다.

퇴위와 서거

통풍으로 고생하던 카를로스 1세는 종교개혁 세력과의 분쟁이 화의로 결말을 맺자 절망하고 퇴위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아들인 펠리페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계승하기를 원했으나 합스부르크 친족들의 견제, 그리고 카를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될 수 있도록 지원했던 푸거 가문 등 독일 은행가들의 배신과 투표인단 일단의 배신 등으로 결국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브뤼셀에서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양위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감으로 스페인 왕위와 대부분의 영토는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양위했다.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카를로스 1세와 펠리페 2세

모든 양위 과정이 끝나자 카를로스 1세는 여생을 마감하기 위해 스페인 헤로니모 수도원(제로니모 수도원)인 유스테 수도원으로 떠났다. 카세레스 근처의 유스테 수도원은 풍광이 유려하면서도 외부와 격리된 외지에 위치한 곳이어서 통풍으로 고통받는 카를로스 1세가 여생을 마감하기 좋은 곳이었다. 카를로스 1세가 태어난 헨테의 프린센호프 성과 비슷하게 꾸민 이곳에서, 카를로스 1세는 장시간 일광욕을 하고 침대에 누운 상태로 종교의식을 행하며, 간간히 취미인 독서와 시계 손질, 미술품 컬렉션 감상(특히 그가 좋아했던 티치아노의 그림)을 즐기곤 했다. 그러면서도 스페인 국왕을 승계한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정치적 조언도 지속하였다.

유스테 수도원에서 알현하는 카를로스 1세

유스테 수도원에서 알현하는 카를로스 1세

카를로스 1세와 부인 이사벨

카를로스 1세와 부인 이사벨

1558년 8월 30일 오후, 카를로스 1세는 정원에서 유일한 정실 왕비였던 이사벨의 초상화와 ‘최후의 심판’ 그림을 갖고 오라고 명령한 후 한참을 조용히 바라보며 묵상하였다. 날이 저물 즈음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였는데 이렇게 시작한 병세가 지속되어 9월 17일 의식을 잃고, 9월 21일 새벽 2시 30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유스테 수도원에 매장되었다가 훗날 펠리페 2세가 세운 엘 에스코리알 수도원으로 이장되었다.

유스테 수도원

유스테 수도원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의 첫 번째 스페인 왕이며, 통일된 이베리아 반도의 ‘최초의 스페인 왕’이었다. 또한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였으며, 아프리카의 일부와 중남미 대륙을 영토로 소유하여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을 영위하였다.

그의 치세 시기는 유럽이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서유럽에서는 민족국가의 시대이자 왕권이 강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관료제와 상비군이 근대국가를 뒷받침해 주었으며, 개인이 공동사회에 속하는 것이 유리했던 중세와는 달리 개인주의가 발달하는 시기였다. 사회는 문화적인 요소를 강조했고 정치와 문화는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이런 새로운 근대의 사상을 종합하여 ‘휴머니즘’이라고 일컫는다. 또한 루터에 의해 ‘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면서 유럽의 종교 지평도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스페인에서는 중세의 봉건제 구조가 유지되고 있었다. 십자군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유럽과 달리 이베리아 반도의 십자군 운동은 성공하였다. 800년에 걸쳐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재정복 운동’으로 스페인은 여전히 중세의 두 기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귀족들은 봉건적 권력을 유지했으며 가톨릭 세력도 강력했다. 따라서 스페인의 국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로스 1세는 종교적으로는 중세적 가톨릭 교회를 위해서,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적인 근대의 권력관계를 위해서 크고 작은 전쟁에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안으로는 스페인 토착 귀족들의 반란(코뮤네로스 반란)에, 밖으로는 유럽의 종교개혁 운동(루터)에 직면했다. 전자는 진압에 성공하였으나 후자는 아우크스부르크 협정으로 루터파와 타협할 수 밖에 없었으며, 결국 이듬해인 1556년 스페인 왕과 신성로마제국 황제에서 퇴위하였다. 스페인 국왕은 아들인 펠리페 2세에게,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동생인 페르디난트 1세에게 양위하였다. 카를로스 1세는 유스테 수도원으로 낙향하였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카를로스 1세의 삶은 당대 유럽 최고권력자의 영광스러운 삶인 동시에 유럽과 스페인의 정치, 사회, 문화, 종교적 모순과 갈등이 육화된 고통의 삶이기도 했다.

가족 관계

• 배우자 포르투갈의 이사벨(Isabel de Portugal, 1503년 ~ 1539년)
• 자녀
- 펠리페 2세(Felipe II de España, 1527년 ~ 1598년), 스페인의 왕
- 마리아 데 오스트리아(María de Austria, 1528년 ~ 1603년)
- 후아나 데 오스트리아(Juana de Austria, 1535년 ~ 1573년)
- 후안(Juan, 1537년 ~ 1538년)

참고문헌

  • 레이몬드 카 외, 『스페인사』, 김원중, 황보영조 옮김, 까치, 2006년
  • Miguel Artola (ed.), Enciclopedia de Historia de España. Vols. 4. Madrid: Alianza Editorial, 2007년
  • Escriva-Gallardo (ed.), Personajes de la Historia de España. Vols. 1-10. Madrid: Espasa Editorial, 199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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