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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정씨(慶州鄭氏) 뿌리 시조는 지백호(智伯虎). 신라초의 진지촌장(珍支村長)이었다. 박혁거세를 왕으로 옹립한 공으로 신라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되고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졌다. 경주정씨의 시조가 된 것은 신라 유리왕 때 시조의 5세손 동충이 鄭氏로 사성(賜姓)된데서 비롯된다. 그리하여 경주정씨는 모두가 지백호를 시조로 하여 기세(起世)하고 있다. 그 뒤 후손들은 연일. 동래. 온양. 초계. 하동. 진양. 진주 등 120여 성씨로 分貫된다. 경주정씨 本宗은 계림, 월성 등으로 쓰여지다 고려조에 문과에 올라 정당문학과 평장사를 역임하고 월성군에 봉해진 문정공 정진원(鄭珍原)이 경주로 고쳐 부르게 되었으며 그를 中祖로 하고 있다. 경주정씨는 ▲문헌공파(文獻公派), ▲양경공파(良景公派), ▲월성위파(月城尉派), ▲평장공파(平章公派) 등 4파로 분파되어 2천여년 동안 78세의 大宗을 이루고 있다. 시조의 44대손 창열공(彰烈公)은 위(偉)와 교(僑) 두 아들을 두었다. 위의 아들 현영(玄英)은 고려조에 문하시중을 지내고 문헌으로 시호를 받아 문헌공파가 되었다. 조선조의 개국공신인 희계(熙啓)는 시호를 양경으로 받아 양경공파가 되었다. 고려조의 부마 이기는 월성위에 책봉되어 월성위공파라 했으며 고려조에 평장사를 역임한 필(弼)은 평장공파를 이루었다. 신라 1천년 왕업에 개국공신인 6부 중에서도 경주 한복판을 차지한 정씨들이었지만 신라 때는 인물이 많이 드러나지 않았다. 당시 전해지는 이름은 신라말엽 청해진을 근거로 하여 동아시아의 해상 무역권을 독점했던 장보고의 동지 정년(鄭年)이 있다. 그는 젊어서 단짝 친구 장보고와 함께 당나라에 건너가 무관으로 입신했다. 당시 황해에서 날뛰던 해적들로부터 모국 신라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을 보고 장보고가 벼슬을 버리고 돌아가 신라 조정을 설득했다. 그 후 청해진(전남완도)을 근거로 해적들을 소탕하고 서해, 남해항로의 무역권을 독점하게 되자 정년도 뒤따라 귀국, 장보고와 함께 활약을 했다. 중시조 정진후(鄭珍厚)는 고려조 문과에 급제한 뒤 요직을 거쳐 월성(경주)군에 봉해진 인물이다. 경주정씨의 중시조가 된 그의 묘소는 경북 월성군 내남면 노곡리에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1일에 제사를 지낸다. 문헌공파의 파조인 정현영은 시조 지백호의 46대손이다.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뒤 호부상서(戶部尙書)를 거쳐 문하시중(조선조의 영의정격)을 역임했으며 후손들은 전남지방에 집성(集姓)하고 있다. 정휘(鄭暉)의 아들인 정희계는 이성계의 쿠데타에 참여, 조선이 들어서자 개국 1등 공신으로 봉해지고 좌참찬과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조선조에 경주정씨는 15명이 문과급제, 30명이 무과급제를 했다. 그중 가장 추앙받는 이름은 임진왜란 전쟁의 벽두에 나라의 관문인 부산진을 지키다 장렬히 전사, 첫 순국으로 기록된 묵의(墨衣)장군 정발(鄭撥)이다. 중시조 정진후의 7대손, 정희계의 6대손인 정발은 25살에 무과에 올라 해남현감, 거제현령, 사복사정(司僕寺正)등을 거쳤다. 왜란이 나기 석달전 부산진첨절제사로 부임했다. 1592년 4월13일 대륙을 노략질하던 일본 3島(本州. 九州. 四國) 왜구들이 풍신수길의 통솔 아래 전면침략을 감행, 새벽 안개 속에 부산 앞바다를 뒤덮었다. 5백여척 병선에 나누어 탄 침략 왜구의 1진 15만8천여명을 소서행장 등 6명의 장수가 지휘하였다. 鄭장군은 영도(影島) 순찰 중 왜병 전위와 맞부딪쳐 수백명을 참살했했다. 그러나 수가 달려 본성으로 후퇴, 성문을 닫아 걸고 굳게 지켰다. 검은 군복을 입고 진두에 나서 군인을 지휘하는 장군의 모습에서 왜병들 사이에 흑의장군이란 명칭이 붙었다. 다음날 적의 총공격에 장군을 중심으로 뭉친 군민은 남녀노소 없이 마지막 한 사람까지 적을 무찔렀으나 중과부적, 적의 조총에 장군이 전사하고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장군은 성을 지키며 인근 고을에 특사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왜병의 세력에 놀란 인근 고을 수령들은 대부분 도주, 왜구는 부산진을 점령한 뒤 거의 큰 저항 없이 서울까지 진격했다. 장군의 용전 사실은 전쟁기간 중 조정에도 알려지지 않았다. 뒤늦게야 조정에서는 그에게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충장의 시호를 내리는 한편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사당을 지어 배향했다. 충열사는 현재도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에 남아 향사가 받들어지고 장군의 동상도 부산시 초량동에 세워졌다. 정발의 외아들 정근은 충청도 수군절제사 등을 거쳤다. 왜구를 무찌른 공으로 전라수사로 승진했으며 이괄난 때도 공을 세워 호위대장에 올랐다. 이밖에 정응룡은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홍의장군 곽재우와 함께 분투하다 순절했다. 정홍덕은 1419년 문과에 급제 병조판사 등을 역임하고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단종이 손위(遜位)하고 죽게 되자 벼슬을 떠났다. 그는 처음에는 신하의 절개를 지켜 순절하려 했으나 8순 노모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어머니와 함께 남원 교룡산 아래로 가서 은거했다. 壇2개를 세우고 매년 단종의 기일과 사육신의 기일에 분향하고 호곡하는 등 끝까지 절개를 지켰다. 2000년 현재 전국에 30만4천명이 살고 있다. 성씨본관별로 27번째 많은 성씨다. 오늘날 정씨의 각 본관별 시조들은 서산 및 낭야정씨를 제외한 모두가 지백호의 원손이라는 것이 일반적 통념이며 경주 정씨가 큰 집이라는 데에는 반론이 없다. 다만, 연일, 동래, 온양, 초계, 하동 등에 한하여 분파된 가계는 소상하게 나타나 있으나, 그 외의 혈연적 계보는 가려낼 방도가 없다. 경주 정씨는 문헌공(참봉공/성은공/매헌공/봉사공/봉천공), 양경공,월성위공, 평장공파 등 네개로 분파되었고, 시조 지백호의 산소가 경상북도 경주군 내남면 로곡리 백운대에 현존하고 있어 음력 10월 1일에 묘사를 올리고 있다. [경주정씨 성은공파 뿌리] 경주정씨 성은공파는 문헌공파 9세 선조인 옥계공으로부터 시작된다. 문헌공파 9세인 옥계공은, 중종(1520년)에 태어났고, 중종 갑진(1544년)에 별시 을과에 1등 합격, 명종 병오(1546년)에 중시 병과에 1등으로 합격하였다. 그후 선전관, 옥구 현감, 사헌부 감찰 등을 지냈고, 명종(1559년)때 왜적이 여러 섬에 또 다시 출몰해서 어란진 첨사로 부임하여 추자도에서 큰 승리를 거두고 웅천현감, 영덕현령, 함흥판관 등을 지냈으나 세화를 지남이 얼마 되지않아 벼슬에 뜻을 버리고 순천으로 돌아와 옥계 거사라 자호하고 시주(詩酒)를 즐겨 만년의 낙을 삼았다. 향년 61세에 옥계정사에서 돌아가시니 순천 명말산에 있는 공의 아버지 산소아래 안장되었다. 정조 경신(1800년)에 도내 선비 박 상 설 등의 상언으로 1801년에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겸 경연참찬관의 추증을 받았고, 순조 임신 1812년에 가선대부 병조참판겸 동지의금부사 훈련원 도정의 가증을 받아 순천 옥계사에 배향되었다. 옥계공(承復)은 6남4녀를 두었으며 큰아들 사안(思安)은 일찍 죽고, 둘째아들 사익(思翊:참봉공파)은 부사직, 셋째아들 사준(思竣:성은공파)은 현감 넷째아들 사(思:매헌공파)도 현감, 다섯째아들 사정(思靖:봉사공파)은 봉사, 여섯째아들 사립(思立:봉천공파)은 현감을 지냈다. 따라서 성은공파는 육계공 시조의 셋째아들 사준의 후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