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승천을 보고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성경은 그들이 돌아온 그 사건을 표현하며 예수님이 승천하신 그 산이 예루살렘에서 가까워서
안식일에도 걸을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승천하신 사건은 안식일에 일어났으며,, 그들이 안식일 법을 잘 지키기 위해 만든
약 1km 정도 이내의 거리만 걸을 수 있는 안식일 상세조항도 슬쩍 결부시켜 놓았다.
안식일에는 멀리 가지도 않았다.
예수님의 승천이라는 놀라운 사건 앞에서도 안식일에 대한 그들의 철저함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가?
주일(안식일에 지금에 와서는 주일을 지키는 것으로 개신교는 바뀌었다.. 주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 날)이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 되었는가?
율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자유로운 율법 준수마저 무너뜨리고자 한다면,,,,
우리는 아마도 그 정신마저도 잃게 될 것이다.
그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지키고자 했던 안식일 정신이 오늘 나에게도 분명히 필요하다.
주일을 잘 준비해야 할 나... 특히, 이번 주일은 초청주일이 아닌가?
남은 시간동안 더 철저히, 더 정밀하게, 더 감각적인 예배 프로그램을 만들어가야겠다.
'자기들이 묵었던 다락방'...
그 곳에서 그들은 두려워 떨었었다. 그들은 그 곳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밖으로 나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 곳에서 그들은 부활의 주님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이 살았고, 주님은 죽었으나 살아있는 모습으로 다시 보여주셨다.
바로 그 곳
그 다락방에 다시 모였다. 두려움과 의심이 일었던 곳.
나에게도 이런 다락방이 있는가?
믿음의 부족으로 생활의 염려에 사로잡혀 두려워하는 시간들,
신앙의 삶을 살다가도 의심의 구렁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시간들.
나도 그 다락방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무엇이 두려웠는가? 무엇이 의심스러웠는가?
예수님은 믿음만 한 분인가? 그 분을 향한 의심의 마음은 전혀 없는가?
오늘 이 방(내가 묵상하는 이 방)이 내 다락방이 되게하소서.
내일 아침 새벽기도하는 그 자리가 내 다락방이 되게하소서.
두려움이 신뢰로, 걱정과 근심이 기도와 찬양으로 바뀌어가는 다락이 되게 하소서.
모여서 기도하는 사람들
11명의 제자들, 다른 여자들,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한 마음으로 모여 기도한다.
120명의 성도가 함께 기도한다.
고전15:6에 보면 500명의 성도가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지만 지금 이 다락방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120명이다.
지금 우리가 함께 믿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구별되어 있다.
모여 기도하는 사람은 더 적다.
그러나, 약속을 믿고 자리를 지키며 그 분을 신뢰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하신다.
나에게 기도가 필요하다.
한 사람의 마음도 움직일 수 없는 빈약한 설득력과 능력으로 초청의 날을 주관한다는 것은 무리다. 어불성설이다.
그러하기에 지금 나에게 기도가 필요하다.
연약함이 오히려 나를 기도하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
연약함이 나를 짖누르는 열등감이나 소심함이 되지 않게 하소서.
연약함이 오직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되게 하소서.
가룟유다가 밭을 샀네.. 비록 그 밭에서 죽었지만,,,
가룟유다는 요12:6에 보면 도둑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예수님 공동체의 회걔로서 남긴 많은 재물로
그는 밭을 사 두었던 것이다. 비록 그 밭에서 죽고 밭 이름마저 '아겔다마'라고 만들었지만...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자신의 배를 불리는데 사용했다.
그는 자신에게 부탁하신 일들을 가지고 공동체를 해롭게 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은사와 재능을 무엇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그것이 가룟유다의 잘못이다.
주님이 주신 것을 주님을 배반하는 일에 사용했다는 것.
나는 주님이 주신 것을 지금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주님이 주신 외모, 재능, 물질, 시간,,등등을 주님이 주신 가족과 더불어
주님을 위해, 주님 주신 사명을 위해 사용하고 있는가?
내가 가진 것이 무엇인가?
오늘 나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기도하며 생각한다.
하나님!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