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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를 유람하며 「유한산도기(遊閑山島記)」 수군 훈련을 참관하다.

작성자고영화|작성시간26.06.16|조회수0 목록 댓글 0

<한산도를 유람하며 유한산도기(遊閑山島記)수군 훈련을 참관하다.>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경상도 관찰사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가 1856년(丙辰) 한산도를 유람하며 수군 훈련을 참관하고 그 감회를 쓴 「유한산도기(遊閑山島記)」 여행 수필을 소개하고자 한다. 1855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한 신석우(申錫愚)는 1856(철종 7)년 새해부터 관할 지역의 순행(巡行) 차, 동래, 김해, 성주, 가야산, 해인사, 거창, 안의, 산청, 진주, 고성을 거쳐 통영에 도착했다.

 

그는 기문(記文) 유한산도기(遊閑山島記)를 통해, 1856(丙辰) 329일에 관찰사로서 통제영 방문에 이어 며칠 후(4월 1일) 한산도(閑山島)를 방문하여 제승당(制勝堂)에 오르고 수군 훈련을 참관하며, 거북선의 모습과 여러 전선의 훈련 모습을 사실적으로 기술했다. 이 글은 조선 후기의 문신 신석우의 문집인 해장집(海藏集12에 수록되어 있다또한 이 글은 당시의 화려한 군사 의식과 거북선(龜船)의 실제 모습, 그리고 통제영의 밤 풍경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번 지면에는 신석우의 여행 수필 유한산도기(遊閑山島記)입통제영기(入統制營記) 를 차례대로 소개하겠다.

 

유한산도기(遊閑山島記)에는 먼저 한산도 유람과 군사 훈련을 묘사했다. 순찰사가 통제영에 도착하면 세병관(洗兵館)에 머물고, 다음 날 통제사(삼도수군통제사)와 함께 한산도를 유람하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단순한 잔치가 아니라 유람을 겸하여 수군의 조련(操鍊) 상태를 살피는 목적이었다. 한산도 포구는 거울처럼 평온하고 산은 그림 같으며, 버드나무 사이로 인가가 보이는 모습이 중국의 '강남 풍경'과 같다고 찬탄했다.

두 번째로 거북선(龜船)을 묘사했다. 신석우(申錫愚)는 훈련 중 등장한 거북선을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다른 전선들과 비슷하나 배 앞에 거북 머리(龜首)가 있어 연무를 내뿜으며, 위는 판자로 덮고 그 위에 거북 등무늬를 그린 천을 씌웠다. 아마 귀빈들을 위해 화려한 퍼포먼스를 한듯하다. 이어 이순신(李忠武) 장군이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으로 왜적을 격파한 승리를 기념하여 그 모양을 본떠 만든 것이라고 설명한다.

세 번째로 통제영의 화려한 밤 풍경을 그렸다. 돌아오는 길에 해안가 마을 사람들이 횃불을 켜서 장관을 이루었는데, 그 행렬 모습이 마치 '구슬을 꿰어 놓은 것' 같았다고 묘사했다. 성 위와 배 위에서 쏘아 올린 화포와 등불이 하늘의 별처럼 빛났으며, 악기 소리와 깃발의 광채가 어우러져 눈과 귀가 어지러울 정도로 군사적 위용이 화려했다고 서술해 놓았다.

네 번째로 여정을 마무리하며 동행자들을 기술했다. 신석우 관찰사는 동래, 김해, 성주, 합천, 산청, 진주, 고성을 거쳐 이곳 통영까지 온 이번 여정이 인생에서 더할 나위 없는 구경이었다고 소회를 밝히며 여정을 마무리했다. 주요 동행자로는 당시 제202대 삼도수군통제사였던 김한철(金翰喆)을 비롯하여 대구 판관 김기순, 거제 부사 조광하 등 영남 지역의 주요 지방관들이 대거 참여했다. 이 기문은 19세기 조선 수군의 의전과 한산도의 역사적 의미, 그리고 당시 관료들의 유람 문화를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1) **유한산도기(遊閑山島記)** 1856(丙辰)/ 신석우(申錫愚 1805~1865)

한산도는 통제영 남쪽 20리 바다 가운데에 있다. 거제도에 속한 섬으로, 이충무공(이순신)이 이곳에서 왜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제승당이 있다.

순찰사가 영문에 들어오면 통제사가 반드시 세병관에 모시고, 이튿날 함께 한산도를 유람한다. 대개 잔치를 베풀고 노니는 김에 (수군의) 조련을 익히는 것이다.

4월 초하루 정해일. 아침에 일어나 만 하루에 나가 바라보니, 포구는 거울처럼 평온하고 산은 그림처럼 둘러쳐져 있었다. 물가 마을은 버드나무 그늘에 가려져 있고, 산성 위 누각들은 단청 빛을 찬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단장한 배들이 물가에 나란히 정박해 있는데, 아득한 풍경이 마치 중국 강남과 같아 일반적인 군함들이 바다에 떠 있는 느낌이 아니었다.

조금 뒤 배에 올랐다. 배는 3층 높이로 위에는 붉은 난간을 설치하고 푸른 휘장을 쳤다. 통제사와 함께 앉아 육지 조련을 마친 뒤, 수십 척의 작은 배들이 좌우로 나열하여 밧줄을 끌며 나아갔다.

왜선 형상을 한 배가 나타나자 제각기 경보를 울리며 가깝거나 멀리서 전투하는 듯한 형세를 취했다. 그때 큰 배 한 척이 섬 사이에서 나타났는데 사람들이 "이것이 거북선(귀선)이다"라고 했다. 그 구조는 대략 다른 전선과 같으나 배 앞부분을 거북 머리처럼 만들었는데, 입을 벌렸다 다물었다 하며 때때로 연기(안개)를 토해냈다. 위는 판자로 덮고 다시 천을 씌워 거북등 무늬를 그렸다. 대개 충무공의 한산도 대첩 때 거북선으로 왜를 격파했기에 그 공로를 형상화한 것이다.

배가 느리고 묵직하게 움직여 반나절 만에 한산도 아래에 도착하여 제승당에 올랐다. 음악을 감상하고 무예 연습을 구경하다가 해 저물녘에야 돌아왔다. 배가 돌아오는 길 중간쯤 왔을 때, 십수 리 밖에서 횃불들이 마치 꿰어 놓은 구슬처럼 이어진 것이 보였다. 이는 연안 포구의 집들이 불을 밝혀 영접하는 것이었다. 성 위에서도 일제히 불꽃을 쏘아 올렸고, 여러 배 위의 깃발과 등불, 화살포들이 하늘에 가득한 별이나 길을 가는 혜성처럼 찬란했다. 길을 오며 본 모든 것들이 이곳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 수준이었다.

선착장에 도착해 내린 뒤 먼저 성안으로 들어갔는데 이미 닭이 세 번 울었다(새벽이 되었다). 북소리와 대포 소리가 맑은 악기 소리와 뒤섞이고, 깃발과 창칼의 광채가 성곽의 불빛 및 포구의 횃불과 번갈아 빛나니 눈과 귀가 어지러워 한참 동안 진정되지 않았다.

내가 이번 길에 동남쪽으로는 동래와 김해에 이르고 서남쪽으로는 이곳에 이르렀으니 여정은 이미 끝난 것이요, 구경 또한 여기서 끝났다. 설령 이보다 더한 것이 있다 한들 감히 청하지 못할 정도다.

[동행한 인물들]

삼도수군통제사 김한철, 대구 판관 김기순, 대구 영장 임경모, 거제 부사 조광하, 합천 군수 송일준, 함양 군수 김석균, 영천 현감 홍건후, 남해 현령 이봉서, 고성 현령 김기현, 곤양 군수 이교헌, 소촌 찰방 홍약필, 사근 찰방 이진모.

[閑山島在統制營南二十里海中 巨濟屬島 李忠武大破倭賊于此 有制勝堂 巡察使入府 府帥必館之於洗兵館 翌日同遊閑山島 盖因宴遊而習操鍊也 四月初一日丁 亥 朝起出挽河樓望見 浦平如鏡 山繚如畵 水岸人家 蔭映楊柳 山郭樓臺 流耀丹粉 粧船畵舶 列艤汀洲 杳然有江南風物 又非樓船下海想 少焉登船 船高三層 上說紅欄 幕以靑幔 與統制使同坐 行陸操罷 小船數十 左右擺列 牽纜以行 倭船現形 諸船報警 若近若遠 有似戰闘之狀 有一大舶從島嶼間出 曰此龜船也 其制大略如他戰艦而船頭作龜首 縮伸闔張 時吐烟霧 上覆以板 又罩以布而畵龜背紋 盖忠武閑島之捷 以龜船破倭 故象其成功也 舟行遲重 半日而到閑山下登制勝堂 觀樂演武 日暮始還 船到半程 望見十數里火炬如貫珠 此沿岸浦戶 張火以迓也 城上亦齊發火 諸船上旗燈箭砲 如星陳之爛于天 彗孛之行于纏 沿路所見 至此皆兒戲矣 及艙所而下 遂先入城 鷄已三呼矣 金皷砲礟之聲 與淸絲豪竹相錯 旗㫌戈鋋之光 與城火浦炬迭耀 耳目炫轉 久而不定 余於今行 東南而至於東萊 金海 西南而至於此則行程固已止矣 而觀亦止矣 雖有加於此者 不敢以請 同遊 三道水軍統制使金翰喆 大邱判官金琦淳 大邱營將任景模 巨濟府使趙廣夏 陜川郡守宋一儁 咸陽郡守金奭均 永川縣監洪健厚 南海縣令李鳳緖 固城縣令金琦鉉 昆陽郡守李敎獻 召村察訪洪若弼 沙斤察訪李晉模]

 

다음 입통제영기(入統制營記) 는 경상도 관찰사 신석우(申錫愚 1805~1865)가 1856년(丙辰) 4월 1일 한산도를 방문하여 유한산도기(遊閑山島記)를 쓰기 전인 3월 29일에, 삼도수군통제영을 방문하여 그 지형과 시설, 역사를 기록한 기문이다. 이 글은 통영에 위치한 삼도수군통제영의 지형, 건물 구조, 이순신 장군의 업적, 그리고 당시의 통제영 운영 현황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먼저 통제영의 위치와 지형을 서술했다. 앞서 3월 29일, 고성에서 40리를 이동해 통제영으로 들어갔다. 20리가 채 못 되어 큰 고개(大峴)를 넘었고, 10리 남쪽에 성이 있었으며 그 문을 원문(轅門)이라 불렀다. 지형이 바다 가운데로 가파르게 솟아 있으며, 왼쪽으로는 남해, 오른쪽으로는 거제가 보인다. 섬들이 엇갈려 솟아 있고 포구가 굽이쳐 흐르는 요새임을 기술했다.

다음으로 주요 건축물에 대해 언급했다. 성내(城內)에는 세병관(洗兵館), 의두각(倚斗閣), 운주헌(運籌軒)이 있고 지형이 좁고 험해 돌을 쌓아 수십 층의 계단을 만들었다. 성외(城外)에는 수항루(受降樓), 만하루(挽河樓), 천척루(千尺樓)가 있으며 그 아래에는 전함들을 묶어두는 선소(船所)가 있다. 그리고 배 위의 무기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갖춰져 있어 항상 적을 마주한 듯한 긴장감이 감돈다. 통제사가 말하기를 "태평소(天鵝)를 한 번 불면 만 명의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군세가 당당했다.

이어 이순신 장군과 '명나라 팔사품'에 대해 기술한다. 통제영의 유래를 들면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서 왜구를 막아낸 공으로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직함이 만들어졌고, 세 번 진영을 옮긴 끝에 이곳(통영)에 진을 열었다고 한다. 또한 명나라의 하사품을 보고 언급한다. 이시언이 통제사로 있을 때, 명나라 황제가 충무공의 공적을 기려 하사한 팔사품(八賜品)(도장, 칼, 패, 깃발 등 8가지 물건)이 여전히 통제사 앞에 진열되어 권위를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통제영의 행정 및 규모에 대해 말한다. 통제영은 고성 땅에 있지만 원문 안의 백성과 토지는 모두 영문(營城)에 속해 있다. 우후(虞候)가 송사를 듣고 처리하며, 수군이 있는 여러 도의 주군들이 모두 이곳에 예속되어 있다. 최근에는 원문 밖 근처 9개 동까지 역을 시키고 있으며, 민가는 총 5,000호 정도에 달하는 큰 규모다.

 

2) **입통제영기(入統制營記)** 1856(丙辰) / 신석우(申錫愚 1805~1865)

329일 병술일이다. 고성현으로부터 40리를 달려 통제영(統制營)으로 들어갔다. 20리가 채 못 되어 하나의 큰 고개(대현)를 넘었는데, 10리 남쪽에 성이 있었고 그 문을 원문(轅門)이라 하였다.

지형이 바다 가운데로 가파르게 뻗어 들어갔는데, 왼쪽으로는 남해, 오른쪽으로는 거제가 보였다. 섬들이 섞여 우뚝 솟아 있고 포구와 항구는 굽이굽이 굴절되어 있으며, 바깥 바다(외택)와는 멀리 격해 있었다. 통제사가 머무는 관청(帥府)에는 성이 있으며, 성 안에는 세병관(洗兵館), 의두각(倚斗閣), 운주헌(運籌軒)이 있다. 모두 지형이 좁고 험하여 돌을 쌓아 수십 층의 계단을 만들었다.

성 밖에는 수항루(受降樓), 만하루(挽河樓), 천척루(千尺樓)가 있다. 그 아래에는 배를 두는 곳(船所)이 있어 전함들을 밧줄로 묶어두었다. 배 위의 기구와 병기들은 하나도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어 항상 적을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통제사가 말하기를 "태평소(天鵝)를 한 번 불면 만 명의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충무공(이순신)께서는 본래 전라좌수사로서 왜구를 격파하여 서쪽으로 올라오려던 적의 기세를 막아 중흥의 으뜸가는 공을 세우셨다. 이에 조정에서 특별히 명령하여 삼도의 수군을 총괄하게 하고 '통제사(統制使)'라는 칭호를 처음 만들었다. 세 번이나 진영을 옮긴 끝에 이곳에 관부를 열었다. 평상시에는 늘 배에 거처하며 병사를 훈련시키고 변란에 대비하게 하였으므로, 지금 통제사가 거처하는 곳은 곧 산성(山城)이다.

후에 이시언(李時言)이 경상우수사를 겸임하고 있을 때, 명나라 황제가 충무공의 뛰어난 공적을 가상히 여겨 도장(), (), (), 깃발()을 내려 포상하였다. 통제사가 이를 여전히 앞에 진열해 두는데, 이를 '황조팔사(皇朝八賜, 명나라 황제가 내린 8가지 하사품)'라 부른다.

통제영은 고성 땅에 있으나 원문 안의 백성과 토지는 모두 통제영 성에 속해 있다. 우후(虞候)가 그들의 소송을 판결하며, 여러 도의 수군이 있는 주와 군들도 모두 이곳에 예속되어 있다. 최근에는 점차 원문 밖 근처의 아홉 개 동네까지 취하여 부역을 시키고 있는데, 민가는 대략 5,000호 정도라고 한다.

[三月二十九日丙戌 自固城四十里入統制營 未及二十里 越一大峴 十里南有城 而門曰轅門 地形陡入海中 左南海 右巨濟 島嶼錯峙 浦港屈折 與外澤隔遠 帥府有城 城中有洗兵館 倚斗閣 運籌軒 皆偪側崎嶇 以石甃爲級十數層 城外有受降樓 挽河樓 千尺樓 下有船所 纜繫戰艦 船上器械 無一不具 常若臨敵 統使曰 一吹天鵝 可集萬人云 李忠武公本以全羅左水使 破倭冦以遏西上之鋒 爲中興元功 朝廷特命捴轄三道水師 而刱統制使之 號 三遷其營 開府于此 常使居舟舶鍊卒待變 故今之所居卽山城也 後之兼慶尙右水使在李時言時 皇朝嘉公茂績 賜印劒牌旗以奬之 統帥尙列之前 謂之皇朝八賜 營在固城地 而轅門內民人土田 皆隷營城 虞候聽其詞訟 諸道有舟師州郡皆隷焉 近漸取轅門外附近九洞役使焉 民戶凡五千戶云]

 

[저자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약력] 신석우는 조선후기 문신으로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성여(聖如), 신소(申韶)의 증손으로할아버지는 신광손(申光遜)이고아버지는 교리 신재업(申在業)이고어머니는 좌참찬 김이탁(金履度)의 딸이다판서 신석희(申錫禧)의 형이다. 1828년 진사, 1834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가주서(假注書예문관검열·사간원정언을 거쳐 1838년 용강현령(龍岡縣令), 그 뒤 부교리·병조참판·우승지·양주목사·대사성·이조참의·승지·이조참판 등을 거쳐 1855년 경상도관찰사, 1857년 대사헌이듬해 한성부판윤을 거쳐 1859년 형조판서에 이어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0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를 다녀왔다이때 청나라에서는 영국·프랑스 연합군에게 광동(廣東)을 점령당하고 북경이 함락당한 때였으므로 귀국하여 이러한 사정을 보고하니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문장과 글씨에 뛰어나 1863년에는 해주기적비(海州紀蹟碑)의 서사관(書寫官)으로 특별 가자(加資)되었다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참고로, 조선후기  경상감사와 대사헌을 역임한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는 거제도를 무척 아끼고 사랑했던 관찰사였다. 바닷가에 위치한 거제도가 공자와 맹자의 고향이라고 칭송했으니, 섬 지역 거제도에 대한 최고의 평가였다. 또한 그가 경상감사로 재직 時, 거제 반곡서원의 중수(重修)를 시작하게 했고, 이후 대사헌으로 영전 후에 반곡서원이 중수(重修)가 마침 끝난 1857년에 추향문(追享文) 작성의 요청에 기꺼이 응하였고 추향문을 작성하여 거제도로 보냈다. 이후 그는 거제도를 잊지 않고 김수근의 추가 배향과 서원의 사액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또한 임금께 반곡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소(疏)를 여러 차례 올린 선생께 삼가 고마움과 존경의 념(念)을 바친다. 그가 남긴 거제의 <추향문(追享文)>과 <추배문(追配文)>, 그리고 <청액소(請額䟽)>는 다음과 같다. 1857년(丁巳) <반곡서원 중수후 고추향문(盤谷書院重修後告追享文)>과 1857년(丁巳) <거제반곡서원 추배 김정문공문(巨濟盤谷書院追配金正文公文)>, 그리고 1861년(辛酉) <거제 반곡서원 사액을 청하는 소(䟽)(巨濟盤谷書院請額䟽)>과 1863년(癸亥) <반곡서원 연액 고유문(盤谷書院延額告由文)> 등이 있다.

 

○ 한편 거제도 역사에는 동명이인이 몇 분 계신다. 그런데 동명이인은 아니지만 비슷한 시대에 이름까지 비슷해 자세히 구분하지 않으면 간혹 헷갈리는 인사가 있다. 바로 1879년(고종 16) <반곡서원 유허비(盤谷書院遺墟碑)>의 비문을 쓴,  당시 진주목사 동양(東陽) 신석유(申錫遊)와,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반곡서원 <추향문(追享文)>과 <추배문(追配文)>, 그리고 <청액소(請額䟽)>’을 쓴 경상감사 해장(海藏) 신석우(申錫愚 1805~1865)가 그들이니 혼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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