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3년 조선통신사 파견, 일본 외교사절 차왜(差倭)와 절차협의 장계(狀啓)>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이번 편에는 조선후기 일본과의 외교 관계에서 활동했던 일본 외교사절 차왜(差倭)에 관한 여러 사건들을 소개한 「장계(狀啓) 4건」을 소개하고자 한다. 당시 조선통신사 파견 절차는 이러했다. 처음 ①일본 정부에서 조선통신사 요청을 위해 청래차왜(請來差倭) 외교사절이 조선으로 파견 옴. – ② 조선에서 사행(使行) 동의 국서(國書)를 작성해 일본에 보낸다. – ③예물(예단)과 물품 식량, 통신사선(보통 6척)을 건조한다. - ④일본 측 호위‧길 안내 사절인 호행대차왜(護行大差倭)가 부산에 도착한다. – ⑤조선통신사 사절단은 한양에서 국왕께 하직 인사와 부산에서 해신제(海神祭)를 지낸 후 일본으로 출항했다.
이번에 소개하는 장계, 첫 번째 ①「1762년 4월 통신사 청송대차왜(通信使 請送大差倭) 접대를 건의한 장계(狀啓)」는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에서 보낸 통신사 청송대차왜(通信使 請送大差倭) 일행이 부산에 도착했음을 보고하고, 향후 접대 대책을 건의하는 장계다.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는 일본 사절단을 맞이한 당시의 보고서다. 이외 조선 측에서는 전례보다 더 많은 일본 사절단이 방문하여 규정 위반이라고 문제를 제기하며, 엄하게 인원을 줄이도록 지시했다. 두 번째 ② 「1763년 2월21일 일본 외교사절 대차왜(大差倭) 접대 장계(狀啓)」는 1763년 일본에서 호행 대차왜(護行大差倭)가 조선통신사 일행을 호위하며 길을 안내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 이에 조선 측에서 전례에 따라 이들의 대접을 기록한 문건이다. 세 번째 ③「1763년 5월12일 일본인 호행 대차왜(護行 大差倭) 접대보고 장계(狀啓)」는 1763년 조선통신사 정사(正使) 조엄(趙曮)을 파견하기 직전, 일본 측 통신사 호행 대차왜(通信使 護行 大差倭, 통신사 길 안내 일본인 사절) 일행의 접대와 보고 절차를 다루고 있다. 일본 측이 가져온 서계(외교 문서)와 예물 목록을 예조에 보고하고 일본 측 문서를 통해 조선통신사 행차(信行)가 예정대로 진행될 것임을 확인하여 우리 조정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다. 네 번째 ④「1763년 7월3일 통신사 사절단 호행차왜(護行差倭)와의 외교절차 장계(狀啓)」는 통신사 일행을 호위하려고 온 일본 측 사절단인 '호행차왜(護行差倭)' 등과 관련된 의례와 문서 수령 보고서다. 1763년 7월은 조엄(趙曮)을 정사(正使)로 하는 계미 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부산에 머물며 예법에 따라 하선다례(下船茶禮)를 행하고 서계(書契, 외교 문서) 및 별폭(別幅, 선물 목록)을 받으며, 영접 사절단을 만나 공식적인 외교 절차를 시작했음을 조정에 알리는 문서다.
○ 일본의 외교사절 차왜(差倭)들은 대부분 태풍으로 동해에서 난파된 왜선(倭船)과 표류(漂流)하는 왜인(倭人)들을 조선에서 구조하고 송환해 준 일에 사례하고자 왔지만, 효종의 즉위 축하와 왜관 이건(移建)을 허락한 일에도 사례하고자 왔다. 또한 무엇보다 조선통신사의 일본 사행(使行) 일정과 절차에 관한 요청 및 협의를 위해 방문하기도 했다. 조선에서는 역관이 그들을 문정(問情)한 후에, 접위관이 접대하였고, 그들이 귀국할 때 회례물목(回禮物目)을 주어 전송하였다. 특히 차왜(差倭) 중에 ‘통신사 청래 차왜(通信使請來差倭)’는 1764년(영조 40년) 조선통신사의 일본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조선에 파견된 일본 측 정식 사절(정관)로 활동을 했고, ‘통신사 호행 대차왜(通信使護行大差倭)’는 같은 해 1764년, 일본으로 향하는 조선통신사 일행을 호위하고 안내하는 업무를 맡았다. 게다가 ‘신사고부 대차왜(身死告訃大差倭)’는 1761년 은퇴한 쇼군 도쿠가와 이에시게(德川家重)의 죽음을 알리는 부고 사절로 기록에 등장한다.
다시 언급하건대, 차왜(差倭)는 조선시대, 일본(대마도)에서 조선에 수시로 파견하던 임시 사절을 말한다. 팔송사(八送使)가 교역을 위한 정기적인 무역사절이라면, 차왜는 외교적인 현안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임시로 파견된 외교사절이었다. 차왜 중에 특히 조선 정부로부터 외교사행으로 인정받은 차왜를 ‘별차왜(別差倭)’라고 하였다. 차왜는 그 사명에 따라 대차왜(大差倭)와 소차왜(小差倭) 및 기타 차왜로 구분할 수 있다.
대차왜는 ‘막부나 통신사’에 관한 중요 사항을 취급했으며, 소차왜는 대마도주나 기타 외교 업무에 관한 사항을 취급하였다. 대차왜는 정관(正官) 1, 도선주(島船主) 1, 봉진압물(封進押物) 1인, 시봉(侍奉) 2인, 반종(伴從) 16인, 격왜(格倭) 70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예조 참판·참의, 동래부사·부산첨사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했다. 한편 소차왜는 정관 1인, 압물 1인, 시봉 1인, 반종 5∼10인, 격왜 30∼40인으로 구성되며, 예조참의·동래부사·부산첨사에게 보내는 서계를 지참했다.
차왜는 각종 연향접대, 식량과 일용 잡물의 지급, 회사 및 개시무역에의 참가 등을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보장받았다. 이에 대마도주는 외교 사행에 가능한 한 많은 선박과 인원의 왕래를 통해 무역량을 증가시켜 무역 이익을 증대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방문하는 일본인의 수를 제한하는 여러 조치가 뒤따랐으며 조일 간 외교 사행마다 마찰을 빚기도 했다.
○ 임진왜란이 끝난 지 10년째 되던 1607년 선조 40년 통신사가 다시 일본 땅을 밟았다. 한·일 양국이 요즘 말하는 조선통신사의 시작이다. 이후 1811년 순조 11년까지 200년 남짓 12차례에 걸쳐 통신사절단이 일본을 방문했다. 일본은 조선에 일본 국왕사(國王使)라는 사절을 보냈다. 이러한 사절단을 보내기 전에 외교사절 차왜(差倭)를 보내 일정과 절차를 협의하였다. 임란 직후의 통신사절단은 초기에 국정 탐색에 역점을 두다가, 1636년 인조 14년부터는 막부 쇼군(將軍)의 즉위나 그의 후계자 탄생을 축하하는 의미로 바뀌었다. 선린 우호·문화 교류 사절단의 성격을 띠었다.
조선통신사는 한양에서 일본 수도 에도(현 도쿄)까지 왕복하는 데 1년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다. 규모는 대략 400~500명이었다. 부산에서 길이 34m, 너비 9.5m, 높이 3m에다 바닥이 평탄한 구조의 평저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넜다. 쓰시마(對馬)번에서는 1500명 정도가 호위에 나섰다. 내륙에 닿은 뒤 다시 배를 타거나 걸었다. 멀고 먼 여정이었다. 그러나 행렬은 장관이었다. 이때가 한·일 양국이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 대마도 도주 별폭 물목과 예조의 회례 물목
차왜는 보통 서계와 별폭을 지니고 동래부를 방문한다.29) 인조대에는 별폭의 물목이 적힌 문건이 없다.30) 효종대에는 價銀과 같은 금전이 포함되어 있다.31) 현종대에는 구리로 만든 대야에 붙은 湯器 1具, 구리 수풍로에 붙은 湯煎 1具, 紋紙 200張 등이 포함되었다.32) 숙종대에는 紋紙가 1000 枚로 늘어났고, 접었다 펴는 부채인 平骨扇이 포함되었다.33) 이에 回禮하는 차원에서 차왜 일행에게 지급한 조선의 물목은 거의 정형화되어 있다. 대체로 백목면, 백면주, 인삼, 호피, 표피, 흑마포, 황모필, 대추, 밤, 종이 등을 보냈다. 회례 물목이 적힌 문건을 紙面上 다 소개할 수는 없다. 그런데 대마도주의 별폭 물목은 대부분 공예품이고, 조선에서 일본으로 답례한 예조의 회례 물목은 목면, 인삼 등 생필품이다. 대마도 도주 별폭 물목은 그때그때 다르지만, 조선 예조의 회례 물목은 준비하는 부처와 수량까지 대략 정해져 있다. 그런데 별폭과 회례 물목의 성격을 가만히 살펴보면, 차왜를 보낸 대마도주가 가능하다면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많이 받아내려 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1) 「1762년 4월 통신사 청송대차왜(通信使 請送大差倭) 접대를 건의한 장계(狀啓)」
이 사료는 1762년(영조 38년, 건륭 27년) 4월 15일, 동래부(또는 경상감영)에서 조정에 올린 장계(狀啓)다. 내용은 일본 쓰시마섬(對馬島)에서 보낸 통신사 청송대차왜(通信使 請送大差倭) 일행이 부산에 도착했음을 보고하고, 향후 접대 대책을 건의하는 것이 핵심이다. 또한 이 사료는 일본 쓰시마(대마도)에서 조선통신사 파견을 요청하기 위해 보낸 사절단이 부산에 도착했을 당시의 보고서다. 이 기록은 이듬해인 1763년, 조엄을 정사로 하여 일본으로 떠난 계미통신사의 서막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다.
*부산 도착 보고 및 일행 구성 : 4월 14일 묘시(새벽 5~7시), 부산첨사 조경상의 보고에 따르면 쓰시마섬의 대차왜(외교사절) 평여방(平如房) 일행이 도착했다. 대차왜를 포함해 봉진압물왜, 시봉왜, 반종왜, 격왜(노를 젓는 왜인), 도선주 평경일 등 총 90여 명의 대규모 인원이었다. 이들은 예조 참판·참의에게 보내는 서계(외교 문서)와 별폭(예물 목록) 등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4월 8일 관소(초량왜관)에 직행했으나, 일부 선박은 옥포에 표류했다가 13일에야 부산항으로 돌아왔다.
*방문 목적은 통신사를 요청하기 위해서다. 에도(江戶) 막부로부터 조선 통신사를 청하는 소식이 왔기에, 이를 전달하고 절차를 협의하러 왔다. 통신사가 내년(1763년) 6월 상순에 부산에서 출발하여, 그해 9~10월 사이에 에도에 입성하는 일정을 제시했다. 이 요청으로 인해 실제 이듬해인 1763년, 조엄(趙曮)을 정사로 하는 통신사 행렬이 일본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온 것으로 유명하다.
*전례보다 많은 인원이라, 규정 위반이라고 문제를 제기했다. 과거 기록(상계등록)을 검토해보니, 보통 반종왜는 14명, 격왜는 50명 정도가 관례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종왜 2명, 격왜 20명이 전례보다 더 많이 왔다. 동래부에서는 훈도와 별차를 통해 이 부분을 엄하게 나무라고 인원을 줄이도록 지시했다.
*조정에 대한 요청: 대차왜가 이미 왜관에 도착해 있는데, 이들이 오래 머물면 비용과 폐단이 크다. 따라서 이들을 상대할 접위관(接慰官)과 차비역관(差備譯官) 등을 예조에서 속히 임명해 내려보내 달라고 촉구하며 장계를 마무리하고 있다.
요약하건대, 이 장계는 1764년 통신사 파행을 앞두고, 일본 측에서 "통신사를 보내달라"고 공식 요청하는 사절단이 부산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긴박한 행정 보고서다.
* 덧붙여 이번 「1762년 4월 통신사 청송대차왜(通信使 請送大差倭) 접대를 건의한 장계(狀啓)」은 발신자가 동래부사(東萊府使)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접대등록(東萊府接待謄錄)』이다.
**「1762년 4월 통신사 청송대차왜(通信使 請送大差倭) 접대를 건의한 장계(狀啓)」**
건륭 27년(1762년) 임오 4월 15일. 본부(본 동래부)에서 올린 장계입니다. 이달 14일 묘시(새벽 5~7시)에 부산첨사 조경상이 보낸 통지에 따르면, 통신사를 청하기 위해 보낸 대차왜(大差倭) 평여방(平如房), 예물을 봉송하는 압물왜 1명, 시봉왜 2명, 반종왜 16명, 격왜(노 젓는 인원) 70명, 도선주 평경일 등이 도착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조 참판과 참의에게 올리는 서계(외교 문서)와 별폭(예물 목록) 각 2부, 동래부사와 부산첨사에게 올리는 서계 1부와 별폭 2부를 지참하였습니다. 이들이 타고 온 배 중 한 척은 지난 8일에 이미 왜관으로 직행하였고, 대차왜가 탄 배 1척과 도선주가 탄 수목선 1척 및 부속선 1척은 옥포로 표류했다가 13일에야 왜관 선창으로 돌아와 정박했습니다.
훈도 최수신과 별차 정일성 등이 상황을 물어본 보고서(문정수본)에 따르면, 일본 정관왜가 말하기를 "에도(동무)로부터 통신사를 청해오라는 소식이 왔기에 내가 나오게 된 것이다. 서울의 접위관과 차비역관(당상·당하관 각 1원)을 신속히 내려보내 전례에 따라 접대해 달라. 내가 일을 마친 후 즉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통신사 행차 일정에 대해서는 "내년(1763년) 6월 상순에 부산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같은 해 9~10월 사이에 에도에 입성하겠다"는 내용을 보고해 왔습니다.
대차왜가 가져온 서계와 별폭의 복사본 1부를 봉하여 예조에 올립니다. 아울러 통신사 파견을 위해 온 대차왜를 접대한 예전 기록을 검토해 보니, 수행원 중 시봉왜 1명, 반종왜 14명, 격왜 50명을 접대한 것이 전례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온 대차왜는 시봉왜 1명, 반종왜 2명, 격왜 20명을 전례보다 더 많이 데리고 왔습니다. 이는 전례에 어긋나는 일이므로, 추가로 데려온 인원들에 대해서는 엄중히 훈계하여 줄이도록 훈도와 별차 등에게 엄격히 분부하였습니다.
대차왜가 이미 왜관에 도착하여 오래 머물며 기다리게 되면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접위관과 차비역관 등을 예조에서 서둘러 내려보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상 내용을 정리하여 보고드립니다. 건륭 27년 임오 4월 15일.[기사제목 壬午四月十五日]
[乾隆二十七年壬午四月十五日. 本府狀啓
本月十四日卯時到付釜山僉使趙慶祥馳通內, 通信使請送大差倭平如房, 封進押物倭一人, 侍奉倭二人, 伴從倭十六名, 格倭七十名, 都船主倭平敬一等, 持禮曹參判參議了書契·別幅各二度, 東萊·釜山了書契一度, 別幅二度是遣, 㯠船段, 初八日直到館所, 差倭所騎船一隻, 都船主所騎水木船一隻及脚船一隻段, 漂泊玉浦, 十三日回泊館所。使訓導崔壽仁, 別差丁一星等, 問情手本內, 正官倭以爲, 自江戶東武, 通信使請來之奇來到, 故差俺出來, 京接慰官及差備譯官堂上·堂下各一員, 從速下來, 依例接待, 使俺竣事後, 卽爲還歸之地爲乎旀. 通信使趁明年六月上旬, 自釜山乘船, 同年九十月間, 入往江戶事, 問情手本據馳通是白置有亦. 大差倭齎來書契·別幅謄本一度, 監封上送于該曹爲白在果, 取考通信使請送大差倭接待各年狀啓謄錄是白乎, 則差倭所率員役, 皆以侍奉一人, 伴從十四名, 格倭五十名接待爲白有去乙, 今此出來大差倭段, 侍奉一人, 伴從二名, 格倭二十名, 加數帶來者, 有違前例是白乎等以, 加數帶來倭人等, 各別責諭減除之意, 訓別等處, 嚴飭分付爲白有在果. 大差倭今已到館, 久留等待, 其弊不貲, 接慰官及差備譯官等, 令該曹催促下送爲白只爲, 詮次善啓云云. 乾隆二十七年壬午四月十五日]
2) 「1763년 2월21일 일본 외교사절 대차왜(大差倭) 접대 장계(狀啓)」
이번 장계(狀啓)는 『각사등록(各司謄錄)』 중 「동래부접대등록왜사등여향(東萊府接待謄錄倭使藤如鄕)」의 도입부이다. 1763년(영조 39년, 건륭 28년) 계미 통신사 행차 당시, 일본 측 호행 대차왜(護行大差倭)인 등여향(藤如鄕)을 접대하는 과정을 기록한 문서다.
* 이번 사건의 발단(2월 12일~20일)은 부산첨사 이응혁의 보고에 의해 시작되었다. 2월 12일 천성보(天城堡) 마거리 앞바다에 왜선 한 척이 표박했다가 20일 초량왜관으로 들어왔다. 조사 결과, 이 배에는 두왜(우두머리) 1명과 격왜(사공) 6명이 타고 있었으며, 통신사 호행 대차왜의 선문(先文, 예고 문서)과 노인(路引, 통행증)을 지니고 있었다.
* 일본 측 요구에 따르면, 왜관의 관수왜(館守倭, 왜관 일본인 관리)는 "대차왜가 곧 도착할 것이니, 모든 접대 절차를 무진년(1748년) 통신사 행차 때의 전례에 따라 준비해 달라"고 요청했다.
* 동래부가 차왜 접대 대응 및 건의를 했다. 동래부에서 무진년의 기록(무진 등록)을 검토해 보니, 당시 호행 대차왜가 왔을 때 경상도 도사(都事)가 접대를 담당했고 별도의 차비역관(差備譯官)은 배치되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에 동래부사는 이번에도 전례에 따라 도사가 접대하게 할 것을 예조(該曹)에 품지하여 도에 지시해 달라는 장계를 올렸습니다.(2월 21일 작성)
따라서 이 기록은 1763~1764년에 걸친 계미 통신사(정사 조엄) 파견 당시, 일본 측 동행 안내역이었던 대마도 사절을 조선 정부가 어떻게 맞이했는지 보여주는 구체적인 행정 자료다. 이에 이 문서 다음에는 보통 예조의 허가나 도사가 파견되어 실제로 접대하는 상세 일정이 이어지게 된다.
* 덧붙여 이번 「1763년 2월21일 대마도 사절 차왜(差倭) 접대 장계(狀啓)」은 발신자가 동래부사(東萊府使)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접대등록(東萊府接待謄錄)』이다.
**「1763년 2월21일 일본 외교사절 대차왜(大差倭) 접대 장계(狀啓)」**
각사등록(各司謄錄) 제○책 (동래부 접대등록 왜사 등여향). 건륭 28년(영조 39년) 계미 8월 일. 「통신사 호행 대차왜(護行大差倭) 등여향(藤如鄕) 접대 등록」
하나(一), 동래부의 장계(狀啓) : 본월(2월) 12일 유시(酉時)에 부산첨사 이응혁이 급히 보낸 보고서가 도착하였습니다. 그 내용은 "천성보(天城堡) 경계인 마거리(磨巨里) 앞바다에 표류하던 왜소선 한 척이 20일에 왜관(館所)으로 돌아온 뒤, 훈도 이창기와 별차 박준한 등이 사정을 물어보고 올린 보고서(手本)에 따르면, '비선(飛船) 한 척에 두왜(頭倭, 우두머리) 1명과 격왜(格倭, 뱃사공) 6명 등이 타고 왔으며, 노인(路引, 통행증) 및 통신사 호행 대차왜의 선문(先文, 도착 예고 문서)을 지니고 왔다'고 합니다.
또한 관수왜(館守倭, 왜관 일본인 관리)가 말하기를, '이제 대차왜의 선문과 사신(私書)을 보니, 통신사 호행 대차왜가 머지않아 나올 것인데, 모든 일을 한결같이 무진년(1748년) 통신사 행차 시의 호행 대차왜(길 안내‧보호 외교사절) 사례에 의거하여 접대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무진년의 등록을 조사해 본즉, 통신사 호행 대차왜가 나온 뒤에 본도(경상도)의 도사(都事)가 접대하였고, 차비역관(差備譯官, 임시 역관)은 없었습니다. 이번에도 무진년의 전례에 의거하여 도사가 접대하도록 해당 조(예조)에 여쭈어 승인을 받은 뒤, 본도에 분부하여 차왜가 나오는 즉시 접대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였기에, 차례대로 정리하여 보고(장계)합니다. 건륭 28년 계미(1763년) 2월 21일.[기사제목 癸未二月二十一日]
[各司謄錄第 冊 (東萊府接待謄錄倭使藤如鄕). 乾隆二十八年(英祖三十九年)癸未八月 日. 通信使護行差倭藤如鄕接待謄錄
一, 東萊府狀啓. 本月十二日酉時到付釜山僉使李應爀馳通內, 天城堡境磨巨里前洋漂泊倭小船一隻, 二十日回泊館所後, 訓導李昌基, 別差朴俊漢等問情手本內, 飛船一隻, 頭倭一人, 格倭六名等同騎, 持路引及通信使護行大差倭先文持來, 而館守倭言內, 今見大差倭先文及私書, 則通信使護行大差, 匪久出來, 凡事一依戊辰信行時護行大差例, 接待之地亦言說是如, 手本爲白有等以, 取考戊辰謄錄, 則信使護行大差出來後, 本道都事接待, 而無差備譯官是白乎所. 今番段置, 依戊辰前例, 以都事接待事, 令該曹稟旨, 分付本道, 以爲差倭出來卽時接待之地爲白只爲, 詮次善啓云云. 乾隆二十八年癸未二月二十一日]
[주1] 호행 대차왜(護行大差倭) : 통신사 일행을 일본 현지에서 안내하고 보호하기 위해 대마도에서 파견한 격이 높은 사절이다.
[주2] 무진년(1748년) 전례 : 조선 시대 외교는 '전례(과거의 사례)'를 매우 중시했다. 15년 전의 기록을 찾아 그대로 시행하려 하는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주3] 도사(都事) : 경상감영의 종5품 관직으로, 외교 사절을 맞이하는 영접관 역할을 수행했다.
3) 「1763년 5월12일 일본인 호행 대차왜(護行 大差倭) 접대보고 장계(狀啓)」
이 사료는 건륭 28년(1763년, 영조 39년) 5월 12일, 경상감사가 조정에 올린 장계의 주요 내용이다. 당시 조선은 일본에 1763년 조선통신사 정사(正使) 조엄(趙曮)을 파견하기 직전이었고, 또 이 문서는 부산에 도착한 일본 측 통신사 호행 대차왜(通信使 護行 大差倭, 통신사 길 안내 일본인 사절) 일행의 접대와 보고 절차를 다루고 있다. 이 내용은 당시 경상감사가 부산에 도착한 일본 사절단(차왜)의 상황을 조정에 보고한 장계다.
*내용인즉, 5월 7일, 통신사를 마중하기 위해 일본에서 온 대차왜선 1척과 수목선, 종선(㯠船, 脚船) 등이 거제도 옥포에 표박했다가 부산 왜관으로 들어왔다. 대차왜 등여향(藤如鄕)을 비롯해 봉진압물왜, 시봉왜, 격왜(노를 젓는 인원) 등 총 160여 명 규모의 일행이 확인되었다. 대차왜가 규정에 없는 종선(㯠船, 脚船) 등을 대동한 것에 대해, 부산첨사 이응혁은 왜관 수직왜(館守倭)에게 속히 돌려보내도록 조치했다. 관례에 따라 경상도 도사(都事)를 청해 이들을 접대하도록 하고, 일본 측이 가져온 서계(외교 문서)와 예물 목록을 예조에 보고했다. 이에 가장 중요한 대목으로, 일본 측 문서를 통해 조선통신사 행차(信行)가 예정대로 진행될 것임을 확인하여 조정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있다. 이 자료는 1763~1764년에 걸친 계미 통신사 행차의 준비 과정을 보여주는 생생한 기록이다.
* 이 사료의 해설 및 주요 포인트 : 1763년 조엄(趙曮)을 정사로 하는 계미 통신사가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일본 측에서 마중 나온 사절단(대차왜)의 도착 소식을 전하고 있다. 또한 조선 정부는 왜관에 들어오는 일본 선박의 수와 종류를 엄격히 제한했는데, 이번에 규정 외의 보조선(거룻배 등)을 가져온 것에 대해 즉각 항의(責諭)하는 모습이 보인다. 당시 통신사 행차 일정이 확실한지가 조정의 큰 관심사였는데, 일본 측으로부터 "확실히 갈 것"이라는 확답을 받았다는 점이 이 장계의 핵심 보고 사항이다.
* 덧붙여 이번 「1763년 5월12일 일본인 호행 대차왜(護行 大差倭) 접대보고 장계(狀啓)」은 발신자가 동래부사(東萊府使)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접대등록(東萊府接待謄錄)』이다.
**「1763년 5월12일 일본인 호행 대차왜(護行 大差倭) 접대보고 장계(狀啓)」**
건륭 28년(영조 39년) 계미년 5월 12일. 본월(5월) 12일 인시(寅時, 새벽 3시~5시)에 도착한 부산첨사 이응혁의 보고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달 7일에 통신사를 호위하여 행차하는 대차왜(大差倭, 외교 사절)의 배 1척과 같은 일행인 수목선(水木船) 1척, 거룻배(㯠船) 1척, 작은 배(脚船) 1척 등이 거제 옥포(玉浦)에 표박하였다가 왜관으로 돌아와 정박하였습니다. 즉시 훈도 박도순과 별차 박준한 등으로 하여금 사정을 묻게 하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통신사 호행 대차왜선 1척에는 정관(正官) 왜인 등여향(藤如鄕), 봉진물품을 압송하는 왜인 1명, 시봉(侍奉)하는 왜인 2명, 수행원(伴從) 16명, 격왜(노 젓는 이) 70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또한 수목선 1척에는 선주 왜인 기번실(紀蕃實)과 격왜 20명이, 거룻배 1척에는 격왜 20명이, 작은 배 1척에는 격왜 20명이 타고 왔다는 사실을 보고해 왔기에 알려 드립니다.
대차왜가 거룻배나 작은 배 등을 거느리고 온 것은 이미 규정 밖의 일이므로, 신속히 돌려보내라는 뜻을 역관들에게 시켜 왜관을 지키는 왜인(관수왜)에게 엄히 꾸짖게 하였습니다. 다만, 통신사 호행 대차왜의 시봉 왜인 2명을 허용하여 접대하는 것은 본래 전례가 있는 일이니 지금 논할 것은 아닙니다. 통신사 호행 차왜가 이미 도착했으므로, 전례에 따라 본도의 도사(都事)를 청해와서 이들을 접대하도록 계획하겠습니다. 차왜가 가져온 서계(외교 문서)와 별폭(예물 목록)의 사본은 해당 조(예조)로 올려보내니, 이들에게 줄 연회 음식과 예물 및 잡화 등은 예조에서 전례에 따라 마련하여 내려보내 주시기 바랍니다.
방금 훈도와 별차 등이 올린 보고에 따르면, '통신사 행차(信行)가 (예정대로) 배를 타고 떠나는 일은 분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다'라고 차왜가 글로 써서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통신사 행차 일정이 확정된 것은 염려할 것이 없는 듯하여, 이러한 연유를 아울러 보고드리는 바이니 잘 정리하여 임금님께 보고(계달)하여 주십시오." 건륭 28년 계미년 5월 12일. [기사제목 癸未五月十二日]
[乾隆二十八年癸未五月十二日. 本月十二日寅時到付釜山僉使李應爀馳通內, 今月初七日出來漂泊玉浦是在通信使護行大差倭船一隻, 同差倭水木船一隻, 㯠船一隻, 脚船一隻等, 回泊館所後, 卽令訓導朴道洵, 別差朴俊漢等問情手本內, 通信使護行大差倭船一隻, 正官倭藤如鄕, 封進押物倭一人, 侍奉倭二人, 伴從倭十六名, 格倭七十名, 同差倭水木船一隻, 都船主倭紀蕃實, 格倭二十名, 㯠船一隻, 格倭二十名, 脚船一隻, 格倭二十名等出來事手本據, 馳通是白置有亦。大差倭㯠·脚船等設, 旣係規外, 斯速入送之意, 使任譯責諭館守倭處是白齊. 信使護行大差倭侍奉二人之許接, 自是前例, 則今無可論是白乎旀。信使護行差倭, 旣已出來, 依前例請來本道都事, 接待計料爲白遣。差倭齎來書契·別幅謄本, 上送于該曹爲白去乎, 所贈宴禮單雜物乙良, 令該曹照例磨鍊下送爲白齊。卽呈訓·別等手本內, 信行乘船退行事, 丁寧無疑是如, 差倭書示文字云云爲白有臥乎所。信行退定一款, 似無可慮, 緣由竝以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云云. 乾隆二十八年癸未五月十二日]
4) 「1763년 7월3일 통신사 사절단 호행차왜(護行差倭)와의 외교절차 장계(狀啓)」
이 문건은 조선 후기 통신사(通信使)행과 관련된 공식 기록의 일부다. 내용은 건륭 28년(1763년, 영조 39년) 7월 3일, 동래부사가 조정에 보고한 계본(啓本, 임금께 올리는 서류)의 형식을 띠고 있다. 일시는 건륭 28년 계미(1763년) 7월 3일이고 보고는 접위관(接慰官)과 동래부사가 함께 올렸다(聯啓). 이 사료는 통신사 일행을 호위하려고 온 일본 측 사절단인 '호행차왜(護行差倭)' 등과 관련된 의례와 문서 수령 보고다.
*내용인즉, 일본 사절인 등여향(藤如鄕, 후지와라 요시사토)과 그 일행이 배에서 내린 뒤 행하는 의례인 '하선다례(下船茶禮)'를 7월 2일에 열었다. 신하들이 연청(宴廳)에 가서 관례대로 행사를 마쳤다. 그리고 행사 후 일본 측에서 제출한 문서들을 받았다. 예조(禮曹)에서 서계(書契, 외교 문서) 및 별폭(別幅, 선물 목록) 각 2부를 받고 동래·부산에선 서계 1부 및 별폭 2부를 받았다. 이에 받은 문서들을 봉인하여 해당 관청(예조)으로 보냈음을 보고하며, 이러한 사유를 차례대로 정리하여 올린다는 내용이다.
*역사적 맥락에서 살펴보면, 이 즈음 1763년 7월은 조엄(趙曮)을 정사(正使)로 하는 계미 통신사 일행이 일본으로 떠나기 위해 부산에 머물며 준비하던 때이다. 일본 측에서 통신사를 맞이하러 온 사절단과 예법에 따라 인사를 나누고 공식 문서를 주고받는 긴박한 외교 현장을 보여준다. 고로 이 문건은 1763년 일본으로 떠난 '계미 통신사' 일행이 부산에서 일본 측 영접 사절단을 만나 공식적인 외교 절차를 시작했음을 조정에 알리는 문서다. 특히 언급된 '등여향(藤如鄕)'은 대마도에서 통신사를 데리러 온 실무 책임자로, 그가 가져온 문서를 정식으로 접수했다는 것이 이 보고의 핵심이다.
* 덧붙여 이번 「1863년 7월3일 통신사 사절단 호행차왜(護行差倭)와의 외교절차 장계(狀啓)」은 발신자가 접위관과 동래부사(接慰官·東萊府使)이고 수신자는 승정원(承政院)이며, 출전은 『각사등록(各司謄錄)』과 동래부접대등록(東萊府接待謄錄)』이다.
**「1863년 7월3일 통신사 사절단 호행차왜(護行差倭)와의 외교절차 장계(狀啓)」**
건륭 28년(1763) 계미 7월 3일. 하나(一), 접위관(接慰관)과 동래부사가 함께 올립니다. 통신사를 호위하여 온 일본 사신(호행차왜) 등여향(藤如鄕)과 그 수행원들의 하선 다례(배에서 내린 후 행하는 의례)를 이번 달 2일로 정하였습니다. 이에 저희(신들)가 함께 연회청에 나가 관례에 따라 의식을 치른 뒤, 해당 일본 사신이 제출한 예조 앞으로 보내는 서계(외교 문서)와 별폭(예물 목록) 각 2도, 동래부와 부산진 앞으로 보내는 서계 1도와 별폭 2도를 받았습니다. 이를 감봉(봉인)하여 해당 조(예조)로 올려보냅니다. 이러한 연유를 정리하여 보고하니 잘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기사제목 癸未七月初三日]
[乾隆二十八年癸未七月初三日. 一, 接慰官東萊府使聯啓 通信使護行差倭藤如鄕員役等下船茶禮, 定於本月初二日爲白有等以, 臣等偕往宴廳, 依例設行後, 同差倭所呈禮曹了書契·別幅各二度, 東萊釜山了書契一度·別幅二度等捧上, 監封上送于該曹爲白乎旀. 緣由馳啓爲白臥乎事是良厼, 詮次善啓云云. 乾隆二十八年癸未七月初三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