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풍무(110)
소리 없이 다가오다.
북경.
중원 외각임에도 불구하고 영락제 이후 천하의 중심으로 자리한 곳. 오직 명예만으로 천하제일이 되고자 하는 무림과는 달리 북경엔 권력을 원하는 자들로 넘쳐난다.
그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곳이 바로 자금성이다.
야망을 위해 또는 천의라는 말로, 스스로를 정당화 한 수많은 이들이 도전을 감행했던 곳, 자금성은 가진 자들의 꿈이었다.
지금 이곳에서 자금성을 꿈꾸는 자가 있었다.
남경왕 또는 적룡왕이라 불리는 주홍이었다.
“눈치를 챘는가.”
주홍은 곤혹스런 얼굴로 중얼거렸다. 승천문 외각에 십만 정병을 주둔시켜두고 성내로 들어왔다.
오늘 자금성에 들러 황제를 배알하는 자리에서 조만간 축하연을 열겠다는 말을 들었다.
“조만간이라…….”
이 한마디가 마음을 심란하게 만들었다. 일상적으로 승리 축하연은 장군이 도착한 당일이나 아니면 날을 정확히 잡아서 하게 된다.
그런데 황실에서는 정확한 날짜를 지정하지 않았다. 결국 축하연에 참석하기 위해선 당분간 북경에 머물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뭔가 께름칙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주군!”
그때 밖에서 주홍을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게!”
안으로 들어온 자들은 천괄을 비롯한 왕부 사신위였다.
“상황은?”
“평소와 다름없이 조용합니다.”
주홍의 묻는 말에 갈영상은 나직하니 대답했다. 북경에 도착한 후 삼 일 동안 갈영상은 북경을 살피고 다녔다. 객잔과 주점을 전전했으나 별다른 조짐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넨?”
고개를 끄덕이며 주홍은 천괄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병부상서와 좌우도독은 준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내기를 끌어올려 음파를 차단한 천괄은 짧게 말했다. 갈영상이 북경을 둘러보는 사이 천괄은 은밀하게 동조자를 만나고 왔다.
북경에서 주홍 편에 서 있는 자들은 병부상서 이충원과 오군도독부의 좌우도독 그리고 한림학사 유장순과 삼공의 일인인 영환공 지상이었다.
“오군도독부 산하 이만 정병이 출병대기중입니다.”
“준비가 끝났다고……. 자넨?”
이번엔 주홍의 시선이 수왕신장 유어청에게로 향했다.
“하후장설은 지금 북경을 떠나있습니다. 천붕회가 열리는 숭산에 있다고 합니다.”
“으음!”
일순 얼굴이 굳어진 주홍은 나직한 신음을 뱉었다. 이번 거사를 결심하게된 결정적인 원인이 바로 하후장설 때문이다.
그가 동창제독으로 집권하면서 내관의 수는 이만으로 늘었고, 동창무인도 오만 명이 되었다.
황제를 꼭두각시로 만들고 전권을 휘두르고 있는 자가 바로 하후장설이었다. 황제를 배알할 때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이상하다 여겼었다.
그런데 외유라니.
환영식이 개최되는 것을 알고 있는 그가 북경을 떠났다는 사실이 못내 걸렸다.
“백양신장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반반입니다. 거사를 눈치채고 움직였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하후장설이 무림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냐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아니 무림보다는 민초들을 조정하기 위해서겠지요.”
“천심을 돌려보겠다 이 말인가?”
“그렇습니다, 주공! 말을 못하고 있을 뿐 민심은 황실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어떠한 기폭제만 주어진다면 바로 타오를 수 있는 상태라는 거지요. 하후장설은 무림인을 그 기폭제로 이용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 때문에 움직인 게 아니라는 결론인가?”
“하지만 경계해서 나쁠 건 없겠지요.”
“알았네, 그건 내가 알아서 조치하도록 하지. 그건 그렇고 왕부에서 온 소식은 없는가?”
낮게 한숨을 내쉬며 주홍은 갈영상에게 다시 물었다.
하연의 가슴앓이는 꽤 길었다. 며칠 동안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고 실성한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기가 부지기수였다.
그런 딸을 보면서도 떠날 수밖에 없었다.
딸보다는 대의가 더 중요했기에.
“지금은 어지간히 기운을 차린 모양입니다. 옷 짓는 법을 배우고 음식 만드는 법을 배우느라 하루가 짧다 하더군요.”
“허! 녀석…….”
다행히 가슴앓이를 이기고 어른이 되어 가는 듯해 주홍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백산이란 청년을 데려 와서는 절을 했을 때부터 느낀 점이었지만 딸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어느새 녀석은 성숙한 어른이 된 것이다. 아비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젠 울진 않겠군…….”
창문 너머로 펼쳐진 밤하늘을 내다보며 주홍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랬다. 주홍의 말처럼 더 이상 주하연은 울지 않았다. 그렇다고 큰 소리로 웃지도 않았다.
언제나 엷게 미소 띤 얼굴로 묵묵히 손을 놀렸다. 낮이면 주방에서 음식 만드는 법을 배웠고, 밤이면 방안에서 침모에게 옷 짓는 법을 배웠다.
“홍아, 너 또 딴 짓 하지.”
바느질을 하던 주하연은 살짝 인상을 쓰며 홍아를 나무랐다.
“언니! 벌써 몇 번째인 줄이나 아세요. 이번에 만드는 옷까지 합치면 여섯 벌이에요. 잠 좀 자세요, 그러다 정말 쓰러진다고요.”
수척해진 주하연의 얼굴을 보며 홍아는 안타까운 듯 말했다. 몸을 움직이고, 음식을 입에 대기 시작했지만 주하연은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있다. 아니 잠을 자지 못했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올라치면 이내 가위에 눌린 듯 화들짝 깨어나고 만다. 잠에서 깨어나면 그녀는 잠시 멍한 얼굴로 앉아 있다가 손에 잡히는 일감을 집어든다.
만들어 놓은 옷가지를 다림질하며 밤을 지새다가 아침이면 주방에 들러 음식을 배운다. 그녀가 배우는 음식 또한 거의 만두에 국한되어 있다.
아침 준비가 끝나면 방으로 돌아와 옷을 만들고, 점심때면 또 주방으로 간다.
“무공을 익힌 사람은 쉽게 쓰러지지도 않아. 쓰러지고 싶어도 쓰러지지 못해. 그 사람은 한숨도 자지 않았어, 몇 개월 동안. 난 그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어.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가슴속에서 터지는 그런 웃음 말이야. 내가 천음신맥을 극복하고 웃었을 때 그 웃음처럼. 하지만 그 사람은 그렇게 웃질 않았어. 타인과 어울려 사는 걸 불안해했고, 힘들어했어. 그가 활기차게 움직일 때는 자신을 잊어버릴 때야, 적이라고 생각되는 자들을…….”
주하연은 말을 끊었다. 언제나 가위에 눌리게 한 남자. 그는 온몸에 피를 흘리며 적을 도륙하곤 한다. 적을 몸을 잘라내며 미소를 짓는다. 그의 모습은 몹시 슬퍼 보였다. 두 손에 피를 묻힌 그의 모습이 너무나 아파 보였다.
그를 향해 뛰어가며 소리를 질렀다. 그만 하라고, 더 이상 힘들어하지 말라고 외쳤다.
그러다 그가 연기처럼 사라져 가면, 붙잡으려고 아등바등하다가 결국엔 흥건히 젖은 얼굴로 잠에서 깬다.
언제나 그랬다.
꿈에서나 그의 얼굴을 보고 싶어 잠을 자고, 그가 떠나버리면 잠에서 깨어난다.
“언니!”
“걱정 마. 이젠 울지 않을 거니까. 우는 건 어린애나 하는 짓이지 . 그거나 똑바로 잡아.”
억지미소를 베어 문 주하연은 다시 바느질에 몰두했다.
백산이 돌아올지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에게 더 이상 시체 옷을 입히지 않겠다는 생각과, 맛있는 만두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우리 만두 먹을래?”
“알았어요. 그러다 살찌지. 날이면 날마다 밤참으로 만두를 먹고 있으니.”
인상을 찌푸린 홍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그녀의 동작은 빨랐다. 그나마 만두라도 먹고 있기에 주하연이 버티고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데우지 말고 그냥 가져와.”
“하여간 취향도 특이하게 변했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결코 특이한 게 아니야. 그들은 만두가 따뜻하거나 식었거나 상관 안 해, 그냥 먹는 음식일 뿐이야.”
밖에서 들려오는 홍아의 쫑알거림에 주하연은 낮게 웃었다.
그 시각.
주하연이 있는 남경에서 수 천리 떨어진 숭산에서도 만두를 먹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왜 이리 맛있냐 이거. 갈수록 만두 빚는 실력이 늘어난다. 만두를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고 하던데……. 아니구나, 설련 너는 얼굴이 되니까 상관없겠네.”
만두 하나를 입안으로 가져가며 백산은 바보처럼 웃었다.
“왜 그러세요.”
화들짝 놀란 설련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갑작스레 가슴이 둥둥 뛰었다. 가끔가다 엉뚱한 소리를 해서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딸 운운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기분 좋은 일 있었나 봐요?”
벌렁거리는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머뭇머뭇 입을 뗐다.
딱히 백산의 말 때문은 아니었다. 남경에서 돌아온 다음 백산은 달라져 있었다.
예전엔 농을 척척 뱉어낼 때도 어두운 구석을 숨기지 못했는데 지금 눈앞의 그의 얼굴은 하도 밝아 눈이 부실지경이다.
점점 그에게 빠져드는 것 같아 내심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을 리가 있나. 꽃처럼 어여쁜 미녀랑 같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자꾸 놀리시면……. 저 물 가지고 올게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설련은 주담자를 들고 일어서고 말았다.
“어? 정말인데. 내가 오십 년 만에 여자랑 같이 밥을 먹는 거라고.”
“하여간 대장 넌 분위기가 뭔지를 몰라. 오십 년이란 말을 하고 싶냐?”
주방에서 이편을 살피고 있던 광치가 술 한 통을 들고 백산에게 다가오며 이죽거렸다. 말끝마다 몇 년 만에,를 강조하는 백산의 모습은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 정도는 잘 놀고 있는 거지 뭘 임마. 뭐 들어온 거라도 있어?”
백산은 눈을 흘기며 물었다.
갑작스럽게 끝이 나버린 비무 때문이었다.
“대장 너 혹시 비무 규칙이라도 알고 덤빈 거냐?”
“규칙? 싸움하는 데 얼어죽을 규칙은 무슨. 무조건 패 죽이고 이기면 되는 거지.”
“그러니까 대장 너보고 도토리라고 하는 거야. 비무에 지게되면 다른 문파 아래로 들어가야 하는데 너 같으면 함부로 비무에 응하겠냐?”
“뭔 소리래?”
놀란 얼굴로 백산은 되물었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잡것들이 천붕회를 상대로 내기를 한 것 같아. 물주는 하후장설이고.”
진위여부는 알 수 없지만 비무장 주변으로 은밀하게 퍼져나가고 있는 소문이었다.
“그런데 끝까지 혼자서 할거냐?”
걱정스런 얼굴로 광치는 물었다. 스스로 표적이 되려고 하기에 하는 말이었다. 천붕회가 이기던 지던, 세 세력은 앞으로 백산을 없애기 위해 혈안이 될 것은 분명했다.
“그래야 기어오르지 못할 것 아냐. 내가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일이기도 하고. 그리고 강호를……, 떠야지.”
씁쓸한 얼굴로 백산은 대꾸했다. 마두가 되었던 선인이 되었던 천붕십일천마로 불리는 자신들을 기억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 그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고 싶었고, 그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울러 이 일을 마지막으로 북방으로 갈 참이었다.
“어디로 가려고.”
“이 넓은 세상에 나 하나 숨을 곳 없을까. 그런데 그건 뭐냐?”
싱긋 미소를 지은 백산은 광치의 손에 들린 단지를 가리켰다.
“맨송맨송한 것 같아서 술 가져왔다. 사내자식이 돼 가지고 분위기 잡을 줄을 몰라!”
이내 표정을 바꾼 광치는 술 단지를 탁자 위로 놓으며 눈을 흘겼다. 봉선군주는 떠나면서 백산의 친구가 되어달라고 했다. 그 말의 의미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유몽으로부터 그의 정체를 듣게되자 비로소 알게 되었다.
“분위기? 광치 넌 장가갔냐?”
“빨리도 물어본다. 내가 첫사랑을 떠나보내지만 않았다면 대장 너 만한 아들이 있다.”
“컥!”
막 입안으로 집어넣었던 만두를 삼켜버린 백산은 숨이 막힌 듯 기침을 해댔다.
“천천히 처먹어. 대장 사모가 해준 만두가 아무리 맛있어도 그렇지 씹지도 않고 넘기면 어떡하냐. 자 여기.”
재빨리 술을 따라 백산 앞으로 내밀었다.
“맞아, 만두는 기가 막히게 맛있다.”
아무 생각 없이 술잔을 받아든 백산은 한 입에 꿀꺽 털어 넣었다.
“죽엽청이 이렇게 독했나?”
일순 목이 타는 듯한 기분에 백산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 전전엔 싸구려 술은 없다. 최고급 술만 있지. 그리고 대장 넌 잘 모르겠지만 좋은 술일 수록 독한 법이다.”
백산의 빈 술잔에 다시 술을 채운 광치는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는 백산을 빤히 쳐다보며 웃었다.
“어! 대장 사모도 왔네요. 사모도 한잔 받으십시오.”
주담자를 들고 서 있는 설련을 발견한 광치는 그녀가 자리를 잡기 무섭게 술을 권했다.
“전 술을 전혀 못하는데요.”
“괜찮아, 고급술이니까 상관없을 거야. 그동안 힘들었는데 한잔 해.”
거절하는 설련을 향해 백산이 말했다.
“그래도…….”
“그럼 내가 마시지 뭐.”
“아니에요. 마실게요.”
벌써 혀가 꼬이기 시작한 백산의 모습에, 화들짝 놀란 설련은 재빨리 술잔을 들었다.
“컥! 쿨럭! 쿨럭! 쿨럭!”
“그럼 오붓한 시간 보내십시오.”
심하게 기침을 해대는 설련을 쳐다보며 빙그레 웃던 광치는 재빨리 자리를 떴다.
“이걸 죽엽청이라 하는데 술이 좀 독하다. 이 죽엽청은 말이야, 언제 처음 마셔봤냐 하면, 내가 검은 눈동자가 되어서, 추렴과 소운에게 비도를 날릴 뻔했던 때가 있었어. 그때 살우에게 죽어라 맞았거든! 근데 말이야, 강기가 서린 주먹을 맞았는데도 아프질 않더라. 금강불괴지신에 달한 몸이, 딸꾹! 그때처럼 싫었던 적이 없었다. 그날, 이 놈의 죽엽청을 한 말을 넘게 마셨을 거야. 그리고 그녀들 앞에 무릎을 꿇었어.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말이야. 어 미안, 생각 안 하기로 했는데 나도 모르게. 난 역시 멍청한가 봐.”
어색한 미소를 지은 백산은 술통으로 손을 뻗었다.
“제가 따를게요.”
백산보다 먼저 술통을 잡은 설련은 조심스럽게 술을 따랐다. 조금 전 그가 했던 말 또한 과거다. 아무것도 알아보지 못하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비도를 뿌린다는 흑색지안(黑色之眼) 상태이리라.
“설련 너도 한잔 해.”
빼앗듯 술 단지를 낚아채 가는 백산의 손을 설련은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다 이내 술잔을 들어 그 앞으로 내밀었다.
그는 친구가 필요한 사람이었다. 같이 술을 마셔줄 친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