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화수
·1959년 경남 함안 출생.
·1998년 월간《文學世界》신인상 등단.
·시집 『까치밥』, 『명품 악보』, 『늙은 나무에 묻다』, 『동백아, 눈 열어라』.
대학 교재 『우리말 우리글 바로 쓰기』(공저)
·김달진문학상, 조연현문학상, 창원시문화상(문학 부문) 등 수상.
·현재 경남시인협회 회장, 문예지『시애』편집장, (사)시사랑문화인협의회 영남지회 상임이사
나란히 나란히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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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듯 보이지 않고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허공이다
얼음장 아래 뜨거운 샘물도 없다
아무도 봄을 말하지 않는다
왼쪽 손가락에서 오른쪽 엄지로 매화가
엉금엉금 기어간다
오른팔에서 왼쪽 팔뚝으로 산수유가
아장아장 걸어간다
그동안 쌓인 오해 한 줄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 나란히 손잡고 서다
자화상
서리가 재빠르게 머리 위에 앉았다
촘촘한 머리빗이 쉽게 지나간다
세세연년 바람이 살갗을 세차게 때려
견디지 못한 안면에 구김살 그득하다
무르익는 나이의 가을볕은
얼굴을 향해 쏟아부었다
얼굴만 검붉게 탔다
미성숙한 홍안이 부끄럽다
코는 오뚝해서 다락집의 바람 선선하고
단춧구멍 같은 눈은 시야가 좁아
더러운 꼴을 볼 수가 없다
귀퉁이에 달랑달랑 붙은 작은 귀
말 같지 않은 소리 들을 수 없다
입술은 언제나 탱글탱글해서
고파도 고프다고 말하지 않는다
얼굴은 거짓말을 못하는데
거짓말만 느는 주름 뒤에
숨은 얼굴이 나에게 말했다
얼굴은 자연이다
세월이 덧칠한 그림이다
걸레
더러운 곳만 찾아다닙니다
구석진 먼지를 마시며
칼칼한 머리카락 삼키며
쉰내 나는 찌끼도 향기롭게 안아줍니다
꾀죄죄하여 땟국이 흐를라치면
물에 담겨 숨 쉴 틈 없이 짓눌리고
비눗물까지 먹게 됩니다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고 합니다
당신은 한 번이라도 깨끗하게 빨려보았는지
묻고 싶습니다
피곤하다는 가벼운 넋두리에도
사람들은 툭하면
걸레를 씹어 먹었느냐고 나무랍니다
걸레짝은 어디에 쓰냐고도 합니다
방을 훔치라고 하네요
단 한 번도 남의 물건을 탐낸 적이 없습니다
젖은 몸으로 방바닥을 깁니다
가끔 보송보송한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하루 일을 마치고 몸을 헹군 뒤
걸레통에 담겨 있는 시간이 가장 행복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노닥노닥 기워도 마누라 장옷이랍니다
복토
산에 들에
꽃과 잎이 땅심에 욱시글득시글
새파랗게 돋았다
새빨갛게 피었다
좁은 땅 흙은 같다, 다만
동쪽은 젖은 흙
길 건너
서쪽은 마른 흙이다
삽을 들어라
젖은 흙 한 삽 떠서
마른 흙을 덮고 마른 흙
한 삽 떠서 젖은 흙을 덮자
갈아엎어 땅심을 돋우자
민심의 붓을 들어라
파란색 빨간색 얼씨구 얼 섞어
보랏빛 땅심 쾌지나칭칭
보라색 무궁화 삼천리강산
금강초롱꽃 덩달아 웃는다
*욱시글득시글: 여럿이 한데 모여 몹시 어지럽게 들끓는 모양, 욱실득실\
열다
동으로 해를 열면
쏜살같이 파고드는
뜨거운 사랑
동백아, 눈을 열어라
한겨울 눈 맞춤에 기뻐라
서으로 노을을 열면
조곤조곤 다가오는
붉디붉은 그리움
나비야, 나래를 저어라
해넘이에 젊은 날 슬퍼라
남으로 구름을 열면
따사로이 내려앉은
정겨운 햇살
산새야, 춤을 추어라
훨훨 솟아오르는 춤을 추어라
북으로 달을 열면
물밀듯 밀려오는
싸늘한 어둠
바람아, 귀를 닫아라
얼얼하게 살아온 세월이 시려라
불판板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달구어지고 달궈져
살과 뼈를 지지는 형벌을
온몸으로 받아내었다
뜨거운 심장을 두 눈 부릅뜨고
살아있었던 모든 것들의 멸각滅却을
지켜보아야 하는 차디찬 검은 눈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평생
결 따라 다루는 육질의 나무를 가르고
육향의 계곡 육즙의 핏물 가득한 숲
듬뿍이 살점이란 살점을
닥치는 대로 안아내었다
누군가의 살과 피를 위한
생살을 뜨겁게 달구어내는 성육聖肉의 시간
살아있던 모든 것이 죽은 후, 살점이란
결코 혼魂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증명해내고야 마는
불타는 육향과 육즙의 시간인데
강철이 아니라 무른 쇠라고
눈물 쇠라고 외치는 소리
바람의 무게만 하다
아우라지 사랑
가만히 보아도 푸른 산
뒤돌아보아도 푸른 산
첩첩 산산에 후끈한 사랑
철 이른 장마 물살에 휩쓸린다
사랑은 우당탕탕 우루루 쾅쾅
눈빛 마주할 틈도 없이 떠내려간다
행여나 돌다리에 걸릴까
뚫어지게 쳐다보는 아우라지 처녀
혹여 징검다리에 걸릴까
한시도 눈 못 떼는 아우라지 총각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물
새까만 총각 옷고름 적신다
어느새 검정 고무신 가득 고인다
가만히 보아도 감자꽃 총각
뒤돌아보아도 찔레꽃 처녀
꽃무덤
상복 공원 장례식장 냇가에
국화꽃이 꽃의 주검을
슬퍼하는 꽃무덤을 아시나요
헌화한 하얀 넋이
나날이 까맣게 뭉개집니다
네 살배기 하늘이와
예순아홉 영순 할머니가 손잡고 건넌 도랑
검버섯 얼굴에 치매가 깜부기처럼 까만
홀씨 되어 훌훌 날아간
민효일 어르신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나요
지역 문학 땐땐하게 다지자던 대학 동기
마지막 인사도 없이 훌쩍 가버린 안성길 평론가
두 발로 걸어 들어간 동네병원 응급실에서
마지막 추석을 보낸 이문재 선생
폐암 말기 친병親病 날짜 잡아
히어리 피던 날 지리산으로 떠난 배종환 시인
극락정토 향기로웠을 국화꽃이
오늘도 까맣게 뭉개집니다
모래섬
지구의 한가운데 선을 긋는다
왼쪽이 좋은 사람은 왼편에 서고
오른쪽이 좋은 사람은 오른편에 선다
선은 점선인 까닭에 모래알처럼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한다
밤낮없이 모래섬에 쓸려 다닌다
누군가 줄을 당기자마자 선이 흔들린다
곧은 잣대가 처음부터 부러진 탓이다
길이를 모르는 줄자에 허청이며 출렁인다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선다
말이 안 되는 말인데
모래섬에서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
연鳶
맞서야 하는 운명이다, 바람에
위기에 온몸으로 나풀거린다
바람이 거칠어도
바람이 아무리 미워도
머리는 꼿꼿하게 세워야 한다
꼬리를 치켜들면 추락이다
연줄이 탱탱하게 버틸수록
어린 심장은 쫄깃쫄깃
지상에 없는 바람 맛이다
얼레를 빠르게 감는다
연이 급상승한다
얼레를 천천히 푼다
꼬리를 흔들며 내려앉는다
방패연 뚫린 구멍 옆으로
송액영복送厄迎福 쓰지 않고
민주공화국民主共和國을 쓴다
얼레의 연실을 있는 대로 푼다
벌이줄이 숨차도록 툭툭 당긴다
가장 높이 올랐을 때 싹둑 자른다
민주공화국을 보듬고 저 멀리
떠가는 연
뚫어져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