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104년 05월 08일 수요공부방<법마상전급 십계문 7,8>.hwp
원기 104년 05월 08일 수요마음공부방
<법마상전급 십계문 7,8>
설법 : 박세훈 교무님
타이핑 : 박준성
◎ 법마 상전급(法魔相戰級) 십계문
1. 아만심(我慢心)을 내지 말며, 2. 두 아내를 거느리지 말며, 3. 연고 없이 사육(四肉)을 먹지 말며, 4. 나태(懶怠)하지 말며, 5. 한 입으로 두 말 하지 말며, 6. 망녕된 말을 하지 말며, 7. 시기심(猜忌心)을 내지 말며, 8. 탐심(貪心)을 내지 말며, 9. 진심(瞋心)을 내지 말며, 10. 치심(痴心)을 내지 말라. |
[7조]
법마상전급 7,8조 시작하겠습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대종사님의 본의를 잘 전달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준비할 때 가장 먼저 보는 것이 대종사님 당대의 자료입니다. 그중 하나가 회보입니다. 원불교 초기에 월간으로 발행하던 정기간행물로, 대종사님 당대 제자들의 감상과 대종사님의 법설을 잘 기록해놓고 있습니다. 회보 48호를 보면 “시기심이라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과 자기 관계자가 제 삼자를 사랑할 때 보기도 싫어하고 듣기도 싫어하는 것을 이름이니 이 마음이 심해지면 공연히 그 사람이 미운 생각이 나며 어느 방면으로든지 그 사람을 깎아 내리고 잘못한 점을 발로(發露)시키려 하는 마음까지 나는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 회보는 정산종사님의 동생이신 주산님이 많이 기록 하셨습니다. 범계의 기준에 대해서는 우리 교도님들이 너무 빡빡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시기심이 일어나는 것은 보산님도 말씀하셨죠? 나는 마음과 내는 마음이 다르다고요. 회보에는 범계에 기준에 대해 어떠한 경우 잠깐 그러한 마음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즉시 제거하면 범계가 아니다. 즉 시기심은 인간의 본능이죠. 시기심이 안 나면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거나 도인이라고 보산님이 말씀하셨더군요. 시기심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이죠. 그러한 마음이 일어난다 해도 즉시 제거하면 범계가 아닌데, 그 시기심을 마음 가운데 머물러두고 그 마음의 지배를 받는 다거나, 그 시기심 때문에 말을 실수하거나 행동을 실수하게 되면 범계가 된다. 시기심이 일어난다고 해서 범계가 아니라, 시기심으로 인해서 내 마음이 시기심에 오래 머물러 있거나 그로 인해서 은혜롭지 못한 말과 행동을 했을 때 범계로 보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대종사님 당대 때 회보에 밝혔던 내용입니다. 시기심에 대해서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제 가족은 지금 충북 진천에 살고 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서울 생활을 했지만, 제가 올해 여기 발령 받아 올 줄 잘 몰라서, 서울에서 살게 될 줄 몰랐습니다. 가끔 서울에 살고 있는 동창 교무나 후배 교무들을 만나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서울보다 시골이 더 좋다. 시골이 공기도 좋고 한가해서 그렇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러한 말이 별다른 말이 아닌 것도 같지만 어찌 보면 시기심에 사로잡힌 말일수도 있습니다. 유명한 철학자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르상티망’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나요? 약한 입장에 있는 사람이 강한 자에게 품는 시기심을 말합니다. 르상티망에 대한 예가 이솝우화 여우와 신 포도입니다. 어느 날, 여우가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포도를 따려고 애써도 손이 닿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우는 “이 포도는 엄청 신게 분명해 이걸 누가 먹겠어”라고 화를 내며 가버립니다. 여우는 손이 닿지 않는 포도에 대한 분한 마음을 ‘저 포도는 엄청 시다’라고 생각을 바꿈으로써 풉니다. 니체는 바로 이점을 문제로 삼았습니다. 르상티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열등감을 노력이나 도전으로 해소하려 하지 않습니다. 대신 열등감의 원천인 ‘강한 타자’를 부정하며 자신을 긍정하려 합니다. 내가 부족해서 못하는 것을 그 부족함을 노력으로 채워서 메꾸려하지 않고 나의 열등감을 느끼게 해주는 사물이나 사람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럼 내가 변화하지 않아도 되고 편하죠. 그 사람이 문제고, 그 포도가 신 것이죠. 내가 포도를 딸만큼 힘이 부족하고 점프를 못해서가 아니라 포도가 시어서 그렇다. 이것이 르상티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저의 시골이 더 좋아 라는 발언 속에는 ‘서울의 비싼 아파트에 사는 사람은 돈이 많고 성공한 사람이다’라는 가치관을 뒤엎고 싶은 ‘르상티망’이 숨어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나는 조용한 시골을 좋아한다” 라고만 이야기 했으면 되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서울보다 시골이 더 좋다고 비교했죠. 서울에서 사는 것이 좋다는 가치관을 뒤엎으면서 나의 삶의 모습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절대적으로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비교를 통해서, 비교되는 나한테 열등감을 주는 그 원천을 부정하면서 긍정하는 것이죠. 이것이 요즘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책에 나와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더 재미있는 것이 있습니다. 니체는 종교를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성경에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산당 선언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노동자는 자본가보다 뛰어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이 전형적인 르상티망이다. 그러면서 이 공산당과 관련된 책과 성경이 많이 팔렸잖아요. 사람들 마음속에 시기심이 많았기 때문에 많이 팔리지 않았을까 생각하는 거죠.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그 말마저도 없었으면 가난한 사람이 어디서 위안을 받겠어요. 지금 내가 가난한데,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니까 세상에는 가난한 사람이 더 많잖아요? 마음에 위안이 되는 것입니다. 노동자는 자본가보다 뛰어나다고 하니까 마음에 위안이 되죠. 그것이 어떻게 보면 그 밑바탕에 가치관을 뒤엎는 거죠. 가난한 사람이 부자보다 더 행복하다. 이것을 가치역전이라고 합니다. 내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성격의 말을 믿고 싶은 것이죠. 그렇게 따진다면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물질적인 가치 보다 정신적인 가치가 중요하다’라는 이야기가 정말로 이것을 깨우친 사람이 아니고서는 내가 안고 있는 현실을 위로받기 위해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르상티망의 함정입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는 시기심을 세밀하게 보지 못하면 내가 시기심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은 아까와 같이 열등감에 의해서 가치가 전도되어서 나를 위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조금 더 법마상전급은 마음을 세밀하게 보아야하기 때문에 한 번 더 바라봐야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기심과 관련된 예화가 있는 책이 있었습니다. K 법학전문대학원 김 모 교수의 인터뷰와 책을 보면 시기심에 대한 재미있는 경험담을 이야기 해주고 있습니다.
김 모교수가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사법연수원에 들어가서 사람들을 보니 묘한 분위기가 감지되어 답답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Y대 나온 사람들은 겉으로 모교에 대해 자부심을 얘기하지만 S대 출신들을 보면 열등감을 느끼고, S대 출신들은 자기들 안에서도 4학년 때 시험 붙은 천재들에 대해서 심한 열등감을 느낍니다. 나아가 그 4학년 때 붙은 사람들은 판사가 된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 판사가 된 사람들은 서울로 판사 발령받은 사람에 대한 열등감, 서울에 발령받은 사람은 서울 본원에 발령받은 사람에 대한 열등감, 서울 본원에 발령받은 사람들은 1등으로 발령받은 사람에 대한 열등감을 느끼고 있더랍니다. 열등감의 사슬이 끊임없이 있는 것이죠. 못하는 사람은 못하는 사람대로, 잘하는 사람은 잘하는 사람대로 그 열등감의 고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입니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지위는 상대적이기 때문이죠. 결국에는 상대심, 비교심에서 자유로워져야 사람이 편해지는데, 의외로 세상에서 잘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상대심, 열등감, 비교심 속에서 살아갑니다. 한시도 쉬지 않고 비교하고 살아가고 있죠? 재산이 있는 이와 없는 이, 학식을 가진 이와 가지지 않는 이, 인물이 있는 이와 없는 이, 지위를 가진 이와 가지지 않는 이를 비교를 합니다. 그래서 나보다 잘나면 시기심이 나고, 나보다 못난 사람을 보면 아만심이 나는 것입니다. 항상 그 마음이 끊임없이 요동을 치고 있죠. 그래서 대산종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보다 승(勝)한 사람에게 시기하고 질투하지 말고 합심 합력하라. 그러면 나도 그와 같아진다. 나보다 잘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하는 일에 마음을 합하고 도와주면 나도 그와 결국엔 같아진다, 그러나 상대하면 본인만 스스로 손해 볼 뿐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수희공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한 일을 내가 잘한 것처럼,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나의 좋은 일처럼 같이 따라서 좋아하고 기뻐하는 것인데, 이게 정말 쉽지 않습니다. 수희공덕이라는 것이 제가 보기엔 시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방법입니다.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의식적으로 계속 기뻐해줘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나보다 월등한 사람이 잘되는 것은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대통령이 되셔서 시기심이 나나요? 시기심이라는 것은 비슷한 사람에게서 나거든요. 나랑 비슷했는데 동창회 가보면 잘되어있거나, 쟤는 심지어 나보다 못했는데 잘되어있을 때 나오기 때문에 저는 수희공덕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보산님 설교를 보니까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군인이 장교로 진급할 때 투서가 들어옵니다. 장교가 진급할 때 여러 가지 평판도 보고 그 사람에 대해서 최종 조사 작업을 들어가는데, 장교로 진급할 때 가장 많은 투서가 들어오는 것이 자신의 동기들에게서 투서가 들어온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그럴 수 있습니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시기심을 느끼고, 자기랑 비슷한 사람이 나를 시기질투하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도 그럴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비슷한 사람들한테 시기심, 질투심을 느끼지 자기보다 한참 낮거나 높은 사람한테는 느껴지지가 않거든요. 그래서 이 시기심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어쨌든 간에 의식적으로라도 수희공덕을 머릿속에 넣고 무조건 다른 사람이 잘되면 정말로 진심으로 기뻐해줘야 합니다. 제가 보기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일원상의 진리를 깨쳐야합니다. 일원상의 진리는 둘이 아니죠. 그리고 시기심이 난다는 것은 상대세계에 머물러 있는 것이죠. 나와 저 사람이 엄연히 구분되어 있는 것이고 인과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성공한 것이 내가 보기에는 쟤는 별로 잘나지도 않고 노력도 안했는데 성공한 것 같아요. 편법을 쓴 것 같아요. 이런 느낌이 드는 거죠. 그러니까 시기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나랑 비슷한 사람이 성공했다는 것은, 인과로 봤을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으니까 성공을 한 거죠. 그래서 시기심이 일어났다는 것은 내가 일원상의 진리, 하나의 진리, 절대의 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닌 상대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고, 인과를 믿지 않는 것이죠. 내가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인 것처럼, 내가하면 노력한 것이고 남이 하면 뭔가 정당한 방법이 아닌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시기심이 날 때 내가 상대세계에 머물러 잇는지 돌아보고 내가 인과를 얼마나 여실히 믿고 있는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8조]
두 번째는 법마상전급 8조 탐심을 내지 말며 입니다. 캘리포니아에서 많은 광부들과 승객들을 태우고 출항한 증기선이 미시시피 강에 이르러 갑작스럽게 발생한 기관 고장으로 파선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갑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승객들은 앞 다투어 구명정에 올라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구명정의 수가 워낙 부족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승객들은 할 수 없이 옷을 벗어 던지고 헤엄을 쳐서 육지에 가까스로 다다랐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이 배를 떠났을 때 또 한 사람이 갑판 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더니 부러진 나무 조각을 부여잡고 강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물위로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그의 시체를 건져내었더니 광부들의 금덩어리와 귀중품들이 나왔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살려고 도망칠 때에도 욕심이 일어나서 승객들의 소지품을 뒤져서 귀중품과 금덩이를 훔친 것입니다. 그러니 그 무게 때문에 가라앉아버렸습니다. 이것이 기사화 되어 신문에 나왔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의 욕심이 엄청나게 힘이 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사를 초월하게 만들었습니다. 죽음의 위기에서조차 그 욕심이 그 순간 다른 사람 것을 가져가려고 하잖아요. 이렇게 본다면 탐심이라는 것은 상당히 힘이 강력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탐심이 강력하기 때문에 우리는 탐심으로 고생을 많이 합니다. 탐심이 없으면 고생을 안 할 텐데 탐심이 있어서 돈도 있어야하고, 사랑도 있어야 하고, 이루어지면 좋고, 이루어지지 않을까 걱정하고, 이루어진 다음엔 깨어질까 걱정이고, 세상 사람들이 여러 가지 탐심으로 고생을 합니다. 탐심이라는 것은 시기심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이죠. 욕심이라는 것이 한자로 두 가지가 있습니다. 탐낼 욕자와 하고자할 욕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탐낼 욕자입니다. 하고자하는 욕구가 없으면 무기력에 빠지죠. 그래서 원불교에서 말하는 탐심을 내지 말며는, 욕심을 중도에 맞게 쓰지 않는 것입니다. 과하게 욕심을 쓰는 것. 과욕, 과식, 과음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종사님도 정전 교의품 사연사조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탐욕이라 함은 모든 일을 상도에 벗어나서 과히 취함을 이름이다.” 또한 한 가지 일을 하면서 공연히 여러 방면으로 욕심을 발하여 이것저것 보는 대로 듣는 대로 하고 싶어 하는 것. 무관사에 동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하고 싶고, 저것도 하고 싶죠. 아까같이 일하면서, 과제하면서 동아리 활동까지 하려면 내 능력으로 봐서는 동아리는 하나정도만 하면 되는데 하나 더 하고 싶고 그렇죠. 보통 1학년 분들은 동아리 서너 개씩도 하죠? 그러다 나중에 체력이 힘들어져서 줄여 가는데 이렇게 한 가지를 하면서 공연히 여러 방면으로 욕심이 발해서 내가 보는 대로 듣는 대로 그것이 다 욕심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탐심을 법마상전급에 두고 대종사님께서 강조하셨던 것은, 탐심이라는 것이 모든 죄의 근본이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악의 근본이 된다. 탐심이 모든 악과, 모든 죄, 모든 번뇌의 뿌리가 됩니다. 법강항마위가 되어도 작은 탐심으로 인해서 무너질 수 있다고도 하셨습니다. 탐심이 일어나면 진심이 일어나고 진심이 일어나면 치심이 일어납니다. 탐심이 시작점입니다. 내가 뭔가를 가지고 싶은데 그게 뜻대로 안돼요. 내가 어떤 사람과 잘되고 싶은데 뜻대로 안됩니다. 그러면 화가 나죠. 진심이라는 것은 내 뜻에 거스를 때 나는 것이거든요. 욕심이라는 것은 항상 넘치죠. 부족하지 않아요. 욕심을 다 만족시키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그러면 진심이 나옵니다. 진심이 나오면 감정적이게 됩니다. 그러면 가리게 됩니다. 그러면 치심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욕심이 일어나면 진심이 일어나고 치심이 일어납니다. 욕심이 모든 삼독의 시작이 되고 뿌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종사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보통급, 특신급, 법마상전급 계문을 마치고 법강항마위가 되면 무엇을 하라고 하셨나요? 심계를 두라고 하셨습니다. 삼독심, 탐심, 진심, 치심은 이 심계와 삼십 계문의 중간다리입니다. 삼독심부터 심계로 들어갑니다. 심계의 시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세밀한 공부가 삼독심에서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 욕심이라는 것을 한번 생각해보면 우리가 물질적인 욕심만 욕심이라고 생각하는데, 공부를하다보면 수도인 으로서의 욕심이 많이 생길수도 있습니다. 청년법회에서 수행 문답을 할 때 잘 안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것도 사실 욕심입니다. 좌선 한두 달 해보고 잘 안된다고 하고, 이것 조금 해봤는데 잘 안 된다 하는 것은 수행상의 욕심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대종사님께서는 욕속심, 속히 이루고자 하는 마음. 그래서 이소성대의 원칙이 천리인데, 모든 것은 작은 것에서부터 커진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 천리인데, 우리가 살다보면 물질적인 것에 욕심이 나기도 하지만 공부를 하면서도 욕심이 나는 것이죠. 빨리 하고 싶고. 저와 관련해서는 제가 탐심과 관련해서 조금 착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탐심이 별로 없는 줄 알았습니다. 살면서 뭔가 갖고싶거나 큰 욕심이 많이 없었는데, 제가 보니까 탐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욕심 경계가 제게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성직자로 살아가다 보니까 욕심경계가 별로 생기지 않습니다. 제게 투자하라는 사람도 없고 돈 빌려달라는 사람도 없고, 이 안에서 살다보니까 뭐가 좋고 나쁜지 별로 시간이 없으니까 쇼핑한다거나 할 시간이 없죠. 그래서 저는 탐심이 없던 것이 아니라 탐심을 일으킬만한 경계를 별로 만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경계가 생겼던 적이 몇 번 있긴 합니다. 제가 세종교당에서 근무할 때 회의를 하거나, 식당을 가거나, 누구를 만나거나 빠짐없이 등장하던 주제가 있습니다. 부동산 이야기입니다. 세종이 한참 부동산 광풍이 불어서 제가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종교당에서 누구를 만나던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집을 사야한다, 집을 사서 집값이 올랐다. 처음에는 그냥 저랑은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집을 사서 집값이 올랐다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결혼을 했으니 집을 하나 마련해야하는 시기도 오고해서 마음이 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저만 동한 게 아니었나 봅니다. 저와 같이 살던 후배 교무도 같이 동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보니까 둘이 같은 사이트를 보고 있었습니다. 부동산 사이트를요. 그다음부터 저희가 부동산에 대해 사리연구를 해서 시간이 나면 아파트 분양 사무실도 가보고, 청약 점수가 몇 점인지도 알아보고, 후배 교무도 결혼을 앞두고 있었고 저는 가정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을 알아봤는데 결국 둘 다 청약을 들었습니다. 그때 청약률이 300대1 200대1 그랬거든요. 그래서 결국은 안됐습니다. 그렇게 저희가 부동산에 대한 집을 사서 재산을 증식해야겠다는 욕심이 들었던 것이 일주일 정도 욕심경계가 광풍같이 지나갔습니다. 그러고 나서 후배 교무와 웃으면서 공부 많이 했다고 끝냈습니다. 근데 아직도 그 부동산에서 연락이 옵니다 문자도 오고. 그런데 제가 생각해보니 탐욕이 생기니까 탐착이 생깁니다. 탐욕이 생기니 아파트들이 보이는데 제가 살고 싶은 아파트가 보여요, 아파트 값이 오를 것 같아. 그 아파트에 마음이 착이 됩니다. 그리고 나니까 탐착이 되니 마음이 가립니다. 되게 분양가가 비쌌습니다. 당첨이 되도 제가 살수가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돈의 세배정도 되는? 그러면 대출을 많이 받아야하는데, 제가 탐심이 생기니까 탐착이 되니까 이 아파트를 얻어야겠다. 그래서 가립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재산이 얼마고, 제가 세종아파트를 얻으면 저희 정토랑 가족은 세종으로 이사를 와야 하는데 정토가 일하는 학교가 사립학교라 이사 올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한 시간 반, 두 시간씩 출퇴근을 해야 하는데 이런 것도 다 놓고 아파트를 분양받아야겠다는 생각에 꽂히니까 다 안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가진 돈이 얼마고, 그 아파트가 당첨되면 내가 살 수 있는 상황인지. 그 광풍이 한 일주일 정도 지나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차리고 보니까 주변에 아파트 투자했다가 손해 봤다는 사람도 많았다는 이야기도 들리고 내가 지금 투자할 수 있는 돈이 얼마인지도 보이고, 내가 그 아파트를 청약 받았을 때 우리 가족들이 이사 갈 수 있는 것인지도 보이더라고요. 그때 탐심에서 벗어난 것이죠. 탐착에서 벗어났고 가려서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것이죠. 탐심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착심이 되고, 가리게 됩니다. 가리게 되니까 제대로 판단인 안 되는 것이죠. 그래서 욕심이 생기면 판단이 제대로 안섭니다. 그래서 실패를 하는 것입니다. 사업도 실패하고. 무리하게 확장했을 때, 욕심이 생기면 다른 사람이 보기엔 다 실패할 것 같은데 성공할 것처럼 보여요. 욕심 한번 들어가면 누구의 이야기도 안 들어옵니다. 그 당시에 제가 탐심이 생겼을 때 브레이크가 바로 작동이 안됐죠. 그때만약에 내가 청약이 되어서 돈을 벌었으면 좋았을까? 더 빠졌을 것 같습니다. 그 투자로 조금이라도 이익을 보았으면 그 재미에 빠져서 안암교당에 오지 않고 세종교당에 있으면서 투자, 분양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오히려 안 된 게 더 잘됐다. 됐으면 그 재미에 계속 빠져있지 않았을까. 그 다음부터 제가 탐심과 욕심 경계 앞에 조금 겸손해졌습니다. 나도 충분히 흔들릴 수 있고 조심해야한다. 우리는 보통 내 마음이 고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우리가 염불과 좌선을 하면 엄청난 망념들이 오고가죠. 불경을 보면 1찰나 간에 9백 생멸을 한다고 합니다. 1찰나라는 것은 0.013초입니다. 그 순간에 9백번의 생각이 오고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고요한 마음이 되었을 때 비로소 나도 번뇌 망상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 당시 세종에서 욕심경계를 지나고 나니까 그래도 일주일 만에 정신을 차렸잖아요. 그래도 평소에 염불하고 좌선하고 수행했던 것이 있기 때문에 브레이크가 계속 분양사무실에 머물러있지 않고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조금이라도 계속 좌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공부를 했기 때문에 돌아왔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수행이 없는 사람은 한번 욕심 경계에 흔들리면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습니다. 패가망신을 해야 끝납니다. 스스로 못 멈추는 폭주기관차입니다. 가지고 있는 돈을 다 털어먹거나 도박을 하면 다른 사람 돈까지 빌려서 해야 끝이 납니다. 욕심의 불이 꺼지지 않습니다. 끝내는 패가망신이나 악도윤회를 하게 됩니다. 여기 계신 일반 교도님이나 청년 교도들이 수양회 올리잖아요. 오늘 너무 힘들어서 1분밖에 선을 못했습니다. 오늘 힘들어서 법문 조금밖에 못 읽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선을 10분간 했지만 망념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고 있는 것이 이 욕심 경계를 만났을 때 브레이크가 됩니다. 여러분들이 조금 조금하는 수행이 뭐가 도움이 되나 하지만 그것이 욕심 경계를 만났을 때 나를 멈출 수 있는 브레이크입니다. 욕심 경계를 만나서 내가 설사 그 탐심이 일어났어도 다시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회복력을 주는 그 힘이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선을 하고, 염불을 하고, 경전을 읽고 마음을 챙기는 것. 그것은 내가 앞으로 무수히 많은 욕심 경계를 만날 겁니다. 그때마다 나를 멈출 수 있게 하는 브레이크고, 내가 잠깐 마음이 쏠리게 되더라도 다시 원래의 마음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하는 회복력을 주는 힘이 되니까 그것을 명심하시고, 하루에 조금씩이라도 수양을 해서 욕심경계를 만나더라도 빨리빨리 돌아오고 브레이크가 잘 작동하시는 수행인들, 공부인들 되시기를 부탁드리면서 마치겠습니다.
Q. 류서현 교우님
설교 말씀 중에 부동산을 예시로 들어주셨는데, 저는 과학적인 면에 대해서 연마를 한 것이고, 그 부분에 있어서 그 능력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과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욕심으로서 예시를 들어주셔서 그 경계를 어떻게 판단해야하는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A.
왜 제가 욕심으로 예시를 들었냐면, 돈이 3억 있는 사람이 4억짜리 집을 분양받는 것은 어느 정도 욕심이 아니라 갚을 능력이 되죠. 그런데 1억 있는 사람이 4억짜리 집을 분양받는 것은 욕심이죠. 시세차익을 노린 것이죠. 그 당시 저는 자본금이 많이 없었기 때문에 시세 차익을 노리는 마음이 더 컸지 이것을 거주목적이나 이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욕심이 많이 들어갔죠. 뭔가 단기간에 이득을 보고 싶은, 세종에 계속 살고 있는데 주변에서 계속 부동산에 대한 이야기를 하니까, 그렇게 투자하기 좋은 곳에 살면서도 투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꼭 필요하지 않는데 한 것이죠. 저한테는 과도한 욕심이었죠. 다른 분들 분양받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과도한 빚을 안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죠. 투자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고, 자기의 분수에 맞게 하라는 이야기입니다.
Q. 양도인 교우님
자기의 분수가 어느 정도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입생이 그렇게 동아리를 많이 드는 이유는 자기가 얼마나 소화할 수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많이 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현재 분수에 넘치게 하고 있는지 안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수행을 통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A.
수행을 통해서 알 수 있죠. 그래서 수행이 잘된 사람은 자기의 능력이 잘 보여서 자기의 분수와 근기와 이런 것들을 알기 때문에 그것에 맞게 하는데 보통은 쉽지 않죠. 첫 번째는 몸이 힘들고나서 알게 됩니다. 돈을 탕진하고 나서 알게 되고, 사람 관계가 깨지고 나서 알게 되죠. 그래도 못하면 감옥에 가죠. 대부분 감옥에 간 분들이 탐욕 때문이라 할 수는 없지만, 탐욕이 절제가 안돼서 그런 거잖아요? 처음엔 자기가 제제하고, 타인이 제제하고, 법이 제제하게 되겠죠. 구속을 받게 되는 거죠. 바로 알기에는 쉽지 않죠. 자기의 능력치를 알기 쉽지 않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어떤 사람은 그것을 3개월 만에 알아차리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3~4학년 때까지도 동아리 활동을 할 수도 있는 거니까 얼마나 빨리 알아차리느냐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Q. 이도심 교우님
교무님께서 아까 시기심을 내지 말며에 대한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수희공덕과 일원상의 진리를 깨치는 것이 시기심을 내지 않는 방법이라고 하셨는데 제가 느낀 것이 공부를 잘하거나 어떤 것을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인과를 알면 쉽게 시기심을 내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문득 생각이 든 것이 그 사람들이 노력한 인들을 알게 되면 그런 결과를 받게 된다는 것들을 알게 되는데 어쩌면 시기심이 무지해서 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A.
그런 게 있습니다. 오디션 프로를 보면 그런 것 같습니다. 연예인, 가수가 되는 것이 화려한 면만 보였다가 오디션 프로를 보면서 힘들게 생존하는 것을 보여주잖아요? 그것을 보면서 청소년들이 상당히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된다는 것을 보여주니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인과적 측면을 본다면 수긍이 더 빠르겠죠. 하지만 잘 드러나지 않죠. 드러나도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잘났다고 하면 좋아하는데 형제지간에는 형이 잘났다, 동생이 잘났다 하면 수긍이 잘 안됩니다. 인과를 알아도 안 되는 경우도 있죠. 명예욕같은게 발동하면 안 될 수도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