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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기 106년 5월 12일 수요마음공부방 <사리연구>

작성자윤성권|작성시간21.05.24|조회수251 목록 댓글 1

 

[수요마음공부방] 정전(正典) 제2 교의편(敎義編) 제4장 삼학 (三學) 제2절 사리연구(事理硏究)

설교 : 박세훈 교무님

일시 : 원기 106년 05월 12일

타이핑 : 윤성권

 

 

오늘 사리연구에 대해서 공부해보겠습니다. 이번주는 사리연구 요지, 다음은 사리연구 목적과 결과에 대해서 공부하겠습니다. 사리연구 요지의 핵심은 대소유무, 시비이해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요. 선진님들에 따르면 우주의 원리가 대소유무고, 우리 마음의 원리가 대소유무다. 지금 우리는 대소유무와 시비이해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직장에서와 같이). 종법사님께서 대소유무와 시비이해 이치를 모른다는 것은 지금 서울에서 부산을 가야하는데 인천으로 가는 것과 같고, 또 다시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데 눈을 감고 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어요.

 

‘대(大)’라고 함은 우주만유의 본체를 이름인데, 대는 언어로 갈(설명할,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본체라 하는 것은 우주만유의 전체를 의미합니다. 본체라고 하면 우주가 있고, 우주 깊은 곳에 또 다른 본체가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주 자체가 본체입니다(본원이고). 본체라 하는 것은 우주 만유의 전체를 의미합니다. 근데 “내가 지금 공부하는 이 순간 본체라고 뭔가 하나를 상상하고 있다. 내 마음이 본원이 있는데 내 마음 본원 자리를 뭔가 또 하나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그것은 이미 잘못된 생각이에요. 첫 번째 본체라는 경지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역대 종법사님께서 ‘대’에 대해서 말씀하실 때 전체를 하나로 보는 것이란 말을 많이 강조하셨어요. 전체를 하나로 보는 것. 한 몸, 한 기운. 여기서 실제로 ‘대’자리를 체험 해볼게요. 준성교우 앞에 경주교우가 있잖아요. ‘대’자리에서 하나로 보여요? 그럼 경주 때리면 준성 아파요? 경주 밥 안먹으면 준성 배고파요? ‘대’자리라는 것은 전체를 하나로 보는 건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하나로 보이느냐. 하나로 보이는게 아니라 하나인 거에요. 근데 또 하나라는 말에 속잖아요. 하나라고 하면 뭔가 얼굴도 같아야 하고, 나이도 같아야 되고, 이렇게 끊임없이 우리가 만들어온 언어, 학습 같은 것에 속거든요. 하나라 하면 또 하나의 분별이 일어나서 하나를 찾게 되요. 그게 오히려 하나를 방해하잖아요. 준성한테 경주와 하나라고 묻기 전에 하나였어요. 왜냐하면 경주하고 나하고 둘이란 생각을 안 하고 있었잖아요. 그게 하나 아니에요? 근데 내가 하나라고 물었을 때 하나가 안 됐잖아요? 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적적성성한 그 자리에 있으면 서로 또 하나 아닌가요? (같이 좌선을 하면서) 하나라는 말에 속아서 하나 자리에 못 들어가고, 내가 질문하는 순간 하나에서 빠져나오고 분별이란 것 때문에 하나에서 자꾸만 어긋나잖아요. ‘대’라는 것은 그래요. 한 기운이에요. 경주가 살 수 없는 곳에서 준성도 살 수 없어요. ‘대’자리라는 것은 한 몸이다. 한 기운이다. 이렇게 봐야 하고, ‘대’자리에 대한 것을 공부한다고 하면 언어도단의 입정처로 들어가야지 자꾸만 분석으로 들어가면 절대 갈 수 없어요. 분석하는 순간 벌써 하나가 깨지는거에요. 어렵죠?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끊임없이 분별하게 배웠으니깐요. 멍하게 두질 않잖아요. 끊임없이 분석하고 질문하고 선택하게해요. ‘대’라고 하는 것은 전체라는 의미이고, 본체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고, 한 몸 인 것이고, 한 기운인 거에요.

 

그러면 ‘소(小)’는 뭐에요? 만상이 형형색색으로 구별되어 있다. 여기에서도 언어가 헷갈리게 해요. 구별되어 있다는 의미가 떨어져 있다는 의미는 아니에요. 이렇게 다양하게 있지만, 우리가 떨어진 것은 아니거든요. ‘소’가 2가지가 있어요. 중생들이 보는 ‘소’는 매일 분별만 하고 살았어요. 다 각각이다. 차별의 ‘소’에요. 너는 너고 나는 나고. 이것은 분리된 ‘소’다. 대소유무의 이치에서 말하는 ‘소’는 ‘대’와 하나된 ‘소’에요. 그것을 진공묘유라고 합니다. 역대 선진님들이 ‘대’와 하나된 ‘소’에 대해서 뭐라고 했냐면 ‘대’를 떠나서 ‘소’가 따로 있지 않고, ‘소’를 떠나서 ‘대’가 따로 있지 않아요. ‘대’가 있고 ‘소’가 있는 것이 아니에요. ‘소’가 하나, 둘, 셋, 넷 더해서 ‘대’가 되고, ‘대’를 나눠서 ‘소’가 되는 것 같은 공식이 아니에요. 왼손과 오른손이 있어요. 아까 말한 분리된 ‘소’, 차별의 ‘소’가 있으면 한쪽 손에 갇혀 있어요. 그러면 왼손은 왼손이고 오른손은 오른손이라 생각해요. ‘대’하고 연결된 전체를 보는 입장에서는 나의 왼손이고, 나의 오른손이다. 다시 설명해서 입, 왼손, 오른손, 발이 있는데, 입하고 오른손하고 안친해. 그래서 입이 오른손 고생해보라고 밥을 안먹었어. 어떻게 되겠어요? 오른손만 힘들어요? 왼손도 힘들겠죠. 근데 우리는 그렇게 살고 있어요. 누가 미우면 그 사람을 원망하면서 공격해요. 그래서 그 사람이 힘들 것이라 생각해요. 하지만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나도 힘들다. 이게 ‘대’를 떠나지 않는 ‘소’, ‘소’를 떠나지 않는 ‘대’입니다. 일본에서 방사능 오염수 방출하면 결국 누가 먹게 됩니까? 결국 돌고 돌아서 다시 오잖아요. 우리가 나라고 하는 것에 갇혀 있으면 분리가 되는 거에요. 마치 왼손하고 오른손이 서로 관계없다고 하면 그걸 보는 우리는 되게 우습고 말이 안되잖아요. 이것을 어리석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다. ‘소’에 갇혀 있으면 ‘대’를 못보고, ‘소’가 있는 데 ‘대’와 연결이 되지 않은 ‘소’는 뭔가 나를 위해서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를 죽이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이제 ‘대’와 ‘소’ 이해가 되죠? 이것을 진공묘유라고 한다.

 

천체물리학자인 제임스 러브룩이 설명한 가이아 이론이라고 있어요. 가이아는 대지의 신이에요. 인간은 지구가 무생물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제임스 러브룩은 지구도 하나의 생명체다. 왜냐하면 생물과 무생물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진화하고 변화해간다고 설명했어요. 우리와 같이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가 지구한테 영향을 끼치고, 지구가 다시 그 생명체한테 영향을 끼친다. 대기 중 산소농도가 약 21%, 평균기온 13℃, 해양 염도가 약 35g/kg 이런 조건이 맞아야 생명체가 살 수 있는데, 이것은 지구라는 무생물 혼자만의 역할이 아니라 지구와 지구에 살고 있는 생명체가 서로 상호작용하며 살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생명체가 항상성을 유지하고 말합니다. 항상성이란 것은 적절한 산소농도, 평균기온 등을 만들어 주는 것. 여기 온풍기가 있는데 온도를 13℃로 맞춰놓고, 그 온도를 넘어가면 꺼지고, 그것보다 낮으면 작동하고 그 온도를 계속 맞춰 가는게 항상성이죠. 그전에는 지구는 지구고, 생명체는 생명체로 따로 생각했습니다. 생명체가 지구의 환경을 변화시킬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반대로 지구의 환경이 생명체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분별한 것이죠. ‘소’자리에서만 본거죠. 근데 제임스 러브룩은 ‘대’자리에서 본 것이죠.

 

1964년 존 스튜어트 베리가 설명한 양자 얽힘이란 공식이 있다. 우주의 근원을 추적해 들어가면 모든 만물은 양자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 닐스보어라는 학자가 양자물리학을 하고, 그 제자인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관찰자에 따라서 측정값이 바뀐다)를 만들었다. 그러니깐 아인슈타인이 말도 안 된다. 과학이란 것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절대적인 측정값은 항상 존재한다. 그러면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닐스보어는 신이 하는 일에 상관하지 말라며 말을 주고 받았다. 이 양자역학에 대한 얘기를 하고 나서 존 스튜어트 베리는 양자 얽힘에 대해 설명했어요. 소립자는 전자하고 양전자로 분리된다. 전자는 왼쪽으로 돌아가면 양전자는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이것이 한 쌍이다. 그런데 양자 얽힘 이론에서는 이것이 옆에 붙어 있지 않아도 640광년이 떨어져 있어도 쌍으로 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영향을 받아서 한쪽이 돌면 다른 한쪽이 돈다. 우주 만유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주 만유 근원을 추적해가면 만물은 양자적으로 얽혀 있다는 것이 양자 얽힘이다. 이걸 아인슈타인이 무시했는데 2015년에 네덜란드 과학자들이 이것을 증명하고, 네이처 논문에 실렸다. 하이젠베르크는 이 세계를 주체와 객체,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 육체와 영혼으로 나누는 것이 더이상 적절하지 않다. 과학이란 이름으로 분석하고 나누고 하는 것이 근본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데 장애가 된다. 카이스트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전흥진 교무님은 원불교와 현대 물리학의 진리관 비교연구라는 박사학위 논문을 썼어요. 이 논문의 핵심은 만물은 빈 공간의 가상 입자가 순간적으로 생겼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한다. 빈 공간은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이다(원불교 용어로 적적성성). 그러면서 전흥진 교무님이 주장하는 것은 물질의 근본은 하나의 기운자리로 일기(一氣)와 공적영지가 둘이 아닌 상태. 그니깐 물질이라는 것이 근본자리에 들어가서는 정신이란 것과 나눌 수 없다. 그래서 말로 표현할 수 없기에 언어도단의 입정처라고 표현했다. 우리가 배운 학습, 지식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것이 ‘대’자리에서는 하나로 통해있고 하나의 기운이고 하나의 몸이다.

 

유무는 변화를 말해요. 원불교에서 변화는 인과에요. 인과가 변화거든요. 대종사님께서 우주에 음양 상승하는 도를 따라서 인간에 선악인과의 보응이 있다. 음양상승하는 도와 인과의 도가 원리가 맞물려 있다. 음이라는 것이 인이에요. 음은 움츠러드는 성질이 있다. 씨앗이 되겠죠. 인이 심는 거고 양은 확산 되는 거잖아요. 확산은 결과(outing)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음은 인이 되겠고, 양은 과가 되는 거고, 이것이 우주에서는 음양상승이 되는 것이고, 인간에 있어서는 인과보응이 되는 것이다. 인과에서는 ‘인영과’가 있어서 시절 인연을 따라서 과거 맺히는 거고, 음양상승이라는 것은 강약이 관계하고, 선악이 짓는 바에 따라서 나타난다. 그러면 이제 변화는 음과 양이에요. 우주의 음과 양의 기운에 따라서 변화가 일어난 다는 말이에요. 음과 양의 이치와 조화에 따라서 사계절이 바뀌고, 인간의 생로병사가 생기고, 또 흥망성쇠가 생긴다. 가장 크고 긴 변화는 성주괴공이 생기고, 우리 마음에는 생주이멸이 생긴다. 음양의 이치에 따라서 수요공부방에 온 것처럼 인을 심고 있고, 그 인이 또 과를 만들어 내고, 과가 과인 동시에 또 인이 되고, 그것이 변화이고 유무에요.

 

그래서 우주의 이치가 대소유무로 되어 있다. 대산상사님께서 사람이 진리의 눈을 떠야 되는데, 육신의 눈만 뜨고 보면 대소유무의 이치를 못 보고 산다고 말씀하셨어요. 모든 것을 대소유무의 관점으로 봐야해요. 대소유무 관점으로 보면 ‘산경전’이 생긴다. 지묵으로 된 경전은 한계가 있다. 마스크도 대소유무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산경전이고, 준성이 경주를 봐도 산경전이다. 다 산경전이다. 왜냐면 그것이 대소유무의 이치로 돌아가니깐. 모든 것을 대소유무의 이치로 바라보는 공부를 해야하는데, 마음을 놓고(가지고) 대소유무를 설명해 보면 한 생각 일어나기 전이 ‘대’이다. 그때는 나와 너가 없었고, 준성과 경주가 나뉘지 않았다. 근데 내가 준성한테 ‘대’자리가 뭐냐고 물어보니 한 마음이 일어났죠? 그때가 ‘소’다. 거기서 내가 말만 들었네 하니 마음이 일어났지 그러다가 제가 준성은 그런 사람 아니다. 나도 잘 모른다 라고 얘기하니 마음이 편해졌죠? 그게 유무에요. 만약 제가 뭐라고 했을 때 마음에 화가 났어요. 근데 유무 이치가 없으면 계속 화가나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어요? 내 공부 정도에 따라서 내가 준 경계 강도에 따라서 있을 만큼 있다가 사라진다. 그것이 대소유무죠. 여러분이 대소유무 보는 연습을 해야 사리연구죠.

내가 하는 일을 대소유무로 설명하면 예를 들어 현승교우가 회사 다니는데, 회사가 ‘대’자리고, 회사 부서가 다르잖아요. 그게 ‘소’자리에요. 근데 그게 ‘대’하고 연결된 ‘소’인지, 그냥 ‘소’인지는 몰라요. 내가 하는 일이 회사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서 일하는 사람은 ‘대’하고 연결된 ‘소’고, 상관없이 내 업무만 하는 사람은 그냥 ‘소’이다. 대소유무 이치를 모르는 거다. 유무는 뭐에요? 회사가 폐업할 수도 있고, 업종을 변경할 수도 있다. 시대에 따라서 회사가 바뀐다. 나도 바뀌고, 그래서 시키는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우리 회사 강점과 약점이 뭔지 알고 일을 하면 유무자리를 본 거다. 회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나는 어떻게 될지 보는게 유무다. 안암 청년회를 설명하면 청년회 조직 자체는 ‘대’다. 다 속해있다. 청년회 안에 회장단, 교화단, 사업부가 있어요. 도서부장은 도서 쪽 신경쓰고, 교화부장은 출석통계 신경쓰고, 영미부는 촬영에 신경쓸 수 밖에 없다. 그게 ‘소’자리다. 근데 회장님은 다르다. 회의할 때 다 보고 있어야 한다. 직책이 올라가면 대소유무를 다 볼 수 밖에 없다. 전체로 보면서 조절한다. 조절한다는 자체가 ‘대’자리에 있다는 것이다. ‘대’자리에 있는 청년이 많으면 어떻겠어요? 편하겠죠? 교무님의 안목에서 같이 봐주면 좋은데 자기 맡은 것만 보고 집중하고 있으면 힘들다. 코로나로 인해 영상법회를 예측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미리 영미부에서 잘 준비해서 대처하고 있죠. 유무자리를 잘 활용한거죠. 내년에 청년회가 어떻게 될지 생각하는 것은 유무자리죠. 청년회 자체를 대소유무로 보는 사람이 많으면 청년회장님이나 교무님이 편할 거에요. 모든 것을 대소유무로 보고 전체로 봐야 일이 잘 돌아간다.

 

교리도 대소유무로 봐야 새롭다. 일원상의 종지는 ‘대’자리에 응해서 된 종지다. 사은은 ‘소’자리에 응해서 만들어진 교법이다. 인과는 유무자리. 계율도 유무자리. 계율이 유무에 바탕한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며, 제불 제성의 심인이며, 일체 중생의 본성이며, 대소 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며, 생멸 거래에 변함이 없는 자리며, 선악 업보가 끊어진 자리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자리로서 (대) / 공적 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 유무에 분별이 나타나서 선악 업보에 차별이 생겨나며, 언어 명상이 완연하여 시방 삼계가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나고 (소) / 진공 묘유의 조화는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이 곧 일원상의 진리니라 (유무)

 

<일상수행의 요법 1조> 심지는 원래 요란함이 없건마는(대)/ 경계를 따라 있어지나니 (소)/ 그 요란함을 없게 하는 것 (유무)

 

<게송>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와 무가 구공이나 (대)/ 구공 역시 구족이라 (소)/ 유는 무로 무는 유로 (유무)

 

<삼학> 정신수양 (대)/ 사리연구 (소)/ 작업취사 (유무)

 

<사은> 피은 (대)/ 지은 (소)/ 보은 (유무)

 

사리연구에서 일에 대해서는 현실적인 시비이해와 진리적인 시비이해가 있어요. 우리는 대부분 현실적인 시비이해에 머물러 있어요. 현실적인 시비이해는 욕심에 끌려서 옳은 것을 그른 것으로 보고, 그른 것을 옳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나한테 이로운 것이 옳은 것이고, 해로운 것은 그른 거다. 대산종사님께서는 대소유무의 이치를 토를 못 떼고 수행하는 것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항상 모래밖에 안된다고 말씀하셨어요. 현실적인 시비이해에서 진리적인 시비이해로 넘어가려면 대소유무의 이치에 바탕한 시비이해로 가야합니다. 대소유무의 이치가 밝아져야 진리적인 시비이해가 됩니다. 사리연구의 요지의 핵심은 시비이해다. 시비이해를 하기 위해서 대소유무를 아는 것이다. 대소유무의 이치에 바탕하지 않은 시비이해는 단촉(시간적으로 제한, 단기간)하고 편협(공간적으로 내 위주)하다. 중생의 시비이해다. 처음에는 이로운 것 같지만 결국에는 죄가 되고 괴로움만 남는 것이 중생의 현실의 시비이해고, 공부인의 시비이해는 대소유무 이치에 바탕한 시비이해입니다. 그것은 시는 반드시 이롭게 되고 비는 반드시 해롭게 된다. 오늘의 결론은 대소유무의 이치로 세상 만물, 모든 것을 바라보라고 했잖아요. 그 이유는 시비이해를 잘하기(잘 운전하기) 위해서 입니다. 다음에는 왜 어떻게 사리연구를 해야하는지 공부하겠습니다.

 

[질의응답]

Q. 박준성

-한 생각이 일어나서 분별이 일어나서 ‘대’자리에 갇힌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A. 박세훈 교무님

-‘대’자리는 생각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내가 일부로 말을 던진 것이다. 내가 말 던지기 전에는 준성이 ‘대’자리에 있었다. 내가 준성이고 앞 사람이 경주라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말 던진 순간 생각이 나고, 분별이 일으켜지고 깨졌다. 다시 ‘대’자리로 돌아가려고 할 때 하나 자리로 돌아가야지 하는 마음으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 선이다. 언어가 끊어진 곳에서 ‘대’자리를 가는 거지 생각으로 나는 하나다 해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대’자리는 생각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래서 경계를 줘 본 것이다. 경계를 준 순간 ‘소’자리로 떨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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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박준성(준현) | 작성시간 21.05.25 성권 교우님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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