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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5일 남한산성 1편

작성자윤광호|작성시간24.05.05|조회수184 목록 댓글 0



https://youtu.be/z-1LSJvJ7Kk?si=vDtelMxQV5Chwi1P






남한산성1.


《오랑캐론》


이용악 <오랑캐꽃>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구려 장군님 무지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백 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께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인문평론. 1939.10.)

                                        

안녕하십니까.
역사를 재밌고 쉽게 해설하기 위해
파고들어 노력하고 또 노력하는 남자,
'쉬운 남자'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에 이어
이번에는 역사의 가장 치욕스런 순간을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바로 남한산성,
병자호란의 역사가 되겠습니다.

​아픈 역사이고 다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역사지만
그래서 더 직시해야할 역사라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그들의 후손이고
또 다시는 그런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물려줘야 할
누군가의 조상이 되어야 할 테니까요.


일단 남한산성 치욕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오랑캐'라는 말에 대해
정확하게 개념 정리할 필요가 있어요.

'오랑캐'는 우리 역사의 키워드입니다.
우리 고대사를 흔든 사고와
그로부터 비롯된 수많은 사건과 전쟁들
저변엔 오랑캐 의식이 짙은 배경색으로
깔려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묻습니다.
여러분은 '오랑캐'를 어떻게 이해하시나요?
그저 편하게 '중국놈'이라고 이해하시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듯해요.
또 '떼놈' '되놈'이라는 비속어로 부르기도 하는데
뜻은 대동소이합니다. 위키백과에,

되놈은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한국어 명칭 중의 하나이다.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중국 한족들이 잘 씻지 않고 더럽다는 뜻인 때놈 또는 인구가 매우 많은 것을 빗대어 떼놈이라는 변형된 표현도 많이 쓰인다.  <위키백과>

이라고 나와 있어요. 일단 오랑캐와 큰 차이는
없어 보이죠. 그래서 현대에 들어 나타난
'중공 오랑캐'까지 마구 혼용한 흔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엄밀하게 구분해야 할 필요성이 있어요.
그래서 '오랑캐'를 화두에 올린 겁니다.


오랑캐란?
개와 오랑우탄의 합성어(오랑+개)로
그 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을 뜻한답니다.
즉 오랑캐는 사람은 탈을 썼을 뿐 애시당초
사람이 아녔던 거지ㅎㅎㅎ
이 말은 개콘의 아재개그에서 나오는 말이니까
너무 흥분하거나 신기해할 필요는 없어요.
우스개소리에는 그냥 웃으시면 되겠습니다.
근데 이러거니 저러거니
나름 성격 규정은 제대로 했다고 봅니다.


오랑캐에 대해 나무위키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우량카이라는 이름은 명나라때 북방 이민족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되었고, 이것이 조선에서 오랑캐로 불리기 시작했는데 /ㅗ/[u > o], /ㅐ/[ai~aj > ε]의 발음 변화를 거쳐 오늘날의 어형이 되었다.

<중략>

실제 우량카이족이 존재하지만 여진 및 몽골 등 중국의 한족을 제외한 이민족들을 전부 다 '오랑캐'로 지칭했었다.  <나무위키>


즉,
우리가 통칭해서 중국인들을 부른 이름이
아녔던 거죠. 오히려 중궈 한족이
다양한 이민족을 지칭하는
배타적 언어가 바로 오랑캐였는데요,

우리 시각도 그와같아
심지어는 일본도 오랑캐, 서양 오랑캐,
중공도 오랑캐였던 것이었던 것이었으니...
참 아이러니하쥬?
파로호는 625때 이승만 당시 대통령이 치열했던 전투 현장을 방문하고 깨뜨릴 파(破), 오랑캐 로(虜), 호수 호(湖)라는 뜻의 '파로호(破虜湖)'라고 명명했다. 이후 이 호수는 '파로호'라는 이름으로 불려지게 되었다. 중공군을 오랑캐로 지칭했던 흔적이다.



하지만
우리가 여기서 논의해 보고자하는
고대사 키워드 '오랑캐'는 북쪽 오랑캐,
즉 광범위하고 배타적인 의미의
'나 빼고 다 오랑캐'가 아니라
오리지날 오랑캐를 지칭합니다.

오랑캐를 만들어낸 중궈 한족을 제외한
북방의 기마 유목민족들이
이 범주에 포함되는 거죠.


그럼 오랑캐는 왜 오랑캐쥬?
답은 야만스럽기 때문이에요.
아재개그에서 성격 규정한 것처럼
짐승같은 야만성이 오랑캐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오랑캐의 성격 규정과
우리의 오랑캐에 대한
단호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역사적 기록을 먼저 보실까요?

고려 태조 재위 24년이자 요태종 재위 15년차인 942년 10월, 거란이 세운 요나라가 화친을 맺기 위해 고려에 사신 30명과 선물로 낙타 50마리를 보냈다. 하지만 고려는 도리어 요나라의 사신들을 모조리 섬으로 유배보냈고 이 중 일부는 자살하거나 사약을 받아 죽기도 했다. 그리고 고려는 선물로 데려온 낙타 50마리를 개경 만부교 밑에 묶어서 굶겨 죽이는 것으로 화답했다. 양국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후에 거란이 수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나아가 훈요10조(訓要十條)에서도 거란을
금수(禽獸)의 나라로 규정하여 경계하도록 했다. 그후 역대왕은 이러한 태조의 반거란정책을
계승했다. <나무위키>​


아! 너무하지 않았나요?
아무리 미워도 그렇지
옆집에서 떡을 가져왔는데 떡접시를
땅바닥에 팽개치고 떡 가져온 사람을
해코지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여?

말 못하는 낙타는 또 무슨 죄여?
불쌍한 낙타,
낙타가 무슨 트로이의 목마도 아니고...

개인의 일도 아니고 적어도 국제관계를
이렇게 파국으로 몰고갈 필요가 있나요?
이러니 거란족들이
이를 갈며 달라들지 않겠나?

이게 바로 고려와 거란의
악연의 시작인 '만부교 사건'이죠. 그리고
윗글에 보이는 금수(禽獸)라는 말이 바로
오랑캐의 다른 표현이며,
오랑캐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었죠.


그러면 고려는 대체 거란을 왜 그렇게
미워했나요? 금수였으니까?
알려지기로는 같은 민족 발해를 멸망시킨 것이
거란이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발해 멸망의 와중에 보인 그들의
짐승같은 태도와 약탈 때문에
치를 떨게 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가 익히 짐작할만한 오랑캐의 습성 말이죠.

근데 오랑캐는 일단 약탈이 목적인 집단이죠.
북쪽 기마 유목민 부족들은 겨울철이면
먹을게 떨어지는게 치명적 약점이에요.

그래서 겨울이 되면 남쪽 따뜻한 나라
농경국가를 동경하게 됩니다.
농경국가들은 1년 농사를 지어
창고에 쌓아놓고 겨울철에 꺼내 먹거든요.
그 창고가 부러웠던 겁니다.

그냥 동경만 하면 괜찮은데 밀고내려와
털어먹는 재미를 알게 됐어요.
빠른 말을 가졌으니 털어먹고
재빨리 달아나면 됐죠.

또 털어먹고 달아나면 드넓은 초원 지대로
흩어지니 누가 그랬는지 범인을 색출하기도
쉽지 않아요. 그러다보니
겨울이면 털어먹는게 당연한 일이 됐어요.

그 기마 유목부족들은
군사적 강점을 지녔어요. 가장 큰 힘은 바로
그들이 벌판을 휘달리며 열심히 조련한
말에서 나오는 힘이었죠.


오죽하면 말:(言)보다 말(馬)을
먼저 배운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만치 그들에게는 말은
삶의 터전이었고, 조건이었습니다.
말:보다 앞서는 말이라니 상징적이지 않나요?

털어먹고 재빨리 달아나던 말은
강력한 군사력의 바탕이 됐으니, 가끔
강력한 지도자가 나타나
초원에서 큰 소리로 외치면
흩어져 살던 부족들이 모이고
초강력 울트라 국가가 형성되고는 했어요.

그럴 때 착한 농경국가는 군사적으로
사실 감당을 못해요. 거란의 요나라,
몽골족의 원나라, 여진족의 후금, 청나라
이런 역사가 그런 역사입니다.

그들은 기마민족 답게 중국은 물론
러시아, 유럽까지도 빗자루질하고 다니며
대제국의 역사를 쓰는 거예요.
거란족, 여진족, 흉노족, 돌궐족, 몽골족 등
역사적으로 이름을 남긴 족들이
이름을 남긴 이유가 말을 기반으로 한
군사력이었던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이유도
해마다 겨울이면 몰려오는 징글징글한
북방 오랑캐 흉노족을 막기 위함이었죠.
얼마나 지겨웠으면 만 리가 넘는
성을 쌓을 생각을 했을까?
그 지겨움의 깊이가,
만 리에 뻗히는 징그러움이
상상이 되세요?

그들 징글징글한 오랑캐는
중궈 한족의 나라에만 몰려갔나요?
그럴 리가요.
당연히 우리나라에도
징글징글하게 몰려왔겠죠?

근데 이상하지 않아요?
고구려가 있을 때는 분명
북방 오랑캐 침입이 크게 문제되지
않았거든요? 다들 아시겠지만 오히려
수나라 당나라 중궈 한족들 침략이 지겨웠잖수?


여기서 문제!
혹시 그 이유가 뭔지 아시우?



다음편에 계속





~퍼온글~




입하(立夏) 5월 5일


24절기 중 일곱 번째 절기.
양력으로 5월 5일 무렵이고
음력으로 4월에 들었으며,
태양의 황경(黃經)이 45도에 이르렀을 때이다.

입하(立夏)는
곡우(穀雨)와 소만(小滿) 사이에 들어
여름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절후이다.

‘보리가 익을 무렵의 서늘한 날씨’라는 뜻으로 
맥량(麥凉), 
맥추(麥秋)라고도 하며,
‘초여름’이란 뜻으로 
맹하(孟夏),
초하(初夏), 
괴하(槐夏), 
유하(維夏)라고도 부른다.

이때가 되면
봄은 완전히 퇴색하고
산과 들에는 신록이 일기 시작하며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린다.

또 마당에는 지렁이들이 꿈틀거리고,
밭에는 참외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리고 묘판에는
볍씨의 싹이 터 모가 한창 자라고,
밭의 보리이삭들이 패기 시작한다.

집안에서는 부인들이 누에치기에 한창이고,
논밭에는 해충도 많아지고
잡초가 자라서 풀뽑기에 부산해진다.

옛날 재래종 벼로 
이모작을 하던 시절에는
입하 무렵에 한창 못자리를 하므로
바람이 불면 씨나락이 몰리게 되는데,

이때 못자리 물을 빼서
피해를 방지하라는 뜻으로
“입하 바람에 씨나락 몰린다.”는 말이 있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는 해는 
목화가 풍년 든다는 뜻으로
“입하 일진이 털 있는 짐승날이면
그해 목화가 풍년 든다.
”는 말도 있다.

입하가 다가오면 모심기가 시작되므로
농가에서는 들로 써레를 싣고 나온다는 뜻으로
“입하물에 써레 싣고 나온다
.”라는 말도 있다.

재래종을 심던 시절에는
입하 무렵에 물을 잡으면,
근 한 달 동안을 가두어
두기 때문에
비료분의 손실이 많아
농사가 잘 안 된다는 뜻으로
“입하에 물 잡으면 보습에
개똥을 발라 갈아도 안 된다.
”라는 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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