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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6일 남한산성 2편&3편

작성자윤광호|작성시간24.05.06|조회수213 목록 댓글 0



https://youtu.be/GNMZEfovUWQ?si=_q8yms5GhQtxyFr6


●건강 생활 365

♧나이보다 젊게 사는 방법 5가지

1. 물을 잘 마셔라.

식사하기 전 30분 전부터 식사하는 도중, 식사 뒤1시간까지는 물을 마시지 않는
것이 좋다.
이때 물을 많이 마시면 포도당의 흡수 속도가 빨라져 혈당과 인슐린 농도도 높아지는데, 다른 혈중 영양소는 모두 지방으로 저장되기 때문이다.
또한 물을 위산을 희석시켜 소화를 방해한다.
그러나 이 시간대 외에는 하루 6~8컵 가량 물을 충분히 마셔주는 것이 신진 대사와 노폐물 분비를 촉진해 다이어트에도 좋다.

2. 바르게 걸어라.

걷기는 만병통치약이라고 할 정도로 당뇨, 고혈압, 심장병 등 성인병의 80퍼센트를 예방할 수 있다. 또 걸으면 뇌세포가 활성화되면서 스트레스도 사라진다.
체지방은 걱기 시작해서 15분 정도 지나야 분해되기 시작하므로 최소한 30~40분 정도 쉬지 않고 걸어야 효과적이다. 또 걸을 때에는 가볍게 숨이 찰 정도의 속도로 걷는다. 걷고 난 뒤에는 저지방 우유나 요구르트 등 유제품으로 단백질을 섭취하는 것이 근육의 피로 회복을 돕는다.

3. 소리내어 웃어라.

독일의 한 의학 전문지에 의하면 웃음은 소화액 분비를 촉진시켜 식욕을 생기게 하고 면역력을 향상시키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웃는지 진지하게 따져보고 재미난 이야기를 기억해 두었다가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과 나누어 보자. 가까운 사람끼리 나누는 칭찬과 웃음은 어떤 보약보다도 건강에 이롭다.

4. 수면은 결코 사치가 아니다.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하고 창조적인 생활을 하려면 반드시 하루 8시간 정도의 잠을 자야 한다. 깊은 수면에 방해가 되는 커피는 오후 2시 이후엔 마시지 말고 흡연, 음주 등을 멀리한다. 또 취침 전 3~4시간 사이에는 심한 육체 활동을 삼간다. 잠자리에서 텔레비전을 시청하면 빛과 소리가 수면에 나쁜 영황을 준다는 점도 잊지 말자.

5. 사랑하면 신난다.

긴장, 초조, 걱정, 짜증 등 부정적인 감정은 질병을 일으키는 요소 중 하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좋아할 만한 것을 찾자. 평생 살면서 사랑하는 것 한 가지만 있어도 증오의 감정이 싹틀 수가 없다. 사랑하는 것이 있으면 모든 것이 신나기 때문이다.



진짜 나를 찾아라
기분 좋아져라
좋은 생각만 하자
그래야 한주가
즐겁고 행복합니다^♡^




남한산성2편.


《서희의 전쟁》



고려 때부터 시작되는
오랑캐와의 대결의 역사에서
결정적인 장면을 살펴볼게요.
자,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고려와 거란 1차전쟁 때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몰고 침입해 왔을 때
서희 선생이 단기필마로 적진에 가
담판을 시작하죠.

소손녕은 탁자를 치며 큰소리를 칩니다.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 너희들이 침범해 부당하게 점거해왔다''

소장군의 강력한 주장을 그동안 우리는
'어거지'라고 가르쳤지만 어거지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적나라한 역사인식인 거유.
국가의 존망이 걸린 치열한 외교 현장에서
상대방 수장의 얘기를 어거지라고 폄하하면
뭐가 되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잖우?
한강 이북 땅은 고구려 땅이었으니까.

거기에 대해 서희는

''고려가 바로 고구려의 옛땅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했고, 평양에 도읍하였다.''

라고 응수합니다.

그리고

''그럼 너희 고려는 왜 가까이 있는 거란을 무시하고 멀리 있는 송나라를 섬기는 거냐?''

라는 힐책에는

''우리 고려는 거란과 관계를 맺고 싶어도 여진족들 때문에 관계를 맺을 수 없오. 거란으로 통하는 강동6주를 우리가 정벌하도록 해 주시오.''

라고 제안합니다.

결과는 결국 강동6주를 얻어내고
거란을 빈 손으로 돌아가게 합니다.


이 '서희의 담판'은 유명한 역사적 사건인데요,
이 때 이 장면에 대해 의문이 생기지 않았나요? '고려가 바로 고구려'라는 말 한 마디에
정말 소손녕이 설득 당한 이유는 뭐지?

우리가 소손녕의 주장을 어거지라고 봤는데,
어거지였다면 그냥 물러갈 이유가 없지 않아요? 별별 개똥같은 어거지를 다 끌어댔겠지.
개경에 개가 많으니까 거란 땅이다.
하늘 색을 봐라. 파란색이니까
그 아래 땅은 거란 땅이다.

등등등....

그런데도 강동6주 땅을 선뜻 양보한
이 무슨 선문답 같은 외교 현장의 결과에
아무 의문점을 갖지 않았다면
참 무던하신 거예요.

이 둘이 나눈 대화의 골자를 뽑아
쉬운 남자가 쉽게 풀어보면 이렇습니다.
소손녕이

'너희들은 신라를 이어받은 놈들이니까
우리랑은 피가 달라. 고구려 옛땅(한강 이북)
돌려도. 안 그러면 가만 안 두겠다.'

라고 하자 서희가,

'이게 무슨 말여 막걸리여. 우리가 바로
고구려 후손이여. 이름도 고려잖여.
같은 오랑캐 친구끼리 왜 그랴? '

이런 말 뜻으로 이해한다면
이해가 빠를 것이어요.

그러면서

'그러면 너그들은 왜 송나라를 섬기고 지랄이여?
같은 오랑캐가 같이 놀아야지.'

라는 힐난에

'너그들이랑 친하고 싶어도 여진 애들이 가로막고 있으니 어쩔 수 없었잖어. 강동6주를 우리가 차지하게 하면 너그들이랑 친하게 지낼게.'

이렇게 거란을 달래 대군을 돌려 보내고
강동6주를 얻어내면서
관계 개선을 약속하는 것이죠.

암튼 같은 기마 유목민족이었던
부랄친구들끼리 싸울 일은 없다는 의미,
'반갑네 친구' 정도로 친구를 확인한
장면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즉 거란은 고려가 고구려라면
너그들 할부지가 내내 거란 할부지인께
그 후손을 친구로 인정하겠다는 뜻이고,
또 고구려의 힘도 인정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워낙 강성했던 고구려였던지라 후대에까지
인정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평화협정을 맺고 강동6주를
오랜 친구 만난 선물로 주고,
군말없이 떠나게 되는 거예요.
물론 나중에 보니까 거란이 송나라를 정벌했고
결과론적으로는 남는 장사였네?
이렇게 되는 것이지만 결과론은 결과론일뿐
당시에는 분명
빈손이었죠.


다시 정리하지만 단군신화에서처럼
한반도로 내려온 기마 유목민족은
한반도에서 곰족을 만나
고대국가를 형성하였고,
고구려로 이어져 내려오게 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농경국가의 색채가
짙어지게 되죠. 그만치 오랑캐의 성격은
희미해지구요. 그것이 하필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구려의 멸망으로 탈바꿈, 완연하게
성격 세탁을 하게 된 것이구요.

그리고 마침내 오랑캐들의 피로 쓰는
침략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이에요.
그 변곡점이 서희의 담판이었던 겁니다.
중궈 한족과의 전쟁은 수당전쟁으로 끝이고,
이후의 침략전쟁은 모두 오랑캐의 침략으로
비롯된 것임은 굳이 말 안해도 아시겄쥬?


우리의 시각도 점차 고구려의
자주적 시각에서 중궈 한족과 동일시하는
사대적 시각으로 바뀌어 갔으니, 사실
오랑캐라는 말도
중궈 한족적 시각임에야...

즉 당나라를 끌어들인 신라의 삼국통일은
우리나라 사대주의 역사의 시작이자
오랑캐 의식이 싹튼 계기가 되는 거예요.
동전의 양면이쥬?
당나라와 비교하면 열등의식이
오랑캐와 비교하면 우월의식이
깊이깊이 또아리 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중궈 한족과 동일시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며, 때로는 그들의 
동생이 되고자, 때로는 그들의
신하가 되고자 해마다 달마다 엄청난
공물을 바치며 구걸하게 되며,
그것으로 왕권의 정통성을 삼으려 했으니
그것이 바로 사대주의 아니던가요?
흔히 사대주의의 시작을
신라의 삼국통일로 보는데
그런 배경이 있었던 겁니다.
앞에 봤던 선덕여왕의 '태평송'이
그 좋은 예가 되겠구요.

그래서 후대의 시인은 이렇게 안타깝게
울부짖나 봅니다.


봉황수(鳳凰愁) - 조지훈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風磬)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鳳凰) 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趨席)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이런 발버둥은 우리를 중국이 아닌데도
중국적 시각을 갖게 했으니
이른바 '소중국'이라 할만 합니다.
바로 이 시각으로 기마 유목민족을 보았을 때
'오랑캐'라는 개념이 탄생했던 거예요.

서희는 이 장면에서 재빨리
'우리도 오랑캐'라는 말로
소손녕을 달랜 거구요.

서희의 담판은 정말 중요한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또 오랑캐와의 끈끈한
악연의 역사가 출발하는 지점이기도 해요.


문제는 서희 이후입니다.
서희와 같은 기조를 유지하며
'우리는 친구'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약속대로 관계 개선을 했으면
탈이 없었을 텐데 '우리도 오랑캐'라고
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소중국' 의식에 젖어
'너그들은 오랑캐'라는 입장을 고집했으니까요.
친송정책을 유지하며 끊임없이 거란을
적대시하고 짐승 취급을 하죠.
그것이 거란을 자극해서 수차례 침략을
하도록 만드는 거죠.

그런데 중궈 한족이 아닌
그토록 무시하고 멸시했던 오랑캐 발밑에
머리를 조아리며 신하가 되기를 구걸해야 했으니
얼마나 자존심 상하고 모멸스러운
사건이었을까요?
자존심이고 자시고 오로지 눈앞의 권력이
먼저였을까요?

이제부터 살펴보고자 하는
남한산성과 삼전도의 굴욕을 말하는 겁니다.

다음편에서는 중궈 한족과 오랑캐 사이에서
균형된 외교로 국익을 지키고자 했다가
사대주의자들에게 쫒겨난
왕 얘기를 해 보기로 해요.

그런 왕이 있어요?

네. 있습니다.
과연 누구일까요?

다음편에 계속



남한산성3편.


《광해의 꿈》


네, 광해군입니다.
다들 정답을 맞추셨으리라 짐작합니다.
이미 영화 '광해, 왕이된 남자'를 통해
광해군의 진면목을 보셨을 겁니다.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열갑절 백갑절은!
더 소중하오!"

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백미였죠.
저는 그 장면에서 온몸에 전율을 느꼈답니다.


비록 가상의 영화였고,
가짜 임금이라는 설정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임금마저 사대의 이유로 갈아칠 만큼 엄중한
당시 조정의 상황과 분위기를 통해
실제 광해군의 고뇌를 들여다볼 수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광해군은 임진왜란 와중에
분조(조정을 나누는 것)를 하여
선조 역할을 대신하였고, 전국 강토를 누비며
병사와 백성을 위무하는 등 일찌감치
훌륭한 왕의 싹을 보이고 있었죠.

하지만 선조는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광해군의 인기가 내내 못마땅했어요.
그래서 7년 왜란 중에 15차례나
양위 파동을 일으켰으니 광해군으로서는
죽을 맛이었을 겁니다.
아버지라 욕도 못하고 말이죠. 씨바...

선조는 왜란이 끝난 후 공신 책봉에서부터
뚜렷한 의도를 드러냅니다.
이순신은 차마 제외할 수 없으니 원균과 동급,
의병활동 했던 민초들은 일단 전부 제외,
하늘 같은 명나라는 우대,
자신의 몽진을 지켰던 신하 우대,
이것은 결국 왜란 극복을 순전히 명나라와
명나라를 끌어들인 자신의 공으로
돌리기 위한 수작이었어요. 따라서
분조를 이끌며 함흥, 해주, 원주, 찍고 전주로,
무려 함경도부터 전라도까지
전국을 누볐던 광해군의 공도
당연히 무시됐겄죠.


문제는 광해군이 그저 못마땅한 정도가
아니란 거였어요.
선조가 광해군을 핍박하는 이면에는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이 있었거든요.
영창대군은 후궁의 아들이었던 광해군과 달리
선조가 어린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낳은 어엿한 적장자였어요.
아직 어리기 짝이 없는 영창대군에게
선조는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죠.
죽기 직전까지 광해, 너는 임시로
세자에 있는 거니까 알현할 필요없다, 고
할 정도였대요.

물론 어린 왕을 세우고 권력을 틀켜쥐려는
서인세력을 등에 엎고 말이죠.
아, 이러면 이건 권력의 문제라 심각해져요.
말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말이 있죠. 남자가 철이 없으면
군대 갔다오면 철든다.
그래도 철이 없는 사람은 결혼하면 철든다.
그래도 철이 없으면 애를 낳으면 철들고,
혹 애키우면서 철드는데,
그래도 철 안든 사람은 늙고 애가 커서
그 애한테 두들겨 맞으면서 철든다.
그래도 철안든 사람은 그냥 놔둬라.
죽어서 무덤 속에서 철든다.

철없는 선조,
참...죽기 전에 정신 차리나 했덩만.


그러다가 미처 교통정리를 못하고 죽으니
집안만 들쑤셔놓고 죽은 꼴이죠.
드디어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조선 15대 왕 광해군입니다.



하지만
선조의 우유부단함과
인목대비와 서인세력의 꿍꿍이는
새 임금 광해에게 결국 크나큰 후환이 됩니다.
왜냐하면 서인 입장에서는
자기들이 몰아내려했던 광해군이 두려웠겠죠.
그리고 꺼림칙한 마음이었을 겁니다.
광해군은 광해군 나름대로 또 그들이
껄쩍지근했겠고... 참 어렵다.
이렇게 깔끔하게 뒷마무리를 못한 이것이
뒷날 조선의 역사를 뒤바꾸는
단초가 되는 거죠.

살아서 조선을 말아먹었던 선조는
죽으면서도 조선을 말아 먹는 거예요.
말아먹기 대왕, 선조 참 일관되시다.


국제 정세는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죠.
조선의 맹주였던 명나라는 허울만 좋은 껍데기로
전락하였고 여진족이 세운 나라
훗날 청이 되는 후금은
강력한 신흥 국가로 떠올랐어요.
광해군은 이런 시대에 국왕으로서
조선을 지키는 방법을 고민했어요.
전쟁이 지난 후 삶을 고통스러워했던
백성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해
그는 노심초사 밤잠을 이루지 못했죠.
그로 인해 그가 선택한 방법은 바로
조선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명(明)과의 관계를
멀리하고, 신흥국가인 후금과의 관계를
도모하는 거였습니다.
그 길만이 새로운 전쟁을 막는 길이자
백성들이 전쟁의 후유증에서
빨리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광해군이 명을 멀리하는 이면에는
그의 생생한 경험도 한몫을 했어요.
광해군은 전쟁을 이끌면서 전국 팔도에서
명나라의 오만함과 터무니없는 횡포를
기가 질리게 목격했다고 합니다.
당시 백성들은 명군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죠.

“왜군은 얼레빗이요, 명군은 참빗일세.”

오히려 왜놈들보다 조선을 도와주러 왔다며
더한 착취와 악행을 저지른 명나라 군사들을
빗대어 나온 말이죠.
이렇듯 참도둑이었던 명나라 군대는
지원군이 아닌 점령군으로
우리 강토를 유린했다는 걸 광해군은
전장에서 몸소 경험한 겁니다.


하지만 광해군과 신하들의 시각차이는
너무도 컸어요.
광해군은 군주로서 나라를 지켜야하는
현실적인 시각으로 정국을 봤고,
신하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로
정국을 봤습니다. 사실 의리보다도
엄밀하게 말해 오랑캐를 사람으로 보지않는
그들의 우월의식이 문제였어요.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은 한 뿌리라는 거 아시죠?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왜냐하면
사사건건 남과 비교하는
못된 버르장머리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까.
명에 비교하면 열등의식이,
오랑캐와 비교하면 우월의식이...

그래서 생긴 역사 법칙이 뭐다?
'기승전오랑캐'
오랑캐 의식이
국제 정세도, 경제도, 국가 이익도,
백성의 안위도 모두 잡아먹는
블랙홀이었습니다.


우리가 오랑캐 오명에서 벗어나려
갓쓰고 도포입고 무던히도 몸부림쳐왔던
역사는 남들을 오랑캐로 멸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거죠.

예를 들어 아이들이 학교에서
왕따당하지 않으려고 다른 아이
왕따 놓는 거나 진배 없어요.
힘센 놈 따라다니면서 약한 아이 괴롭히는
똘마니를 자처했던 것입니다.
명이 볼 때는 조선 너그들도
동이족(東夷族) 오랑캐였고만
얼매나 가당치 않았을꼬?
또 얼매나 재미졌을꼬?

따라서 신하들은 국제관계고 자시고
다 떠나 오로지 북쪽 짐승들과 타협하고
친하게 지내야 한다는 사실을 못견뎌했고,
오랑캐들은 이 쪼매만한 나라로부터
짐승 취급 당하는 사실을 못견뎌했다는 거.

허울뿐인 명나라는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여
후금에 대항하고자 했으나
이를 간파한 광해군은 사세를 관망하였어요.
열등의식과 우월의식에 쩌든 신하들은
명과의 의리를 내세워 파병을 주장하는데
심지어 나라가 망해도 좋으니
명나라를 도와야한다고,
'숭명사상'을 내세웠어요.

그들은 아예 왕마저 인정하지 않을 정도였죠.
조선의 왕도 단지 명나라의 일개 신하일 뿐이니까
따지고 보면 왕도 결국 자신들과 똑같은
명나라의 신하 아니겠습니까?
와요? 틀린 말 했심미까?
아구통을 돌려버리고 싶은
삐뚤어진 그들의 의식은
아구통을 돌리는 정도로는 빠지지않을 만큼
너무 깊이 박혀 있었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망해서 명나라를 살리자.
그게 의(義)고 동방예의지국의 신하된 예(禮)다.'

이런 말까지도 서슴치 않는 신하들
이해가 되십니까? 막상 전쟁이 벌어지면
다 도망가 버릴 거면서, 또 민초들만
맨주먹 붉은피로 싸우게 할 거면서...

당시 조선은 고구마 농사가 대풍이었나봐요.
광해군은 신하들의 사대 요구를 받을 때마다 
구역꾸역 고구마를 먹은 심정이었어요.
그들은 말로 설득될 사람들이 아녔거든요.
이미 자랑스런 명나라의 신하들이었으니까.


이런 역사를 보다보면
지금의 현실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 안 드세요?
625때 미국이 우리를 구해줬으니까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설령 하늘이 뒤집어져도
미국을 도와야 하고 미국과 함께해야 한다는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람들과,
미국은 그들의 이익을 위해서 한 행동일 뿐이고
우리는 우리의 국익을 위해
새로운 국제관계를 정립해야 한다는
실리와 현실을 중시하는 사람들

그 와중에 혹 반미나 미군 철수와 같은 주장은
설 자리가 없어지죠.
그들을 어떻게 했는지 잘 아시죠?
공산당이며 빨갱이며 종북이며 좌파며
온갖 무시무시한 굴레를 씌워
참살해온 역사를 생생하게
기억하시죠?
미군의 주둔은 감히 신의 영역이 돼 버렸어요.
남의 나라 소중한 땅을 점거하고 사용료는 커녕 오히려 방위분담금을 받아 챙기니
미국으로서는 얼마나 꿀빠는 느낌일까?

그리하여 1~20년도 아닌
무려 70년을 넘어 백년을 향해 가도록
강산이 7번 넘게 바뀌도록
남의 나라에 주둔한
신의 나라 군대는 의기양양하고
땅의 주인은 나가라는 말 한 마디를 못해 끙끙
머슴살이를 하고 있으니
조상들이 하늘에서
얼마나 한심한 새끼들이라고 혀를 차고 계실까?
당나라 군대도 명나라 군대도
그렇게까지는 안했구만... 쯧.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신의 나라 군대가 오랫동안
우리나라를 지켜주시고 계시니
자랑스러우십니까?




다음편에 계속




#한국사




#인문학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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