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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1일 남한산성 마지막회

작성자윤광호|작성시간24.05.11|조회수162 목록 댓글 0





#건강정보


[돈이 필요 없는 자연 건강법]

1. 피부를 탱탱하게 하는 방법

콩을 하룻밤 정도 불린다.
잘 으깬 다음 꿀을 약간 넣고 얼굴과 목에 바른다.
5분 정도 후에 미지근한 물로 닦아내면 끝!

2. 기미없애는 법

마늘 여섯 쪽을 곱게 다져 물 반 컵에 골고루 섞는다.
2~3일 가량 차고 어두운 곳에 두었다가 기미나 잡티가 있는부분에 바르면 하루 하루 옅어지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3. 지친 피부에 생기를 불어넣는 방법

오이를 갈아서 부드러운 상태로 만든 다음 얼굴과 목에 바른다.
머리를 쓸어 올리고 귀 뒷부분과 목 뒤쪽까지 발라준다.
지성 피부의 피지 제거에도 더할 나위 없이 좋다.

4. 여드름 퇴치법

무를 곱게 갈아 냉장실에 보관한다.
잠들기 전에 바르고 마사지해 주면 OK!

5. 튼살 방지법

건강 식품 코너나 일부대형 할인점에서 구할 수 있는 맥아유를 사용해 본다. 튼살을 방지하거나 치료하는 데 효과적이며 피부의 탄력도 유지시켜 준다.
특히 임신한 여성은 배와 가슴 부분에 발라주면 흉하게 트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

6. 땀구멍 줄이는 법

레몬 8개에 소주 한 병을 부어 밀폐 용기에 담아 보관한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거즈에 걸러 병에 담은 뒤 냉장고에 넣어두고 아침저녁으로 발라주면 점점 줄어드는 땀구멍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7. 흉터 없애는 방법

레팀 A는 미용에도 효과가 있지만 살이 튼 부위나 흉터에도 좋다. 얼굴용으로 처방 된 레틴 A를 튼 살 부위에 6개월 동안 지속적으로 사용한 여성들의 경우 튼살이 14%나 감소했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그밖에 피부에 난 흠을 줄여주는 재료들 오트밀/요구르트/딸기/장미오일

8. 눈가나 입가의 잔주름 없애는 법

흑설탕 반 큰술에 미지근한 물을 넣고 섞는다.
얼굴에 바르고 10분 정도가 지나 스팀 타월로 닦아내면
보습 만점!
영양 만점! 입술이 텄을 때도 응용하면 좋다.

9. 내 피부에 맞는 화장품 구입하는 법

예뻐지려고 쓰게 되는 각종 화장품들의 비용이 만만치 않다. 몇만원부터 수십만원까지! 욕심에 구입했다가 피부에 안맞아 한두번 쓰고 구석에 쌓아놓는 화장품도 부지기수.
샘플을 이용하면 화장품이 내 피부에 맞는지도 알 수 있고 낭비되는 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

10. 화이트 크림 만드는 법

기미나 햇볕에 탄자리를 옅게 만들어주는 크림을 직접 만들어보자.
레몬 한 개, 라임 한개(구하기 힘들다면 대신 오이를 사용한다)의 즙을 짠 다음 꿀 2큰술과 플레인 요구르트를 섞어서(걸쭉해서 흐르지 않을 정도로) 필요한 부위에 부드럽게 마사지 해준다.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이렇게 해주어야 한다.

11. 생기 있고 예쁜 눈 만드는 법

오이를 얇게 썰어서 눈을 감고 그 위에 붙여 놓으면 쓰리거나 부은 눈이 진정된다.
얇게 썬 생 감자에는 눈 밑의 그늘을 없애주는 칼륨이 들어 있다.

그리 비싸지 않은 티백(녹차나 홍차, 아무거나 좋다! 만져봤을 때 시원한 느낌이드는 상태로 준비할 것)을 눈두덩 위에 얹는다. 여기에는 탄닌산 성분이 있기 때문에 눈을 상쾌하게 만들어 준다.(단, 탄닌산이 들어 있지 않은 허브티백은 제외한다.)

여몬드 오일은 메이크업을 지울 때도 좋고, 속눈썹을 윤기 있게 해주며 극건성 피부를 위한 모이스처라이저로도 이상적이다. 또한 햇볕에 탄 피부를 진정시키는 효과도 있습니다.



#남한산성 #역사이야기

남한산성9. 마지막회


《저주의 릴레이》


여기서 인조를 위한 변명도 들어 볼까요?

전에 말한 것처럼 인조는 힘이 없었습니다.
만, 그 때의 치욕은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었죠.
일국의 왕이 오랑캐 앞에 무릎꿇고 절하면서
목숨을 구걸한 일은 역사 이래
초유의 사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인조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죠.
반정공신들이 장악한 조정은 날마다
밥그릇 찢기에 몰두하고 있었구요,
왕실은 저주로 주술로 근래 보기드문
혼돈의 콩가루 집안을 연출하고 있었죠.

근데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뜻밖에도
청나라에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어요.
강빈의 경제적 능력도 대단했구요,
청나라 고관대작들과의 교류는 그가 왕이 된 후
조선의 외교에 큰 자산이 될게 분명했죠.

인조 입장에서는 듣기만해도 치를 떨고
청한 하늘을 보기만 해도
피눈물을 흘릴 원수
청! 청! 청나라건만,
하필 그 원수의 나라, 청나라에서
그 원수같은 놈들과 어울려
고고씽하고 있는 세자를
이해할 수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드디어 8년 만에 세자가 돌아옵니다.
마치 개선장군처럼 돌아오는 소현세자를
어떻게 맞이해야 하나요?
이미 마음은 돌아섰어요.
너는 내 자식이 아니다. 개자식이다.
더구나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신임을
등에 지고 있어, 혹시... 하는
왕위 이양 강제에 대한 의구심마저 있었던 터라
인조로서는 세자를 정적으로까지 생각합니다.

그래서 8년 만에 맞이하는 자식을
등돌리고 맞이하는 거예요.
소현세자는 황당한 상황에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 등에 대고 머리를 조아려 절을 하구요,
아버지는 끝끝내 돌아보지 않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뜻밖의 냉대에 상심한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두 달만에
사망합니다.
향년 33세의 창창한 젊음이었죠.
너무 억울한 죽음이라 세간에 여러
말들이 많이 있었죠.

이후 소현세자의 집안이 풍비하고
세자비 강빈 역시 왕을 시해하려한
역적의 괴수로 박살나는 것은
분명 인조의 뜻이거나 묵인하에 이루어진
일이겠으나 정치적 안정을 위해서는
인조도 어쩔 수 없었을 거예요.
혹시라도 소현세자가 불씨가 되어
청나라가 개입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리하여 조선이 또다시 전란에 휩싸인다면
인조가 감당할 수준이 아닐테니까.
어쨌거나 정치권력의 비정함을
어디 인조만 책임질 일이던가요?
인조만 미워하지 마세요.
그래서 옛날부터 하는 말이 있잖아요.
권력은 아들하고도 나누는게 아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
인조에겐 김경징 같은 개차판이 판치고
이순신 장군 같은 명장이 없었기 때문이겠죠.
인조 주변의 반정공신들이 문제라는 뜻,
결국 결론은 다시 반정으로 돌아 가네요.


각설하고,
조선 정예군을 바보로 만들었던 김자점,
심기원 두 도원수는 전후 어찌되었을까요? 
왕을 오랑캐한테 능욕하게 만들었으니
능지처참해야 옳지 않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조를 왕으로 만든 1등공신이잖아요.
아무도 처벌받지 않아요.
김자점은 잠깐 유배되기도 하지만
다시 복귀하여 권력의 정점에 놓입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죠.
더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권력입니다.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술쳐먹고 니나노하다
강화도 수비에 실패한 강화도 검찰사
육갑병신 김경징은 유배 끝에
신하들의 불같은 상소로 끝내 사사됩니다만,
나머지 1등공신들은 권세를 그대로 유지합니다.
역시 권력은 좋은 것이여!


웃기는 것은 이 와중에 일어나는 공신들의
배신과 저주의 릴레이입니다. 
이괄의난 때 반란군에 의해 잠시
왕이 됐던 흥안군이 잡혔는데,
도원수 심기원은 왕의 허락도 받지않고 그를
처단하죠. 흥안군이
난 왕족이잖아! 왕의 허락을 받아와!
라고 소리치지만 심기원은 왕이고 나발이고
거침이 없었어요. 원래 왕족은
왕의 허락을 받아야 처벌할 수 있다네요.
하지만 왕이 왕 같이 보였겠어요?
인조는 당시 공주에서 인절미 먹던 중이었죠.
흥분한 흥안군이
너도 똑같이 억울하게 죽을 것이다 이노마!
라고 저주를 했다고 해요.

이 일로 인조의 눈밖에 난 심기원
한동안 권력에서 밀려나죠.
이후 호란이 끝나고
심기원이 좌의정을 유지하면서
남한산성의 수어사를 겸임하는 파격적인
인사조치로 권력의 한축이 되고
남한산성의 군사력까지 쥐자 슬슬
인조한테 당한 설움을 갚을 나쁜 마음을 먹어요.
장사들을 차출해 호위대를 결성하고
예전 지사(知事)였던 이일원(李一元),
남한산성의 행정권을 쥔 광주부윤 권억(權澺)
등과 모의, 인조를 몰아내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세울 작당을 합니다.

물론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있을 때니까
아무 관련이 없어요. 그러다가,
역모요!
발고가 되매,
그 즉시 체포되어 국문을 받았고
죄를 자복한 뒤 처형당하는데,
거열형을 받아요.

거열형은 죄인의 목과 팔, 다리를
다섯 대의 수레나 소와 말에 매달아 
찢어 죽이는 사형 집행 방식이죠. 
환형(轘刑), 환렬(轘裂)이라고도 하는데, 
조선시대의 경우 중국의 대명률을 수용하여 
능지처사형을 시행했지만, 집행 방식은 
거열형으로 하였다고 해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죄인을
머리, 몸뚱이, 팔, 다리 6토막을 내어 죽이되
말이나 소가 사방에서 끌게 하여
산 채로 6토막 나게 찢어죽였다는 뜻이죠.
모반 대역죄나 강상의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거열형을 시행하였다네요.

심기원은 자신의 거열형에 관여한 김자점에게
사지가 찢기기 전에 역시 저주를 합니다.
너도 똑같은 방법으로 죽게될 것이다. 이노마!

이 역모 사건에는 엉뚱하게
비운의 장수 임경업도 얽혀서
심문을 받다가 옥사합니다.
인조가 임경업을 의도적으로 죽인 건 아니고,
'심기원이 이노마가 먼저 난을 일으킨 뒤에
따로 임경업을 포섭하려 한 거 아닐까?'
라고 깊이 고민하며 임경업의 혐의에 대해
대신들과 논의할까 망설이던 찰나
임경업이 심문을 이기지 못하고
사망한 거예요.

옛날엔 역모 사건 고변이 들어가면 무조건
잡아다 쥐어짜기부터 하니까, 참 불합리하죠?
못견뎌 자백하면 거열형이고, 끝까지 버티면
독종일세, 세게, 더 세게! 빠삭!
뼈가 부서져 독종으로 죽어 나가니 말이예요.

이 역모 사건이
엉뚱하게 소현세자한테까지 불똥이 튀죠.
가뜩이나 의심 많았던 의심병 환자 인조는
스스로 쿠데타로 왕이 됐으니 쿠데타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었을 거예요.
소현세자 귀국 후에 소현세자를 의심하여
죽게하는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그럼 김자점은 어땠을까요?
김자점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한 배신자
김질의 후손입니다. 역시 배신의 피는
대를 물리는가 봅니다.
김자점은 병자호란 이후에도 도원수로서 잘못을
꿀같은 유배로 끝내고 승승장구
손자인 김세룡을 당시 실세이며 저주의 화신
조귀인의 딸인 효명옹주(인조의 庶女)와
혼인시켜 왕의 외척이 된 뒤, 영의정에 올라
국권을 전횡하며 올림픽대로 탄탄대로를
폭주하기에 이릅니다.

조선의 3대 간신에 꼽히는 김자점이에요.
그의 권력과 잔머리 술수가 어느 정도인지
보통 사람들은 가늠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김자점은 그러나 자신의 뒷배 인조가 죽고
1649년 효종이 즉위하자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기 시작해요.
평소 김자점의 독주를 비판하던
대사간 김여경과 집의 송준길 및 장령 이상일
등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해요.
화무십일홍이요, 권불십년이라. 

이에 앙심을 품은 김자점은 역관 이형장을
몰래 청나라에 보내 조선이 장차 청나라를
정벌할 계획임을 알렸고, 아울러 김상헌과
김집이 청나라를 배척하는데
앞장서고 있는 사실을 밀고합니다.
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쓴 인조의 묘지문을
청나라에 보내 양국 사이를 이간질하였으니...
이런 잡놈! 지 애비도 팔아먹을 놈!
김자점, 정말 상상초월이죠.

역사는 또한 간신 김자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김자점을 기억하기 위한 3행시 한 판

김 : 김밥을 먹다가
자 : 자꾸 막히는 것은
점 : 점마 때문이다. 김자점 간신배 점마.


효종의 기민한 수습으로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고 나니 조정의 신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엄형에 처할 것을
상소하였으며, 죄상이 드러나자 광양에
유배 조치합니다.
여기에 조귀인의 효종에 대한 저주사건을
조사하던 중, 드디어 김자점의 역모가 드러나니
김자점을 친국해 김자점과 아들 익(釴)이
정신(廷臣)과 각지의 수령 및 지방 장수들과
내왕한 서신을 통해 역모를 주도하였음을
확인합니다.
이에따라 인조의 후궁 귀인(貴人) 조씨를
사사하고, 김자점 및 아들과 손자는
능지형에 처하고 가산을 몰수하니,
이것이 이른바 김자점의 난입니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의 야사집인 '청성잡기'에는 
김자점이 심기원의 능지형을
공개적으로 제안하여 산 채로 사지를
토막낸 후 죽였으며,
심기원은 김자점을 저주,
또한 김자점 역시 같은 방식으로 처형된 후
능지형이 폐지되었다고 합니다.
결국 김자점이 마지막 점을 찍어
결자해지를 한 건가요?


에구, 나라는 거덜나고 공신들은 너무 배불러서 싸움박질에 저주씨가 릴레이를 하고,
역모씨가 난무하다가 외침에 내란에
민초들만 죽어나니 이게 나라꼴이냐?
이럴려고 반정했냐?
역시 명분 없는 반정의 폐해는
감히 헤아릴 수 없을만큼 엄청납니다.
반정은 엄연한 권력다툼이며
피바람을 불러올 최악의
유혈 난투극이기 때문이죠.

결국 임금이 무릅꿇고 항복하는
초유의 역사에서 누가 무슨 책임을 졌으며,
어떤 반성을 했을까요?
헛발질만 했던 조선의 장수들은 끝까지
기고만장해서 떵떵거리다가
넘치는 권력을 주체하지 못해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하며
저주 릴레이를 하고 있었으니...

이들의 저주의 릴레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반정의 폐해와 권력자들의 뻔뻔스러움,
그리고 한번 배신은 영원한 배신이다,
라는 사실입니다.

참담하기 그지없었던 남한산성의 역사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 걸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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