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화학과 류문식
주제: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에 포함되고, 의지로서의 세계를 포함하는 것은 예술이다. 나는 여기서 예술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로서 해석하겠다. 모든 사람들이 가진 예술성에 의해서 의지로서 이해되는 이데아 세계는 설명될 수 있다.
구성 및 내용, 의견
대학교 2학년 시절, 교양 수업 ‘철학의 이해’ 수업 시간에 들었던 쇼펜하우어에 대한 간단한 수업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뭐, 내 능력으로는 그 당시 들었던 구체적 수업 내용은 기억해 낼 수 없지만, 한 가지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있다. ‘인생은 햇빛 찬란한 대지위에 뜬 먹구름 아래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간단히 내가 이해한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해보자면, 앞을 내다봐도, 뒤를 돌아봐도 햇빛 찬란하며, 계속 걸어가 보면, 어떤 좋은 것이 있을 것 같고, 걸어온 길을 되돌아봐도 참 좋은데, 결국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좋지 못한 상황 속을 걸어가고 있다는 말로 이해가 되었다. 이 말은 그 당시 나의 상황과 맞물려 나에게 큰 감명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 자신이 인식하는 세상의 ‘물’에 대한 이해와 그 본성을 찾아 가는 길을 길 가운데 생각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언급하는 것은 표상의 세계로, 표상의 세계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우리와의 관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그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보다 더 깊은 실재가 존재 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의지로서의 세계이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우리 눈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음악이나 신체적 움직임을 보일 때 얼핏 보이기도 한다. 그 다음으로 쇼펜하우어가 언급하는 부분은 가장 주목했던 부분인 예술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그는 예술이 의지의 활동으로서 인간에게 의지로서의 세계의 여러 모습들을 드러내는 피난처의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고통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명언의 분위기와 느낌을 같이 하고 있다.
1. 표상으로서의 세계
책의 머리에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표상이란 말을 찾아봤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재현하는 세계, 의지로서의 세계’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경험에 의한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경험은 언제나 지각하는 의식의 관점에서 가능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과 그 경험에 의해 인식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사물의 참된 본성을 지각할 수 없는 것이고, 결국 어떤 대상에 대해 겉핥기식의 이해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의도하는 바는 겉핥기에서 끝나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그 사물의 본질까지의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하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칸트의 경험하는 세계 이론과 비교된다..
2. 의지로서의 세계
의지로서의 세계는 우리 인간에게 쉽게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경험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쇼펜하우어는 이야기 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의지활동에 우리가 우리 신체를 움직이기 위한 힘을 경험할 때 의지로서의 세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의지는 신체의 움직임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즉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또 다른 대상으로 경험하며 동시에 그것을 의지로서 경험한다는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현실 세계를 이야기 한 것이라면, 의지로서의 세계는 플라톤이 이야기 한 이데아의 세계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어떤 사물의 표면에 집중하는 반면에 의지로서의 세계는 사물의 본질의 세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 되는 것일까? 의지활동을 하면 어렴풋이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어렴풋한 세계라면, 그 세계를 확신할만한 무엇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책을 읽어가도 의지로서의 세계라는 막연한 정리일 뿐 어떠한 체계나 구체적 내용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얘기하는 의지란 인간의 의지를 이야기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의지로서의 세계는 결코 이데아의 세계나 현상 세계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세계는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의지에 의해 보여지는 세상이라면, 그 의지로서의 세계는 그 개인 혼자만의 공상의 세계가 되기가 쉬울 것 같다. 만약 모두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를 생각해보자면, 굳이 의지로서의 세계를 쫓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그런 세상이 아닌 것일까?
의지란 지성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은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는 ‘길에 놓여진 돌맹이 하나도 의지의 표현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의지라는 말을 다시 해석해본다면, ‘누군가의 뜻’으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의 의지에 의해 길 가운데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이 커지게 된다. 과연 그 의지, 뜻이란 것은 어디까지란 것인가. 우리의 생각이나 이성도 어떠한 절대자의 의지와 뜻 아래 놀아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의지와 뜻에 의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신, 절대자의 뜻에서 일어나는 것이란 말일까? 쇼펜하우어는 신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의지로서의 세계와 또한 그 의지로서의 세계를 바라볼 때 어떤 절대자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절대자의 본질이나, 성품 등에 대한 논의가 내 안에서 끝없이 일어났다.
3. 예술에 관하여
예술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예술작품의 감상은 우리로 하여금 의지활동의 밀어붙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라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잊게 된다. 예술의 천재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표현하거나 기술하는 개별적 사물들의 형상들 또는 플라톤적 이데아들을 드러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지각하는 것에 대한 플라톤적 이데아를 경험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의 기능에 있어서, 예술이 우리 인간의 의지 활동의 피곤함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추구해나가는 의지로서의 세계를 드러내는 활동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을 통해 어떤 편안함과 즐거움과 기쁨만을 선사받게 되는 것일까?
예술에는 예술작품을 제작해낸 예술가의 정신과 의도가 담겨있다.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느낌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작가의 의도와 전해주려는 의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예술은 예술가들이 가진 이데아를 들어내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이란 것은 처음부터 그 예술가의 의도와 정신의 표현이 담긴 것인데, 이것을 다른 사람이 인식함으로 또 다른 이데아, 의지로서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 도구로 이해될 것 같다. 예술이 예술의 감상자들에게 언제나 편안함과 즐거움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역겨움이나 두려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고, 예술을 통해서 어떤 영감이나 자극을 받는 일도 있을 것이다.
예술은 인간에 어떤 의미일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예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예술은 예술가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식으로든 정해진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예술을 통해 얻는 것은 힘든 것이 될 것 같다. 예술의 범위와 표현이 의지로서의 세계보다 한 단계 더 넓은 것으로서 의지로서의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술이란 것은 세상의 무엇이든, 적용되고 포괄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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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의지로서의 세계에 포함되고, 의지로서의 세계를 포함하는 것은 예술이다. 나는 여기서 예술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의미로서 해석하겠다. 모든 사람들이 가진 예술성에 의해서 의지로서 이해되는 이데아 세계는 설명될 수 있다.
구성 및 내용, 의견
대학교 2학년 시절, 교양 수업 ‘철학의 이해’ 수업 시간에 들었던 쇼펜하우어에 대한 간단한 수업 내용을 기억하고 있다. 뭐, 내 능력으로는 그 당시 들었던 구체적 수업 내용은 기억해 낼 수 없지만, 한 가지 내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는 쇼펜하우어의 말이 있다. ‘인생은 햇빛 찬란한 대지위에 뜬 먹구름 아래를 걸어가는 것과 같다’ 간단히 내가 이해한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해보자면, 앞을 내다봐도, 뒤를 돌아봐도 햇빛 찬란하며, 계속 걸어가 보면, 어떤 좋은 것이 있을 것 같고, 걸어온 길을 되돌아봐도 참 좋은데, 결국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좋지 못한 상황 속을 걸어가고 있다는 말로 이해가 되었다. 이 말은 그 당시 나의 상황과 맞물려 나에게 큰 감명이 되었던 기억이 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 자신이 인식하는 세상의 ‘물’에 대한 이해와 그 본성을 찾아 가는 길을 길 가운데 생각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다. 첫째로 언급하는 것은 표상의 세계로, 표상의 세계란,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우리와의 관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다음으로는 그는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보다 더 깊은 실재가 존재 한다고 이야기 하는데, 이것이 의지로서의 세계이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우리 눈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음악이나 신체적 움직임을 보일 때 얼핏 보이기도 한다. 그 다음으로 쇼펜하우어가 언급하는 부분은 가장 주목했던 부분인 예술에 대한 그의 견해이다. 그는 예술이 의지의 활동으로서 인간에게 의지로서의 세계의 여러 모습들을 드러내는 피난처의 역할을 한다고 이야기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떠한 고통에 대해 비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한다. 내가 기억하고 있는 그의 명언의 분위기와 느낌을 같이 하고 있다.
1. 표상으로서의 세계
책의 머리에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라는 문장을 읽으면서 표상이란 말을 찾아봤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재현하는 세계, 의지로서의 세계’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경험에 의한 지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경험은 언제나 지각하는 의식의 관점에서 가능하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과 그 경험에 의해 인식되는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 때문에 사물의 참된 본성을 지각할 수 없는 것이고, 결국 어떤 대상에 대해 겉핥기식의 이해만을 하게 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의도하는 바는 겉핥기에서 끝나는 사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그 사물의 본질까지의 지식을 우리에게 제공하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칸트의 경험하는 세계 이론과 비교된다..
2. 의지로서의 세계
의지로서의 세계는 우리 인간에게 쉽게 보여지지 않는 것이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경험에 의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쇼펜하우어는 이야기 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의지활동에 우리가 우리 신체를 움직이기 위한 힘을 경험할 때 의지로서의 세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의지는 신체의 움직임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한다. 즉 세계 속에서 마주치는 또 다른 대상으로 경험하며 동시에 그것을 의지로서 경험한다는 것이다.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현실 세계를 이야기 한 것이라면, 의지로서의 세계는 플라톤이 이야기 한 이데아의 세계를 이야기 하는 것 같다. 또한 앞에서 이야기 했듯이 표상으로서의 세계가 어떤 사물의 표면에 집중하는 반면에 의지로서의 세계는 사물의 본질의 세계를 이야기 하고 있다.
의지로서의 세계는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인식 되는 것일까? 의지활동을 하면 어렴풋이 보이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이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어렴풋한 세계라면, 그 세계를 확신할만한 무엇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책을 읽어가도 의지로서의 세계라는 막연한 정리일 뿐 어떠한 체계나 구체적 내용에 대한 내용이 없는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얘기하는 의지란 인간의 의지를 이야기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의지로서의 세계는 결코 이데아의 세계나 현상 세계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세계는 아닐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의지에 의해 보여지는 세상이라면, 그 의지로서의 세계는 그 개인 혼자만의 공상의 세계가 되기가 쉬울 것 같다. 만약 모두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는 세계를 생각해보자면, 굳이 의지로서의 세계를 쫓거나 생각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모든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그런 세상이 아닌 것일까?
의지란 지성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은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그는 ‘길에 놓여진 돌맹이 하나도 의지의 표현이다’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의지라는 말을 다시 해석해본다면, ‘누군가의 뜻’으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어떤 사람의 의지에 의해 길 가운데 무엇인가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일’이 커지게 된다. 과연 그 의지, 뜻이란 것은 어디까지란 것인가. 우리의 생각이나 이성도 어떠한 절대자의 의지와 뜻 아래 놀아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 인간의 의지와 뜻에 의해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들은 신, 절대자의 뜻에서 일어나는 것이란 말일까? 쇼펜하우어는 신에 대한 구체적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의지로서의 세계와 또한 그 의지로서의 세계를 바라볼 때 어떤 절대자의 존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절대자의 본질이나, 성품 등에 대한 논의가 내 안에서 끝없이 일어났다.
3. 예술에 관하여
예술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예술작품의 감상은 우리로 하여금 의지활동의 밀어붙임에서 벗어나게 해준다’라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을 감상하는 동안 우리는 스스로를 잊게 된다. 예술의 천재는 작품을 통해 자신이 표현하거나 기술하는 개별적 사물들의 형상들 또는 플라톤적 이데아들을 드러내 줄 수 있다고 믿는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지각하는 것에 대한 플라톤적 이데아를 경험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예술의 기능에 있어서, 예술이 우리 인간의 의지 활동의 피곤함에서 벗어나게 해준다고 주장한다. 즉, 인간이 추구해나가는 의지로서의 세계를 드러내는 활동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술을 통해 어떤 편안함과 즐거움과 기쁨만을 선사받게 되는 것일까?
예술에는 예술작품을 제작해낸 예술가의 정신과 의도가 담겨있다. 예술 작품이 우리에게 전해주는 느낌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어느 정도는 작가의 의도와 전해주려는 의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는 예술은 예술가들이 가진 이데아를 들어내는 것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렇다면, 예술 작품이란 것은 처음부터 그 예술가의 의도와 정신의 표현이 담긴 것인데, 이것을 다른 사람이 인식함으로 또 다른 이데아, 의지로서의 세계를 인식하게 되는 도구로 이해될 것 같다. 예술이 예술의 감상자들에게 언제나 편안함과 즐거움만을 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역겨움이나 두려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고, 예술을 통해서 어떤 영감이나 자극을 받는 일도 있을 것이다.
예술은 인간에 어떤 의미일까?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것처럼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어떤 정보를 제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예술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예술은 예술가의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인지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식으로든 정해진 의지로서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예술을 통해 얻는 것은 힘든 것이 될 것 같다. 예술의 범위와 표현이 의지로서의 세계보다 한 단계 더 넓은 것으로서 의지로서의 세계를 포괄하는 것이 된다고 생각한다. 예술이란 것은 세상의 무엇이든, 적용되고 포괄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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