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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예술철학 레포트-(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대해서)

작성자남윤선|작성시간03.11.29|조회수502 목록 댓글 0

사실주의미술
실재하는 현실을 주관적으로 변형 ·왜곡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예술가의 태도.

미술에서 사실주의는 미술사의 유파, 그리고 예술철학적 관점에서 특정한 세계관에 대해 말할 때 사용되는 미술비평 또는 미술사적 용어이다. 미술사조로서의 사실주의는 일반적으로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나타난 유파를 일컫는 것으로서 G.쿠르베와 H.도미에, F.밀레 등의 화가들이 지향했던 태도와 기법을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현실을 충실하게 반영하고자 하는 태도는 19세기 이전에도 있었으며 그 사례를 구석기시대 원시동굴벽화로부터 북유럽 르네상스 시대의 J.반 아이크와 알브레히트 뒤러, 17세기의 카라바조, 베르메르, 렘브란트, D.벨라스케스, 그리고 F.고야 등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미술사적 맥락에서 사실주의는 19세기 언어적 산물로서 1821년에 샹플뢰리에 의해 제안되어 19세기 중엽에 하나의 예술운동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당시 사실주의는 예전의 미메시스(mimesis:모방)이라는 용어를 대체하여 예술의 실재에 대한 의존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으나, 그 후 일반적인 개념으로 정립됨에 따라 미메시스만큼이나 애매한 것이 되었다. 즉 사실주의가 이론적 용어로 분류되는가 하면 마르크스주의에서 보여지듯 실천적 의미로 통용되기도 한다.

20세기에 들어 추상과 다른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재현적인 경향에 대해 ‘사실주의’라는 명칭을 부여하는 경향이 많다. 그런 만큼 사실주의는 해석하기에 따라 매우 다의적이며, 그 극단적 사례를 마술적 사실주의라는 서로 모순관계에 있는 언어가 결합된 명칭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점이 사실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 정의를 가로막고 있는 장애요소이다.

그러나 관학주의와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가 지배하던 19세기 프랑스에서 객관적인 현실의 충실한 재현이란 과제를 수행하고자 한 사실주의는 당시 미술과 비교해볼 때 전위적인 성격을 드러낸다. 그들은 그 시대에 적합한 것은 당시대의 현실 속에서 취해져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믿음의 이면에는 자연과학 및 기술의 발달에 의한 자연과 사회현실에 대한 관심의 고조, 계몽주의 사상의 파급, 프랑스 대혁명을 통한 민주주의 사회의 도래와 실증주의 철학의 확산, 산업혁명, 마르크스 ·엥겔스에 의한 과학적 사회주의로의 발전이란 사회적 배경과 조건이 작용하였다.

사실주의라는 용어가 화가에 의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855년 쿠르베가 당시의 관학적인 살로에서 주목받지 못한 자신의 작품들을 모아 개최한 개인전에 ‘레알리슴’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때부터였다. 이미 1820년대부터 프랑스 예술계에서 언급되던 사실주의를 자신의 회화에 채택한 쿠르베는 J.A.앵그르와의 천사(天使) 논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천명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즉 고상하고 우아하며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당시의 지배적인 미적 규범과 상반되는 노동자,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대한 앵그르의 불만에 맞서 쿠르베는 “나에게 천사를 보여주면 나는 그것을 그릴 수 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이것은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은 결코 그리지 않겠다는 태도이며 그 밑바탕에는 19세기 프랑스의 ‘과학주의적 태도’가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쿠르베는 ‘미술에서 성 토마스’와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토마스의 의심과 같은 맥락에서 쿠르베의 태도는 실증주의와 상응할 뿐만 아니라 E.졸라나 콩쿠르 형제의 예술이론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과학주의’와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것이야말로 근대정신의 발현이다.

쿠르베는 자신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사회주의적이라는 당시 미술계의 비평에 맞서 “나는 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공화주의자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리얼리스트이다”라는 말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즉 리얼리즘은 이러저런 방식으로 그려야 한다는 기법이나 방식으로부터 세계관으로 표명되었으며, 이런 경향은 예술을 인종 ·시대 ·환경의 측면에서 고찰하고자 한 역사가 H.텐과 소설가 졸라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경향이다.

쿠르베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리얼리즘 정신이 구현된 작품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소실되었으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알려지고 있는 《돌깨는 사람들》과 그 이듬해에 그려진 《오르낭의 매장》일 것이다. 특히 《오르낭의 매장》에서 그는 매장의 세속적인 의미를 강조하여 이 풍경을 사회공동체에 내재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부각시켰다. 매장되는 사람은 누구라도 상관없으며 따라서 죽은 자의 영혼이 어떻게 되든, 또 내세와 어떤 관계를 가지든 상관없다. 매장되고 있는 장소, 그리고 매장에 참여하고 있는 공동체의 성격만이 이 그림의 요점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회적 ·회화적 리얼리즘이다.

쿠르베와 더불어 리얼리스트로 분류할 수 있는 동시대의 화가는 도미에와 밀레이며 쿠르베의 회화를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리얼리즘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정직한 기록이자 현실의 규명(糾明)이며 세계관의 반영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리얼리즘이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지니며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고 있는 점을 고려해볼 때, 리얼리즘은 하나의 사조로서 미술사 속에 박제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새롭게 조명받는 세계관의 한 형식임을 알 수 있다.




인상주의미술

19세기 후반, 주로 1860∼1890년대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상의 주의.


인상주의미술을 추진한 화가들을 인상파라고 하는데, 이 일파가 지향한 것은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는 데 있었다. 당시 급속하게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나 옥외로 나가서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었다. 그들에게 자연은 종래의 화가들이 나타낸 것처럼 그렇게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극히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것으로 비쳤다. 빛의 변화에 따라 같은 풍경이라도 전혀 양상을 달리하고 그 속에 포함된 대기의 뉘앙스의 미묘함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이와 같이 빛의 문제, 밝음의 추구에서 색채의 문제에 이른 그들은 변하기 쉬운 자연의 순간적 표정의 파악을 위하여 여러 가지 표현상의 새로운 기법을 발견하는 동시에 그 제작 태도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자기들의 직관(直觀)을 중시하고, 당초에 지향했던 대상의 객관적 재현의 범위를 벗어나 주관적인 감각의 반영에 전념하게 되었다.
인상주의가 미술상 또는 사상에 있어서 근대적 감성의 해방운동이고 객관주의에서 주관주의로 옮아가는 중요한 교량이라든가, 서유럽 사실주의미술의 최종단계이자 극치인 동시에 20세기 예술을 향한 기점이라고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미술상의 인상파가 성립된 것은 1860년의 파리에서였다. 종래의 아카데믹한 작풍에 불만을 느낀 몇몇의 개성적인 청년작가들이 모여 하나의 그룹을 형성한 것이다.
이미 1857년경부터 피사로, 세잔, 기요맹이 차례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아카데미 스위스'에서 제작하였고, 같은 무렵 바질·모네·르누아르·시슬레 등도 '글레르의 아틀리에'에서 서로 우정을 맺었다. 이 중 모네는 '아카데미 스위스'에도 출입하여 이들 7명의 화가들은 곧 지기(知己)가 되어 매주 목요일에 카페 게르부아에 모여 새로운 회화에 관해 열심히 토론하였다. 이곳에는 그들 외에 새로운 예술의 옹호자 졸라와 그 밖에 시인·평론가들도 모였다. 그들은 1863년 낙선화전에 출품한 《풀밭 위의 점심》으로 혹평을 사고, 1865년 살롱에 출품한 《올랭피아》로 격렬한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혁신화가 마네를 그들의 수령으로 받들고 밝고 대담한 새로운 회화관으로 해서 크게 계발(啓發)되었다.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은 이 카페 게르부아의 모임을 자연 해산시켰으나, 모네·피사로·시슬레 등이 전쟁을 피하여 런던으로 가서 터너와 컨스터블 등 영국 근대 풍경화파의 외광표현(外光表現)을 접한 사실은 벨라스케스·고야·들라크루아 등, 인상파적 기법을 선구적으로 이미 실천하여 그들에게 영향을 준 작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운동의 개화(開花)에 크게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전후(戰後)에 각각 파리로 돌아와, 1874년 봄 나달의 사진관에서 이 파의 첫 전람회인 '화가·조각가·판화가 무명예술가협회' 제1회전을 열었다.
이때 출품된 모네의 작품 《인상·일출(日出)》이라는 풍경화의 제명(題名)을 따서 르루아라는 한 미술기자가 '인상파전람회'라고 하는 다분히 조롱 섞인 기사를 《샤리바리》에 실은 것이 '인상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되었다. 이 그룹전은 세상의 몰이해와 싸우면서 1886년까지 전후 8회에 걸쳐 열렸는데, 1877년의 제3회전부터는 그들 자신도 '인상파'라는 명칭을 사용할 만큼 이 명칭은 일반화되었다.
이 인상파 그룹과 8회에 걸친 그들 전람회의 경과는 물론 일률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우두머리격인 마네는 처음부터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룹의 유력한 작가들이 전람회에 참가한 횟수를 보아도 8회 동안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출품한 사람은 피사로 단 한 사람뿐, 그 밖의 드가와 모리조는 7회, 기요맹이 6회, 모네와 고갱이 5회, 시슬레와 르누아르가 4회, 세잔은 2회에 불과했다. 쇠라·시냐크·르동 등은 겨우 마지막 전람회에 등장했을 뿐이다.
이런 사실만 보아도 소수 화가들의 12년에 걸친 악전고투의 인상파운동이 그다지 통일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세평(世評)이 호전된 그 시점에서 이전부터 다소 난맥상을 보여 왔던 그들의 공통적 사고와 그룹으로서의 결속은 무너져, 제8회전의 성공 후 각자 자기 길을 걸었다.
그런데 인상파화가들은 재능과 기질면이 서로 다르듯이, 화풍에 있어서도 결코 한결같지 않았다. 모네·피사로·시슬레 등이 그 중에서도 인상파의 작풍을 가장 잘 나타낸 작가들로 알려져 있으나, 그들도 역시 시기에 따라 화풍이 변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의미에서 말한다면 인상파화가들이 유형적인 아카데미즘에 반항하고 어떤 관례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관찰과 기법으로 밝고 미묘한 대기(大氣)의 인상을 묘사하는 데 전념했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었다. 빛의 효과를 교묘하게 나타낸 예로서 그들은 앞서 든 화가들 외에도 부댕이나 용킨트 등의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는 기법상의 특색에서도 얻는 바가 많았고, 선명한 색채감이나 유동적인 구도를 보여 주는 일본의 풍속화(우키요에)에서도 많은 계시를 받았다.
그들은 이른바 '외광파(外光派)'로서 언제나 옥외(屋外)에서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자연계의 모든 색은 빛과 대기에 의해 생겨나고 변화하므로 물체 고유의 색(고유색)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또한 사용하는 색채를 햇빛의 프리즘분해에 의해 얻을 수 있는 7색(色)에 한정하려 하였다. 그들은 팔레트에서 검정과 갈색을 추방하고 그늘부분에도 명도(明度)가 낮은 색채, 파랑이나 보라를 사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색조(色調)의 분할이라든가 색채의 병치(竝置)라고 하는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고안하였다. 빛의 광휘(光輝)를 될 수 있는 대로 강조하기 위해 팔레트에서 그림물감의 혼색을 피하고 순수색(純粹色)을 작고 짧게 칠하여 시신경(視神經)을 자극하도록 하는 한편, 서로 다른 순수색(특히 補色관계에 있는 색끼리)을 세밀하게 병치시켜 색채의 선명함을 한층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서로 인접하는 색들이 보는 사람의 망막 위에서 혼연히 융합되고(시각혼합작용), 게다가 그 융합된 색조는 팔레트 위에서의 명도가 떨어지는 혼색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선명함을 간직하기 때문이었다. 신인상파(新印象派)는 인상파화가들이 경험 속에서 발견한 이 색채원리를 더욱 철저화한 데서 출발하였다.



후기인상주의미술


후기인상주의는 인상파에 속하거나 또는 그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차츰 그 영향에서 벗어나 개성적인 방향을 모색함으로써 내부에서 인상주의를 수정하려고 한 사람들의 경향을 가리키는데, 이 말은 훗날 영국의 미술비평가 로저 프라이에 의해 아주 막연한 의미에서 명명(命名)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후기인상파로는 세잔, 고흐, 고갱 등을 지칭하는데, 동시대인인 로트레크, 드가, 르누아르 등을 후기인상주의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그러나 물체의 실재감과 공간구성을 추구한 세잔이건, 강렬한 색과 붓끝으로 내적 생명을 표출한 고흐이건, 또는 원시성과 신비감을 원색(原色)을 종합적으로 사용하여 상징적 색채로 나타내려 한 고갱이건, 이 화가들의 작풍은 어디까지나 개별적이고 집단으로서의 공통성은 없었으며, 오히려 인상파 이후의 20세기 회화의 발전을 준비한 다채롭고 중요한 한 단계로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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