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덕적인간과 비도덕적사회 - 라인홀드 니버 >
주 제 : 도덕적인 개인이 집단에 들어가면 비도덕적인 인간이 된다??
( 과연 도덕적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인가? )
구 성 :
p 276 도덕의 문제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집단들의 관계로 옮겨가면 갈수록 이기적 충동은 사회적 충동을 누르고 득세하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내면적 억제도 이기적 충동을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다.
p 286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유지되고, 또 이러한 충성심이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인정된다면, 개인의 높은 도덕적 이상이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상충하고 있는 경우에라도 개인은 얼마든지 비이기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개인의 이익은 집단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기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간접적 이기주의는 집단 내에서 개인이 보여주는 이기적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p 287 설상가상으로 한 사회집단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물론 처음에는 아무런 사심 없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출발하지만, 그 집단 내에서 또는 보다 특권적인 집단으로 전환함에 의해 얻게 될 엄청난 개인적 보상으로 인해 끊임없는 유혹을 받게 될 가능성이 항상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이익이 항상 그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합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내 용 :
니버라는 사람은 책의 제목을 통해서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이미 다 말하고 있는 것 같다. ‘ 도덕적인간과 비도덕적사회 ’.....이는 우리 인간 개개인은 도덕적인데, 사회는 비도덕적이라는 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읽어나갔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큰 틀은 잡은 것 같은데, 솔직히 이해가 쉽게 되지는 않았다. 단지 개인적인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폭력과 비폭력과 같은 이야기들까지 더해져서 읽으면서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책을 처음 봤을 때는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했는데, 너무 얕잡아 봤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하는 그 큰 틀은 우리 개인적인 인간은 도덕적인데, 그 개인이 사회에 들어가게 되면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이게 변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들이 쉽게 생각해보면 이 말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님비현상 같은 예를 살펴보면 말이다. 자신들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비도덕적인 행동도 할 수 있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선하고 동정심을 가지고 있고, 양심적이었던 개인이 집단에, 사회에 속해있다고 해서 그 행동들이 모두 비도덕적이라고, 비도덕적인 인간이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어느 정도 그 개인들에게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이기주의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집단이 무엇이 길래 그들을 그렇게 바꾸어 논다는 것일까?
사람의 본성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인 인간이 집단에 들어가서 비도덕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이미 비도덕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집단에 들어가서도 더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거라 생각된다.
이것에 대해 생각해보기에 앞서 성선설과 성악설을 생각해보자. 먼저, 성선설은 ‘ 사람은 선한 본성을 타고난다. ’는 맹자의 인성론을 말한다. 맹자는 사람들은 본래 다 선하게 태어나지만, 결코 다 선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인의예지와 같은 4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니버는 성선설 쪽의 생각에 있는 것 같다. 개인으로 보면 그 자체가 도덕적이고, 선한데, 주변적인 환경이랄지, 요소들로 인해서 그들은 선하지 못하게 되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성선설의 입장보다는 성악설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지금 우리현실에 있어서는 더 맞는다고 생각한다.
성악설은 ‘ 사람의 성(性)은 원래 악하며, 선하게 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 이다. ’ 라고 한 중국 전국시대 순자의 인성론이다.
이 순자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누구나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며, 좋은 목소리와 예쁜 용모를 탐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 만일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본성에 따르고 그의 욕구에 따라간다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고 사회 질서가 어지러워져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이 있어 법으로 교화하고 예의로 인도한 뒤에야 사양하는 데로 나가고 예의 세세한 조리에 합당하게 되어 천하는 질서 있게 된다. ” 고 주장했다. 순자는 인성이 비록 악하지만, 사람의 후천적 노력에 의하여 선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능력은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발휘할 수만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악설에 대해 다시 보고 나니 내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요즘 현대의 개인은 성선설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악설에 따르는 것 같다. 개인주의니 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려고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도 기꺼이 하는 것이 요즘 현대의 사람들인 것 같다.
길가다가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행동들, 버스 안에서 노약 석에 앉아놓고, 어른들이 와도 결코 자리 양보하는 일이 없고, 다른 사람보다 빨리 가려고 새치기 하고, 갖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져가고, 거짓말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몰래 폐수를 강에 흘려버리고, 성을 매매하고, 상대방을 이간질 시키고, 남을 속이고, 폭력을 휘두르고, 돈을 빼앗고, 사기치고........... 이런 갖가지 문제가 되고 있는 행동들을 보면 현대의 개인들은 결코 도덕적이지 못하고 비도덕적이다. 좀더 심하게 말한다면 선하지 못한 악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니버가 보는 도덕적인 개인은 과거의 이야기 같다. 요즘엔 사회나 집단과 같은 곳에서의 이익을 보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인간이 아니라 비도덕적인인간이라고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비도덕적사회를 도덕적사회로 고쳐야할 지도 모른다. 이런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개인들을 도덕적으로 선하게 교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사회이기 때문이다. 성악설에서 순자가 말했듯이 사람들의 본성은 악하지만, 교육을 통해서 이러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이런 교육을 우리 사회에서 해주고 있다.
초등학교 때는 바른생활을 통해서, 중학교 때는 도덕, 고등학교 때는 윤리라는 과목을 통해서 가장 기본적이고 올바른 행동을 하게끔 교육을 받는다. 이런 교과서를 통한 교육뿐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은 집단에서, 사회에서 교육을 받는다. 가장 작은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가정이고, 학교이다. 가정에서의 교육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떤 것이 선한 행동인지, 도덕적인 행동인지를 습득하게 된다. 이런 교육으로 비도덕적인 개인들은 도덕적인 행동을 하게끔 바뀌는 것이다. 집단이나 사회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보다는 모두를 위한 이익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 그들은 도덕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니버는 다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개인이 집단에 들어가면 그 집단의 이익이 곧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집단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더 챙기기 위해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앞에서 누누이 말했듯이 니버의 이런 입장은 요즘 현대의 사회와는 맞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개인이 집단에 속하게 됨으로써 그 집단을 위한 이익을 추구 하려 고는 하겠지만, 이를 위해 도덕적인 인간이 비도덕이게 된다는 생각은 터무니 없다고 느낀다. 오히려, 비도덕적인 인간이 사회에, 집단에 속하게 됨으로써 그 안에서 도덕적인 인간으로 교화된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비도덕적 인간이고, 사회야 말로 도덕적인 사회일 것이다.
개인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사회라는 커다란 곳에 들어가면 그것은 작은 실수로 무마될 수 있는 것처럼, 개인이 집단에 들어가서 더 이기적이고 비도덕이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용해주는 사회라는 품안에서 덜 이기적이고, 도덕적이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생각할 때 니버가 말하는 도덕적인간은 사회 안에 있을 때 더 빛을 낼 수 있을 것이다.
< 단어 수 : 1004 >
구성 ~
1) 183 이제 이 정치철학은 더 이상 상층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신념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내적 ․ 외적인 공감을 보이고 있고, 자본가들은 소심한 공동체에 위협을 가하면서 인내심 없고 음흉하며 반항적인 노동계급에게 양보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도깨비로 사용한다.
2) 184 폭력과 혁명은 일반적으로 사회변화의 도구로서 일단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 하지만 그들은 폭력이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라고 가정하는 점에서 분명 오류를 범하고 있다.
3) 185 동기와 궁극적 목적 사이에 놓여 있는 수단들과 보다 저차적이고 직접적인 목적들을 선택하는 문제는 윤리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실용주의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4) 186 일단 우리가 강제력의 요소를 윤리적으로 정당한 범주에 귀속시키게 되면, 설사 그것이 항상 도덕적으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폭력적인 강제성과 비폭력적인 강제성을 절대적으로 구별해낼 수 있는 경계선을 확립할 수 없게 된다.
5) 187 ~ 이와 같은 것들이 바로 복잡한 집단간의 관계에 담겨 있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개인관계의 윤리를 무비판적으로 집단간의 관계에 적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6) 188 도덕의지는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생명, 이익 및 권리를 고려하는 테서 드러난다. 이웃사람들을 신뢰하는 것은 선한 태도이다.
7) 188 비교적 단순한 개인들간의 관계에서조차 절대적이라고 간주될 만한 도덕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는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8) 189 반성적인 도덕성은 항상 본질적으로 선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도덕적 가치들을 새로이 분석해야 하며, 또 그 가치들을 도구적인 차원에서 판단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9) 189 사회는 일반적으로 생명에 대한 외경이 근본적인 도덕적 태도라고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살인자의 생명을 빼앗는다.
10) 190 사회는 의견발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사회적 선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는 사상의 자유가 타고난 권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진보의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11) 190 중간층은 자유와 개인생명의 존중, 소유권, 상호신뢰와 이타심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 데 비해, 프롤레타리아는 집단에 대한 충성과 그 결속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12) 193 이와 더불어 혁명전략은 동기나, 혹은 견고한 도덕적 기반을 제공해주는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13) 193 폭력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제도가 확립되고, 또 그 제도를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면, 폭력과 혁명을 배제시켜야 하는 순수하게 윤리적인 근거는 있을 수 없다.
14) 193~194 ~ 일단 우리가 숙명적으로 정치를 위해 윤리를 양보하고, 또 사회적 결속의 불가피한 수단으로서 강제력을 받아들인 이상, 우리는 비폭력적 강제와 폭력적 강제, 혹은 정부가 사용하는 강제력과 혁명가가 사용하는 강제력 사이에 절대적인 구별을 지을 수는 없다.
15) 197 가장 부유한 계층과 가장 궁핍한 계층이 공동의 목표하에 결성한 정당에 중간층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파시즘의 정치적 지략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를 잘 보여준다.
16) 201 현대 국가가 독일의 경우에서처럼 사회적 ․ 경제적 갈등에 의해 붕괴되는 경우에조차도, 애매모호한 자기보존의 본능과 여전히 잠재적인 국가적 통일의식이 막연한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17) 203 그리고 현재와 같은 재정적 위기는 중간층이 자신들의 기존 권력을 유지하는 한, 공산주의 혁명보다는 파시스트적 경향을 불러일으킨다.
18) 205~206 만약에 혁명이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완전히 뿌리뽑고 평등의 정의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 혁명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많은 잘못들은 대부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 208 최초의 권력과 특권의 균등화가 사회에서의 상호평등의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한 공산주의자의 가정은 분명히 옳다.
20) 210 인간이란 항상 최소한의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욕구들을 확대시킬 수 있는 상상력이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필요보다는 자신의 필요를 더 절실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기적이다.
21) 213 종교의 현실에 있어 절대주의는 부조리를 허용하고, 정치의 현실에 있어서는 잔인성을 용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와 잔인성은 인간본성의 타성이 절대적 이상에 대한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그 결과들이 정당화되지 못한다.
22) 213 개인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해도 없고 열정적인 기행 정도로 비치는 열광주의도 정치적 정책으로 나타나게 될 때에는 인류에 대한 자비와는 전혀 무관해져버린다.
23) 215 노동자들은 분쟁이 일정기간 계속되면 자본가의 경제적 자원과 도저히 비교가 안되기 때문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노동계급은 굶주림에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24) 216 이와 같이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경제적인 힘만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바위에 계란치기나 같다. 이제 이런 약점을 보완하려면 노동 계급은 필연적으로 정치권력도 소유해야한다.
25) 220 사회주의는 의회주의 활동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달성될 수 있다는 희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위에서 열거한 모든 나라들의 역사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26) 221 국가는 어디에서나 자본가의 특권을 줄이고 그 힘을 제약하며 노동자들에게 좀더 많은 특권과 힘을 부여할 목적으로 경제영역에 간섭해왔다.
27) 222 특권계급은 종종 노동당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하여, 또는 노동계급에 의한 과격한 요구를 미리 차단하기 위하여 일정부분 자신들의 이익을 양보하기도 한다.
28) 223 이런 이유들로 해서 우리는 정치의 영역에서 이성과 양심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치적 압력도 병행해서 사용되어야한다.
29) 225 왜냐하면 경제력이 정치권력보다 더 근본적이며, 또한 경제력은 정치적 평등주의의 형태와 원리마저도 자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비유는 잘못이기 때문이다.
30) 225 의회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난점과 위험들은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회에서 명백하게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나면 이 모든 난관들을 타개하고 사회개혁을 위하여 국가의 권력과 위신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31) 227 실제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아닌 가존의 사회체제나 제도에 의해 가장 큰 혜택을 입고 있는, 권력있는 지배집단의 이해관계이다.
32) 228 정치는 지배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른 압력에 의해 대체적인 윤곽과 방향이 잡힌다. 전문가는 이미 결정된 방향에 합리적인 정당화와 효율적인 적용을 가할 뿐이다.
33) 229 즉, 한 계급으로 하여금 모든 사실들을 다 알 수 있게 하거나 다른 계급을 자극하는 모든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과정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4) 232 왜냐하면 농민계층은 자본주의 체제로 인하여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하더라도, 집단주의적인 정치목표를 지지하게 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5) 233 즉, 현대사회에는 기존의 불안정한 세력균형을 깨뜨리고 완전히 혁신할 수 있는 단일한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6) 234 만약에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같은 폭력행위는 외과의사의 의술과 같은 속도를 갖게 될 것이며, 따라서 상처가 생기면 곧바로 대증요법을 통해 치료가 이루어질 것이다.
37) 235 그런데 이같은 확신이나 환상은 광신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위험한 반면, 이런 환상을 포기하면 타성에 젖어버릴 것이란 점에서 위험하다.
38) 236 감상주의와 낭만주의는 실천적 의지를 결여한 채 이상적 목표만을 꿈꾸는, 외부적 관찰자들의 질병이다.
39) 236 ~ 즉, 역사에 있어서의 급진세력의 빛에 비추어 언제나 타협적 요소가 담긴 직접적인 성과들을 비판하고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부터 이들은 완전한 상대주의의 늪 속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40) 237 따라서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합리주의자의 달콤한 정당성보다 절대주의의 과감한 도전이다.
41) 238~239 특권과 권력의 유혹에 굴복해버린 모든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개인적인 야심과 영달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었다.
42) 242 국가는 언제나 국민들의 충성심을 요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너무나 큰 충성심을 요구하기 때문에, 다른 공동체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국가와 경쟁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43) 242 사회주의의 지도자들이 국가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구실로 적대세력의 주장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이미 암시한 바와 같이 개인적인 야심의 동기에서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다.
44) 244 따라서 국가에의 복종은 계급투쟁보다 국제적 분쟁을 선호한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양자택일은 결코 이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45) 245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론적 사회주의의 차이는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워낙 크므로, 이 둘 사이에서 순수하게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이란 전혀 불가능하다.
46) 247 새로운 평화도 마찬가지로 외양뿐인 억지 평화이다. 단지 사회적 ․ 경제적 세력들간의 균형이 대전 전에 비해서 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47) 248 강제력이란 요소는 언제나 은밀하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경제력, 선전기구, 전통적인 통치수단, 비폭력적 수단 등 모든 통치수단들을 망라하여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8) 248 따라서 협력과 상호성을 무비판적으로 지나치게 찬양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온 불의를 인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 형태는 아니더라도 은밀한 형태의 강제력에 대해서는 무조건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49) 249 지금까지의 논의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강요하고 있는 결론은 평등이란, 아니 좀더 상사하게 말하자면, 평등한 정의란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장 합리적인 궁극목적이라는 사실이다.
50) 249~250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등이 평화보다 더 높은 사회적 목표라는 사실이다. 물론 완전한 평등이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평화의 이상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51) 251 모든 사회에는 사회문제를 흐리게 하는 편파성과 편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성은 일반적으로 점차 증대해가면서 사회적 특권세력의 요구를 억제하고 비특권계층을 지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 자체는 보다 더 평등한 권력의 균형을 이룩하는 경향이 있다.
52) 252 사회 내에서 이성의 힘은 완전한 힘의 평등을 가져올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다. 다만 목적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
53) 252 갈등과 강제력은 분명히 위험한 도구이다. 이러한 갈등과 강제력은 사회적 악을 양산해내무로, 현명한 지성이 있는 사회라면 그것들의 무분별한 사용에 대해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54) 253 이처럼 강제력은 국내분쟁에서 사용될 경우에는 사회의 공정성을 나타낼 수 있지만, 국제분쟁에 사용될 때에는 인류라는 보다 큰 공동체의 이익을 배반하는 하나의 위협으로 전환된다.
55) 254 도덕가들은 흔히 강제력의 문제를 폭력적 강제력과 비폭력적 강제력으로 구별한다.
56) 255 폭력과 비폭력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그것들이 발생시킨 파괴의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차이도 중요하게 고려되기는 하지만), 전자의 공격적 성격과 후자의 소극적 성격에 있다.
57) 255 비폭력은 매우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형태의 저항이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들은 대단히 적극적이다. ~ 종종 소유권에 대한 파괴를 통해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58) 256~257 소극적 형태의 저항은 그것이 소극적이라는 이유 때문만으로 영혼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저항이 사회적, 물리적 관계 속에 파고들어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을 제약하는 한에 있어, 그것은 일종의 물리적 강제력인 것이다.
59) 259 진리의 힘 또는 영혼의 힘의 사용은, 보다 순수하고 정확한 의미에서 사회적 갈등에 있어서 대립세력의 이성과 선의지에 호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60) 260 교육에 있어서 강제적 요소들은 도덕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요소들은 지성과 감정의 세계에서 작용하고 아무런 신체적 제약을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61) 260 폭력적 강제와 비폭력적 강제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심리적 강제와 육체적 강제 사이에도 강제력의 정도에 있어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62) 262 설사 비폭력적 저항이 적대세력에게 고통과 재난을 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러한 괴로움이 불러일으키는 분노를 그것이 가한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인내함으로써 완화한다.
63) 264 분노란 불의에 대한 감정의 이기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분노가 전혀 없는 상태란 곧 사회적 지성이나 도덕적 활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64) 265 간단히 말해서 비폭력적 강제력과 저항은 사회생활에서의 도덕적, 합리적 요소들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제공해주는 강제력이다.
65) 266 그리고 폭력은 종종, 간디가 시사했던 바와 같이 도덕적 선의지의 봉사자일 수 있다. 또한 비폭력적 방법이라고 해서 완전한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66) 266 간디조차도 실용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요소들의 중요성을 거듭 확인하면서, 비폭력적 방법의 장점들은 특히 지배집단보다는 저항집단의 요구와 한계에 딱 들어맞는다고 주장하였다.
67) 268 사회적 무지가 강제적인 폭력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될 경우, 무지한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응폭력을 저지를 것이다. 설사 사회적 지성이 어느 정도 살아 있는 경우에도, 경제적 이해관계는 폭력의 사용에 대해 완강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68) 269 종교는 인간들의 공통된 근원을 일깨우고, 또 인간의 악이나 덕은 같은 성격의 것임을 설파함에 의하여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으려 한다.
69) 269 세속적 상상력은 결코 이런 회개적 태도와 사랑의 충동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겉모양은 무시해버리고 궁극적이며 심원한 통일성을 강조하는 숭고한 광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70) 270 인간의 삶의 역사는 언제나 자연세계의 반영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간파했다시피, 역사의 종말에 가서 세계의 평화는 투쟁에 의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71) 271 사회를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이다. 그리고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72) 272 정의 그 자체만으로는 곧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보다 높은 어떤 것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73) 272 하지만 도덕적 통찰과 정치적 통찰을 융합해야 할 필요성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두가지 형태의 도덕, 즉 개인적 도덕과 사회적 도덕, 내적인 도덕과 외적인 도덕 내에 있는 상호융합이 불가능한 독특한 요소들까지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된다.
74) 272 내면적인 입장에서 볼 때 가장 도덕적인 행위는 이타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다. 외적인 관찰자는 이기주의에서 선을 찾을는지 모른다.
75) 273 합리화된 형태의 종교는 일반적으로 살아보다는 의무를 최고의 덕으로 간주한다. 이는 칸트나 스토아의 도덕과 유사한다. 왜냐하면 충동(이타적인 충동까지 포함하여)에 도덕적 우월감을 부여하기보다는 모든 충동을 이성을 통제하에 두는 것이, 그들이 볼 때 더 바람직스럽기 때문이다.
76) 273 도덕적 합리주의는 인간의 행위를 사회적 관점에서 보며, 보편적인 선과 전체 사회와의 조화를 궁극적 기준으로 간주한다.
77) 275 내면적 입장의 도덕과 외면적 입장의 도덕을 조화시키려는 공리주의적 시도는 불가피하며, 실제로 일정한 한계 내에서는 가능하기도 하다.
78) 275 따라서 도덕적 합리주의는 종교에 비하면 이기심을 훨씬 약하게 억제하며, 정치적 현실주의에 비하면 훨씬 약한 사회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믿는다.
79) 276 도덕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에서 집단들의 관계로 옮겨가면 갈수록 이기적 충동은 사회적 충동을 누르고 득세하게 된다.
80) 276 종교는 순전히 내적인 훈련에 의해서만 이상을 실현하려 할 때 자기모순에 빠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정신의 내면적 요구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다.
81) 277~278 종교적 이상주의는 타인의 주장이 아무리 그릇된 것일지라도 끝까지 들어주고, 타인이 자기이익을 부당하게 요구할지라도 이에 맞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거기에 양보하도록 가르친다.
82) 279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양쪽에 모두 이익을 주는 완전한 상호이해는 의도적이지 않을 때, 즉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83) 279 인간관계가 친밀한 곳에서는 (그리고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에서만 사랑이 효력을 충분하게 발휘하는 곳에서는) 사랑의 방법만이 정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84) 280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이기적 충동은 이타적 충동에 비해 훨씬 강력하기 때문에, 이타적 충동에 대한 보통 이상의 강력한 지지를 해주지 않게 되면, 아무리 선한 사람이 생각해낸 정의도 그에게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85) 281 개인에게 자기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중요시하도록 강요하는 모든 도덕, 그리고 무사성을 요구하는 모든 도덕은 국가의 행위에 적합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이익에 관해 비이기적일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86) 281 현명한 정치가라면 자기집단의 이익이 인류공동체의 정체이익과 명백히 정의롭지 못한 관계에 있을 때는 자기집단의 이익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87) 283 간디와는 달리, 톨스토이의 정치강령은 전혀 비현실적인 상태 그대로였다. 즉, 사랑이라는 종교적 이상과 강제력이라는 정치적 필요조건을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88) 283~284 즉, 낭만적인 테러리스트들은 독립적으로 자행되는 테러행위를 체계적이고 일관된 정치적 계획과 연결짓지 못했으며, 평화주의자들도 정치적 힘을 순수한 무저항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했다.
89) 284 다시 말해서 종교적 이상주의를 채택할 경우, 이기주의적 충동에 대해 가장 강력한 내면적 억제를 가하려는 집단과 사회적 억제를 가하려는 집단을 화해시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해진다.
90) 284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해지는 잘못을 시정하려면,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이기주의에 비해 자기 자신의 이기주의를 더욱 가혹하게 억제하는 훈련이 꼭 필요하다.
91) 285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을 구별짓는 일은 더욱 복잡한 문제이다. 인간의 집단은 도덕적으로 무디기 때문에 순수한 공평무사의 도덕을 집단에서 찾기란 거의 불가능 하다.
92) 285 도덕적 요인들은 결과적으로 발생되는 사회적 경쟁과 갈등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는 있어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도덕적 선의지를 원리로 삼는 사람들은 집단의 특수이익을 모든 인간의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조화의 이상과 연결시키려 한다.
93) 285~286 따라서 순수하게 개인적인 도덕과 적당한 정치적 전략 사이에는 여전히 일정한 갈등과 대립이 남아 있게 된다.
94) 286 개인의 이익은 집단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기 이익을 추구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이같은 간접적 이기주의는 집단 내에서 개인이 보여주는 이기적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95) 287 설상가상으로 한 사회집단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물론 처음에는 아무런 사심 없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출발하지만, 그 집단 내에서 또는 보다 특권적인 집단으로 전환함에 의해 얻게 될 엄청난 개인적 보상으로 인해 끊임없는 유혹을 받게 될 가능성이 항상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이익이 항상 그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합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96) 288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회의 안정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기술의 발달은 생활환경을 급속하게 변화시켜, 사람들은 전래되어오던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 더 이상 존경심을 갖지 않게 되어버렸다.
97) 289 우리는 지금 인격적, 도덕적 이상주의가 위선이라는 혐의를 받고, 때로는 그런 이유로 해서 비난을 받을 만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정직성이 냉소주의의 발끝에도 못 비치는 그런 시대이다.
98) 289 따라서 우리는 이를 철저하게 이성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다만 환상이 그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앞서 이성이 그것을 파괴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99) 291 여기서 말하는 사회란 시민사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 있는 일체의 집단을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결사체, 인종, 민족, 계급, 국가, 국제사회등이 모두 포함된다.
100) 291「개인들의 비이기성은 국가의 이기성으로 전환된다.」이것이 그의 전제요, 제1명제이다. 개인은 비이기적이고, 사회는 이기적이다. 제목을 빌려 표현하자면 개인은 도덕적이고 사회는 비도덕적이다.
주 제 : 도덕적인 개인이 집단에 들어가면 비도덕적인 인간이 된다??
( 과연 도덕적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인가? )
구 성 :
p 276 도덕의 문제가 개인적인 차원에서 집단들의 관계로 옮겨가면 갈수록 이기적 충동은 사회적 충동을 누르고 득세하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내면적 억제도 이기적 충동을 완전히 제어할 수는 없다.
p 286 집단에 대한 충성심이 유지되고, 또 이러한 충성심이 다른 집단과의 관계에서도 인정된다면, 개인의 높은 도덕적 이상이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한 집단이 다른 집단과 상충하고 있는 경우에라도 개인은 얼마든지 비이기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다. 개인의 이익은 집단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기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같은 간접적 이기주의는 집단 내에서 개인이 보여주는 이기적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p 287 설상가상으로 한 사회집단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물론 처음에는 아무런 사심 없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출발하지만, 그 집단 내에서 또는 보다 특권적인 집단으로 전환함에 의해 얻게 될 엄청난 개인적 보상으로 인해 끊임없는 유혹을 받게 될 가능성이 항상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이익이 항상 그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합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내 용 :
니버라는 사람은 책의 제목을 통해서 자신이 말하려는 바를 이미 다 말하고 있는 것 같다. ‘ 도덕적인간과 비도덕적사회 ’.....이는 우리 인간 개개인은 도덕적인데, 사회는 비도덕적이라는 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읽어나갔다.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럴 것이라는 큰 틀은 잡은 것 같은데, 솔직히 이해가 쉽게 되지는 않았다. 단지 개인적인 인간과 사회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폭력과 비폭력과 같은 이야기들까지 더해져서 읽으면서도 점점 복잡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책을 처음 봤을 때는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했는데, 너무 얕잡아 봤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말하려고 하는 그 큰 틀은 우리 개인적인 인간은 도덕적인데, 그 개인이 사회에 들어가게 되면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이게 변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우리들이 쉽게 생각해보면 이 말이 맞는 것이라고 생각될 수도 있다. 님비현상 같은 예를 살펴보면 말이다. 자신들의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들은 기꺼이 비도덕적인 행동도 할 수 있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적으로 선하고 동정심을 가지고 있고, 양심적이었던 개인이 집단에, 사회에 속해있다고 해서 그 행동들이 모두 비도덕적이라고, 비도덕적인 인간이 되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어느 정도 그 개인들에게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이기주의가 있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집단이 무엇이 길래 그들을 그렇게 바꾸어 논다는 것일까?
사람의 본성은 그리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인 인간이 집단에 들어가서 비도덕적인 인간이 된다는 것은 잘못된 것 같다. 이미 비도덕적인 인간이었기 때문에 집단에 들어가서도 더 이기적이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는 거라 생각된다.
이것에 대해 생각해보기에 앞서 성선설과 성악설을 생각해보자. 먼저, 성선설은 ‘ 사람은 선한 본성을 타고난다. ’는 맹자의 인성론을 말한다. 맹자는 사람들은 본래 다 선하게 태어나지만, 결코 다 선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인의예지와 같은 4덕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니버는 성선설 쪽의 생각에 있는 것 같다. 개인으로 보면 그 자체가 도덕적이고, 선한데, 주변적인 환경이랄지, 요소들로 인해서 그들은 선하지 못하게 되고,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성선설의 입장보다는 성악설의 입장에서 보는 것이 지금 우리현실에 있어서는 더 맞는다고 생각한다.
성악설은 ‘ 사람의 성(性)은 원래 악하며, 선하게 되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에 의한 것 이다. ’ 라고 한 중국 전국시대 순자의 인성론이다.
이 순자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누구나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며, 좋은 목소리와 예쁜 용모를 탐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 만일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본성에 따르고 그의 욕구에 따라간다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고 사회 질서가 어지러워져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이 있어 법으로 교화하고 예의로 인도한 뒤에야 사양하는 데로 나가고 예의 세세한 조리에 합당하게 되어 천하는 질서 있게 된다. ” 고 주장했다. 순자는 인성이 비록 악하지만, 사람의 후천적 노력에 의하여 선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능력은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발휘할 수만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성악설에 대해 다시 보고 나니 내 생각은 더 확고해졌다. 요즘 현대의 개인은 성선설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악설에 따르는 것 같다. 개인주의니 해서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려고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도 기꺼이 하는 것이 요즘 현대의 사람들인 것 같다.
길가다가 쓰레기를 아무렇게나 버리는 행동들, 버스 안에서 노약 석에 앉아놓고, 어른들이 와도 결코 자리 양보하는 일이 없고, 다른 사람보다 빨리 가려고 새치기 하고, 갖고 싶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져가고, 거짓말 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몰래 폐수를 강에 흘려버리고, 성을 매매하고, 상대방을 이간질 시키고, 남을 속이고, 폭력을 휘두르고, 돈을 빼앗고, 사기치고........... 이런 갖가지 문제가 되고 있는 행동들을 보면 현대의 개인들은 결코 도덕적이지 못하고 비도덕적이다. 좀더 심하게 말한다면 선하지 못한 악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다.
니버가 보는 도덕적인 개인은 과거의 이야기 같다. 요즘엔 사회나 집단과 같은 곳에서의 이익을 보려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도덕적인간이 아니라 비도덕적인인간이라고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오히려 비도덕적사회를 도덕적사회로 고쳐야할 지도 모른다. 이런 비도덕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하는 개인들을 도덕적으로 선하게 교화시켜주는 것이 바로 사회이기 때문이다. 성악설에서 순자가 말했듯이 사람들의 본성은 악하지만, 교육을 통해서 이러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이런 교육을 우리 사회에서 해주고 있다.
초등학교 때는 바른생활을 통해서, 중학교 때는 도덕, 고등학교 때는 윤리라는 과목을 통해서 가장 기본적이고 올바른 행동을 하게끔 교육을 받는다. 이런 교과서를 통한 교육뿐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은 집단에서, 사회에서 교육을 받는다. 가장 작은 집단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 가정이고, 학교이다. 가정에서의 교육을 통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할 것인지, 어떤 것이 선한 행동인지, 도덕적인 행동인지를 습득하게 된다. 이런 교육으로 비도덕적인 개인들은 도덕적인 행동을 하게끔 바뀌는 것이다. 집단이나 사회에서의 생활을 통해서 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 그 안에서 자신만의 이익을 챙기려 하기 보다는 모두를 위한 이익을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회라는 틀 안에서 그들은 도덕적인 인간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라 생각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니버는 다른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그는 개인이 집단에 들어가면 그 집단의 이익이 곧 자신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집단 안에서 자신의 이익을 더 챙기기 위해서 비도덕적인 행동을 하게 된다고 말한다.
앞에서 누누이 말했듯이 니버의 이런 입장은 요즘 현대의 사회와는 맞지 않은 것 같다. 물론, 개인이 집단에 속하게 됨으로써 그 집단을 위한 이익을 추구 하려 고는 하겠지만, 이를 위해 도덕적인 인간이 비도덕이게 된다는 생각은 터무니 없다고 느낀다. 오히려, 비도덕적인 인간이 사회에, 집단에 속하게 됨으로써 그 안에서 도덕적인 인간으로 교화된다고 생각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비도덕적 인간이고, 사회야 말로 도덕적인 사회일 것이다.
개인이 큰 실수를 저질렀다 할지라도, 사회라는 커다란 곳에 들어가면 그것은 작은 실수로 무마될 수 있는 것처럼, 개인이 집단에 들어가서 더 이기적이고 비도덕이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포용해주는 사회라는 품안에서 덜 이기적이고, 도덕적이게 바뀔 수 있다고 생각된다.
내가 생각할 때 니버가 말하는 도덕적인간은 사회 안에 있을 때 더 빛을 낼 수 있을 것이다.
< 단어 수 : 1004 >
구성 ~
1) 183 이제 이 정치철학은 더 이상 상층 프롤레타리아의 정치적 신념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지식인들은 이에 대해 내적 ․ 외적인 공감을 보이고 있고, 자본가들은 소심한 공동체에 위협을 가하면서 인내심 없고 음흉하며 반항적인 노동계급에게 양보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도깨비로 사용한다.
2) 184 폭력과 혁명은 일반적으로 사회변화의 도구로서 일단 배제되는 경향이 있다. ~ 하지만 그들은 폭력이란 본질적으로 비도덕적이라고 가정하는 점에서 분명 오류를 범하고 있다.
3) 185 동기와 궁극적 목적 사이에 놓여 있는 수단들과 보다 저차적이고 직접적인 목적들을 선택하는 문제는 윤리적이기보다는 정치적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실용주의적인 문제들을 제기한다.
4) 186 일단 우리가 강제력의 요소를 윤리적으로 정당한 범주에 귀속시키게 되면, 설사 그것이 항상 도덕적으로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더라도, 폭력적인 강제성과 비폭력적인 강제성을 절대적으로 구별해낼 수 있는 경계선을 확립할 수 없게 된다.
5) 187 ~ 이와 같은 것들이 바로 복잡한 집단간의 관계에 담겨 있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로 인해서 개인관계의 윤리를 무비판적으로 집단간의 관계에 적용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6) 188 도덕의지는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생명, 이익 및 권리를 고려하는 테서 드러난다. 이웃사람들을 신뢰하는 것은 선한 태도이다.
7) 188 비교적 단순한 개인들간의 관계에서조차 절대적이라고 간주될 만한 도덕적 가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는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8) 189 반성적인 도덕성은 항상 본질적으로 선한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도덕적 가치들을 새로이 분석해야 하며, 또 그 가치들을 도구적인 차원에서 판단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9) 189 사회는 일반적으로 생명에 대한 외경이 근본적인 도덕적 태도라고 믿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하여 살인자의 생명을 빼앗는다.
10) 190 사회는 의견발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사회적 선이라고 믿고 있지만, 이는 사상의 자유가 타고난 권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진보의 기본적인 조건이기 때문이다.
11) 190 중간층은 자유와 개인생명의 존중, 소유권, 상호신뢰와 이타심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 데 비해, 프롤레타리아는 집단에 대한 충성과 그 결속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12) 193 이와 더불어 혁명전략은 동기나, 혹은 견고한 도덕적 기반을 제공해주는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13) 193 폭력을 통해 정의로운 사회제도가 확립되고, 또 그 제도를 보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겨난다면, 폭력과 혁명을 배제시켜야 하는 순수하게 윤리적인 근거는 있을 수 없다.
14) 193~194 ~ 일단 우리가 숙명적으로 정치를 위해 윤리를 양보하고, 또 사회적 결속의 불가피한 수단으로서 강제력을 받아들인 이상, 우리는 비폭력적 강제와 폭력적 강제, 혹은 정부가 사용하는 강제력과 혁명가가 사용하는 강제력 사이에 절대적인 구별을 지을 수는 없다.
15) 197 가장 부유한 계층과 가장 궁핍한 계층이 공동의 목표하에 결성한 정당에 중간층을 끌어들일 수 있었다는 것은 파시즘의 정치적 지략의 수준이 얼마나 높은가를 잘 보여준다.
16) 201 현대 국가가 독일의 경우에서처럼 사회적 ․ 경제적 갈등에 의해 붕괴되는 경우에조차도, 애매모호한 자기보존의 본능과 여전히 잠재적인 국가적 통일의식이 막연한 가능성을 만들어 낸다.
17) 203 그리고 현재와 같은 재정적 위기는 중간층이 자신들의 기존 권력을 유지하는 한, 공산주의 혁명보다는 파시스트적 경향을 불러일으킨다.
18) 205~206 만약에 혁명이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완전히 뿌리뽑고 평등의 정의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 혁명의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겨나는 많은 잘못들은 대부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다.
19) 208 최초의 권력과 특권의 균등화가 사회에서의 상호평등의 가능성을 높여준다고 한 공산주의자의 가정은 분명히 옳다.
20) 210 인간이란 항상 최소한의 필요 이상으로 자신의 욕구들을 확대시킬 수 있는 상상력이 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의 필요보다는 자신의 필요를 더 절실하게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기적이다.
21) 213 종교의 현실에 있어 절대주의는 부조리를 허용하고, 정치의 현실에 있어서는 잔인성을 용인한다. 그리고 이러한 부조리와 잔인성은 인간본성의 타성이 절대적 이상에 대한 장애물이 되기 때문에 그 결과들이 정당화되지 못한다.
22) 213 개인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해도 없고 열정적인 기행 정도로 비치는 열광주의도 정치적 정책으로 나타나게 될 때에는 인류에 대한 자비와는 전혀 무관해져버린다.
23) 215 노동자들은 분쟁이 일정기간 계속되면 자본가의 경제적 자원과 도저히 비교가 안되기 때문에 약해질 수밖에 없다. 결국 노동계급은 굶주림에 굴복할 수밖에 없게 된다.
24) 216 이와 같이 산업사회에서는 노동자들이 경제적인 힘만으로 대항한다는 것은 바위에 계란치기나 같다. 이제 이런 약점을 보완하려면 노동 계급은 필연적으로 정치권력도 소유해야한다.
25) 220 사회주의는 의회주의 활동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달성될 수 있다는 희망은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위에서 열거한 모든 나라들의 역사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26) 221 국가는 어디에서나 자본가의 특권을 줄이고 그 힘을 제약하며 노동자들에게 좀더 많은 특권과 힘을 부여할 목적으로 경제영역에 간섭해왔다.
27) 222 특권계급은 종종 노동당의 성장을 방해하기 위하여, 또는 노동계급에 의한 과격한 요구를 미리 차단하기 위하여 일정부분 자신들의 이익을 양보하기도 한다.
28) 223 이런 이유들로 해서 우리는 정치의 영역에서 이성과 양심에만 전적으로 의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정치적 압력도 병행해서 사용되어야한다.
29) 225 왜냐하면 경제력이 정치권력보다 더 근본적이며, 또한 경제력은 정치적 평등주의의 형태와 원리마저도 자신의 필요와 목적에 따라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비유는 잘못이기 때문이다.
30) 225 의회주의를 신봉하는 사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난점과 위험들은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품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의회에서 명백하게 다수의석을 차지하고 나면 이 모든 난관들을 타개하고 사회개혁을 위하여 국가의 권력과 위신을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31) 227 실제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아닌 가존의 사회체제나 제도에 의해 가장 큰 혜택을 입고 있는, 권력있는 지배집단의 이해관계이다.
32) 228 정치는 지배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른 압력에 의해 대체적인 윤곽과 방향이 잡힌다. 전문가는 이미 결정된 방향에 합리적인 정당화와 효율적인 적용을 가할 뿐이다.
33) 229 즉, 한 계급으로 하여금 모든 사실들을 다 알 수 있게 하거나 다른 계급을 자극하는 모든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과정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34) 232 왜냐하면 농민계층은 자본주의 체제로 인하여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하더라도, 집단주의적인 정치목표를 지지하게 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35) 233 즉, 현대사회에는 기존의 불안정한 세력균형을 깨뜨리고 완전히 혁신할 수 있는 단일한 정치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36) 234 만약에 폭력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한다면, 이같은 폭력행위는 외과의사의 의술과 같은 속도를 갖게 될 것이며, 따라서 상처가 생기면 곧바로 대증요법을 통해 치료가 이루어질 것이다.
37) 235 그런데 이같은 확신이나 환상은 광신으로 기울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위험한 반면, 이런 환상을 포기하면 타성에 젖어버릴 것이란 점에서 위험하다.
38) 236 감상주의와 낭만주의는 실천적 의지를 결여한 채 이상적 목표만을 꿈꾸는, 외부적 관찰자들의 질병이다.
39) 236 ~ 즉, 역사에 있어서의 급진세력의 빛에 비추어 언제나 타협적 요소가 담긴 직접적인 성과들을 비판하고 심판하지 않는다면, 그 순간부터 이들은 완전한 상대주의의 늪 속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40) 237 따라서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합리주의자의 달콤한 정당성보다 절대주의의 과감한 도전이다.
41) 238~239 특권과 권력의 유혹에 굴복해버린 모든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의심할 바 없이 개인적인 야심과 영달이라는 아킬레스건을 갖고 있었다.
42) 242 국가는 언제나 국민들의 충성심을 요구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국가는 너무나 큰 충성심을 요구하기 때문에, 다른 공동체들이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국가와 경쟁하는 일은 꼭 필요하다.
43) 242 사회주의의 지도자들이 국가의 평화를 유지한다는 구실로 적대세력의 주장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이미 암시한 바와 같이 개인적인 야심의 동기에서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다.
44) 244 따라서 국가에의 복종은 계급투쟁보다 국제적 분쟁을 선호한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양자택일은 결코 이성에 의해 합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
45) 245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론적 사회주의의 차이는 이상에서 살펴본바와 같이 워낙 크므로, 이 둘 사이에서 순수하게 합리적이고 도덕적인 선택이란 전혀 불가능하다.
46) 247 새로운 평화도 마찬가지로 외양뿐인 억지 평화이다. 단지 사회적 ․ 경제적 세력들간의 균형이 대전 전에 비해서 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다.
47) 248 강제력이란 요소는 언제나 은밀하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은 경제력, 선전기구, 전통적인 통치수단, 비폭력적 수단 등 모든 통치수단들을 망라하여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8) 248 따라서 협력과 상호성을 무비판적으로 지나치게 찬양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온 불의를 인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 형태는 아니더라도 은밀한 형태의 강제력에 대해서는 무조건 수용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다.
49) 249 지금까지의 논의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강요하고 있는 결론은 평등이란, 아니 좀더 상사하게 말하자면, 평등한 정의란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장 합리적인 궁극목적이라는 사실이다.
50) 249~250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등이 평화보다 더 높은 사회적 목표라는 사실이다. 물론 완전한 평등이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평화의 이상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51) 251 모든 사회에는 사회문제를 흐리게 하는 편파성과 편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성은 일반적으로 점차 증대해가면서 사회적 특권세력의 요구를 억제하고 비특권계층을 지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 자체는 보다 더 평등한 권력의 균형을 이룩하는 경향이 있다.
52) 252 사회 내에서 이성의 힘은 완전한 힘의 평등을 가져올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다. 다만 목적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
53) 252 갈등과 강제력은 분명히 위험한 도구이다. 이러한 갈등과 강제력은 사회적 악을 양산해내무로, 현명한 지성이 있는 사회라면 그것들의 무분별한 사용에 대해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54) 253 이처럼 강제력은 국내분쟁에서 사용될 경우에는 사회의 공정성을 나타낼 수 있지만, 국제분쟁에 사용될 때에는 인류라는 보다 큰 공동체의 이익을 배반하는 하나의 위협으로 전환된다.
55) 254 도덕가들은 흔히 강제력의 문제를 폭력적 강제력과 비폭력적 강제력으로 구별한다.
56) 255 폭력과 비폭력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그것들이 발생시킨 파괴의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물론 이 차이도 중요하게 고려되기는 하지만), 전자의 공격적 성격과 후자의 소극적 성격에 있다.
57) 255 비폭력은 매우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형태의 저항이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결과들은 대단히 적극적이다. ~ 종종 소유권에 대한 파괴를 통해 생명을 파괴하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58) 256~257 소극적 형태의 저항은 그것이 소극적이라는 이유 때문만으로 영혼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저항이 사회적, 물리적 관계 속에 파고들어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 행동을 제약하는 한에 있어, 그것은 일종의 물리적 강제력인 것이다.
59) 259 진리의 힘 또는 영혼의 힘의 사용은, 보다 순수하고 정확한 의미에서 사회적 갈등에 있어서 대립세력의 이성과 선의지에 호소하는 것을 의미한다.
60) 260 교육에 있어서 강제적 요소들은 도덕적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요소들은 지성과 감정의 세계에서 작용하고 아무런 신체적 제약을 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61) 260 폭력적 강제와 비폭력적 강제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심리적 강제와 육체적 강제 사이에도 강제력의 정도에 있어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62) 262 설사 비폭력적 저항이 적대세력에게 고통과 재난을 준다 하더라도, 그것은 이러한 괴로움이 불러일으키는 분노를 그것이 가한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인내함으로써 완화한다.
63) 264 분노란 불의에 대한 감정의 이기적인 측면이다. 따라서 분노가 전혀 없는 상태란 곧 사회적 지성이나 도덕적 활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64) 265 간단히 말해서 비폭력적 강제력과 저항은 사회생활에서의 도덕적, 합리적 요소들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제공해주는 강제력이다.
65) 266 그리고 폭력은 종종, 간디가 시사했던 바와 같이 도덕적 선의지의 봉사자일 수 있다. 또한 비폭력적 방법이라고 해서 완전한 사랑의 정신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는 없다.
66) 266 간디조차도 실용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요소들의 중요성을 거듭 확인하면서, 비폭력적 방법의 장점들은 특히 지배집단보다는 저항집단의 요구와 한계에 딱 들어맞는다고 주장하였다.
67) 268 사회적 무지가 강제적인 폭력에 의해 도전을 받게 될 경우, 무지한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응폭력을 저지를 것이다. 설사 사회적 지성이 어느 정도 살아 있는 경우에도, 경제적 이해관계는 폭력의 사용에 대해 완강한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68) 269 종교는 인간들의 공통된 근원을 일깨우고, 또 인간의 악이나 덕은 같은 성격의 것임을 설파함에 의하여 모든 인간을 하나로 묶으려 한다.
69) 269 세속적 상상력은 결코 이런 회개적 태도와 사랑의 충동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겉모양은 무시해버리고 궁극적이며 심원한 통일성을 강조하는 숭고한 광기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70) 270 인간의 삶의 역사는 언제나 자연세계의 반영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간파했다시피, 역사의 종말에 가서 세계의 평화는 투쟁에 의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71) 271 사회를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정의이다. 그리고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72) 272 정의 그 자체만으로는 곧 저급한 수준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정의는 보다 높은 어떤 것에 의해 인도되어야 한다.
73) 272 하지만 도덕적 통찰과 정치적 통찰을 융합해야 할 필요성과 가능성이 있다고 해서 두가지 형태의 도덕, 즉 개인적 도덕과 사회적 도덕, 내적인 도덕과 외적인 도덕 내에 있는 상호융합이 불가능한 독특한 요소들까지 완전히 제거해서는 안된다.
74) 272 내면적인 입장에서 볼 때 가장 도덕적인 행위는 이타적 동기에서 나온 것이다. 외적인 관찰자는 이기주의에서 선을 찾을는지 모른다.
75) 273 합리화된 형태의 종교는 일반적으로 살아보다는 의무를 최고의 덕으로 간주한다. 이는 칸트나 스토아의 도덕과 유사한다. 왜냐하면 충동(이타적인 충동까지 포함하여)에 도덕적 우월감을 부여하기보다는 모든 충동을 이성을 통제하에 두는 것이, 그들이 볼 때 더 바람직스럽기 때문이다.
76) 273 도덕적 합리주의는 인간의 행위를 사회적 관점에서 보며, 보편적인 선과 전체 사회와의 조화를 궁극적 기준으로 간주한다.
77) 275 내면적 입장의 도덕과 외면적 입장의 도덕을 조화시키려는 공리주의적 시도는 불가피하며, 실제로 일정한 한계 내에서는 가능하기도 하다.
78) 275 따라서 도덕적 합리주의는 종교에 비하면 이기심을 훨씬 약하게 억제하며, 정치적 현실주의에 비하면 훨씬 약한 사회적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믿는다.
79) 276 도덕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에서 집단들의 관계로 옮겨가면 갈수록 이기적 충동은 사회적 충동을 누르고 득세하게 된다.
80) 276 종교는 순전히 내적인 훈련에 의해서만 이상을 실현하려 할 때 자기모순에 빠질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위험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정신의 내면적 요구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있다.
81) 277~278 종교적 이상주의는 타인의 주장이 아무리 그릇된 것일지라도 끝까지 들어주고, 타인이 자기이익을 부당하게 요구할지라도 이에 맞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는 거기에 양보하도록 가르친다.
82) 279 상호관계를 맺고 있는 양쪽에 모두 이익을 주는 완전한 상호이해는 의도적이지 않을 때, 즉 보답을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베풀 때 완전하게 실현된다.
83) 279 인간관계가 친밀한 곳에서는 (그리고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에서만 사랑이 효력을 충분하게 발휘하는 곳에서는) 사랑의 방법만이 정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84) 280 앞에서 말했던 바와 같이, 이기적 충동은 이타적 충동에 비해 훨씬 강력하기 때문에, 이타적 충동에 대한 보통 이상의 강력한 지지를 해주지 않게 되면, 아무리 선한 사람이 생각해낸 정의도 그에게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85) 281 개인에게 자기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을 중요시하도록 강요하는 모든 도덕, 그리고 무사성을 요구하는 모든 도덕은 국가의 행위에 적합지 않다는 말이 된다.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이익에 관해 비이기적일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
86) 281 현명한 정치가라면 자기집단의 이익이 인류공동체의 정체이익과 명백히 정의롭지 못한 관계에 있을 때는 자기집단의 이익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다.
87) 283 간디와는 달리, 톨스토이의 정치강령은 전혀 비현실적인 상태 그대로였다. 즉, 사랑이라는 종교적 이상과 강제력이라는 정치적 필요조건을 결합시키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88) 283~284 즉, 낭만적인 테러리스트들은 독립적으로 자행되는 테러행위를 체계적이고 일관된 정치적 계획과 연결짓지 못했으며, 평화주의자들도 정치적 힘을 순수한 무저항과 동일시하는 우를 범했다.
89) 284 다시 말해서 종교적 이상주의를 채택할 경우, 이기주의적 충동에 대해 가장 강력한 내면적 억제를 가하려는 집단과 사회적 억제를 가하려는 집단을 화해시킨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해진다.
90) 284 자신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엄격해지는 잘못을 시정하려면,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의 이기주의에 비해 자기 자신의 이기주의를 더욱 가혹하게 억제하는 훈련이 꼭 필요하다.
91) 285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을 구별짓는 일은 더욱 복잡한 문제이다. 인간의 집단은 도덕적으로 무디기 때문에 순수한 공평무사의 도덕을 집단에서 찾기란 거의 불가능 하다.
92) 285 도덕적 요인들은 결과적으로 발생되는 사회적 경쟁과 갈등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 는 있어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도덕적 선의지를 원리로 삼는 사람들은 집단의 특수이익을 모든 인간의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조화의 이상과 연결시키려 한다.
93) 285~286 따라서 순수하게 개인적인 도덕과 적당한 정치적 전략 사이에는 여전히 일정한 갈등과 대립이 남아 있게 된다.
94) 286 개인의 이익은 집단의 이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자기 이익을 추구할 수 도 있다. 하지만 이같은 간접적 이기주의는 집단 내에서 개인이 보여주는 이기적 행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95) 287 설상가상으로 한 사회집단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물론 처음에는 아무런 사심 없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출발하지만, 그 집단 내에서 또는 보다 특권적인 집단으로 전환함에 의해 얻게 될 엄청난 개인적 보상으로 인해 끊임없는 유혹을 받게 될 가능성이 항상 생겨난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이익이 항상 그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합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96) 288 기술문명의 발달로 인해 사회의 안정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기술의 발달은 생활환경을 급속하게 변화시켜, 사람들은 전래되어오던 조상들의 전통에 대해 더 이상 존경심을 갖지 않게 되어버렸다.
97) 289 우리는 지금 인격적, 도덕적 이상주의가 위선이라는 혐의를 받고, 때로는 그런 이유로 해서 비난을 받을 만한 시대에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정직성이 냉소주의의 발끝에도 못 비치는 그런 시대이다.
98) 289 따라서 우리는 이를 철저하게 이성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다만 환상이 그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앞서 이성이 그것을 파괴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99) 291 여기서 말하는 사회란 시민사회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을 넘어서 있는 일체의 집단을 말한다. 그래서 여기에는 결사체, 인종, 민족, 계급, 국가, 국제사회등이 모두 포함된다.
100) 291「개인들의 비이기성은 국가의 이기성으로 전환된다.」이것이 그의 전제요, 제1명제이다. 개인은 비이기적이고, 사회는 이기적이다. 제목을 빌려 표현하자면 개인은 도덕적이고 사회는 비도덕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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