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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중세철학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 개념 [이경재]

작성자김요한|작성시간03.10.25|조회수2,055 목록 댓글 0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 개념

이 경 재 (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목차
I. 인물 토마스 아퀴나스
II.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III. 사랑의 일반적 의미
1. 사랑이라는 행위 자체의 기본 의미
① 감각적 욕구와 지적 욕구
② 욕구의 제1추동력으로서의 사랑
2. 사랑의 구별과 특징
IV. 아모르(에로스)와 카리타스(아가페)
1. 사랑과 인간의 행복
2. 신의 선물로서의 카리타스
3. 아모르에서 카리타스로
V. 마치며

I. 인물 토마스 아퀴나스

토마스 아퀴나스(1224-1274)는 스콜라주의의 전성기인 13세기에 활동한 가장 탁월한 중세 사상가이다. 그는 당시 유럽 학문의 중심지이던 파리대학의 교수였고, ꡔ신학대전ꡕ ꡔ이교도대전ꡕ을 위시한 신학적 저작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에 대한 주석서들, 그리고 4복음서를 비롯한 성서 주해서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긴 그는 가톨릭 교회에 의해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라는 칭호를 부여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톨릭 교회 내에서 최고의 학문적 권위로 인정되고 있다. 거대한 덩치를 지녔음에도 아둔해 보일 정도로 과묵한 성격이었던 탓에 ‘벙어리 황소’(Dumb Ox)라는 별명으로 불리었다고 전해지기도 하는 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Albertus Magnus)가 여전히 살아있던 1274년, 교황의 부름을 받아 제2차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가던 중에 50세를 채 넘기지 못한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그의 행적과 행보에 관한 수많은 일화들을 따라가야 할 것이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경우에는 이 정도만으로도 될 듯 싶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역사적 행보보다 그의 저작들이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그의 학문적 및 정신적 세계에 주목하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생애 가운데 간과해서는 안 될 두 가지 사건이 있는데, 하나는 그가 도미니코회에 입회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의 만남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한 탁월한 초상을 그려낸 것으로 평가되는 G. K. 체스터튼의 ꡔ성 토마스 아퀴나스ꡕ(박갑성 옮김, 홍성사, 1984)에는 이 두 사건 각각에 대해 한 장씩을 할애하여 그 의미를 묘사하고 있으며, 토마스 오미어러는 ꡔ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ꡕ(이재룡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2)에서 그의 인생의 방향을 결정지은 2대 사건으로 묘사하고 있다(38쪽). 대체로 이 두 사건의 중요성은 대부분의 토마스 아퀴나스 전기작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고 있다.
전자가 하나의 ‘사건’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출생배경과 무관하지 않지만 이에 대한 장황한 설명은 옆으로 제쳐놓자. 중요한 것은 그가 귀족 가문의 자제로서 대수도원의 수도원장이라는 편안하고 안락한 고위 성직자로의 길을 버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이라는 판단에 따라 탁발수사의 길을 거침없이 걸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그가 속한 도미니코회는 알비파의 이단자들에게 가톨릭 사상을 설교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설교 수도회였고, 자연히 교육과 학문을 중시하는 일종의 학자들의 수도회였다. 학문의 길이 그의 일생의 소명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전해주는 메시지의 핵심은 그의 전 생애를 지배한 것이 다름 아니라 신에 대한 사랑과 복종이었다는 것, 다시 말해 그의 시선이 궁극적으로 땅이 아니라 하늘을 향해 있었다는 것이며, 당연한 결과로서 그가 자신의 온 학문적 노력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교의 진리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우선적으로 신앙인이자 신학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를 말하면서 너무나도 당연해 보이는 이 점을 굳이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둘째 사건, 즉 그가 자신의 사상을 전개하는 데 있어서 도구로 삼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의 만남 때문이다. 흔히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의 대표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로 간주되어 왔으며, 또 그것은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평가가 단순히 ‘중세의 스콜라신학자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 탁월하게 정통한’이라든가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가지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논증하려는’ 사람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였다는 것으로 이해된다면, 그것은 그다지 정확한 이해라고 할 수 없다.

II. 토마스 아퀴나스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

ꡔ오르가논ꡕ으로 대변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 저작은 이미 중세 초기부터 서구 그리스도교 세계에 알려져 있었지만, ꡔ형이상학ꡕ ꡔ자연학ꡕ ꡔ영혼론ꡕ ꡔ니코마코스윤리학ꡕ 등 그의 철학적 저작이 본격적으로 중세에 번역·소개된 것은 12세기 이후의 일이다. 스콜라사상가들로부터 ‘철학자’라는 명칭으로 불릴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은 신학에 대비되는 ‘철학’의 대명사였으며, 그리스도교적 계시와 독립적으로 자연이성에 의한 합리적 논증을 통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 이전까지 중세 사상을 주도했던 거대한 흐름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였는데, 이들 역시 인간 이성에 의한 이해와 앎을 추구했다는 점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 맥을 같이하지만, 근본적으로 신학적 주제에 관한 인간 이성의 자율성 인정 여부에서, 다시 말해 신앙의 진리의 도움 없이 이성의 진리가 가능한가의 문제에서 차이를 보인다. 신앙의 진리에 위배되는 모든 인간 이성은 진리의 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한다는 아우구스티누스주의에 비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신앙의 진리와 무관하게 이성의 진리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이성의 합리적 논증에 입각한 이해의 중요성을 상대적으로 강조했다. 이들의 차이만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자면, 아우구스티누스주의는 그리스도교에 충실하여 중교적이고 영성적인 측면을 강조한 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철학적 관점에서 인간 이성의 합리성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13세기의 스콜라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치를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신앙적 진리와 화해시키지 못한 채 합리적 논증보다는 신앙과 영성을 강조한 전통적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와, 그리스도교의 권위와 진리를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적극 수용하여 그 원리에 따라 논증되는 모든 것의 진리치를 옹호하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 크게 대별된다. 전자의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프란치스코회 원장이기도 했던 보나벤투라(Bonaventura)를, 후자의 대표자로는 소위 라틴 아베로에즈주의자(Latin Averroist) 혹은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radical Aristotelianism)라 일컬어지는 브라방의 시제르(Siger of Brabant)와 다키아의 보에티우스(Boethius of Dacia)를 들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의미에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러한 조류 가운데 그가 취한 길은 양자의 조화였다. 그러나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주의와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사이의 조화가 아니라 신앙과 이성, 신에 대한 사랑과 합리성에 대한 사랑 사이의 조화였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에서 볼 때 문제의 발단은 이성의 진리 혹은 합리성이 아리스토텔레스 사상과 동일시된 데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은 이성의 진리로 나아가는 적합한 길을 열었으며 탁월한 원리와 개념들을 제공해 주었지만, 그 자체가 이성적 진리와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급진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문제점은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합리성을 추구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를 절대시했다는 점이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아리스토텔레스만 수용한 것도 아니고 아리스토텔레스이기 때문에 수용한 것도 아니었다.
비단 아리스토텔레스 뿐 아니다. 그리스도교도의 것이든 이교도의 것이든 간에 모든 이론과 견해들은 권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진리와 합리성에 의해 평가되었고 필요할 경우 수정되었다. “견해들을 선택하고 배제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누가 말했느냐에 따라 사랑과 미움에 의해서 이끌려서는 안 되고, 진리의 확실성에 의해서 이끌려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 ꡔ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 대한 주해ꡕ, 제12권, 12, 9.
는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근본적인 학문적 태도였다. 이것은 곧 진리에 대한 사랑이자 인간의 이성에 의한 합리적 이해에의 확신과 사랑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이성에 의한 진리의 추구는 신앙 앞에서 불필요한 것도 아니고 신앙과 무관한 것도 아니다. 진리의 획득을 본질적 사명으로 하는 인간의 이성은 신에 의해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성적 진리의 추구는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사명이기도 했다.
인간의 이성은, 마치 아버지의 집에서는 아들인 사람이 자기 집에서는 가장인 것처럼, 신에 의해 부여된 한에서 궁극적으로 신에게 의존하지만 인간의 본성적 능력인 한에서는 그 고유한 작용과 대상을 지니는 독자적 능력이다. 이러한 이성의 진리는 신앙의 진리에 위배되지 않아야 마땅하지만, 그 이유는 신앙의 진리가 ‘진리’이기 때문이지 다른 어떤 이유 때문도 아니다. 진리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상 전체를 지배하는 키워드다. 그것은 곧 진리 그 자체인 신에 대한 사랑이면서 동시에 신에 의해 진리를 파악하는 능력으로서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적 능력에 대한 확신이다. 모든 진리는 진리 그 자체인 신에게 그 궁극적 원천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성에 의한 진리의 추구는 곧 신에 대한 추구이며, 이성이 획득하는 진리는 그것이 진리인 한에서 진리 그 자체인 신에 대한 참여이기도 하다. 이성을 무시하는 것은 그것을 부여한 신의 창조행위를 괜한 짓으로 폄하하는 셈인 반면, 이성을 맹신하는 것은 신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이성적 진리를 추구하는 가운데 신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소명의식이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그는 합리주의자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합리적 설명은 직관과 신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마스 오미어러, ꡔ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ꡕ, 이재룡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2), 94-95쪽.
라는 오미어러(Thomas F. O'Meara)의 묘사나, “그의 논의는 이성적이며 자연적이다. 그러나 그의 연역은 모두가 초자연적인 것을 위한 것이다” G. K. 체스터튼, ꡔ성 토마스 아퀴나스ꡕ, 박갑성 옮김 (홍성사, 1984), 34쪽.
라는 체스터튼(G. K. Chesterton)의 진술은 모두 이처럼 인간 이성의 ‘종속적 독자성’을 말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수용하여 합리적 논증을 펼치는 가운데 그가 추구하고자 한 것은 결국 그리스도교의 진리였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연히 그의 저작들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보이는 화려한 문구나 열정적인 웅변 대신 건조할 만큼 치밀한 논증들의 연속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논증의 부족이나 빈곤함을 이유 삼아 아우구스티누스를 폄하하지 않는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열정적으로 전하는 다소 웅변적인 메시지는 결국 그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동일한 진리, 즉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였기 때문이다. 다만 논증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몫이었을 뿐이다. 적어도 학문적인 면에서 그가 아우구스티누스를 능가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시인이었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산문가였다.
그 용어 자체만으로도 사뭇 들뜨게 만드는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은 아우구스티누스 사상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이자 그의 대표작인 ꡔ하나님의 도성ꡕ(De Civitate Dei)의 핵심 주제이기도 한데, 이에 대해 그는 “두 가지 사랑이 두 도시를 건설했다. 심지어 신까지도 멸시하는 자기사랑이 지상도성을 만들었고, 자기를 멸시하면서 신을 사랑하는 사랑이 천상도성을 만들었다”라면서 열정적이고도 화려한 웅변을 쏟아내는가 하면, “나의 사랑, 나의 중력”(amor meus, pondus meum)이라는 시적 표현을 담아내기도 한다. 아우구스티누스, ꡔ하나님의 도성ꡕ, 14, 28.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진리에 대한 사랑을 이면에 감춘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사랑의 정의는 무엇이고 그것은 어떤 행위이며, 그것은 어떻게 구분될 수 있고 또 어떤 특성을 가지는지 등에 대해 논의해 나간다. 그런 까닭에 마음을 움직이는 웅변과 설득을 원한다면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이해와 논증을 원한다면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의에서 기대해야 마땅한, 따라서 우리가 살표보고자 하는 것은 그토록 예찬되고 노래되어 온 ‘사랑’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것, 즉 ‘사랑’에 의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자래매김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이해와 논의이다.

III. 사랑의 일반적 의미

흔히 서구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는 사랑을 에로스(eros)와 아가페(agape) 또는 아모르(amor)와 카리타스(caritas)로 대별시켜 말하곤 한다. 전자는 인간적 사랑 혹은 인간의 자연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반면, 후자는 그리스도교적 사랑 혹은 신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구별은 사랑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매우 주목해야할 구별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종종 연장선 상에서가 아니라 대립적인 구도 속에서 이해되어 왔다. 전자인 아모르 혹은 에로스는 남녀간의 성적 사랑을 포함하여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사랑으로, 이에 비해 후자인 아가페 혹은 카리타스를 인간적인 사랑과는 완전히 분리된 성스러운 사랑이자 이타적이고 희생적 사랑이며, 순수한 정신적 사랑으로 이해되어 이 둘이 대립되곤 한다. 그리스도교적 사랑 즉 카리타스에 비해 인간적 사랑 즉 아모르는 악을 유발하는 요인으로까지 간주되어 절제와 극복을 통해 카리타스로 승화되어야 마땅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그러나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모르와 카리타스가 구별되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서로 경쟁적이거나 대립된 것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그의 주저인 ꡔ신학대전ꡕ에는 사랑에 대한 논의가 세 부분에서 제시되고 있는데, 하나는 신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부분에서 논의되는 신의 사랑이고, 토마스 아퀴나스, ꡔ신학대전ꡕ, I, q.20. (이하 ꡔ신학대전ꡕ)
둘째는 인간의 정념(passion)을 다루는 가운데 논의되는 본성적 행위로서의 사랑이며, ꡔ신학대전ꡕ, I-II, qq.26-28.
셋째는 믿음, 소망과 함께 신학적 덕으로서의 사랑을 다루는 부분이다. ꡔ신학대전ꡕ, II-II, qq.23-27.
이 가운데 첫째는 신의 사랑인데 비해 둘째와 셋째는 인간의 사랑이며, 인간의 사랑은 다시금 아모르 즉 자연적·본성적 사랑(둘째)과 카리타스 즉 그리스도교적 사랑(셋째)으로 구별될 수 있다. 그럼으로써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의 주체 및 대상의 구별에 입각하여 서로 다른 양태의 사랑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그 모든 논의는 공통적으로 사랑의 본질에 대한 이해, 다시 말해 모든 사랑의 양태에 공통적인 것으로서의 사랑의 행위가 과연 어떤 작용인지에 대한 고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위에서 구분된 사랑의 양태 가운데 신의 사랑을 모든 사랑의 원천이자 근거로, 인간의 자연적 사랑을 사랑 개념에 대한 이해의 출발점으로,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사랑인 카리타스를 인간의 사랑의 완성이자 이상으로 간주하고 있는데, 이러한 논의에는 모두 사랑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공통적으로 깔려있는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 본질은 근본적으로 가장 넓은 의미에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사랑의 양태를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인간의 자연적 사랑 즉 아모르에 대한 분석에 기초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참된 사랑 혹은 올바른 사랑이란 무엇이고,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모르에 맞서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아모르의 이상이자 아모르를 완성시키는 것으로서 카리타스를 자리매김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행하는 사랑의 양태 중에서 신의 은총이 개입된 탁월한 사랑으로서의 카리타스는, 은총이 자연(혹은 본성)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보존․고양․완성시킨다는 일반적 원리에 따라 자연적 사랑인 아모르에 대비되는 것으로가 아니라 아모르의 이상으로서 아모르를 완성시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장 욱, ꡔ중세철학의 정신ꡕ (동과서, 2002), 291쪽 참조.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사랑에 대한 논의를 살펴보기 위한 출발점은 자연히 인간에게 있어서 ‘사랑’이 과연 어떠한 행위인가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1. 사랑이라는 행위 자체의 기본 의미

철학적인 관점을 잠시 벗어나 일상적 쓰임새를 볼 때 사랑은 흔히 우정과 대비되곤 한다. 사랑은 이성간에, 우정은 동성간에 성립하는 감정적 친밀관계를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생물학적 성별에 입각한 이러한 구별의 편협성을 지적하면서, 사랑과 우정의 구분을 심리적 구속 및 신체적 접촉 시도의 유무에서 찾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사랑에 대한 이해는 부모에 대한 사랑이나 이웃사랑, 이념이나 가치에 대한 사랑 등을 사랑의 범주에서 제외시키지 않는 한, 사랑의 여러 양태들 가운데 특정 양태에 해당될지는 몰라도 그 모든 양태를 포섭하는 사랑의 근본적 이해라고 할 수는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의에 입각해 볼 때 인간의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이해된 선을 향한 의지와 욕구의 실질적인 제1추동력’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것은 곧 사랑이 인간의 모든 의지작용에 수반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일상의 어법이 기대하는 것 이상으로 사랑이라는 행위의 외연을 보편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셈이 된다. 하지만 이를 수긍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연관된 점이 해명되어야 한다. 하나는 왜 사랑이 모든 의지/욕구작용에 개입되는가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의지/욕구의 모든 작용이 사랑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물음들은 의지와 사랑 사이의 관계를 보다 명확히 함으로써 논의될 수 있다.

① 감각적 욕구와 지적 욕구

우선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랑의 외연을 의지를 포함하는 모든 욕구작용과 동일시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의지와 욕구가 있는 곳에는 항상 사랑이 있어야 한다” ꡔ신학대전ꡕ, q.20, a.1, c.
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 이유를 “첫째 것이 결여될 경우, 그에 따르는 것들 역시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사랑을 의지와 욕구의 모든 작용에 있어서 제1의 것으로 이해한다. 의지와 욕구의 모든 작용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단일하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그 모든 작용에 포함되고 또 전제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나 욕구란 무엇인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욕구란 선(the good)을 대상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행위자의 능동적 추구헹위를 일컫는다. 육체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지적 본성을 지닌 인간의 경우 이러한 욕구는 감각적 욕구(sensible appetite)와 지적인 욕구(intellectual appetite)로 구별되며, 의지(will)란 바로 후자 즉 지적인 욕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된다. 감각적 욕구는 감각적 인식능력(estimative power 혹은 cogitative power 중세 스콜라의 용어 가운데 estimative power는 감각능력에 따르는 인식능력 일반을 의미하는 반면, cogitative power는 오직 지적 본성을 지닌 인간의 감각적 인식능력을 의미한다. 인간의 경우 감각적 인식과 지적 인식은 서로 구별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후자에 종속되기 때문이다.
)에 ‘선으로 주어진’ 것에 대한 추구인 반면 지적 욕구인 의지는 지성(intellect)에 의해 ‘선으로 이해된’ 것에 대한 추구이다. 그러므로 감각적 욕구와 의지는 ‘선에 대한’ 추구라는 점에서, 그리고 선에 대한 ‘추구’인 한 능동적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임에도 불구하고, 그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감각적 인식과 지적 인식의 차이에 따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이 구별되어야 한다.
첫째, 감각적 욕구는 수동성을 포함하는 데 비해 의지는 능동적이다. 전자의 경우 감각작용 자체가 수동적이기 때문에 감각적 추구의 능동성은 그에 앞서 외부의 욕구대상이 육체적 조건에 변화를 일으키는데 따르는 감각적 반응이라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이에 반해 후자 즉 의지는 그 대상인 선마저도 지성의 적극적인 선·악 판단에 의한다는 점에서 전자에 비해 능동적이다. 다시 말해 선에 대한 감각적 욕구는 그 욕구 자체가 대상에 의해 수동적으로 촉발되고 그에 따르는 반응으로서 추구가 이루어지며,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욕구에 따르는 실제 행위를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동적(passive)인 행위라는 의미에서 정념(passion)이라고 하는 반면, 선에 대한 의지의 추구는 주어진 대상을 선으로 이해하는 지성의 능동적 활동에 더해서 그에 대한 의지 자신의 주체적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대상에 대한 실질적 추구가 이루어지지 않는 보다 적극적인 활동이다.
둘째, 감각적 욕구는 구체적인 대상이 무엇이냐에 따라 반응하는 데 반해 의지는 그 대상이 무엇이냐와 상관없이 그것을 추구할 수 있다. 감각적 욕구는 특수한 선(particular good)에 대해 규정이 되어 있는 반면, 의지는 특수한 선에 대해 규정되어 있지 않고 선 일반(good in general)에 개방되어 있기 때문인데, 이 점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접어두고 그 차이를 간단히 말해보자면, 감각적 욕구를 일으키는 감각적 인식은 대상에 대한 선악 판단에 있어서 그 자신의 능동적 개입을 통해 판단을 달리할 수 없는 반면, 지적 욕구를 일으키는 지적 인식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데서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입맛에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에 대한 판단은 감각의 적극적 개입에 의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들 각각이 지닌 성질에 기인한다. 쓴 것을 피하고 단 것을 취하려는 감각적 욕구가 구체적으로 어떤 대상을 추구하고 또 회피하느냐는 감각작용의 능동적 개입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감각에 작용하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다. 감각적 욕구는 씀바귀를 단 것으로 추구하거나 설탕을 쓴 것으로 회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지적 욕구에서는 대상이 무엇이냐에 상관없이 동일한 대상을 그것이 지닌 다양한 관점에 따라 선으로도 악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설탕은 그것이 달다는 이유에서 선으로 추구될 수도 있지만, 비교에 의해 꿀보다는 그 달콤함의 정도에서 열등한 것으로 회피될 수도 있고, 나아가 당뇨를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회피될 수도 있다. 더욱이 감각과 무관하게 순수한 지적 욕구의 대상인 것의 경우에도 역시, 예를 들어,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할 수도 있는 반면 ‘모르는 게 약’이라면서 ‘앎’ 또는 ‘지식’에 대해 상반된 욕구를 지닐 수 있다. 그러므로 의지의 추구는 그것이 실제로 욕구하는 구체적 대상이 무엇인가에 의해 그 추구가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성이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좌우된다. 이렇게 의지는 지성이 선으로 이해한 모든 것을 추구한다. 스스로에 의해 혹은 남들이나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악한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예를 들어 살인이나 자살과 같이-일지라도, 그것을 의도하고 수행하는 것은 적어도 그것이 어느 한 관점에서는 그 행위자에게 선으로 이해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의지는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선으로 이해되는 모든 것을 추구하며, 추구되는 모든 것을 선으로 추구한다.
감각적 욕구와 의지 사이의 이러한 구별은 욕구의 분석과 이해를 위해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에게 마치 서로 무관한 두 종류의 독자적 추구행위 혹은 그 계열이 있기라도 하듯이 분리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 감각적 욕구는 지적 욕구와 무관하게 감각적 욕구 대상을 추구하는 능력이 아니다. 감각적 욕구는 무의식적 행위가 아닌 한 의지에 매개되어 추구되기 때문이다. ꡔ신학대전ꡕ, I, q.81, a.3, c 참조.
이 점은 감각적 욕구든 지적 욕구든 간에 그에 대한 실제 추구는 한 개인의 행위를 통해서, 특히 외부 대상에 대한 추구는 한 개인의 육체적 행위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인간의 의식적 행위는 조건반사 등의 경우와는 달리 단순히 감각적 자극과 그에 따르는 욕구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대한 의지의 명령을 통해 수행된다. 달콤한 것에 대한 욕구는 미각작용에 따르는 감각적 욕구이지만, 그 욕구를 실제로 시행에 옮겨 설탕을 향해 가기 위해서는 육체를 움직이는 의지의 동의와 명령이 필요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입에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먹거나, 배고픔에도 불구하고 먹지 않거나 하는 소위 감각적 욕구에 대한 절제가 일어난다. 그러한 절제는 단순한 억제가 아니라 이유 있는 억제이며, 그 억제의 이유는 감각에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지성에 알려지는 것으로서 지적 욕구의 추구대상이 되는 것이다.

② 욕구의 제1추동력으로서의 사랑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제 사랑에 대한 논의로 되돌아가 보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사랑을 감각적 욕구와 의지의 두 관점 모두에서 논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감각적 욕구인 정념을 다루는 부분에서 비교적 자세하게 그것을 분석하고 있다. 그런데 언급한 것처럼 의지는 대상이 무엇인가에 무관하게 모든 것을 단지 선의 관점에서 추구하며 그러한 한 동일한 욕구능력인 반면, 구체적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 그것을 추구하거나 회피하는 감각적 욕구의 경우는 그 대상이 되는 선에 따라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대상의 좋고 나쁨에 따라 단순히 그것을 욕구하거나 회피하는 달성욕(concupiscible appetite)이고, 다른 하나는 극복욕(iracible appetite) ‘달성욕’과 ‘극복욕’은 각기 appetitus concupiscibilis와 appetitus irascibilis의 번역어로서, 문자 그대로 하자면 ‘기꺼이/즐거이 추구하는 욕구’와 ‘분노하는/성내는 욕구’를 의미하지만, 이에 대한 적합한 번역어가 아직 국내에는 정착되어 있지 않다. 장욱 교수는 이를 ‘호의적 욕구’와 ‘적대적, 즉 분노하는 욕구’로 번역하고 있다. 그리고 ‘concupiscibilis’의 영어역인 ‘concupiscible’은 일반 영어사전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이다.
으로서 선을 추구하거나 악을 피하는 데 방해가 되는 난관들을 극복하고 넘어서려는 욕구이다. ꡔ신학대전ꡕ, I, q.81, a.2, c 참조.

달성욕은 다시금 세 차원으로 구분될 수 있다. 우선 추구되는 대상으로서의 선을 달성하거나 악을 피함으로써 기쁨을 얻으려는 경향성(aptitude), 그 목적을 향한 실제 운동(movement), 그리고 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그 운동을 정지하는 쉼(rest)이 그것이다. 달성욕의 이 세 차원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각기 사랑(love, amor)과 미움(hatred), 추구(desire)와 회피(aversion), 그리고 그 목적의 성공적 달성에 따르는 선 안에서의 기쁨(joy) 혹은 즐거움(pleasure)과 그 실패에 의해 악이 여전히 남아 있는 슬픔(sorrow) 혹은 고통(pain)으로 규정한다. ꡔ신학대전ꡕ, q.25, a.2, c 참조.

극복욕은 이러한 달성욕의 운동이나 그 쉼과 관련해서 일어난다. 즉 선으로의 운동이 난관이 부딪혔을 때 그 달성하기 어려운 선을 향하는 정념인 희망(hope)이, 희망의 반대로서 희망이 향하는 어려운 선이 사실상 획득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되는 데 따라 그 선에의 추구를 철회하는 절망(despair)이 일어나고, 악을 피하는 데 어려움이 닥쳤을 경우 그 악이 자신에게 초래할 미래의 상처를 염려하는 두려움이, 이에 반해 그 악의 극복을 위해 당당하게 맞서는 과감함(dareing) 일어나며, 악의 현존에 대한 슬픔이나 고통으로부터 분노(anger)가 일어나는 식이다. 희망에 대해서는 ꡔ신학대전ꡕ, I-II, q.25, a.4, c; q.40, aa.1-3. 절망에 대해서는 q.40, aa.4-5, 두려움에 대해서는 qq.41-44, 과감함에 대해서는 q.45, 분노에 대해서는 qq.46-48 참조.

정념에 대한 이러한 분석에서 알 수 있듯이 극복욕은 달성욕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제한다. 그리고 달성욕은 선이나 악에 대한 사랑과 미움을 그 출발점으로 한다. 그런데 이 가운데 악에 대한 미움은 선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악이란 그 자체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가치나 힘이 아니라 우선적으로 선의 결여(privation)라는 2차적이고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그리고 선의 결여로서의 악 역시 그것이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무가 아닌 한 선의 측면을 지니는 반면 모든 선 역시 그것이 순수현실태로서 완전선이자 무한선이 아닌 한 다른 것과의 비교에서 선의 결여의 측면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선은 선으로서 추구되지만 동시에 선의 결여 즉 악으로서 회피될 수 있으며, 모든 악 역시 그것이 무는 아닌 한 선으로서 추구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볼 때 악의 회피는 그 자체가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서 선의 추구와 대등한 것이기보다는, 선의 추구에 따라 그러한 선에 반대되는 것의 회피라는 의미를 지닌다. 선과 악의 관계에서 선이 논리적으로 악에 앞서듯이 선의 추구 역시 악의 회피에 논리적으로 앞서며, 이는 결국 사랑이 미움에 앞선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적으로 달성욕에서 제1의 것은 선을 달성하려는 욕구로서의 사랑이며, 이것이 없이는 악의 회피를 비롯하여 그에 이어지는 모든 욕구 자체가 성립하지 않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을 선을 향한 욕구의 제1추동력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쁨은 달성된 선에 대한 정념이며 희망은 아직 달성되지 않은 선에 대한 정념인 것처럼 다른 모든 욕구의 정념들은 특정한 조건하에서의 선과 관련되는 데 반해, 사랑은 달성 여부 등의 특정 조건에 상관없이 ‘단지 선’이라는 이유에서 그것을 달성하려는 의지의 추동력을 의미한다는 점 역시 이 점을 증거한다. 결국 사랑은 감각적 욕구에 의한 모든 추구행위와 무차별적으로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모든 추구행위를 일으키는 최초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한 사랑은 감각적 욕구에 의해 추구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감각적 욕구의 분석에서 드러난 사랑의 의미는 지적 욕구인 의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의지는 구체적 대상과의 연관 속에서가 아니라 모든 대상에 대해 그것들을 선 일반의 관점에서 추구할 수 있으며, 따라서 의지는 모든 대상을 우선적으로 선으로서 추구한다. 그러므로 선을 달성하려는 의지의 실질적인 모든 운동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이라고 하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의지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사랑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지성과 의지를 원리로 해서 수행되는 인간적 행위(human act) 인간이 수행하는 모든 행위를 일컫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인간의 지적 본성 즉 지성과 의지를 원리로 하여 일어나는 행위를 의미한다. 토마스는 이를 인간의 행위(act of man)과 인간적 행위(human act)로 구별한다. 인간적 행위는 사실상 인간의 모든 의식적 행위를 의미하며, 이러한 인간적 행위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이 바로 자유이다.
는 항상 어떤 목적을 향해 일어난다고 말하는데, 이때 어떤 것이 목적인 이유는 그것이 추구하는 자에게 선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목적에 대한 추구는 곧 목적으로서의 선에 대한 추구이자 그에 대한 의지의 사랑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인간이 암중모색하는 가운데 수행하는 모든 의식적 행위는 바로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수행되며, 목적이 없이는 그 어떤 인간적 행위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지적 욕구의 영역에서도 여전히 목적으로서의 선에 대한 사랑이 그것을 향한 행위에서의 제1추동력이 된다.
물론 대상에 대해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감각적 욕구에서의 사랑과 그에 대해 능동적 선택이 개입되는 이러한 선택은 대상 자체에 대한 의지의 자율성 뿐 아니라, 대상의 선택에 관여하는 지성에 대한 의지의 자율성까지를 포함한다. 의지는 지성에 의해 선으로 이해된 것만을 추구할 수 있다는 한계 내에서 지성에 의해 선으로 이해된 것은 무엇이든 추구할 수 있다. 또한 지성이 선으로 이해한 모든 것을 의지가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행위에 있어서 지성과 의지 사이의 이러한 상호의존적 관계가 바로 인간의 자유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지적 욕구에서의 사랑이 무차별적으로 동일시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사랑(amor)과 구별해서 의지의 사랑인 지적 사랑(dilectio)을 말하기도 한다. ꡔ신학대전ꡕ, I-II, q.26, a.1, c. 단, 그는 감각적 욕구와 구별되는 지적 욕구에 있어서는 amor와 dilectio가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감각적 욕구는 항상 지성의 앎에, 따라서 지적 욕구에 매개되어 추구된다는 점을 환기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감각적 욕구의 경우 육체의 상태에 따르는 욕구의 충족에 적합한 대상-예를 들어 목마를 때의 마실 것-에 대한 추구는 자동적이며 필연적이지만, 그에 대한 실제적 추구는 그러한 감각적 욕구마저도 인식하는 지성 및 그에 따르는 지적 욕구에 의해 매개되어 추구되며, 그에 의해 조정·통제된다. 그 자체로서 고려될 때에는 주어진 대상에 대해 필연적으로 반응하는 감각적 욕구도 사실상 능동적 선택이 개입되는 지적 욕구에 매개되기 때문에 그 추구의 필연성이 상대화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감각에 선으로 주어진 대상 역시 지성에 의해 선으로 이해되어 추구된다.
동일한 순간에 다양한 대상들에 대한 다양한 욕구가 인간의 내면 속에서 일어날 수 있고, 또 그것은 지성에 알려지는 만큼, 그 모든 욕구들이 다 실질적인 추구 즉 사랑의 이유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 행위는 항상 그 가운데 하나를 위해 일어나게 된다. 그 대상이 다른 것보다 더 갈망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다른 것들은 그것에 앞서 추구될 만큼 좋은 것은 아닌 것, 다시 말해 상대적으로나마 ‘덜 선’ 즉 ‘선의 결여’ 즉 ‘악’이다. 욕구는 인식이 아니라 실천이므로 현실화되지 않는 욕구는 더 이상 욕구가 아니다. 실제로 추구되지 않는 선에 대한 욕구는 그 선을 실제로 획득함으로써 추구하는 자와 추구되는 것의 일치를 지향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사랑은 단순히 선에 대한 인식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선으로서 실제로 추구하는 행위를 일으키는 제1추동력이다. 사랑은 인식 및 그러한 인식에 대한 언어적 표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실질적 추구행위이며, 그러한 실제로 추구되는 대상만이 온전한 의미에서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란 선으로 이해된 것에 대한 모든 실질적 추구행위를 일으키는 제1추동력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는 곧 모든 것에 대한 의지와 욕구의 모든 실질적인 추구활동에 사랑이 개입됨을 의미한다. 누군가가 어떤 것을 실제로 추구한다면, 그러한 추구는 곧 그것에 대한 추구자의 사랑 때문에 일어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 사랑의 구별과 특징

사랑이라는 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가 선을 향한 의지와 욕구의 제1추동력이라는 이제까지의 장황한 논의를 바탕으로 이제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의에 나타난 사랑의 몇 가지 특징을 통해 사랑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구체화해 보자.
우선, 단순한 욕구가 아니라 욕구의 실질적 추구를 의미하는 사랑의 결과는 사랑하는 자와 사랑받는 것 사이의 합일(union)이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ꡔ신학대전ꡕ, I-II, q.28, a.1, c.
이러한 합일은 방해되거나 좌절될 수 있기 때문에 당연하거나 필연적인 결과는 아니다. 그러나 사랑은 순탄한 경우 뿐 아니라 어려운 경우에도 그러한 합일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욕구가 아니라 열정과 열망을 포함하는 욕구행위다. 적어도 그러한 합일을 지향하지 않는 욕구는 사랑으로 간주될 수 없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을 단순히 누군가에게 좋은 일이 있기를 바라는 호의와 구별한다. ꡔ신학대전ꡕ, II-II, q.27, a.2, c.

그런데 이러한 합일을 그는 두 가지로 구분한다. 하나는 실질적 합일(real union)이고 다른 하나는 애정관계의 합일(union of affection)이다. ꡔ신학대전ꡕ, I-II, q.28, a.1, c.
전자는 추구되는 대상이 추구하는 자에게 획득됨으로 인해 추구하는 자 안에 실제로 현존하게 그러한 합일로서, 예를 들어 명예, 부, 지식, 건강, 안락함 등이 그것을 추구하는 자 안에 있게 되는 경우이다. 이에 비해 후자는 사랑의 대상을 자기 자신처럼 간주함으로써 그 대상과의 일종의 동일시를 가져오는 것이다. 이 경우 자신과 동일시되는 대상에게 선인 것은 곧 자기 자신에게 선인 것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인 것을 마치 자신에게 선인 것처럼 추구하게 된다.
실질적 합일은 사람 이외의 것에 대한 사랑에서, 애정관계의 합일은 그 자체가 또한 사랑의 주체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결과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는 이러한 구별은 사랑이라는 행위 자체가 지향하는 두 가지 방향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구별과 맞물려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는 ‘무엇을 사랑하는가’와 관련된 추구의 구체적 대상 혹은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누구를 사랑하는가’와 관련된 것인데, ꡔ신학대전ꡕ, I, q.20, a.1, ad 3; I-II, q.26, a.4, c 참조.
이것은 결국 구체적 대상에 대한 추구가 ‘누구를 위한 것인가’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서 선에 대한 제1추동력으로서의 사랑은 ‘누군가에게 선을 욕구하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고, 이에 따라 사랑은 ‘무엇을’ 그리고 ‘누구를 위해’ 추구하는가 하는 두 차원으로 분석될 수 있다. 그리고 후자는 다시금 자기 자신을 위한 경우와 타인을 위한 경우로 나누어지며, 이에 따라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기사랑(amor concupiscentiae)과 타인사랑(amor amicitiae)을 구별한다. ꡔ신학대전ꡕ, I-II, q.26, a.4, c 참조. 본문에서 ‘자기사랑’과 ‘타인사랑’이라는 용어는 원래의 라틴아 용어인 ‘amor concupiscentiae’와 ‘amor amicitiae’의 문자적 번역이 아니라 내용에 비추어 필자가 의역한 용어이다. 장욱 교수는 문자적 의미에 충실하게 각기 ‘욕구적 사랑’과 ‘친구사랑’으로 번역하고 있다.
이 가운데 ‘무엇’의 측면은 자기 자신이든 남이든 간에 누구를 ‘위해’ 추구되는 조건적인 선인 반면, 자기사랑이든 타인사랑이든 ‘누구’의 측면은 조건지워지지 않은 혹은 무조건적인 추구의 대상으로서의 선이므로 보다 근본적이고 1차적인 사랑의 대상이라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명예를 갈망하는 것은 그것이 나 혹은 누군가에게 좋기 때문이지만, 나를 사랑하는 것 혹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에 무슨 이유가 조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여기서 타인사랑은 좀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이해할 필요가 있다. 타인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타인의 선을 마치 자신의 선인 양 추구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위해 타인의 선을 추구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자는 타인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것인 반면, 후자는 타인을 자신에게 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타인을 위해 선을 추구하는 것은 타인사랑이지만, 그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인 경우에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타인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고 말한다. ꡔ신학대전ꡕ, I-II, q.26, a.4, ad 3.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의 실질적 합일을 결과시키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타인을 타인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선을 위한 일종의 수단으로 간주하여 추구하는 자기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남의 기쁨을 위해 그것을 추구하고 그와 함께 기뻐하는 것과, 자신의 기쁨을 위해 남이 기뻐하는 것—남이 싫어하는 것은 물론이고—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타인사랑은 자신의 관점을 타인에게 부여함으로써 동일시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관점을 자신의 것으로 동일시하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러한 한 타인이 원치 않는 것—이는 곧 그에게는 선이 아닌 것 즉 악이다—을 추구하는 것은 타인사랑이 아니라 자기사랑에 불과하다.
앞서 사랑의 결과에 대한 구별을 이 구별과 연결시켜보자. 실질적 합일은 분명히 ‘무엇’의 측면이지 ‘누구’의 측면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 다시 말해 애정관계의 합일은 단순히 ‘그에게 선을’ 추구하는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추구가 ‘그를 위한’ 것인지 ‘나를 위한’ 것인지에 의해 다시 구별되어야 한다. 엄밀한 의미에서의 애정관계의 합일 즉 사람에 대한 사랑은 ‘그를 위한’ 사랑 즉 타인사랑에서 성립한다. 자기사랑의 일환으로 이루어지는 애정관계의 합일은 일상에서 흔히 이기적 사랑이라고 하는 것으로서 타인을 자신에게 종속시켜 소유물화하려는 것에 불과하며 일종의 실질적 합일—그 온전한 실현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에 대한 지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타인사랑은 자신과 타인 사이의 유사성과 적절성에 따르는 친밀성(familiarity)에 근거해서만 성립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의 기쁨을 나의 것으로 공유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기쁨을 공유할 수 없는 사람에게 선을 의지하는 것은 의무일 수는 있어도 사랑은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어떤 것이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그것이 자신에게 본성적으로 적합한 것이거나 기쁨을 주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ꡔ신학대전ꡕ, I-II, q.27, a.1, c 참조.
그 기쁨은 곧 사랑이 단순한 호의를 넘어서서 열망과 정열을 담아 추구되는 선과의 합일을 지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타인의 기쁨이 자신에게는 아무런 기쁨도 되지 않거나 혹은 오히려 회피의 대상인 고통이나 두려움을 수반하게 될 경우, 그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방해물로 간주되어 미움의 대상이 된다. 남을 사랑하는 것에 고통과 희생이 수반될 수는 있지만 고통과 희생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라면 그것은 통상 그런 경우라고 회자되는 이타적인 사랑이 아니라 도대체가 사랑이 아니다. 그것은 의무일 수 있지만, 의무에도 역시 그에 복종한다는 일말의 기쁨과 만족이 뒤따르기 마련이고 보면, 그것은 차라리 자기학대라고 해야 올바를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기쁨이 된다고 해서 그것을 이기적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와 남 사이에 누구의 유익을 위한 것인가라면 몰라도, 그에 따르는 기쁨이 누구에게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이기적 사랑과 이타적 사랑으로 구별하는 것은 적어도 토마스 아퀴나스에게는 적절치 않다. 모든 사랑에는 사랑하는 자의 기쁨이 수반된다. 자기를 위한 것인가 남을 위한 것인가의 구별만이 있을 뿐이다. 진정한 의미의 타인사랑, 즉 타인에게 선을 욕구하고 그가 기뻐하는 것을 같이 기뻐하는 그러한 사랑은 개념적으로는 간단할지 몰라도 현실적으로는 그처럼 쉬운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IV. 아모르(에로스)와 카리타스(아가페)

1. 사랑과 인간의 행복

사랑이라는 행위는 선에 대한 실질적 추구행위를 일으키는 제1추동력이다. 그것은 선으로 이해된 모든 것에 열려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자기사랑일수도, 타인사랑일수도 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은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다. 그렇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의지가 있는 곳에서는 항상 사랑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지적 본성 덕분에 선 일반의 관점에서 모든 선을 추구할 수 있고, 그러므로 모든 것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동시에 사랑할 수는 없다. 사랑하는 것들을 동일한 정도로 사랑할 수도 없다. 어떤 것을 사랑하든 마찬가지인 것도 아니다. 행위의 추동력인 사랑은 그것이 지향하는 대상으로서의 목적과 합일을 열망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 사랑의 다른 모든 대상에 앞서 사랑되는 것,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사랑을 상대화하는 것, 그 사랑 때문에 다른 모든 욕구마저도 포기할 수 있는 것, 이것이 바로 삶 전체를 통해 추구하는 궁극목적으로서의 행복이다. 행복하기만 하다면 돈이나 명예나 지위가 없어도, 아니 세상의 그 무엇이 없어도 상관없다고 하지 않겠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행복(happiness)은 우선적으로 구체적 내용을 지닌 무엇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의 궁극목적(ultimate end)으로 이해되며, 삶의 과정 속에서 추구되는 다른 모든 목적들은 궁극목적인 행복을 위한 수단적 가치를 지니는 경과목적(proximate end)들로 이해된다. 궁극목적과 경과목적에 대해서는 ꡔ신학대전ꡕ, I-II, q.12, a.2, c 참조.
예를 들어 의대 진학이라는 목표는 의사가 되려는 목표의 수단적 가치를 지니며, 의사가 되는 것 역시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적 가치를 지니는 경과목적인 것이다. 이러한 계열은 단지 하나만이 아니라 직업, 취미, 건강, 가정 등 통상 여러 계열을 이루기 마련이지만, 이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의 궁극목적인 행복으로 수렴된다. 경과목적들은 모두 ‘왜?’의 물음이 가능하고 그것은 결국 행복하기 위한 것으로 대답될 수 있지만, 행복에 대해서는 ‘왜?’의 물음이 불가능하다.
궁극목적으로서의 행복이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모든 선 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궁극목적 앞에서 다른 모든 것들은 종속되고 상대화된다. 모든 경과목적은 목적이면서 동시에 수단이기 때문에 목적의 관점에서 이해되는 한 그 자체로 선이지만, 보다 상위의 목적에 비추어 볼 때는 조건적 선이다. 의대생이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간다면, 그것은 의사가 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가 추구하는 보다 상위의 목적에 적합하지 않거나 아니면 적어도 필연적인 수단은 아니라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직 궁극목적인 행복만이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가 아니라 그 자체만으로 선으로 이해되어 추구되는 유일한 목적이다. 다른 모든 목적들은 그 자체의 좋음을 말할 수도 있으면서 동시에 이러한 행복에의 적합성 여부에 따라 좋은 것으로도 좋지 않은 것으로도 판단될 수 있는 것이다. 서로 충돌되는 수단들은 목적에의 적합성 여부에 따라, 서로 충돌되는 경과목적들은 결국 궁극목적인 행복에의 적합성 여부에 따라 그 선성이 판단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삶을 영위해 가는데 있어서 모든 선 판단의 궁극적 기준은 오직 하나 즉 행복일 수밖에 없다. 복수의 기준이 작동한다면, 그것은 여전히 경과목적의 영역에 있는 것이다. 행복은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방향짓는 궁극적 기준인 셈이다.
행복에 대한 추구, 행복에 대한 사랑은 필연적이다. 문제는 그러한 행복의 구체적 대상이나 내용이 드러나 있지 않다는 데 있다. ‘행복’이라는 말 자체는 일상적으로도 이미 궁극성의 의미가 담겨있고 따라서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지만, 사실상 그 행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그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일률적으로 규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목적이든 수단이든 간에 선으로 이해된 것만을 추구하는 인간은 궁극목적인 행복에 대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 혹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지 혹은 그 필연적 조건이 무엇인지 등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가 없는 한 그것의 궁극성을 인정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실제로 추구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은 각자 나름대로의 행복에 대한 이해에 따라 삶을 영위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행복에 대한 이해를 보다 구체화하거나 수정·변경해 나아간다. 삶 전체는 나름대로 이해한 행복을 추구하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행복이 무엇인지를 모색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각자가 이해한 행복은 곧 그 사람의 삶 전체를 통해 판단의 기준이 되는 가치관으로 작용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곧 행복과 동일시되기도 하며, 적어도 그 순간에는 다른 모든 가치들이 그에 비해 상대화된다. 명예 혹은 부가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의 모든 삶이 궁극적으로 그것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경험적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행복의 이해는 개인에게 마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어떤 계기에 의해 그 이해는 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어떤 것을 행복으로 추구하는지가 곧 그 사람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 되는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인간은 각자가 자신이 이해한 행복을 추구하는 가운데 자유롭게 자기규정하고 자기창조해 나아가는 존재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이해가 각자에게 달려있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다 옳거나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행복이란 그것을 획득함으로써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게 되는 그러한 최고선(highest good)이자 총체선(total good)으로 이해될 수 있고, 따라서 행복에 대한 각자의 이해란 곧 각자의 입장에서 그러한 선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그런데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어떤 것이 선인 이유는 그것이 선으로 이해되어 추구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이 선이기 때문에 선으로 이해되고 또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선이란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다”(Bonum est id quod omnia appetunt)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추구되기 때문에 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선이기 때문에 추구된다는 의미이며, 그러한 한에서 추구되는 모든 것은 선이라는 의미이다.
지적 본성 덕분에 이해된 선만을 추구하는, 다시 말해 선에 대한 추구를 그에 대한 이해 여부에 의존하는 본성을 지닌 인간의 경우, 각자는 자신이 선으로 이해한 모든 것을 추구할 수 있지만,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선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외형상의 선(apparent good) 즉 선으로 이해되었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목적의 달성에 적합하지도 않은 선과 실질선(real good)을 구별한다. ꡔ신학대전ꡕ, II-II, q.23, a.7, c 참조.
이해된 선(apprehended good)은 외형상의 선일 수도 실질선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의미하는 실질선은 우선적으로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좋은 것, 다시 말해 종적 본성에 따르는 선이다. 물론 실질선은 각 개인의 조건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적 차원에서도 말해볼 수 있다. 그러나 종적인가 개인적 차원인가의 구별에 앞서 중요한 것은 어떤 것이 실제로 그것을 추구하는 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선인가의 여부는 단순히 그것을 선으로 이해하는 데 달려있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질선은 존재론적 차원을 고려할 때에만 타당하다. 인간이 실제 삶을 영위하는 환경으로서의 문화적 공간은 실질선 여부가 크게 작용하지 않는 영역을 상당부분 포함한다. 인간에 의해 의미와 가치가 부여됨으로써 창조된 문화공간에 적용되는 질서는 분명히 자연의 질서에 더해서 인간의 사유에 의존하는 질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각자의 기호와 판단이 절대시될 수 있으며, 상호주관성이 객관성의 지위를 대신 할 수 있다. 그러나 존재의 질서에서는 사물들 사이의 적합-부적합의 관계와 그에 대한 사유와 판단의 옳고 그름이 모두 존재의 질서에 의존된다. 인간의 이해는 그 질서를 반영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규정하거나 영향을 주거나 변경할 수 없다.
행복이 단지 사회적 함의만을 지닌다면 각자가 이해하여 추구하는 행복과 그에 따르는 삶이 절대적인 가치를 지닐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행복이 그 이상의 것, 다시 말해 존재론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라면 문제는 달라진다. 적어도 종적인 차원에서 행복의 객관적 내용이 주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사유의 질서가 아니라 자연(nature)의 질서에 따르는 것일 터이므로, 그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가 역시 인간의 본성(nature)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따라 인간 본성의 충만한 실현에서 행복의 객관적 의미를 찾고 있다.
이 두 철학자 모두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서 지성성(intellectuality)을 그 종차로 하는 존재로 이해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인간은 육체에 따르는 감각적 욕구와 지적 본성에 따르는 지적 욕구를 자신의 본질적 경향성으로 지닌다. 그러므로 본성의 충만한 실현은 이 두 욕구 모두의 충만한 실현을 의미한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바로 지적 본성에 있기 때문에,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완성은 감각적 욕구가 단순히 억제되거나 통제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적 욕구에 앞서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에서 감각적 본성보다는 지적 본성의 충만한 실현에 있다. 그리고 지적 본성의 충만한 실현은 곧 본성상 알기를 원하는 지성의 욕구를 잠재울 수 있는 대상, 즉 더 이상의 앎 혹은 진리를 욕구하지 않을 수 있는 대상에 대한 인식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유한한 진리들은 원칙적으로 그 이외의 진리를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성의 욕구를 종식시킬 수 없다. 오직 모든 진리를 자신 안에 포함하는 무한한 진리로서의 진리 그 자체만이 앎을 향한 지성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모두 인간의 인간으로서의 완성은 진리 그 자체의 획득에 있다고 말하며, 진리 그 자체야말로 지적 본성을 지닌 인간의 객관적 행복의 내용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진리 그 자체는 인간이 자신의 본성에 따르는 충만한 실현과 완성을 추구하는 한 필연적으로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 대상으로서의 선 그 자체이기도 하다.
문제는 진리 그 자체이자 선 그 자체인 것의 획득이 실제로 가능한가이다. 이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현실적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데 반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것을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을 우선적으로 관조적인 삶으로, 그리고 최소한 그것을 방해하지 않기 위한 모든 육체적 조건의 충족으로 이해한다. 이에 반해 진리 그 자체이자 선 그 자체의 현실적 획득 가능성을 인정하는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서라도 그것의 획득을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의 현실적 획득 가능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하는데, 하나는 ‘진리 그 자체이자 선 그 자체인 어떤 것’이 마치 대상화될 수 있는 하나의 존재자인 것처럼 실제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해된 선이 아니면 추구하지 못하는 인간의 입장에서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은 이 두 전제 모두에 대한 긍정적 대답이다. 그리스도교야말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복에 대한 이해가 지닌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차별화시키는 결정적 요인이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창조와 섭리와 구원의 신은 인간이 지니는 모든 이론적 및 실천적 의문의 궁극적 해명이자 근거다. 행복 역시 신과 함께하는 삶에 있고, 신에 대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제1의 사랑임이 분명하다.

2. 신의 선물로서의 카리타스

신에 대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해는 그리스도교를 배경으로 하는 중세의 다른 사상과들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인간의 자연이성의 관점에서는 신의 존재 자체가 자명하지 않다는 그의 주장에 있다. 다시 말해 신의 존재는 신앙의 관점에서는 자명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성의 관점에서는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신앙은 신의 존재와 그의 섭리, 통치, 구원 등을 모두 보증하지만, 이성은 그의 존재마저도 보증하지 못한다. 자연이성의 관점에서 신 존재의 증명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신으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자연이성은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는 탁월한 능력으로서 신의 모상(imago Dei)의 징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인식이 현실적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자연이성에 애초부터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성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지식이며, 그렇기 때문에라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중에도 무수한 오류와 시행착오를 거쳐서야 비로소 도달될 수 있다. ꡔ신학대전ꡕ, I, q.1, a.1, c 참조.

신의 존재가 자명하지 않다는 이러한 입장에서 필연적으로 귀결되는 것은 신이 인간의 궁극적 행복일지라도 그것이 인간에게 행복으로 이해되어 실제로 추구될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그 가능성이 희박한 이유는 인간이 지닌 자연이성의 본성 때문이지 단순히 인간의 게으름 때문이 아니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 본성으로 부여된 자연이성의 능력만을 고려해 본다면, 인간이 신을 행복으로 추구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신의 존재는 곧 인간의 행복이자 사랑의 대상으로서의 신이 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에 의해 창조된 세계질서와 그 안에서 작용하는 신의 섭리 및 통치마저도 긍정하는 것이며, 이는 곧 창조-타락-구원-종말이라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 세계관 자체를 하나의 신화적 가설이나 문화적 현상으로서가 아니라 사실로서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이 아닌 다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은 ‘그저 다른 삶’이 아니라 삶 자체의 궁극적인 파괴와 몰락을 의미한다. 이런 마당에 자신의 이성을 탁월하게 사용하는 극소수의 인간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자신의 객관적 행복인 신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그 전제가 되는 신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 모두에게 개방되어야 한다.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신 자신에 관한 진리가 신 스스로에 의해 계시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로 인도하려는 신의 사랑의 표현이다. 신이 베푸는 사랑 역시 사랑의 일반적 의미 즉 선에 대한 추구임은 마찬가지지만, 신은 그 무엇도 결여하지 않은 완전자이기 때문에 신의 사랑은 자신의 완성을 위해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선을 나누어줌으로써 남에게 선을 바라는 그런 사랑이다. ꡔ신학대전ꡕ, I, q.20, a.2, c 참조.
인간에게 최고의 선은 곧 그의 객관적 행복인 신과의 만남이기 때문에, 인간을 향한 신의 사랑은 자신의 도움이 없이는 신을 알기도 사랑하기도 어려운 인간에게 자신의 존재와 사랑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을 추구하고 사랑하도록 도와주는 것으로 표현된다. 자연이성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일을 보다 용이하고 개방적이게 만드는 신의 초자연적 계시는 곧 인간에 대한 신의 은총이자 사랑의 표현이다.
이해된 것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도 신에 의해 부여된 것이며, 다른 모든 본성과 마찬가지로 인간 역시 그러한 자신의 본성에 따르는 것이 창조의 질서이자 신에 의해 의도된 것임을 고려할 때, 인간의 자연이성이 자신의 객관적 행복인 신을 인식하고 추구하기에 적합한 능력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오직 초자연적인 은총의 도움에 의해 모든 사람에게 가능해진다는 것은 얼핏 모순처럼 보이며 신의 사랑이기보다는 신의 독재적 지배에 대한 증거로 보일 수도 있다.
물론 신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필연적으로 추구하도록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볼 때 인간이 구체적인 어떤 대상, 그것도 다른 모든 가치의 기준이 되는 궁극목적으로서 특정한 대상을 필연적으로 추구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모든 행위로부터 자유와 자율성을 빼앗는 것이며, 이는 곧 인간의 지적 본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고, 인간을 존재론적으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어차피 인간을 포함하는 존재세계 전체는 그것을 창조한 신의 법칙에 필연적으로 종속되게 마련이며, 그런 의미에서 신은 인간을 포함한 세계 전체에 대한 독재적 지배자다. 독재자가 아닌 신은 신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신의 법칙에 맹목적으로 종속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할 망정 마치 신 자신이 그런 것처럼 자유—그리고 그 근거로서의 지적 본성—를 줌으로써 인간의 격을 높이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간이 참된 행복인 신을 사랑하여 그 행복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본성 혹은 자연과 은총 혹은 초자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적절한 이해가 요구된다. 초자연적 간섭으로서의 신의 은총은 자연 혹은 본성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본성의 완성을 위한 신의 선물로 이해되어야 한다. 초자연을 자연에 대한 부정이자 대치물로 간주하는 것은 신의 무능력이나 신이 저지른 과거의 잘못을 지적하는 셈이 된다. 자연의 입장에서 초자연은 본성에서 벗어난 것일 수 있지만, 자연과 초자연 모두 신에게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에 연장선상에 있다. 엄밀하게 말하면 자연의 창조가 초자연의 질서에 의해 성립된 것이기 때문에 자연 안에는 이미 초자연이 작동하고 있다. 자연이 자연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초자연 덕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연이성 역시 개념상으로는 신의 간섭과 무관하게 자신의 본성적 능력에 따라 그 작용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지만, 자연이성의 존재와 작용 자체가 이미 그것을 창조한 신의 섭리에 의존하기 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는 초자연과 철저하게 분리된 자연이성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포함한 신의 계시는 인간의 지적 본성을 대신하거나 그것이 불필요함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만의 힘으로는 자신의 궁극목적인 신이 아니라 다른 곳에 눈을 돌리기 마련인 인간으로 하여금 그 인식과 사랑의 방향을 신으로 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주어지는 신의 선물이다. 물질유의 세계에 속하면서도 자신의 지적 본성 덕분에 그것을 벗어나 비물질유의 영적 세계에 한 발을 딛고 있는 인간의 행복은 자연 내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벗어나 있는 진리 그 자체이자 선 그 자체인 신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시된 진리는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신에게 향할 것을 명령할 뿐 그것을 강제하지는 않는다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한다. 신과 계시된 진리에 인간의 대한 이해가 온전할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그것은 우선적으로 믿음의 대상이지 이해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인간의 지식은 신의 모습을 똑바로 직시하고 그의 권능을 일일이 이해·확인할 수 없다. 신의 계시는 그 모든 것을 드러내고 있지만, 자연이성에 의해 낱낱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그 진리의 빛이 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의 계시에 대한 ‘이해’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믿음’을 통해 신을 추구하고 사랑하려 애쓰는 자에게 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부여하는 또 다른 은총이 곧 초자연적 덕으로서의 사랑 즉 카리타스(혹은 아가페)다.

3. 아모르에서 카리타스로

일반적 의미의 사랑 즉 아모르는 선으로 이해된 모든 것을 대상으로 추구할 수 있는 의지의 사랑을 의미하는 반면, 카리타스는 아모르 가운데 특정한 사랑 즉 오직 신과 신적 선을 대상으로 추구함으로써 신 자신을 획득하고 신 안에서 쉼을 얻는 그러한 사랑이다. ꡔ신학대전ꡕ, II-II, q.23, a.6, c 참조.
이러한 카리타스에 의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랑의 행위와 그 덕(virtue) 모두를 의미한다. ꡔ신학대전ꡕ, I-II, q.26, a.3, c 참조.
덕이란 일반적으로 행위의 반복에 의해 습득된 습관(habit) 가운데 나쁜 습관인 악덕(vice)에 대해 올바른 습관을 의미하며, 한마디로 올바른 행위경향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카리타스를 인간이 스스로 습득한 덕이 아니라 신에 의해 인간의 본성에 더해진 덕으로 이해한다. 카리타스는 인간 의지의 본성적 사랑을 넘어서는 사랑이라는 이유에서다. ꡔ신학대전ꡕ, II-II, q.23, a.2, c.
카리타스 역시 인간에 의해 수행되는 사랑 즉 아모르이면서 동시에 그것과는 구별되어야 하는 아주 특별한 방식의 아모르를 수행하는 경향성으로 이해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한 실제적 욕구행위로서의 아모르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그 주체인 인간의 충족과 완성으로서의 행복이며, 인간의 행복은 오직 진리 그 자체이자 선 그 자체인 신과의 만남에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모르는 카리타스로 승화될 때에만 비로소 올바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카리타스는 행복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아모르가 그 객관적 행복인 신을 향하게 될 경우를 말한다.
이러한 카리타스는 자신의 이해에 따라 행복의 구체적 내용을 추구하면서 동시에 행복의 내용을 모색해 나아가는 인간이 행복의 여러 후보들 가운데 신을 선택하여 추구하는 경우라고 이해해 볼 수도 있다. 그럴 경우 카리타스는 굳이 의지의 본성을 넘어서는 것으로서 신에 의해 부과된 것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마치 신의 도움이 없이는 신을 사랑할 수 없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카리타스가 의지의 본성에 입각한 아모르를 넘어선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의지의 본성에 입각한 아모르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데 반해 카리타스는 그러한 자기중심성을 넘어선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아모르의 경우 그것이 제아무리 엄밀한 의미에서의 타인사랑 즉 타인을 위해 타인에게 선을 욕구하는 사랑일지라도 그것은 항상 자기사랑에 대한 모방으로서만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사랑을 포함한 모든 아모르는 그로부터 결과되는 합일에 따르는 기쁨에 대한 기대를 동반하며, 기쁨을 주지 못하는 대상은 사랑이 아니라 회피와 미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모르는 결국 선에 대한 자신의 이해에 입각하기 때문에 자신에게 선인 것에 대한 사랑을 그 근본적인 특징으로 한다. 아모르는 자신의 선, 자신의 행복을 갈망하는 욕구작용인 것이다.
물론 아모르에 의해서도 신을 사랑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이 자신에게 선으로 이해되는 한에서이기 때문에 자기사랑의 일환에 불과하며, 자신이 사랑하는 여러 대상 가운데 하나로서 신을 간주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의지의 추구는 그 본성상 필연적이 아니기 때문에 신 역시 객관적으로는 선 그 자체이자 인간의 행복일지 몰라도 인간의 이해와 욕구 앞에서 상대화될 수 있고, 따라서 조건과 상황에 따라 추구의 대상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신이 더 이상 자신에게 기쁨을 주지 않거나, 다른 것에 대한 사랑과 충돌할 경우, 신이 과연 사랑의 대상인가의 여부가 고려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종교를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간주하거나 고단한 삶에 대한 위안의 방편으로 삼는 경우에 나타나는 신에 대한 사랑, 나아가 신을 이 땅에서의 성공적 삶에 대한 도우미처럼 생각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신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카리타스가 아니라 인간 의지의 본성에 입각한 자기중심적 신 사랑이다. 그것은 이해된 선만을 추구하는 인간의 지적 본성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자연스러울지언정 진정한 의미에서의 신 사랑일수도, 참된 행복인 신과의 합일로 나아가는 사랑일 수도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말하는 카리타스는 이러한 본성적 자기중심성을 넘어서서 그야말로 신을 위해 신을 사랑한다는 데 그 근본적 특징이 있다. 하지만 의지의 본성에 의한 사랑과는 달리 카리타스는 그 대상인 신과의 직접적인 접촉이나 관계에서 비롯되는 사랑이 아니다. 오히려 카리타스의 실천은 계시된 진리에 의해 부여된 명령에의 복종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신을 사랑한다면, 신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원하는 것을 기꺼이 행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진정한 의미의 타인사랑으로서 인간적 사랑의 영역에서도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의 명령은 인간의 자연적 사랑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도 감당되지도 않는 행위까지를 요구한다. 일곱 번 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이 그 단적인 예이다. 의지의 본성에 따르는 자연적 사랑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랑의 대상이기는커녕 가장 극단적 미움의 대상일 원수마저도 사랑하라는 이 명령은 충족과 기쁨을 수반하기보다는 고통과 희생을 예견케 한다. 게다가 단지 명령에 대한 복종으로서 그 행위를 수행하는 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사랑이라기보다는 의무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리타스가 단순히 권위에 대한 복종으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사랑일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신에 대한 사랑, 그 사랑에 때문에 자신의 본성적 의지의 관점에서는 전혀 사랑의 대상일 수 없는 원수사랑의 명령마저도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실천할 수 있게 하는 신에 대한 사랑에 따르는 기쁨과 즐거움 때문이다. 이러한 기쁨은 단순히 신을 행복의 구체적 대상인 선 그 자체로 인식하고 추구하는 데 따르는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참된 행복인 신에게로 인도하기 위해 신을 사랑하는 행위에 더해주는 신의 선물이다. 이런 이유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카리타스보다 더 강렬하게 행위를 유도하는 덕도 없고, 카리타스보다 더 커다란 즐거움으로 행위를 수행하는 덕도 없다고 말한다. ꡔ신학대전ꡕ, II-II, q.23, a.2, c 참조.
카리타스는 신을 사랑하게 하는 신의 선물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기도 하다.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은 신 자신의 완성과 행복을 위한 것이 아니라-신은 완전자이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며, 따라서 인간이 신과의 합일이라는 객관적 행복에 이르고 그 안에서 기뻐하기를 원하는 그런 사랑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신의 사랑에 부응하는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에는 인간적인 방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지라도 신에 의해 의도된 기쁨이 수반되는 것이다. 신에 대한 사랑에 따르는 기쁨이야말로 원수마저도 사랑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신의 본성에 따를 경우 고통을 수반하는 원수사랑 자체가 카리타스에 의해 기쁨을 주는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기보다는, 그 명령을 기꺼이 준수하기까지에 이르는 신에 대한 사랑에 수반되는 기쁨이 그 고통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리타스는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는 자연적 사랑을 넘어서서 자신의 행복인 신에 철저하게 종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카리타스에 의해 비로소 신은 인간이 헤아릴 수 있는 여러 선들 중 하나로서가 아니라 모든 선의 기준이자 원천으로서 추구되며, 그럼으로써 인간은 자신의 객관적 행복을 실제로 추구할 수 있게 된다. 신을 사랑하는 것은 객관적 행복에 대한 사랑이며,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 것 자체가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이자 선물인 것이다. 또한 카리타스는 모든 인간을 바로 신이 사랑하는 자라는 이유에 의해 사랑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웃사랑 즉 자신을 위한 타인 사랑이 아니라 타인을 타인으로 인정하면서 사랑하는 참된 인격적 사랑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결국 본성상 자신의 이해에 따라 자신의 완성과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이고 자연적인 사랑으로서의 아모르는 그러한 본성적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는 신에의 사랑인 카리타스에 의해서만 올바른 길에 들어설 수 있고 또 완성될 수 있다. 궁극목적은 곧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고, 이러한 궁극목적은 복수일 수 없기 때문에, 카리타스에 의해 신을 사랑하는 것은 곧 신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것과 같다. 신을 사랑하는 자는 다른 모든 행위에 있어서도 자신의 이익에 따라 판단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신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자이며, 신에 대한 그의 사랑은 카리타스가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벗어나지 못한 아모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카리타스에 의한 신 사랑은 자신의 모든 행복과 이익을 신에게서 구하기 때문에 이 땅에서의 삶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남을 배반하거나 기만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을 위한 신 사랑은 신 마저도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것이기에 자신의 이익에 따라 신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을 수단화하고 도구화하는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카리타스는 인간의 삶에서 구별되며 언급되는 여러 방식의 사랑에서 진실함을 말할 수 있는 원형이기도 하다. 남녀간의 사랑이든 부모자식 간의 사랑이든 그 어떤 관계의 사랑이든 간에 인간들 사이의 모든 사랑 뿐 아니라 이념이나 가치에 대한 사랑마저도 그것의 진실함 혹은 진정성을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익만을 고려하는 것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진실한 사랑이란 인간적 기원을 지닌다기보다는 신적인 기원을 지닌 것이며,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과 그에 화답하는 카리타스 즉 신에 대한 인간의 사랑을 닮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세계에서 진실한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신이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카리타스의 발현인 것이다. 카리타스가 자기중심성을 벗어나는 신에 대한 사랑이라고 해서 그것이 다른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것 역시 카리타스이며, 이에는 신이 사랑하는 자로서의 자기 자신과 자신의 이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V. 마치며

사랑은 선에 대한 의지와 욕구의 제1추동력이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규정은 자칫 각 개인들이 경험에 바탕을 둔 주관적 견해표명으로 흐르기 쉬운 사랑에 대한 논의에 대해 일반성과 객관성을 담보해 주는 토대로서의 철학적 규정이다. 이를 바탕으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의 본성적 욕구에 따르는 자연적 사랑으로서의 아모르에 대한 철학적 분석을 제시할 뿐 아니라, 그러한 본성을 넘어서는 것이면서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신적 사랑인 카리타스를 구별하고, 카리타스야 말로 아모르의 이상이자 완성으로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사랑 중에서 가장 탁월한 사랑이자 참되고 올바른 사랑임을 논증한다. 이해된 선만을 추구하는 본성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본성에 따르는 사랑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의 행복은 그러한 영역을 초월하는 진리 그 자체이자 선 그 자체인 신과의 만남에서만 가능하다는 형이상학적 분석을 토대로 토마스 아퀴나스는 본성에 입각한 아모르가 본성을 넘어서는 카리타스로 승화될 때 비로소 선을 추구하는 사랑의 욕구가 충족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모르와 카리타스의 구별이 토마스 아퀴나스만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구별을 인간의 본성적 욕구방식과 그 대상인 선 사이의 일반적 관계에 대한 분석에 기초해서 논의한다는 점은 그의 고유한 특징이다. 특히 그 구별이 단순히 대상에 따르는 구별 즉 자기 자신을 포함한 세상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구별에 입각해 있지 않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신에 대한 사랑마저도 자기사랑의 일환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며, 그러한 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적 욕구방식임을 그는 논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성을 축으로 구별되어야 하는 토마스 아퀴나스 식의 아모르와 카리타스의 구별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신을 멸시하는 자기사랑과 자신을 멸시하는 신에 대한 사랑’이라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뇌에 찬 진술이 이론적 근거와 더불어 이해될 수 있다. 도대체 왜 신을 사랑하기 위해 굳이 자신을 멸시해야 하는가의 물음은 신에 대한 사랑마저 자기사랑의 일환이기 쉬우며 그것이 바로 인간 욕구의 본성이라는 점을 직시할 때에만 비로소 그 한계를 넘어서 진정한 의미의 신 혹은 타인사랑으로 나아가려는 의지의 간절함을 간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제기되는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냐?’는 물음 역시 대부분의 경우 ‘진실한’ 사랑이 과연 어떤 것인가에 대한 실존적 물음으로 볼 수 있는 한, 사랑의 ‘진실성’을 단순히 특정한 심리적·감정적 태도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성을 넘어서는 것에서 찾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에서 그 적절한 해명의 단서를 구할 수 있다.
카리타스는 선을 추구하는 의지가 향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대상 즉 객관적 행복인 선 그 자체로서의 신을 향하는 의지의 사랑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신을 자기 자신의 기쁨에 종속시키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신 자신을 위해 추구하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올바른 사랑인 동시에 진정한 사랑이며 의지의 본성에 따르는 모든 사랑의 완성이자 가장 탁월한 의미의 사랑이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만으로 행사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라 그에 더해지는 신의 은총 덕분에 가능한 사랑이며, 인간에게 베푸는 신의 사랑에 대한 화답이다. 본성적인 방식으로는 불가능할 수 있는 신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신과의 합일을 추구할 수 있게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에 대한 신의 사랑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적 진리에 비추어 별반 새로울 것 없는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사랑을 의지와 욕구의 작용으로 분석하는 가운데 자기중심성을 축으로 본성적인 아모르와 본성 초월적인 카리타스를 구별하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의는 단순히 사랑에 대한 철학적 해명을 넘어서서 인간의 실존적 결단을 촉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완성으로서의 객관적 행복을 추구하는 한 무엇을 사랑하고 추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욱이 신마저도 자기중심적으로 사랑할 수 있다는 그의 분석은 그리스도교 밖의 사람들 이전에 그 안의 사람들이 보다 주목해야 할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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