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캔터베리의 성 안셀무스(Saint Anselm of Canterbury)
에리게나가 시작한 운동은 그 창시자가 죽은 후 사라졌다. 그 후 나라간의 약탈과 전쟁으로 인하여 10세기동안의 지적생활은 전무했다. 그러나 베네딕트수도원의 몇몇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엄격한 기독교생활과 세속적인 생활을 옹호하는 이들의 갈등이 이어졌다. 이에 성 안셀무스의 제술에서 최초의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발견했다.
1. 이성과 신앙
지식의 두 원천은 이성과 신앙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변증론자의 극단적인 태도에 반대하여 안셀무스는 사람은 먼저 신앙에 굳게 서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을 단언한다. 첫째, 진리가 아주 방대하고 심오하여 죽을 인생들은 결코 그것을 다 알 수 없다는 점과, 사람의 날들을 계수되었으므로 교부들도 더 오래 살았더라면 말했을 모든 것을 실제로 말할 수 없었다는 점,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를 밝게 하시는 일을 결코 그만두지 않으셨고, 그만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점을 잃어버리는 점이다. 마지막을 신앙에 대한 이해다. 한 사람의 신앙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계쪽으로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으려면 이성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들을 논의하기 전에 이 신비들을 믿어야 하며, 믿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려 해야 한다. 안셀무스는 자신이 “필연적 이유”라고 부르던 것으로, 잘 수행한 이성적 탐구가 필연적으로 신앙의 신비들을 지지하게 됨을 증명하자고 제안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는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나님이시며, 말씀의 성육신은 인간을 구원하는 데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이유에 의하여 입증하는 것은 또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그 필연성을 이해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일일 것이다.
2. “모놀로기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존재
“모놀로기움”에는 계시의 힘에 의하여 입증되는 내용은 전혀 없고, 이성의 힘에 의하여 입증되는 내용만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첫째는 사물들은 완전으로 동등하지 않다는 원칙이며, 둘째는 절대적 존재는 그 분유들의 존재에 의하여 요구된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증명의 출발점은 사물 속에는 선이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개별적 선들은 똑같이 선한 것은 아니므로, 단일하고 동일한 선에 참여함에 의해서만 선이 될 수 있다. 이 선들은 절대적으로 선하며, 절대적으로 위대하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보다 우월한 제일 존재가 있고,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라 부른다. 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을 갖고 있다. 이 원인들은 하나의 유일한 원인으로 환원되든지 혹은 스스로 존재하든지 혹은 서로가 서로를 산출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유일한 원인 때문에 존재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이 원인은 하나님이다. 세 번째는 필연적으로 모든 존재보다 우월하고, 어떤 존재보다 열등하지 않은 한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증명들은 하나의 유일한 항으로 계열을 끝내지 않을 수 없는 내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 이 계열은 유한한 수의 항을 포함하고 있는 위계다.
3.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의 증명
안셀무스는 “하나님”이라는 낱말에 대한 지식이며, 그 말에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을 전제로 연구한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가장 큰 존재가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되므로, 그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존재는 이성 속에 있고, 실제로도 있다. 신앙이 제시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존재에 대한 문제일 때에만 사유 속에 실존으로부터 실제 실존으로 이르는 과정은 가능하고, 필연적이라고 안셀무스는 말한다. 이 논리는 이후에도 많은 철학자들이 취했고, 혹은 거부했다.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실제 존재와 사유가 파악하는 예지적 존재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원리를 정죄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점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존재를 제쳐두고, 존재 문제를 고찰하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4. 하나님의 속성들과 창조
하나님은 실존하지 않을 분이시므로, 그는 가장 뛰어난 존재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그 존재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산출 원인이시든지 혹은 하나의 질료이어서 우주는 그 질료로부터 만들어진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는 하나님과 우주를 하나의 유일한 존재로 환원하지 않는 유일한 교리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으로 만물을 유지하시면서 모든 것에 현존하시며,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에 맞는 이름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 그에게 돌리는 정당한 두 가지 조건은 첫째,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본질적으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완전은 아무런 변화나 감소를 겪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그의 본질은 아무런 우연성을 받아들이시는 일이 없이 그 자신이 동일하시다. 하나님만 말 그대로 존재하시고, 다른 존재들은 하나님에 비교할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5. 지식과 의지
그는 유와 종의 실재를 신학적 정통 신앙에 필수적 조건으로 만들기까지 그 실재를 주장한다. 이것은 성 안셀무스의 사상을 존재론적 논증의 발견으로 향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신 존재 증명에서 완성의 정도를 직접적으로 논증할 수 있게 한 요소 가운데 하나의 실재이다. 생각할 수 있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은 우리를 곧장 정도가 높은 실재로 데려간다. 그가 보기에 관념의 대상들은 이미 존재였기 때문이다. 진리는 무엇의 존재가 무엇의 당위를 결정하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이 규칙은 결국 언제나 하나님의 본질이므로, “진리에 대하여”는 참된 모든 것의 유일한 진리 즉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결론을 내린다. 안셀무스의 신학을 연구한 학자 가운데는 이 신학을 “기독교 합리론”이라고도 한다. 이 신학의 애매한 것은, 이 신학이 이해를 구하는 신앙의 내면적 생활을 표현할 때 때로는 신비주의와 맞닿는 동시에 이성적 필연성을 바뀌는 변증법적 정열로 가득 차 있다는 이중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안셀무스를 스콜라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웠다. 신학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그 변증법적 엄격함으로 신학을 일종의 학문으로 바꾸어 놓았던 최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의 이름은 소위 “존재론적 증명”으로 수세기동안 형이상학자들을 갈라놓게 할 끝간데 없는 논쟁과 나눠질 수 없다. 명백한 것은 형이상학자가 “ 존재론적” 증명에 찬성하는지 반대는지를 아는 것이 그의 철학을 아는데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나 그럴듯하게 추측할 수 있게 한다.
에리게나가 시작한 운동은 그 창시자가 죽은 후 사라졌다. 그 후 나라간의 약탈과 전쟁으로 인하여 10세기동안의 지적생활은 전무했다. 그러나 베네딕트수도원의 몇몇사람들의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엄격한 기독교생활과 세속적인 생활을 옹호하는 이들의 갈등이 이어졌다. 이에 성 안셀무스의 제술에서 최초의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발견했다.
1. 이성과 신앙
지식의 두 원천은 이성과 신앙이며,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어떤 변증론자의 극단적인 태도에 반대하여 안셀무스는 사람은 먼저 신앙에 굳게 서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을 단언한다. 첫째, 진리가 아주 방대하고 심오하여 죽을 인생들은 결코 그것을 다 알 수 없다는 점과, 사람의 날들을 계수되었으므로 교부들도 더 오래 살았더라면 말했을 모든 것을 실제로 말할 수 없었다는 점,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를 밝게 하시는 일을 결코 그만두지 않으셨고, 그만두지 않으실 것이라는 점을 잃어버리는 점이다. 마지막을 신앙에 대한 이해다. 한 사람의 신앙을 이해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시계쪽으로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찾으려면 이성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들을 논의하기 전에 이 신비들을 믿어야 하며, 믿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려 해야 한다. 안셀무스는 자신이 “필연적 이유”라고 부르던 것으로, 잘 수행한 이성적 탐구가 필연적으로 신앙의 신비들을 지지하게 됨을 증명하자고 제안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그는 세 위격이신 한 분 하나님이시며, 말씀의 성육신은 인간을 구원하는 데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을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이유에 의하여 입증하는 것은 또 신비를 이해하는 것은 그 필연성을 이해하는 것을 훨씬 넘어서는 일일 것이다.
2. “모놀로기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존재
“모놀로기움”에는 계시의 힘에 의하여 입증되는 내용은 전혀 없고, 이성의 힘에 의하여 입증되는 내용만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첫째는 사물들은 완전으로 동등하지 않다는 원칙이며, 둘째는 절대적 존재는 그 분유들의 존재에 의하여 요구된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첫 번째 증명의 출발점은 사물 속에는 선이 있다는 사실이다. 모든 개별적 선들은 똑같이 선한 것은 아니므로, 단일하고 동일한 선에 참여함에 의해서만 선이 될 수 있다. 이 선들은 절대적으로 선하며, 절대적으로 위대하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보다 우월한 제일 존재가 있고,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라 부른다. 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원인을 갖고 있다. 이 원인들은 하나의 유일한 원인으로 환원되든지 혹은 스스로 존재하든지 혹은 서로가 서로를 산출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의 유일한 원인 때문에 존재하며, 스스로 존재하는 이 원인은 하나님이다. 세 번째는 필연적으로 모든 존재보다 우월하고, 어떤 존재보다 열등하지 않은 한 본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 증명들은 하나의 유일한 항으로 계열을 끝내지 않을 수 없는 내용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때 이 계열은 유한한 수의 항을 포함하고 있는 위계다.
3. “프로슬로기온”(Proslogion)의 증명
안셀무스는 “하나님”이라는 낱말에 대한 지식이며, 그 말에 돌릴 수 있는 유일한 지식을 전제로 연구한다. 우리는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가 없다고 믿는다. 하지만 가장 큰 존재가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 것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되므로, 그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존재는 이성 속에 있고, 실제로도 있다. 신앙이 제시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존재에 대한 문제일 때에만 사유 속에 실존으로부터 실제 실존으로 이르는 과정은 가능하고, 필연적이라고 안셀무스는 말한다. 이 논리는 이후에도 많은 철학자들이 취했고, 혹은 거부했다. 이 내용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실제 존재와 사유가 파악하는 예지적 존재를 같은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원리를 정죄하는 자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점은 경험적으로 주어진 존재를 제쳐두고, 존재 문제를 고찰하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이다.
4. 하나님의 속성들과 창조
하나님은 실존하지 않을 분이시므로, 그는 가장 뛰어난 존재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존재하는 다른 모든 것을 필연적으로 그 존재를 하나님으로부터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산출 원인이시든지 혹은 하나의 질료이어서 우주는 그 질료로부터 만들어진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는 하나님과 우주를 하나의 유일한 존재로 환원하지 않는 유일한 교리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으로 만물을 유지하시면서 모든 것에 현존하시며,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존재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에 맞는 이름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 그에게 돌리는 정당한 두 가지 조건은 첫째, 우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본질적으로 절대적인 하나님의 완전은 아무런 변화나 감소를 겪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며, 두 번째는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며, 그의 본질은 아무런 우연성을 받아들이시는 일이 없이 그 자신이 동일하시다. 하나님만 말 그대로 존재하시고, 다른 존재들은 하나님에 비교할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5. 지식과 의지
그는 유와 종의 실재를 신학적 정통 신앙에 필수적 조건으로 만들기까지 그 실재를 주장한다. 이것은 성 안셀무스의 사상을 존재론적 논증의 발견으로 향하게 하고, 그로 하여금 신 존재 증명에서 완성의 정도를 직접적으로 논증할 수 있게 한 요소 가운데 하나의 실재이다. 생각할 수 있는 완전한 존재에 대한 관념은 우리를 곧장 정도가 높은 실재로 데려간다. 그가 보기에 관념의 대상들은 이미 존재였기 때문이다. 진리는 무엇의 존재가 무엇의 당위를 결정하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다. 이 규칙은 결국 언제나 하나님의 본질이므로, “진리에 대하여”는 참된 모든 것의 유일한 진리 즉 하나님이 존재하신다고 결론을 내린다. 안셀무스의 신학을 연구한 학자 가운데는 이 신학을 “기독교 합리론”이라고도 한다. 이 신학의 애매한 것은, 이 신학이 이해를 구하는 신앙의 내면적 생활을 표현할 때 때로는 신비주의와 맞닿는 동시에 이성적 필연성을 바뀌는 변증법적 정열로 가득 차 있다는 이중적인 사실 때문이었다. 안셀무스를 스콜라주의의 아버지라고도 불리웠다. 신학의 이상을 추구하면서 그 변증법적 엄격함으로 신학을 일종의 학문으로 바꾸어 놓았던 최초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안셀무스의 이름은 소위 “존재론적 증명”으로 수세기동안 형이상학자들을 갈라놓게 할 끝간데 없는 논쟁과 나눠질 수 없다. 명백한 것은 형이상학자가 “ 존재론적” 증명에 찬성하는지 반대는지를 아는 것이 그의 철학을 아는데 충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나 그럴듯하게 추측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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