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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중세철학

과제3)에리게나, 안셀무스, 아벨라르

작성자최준호|작성시간06.11.24|조회수146 목록 댓글 1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게나

스코틀랜드 사람 요한은 자기 시대를 지배한다. 그리고 그의 교리는 서양 사상사에 아주 독특한 자리를 차지하므로 이 교리는 우리가 꼼꼼하게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다.

1. 신앙과 이성
사람은 진리에 대하여 세 가지 연속 선상에 있어 왔다. 복음에 의하여 진리의 완전한 계시가 있을 때까지 이성은 자연을 이해하기 위하여 그리고 자연의 원인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하여 물리학을 구성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성은 두 번째 단계에 들어갔는데 이성은 무오류의 원천으로부터 진리를 받아들이므로 이성이 할 수 있는 지혜로운 일은 하나님이 성경에 계시하신 대로 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는 현재 단계를 대신하여 나중에 나타날 것이다. 지복의 전망 속에 신앙은 사라질 것이며 진리에 대한 직접쩍인 통찰이 대신할 것이다. 인간 이성은 지금처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하여 가르침을 받는 이성이며, 문제의 이성이 철학자의 이성이든 신학자의 이성이든 상관없이 이 사실을 역시 마찬가지로 남는다.
이 사실의 첫 번째 결과는 신앙을 깨달은 사람이 보기에 신앙은 지적 지식의 조건이 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계시는 성경에 나타나 있으므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이 우리 이성의 노력을 앞지르도록 하라.
신앙은 일종의 원리다. 이성을 부여받은 피조물에게서 창조주를 아는 지식은 이 원리로부터 발전하기 시작한다. 만일 이성이 성경의 글 속에 감추인 영적인 의미를 분별하려고 개입하지 않으면, 성경의 해석은 이상한 실수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 다음으로, 그런 식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철학의 빛인 지성의 빛을 켜 주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다. 이런 이유로 실로 철학과 종교가 동일한 것같이 에리게나는 철학과 종교를 동의어로 본다. 이 교리에서 신앙은 지적인 지식을 향한 욕망을 낳고, 지적인 지식의 대상은 신앙의 내용이 된다.
그가 때때로 반발하는 권위는 하나님의 권위도 교부의 권위도 아니다. 에리게나가 이 요점에 대하여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을 살폈을 때 결국 권위의 원천은 이성이라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우리는 그를 믿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이해하든지 이해하지 못하든지 참되기 때문이다.
이 입장은 모든 중세 신학자들이 인정한 원리, 즉 하나님만 오류가 없으시다는 원리를 단순하게 적용한 것이다.
2. 자연과 그 구분
변증론의 두 가지 기본적 기능은 구분과 분석이다.
구분과 분석이 개념들을 해체하거나 다시 구성하는 추상적 방식일 뿐만 아니라 자연 법칙들이 그처럼 정의된 법칙들이라는 점은 이 교리의 전형적인 특색이다. 에리게나의 교리는 논리학이 아니다. 그것은 물리학이며, 좀더 정확하게 그가 말한 대로 표현하면 ‘자연학’이다.
자연은 무엇인가? 자연은 네 가지 중요한 구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창조하면서 창조되지 않는 자연, 둘째 창조되면서 창조하는 자연, 셋째 창조되면서 창조하지 못하는 자연, 넷째 창조하지도 창조되지도 못하는 자연이다. 네가지 부분들이 둘로 환원 될 수 있는데 첫 번째와 네 번째는 창조되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창조되므로, 우리는 오직 두 가지 중요한 구분을 만난다. 즉 창조주와 피조물이다. 창조하면서 창조되지 않는 자연은 하나님이며 이는 사물들의 원리로 간주된다. 반면에 창조되지 않고 창조하지 않는 자연은 창조하기를 그치고 자기 안식에 들어가 있는 하나님으로 간주된다. 반면에 두 번째 구분은 원형적 이데아에 상응하며, 이 이데아들은 사물들을 창조하지만 스스로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데아들이 창조한 사물들을 포함하지만 아무것도 만들지 못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하나님은 첫 번째 구분에서 창조주나 기원으로, 네 번째 구분에서 목적으로 가정되며, 모든 존재들은 이 원리나 목적 속에 포함된다.
자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포함하는 한에서 자연의 구분을 고찰해 보자.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들은 상대적인 가치를 가질 뿐이다. 모든 존재는 없는 것의 비존재이다. 존재는 이성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감관으로 파악할 수 있거나 지성으로 이해 될 수 있는 것이다. 두 인식 능력이 파악할 수 없는 것이면 올바르게 비존재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에리게나는 이 정의를 사용하면서 비존재의 다섯 유형을 구분한다. 첫째, 완전하므로 우리의 감관과 이성을 벗어나는 것. 둘째, 사물의 위계질서 속에서 열등한 것의 확증은 우월한 것의 부정이다. 셋째, 잠재적 존재는 실현되면 존재할 것의 비존재이다. 넷째, 발생하고 부패하는 존재는 적어도 불변하는 이데아들과 비교할 대 없는 것이다. 다섯째, 사람의 경우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는 한 존재이며 잘못으로 이 형상을 잃어버리는 한 존재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피조물이 그 부분을 이루고 있는 전체로 ‘자연’을 상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아니시며 만물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말하기 위하여 우리는 드니가 옹호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이 방법은 세 가지 연속 단계를 따른다. 첫째 ‘긍정 신학’의 단계다. 이 신학은 범주가 하나님께 타당하게 적용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 다음으로는 ‘부정 신학’의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실체로 질도 양도 아니시며, 범주에 속하는 존재가 도무지 아니시다. 세 번째는 ‘초월 신학’이다. 이 신학은 하나님께서는 어떤 특정한 범주에 속하지 않으시니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초월하시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범주를 넘어서시는 분이시므로, 어떤 긍정보다 그리고 어떤 부정보다 우월하신 분이다.
3. 신적인 이데아들
성부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신 이데아들은 영원부터 그(말씀)안에서 존속한다. 에리게나는 이데아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영원하며 심지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지만 영원한 존재가 되려면 하나님께 의존해야 하므로 실은 영원하지 않다고 가르친다.
드니와 플로티누스의 하나님처럼 에리게나의 하나님은 일자이시다. 모든 이데아들도 하나님의 절대적 통일성을 변경시키지 않고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높은 이데아, 이성, 그리고 가시적 사물과 불가시적 사물의 형상으로 역시 볼 수 있다. 게다가 하나님의 말씀은 원인이 되니, 시간 속에서 발전할 모든 것이 원리이신 그 안에 영원히 존재하고 잇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된 우주의 이성이며 창조적 원인이며, 완전히 단순하면서 무한히 복합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는 단순하면서 장차 있을 다양성의 씨를 포함하고 있는 단일성이다.
에리게나의 교리에서 하나님께서 이데아들을 ‘만드셨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부와 엄밀하게 말해 함께 영원한 반면, 이데아들은 그렇지 뫃사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자기 모순적으로 보이는 것이 에리게나의 마음속에서 극복할 수 없는 난점을 제기하지 않는 참된 이유는, 오직 그의 창조 개념을 분석할 때에야 분명하게 나타 날 수 있을 것이다.
4. 창조와 계시
일자의 형이상학에서 ‘창조;라는 낱말은 단일성이 다원성을 통하여 나타남을 뜻한다. 에리게나의 교리에서는 이런 의미를 전달하려고 몇몇 서로 다른 은유를 사용한다. 피조물들은 어떤 가지적 태양으로부터 발산되는 광선에 비교할 수 있다. 혹은 원주의 반지름과 그 중심의 관계는 피조물과 하나님의 관계와 동일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에리게나의 하나님은 어떤 원리와 비슷한데, 이 원리는 단순하여 파악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원리는 자신의 복잡한 결과들 속에서 순식간에 나타난다. 하나님의 자기 현현은 에리게나의 교리에서 창조의 참된 의미이다. 에리게나는 창조를 ’신현‘이라고 부른다. 즉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하나님이 보시겡 창조하는 것은 스스로를 계시하는 것이다. 계시가 창조인 것과 마찬가지로 창조가 계시다.
이 지적은 첫째로 소위 이데아의 창조에 적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접근 할 수 없는 초월성 안에 머무르지 않으시고 자기 현현 곧 ‘무엇 속에 존재하시기 시작’하시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데아를 산출하시면서 스스로를 창조하신다고 말해야 했다.
존재의 증가는 개별자에 이르기까지 방해받지 않고 계속된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데아들을 산출하는 데 있다. 창조는 그때부터 완전하다. 이데아에 대하여 인식되는 것과 존재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이데아의 창조 다음에 다른 창조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때 다른 창조는 사물들의 창조가 될 것이다. 만물은 그 보편적 원인인 이데아들 속에 이미 암시적으로 들어 있다.
일자로부터 다자가 나오는 것은 성삼위의 제3위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모든 피조물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모방하면서 구조를 이루시는 삼위로 정의된다. 성부에 상응하는 본질과 성자와 상응하는 능동적 덕과 성령에 상응하는 기능이다.
5. 창조와 조명
계시로 인식된 창조 개념은 에리게나의 우주에 또 다른 주제를 이끌어 들인다. 그것은 ‘조명’이라는 주제다. 많은 중세 교리에서 은혜와 자연의 이중 조명이 나타난다. 창조받은 모든 존재들은 빛들이다. 사물들인 아주 많은 희미한 빛으로 구성된, 창조계는 하나님을 보여 주도록 되어 있는 조명일 뿐이다.
하나님의 빛의 현현인 세상은, 하나님께서 발산하기를 멈추시면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주는 성경과 비교할 수 있는 계시이다. 모든 사물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말씀하신 말이다.
우주를 형성하는 위계 질서적인 조명 혹은 신현은 세 개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순수하게 비물질적인 실체 즉 천사의 세계, 물질적이고 볼 수 있는 실체의 세계, 그리고 두 세계 사이에서 두 세계의 본질을 함께 가지고 둘을 연결하는, 축소된 우주인 사람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분유인 이 모든 존재 속에 계신다. 에리게나의 교리에서 ‘분유’는 ‘나눔’을 뜻한다. 이 분유는 우주의 구조에 속하는 은혜와 자연의 위계적인 나눔을 뜻한다.
우리는 창조를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로 보곤 했다. 따라서 우리는 에리게나에서 “하나님과 피조물은 동일하다”는 말을 읽을 때, 자연적으로 그를 범신론자로 낙인을 찍는다. 하지만 사실상 에리게나는 각각의 모든 피조물은 본질적으로 존재의 형태에서 존재를 넘어서시는 분의 현현이라는 뜻일 따름이다. 존재의 본질은 하나님인 초존재에 의하여 발산된 빛에 불과하다.
‘위계질서’라는 개념은 존재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와 존재들이 그 원천으로부터 나온 거리를 함축하고 있다. 계급과 질서의 체계를 뜻할 뿐만 아니라, ‘거룩한’ 계급과 질서의 체계를 뜻한다. 천사들은 존재의 보편적 위계에서 정상을 차지한다. 사람들과 달리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인식을 향유한다. 이 사실은 하나님을 얼굴을 맞대고 볼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는 없다. 천사들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맨 처음 ‘신현들’ 혹은 현현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신현들을 넘어서 가장 높은 비존재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사라도 여전히 원형적 이데아들을 보지는 못한다. 그들에 대하여 이 원형적 이데아들을 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보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6. 존재의 위계 질서
하나님의 신현들은 위계 질서의 규모에 따라 분배된다. 이 위계질서에서 일어나는 전달물은 천사의 본질과 천사들이 자리잡은 위계의 본질에 더해지는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천사들의 본질이며 위계다. 세계 질서에서 차지하는 그 위치는 위로부터 그 천사에게 조명하는 좀더 높은 모든 천사들과 맺은 관계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 천사의 개별적 본질은 하나님의 보편적 현현에서 독특한 계기에 속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별되고 위계에서 자리를 잡은 천사들은 ‘질서’를 형성하는데 이 질서의 본래적인 아름다움은 우주의 아름다움이다. 천사로부터 천사보다 훨씬 적게 자신의 조명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자신의 수단을 사용하여 스스로를 조명 할 수 있다. 사람은 마음과 신체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사람은 지적인 조명이 가능한 본성을 가진 모든 존재 중에서 가장 낮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본질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하여 우리는 사람을 두 가지 서로 다른 상태에서 고찰해야 한다. 첫째로 사람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다. 그 다음으로 사람은 이제 원죄의 결과에 놓여있다. 참된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의 이데아다. 이 이데아 속에 모든 가능한 개별 인간이 영원히 포함되어 있었고, 이 개별 사람들이 그 이데아로부터 이제 분리되게 되었던 것은 그들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 일단 이 상황이 시작되면 증식을 통하여 이런 분리 과정을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피조물들이 통일로부터 벗어나 방황할 때 정지 지점은 전혀 없다.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면서, 타락하여 자기 속에 열등한 본질을 가진 모든 존재들을 담았다. 피조물은 그 이데아들의 단일성 속에 있었을 때보다 지금 더 실제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사실상 타락했다. 모든 몸체들은 하나님 속에 있는 자기네 이데아들 속에 있을 때보다 스스로 있을 때 참으로 덜 실재답지 못하다.
이 결론에 대한 즉각적인 반대는, 물질적 존재의 물질성은 마음속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물질적 존재는 인식되는 한에서 마음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스스로는 그리고 자신의 물료적 본질로는 마음속에 존재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것은 착각이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람의 이데아를 원죄 후의 오류와 무지로 가득 찬 사람과 같은 것으로 상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모든 존재에 대한 지식을 가지기를 바라셨다. 원죄가 없다면 우리는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앞서서 그리고 그 지각과 별개로 여전히 우리 속에 있는 사물들의 이데아로 사물들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에리게나의 세계다. 만물이 자기의 고국에 있는 것처럼 영원히 존속해야 했던 곳인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온 것처럼, 사물들은 지금 그 말씀으로 돌아가려고 애를 쓰고 있다.
7. 하나님께로 돌아감
몸체들의 세계가 증식하는 것은 원죄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동정의 손길로 이 감각 세계를 만드셨고, 감각적 사물들이 타락한 사람을 스스로 분리되어 나온 가지적 실제들에게로 되돌아가도록 이 끌 곳으로 만드셨다. 여기서도 기독교적 낙관론이 당당히 자리잡고 있다.
하나님의 표지를 갖지 않는 존재는 하나도 없으므로 모든 존재들이 사람에게 그 생각을 창조자께로 되돌리도록 권유한다는 점을 지적하자. 몸체들은 하나님의 흔적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되도록 지음을 받았다. 이 사실은 사람 속에 있는 감각과 이성과 ‘지적’ 직관의 삼위일체를 하나님의 성삼위 일체에 비교함으로써 검증할 수 있다.
영혼의 첫 번째 기능은 순수한 지적 활동이다. 두 번째 기능은 영혼 속에서 나타나는 하나님께 대한 고찰이다. 세 번째 기능은 복잡한 운동인데, 이 운동은 외부 대상이 우리의 감관 기관 중 하나에 미치는 인상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가 감각이라고 부르는 내적인 상을 상출한다.
영혼은 삼위 일체 하나님을 흉내낼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돈다. 그러나 그 이상이다. 영혼은 하나님을 결코 떠나지 않으니, 영혼이 유와 종과 개별로 내려 갈 때 순수 사유를 통하여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은 하나이면서 셋인 지성이 하는 일이다. 모든 지식은 이성을 통하여 실체 공존적 감관의 도움으로 즉 이 감관 속에 실체 공존적인 감각 지식의 도움으로 활동한다. 복잡한 사유 기능은 이 감관으로부터 나오며, 이 감관으로 존속하며 이 감관으로 돌아간다.
돌아가기 위하여, 존재의 위계질서로 퍼지는 사랑의 동일한 운동이 이런 귀한을 통일시켜야 한다. 이처럼 사물들을 하나님께로 다시 부르는 것은 먼저 존재들 안에서 내적인 필연성의 결핍으로 나타난다. 에리게나는 이를 존재들의 형상 없음 이라고 부른다.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께로 귀한하는 처음 단계다.
두 번째 단계는 자연과 은혜의 합동 결과가 될 육신의 부활이 될 것이다. 세 번째 단계가 진행되면서, 각 개인의 신체는 구분에 의하여 나누어졌던 영혼으로 돌아올 것이다. 신체는 다시 생명이 될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인간 영혼이 그 제일 원리 즉 이데아로 돌아가게 할 것이며, 영혼과 더불어 영혼이 다시 흡수한 신체도 이데아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이 우주적 ‘분석’의 다섯 번째이며 마지막 계기는 천제 영역을 낙원으로 되돌려 놓을 것이다. “하나님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그때는 위대한 귀한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첫 번째 귀환 과정은 이미 은혜의 활동을 함축하고 있으니,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이 하나님을 향한 우주적 운동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첫 번째 과정은 오직 은혜의 활동인 두 번째 과정에 의하여 완성된다. 새로운 은혜가 앞선 은혜에 추가되면, 오직 그 자연들 가운데 몇몇을 참으로 ‘초자연적인’ 상태로 끌어올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은혜는 세 단계에 따라 선택된 영혼을 들어올릴 것이다. 사람은 다시 순수 사유, 즉 순수 지성이 된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 스스로를 분명하게 나타내신 모든 가지적 존재들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먼저 얻을 것이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수준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은밀한 원인들이 들어 있는 근접할 수 없는 광명의 초월적 흑암 속에 순수 사유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사물들은 스스로 있을 때 보다 그 이데아 안에 있을 때 실재답기 때문에 그러므로 모든 본질은 하나님 안에서 가지적 실재인 충만한 실재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실체의 섞임이나 혼돈이 전혀 없고, 혼합이나 구성이 없이 재연합이 있을 것이다. 이 재연합에서 모든 속성들은 변함이 없이 존속될 것이다.
질료가 가지적 요소로 분해되는 우주에서 질료의 지옥에 해당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오리게네스처럼 에리게나는 질료의 게헨나(지옥)라는 개념은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없애 버려야 할 이교적 미신의 잔조물이라고 본다. 여호사밧의 골짜기(욜 3:2)와 자벌레와 황으로 가득 찬 못들을 유치한 상상물을 보고서, 물질적 질료가 남지 않은 곳에서 어떻게 골짜기들과 벌레들과 못들이 있을 수 있는가? 게다가 물질적이거나 빗물질적이거나 이 형벌들은 영원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그렇다’고 대답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으로 구속하신 세계에서 죄와 악과 마귀의 최후 승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 두 문제들은 동시에 해결된다. 질료가 가지적인 것에 다시 흡수되면서 악의 모든 흔적들은 하루에 자연에서 사라질 것이다. 선택받은 자와 정죄받은 자 사이의 초자연적 구분이 온전하게 남을 것이며, 영원히 존속 될 것이다. 그러나 각자의 양심에 따라 복을 받거나 형벌을 받을 것이다. 영생은 진리를 아는 것이므로, 진리를 아는 지식은 영원한 지복이다. 영원한 죽음이 진리에 대한 무지라면, 진리에 대한 무지보다 더 영원한 형벌은 없다. 영원한 모든 슬픔의 유일한 원인인 진리의 부재 말고 피해야 할 것도 전혀 없다. 그리스도의 박탈과 부재는 모든 이성적 피조물의 고통이기 때문이다.
에리게나 이후에 라틴 전통의 건전한 가르침에 적합한 아주 미미한 교리들을 전체로 통합하려고 시도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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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터베리의 성 안셀무스

1. 이성과 신앙
안셀무스는 신앙과 이성이 지식의 두 원천이라고 말한다. 특히 사람은 먼저 신앙에 굳게 서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할 것을 단언한다. 사람은 믿기 위하여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믿는다고 말한다. 신앙의 이해는 신앙을 전제 한다는 것이다. 그는 진리를 찾으면서 따라야 할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성을 통하여 신앙의 신비들을 논의하기 전에 이 신비들을 믿을 것, 그 다음으로는 믿는 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신앙을 첫째로 두지 않는 것은 추정이며, 그 다음에 이성에 호소하지 않는 것은 태만이다. 안셀무스는 이성보다 신앙을 우선시 한 것 같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에만 치우치지 않고 신앙을 바탕으로 한 이성을 주장하고 있다. 안셀무스에게 이성의 사용은 신앙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와 동일하다고 생각된다. 기독교의 신비적인 부분을 이성적으로 먼저 해결하려고 한다면 수많은 난제들을 만날 것이다. 먼저 신앙을 가지고 그것들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타당하다.

2. 「모놀로기움」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존재
「모놀로기움」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논증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 논증들은 두 원칙을 받아들일 것을 전제한다. 첫째로 경험에서 관찰 할 수 있는 사실로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원칙, 다음으로 일종의 즉각적인 지성적 증거.
첫 번째 증명의 출발점은 사물 속에서는 선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선하다고 보는 사물들은 모두 어디서 나오는가 하는 질문은 자연스러운 문제이며 불가피 한 것이다. 우리는 이 선들이 원인을 가지고 있어야 함을 안다. 이제 크든지 적든지 어느 정도로 완전을 갖고 있는 모든 것은 하나의 단일하고 동일한 원리에 참여한다는 사실 때문에 그 완전을 갖는 것이 절대적으로 확실하고 분명하다. 만물을 선하게 하는 이 ‘단일하고 동일한’ 선은 오직 하나의 위대한 선 일수 있다. 나머지 모든 선은 그 선에 의하여 선하며, 이 선만 스스로 선하다. 절대적으로 선한 것은 또한 절대적으로 위대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모든 것보다 우월한 제일 존재가 있고, 우리는 그를 하나님이라 부른다.

3. 「프로슬로기온」의 증명
존재가 지성 속에만 존재한다면, 그것보다 더 큰것을 생각 할수 없다는 것은 그것보다 더 큰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 되므로, 그것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존재는 지성 속에 있고 동시에 실제로도 있다.
이 주장은 근거로 삼는 원칙은 (1) 신앙이 주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 (2) 사유 속에 존재하는 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3) 사유 속에 하나님의 개념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실제로 존재함을 단언할 것을 논리적으로 요구한다.
가우닐론은 두가지 중요한 반대를 제기 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실존을 추론할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다음으로 이 우리는 사유 바깥의 존재를 입증하기 위하여 사유 속의 실존에 의존 할수 없다.
성 안셀무스는 이 점에 대하여, 그것이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존재에 대한 문제일 때에만 사유 속의 실존으로부터 실제 실존으로 이르는 과정은 가능하고 필연적이라고 대답한다.

4. 하나님의 속성들과 창조
하나님께서는 실존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시므로, 그는 가장 뛰어난 존재이시다. 즉 존재성의 충만이시다. 우리는 본질이라는 칭호를 그에게 붙인다. 본질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그 본질이 존재하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다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먼저 스스로를 통하여 존재하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을 통하여 존재하는 것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존재 방식임을 주목하라. 빛의 본질이 빛을 발산하는 광채와 나누어지지 않듯이, 하나님의 본질은 하나님이 누리시는 존재와 나누어지지 않는다. 그들의 본성이 존재 할 수 있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 본성에게 존재를 주셔야 한다. 오직 두가지 가설이 가능하다. 즉 하나님께서 우주의 산출 원인이시든지 혹은 하나의 질료이어서 우주는 그 질료로부터 만들어진다. 이 질료는 필연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와 동일해야 한다.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교리는 하나님과 우주를 하나의 유일한 존재로 환원하지 않는 유일한 교리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는 우주를 자신의 실체로부터 태어나게 하기 위해서 일종의 소멸을 겪으셔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은 우리가 처음에 언급했던 가설만을 남겨 놓는다. 즉 우주는 선재한 질료 없이 태어났다.
우주가 하나님으로 받은 실제 존재를 아직 받지 않았던 순간에, 우주는 이미 창조주의 사유 속에서 모형, 형상, 상, 혹은 규칙으로 존재했다. 창조된 이데아에 대한 에리게나의 교리에 정반대다.
하나님께서는 만물로 하여금 존재로 존속될 수 있게 하시려고 그들을 유지하시고 보존하신다. 만일 우리가 모든 창조된 존재를 아주 완전히 초월하는 어떤 존재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려고 한다면, 긍정적인 완전을 표시하며 오직 그런 것을 표시하는 이름을 그에게 돌려야 한다. 돌리는 일은 오직 두가지 조건에서 정당하다.
첫째로 이 이름들은 절대적으로 그에게만 돌려야 하며 상대적으로 피조물들에게 돌려서는 안된다.
둘째로 하나님께 모든 긍정적인 완전을 무차별적으로 돌리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각 유에서 가장 완전한 것을 돌리는 그런 성질만 하나님께 돌린다. 이 모든 완전은 하나님의 완전한 단순성을 변화시킴이 없이 하나님 안에 통일된다. 하나님만 말 그대로 존재하시고, 다른 존재들은 하나님에 비교할 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5. 지식과 의지

또 안셀무스는 지식과 의지에서 ‘곧음’을 말하고 있는데 선택의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그는 의지에 대한 성향을 두 가지로 말하는데 첫 번째는 유용한 것을 향한 경향이다. 이것은 의지와 나누어질 수 없는 것이다. 두 번째는 정의를 향한 경향인데 이것은 의지와 나누어 질수 있다. 선택 의지는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판단과 그 다음으로 즉 자유다. 이것은 정의의 규칙에 따라 선택하고 행하는 능력이다. 두 가지 중요한 결과가 나오는데 첫 번째로 도덕적 자유는 정의를 향한 경향은 의지와 나누어 질 수 있으므로 사라 질 수 있다. 두 번째는 죄를 범하는 능력은 자유의 일부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하는 어떻게 사람이 죄를 지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을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맨 처음 죄를 범할 때는 자신의 선택 의지에 의하여 범죄를 한 것이지, 그의 자유에 의하여 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자유를 죄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버리기 위하여 선택 의지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곧음’을 상실했고 그것을 우리의 능력으로 회복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안셀무스는 하나님 속의 자유는 창조되지 않았고 자존적인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사라질 수 없다. 사람속의 자유는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창조된 능력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유와 나누어 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이 자유를 잃어버린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선택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자유를 행사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자유는 은혜를 통해서 선택 의지에 다시 돌아간다고 말한다.
전체적으로 안셀무스는 신앙을 바탕에 둘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또한 죄를 범한 것은 자유의 일부가 아니고 우리가 곧음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 같다. 또한 그것들을 회복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의지해야하는 은혜를 받아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어거스틴과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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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 아벨라르

1. 논리학
보편자는 실재 속에 존재하는가 아니면 단지 사고 속에 존재하는가?
첫 번째 가능한 해석은 보에티우스의 해석이다. 모든 개별자는 자신이 속한 종의 본질을 공통으로 소유하지만, 각각에게 고유한 우유(크기, 색, 모양 등)의 ‘집합’에 의하여 서로 다르다. 보편자는 어떤 종에 속하여 있는 모든 개별자에게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가르킨다. 보편자는 스스로 지속하지 않지만, 우유에 의하여 특징을 드러내는 개별자들 속에서 전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지속된다. 그러나 아벨라르는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두 번째로 가능한 해석은 진실에 더 가깝다. 개별자는 우유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자신의 본질에 의해서 서로 구별되므로, 하나에서 발견되는 것이 다른 것에서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2. 윤리학
“네 자신을 알라”에서 악덕과 죄의 구분으로부터 출발한다. 악덕은 옳지 않은 것을 따르려는 경향 즉 해야 할 것을 하려 하지 않으려 하거나 해서는 안되는 것을 삼가지 않으려는 경향이다. 악덕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라 죄를 범하려는 경향이다. 죄는 해서는 안되는 일을 삼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되는 일에 동의하는데 있다. 악에 동의하는 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며 따라서 악을 행하려는 의도는 죄의 본질이다. 우리는 의도의 악함과 행위의 악함을 구별하듯이 의도의 선함과 행위 - 결과의 선함도 구별해야 한다. 의도의 선함과 행위 - 결과의 선함은 연결되어 있다. 선한 의도의 결과가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행위 - 결과의 의도가 선하다 해서 행위 - 결과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선한 의도는 본질적으로 나쁜 행위 - 결과를 그 결과로 가질수 있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한 의도가 명령하는 도덕적 행위는 언제나 선한 행위이고 악한 의도가 명령하는 도덕적 행위는 언제나 악하다.
그러나 선한 의도는 무엇인가? 단순히 선하게 보이는 의도가 아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꼭 하기를 원하시는 것이어야 한다. 아벨라르는 심각한 난점에 빠지게 되는데 그는 선한 의도를 갖고 있다는 개인적 인상으로 충분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만일 그 정도로 충분하다면 그리스도와 순교자들을 핍박한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정당한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복음의 가르침에 앞서서 선한 의도를 가질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가르침을 전할 때에도 어떤 도시에는 진리를 전하시고 다른 도시는 오류 가운데 방치해 두셨다. 지금도 많은 선한 불신자들이 복음을 안다면 회개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한다. 어떻게 그들의 의도와 그들의 작용이 선할 수 있는가?
아벨라르는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 라고 말한다. 확실히 행위 결과는 사실상 나쁜 것일 수 있지만, 어떻게 그들이 알지 못하고서 책임을 지는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그를 죽여 악한 행위 결과를 만들어 냈지만, 그들이 양심에 따라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었다면, 그들은 그리스도를 살려 둠으로써 더 심각하게 죄를 범했을 것이다.
아벨라르가 또 하나의 신학적 난점을 생각하지 못했더라면 아주 옳았을 것이다. 그 난점은 우리가 아무리 그들의 행위를 도덕적이라고 말하더라도,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 점을 설명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그들을 보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우리에게는 분명하지 않아도, 이 사람들은 불신하며 죽은 것으로 충분히 정죄를 받은 것이다.”

3. 신학
불신자는 불신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서 제외된다는 원리는 고스란히 남아 있지만, 그럼 누가 불신자인가? 이교 철학자들은 어떤가? 그들은 불신자라고 하겠는가?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는 진리들 가운데 핵심을 유대인들에게 선지자로 계시하셨고 이교도에게는 철학자로 계시하셨으므로, 이교도들이 스승의 가르침을 듣지 않았다면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아벨라르는 많은 이교도들과 어떤 유대인들이 구원을 받았고, 이교도들 가운데 먼저는 희랍인이, 그 다음에는 희랍인의 교리를 따른 라틴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본다.
아벨라르는 명쾌한 지성과 인자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기독교 계시는 선택받은 자를 정죄당한 자와, 진리를 오류와 구별하는 건널 수 없는 장벽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철학자들의 이성을 그의 신앙과 아주 같은 것으로 보았는데, 이는 그의 신앙이 그의 이성과 비슷하게 보이게 하려 함이었다.

읽으면서 아벨라르의 윤리학과 신학이 매우 흥미로웠다.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한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는 것과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을 통해서 계시했다는 점이 무척 흥미롭다. 아벨라르는 선택받은 자에 대해 깊게 인식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하나님께서 알려주시고자 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신학자도 아니고 많이 모르지만 두 번째 신학적 난제였던 복음을 알지 못하고 죽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과 “하나님이 그들을 보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우리에게는 분명하지 않아도, 이 사람들은 불신하며 죽은 것으로 충분히 정죄를 받은 것이다.”를 생각하면서 한 성경 구절이 생각이 난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장 18~20절 말씀)
복음을 이 세상에 전해야 한다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가슴 깊이 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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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준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6.11.24 과제3이 이렇게 묶이는 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라고 하신거 다 했음돠..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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