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아랍 철학
A.D.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아테네에서 철학 학교를 폐쇄할 것을 명령했다. 그때까지 그리스의 사상은 이미 아시아에 터를 잡기 시작했고, 이 사실로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시리아와 페르시아와 이집트와 모로코와 스페인을 거쳐 서유럽에 다시 전달하게 될 순환운동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리스 철학은 철학 학교들이 문을 닫기 전에 아테네에서 이 철학을 연구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아시아로 왔다. 에뎃사의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그 페르시아와 시리아에 학교를 만들었고 철학 작품과 과학 작품이 그리스어에서 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 헤지라 후 회교는 서아시아에서 기독교를 대신했다. 바그다드 칼리프들은 시리아 학자들의 봉사를 요청했다. 시리아 학자들은 새 주인들의 후원을 받아 가르치는 일과 그 밖의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아랍어는 학문어가 되었다. 그리스의 작품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대체로 시리아의 학자들은 그리스의 학문을 아랍에 전달했는데, 그 시기는 그리스 학문이 아랍인에게서 유대인에게로 그리고 서양 기독교의 신학자들에게 전달될 동안이었다.
이 철학 전통 가운데 많은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으로, 아주 이른 시기에 그가 썼다고 보아지며 신플라톤주의의 성격을 띤 두 논문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 혼합은 중세 사상 발전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중세 학자들은 자신의 진술을 조화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한 철학자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썼다고 말하는 것을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아랍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니누스를 섞은 내용을 유포했다. 그들은 이 두 철학을 두 개의 철학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이슬람 신앙은 지적 해석의 필요를 느꼈다. 이것은 그 시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제기한 코란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지성하기 위함이다. 무타질라 사람들은 계시의 해석에서 이성에 의존할 필요를 강조했다. 이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절대적 단일성을 수립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본질과 속상을 전혀 구분하지 않으려고까지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정의를 주장하고 선과 악은 오직 하나님께서 선이나 악이 되게 하기를 의욕하셨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그들은 부정적 방법을 계속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신인동형론적 표상을 부정했다. 이 방법은 하나님에게서 그 피조물에게 적용하는 모든 규정을 부인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을 본래적인 한 정의의 법칙에 굴복시키는 것은 은근히 이성이 발견할 수 있고, 사람들은 그 법칙에 따라야 하는 객관적 선과 객관적 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회교 신학자들은 사람에게 도덕적 자유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 후 무타칼리문 학파는 무타질라 학파의 다소 비정통적 활동에 반대한 신학 반동이다. 알 아사리는 무타질라로서 오랫동안 가르친 후에 공개적으로 이전의 입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에 대한 완전한 정당화를 수립한다. 알 아사리의 두 번째 교리는 마침내 회교의 정통 신학이 되었다. 오늘날 몇몇 마호메드 학파는 여전히 이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정통 신학자들이 그리스 철학을 이처럼 반박하여 그 결과 어떤 아랍 사상가들은 종교와 관계를 잃지 않으면서 철학 자체를 위하여 철학을 추구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신학자가 철학에 가장 크게 기여하게 될 서유럽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뚜렷하게 대조적으로, 마호메드 사상가들이 철학자에 한 가장 큰 기여는 철학자들이 했다.
회교 신학자 가운데 코란에 비추어 그리스 철학을 다시 해석하는데 성공을 거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결과 회교 신학이 점점 그리스 철학과 결별하여 그 철학을 반박하는 데 까지 이르렀다.
1. 알킨디와 알파라비
알킨디의 ‘지성에 대하여’는 지성의 활동을 기술하면서 추상 작용의 본질에 빛을 비춰주고 있다. 이 추상 작용은 보편자를 산출하는 작용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에 따라’ 지성에 대하여 말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능동 지성 혹은 ‘언제나 활동하는 지성’을 예지로 영혼과 구별되고 영혼보다 우월하고 그 영혼에 작용을 미쳐 가능성으로 지적인 영혼을 능동성으로 지적인 영혼으로 바꾸는 영적인 존재 혹은 실체로 고찰한다.
아랍 철학은 처음부터 아프로디시아스의 영향을 받아, 모든 인류에 대하여 오직 하나의 능동적 지성이 있으며, 각 개인은 능동 지성의 작용이 가능성에서 능동성으로 이끌어가는 수용적 능력만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모든 개념들은 하나의 순전히 영적인 존재 혹은 예지로부터 우리 개인의 영혼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예지는 모든 인류에 대하여 하나며 동일하다.
알킨디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하나이 철학으로 다루려는 동일한 경향은 알파라비에게도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회교를 갖고 있었으며 이 종교는 이들에게 철학적 사유에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종교는 기독교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사람들을 주의 깊게 구별했다. 코란의 하나님은 하나이며 영원하며 전능하며 만물의 창조주이다. 그리스도인들 이전에 아랍의 철학자들은 엄격하게 가지적 필연성에 의하여 통치되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우주라는 그리스의 개념과 자유롭고 전능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유롭게 창조된 세계라는 성경의 개념을 조화시키는 문제에 맞닥뜨렸다.
알킨디의 시대 바로 전에 한 회교 신학교는 코란의 하나님과 구약의 하나님의 권리를 강하게 대조했다. 알 아사리에 따르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명령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그의 권세로부터 독립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악은 물론 선도 오직 하나님의 전능한 의지 덕분에 존재한다.
아사리 학파에 따르면 세상은 시간의 순간들과 장소의 점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이 순간들과 점들은 하나님의 유일한 의지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다. 이 둘의 결함 관계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유롭게 개입함에 따라 쉽게 바꾸어진다. 그들의 우주관이 코란의 신 개념과 밀접하게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회교 철학’을 이룩했다. 세계는 알라가 발휘하는 전능한 의지의 자유로운 개입에 언제나 열려 있는 전적으로 유연한 물질이다.
알파라비는 그리스 철학의 압도할 만하게 풍부한 사유를 동양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향수어린 감정에 자신의 신비 체험에 적용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자연적 존재는 우연적이다. 자연적 존재들은 실존과 형상을 제공받기 때문에 어떤 원인으로부터 실존을 받았음에 틀림없고, 실존은 본질적으로 이 원인에 속해있으며 이 원인은 이런 이유로 즉 신으로부터 실존을 잃어버릴 수 없다. 모든 표상은 하나의 확언을 함의한다. 실존은 사물의 본질에 포함되지 않는다. 실존은 사물들의 구성 특성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며 본질이라는 것의 표상은 그 실존의 표상이 없이는 불완전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알파라비의 정신세계는 그 실존에 있어서 하나의 제일 원인에 의존해 있다. 이 원인은 운동을 하면서 정신세계를 움직이게 하고 심지어 본질들에서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을 규정한다. 사물들이 무엇이라는 것의 원인은 그 사물들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지식의 원인이다. 능동 지성은 그 존재에서처럼 그 활동에서도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지성과 사랑을 통하여 이 개별적 능동 지성에 연합되는 것이다. 이 능동적 지성은 즉각적인 부동의 시동자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모든 가지적 지신의 원천이다.
또한 알파라비는 지상의 모든 나라를 포함하는 범세계적 사회를 꿈꾸었다. 지상의 도성은 천상의 도성과 그 지복을 향하는 한 단계에 불과하다. 끝없이 새롭게 되는 영혼과 영혼의 연합에 의하여 죽은 자이 기쁨이 생기고 커지고 무한히 부요롭게 된다.
-아랍 철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아랍의 문화가 서양의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공부했지만 그것이 어떤 경로로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는 잘 몰랐다. 서양은 참으로 아랍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듯 하다. 하마터면 없어질 수도 있었을 고대의 작품들을 보존해줬으니 말이다.
아랍 철학은 서양 철학과 비교해 보았을 때 비슷하기도 했다. 출발점도 그리스 철학이고, 각자의 종교에서 모시는 신도 뿌리는 같기 때문인 듯하다. 창조자, 전능자, 능동 지성, 선과 악의 기준이 되는 자.. 사실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그들의 논리는 다른 점을 찾지 못했다. 아랍에서도 서양에서도 의견이 여러 가지이니 그저 그 중의 한 사유인 것 같다.
그래도 이들도 꽤 높은 도급에 이른 사람들인 듯하다. 특히 알파라비가 꿈꿨던 범세계적인 사회는 그리 길지 않게 소개가 되었지만 한참 옛날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참 대단한 것 같다. 이것은 서양 철학 중에서도 보지 못한 생각 아닌가. (내가 공부를 안 해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기독교인으로서의 개인적 생각이지만, 만약 아브라함이 하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 지역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회교 대신 기독교가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이 나지 않았을까? 혹은 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나지 않았을까? 문화권이 다른 것이, 믿는 종교가 다른 것이 그 명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종교만 다르지 서로 소유한 철학적 사유들은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믿는 신도 뿌리는 같고..
아무튼 이러한 이유들로 이들의 철학은 비슷할 수밖에 없는 듯 하다. 아예 동양 철학이 아닌 바에야..
5-2. 유대철학
유대 사유의 출발점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구약 성경과 랍비 글모음으로 집적된 주석들-탈무드였다. 이 때문에 기독교 신학자들은 유대 신학자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 하나님의 절대 자유와 창조 개념과 같이 근본적 개념에서 그러하게 될 것이다.
1. 솔로몬 이븐 가비롤
솔로몬 이븐 가비롤은 스페인에 살았던 유대인으로 스콜라주의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를 기독교 저술가로 잘 못 알아 그를 기독교의권위자로 인용했다. 이는 같은 계시를 공통으로 받아들이므로 유대교 사상가와 기독교 사상가들이 종교적으로 비슷하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생명의 샘’은 5권으로 나누어져 있는 긴 대화록으로 변증적 예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교리는 겉모습은 플라톤주의적이지만, 유대교의 정신에 젖어있다.
하나님을 빼고 모든 실체는 심지어 단순한 실체라고 하는 것들도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있다. 만일 이런 유의 구성을 ‘질료 형태론적’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한다면, 가비롤의 ‘질료 형태론’은 수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피조물을 창조주와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몸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영적인 실체도 역시 영적인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영적인 질료는 영적인 실체 속에서 이 영적 실체들의 개별화 원리이며 변화 원리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달리 이 변화와 개별화의 원리에 종속한다. 보편적 형상과 보편적인 일차적 질료로 이뤄진 보편적 실체가 있다. 모든 몸체의 질료는 ‘물질성’의 형상에 의하여 스스로 존재한다.
하나의 개별 몸체를 다른 개별 몸체와 구별하는 것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상보적 형상들이다. 이 상보적 형상 때문에 몸체는 단순한 광물로, 신물과 동물 혹은 사람으로 결정된다. 모든 구성적 존재에서 ‘형상의 복수성’이 있다. 존재는 질서에 따라 서로 지속한다.
우주의 본질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 겹치는 형상 때문에 바로 그것으로 있으며 각 존재는 이 우주의 본질에 관여한다. 가비롤의 세계는 서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형상들의 전체 구조와 아울러 제 1의 조물주로부터 하나의 의지를 통하여 나온다. 이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하며 이 의지가 하나님으로부터 방출된 영적 실체로 보아야 하는지 딱 부러지게 말하기란 어렵다. 모든 존재는 의지에 의하여 붙잡혀 있으며 그 의지에 의존해 있다. 존재를 붙잡고 그것들이 정지하는 한계와 극에 고정시키는 것은 의지이다. 바로 이 의지에 의하여 형상들은 규칙적으로 성질을 갖고 합법화하는 반면에 이 의지에 의존하고 이 의지에 붙들리게 된다.
이 교리는 성경의 하나님의 의지와 비슷한 가장 높은 의지에 의존하는 철학적으로 가지적 세계를 서술했다. 이 세계는 야훼께서 의욕하셨을 신플라톤주의적 우주였다. 존재가 좀 더 가지적이고 지적일수록 더 비물질적이고 단순한 이런 세계에서 사람은 자신의 지성 덕분에 형상에서 형상으로 거슬러가 창조의 의지까지 되오를 수 있는 매개적 위상을 차지한다. 이간의 영혼은 이 가지적 형상을 품고 있으며 이 가지적 형상은 전개되기 위하여 그런 일깨움만을 기다리고 있다. 감각적 형상과 인간 영혼의 관계는 기록된 책과 독자의 관계와 같다. 가비롤은 우주 발생론을 널리퍼트렸다.
이블 파쿤다는 세상이 복합적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이 입론을 증명한다. 이븐 카디크는 소우주에서 세상의 우연성에 의하여 신 존재를 증명한다. 이븐 다우드 제 1시동자의 필연성과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의 차이에 잇달아 의존함으로 신 존재를 예증한다.
이들의 합리적인 해석을 향한 반동으로 유다 할레비는 순수히 유대적이고 할 수 있는 대로 덜 철학적이게 될 신학을 옹호한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다. 할레비는 신학자인데다 민족주의와 전통주의를 표방하는 위엄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반동은 유대 철학의 발전을 가로막지 못하고 그 발전 속도를 느리게도 못했다.
2. 모세스 마이모니데스
그의 ‘당황하는 자들에 대한 안내’라는 책은 학문과 철학의 결론을 성경의 문자적 의미와 조화시키는 것에 대하여 확신이 없고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쓴 책이다. 이 책의 여감은 신플라톤주의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적이다.
유대의 박사에 따르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학문과 철학은 구별되는 본성을 갖고 있는 지식들이다. 세계의 창조는 이성의 관점에서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결정적 증거가 없을 때 ‘시간 속의 창조’라는 모세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허용할 만하다. 마이모니데스는 순수 예찌는 질료에서 자유롭고 지상 몸체에 나타나는 질료와는 구별되는 질료가 천상 몸체에 있다고 인정한다. 예지들의 실존을 설명하고, 9개의 구체를 주재하는 9개의 좀더 높은 예지가 있고, 열 번째 예지는 능동지성이라고 한다. 능동 지성은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 구체 아래 달밑 세계, 네 원소의 장소가 있다. 한 육체와 그 형상인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다섯가지 능력을 부여받았다. 개인적으로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오직 수동 지성만 갖고 있으며 습득된 지성이 능동 지성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에게 형성된다. 사람은 자신의 공로 정도에 따라 다른 일종의 지적 자본을 갖고 있으며 이 지적 자본은 죽은 후에 능동 지성과 다시 연합한다. 철학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지성을 부요롭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대로 구원하는 일이 사람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세계는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시간에서 창조된 거라 말한다. 그러나 반면 이 입론은 논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이 입론에 의존할 수 없다. 세계가 영원부터 조재했던 것처럼 이 진리의 증명은 뒷일로 남아있다. 마이모니데스는 제 1 시동자의 실존과 필연적 존재의 실존과 제 1 원인의 실존을 증명한다. 세상이 시간 속에서 무로부터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영원부터 있었는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실존은 설명된다. 마이모니데스는 부정적인 속성 말고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은 알지만 그 분이 누구신지는 모른다. 우리의 유일한 자료는 부정적 속성을 모으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를 피해간다 해도 세상에 나타나는 그 분의 행동의 결과는 전적으로 모든 사람의 눈에 명백하다. 하나님은 능동인이면서 세계의 목적인이다.
마이모니데스는 자신의 작품을 체계적 설명으로 보지 않았다. 마이모니데스는 기독교 신학자들과 함께 구약을 믿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구약의 신앙을 참된 철학과 조화시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심지어 그의 모범으로 유익을 얻었다. 수많은 점에서 철학 혼자서는 계시 속에 담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마이모니데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영감과 모형이 되었다.
12세기의 유대교와 12세기의 기독교를 비교한다면 유대사상이 아랍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덕택에 얼마나 우월해졌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유대에서도 합리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철학이 있었다니 조금 놀랍기도 했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는지는 이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의 사유가 또 서양 철학에 끼친 영향이 만만치 않다. 기욤,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등 모두 유대의 영향을 받았고 기독교의 대표적인 사상인 우주발생론 또한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전에 기독교의 교리가 예수님과 초대 교회에 관한 자료들이 로마의 핍박으로 다 불타 없어져버려 고대 그리스와 유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서양 중세 철학을 들어가기 전에 아랍 철학과 유대 철학 순서를 이 책에서 집어넣은 것도 알 수 있었다.
유대 철학, 아랍 철학은 고대 그리스와 구약에서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철학 또한 비슷한 출발점과 이 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학문적 배경으로 인해서 이 세 철학은 비슷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후에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의 교리가 구약시대 이후에도 별로 변화가 없었던 것일까?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예수님 당세의 기록이 좀 더 많이 남아 있었다면 서양 철학은 좀 더 다르지 않았을까.
이들의 철학은 종교를 떠나서는 존재 할 수 없는 철학이다. 세 종교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느끼는 것인가이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차이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틀렸다 맞았다 하는 식의 표현은 옳지 않겠지만 기독교 나름의 자생적인 철학을 발전시켰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늦어서 1000단어로 했습니다. 나름대로 공부도 더 많이 되고 더 요약하려고 머리 쓰지 않아도 되는 장점도 있네요. 하하하~~
A.D. 529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아테네에서 철학 학교를 폐쇄할 것을 명령했다. 그때까지 그리스의 사상은 이미 아시아에 터를 잡기 시작했고, 이 사실로부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시리아와 페르시아와 이집트와 모로코와 스페인을 거쳐 서유럽에 다시 전달하게 될 순환운동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리스 철학은 철학 학교들이 문을 닫기 전에 아테네에서 이 철학을 연구한 그리스도인들에 의하여 아시아로 왔다. 에뎃사의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그 페르시아와 시리아에 학교를 만들었고 철학 작품과 과학 작품이 그리스어에서 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 헤지라 후 회교는 서아시아에서 기독교를 대신했다. 바그다드 칼리프들은 시리아 학자들의 봉사를 요청했다. 시리아 학자들은 새 주인들의 후원을 받아 가르치는 일과 그 밖의 활동을 계속했다. 그리고 아랍어는 학문어가 되었다. 그리스의 작품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대체로 시리아의 학자들은 그리스의 학문을 아랍에 전달했는데, 그 시기는 그리스 학문이 아랍인에게서 유대인에게로 그리고 서양 기독교의 신학자들에게 전달될 동안이었다.
이 철학 전통 가운데 많은 부분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으로, 아주 이른 시기에 그가 썼다고 보아지며 신플라톤주의의 성격을 띤 두 논문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이 혼합은 중세 사상 발전에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중세 학자들은 자신의 진술을 조화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다면 한 철학자가 다른 사람의 작품을 썼다고 말하는 것을 별로 주저하지 않았다.
아랍철학자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름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로티니누스를 섞은 내용을 유포했다. 그들은 이 두 철학을 두 개의 철학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이슬람 신앙은 지적 해석의 필요를 느꼈다. 이것은 그 시대의 근본주의자들이 제기한 코란에 대한 문자적 해석을 지성하기 위함이다. 무타질라 사람들은 계시의 해석에서 이성에 의존할 필요를 강조했다. 이들은 특별히 하나님의 절대적 단일성을 수립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본질과 속상을 전혀 구분하지 않으려고까지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의 정의를 주장하고 선과 악은 오직 하나님께서 선이나 악이 되게 하기를 의욕하셨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사실을 거부했다. 그들은 부정적 방법을 계속 적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신인동형론적 표상을 부정했다. 이 방법은 하나님에게서 그 피조물에게 적용하는 모든 규정을 부인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뜻을 본래적인 한 정의의 법칙에 굴복시키는 것은 은근히 이성이 발견할 수 있고, 사람들은 그 법칙에 따라야 하는 객관적 선과 객관적 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회교 신학자들은 사람에게 도덕적 자유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 후 무타칼리문 학파는 무타질라 학파의 다소 비정통적 활동에 반대한 신학 반동이다. 알 아사리는 무타질라로서 오랫동안 가르친 후에 공개적으로 이전의 입장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절대적 자유에 대한 완전한 정당화를 수립한다. 알 아사리의 두 번째 교리는 마침내 회교의 정통 신학이 되었다. 오늘날 몇몇 마호메드 학파는 여전히 이 신학을 가르치고 있다. 정통 신학자들이 그리스 철학을 이처럼 반박하여 그 결과 어떤 아랍 사상가들은 종교와 관계를 잃지 않으면서 철학 자체를 위하여 철학을 추구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신학자가 철학에 가장 크게 기여하게 될 서유럽에서 일어나는 일과는 뚜렷하게 대조적으로, 마호메드 사상가들이 철학자에 한 가장 큰 기여는 철학자들이 했다.
회교 신학자 가운데 코란에 비추어 그리스 철학을 다시 해석하는데 성공을 거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결과 회교 신학이 점점 그리스 철학과 결별하여 그 철학을 반박하는 데 까지 이르렀다.
1. 알킨디와 알파라비
알킨디의 ‘지성에 대하여’는 지성의 활동을 기술하면서 추상 작용의 본질에 빛을 비춰주고 있다. 이 추상 작용은 보편자를 산출하는 작용이다. 그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교리에 따라’ 지성에 대하여 말한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능동 지성 혹은 ‘언제나 활동하는 지성’을 예지로 영혼과 구별되고 영혼보다 우월하고 그 영혼에 작용을 미쳐 가능성으로 지적인 영혼을 능동성으로 지적인 영혼으로 바꾸는 영적인 존재 혹은 실체로 고찰한다.
아랍 철학은 처음부터 아프로디시아스의 영향을 받아, 모든 인류에 대하여 오직 하나의 능동적 지성이 있으며, 각 개인은 능동 지성의 작용이 가능성에서 능동성으로 이끌어가는 수용적 능력만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모든 개념들은 하나의 순전히 영적인 존재 혹은 예지로부터 우리 개인의 영혼으로 흘러들어간다. 이 예지는 모든 인류에 대하여 하나며 동일하다.
알킨디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플라톤주의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하나이 철학으로 다루려는 동일한 경향은 알파라비에게도 나타났다. 이 사람들은 회교를 갖고 있었으며 이 종교는 이들에게 철학적 사유에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종교는 기독교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은 성경의 사람들을 주의 깊게 구별했다. 코란의 하나님은 하나이며 영원하며 전능하며 만물의 창조주이다. 그리스도인들 이전에 아랍의 철학자들은 엄격하게 가지적 필연성에 의하여 통치되는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우주라는 그리스의 개념과 자유롭고 전능한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유롭게 창조된 세계라는 성경의 개념을 조화시키는 문제에 맞닥뜨렸다.
알킨디의 시대 바로 전에 한 회교 신학교는 코란의 하나님과 구약의 하나님의 권리를 강하게 대조했다. 알 아사리에 따르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유일한 명령에 의하여 창조되었으며 그의 권세로부터 독립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악은 물론 선도 오직 하나님의 전능한 의지 덕분에 존재한다.
아사리 학파에 따르면 세상은 시간의 순간들과 장소의 점들로 이루어져있으며, 이 순간들과 점들은 하나님의 유일한 의지에 의하여 결합되어 있다. 이 둘의 결함 관계는 하나님의 능력이 자유롭게 개입함에 따라 쉽게 바꾸어진다. 그들의 우주관이 코란의 신 개념과 밀접하게 일치한다는 의미에서 ‘회교 철학’을 이룩했다. 세계는 알라가 발휘하는 전능한 의지의 자유로운 개입에 언제나 열려 있는 전적으로 유연한 물질이다.
알파라비는 그리스 철학의 압도할 만하게 풍부한 사유를 동양인들이 갖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향수어린 감정에 자신의 신비 체험에 적용시킬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자연적 존재는 우연적이다. 자연적 존재들은 실존과 형상을 제공받기 때문에 어떤 원인으로부터 실존을 받았음에 틀림없고, 실존은 본질적으로 이 원인에 속해있으며 이 원인은 이런 이유로 즉 신으로부터 실존을 잃어버릴 수 없다. 모든 표상은 하나의 확언을 함의한다. 실존은 사물의 본질에 포함되지 않는다. 실존은 사물들의 구성 특성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며 본질이라는 것의 표상은 그 실존의 표상이 없이는 불완전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알파라비의 정신세계는 그 실존에 있어서 하나의 제일 원인에 의존해 있다. 이 원인은 운동을 하면서 정신세계를 움직이게 하고 심지어 본질들에서 정신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들을 규정한다. 사물들이 무엇이라는 것의 원인은 그 사물들에 대하여 우리가 가지는 지식의 원인이다. 능동 지성은 그 존재에서처럼 그 활동에서도 변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지성과 사랑을 통하여 이 개별적 능동 지성에 연합되는 것이다. 이 능동적 지성은 즉각적인 부동의 시동자이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모든 가지적 지신의 원천이다.
또한 알파라비는 지상의 모든 나라를 포함하는 범세계적 사회를 꿈꾸었다. 지상의 도성은 천상의 도성과 그 지복을 향하는 한 단계에 불과하다. 끝없이 새롭게 되는 영혼과 영혼의 연합에 의하여 죽은 자이 기쁨이 생기고 커지고 무한히 부요롭게 된다.
-아랍 철학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아랍의 문화가 서양의 르네상스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은 공부했지만 그것이 어떤 경로로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는 잘 몰랐다. 서양은 참으로 아랍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듯 하다. 하마터면 없어질 수도 있었을 고대의 작품들을 보존해줬으니 말이다.
아랍 철학은 서양 철학과 비교해 보았을 때 비슷하기도 했다. 출발점도 그리스 철학이고, 각자의 종교에서 모시는 신도 뿌리는 같기 때문인 듯하다. 창조자, 전능자, 능동 지성, 선과 악의 기준이 되는 자.. 사실 하나님과 세계에 대한 그들의 논리는 다른 점을 찾지 못했다. 아랍에서도 서양에서도 의견이 여러 가지이니 그저 그 중의 한 사유인 것 같다.
그래도 이들도 꽤 높은 도급에 이른 사람들인 듯하다. 특히 알파라비가 꿈꿨던 범세계적인 사회는 그리 길지 않게 소개가 되었지만 한참 옛날 사람이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참 대단한 것 같다. 이것은 서양 철학 중에서도 보지 못한 생각 아닌가. (내가 공부를 안 해서 모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기독교인으로서의 개인적 생각이지만, 만약 아브라함이 하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 지역에서도 어떤 형태로든 회교 대신 기독교가 들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그렇다면 이 지역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 같은 사람이 나지 않았을까? 혹은 그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나지 않았을까? 문화권이 다른 것이, 믿는 종교가 다른 것이 그 명성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종교만 다르지 서로 소유한 철학적 사유들은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믿는 신도 뿌리는 같고..
아무튼 이러한 이유들로 이들의 철학은 비슷할 수밖에 없는 듯 하다. 아예 동양 철학이 아닌 바에야..
5-2. 유대철학
유대 사유의 출발점은 본질적으로 종교적이다. 구약 성경과 랍비 글모음으로 집적된 주석들-탈무드였다. 이 때문에 기독교 신학자들은 유대 신학자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게 된다. 하나님이 한 분이심, 하나님의 절대 자유와 창조 개념과 같이 근본적 개념에서 그러하게 될 것이다.
1. 솔로몬 이븐 가비롤
솔로몬 이븐 가비롤은 스페인에 살았던 유대인으로 스콜라주의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그를 기독교 저술가로 잘 못 알아 그를 기독교의권위자로 인용했다. 이는 같은 계시를 공통으로 받아들이므로 유대교 사상가와 기독교 사상가들이 종교적으로 비슷하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된다.
‘생명의 샘’은 5권으로 나누어져 있는 긴 대화록으로 변증적 예증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교리는 겉모습은 플라톤주의적이지만, 유대교의 정신에 젖어있다.
하나님을 빼고 모든 실체는 심지어 단순한 실체라고 하는 것들도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있다. 만일 이런 유의 구성을 ‘질료 형태론적’이라고 부르는 데 동의한다면, 가비롤의 ‘질료 형태론’은 수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 피조물을 창조주와 근본적으로 구별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몸체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단순하다고 할 수 있는 영적인 실체도 역시 영적인 질료와 형상으로 이루어져있다. 이 영적인 질료는 영적인 실체 속에서 이 영적 실체들의 개별화 원리이며 변화 원리이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과 달리 이 변화와 개별화의 원리에 종속한다. 보편적 형상과 보편적인 일차적 질료로 이뤄진 보편적 실체가 있다. 모든 몸체의 질료는 ‘물질성’의 형상에 의하여 스스로 존재한다.
하나의 개별 몸체를 다른 개별 몸체와 구별하는 것은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상보적 형상들이다. 이 상보적 형상 때문에 몸체는 단순한 광물로, 신물과 동물 혹은 사람으로 결정된다. 모든 구성적 존재에서 ‘형상의 복수성’이 있다. 존재는 질서에 따라 서로 지속한다.
우주의 본질에서 모든 존재는 서로 겹치는 형상 때문에 바로 그것으로 있으며 각 존재는 이 우주의 본질에 관여한다. 가비롤의 세계는 서로 긴밀하게 이어져 있는 형상들의 전체 구조와 아울러 제 1의 조물주로부터 하나의 의지를 통하여 나온다. 이 의지는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하며 이 의지가 하나님으로부터 방출된 영적 실체로 보아야 하는지 딱 부러지게 말하기란 어렵다. 모든 존재는 의지에 의하여 붙잡혀 있으며 그 의지에 의존해 있다. 존재를 붙잡고 그것들이 정지하는 한계와 극에 고정시키는 것은 의지이다. 바로 이 의지에 의하여 형상들은 규칙적으로 성질을 갖고 합법화하는 반면에 이 의지에 의존하고 이 의지에 붙들리게 된다.
이 교리는 성경의 하나님의 의지와 비슷한 가장 높은 의지에 의존하는 철학적으로 가지적 세계를 서술했다. 이 세계는 야훼께서 의욕하셨을 신플라톤주의적 우주였다. 존재가 좀 더 가지적이고 지적일수록 더 비물질적이고 단순한 이런 세계에서 사람은 자신의 지성 덕분에 형상에서 형상으로 거슬러가 창조의 의지까지 되오를 수 있는 매개적 위상을 차지한다. 이간의 영혼은 이 가지적 형상을 품고 있으며 이 가지적 형상은 전개되기 위하여 그런 일깨움만을 기다리고 있다. 감각적 형상과 인간 영혼의 관계는 기록된 책과 독자의 관계와 같다. 가비롤은 우주 발생론을 널리퍼트렸다.
이블 파쿤다는 세상이 복합적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해서 이 입론을 증명한다. 이븐 카디크는 소우주에서 세상의 우연성에 의하여 신 존재를 증명한다. 이븐 다우드 제 1시동자의 필연성과 가능적인 것과 필연적인 것의 차이에 잇달아 의존함으로 신 존재를 예증한다.
이들의 합리적인 해석을 향한 반동으로 유다 할레비는 순수히 유대적이고 할 수 있는 대로 덜 철학적이게 될 신학을 옹호한다. 그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믿는다. 할레비는 신학자인데다 민족주의와 전통주의를 표방하는 위엄있는 인물이다. 이러한 반동은 유대 철학의 발전을 가로막지 못하고 그 발전 속도를 느리게도 못했다.
2. 모세스 마이모니데스
그의 ‘당황하는 자들에 대한 안내’라는 책은 학문과 철학의 결론을 성경의 문자적 의미와 조화시키는 것에 대하여 확신이 없고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쓴 책이다. 이 책의 여감은 신플라톤주의적이며 아리스토텔레스 주의적이다.
유대의 박사에 따르면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학문과 철학은 구별되는 본성을 갖고 있는 지식들이다. 세계의 창조는 이성의 관점에서 불가능한 것이 아니며 결정적 증거가 없을 때 ‘시간 속의 창조’라는 모세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허용할 만하다. 마이모니데스는 순수 예찌는 질료에서 자유롭고 지상 몸체에 나타나는 질료와는 구별되는 질료가 천상 몸체에 있다고 인정한다. 예지들의 실존을 설명하고, 9개의 구체를 주재하는 9개의 좀더 높은 예지가 있고, 열 번째 예지는 능동지성이라고 한다. 능동 지성은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 구체 아래 달밑 세계, 네 원소의 장소가 있다. 한 육체와 그 형상인 영혼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다섯가지 능력을 부여받았다. 개인적으로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오직 수동 지성만 갖고 있으며 습득된 지성이 능동 지성의 영향을 받아서 인간에게 형성된다. 사람은 자신의 공로 정도에 따라 다른 일종의 지적 자본을 갖고 있으며 이 지적 자본은 죽은 후에 능동 지성과 다시 연합한다. 철학의 실천을 통하여 자신의 지성을 부요롭게 함으로써 자신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대로 구원하는 일이 사람에게 남아 있다.
우리는 세계는 영원하지 않고 하나님에 의해 시간에서 창조된 거라 말한다. 그러나 반면 이 입론은 논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존재를 설명하려고 이 입론에 의존할 수 없다. 세계가 영원부터 조재했던 것처럼 이 진리의 증명은 뒷일로 남아있다. 마이모니데스는 제 1 시동자의 실존과 필연적 존재의 실존과 제 1 원인의 실존을 증명한다. 세상이 시간 속에서 무로부터 창조되었는지 아니면 영원부터 있었는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실존은 설명된다. 마이모니데스는 부정적인 속성 말고는 하나님의 본질적 속성을 절대적으로 거부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심은 알지만 그 분이 누구신지는 모른다. 우리의 유일한 자료는 부정적 속성을 모으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우리를 피해간다 해도 세상에 나타나는 그 분의 행동의 결과는 전적으로 모든 사람의 눈에 명백하다. 하나님은 능동인이면서 세계의 목적인이다.
마이모니데스는 자신의 작품을 체계적 설명으로 보지 않았다. 마이모니데스는 기독교 신학자들과 함께 구약을 믿는 신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 신학자들이 구약의 신앙을 참된 철학과 조화시키는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 그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기독교 신학자들은 심지어 그의 모범으로 유익을 얻었다. 수많은 점에서 철학 혼자서는 계시 속에 담긴 진리를 얻을 수 없다. 마이모니데스는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영감과 모형이 되었다.
12세기의 유대교와 12세기의 기독교를 비교한다면 유대사상이 아랍 철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덕택에 얼마나 우월해졌는지를 파악하게 된다.
-유대에서도 합리적으로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철학이 있었다니 조금 놀랍기도 했다. 이들이 어떤 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했는지는 이 책을 통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의 사유가 또 서양 철학에 끼친 영향이 만만치 않다. 기욤, 보나벤투라, 토마스 아퀴나스 등 모두 유대의 영향을 받았고 기독교의 대표적인 사상인 우주발생론 또한 이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전에 기독교의 교리가 예수님과 초대 교회에 관한 자료들이 로마의 핍박으로 다 불타 없어져버려 고대 그리스와 유대의 영향을 받았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들이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본격적인 서양 중세 철학을 들어가기 전에 아랍 철학과 유대 철학 순서를 이 책에서 집어넣은 것도 알 수 있었다.
유대 철학, 아랍 철학은 고대 그리스와 구약에서의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철학 또한 비슷한 출발점과 이 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역사적·학문적 배경으로 인해서 이 세 철학은 비슷할 수밖에 없는 듯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신 후에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종교의 교리가 구약시대 이후에도 별로 변화가 없었던 것일까? 조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예수님 당세의 기록이 좀 더 많이 남아 있었다면 서양 철학은 좀 더 다르지 않았을까.
이들의 철학은 종교를 떠나서는 존재 할 수 없는 철학이다. 세 종교가 다른 점이 있다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고 느끼는 것인가이다. 그런데 이런 중대한 차이는 별로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다. 틀렸다 맞았다 하는 식의 표현은 옳지 않겠지만 기독교 나름의 자생적인 철학을 발전시켰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늦어서 1000단어로 했습니다. 나름대로 공부도 더 많이 되고 더 요약하려고 머리 쓰지 않아도 되는 장점도 있네요. 하하하~~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