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 코플스톤, 『중세철학사』, 서광사, 36,37,38장
김 잠선
제 36장 성 토마스 아퀴나스 6: 창조
-무로부터의 창조
하느님은 세계의 제 1원인이고 유한한 존재는 자신의 필연적인 존재에 힘입고 있는 우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는 하느님의 창조에 의해서 생기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또 이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일 수 밖에 없다.
만일 피조물이 미리부터 존재하는 어떤 소재로부터 만들어 졌다면, 이 소재는 하느님 자신이거나 또는 하느님 이외의 다른 무엇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순일하고 정신적이며 불변적이므로 창조의 소재일 수가 없다. 그리고 제 1원인에 의존하지 하지 않고 독립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를테면 하나의 필연적인 존재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앞서 있으며, 그리고 만일 하느님은 변화할 수 없다면 , 즉 창조에 있어서 자신을 밖으로 나타낼 수 없다면 하느님은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해지는 경우, 그것은 최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가 그 다음에 어떤 무엇이 있었다거나, 또는 <무로부터>라는 그 말은 <어떤 무엇으로부터는 아니다>라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해 되어서는 안된다.)
창조를 창조 행위라는 측면, 즉 피조물의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창조는 피조물의 존재 원리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하나의 실재적 관계이다.
모든 피조물은, 바로 창조되어 있다는 그 사실에 의해서 창조자로서의 하느님에 대해서 하나의 실재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역으로 하여, 하느님이 피조물에 대해서 하나의 실재적인 관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관계된 것으로서 피조물에 대해서 말하거나 피조물에 관계된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 하느님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피조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피조물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하나의 의존관계인 그 실제적인 관계는 피조물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을 마땅히 명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466쪽
-하느님만이 창조할 수 있다.
창조는 하느님만의 특권이다. 어떠한 피조물에도 전해질 수 없다.
-하느님은 자유로이 창조했다.
하느님의 창조는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동기로서 즉 선을 위해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성은 무한한 지성일 뿐 아니라 무한한 의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의지는 자유이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이 무한한 선이므로 필연적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러하 무한한 완전성으로서의 하느님은 자기 충족적이므로 하느님에게는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대상은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의지는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는 자유이다.
-창조의 동기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무한한 완전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위한 무엇을 얻기 위해서 창조했을 리가 없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자신의 선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선을 제공하고 확산하기 위해서 창조했던 것이다.
창조 행위에 있어서의 목적은 하느님 자신이외의 존재자들에 전달될 수 있는 하느님 자신의 선이라는 의미로 이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선을 나타내고 이를 분유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전능성
전능이라는 하느님의 속성은, 하느님은 가능한 것은 모두 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최고의 존재, <자존하는 존재>이며, 즉 존재를 분유할수 있는 어떤 것을 창조하는 의지이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이 실재로 행하는 것만이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하여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다른질서를 의지할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느님의 행위는 하느님의 본질과 그 무한의 선과 동일하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가능한 한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행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하느님은 고통이나 악이 현존하는 세상을 창조했을까?.
-악의 문제
이 세상을 의지 함에 있어서 하느님은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악을 의지하지는 않았다. 하느님은 무한의 선인 자신의 본질을 필연적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또 하느님은 자신의 선의 한 전달자로서의 창조를 자유로이 원하고 있다.
악은 하나의 적극적인 존재가 아니며, 악은 결여이다. 그것은 <어떤 것 >, 즉 적극적인 것의 결여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악은 창조될 수가 없음으로, 하느님이 창조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악은 존재로서 그 자체가 선인 것의 결여로만 존재할 뿐이다. 나아가서 인간의 의지 마저도 악 차제를 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지의 대상은 반드시 선한(좋은)것, 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의지도 악을 악으로서 욕구할 수 없으며, 그리고 세계를 창조하면서 악을 '미리 알았던' 하느님은 악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선인 세계를 원했고 하느님은 미리 알고 있었던 그 악을 허락하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소멸이나, 죽음은 일종의 존재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많은 자연적인 악이나 고통은 우주의 완전성이나 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측면에서의 도덕적인 악의 결과 이다. 말하자면 이들 악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악은 단지 하느님이 허락했을 뿐이다.
제 37장 성 토마스 아퀴나스7: 영혼론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실체적 형상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모든 규정, 즉 유형성(제1질료의 형성에 의한), 식물적, 감각적, 지적인 작용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영혼이다. 식물에는 생명과 성장 및 생식의 능력을 부여하는 식물적 원리 또는 식물혼만이 있다. 동물에는 식물적 생명의 원리와 함께 감각적 생명의 원리로서 작용하는 감각혼만이 있다. 인간에게는 이성적 원리 또는 이성혼 만이 있으며 이는 그 잔체의 특유한 작용 원리만 있는 것이아니라 식물적, 감각적, 기능의 원리이기도 하다. 인간이 죽어서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면, 그 육체는 소멸한다. 이 경우 단순히 이성적 기능만이 아니라 감각적 기능도 정지한다. 말하자면 이 모든 작용이 지니는 하나의 원리는 앞서 형성하고 있었던 질료를 더 이상 형성하지 않게 되어서 통일되었던 인간의 실체 대신에 다수의 실체들이 생겨나며, 그 새로운 실체적인 형상들은 질료의 가능태로부터 끌어내어진다.
인간이 추리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느끼고 감각하는 것마저도 알고 있는 것은 개별적인 하나의 인간이다. 그러나 신체없이는 감각할수 없으므로, 영혼만이 아니라 신체도 인간에게 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성혼이 주입될 때 인간은 태어나고, 이성혼이 신체로부터 떠날 때 인간은 죽는다. 이를테면 인간에게는 이성혼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실체적 형상도 없다. 그리고 이 영혼은 하위 형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즉 식물의 경우에는 식물혼이, 비이성적인 동물의 경우에는 감각혼이 행하고 있는 것을 인간의 경우에는 이성혼이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영혼이 신체와 결합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일 수가 없다. 이 결합은 영혼이 전생에 지은 죄에 대한 벌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예컨데 인간의 영혼은 감각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신체없이는 이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사고력을 가지고 있으나 생득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감각 경험에 의해서 그 관념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필요하다. 따라서 영혼은 신체를 필요로 하고 또 영혼은 본성적으로 신체의 형상이므로, 영혼은 신체와 결합해 있는 것이다.
-영혼의 능력
인간의 영혼에는 자신의 작용에 대해서 가능태에 있으면서 제각기 자신의 작용과 대상에 따라서 구별되는 기능들 또는 작용 능력들이 있다. 이들 능력이나 기능 가운데 어떤 것은 영혼 그 자체에 속하여 본질적으로는 신체적 기관에 의존하지 않으나, 다른 어떤 것은 <합성체> 에 속하여 신체없이는 작용할 수가 없다. 예컨데 이성적인 또는 지적인 그 기능은 본질적으로 신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체와 결합상태에서는 인식의 소재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는 있다. 그러나 감각 능력은 분명히 신체없이 발휘될 수가 없다. 이에 반하여 그 능력은 영혼없이 신체에 의해서 발휘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주체는 영혼만도 아니고 신체만도 아닌 인간이라는 합성체인 것이다. 이를 테면 신체와 영혼은 감각작용을 함에 있어서 제각기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감각 능력은 그 양자에 따로따로 속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결합하여 있는 그 양자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내부 감각
내부 감각은 인간 뿐만아니라 동물에도 공통적이다. 이것은(내부감각은) 고유한 외부감각에 주어진 대상들을 구별하고 대조하는 감각으로서 이러한 기능은 일반감각 또는 <공통감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인간과 동물은 외부의 감각적 대상으로부터 똑같은 방법으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감각적인 형상에 관해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외부 감각에 의해서 직접 파악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차이가 있다. 동물은 유익성과 무익성, 그리고 호의적인 것과 적대적인 것을 자연적인 본능에 의해서 지각하지만, 인간은 개별적인 사물들을 비교한다. 그러므로 동물의 경우 <본성적인 평가력>이라고 부르고, 인간의 경우에는 <사고력> 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사고력에 단순한 본능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자유의지
의지는 본성상 선 일반을 지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선 일반을 욕구한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강제의 필연성, 즉 억지로 의지에 떠 맡겨지는 필연성이 아니다. 그 필연성은 본성적으로 궁극적인 목적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의지 자체에서 생겨난다. 의지는 하나의 욕구 능력이므로, 욕구의 자연적 대상이나 자연적 <목적>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이 대상은 지복, 행복, 선 일반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행복할 것을 바라고 있으며, 또 그러기를 바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억지로 외부로부터 부과된 필연성이 아니라 의지의 본성에서 생겨나는 본성적 필연성이다.
그러나 비록 인간이 필연적으로 행복을 바라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개별적인 선택에 관해서 인간에게 자유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다. 반드시 행복에 필요하지는 않지만, 개별적인 선이 존재하며, 그러한 것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나아가서 비록 참다운 행복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데만, 즉 무한한 선을 얻는데만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의식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거나 하느님으로 이끌어 주는 수단들을 반드시 바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어서 지성은, 무한한 선으로서의 하느님이나 의지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행복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해서 명확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를테면 비록 인간은 반드시 행복을 바라고 있기는 하지만, 행복과 하느님의 관계가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 이외의 것을 바랄 수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것은 아니다. 몰론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을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반드시 행복을 바라고 있고 또 사실행복은 하느님, 즉 무한한 선에 이르는데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무한한 선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명확한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행복과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는 대상 일지라도 관계가 있는 것처럼 여겨서 자신의 행복을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실재적이든 외관상이든간에 하나의 선으로서 바라고 있다.
요컨데 인간은 반드시 <선이라는 이유에서> 무엇을 바라고 반드시 행복을 추구하지만, 인간은 행복과 하느님간의 관계를 중요시하지 아니하고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을 마치 자신에게는 진정한 행복의 원천인 것처럼 인정할 수도 있다.
자유의지는 의지와는 다른 능력 또는 기능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양자 사이에는 개념상의 구별이 있다. 왜냐하면 '의지'라는 말은, 필연적이든(목적이나 행복에 관해서) 자유이든 (목적에 대한 수단의 선택에 관해서)간에 우리가 지니는 모든 의지 작용의 원리로서 기능을 가리키고 있는 반면에, '자유의지'는 목적에 대한 수단의 자유스러운 선택의 원리로서 위와 같은 기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비록 인간이 반드시 반드시 목적이나 행복을 바라고 있을지라도, 그는 목적과 그 개별적인 수단 사이의 관계를 반드시 통찰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인간은 수단의 선택에 관해서는 자유로워서 외부로부터나 내부로부터도 강요받지 않는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인간은 이성적이라는 사실의 결과이다.
-가장 고귀한 능력
지성은 인식에 의해서 대상을 소유하고 정신적인 동화 작용에 의해서 대상을 자기 자신안에 지니는 반면에 의지는 외적인 것으로서의 대상을 지향하고 있다. 요컨데 자기 자신 밖에 존재하는 대상의 완전성을 지향하는 것(의지)보다도 대상의 완전성을 자기 자신안에 소유하는(지성) 편이 더욱 완전하다고 볼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때. 지성이 보다 고귀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영혼의 불멸
사실 영혼은 신체의 형상이다.
영혼은 본성적으로 신체의 형상이므로 언제나 신체를 형성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런데도 여전히 영혼은 이성혼이며, 그의 능력은 신체를 형성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소멸하는 사물은 그 자체가 아니면 다른것에 따라서,즉 자신의 존재가 의존하고 있는 어떤것의 소멸에 의해서 소멸한다. 동물의 혼은 자신의 모든 활동이 신체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신체가 소멸하면 따라서 소멸한다. 그러나 이성혼은 그것에 본질적으로 의존해 있지 않은 신체가 소멸할지라도, 자립적인 형상이므로 이에 영향을 받을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의 이성혼인 인간 영혼은 빗물질적이며, 즉 정신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의해서 영혼은 불멸적이며 본성적으로 죽을 수 없다는 결과가 된다.
또한 인간에게는 불멸성에 대한 자연적인 욕구가 있으며, 이 자연적인 욕구는 하느님에 의해서 주입되어 있는 한에서 헛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를 시간의 무제약에서 그리고 본질적으로 파악하는 영혼에 대해서 불멸성을 추구하고 있다.
제 38장 성토마스 아퀴나스 8: 인식
-인식의 과정: 보편자와 개체의 인식
유형적인 대상은 감각 기관에 작용하고, 감각작용은 신체를 사용하는 영혼만의 활동이 아니라, 영혼과 신체로 이루어진<합성체>의 활동이다. 감각은 본성적으로 개체의 파악에 한정되어 있어서, 보현자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인식은 보편자에 대한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지적 작용에 있어서 물질적 대상의 형상을 추상 작용에 의해서 파악하며, 즉 보편자를 파악하는 것이다.
비록 감각작용이 영혼과 신체가 함께 하는 작용이라고는 하지만, 이성적이면서 정신적인 영혼은 물질적인 것 또는 감각적 표상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영혼으로부터의 어떤 작용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개념은 단순히 수동적으로는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작용은 감각적 표상을 '조명하여' 그것으로부터 보편자 또는 '가지상'을 추상하는 능동이성의 작용인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어떠한 특별한 조명없이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 능동 이성이 감각적인 표상의 가지적인 측면을 볼수 있게하여, 그 감각적인 표상 가운데 잠재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형상이면서 가능태로소의 보현적인 요소를 밝혀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능동 이성은 스스로 보편적인 요소를 추상하여 수동 이성안에 <각인된 형상>이 생기게 한다. 능동이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 한정에대한 수동 이성의 반응이 곧 <정신의 말>, 표명된 형상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편적 개념이다.
계속......
김 잠선
제 36장 성 토마스 아퀴나스 6: 창조
-무로부터의 창조
하느님은 세계의 제 1원인이고 유한한 존재는 자신의 필연적인 존재에 힘입고 있는 우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한 존재는 하느님의 창조에 의해서 생기지 않으면 안된다. 게다가 또 이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일 수 밖에 없다.
만일 피조물이 미리부터 존재하는 어떤 소재로부터 만들어 졌다면, 이 소재는 하느님 자신이거나 또는 하느님 이외의 다른 무엇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순일하고 정신적이며 불변적이므로 창조의 소재일 수가 없다. 그리고 제 1원인에 의존하지 하지 않고 독립해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다. 이를테면 하나의 필연적인 존재밖에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앞서 있으며, 그리고 만일 하느님은 변화할 수 없다면 , 즉 창조에 있어서 자신을 밖으로 나타낼 수 없다면 하느님은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하느님이 세계를 창조했다고 말해지는 경우, 그것은 최초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가 그 다음에 어떤 무엇이 있었다거나, 또는 <무로부터>라는 그 말은 <어떤 무엇으로부터는 아니다>라는 것과 같은 뜻으로 이해 되어서는 안된다.)
창조를 창조 행위라는 측면, 즉 피조물의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창조는 피조물의 존재 원리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하나의 실재적 관계이다.
모든 피조물은, 바로 창조되어 있다는 그 사실에 의해서 창조자로서의 하느님에 대해서 하나의 실재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관계를 역으로 하여, 하느님이 피조물에 대해서 하나의 실재적인 관계를 지닌다고 말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느님에게 관계된 것으로서 피조물에 대해서 말하거나 피조물에 관계된 것으로서, 하느님에 대해서 말하는 경우 하느님에게 의존하고 있는 것은 피조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피조물에 의존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하느님과 피조물 사이의 하나의 의존관계인 그 실제적인 관계는 피조물에서만 볼 수 있다는 것을 마땅히 명심해야 한다는 점이다. -466쪽
-하느님만이 창조할 수 있다.
창조는 하느님만의 특권이다. 어떠한 피조물에도 전해질 수 없다.
-하느님은 자유로이 창조했다.
하느님의 창조는 필연에 의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동기로서 즉 선을 위해서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느님의 본성은 무한한 지성일 뿐 아니라 무한한 의지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의지는 자유이다. 하느님은 자기 자신이 무한한 선이므로 필연적으로 사랑하고 있다. 그러하 무한한 완전성으로서의 하느님은 자기 충족적이므로 하느님에게는 자기 자신 이외의 다른 대상은 필요가 없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의지는 다른 대상들에 대해서는 자유이다.
-창조의 동기
하느님의 창조 행위는 무한한 완전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위한 무엇을 얻기 위해서 창조했을 리가 없다. 말하자면 하느님은 자신의 선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선을 제공하고 확산하기 위해서 창조했던 것이다.
창조 행위에 있어서의 목적은 하느님 자신이외의 존재자들에 전달될 수 있는 하느님 자신의 선이라는 의미로 이해 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피조물들은 하느님의 선을 나타내고 이를 분유함으로써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전능성
전능이라는 하느님의 속성은, 하느님은 가능한 것은 모두 할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은 최고의 존재, <자존하는 존재>이며, 즉 존재를 분유할수 있는 어떤 것을 창조하는 의지이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이 실재로 행하는 것만이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하여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것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다른질서를 의지할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느님의 행위는 하느님의 본질과 그 무한의 선과 동일하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느님은 언제나 가능한 한에서 최선의 방법으로 행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어째서 하느님은 고통이나 악이 현존하는 세상을 창조했을까?.
-악의 문제
이 세상을 의지 함에 있어서 하느님은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악을 의지하지는 않았다. 하느님은 무한의 선인 자신의 본질을 필연적으로 사랑하고 있으며, 또 하느님은 자신의 선의 한 전달자로서의 창조를 자유로이 원하고 있다.
악은 하나의 적극적인 존재가 아니며, 악은 결여이다. 그것은 <어떤 것 >, 즉 적극적인 것의 결여로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악은 창조될 수가 없음으로, 하느님이 창조했을 리가 없다. 오히려 악은 존재로서 그 자체가 선인 것의 결여로만 존재할 뿐이다. 나아가서 인간의 의지 마저도 악 차제를 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지의 대상은 반드시 선한(좋은)것, 또는 그렇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떠한 의지도 악을 악으로서 욕구할 수 없으며, 그리고 세계를 창조하면서 악을 '미리 알았던' 하느님은 악을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선인 세계를 원했고 하느님은 미리 알고 있었던 그 악을 허락하기로 작정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면 소멸이나, 죽음은 일종의 존재에 속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많은 자연적인 악이나 고통은 우주의 완전성이나 선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측면에서의 도덕적인 악의 결과 이다. 말하자면 이들 악은 '불가피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자연적인 악은 단지 하느님이 허락했을 뿐이다.
제 37장 성 토마스 아퀴나스7: 영혼론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실체적 형상
인간에게 인간으로서의 모든 규정, 즉 유형성(제1질료의 형성에 의한), 식물적, 감각적, 지적인 작용을 부여하는 것은 인간에 있어서 하나의 영혼이다. 식물에는 생명과 성장 및 생식의 능력을 부여하는 식물적 원리 또는 식물혼만이 있다. 동물에는 식물적 생명의 원리와 함께 감각적 생명의 원리로서 작용하는 감각혼만이 있다. 인간에게는 이성적 원리 또는 이성혼 만이 있으며 이는 그 잔체의 특유한 작용 원리만 있는 것이아니라 식물적, 감각적, 기능의 원리이기도 하다. 인간이 죽어서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면, 그 육체는 소멸한다. 이 경우 단순히 이성적 기능만이 아니라 감각적 기능도 정지한다. 말하자면 이 모든 작용이 지니는 하나의 원리는 앞서 형성하고 있었던 질료를 더 이상 형성하지 않게 되어서 통일되었던 인간의 실체 대신에 다수의 실체들이 생겨나며, 그 새로운 실체적인 형상들은 질료의 가능태로부터 끌어내어진다.
인간이 추리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이 느끼고 감각하는 것마저도 알고 있는 것은 개별적인 하나의 인간이다. 그러나 신체없이는 감각할수 없으므로, 영혼만이 아니라 신체도 인간에게 속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성혼이 주입될 때 인간은 태어나고, 이성혼이 신체로부터 떠날 때 인간은 죽는다. 이를테면 인간에게는 이성혼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실체적 형상도 없다. 그리고 이 영혼은 하위 형사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즉 식물의 경우에는 식물혼이, 비이성적인 동물의 경우에는 감각혼이 행하고 있는 것을 인간의 경우에는 이성혼이 수행하고 있다. 따라서 영혼이 신체와 결합하는 것은 부자연스러운 것일 수가 없다. 이 결합은 영혼이 전생에 지은 죄에 대한 벌일 수가 없는 것이다. 예컨데 인간의 영혼은 감각 능력을 지니고 있으나, 신체없이는 이 기능을 수행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사고력을 가지고 있으나 생득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감각 경험에 의해서 그 관념을 형성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신체가 필요하다. 따라서 영혼은 신체를 필요로 하고 또 영혼은 본성적으로 신체의 형상이므로, 영혼은 신체와 결합해 있는 것이다.
-영혼의 능력
인간의 영혼에는 자신의 작용에 대해서 가능태에 있으면서 제각기 자신의 작용과 대상에 따라서 구별되는 기능들 또는 작용 능력들이 있다. 이들 능력이나 기능 가운데 어떤 것은 영혼 그 자체에 속하여 본질적으로는 신체적 기관에 의존하지 않으나, 다른 어떤 것은 <합성체> 에 속하여 신체없이는 작용할 수가 없다. 예컨데 이성적인 또는 지적인 그 기능은 본질적으로 신체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신체와 결합상태에서는 인식의 소재에 어느 정도 의존하고는 있다. 그러나 감각 능력은 분명히 신체없이 발휘될 수가 없다. 이에 반하여 그 능력은 영혼없이 신체에 의해서 발휘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 주체는 영혼만도 아니고 신체만도 아닌 인간이라는 합성체인 것이다. 이를 테면 신체와 영혼은 감각작용을 함에 있어서 제각기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감각 능력은 그 양자에 따로따로 속한다기 보다는 오히려 결합하여 있는 그 양자에 속해 있는 것이다.
-내부 감각
내부 감각은 인간 뿐만아니라 동물에도 공통적이다. 이것은(내부감각은) 고유한 외부감각에 주어진 대상들을 구별하고 대조하는 감각으로서 이러한 기능은 일반감각 또는 <공통감각>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인간과 동물은 외부의 감각적 대상으로부터 똑같은 방법으로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감각적인 형상에 관해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외부 감각에 의해서 직접 파악되지 않는 것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는 인간과 동물 사이에 차이가 있다. 동물은 유익성과 무익성, 그리고 호의적인 것과 적대적인 것을 자연적인 본능에 의해서 지각하지만, 인간은 개별적인 사물들을 비교한다. 그러므로 동물의 경우 <본성적인 평가력>이라고 부르고, 인간의 경우에는 <사고력> 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이 사고력에 단순한 본능 이상의 것이 포함되어 있다.
-자유의지
의지는 본성상 선 일반을 지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필연적으로 선 일반을 욕구한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강제의 필연성, 즉 억지로 의지에 떠 맡겨지는 필연성이 아니다. 그 필연성은 본성적으로 궁극적인 목적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의지 자체에서 생겨난다. 의지는 하나의 욕구 능력이므로, 욕구의 자연적 대상이나 자연적 <목적>을 떠나서는 이해될 수 없다. 따라서 이 대상은 지복, 행복, 선 일반이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행복할 것을 바라고 있으며, 또 그러기를 바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 필연성은 억지로 외부로부터 부과된 필연성이 아니라 의지의 본성에서 생겨나는 본성적 필연성이다.
그러나 비록 인간이 필연적으로 행복을 바라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는 개별적인 선택에 관해서 인간에게 자유가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다. 반드시 행복에 필요하지는 않지만, 개별적인 선이 존재하며, 그러한 것을 바라느냐 바라지 않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이다. 나아가서 비록 참다운 행복은 하느님을 소유하는 데만, 즉 무한한 선을 얻는데만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의식적으로 추구해야 한다거나 하느님으로 이끌어 주는 수단들을 반드시 바라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있어서 지성은, 무한한 선으로서의 하느님이나 의지를 결정하지 않을 수 없는 행복의 유일한 원천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해서 명확한 통찰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이를테면 비록 인간은 반드시 행복을 바라고 있기는 하지만, 행복과 하느님의 관계가 인간에게 있어서 하느님 이외의 것을 바랄 수가 없을 정도로 명확한 것은 아니다. 몰론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언제나 하느님을 바라고 있다. 왜냐하면 인간은 반드시 행복을 바라고 있고 또 사실행복은 하느님, 즉 무한한 선에 이르는데만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무한한 선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명확한 통찰력이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의 행복과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는 대상 일지라도 관계가 있는 것처럼 여겨서 자신의 행복을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인간은 그가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실재적이든 외관상이든간에 하나의 선으로서 바라고 있다.
요컨데 인간은 반드시 <선이라는 이유에서> 무엇을 바라고 반드시 행복을 추구하지만, 인간은 행복과 하느님간의 관계를 중요시하지 아니하고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을 마치 자신에게는 진정한 행복의 원천인 것처럼 인정할 수도 있다.
자유의지는 의지와는 다른 능력 또는 기능이 아니다. 그러나 그 양자 사이에는 개념상의 구별이 있다. 왜냐하면 '의지'라는 말은, 필연적이든(목적이나 행복에 관해서) 자유이든 (목적에 대한 수단의 선택에 관해서)간에 우리가 지니는 모든 의지 작용의 원리로서 기능을 가리키고 있는 반면에, '자유의지'는 목적에 대한 수단의 자유스러운 선택의 원리로서 위와 같은 기능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같이 비록 인간이 반드시 반드시 목적이나 행복을 바라고 있을지라도, 그는 목적과 그 개별적인 수단 사이의 관계를 반드시 통찰하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인간은 수단의 선택에 관해서는 자유로워서 외부로부터나 내부로부터도 강요받지 않는다.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은 인간은 이성적이라는 사실의 결과이다.
-가장 고귀한 능력
지성은 인식에 의해서 대상을 소유하고 정신적인 동화 작용에 의해서 대상을 자기 자신안에 지니는 반면에 의지는 외적인 것으로서의 대상을 지향하고 있다. 요컨데 자기 자신 밖에 존재하는 대상의 완전성을 지향하는 것(의지)보다도 대상의 완전성을 자기 자신안에 소유하는(지성) 편이 더욱 완전하다고 볼수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 볼때. 지성이 보다 고귀한 능력이라는 것이다.
-영혼의 불멸
사실 영혼은 신체의 형상이다.
영혼은 본성적으로 신체의 형상이므로 언제나 신체를 형성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런데도 여전히 영혼은 이성혼이며, 그의 능력은 신체를 형성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소멸하는 사물은 그 자체가 아니면 다른것에 따라서,즉 자신의 존재가 의존하고 있는 어떤것의 소멸에 의해서 소멸한다. 동물의 혼은 자신의 모든 활동이 신체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신체가 소멸하면 따라서 소멸한다. 그러나 이성혼은 그것에 본질적으로 의존해 있지 않은 신체가 소멸할지라도, 자립적인 형상이므로 이에 영향을 받을수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의 이성혼인 인간 영혼은 빗물질적이며, 즉 정신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이에 의해서 영혼은 불멸적이며 본성적으로 죽을 수 없다는 결과가 된다.
또한 인간에게는 불멸성에 대한 자연적인 욕구가 있으며, 이 자연적인 욕구는 하느님에 의해서 주입되어 있는 한에서 헛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존재>를 시간의 무제약에서 그리고 본질적으로 파악하는 영혼에 대해서 불멸성을 추구하고 있다.
제 38장 성토마스 아퀴나스 8: 인식
-인식의 과정: 보편자와 개체의 인식
유형적인 대상은 감각 기관에 작용하고, 감각작용은 신체를 사용하는 영혼만의 활동이 아니라, 영혼과 신체로 이루어진<합성체>의 활동이다. 감각은 본성적으로 개체의 파악에 한정되어 있어서, 보현자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인식은 보편자에 대한 것이다. 이를테면 인간은 지적 작용에 있어서 물질적 대상의 형상을 추상 작용에 의해서 파악하며, 즉 보편자를 파악하는 것이다.
비록 감각작용이 영혼과 신체가 함께 하는 작용이라고는 하지만, 이성적이면서 정신적인 영혼은 물질적인 것 또는 감각적 표상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영혼으로부터의 어떤 작용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개념은 단순히 수동적으로는 형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작용은 감각적 표상을 '조명하여' 그것으로부터 보편자 또는 '가지상'을 추상하는 능동이성의 작용인 것이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어떠한 특별한 조명없이 자신의 자연적인 능력에 의해서 능동 이성이 감각적인 표상의 가지적인 측면을 볼수 있게하여, 그 감각적인 표상 가운데 잠재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형상이면서 가능태로소의 보현적인 요소를 밝혀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능동 이성은 스스로 보편적인 요소를 추상하여 수동 이성안에 <각인된 형상>이 생기게 한다. 능동이성에 의하여 이루어진 이 한정에대한 수동 이성의 반응이 곧 <정신의 말>, 표명된 형상이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보편적 개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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