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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철학

에세이 수정본입니다.

작성자김의신(사회철학)|작성시간09.05.26|조회수123 목록 댓글 0

◈ 들어가며 ◈

인간의 본성은 이기적인가? 아니면 이타적인가? 인간본성에 대한 이러한 물음은 참으로 난해하며 고대의 철학자들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명확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명확한 답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도 하기 어렵다.

우리는 보통 선한 사람에 대해 이타적이라고 하며, 악한 사람에 대해 이기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상생활 속에서도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며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을 일컬어 '이기주의자'라고 하는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이러한 이기적인 사람을 꺼리며 그의 행동을 비난하기도 한다. 그런데 모든 인간의 본성을 이기적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 있다. 전통적 도덕과 반대되며 납득하기도 힘든 이 이론이 바로 '심리학적 이기주의'이다. 이는 홉스로부터 출발하여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는데, 어떤 강력한 매력이 있는 듯하다. 그러나 후세에 와서 그릇된 이론임이 밝혀지게 된다.

 

1. 심리학적 이기주의란?

 

심리학적 이기주의(Psychological Egoism)란 인간 본성에 대한 사실적인 주장이다. 즉 인간은 본성적으로 이기적이며 따라서 언제나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이타적인 행위, 가령 타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행위를 하여도 그것은 오직 그러한 행위가 자기의 이익에 부합될 경우에만 가능하다. 결국 심리학적 이기주의는 전통적인 도덕관념을 부정하게 된다. 전통적으로 도덕은 사람들에게 순수한 이타적 행위를 강조하는데, 심리학적 이기주의에 따르면 그러한 행위는 인간본성에 위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심리학적 이기주의에 따르면 오른쪽 뺨을 맞고 왼쪽 뺨을 내미는 사람도 그 속에는 다른 이기적인 동기가 숨어 있으며 지하철에서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고 자신을 희생한 영웅적 시민도 무엇인가 다른 목적 혹은 동기에 의해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 된다.

예를 들어 홉스는 동정심에 대하여 “타인의 재난에 대한 인식에서 발원하여 생겨난 우리 자신의 미래에 대한 재난의 상상 혹은 픽션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은 동정심이 발생하는 상황을 매우 훌륭하게 설명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보통 악한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보다 선한 사람이 고통을 받을 때 더 큰 동정심을 갖는다. 그런데 동정심은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과의 일체감을 필요로 한다. 즉 우리는 스스로를 고통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상상할 때 그를 동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선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선한 사람과 더 긴밀한 일체감을 느끼고 악인에 대해서는 약간의 동정심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즉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사람들에 대해 제각각의 동정심을 느끼는 이유는 서로간의 일체감이 다르기 때문이며, 결국 동정심도 순수한 이타적 동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미래의 불행에 기인한 것으로 해석된다.

맹자가 이야기 한 것을 떠올려 보자. 다만 우물가가 아니라 좀 더 위험한 강물에 아이가 빠져있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보고 위험을 무릅쓰고 강물에 뛰어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사람은 정말로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위험을 무릅쓴 것일까? 실제로 이런 상황은 우리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일어나고 있다. 자국도 아닌 일본에서 지하철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고 젊은 나이에 삶을 마친 故이수현군이 그 아름다운 예가 되며, 해마다 여름이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다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 여럿 발생한다. 이렇게 명백히 이타적인 행위라고 할 수 있는 행위를 한 사람들을 보고도 심리학적 이기주의자들은 ‘이기주의’를 주장할 수 있을까? 그들에 대답은 ‘그렇다.’이다. 심리학적 이기주의자들은 행위의 동기를 보다 깊이 분석함으로써 앞서 언급한 희생과 같이 숭고한 행위도 단지 이타적으로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말한다. 즉 이수현군의 행위는 ‘영웅’으로 칭송되고자 하는 욕구 혹은 후세에 기리 이름을 남기고 싶다는 욕구가 동기가 된 것이며 겉보기에 비이기적인 것으로 드러날 뿐인 것이다. 이처럼 동기를 재해석 하는 방법은 이타주의적 행동에 대해 보다 자기중심적인 동기로써 그 이타주의를 제거하게 되며 이는 계속적으로 반복 가능하다.

 

2. 심리학적 이기주의 주장

첫째, 인간은 언제나 스스로가 가장 원하는 행동을 한다.

여기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알찬 방학을 보내려는 두 학생이 있다. 철수는 이른바 ‘스펙’을 쌓기 위해 영어공부를 계획하고 영희는 불우한 이웃을 돕는 대학생 봉사활동 프로그램에 지원을 하였다. 아마도 철수는 취업대란 속에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를 바라고 궁극적으로는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려는 것이며, 이는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반면 영희는 성인으로써 자기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봉사하며 그 속에서 인생의 가치를 찾고자 하는 것으로, 이는 이타적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두 학생은 모두 자신이 계획한 대로 최선을 다하여 실천에 옮겼다. 우리는 조금 극단적으로 철수는 이기적인 사람이며 영희는 비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심리학적 이기주의자에 따르면 우리는 두 경우 모두 그 행동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가정 하에서 두 사람은 모두 단순히 그 자신이 가장 원하는 일을 하고 있을 따름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영희가 어려운 사람을 돕는 봉사활동을 한 것은 오직 그녀 자신이 자기개발보다는 봉사활동을 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그녀의 행동은 스스로가 가장 하고 싶어 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자신의 욕구에의 지시를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행동을 비이기적인 행동이라 할 수 없다. 나아가서 어떠한 이타주의적 행동이라도 스스로 원하는 것을 한 것이므로 언제나 심리학적 이기주의는 옳은 것이다.

 

이제 위의 논증에 대한 반론을 살펴 보겠다.

심리학적 이기주의에 대한 S. Butler의 고전적인 비판을 통해 보면,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의 행동뿐 아니라 그것과 동열에 심미적 욕구라든가, 정의에 대한 욕구와 더불어 타인의 행불행에 대한 이타적 관심도 일차적으로 가졌으며, 특히 性的욕구라는 일차적 욕망은 이기주의가 생각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배반하기도 한다. 자기 자신에게 최대의 善이 아닌 것을 요구하며 그것에 만족하기도 한다고 했다. 즉 위의 논증은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나, 자신이 원하는 것 이외의 어떤 행동도 자발적으로 하지 못한다는 것은 잘못된 전제이다.

우리는 조금만 생각해보면 금방 위 주장에 대한 예외적인 사례를 떠올릴 수 있다. 한 가지는 시험기간에 시험공부를 하는 학생을 들 수 있다. 그 학생은 공부를 하기 보다는 놀기를 원하지만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서 공부를 한다. 그런데 이런 예는 위 논증이 증명하려는 것과 일치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위 논증에 따라서 그 학생은 단지 공부하기를 원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예를 더 살펴보겠다. 이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를 원하기 때문도 아니고, 그것들이 우리가 성취하기를 원하는 어떤 목적에 이르는 수단이기 때문도 아니며, 우리가 해야 한다고 느끼기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그런 행동에 관한 예이다. 어떤 사람이 자신이 그렇게 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어떤 행동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런 경우에, 그 사람은 결국 스스로가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경우도 그 사람은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한 것이 된다. 그러나 이 논증은 잘못된 것이다. 만일 내가 어떤 일을 하기로 약속한 후에 그것을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내 약속을 지키기를 원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거짓이다. 이런 경우 우리는 분명하게 갈등을 겪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한다고 느낀 것을 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러한 갈등은 우리의 욕구와 의무감이 언제나 일치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만약 우리의 욕구와 의무감이 언제나 일치한다면 보다 즐거운 삶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 우리는 항상 욕구와 의무의 갈등 사이에서 방황하며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즉 시험을 앞둔 학생은 놀기를 원하고 있음에도 시험공부를 하는 것이며 만일 그 학생이 하고 싶은 한다면, 공부를 그만두고 놀기를 시작했을 것이다.

둘, 이기적인 것과 비이기적인 것을 결정하는 것은 욕망이 아니라 욕망의 대상이다.

만일 모든 자발적인 행동은 욕구에 의해 동기가 주어진다는 위의 논증이 옳은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나 이 점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영희가 이기적으로 혹은 자기 이익을 위한 동기에서 행동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만약 영희가 자기 개발을 포기하고서라도 불우한 이웃을 돕기 위해 봉사활동을 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바로 영희가 비이기적인 사람이 되게 한다. 즉 자기 자신의 약간의 희생을 감수할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돕기를 원하는 것을 빼놓는다면 세상에 비이기적이라 부를 수 있는 행위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즉 그것이 이기적이냐 아니냐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욕망의 대상이 무엇인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단순히 자신의 욕망에 따라 행동하고 있다는 그 사실이 그 사람이 이기적으로 행동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스스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오직 내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는 어떤 관심도 가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기적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을 원하고 있고, 내가 바로 그 욕구에 따라 행동한다면, 그때의 나의 행동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논증은 모든 면에서 그릇된 것이다. 그 전제가 참이 아니며, 비록 논증 자체가 참이라고 하더라도 그 결론이 그것들로부터 따라 나오지는 못한다.

이제 심리학적 이기주의의 두 번째 주장을 살펴보겠다.

 

둘째, 비이기적 행동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만족감을 느끼게 한다.

두 번째 논증은 소위 비이기적 행동이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 속에 일종의 자기 만족감을 일으킨다는 사실에 호소하고 있다. 홉스의 주장을 살펴보자. 홉스는 “인간의 본성”이라는 논문에서 자비심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인간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인간이 자신의 욕망을 성취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욕망 안에서 다른 사람을 도울 수도 있음을 발견하는 것 이상으로 인간에 대한 논증을 할 수 는 없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자비심이 존재하는 바로 그 개념이라는 것이다.” 즉 홉스에 따르면 자비심이란, 인간이 타인을 도움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고 우월함을 과시하는 것에 불과하다. 설사 자비를 베푼 자신이 이러한 사실을 믿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스스로에게 즐거움을 주는 자의적인 해석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기들을 판단하는 최선의 심판관이 될 수 없다. 결국 홉스에 따르면 자비심은 인간이 스스로 우쭐해 하는 마음인 것이다. 이처럼 홉스는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고 싶어 하는 것에 대한 피상적이고 아부적인 설명을 피하고 현실적인 설명을 하고자 했다. 즉 비이기적 행동에 대해 그것은 그 사람에게 깨끗한 양심을 준다거나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들이 이 논증을 뒷받침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만족감은 인간이 원하고 추구하는 매우 만족스러운 의식 상태이다. 따라서 비이기적인 행동들은 매우 피상적인 분석에서만 비이기적인 것이며 좀 더 깊이 분석해본다면 인간이 비이기적 행동을 하는 것은 자기 만족감과 같은 만족스러운 의식 상태를 추구하는 행위인 것이다. 영희는 비록 자기 개발은 포기 했지만 불우한 사람들을 도왔기 때문에 스스로 매우 만족스러움을 느꼈을 것이다. 만일 영희가 그저 도서관에 틀어 박혀서 공부만 했다면 그녀는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것이 그녀의 행동의 핵심이다.

 

이제 반론을 살펴보겠다.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은 사실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얻는 수단일 뿐이라는 심리적 이기주의의 반론에 대해서 Butler는 다음과 같이 반박한다. 즉 그에 따르면 이타적 행동으로 우리가 만족을 얻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행동으로 얻게 될 만족 때문에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우리가 이타적 행동을 원했기 때문에 만족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위 논증에 동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자신을 희생 하면서까지 타인을 도우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즉 우리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데에서 만족을 얻는다는 그 이유가 바로 그 사람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기적인 사람은 그렇지 않은 데 반해 비이기적인 사람을 다른 사람을 돕는 것에서 만족을 이끌어 내는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니겠는가? 결국 영희가 이기적인 것은 타인을 돕는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만족을 얻기 때문이라는 것은 궤변에 불과한 것이다. 나아가 영희가 봉사활동을 함으로써 만족을 얻게 되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즉 영희는 타인의 처지에 대해 마음을 쓰는 그런 종류의 사람인 것이다. 만일 영희가 이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녀는 봉사활동을 하는 내내 어떤 특별한 만족감을 느낄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것은 비이성의 징표이며 이기성의 징표가 아니다.

이 사례를 통해 욕망의 본질과 그 대상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만일 우리가 어떤 목적을 성취하는 데 적극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우리는 그것을 얻는 데에서 만족을 얻어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태도의 대상은 그 목적의 성취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그 속에서 어떤 만족을 발견할 수 있기 전에 그 목적을 달성하기를 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우리는 먼저 어떤 만족스러운 의식을 욕구하고, 그러고 나서 그것을 얻기 위한 수단을 생각해 내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많은 종류의 목적-좋은 성적, 취업-등을 원하고 있으며, 우리가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을 얻으면 만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복을 원한다면, 그는 그들을 도와주는데서 만족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좋은 감정이 그의 욕구의 대상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그가 얻고자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그 사람이 이런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건 이기적인 것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지금까지 심리학적 이기주의를 주장하는 두 가지 논증을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심리학적 이기주의가 참임을 주장하는 한 가지 사례를 들어 보겠다.

 

셋째, 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

19세기의 한 신문에 실려있는 아브라함 링컨의 이야기를 보겠다.

링컨은 언젠가 어느 낡은 만원 여행 마차에서 한 동료 승객에게 모든 사람이 선한 행동을 하는 것이 사실은 이기적인 동기에서 촉발된다고 말했다. 그들이 진흙 구덩이 위에 세워진 나무 다리를 통과하고 있을 때 동료승객은 그 입장에 대해 반대하고 있었다. 다리를 건넜을 때, 그들은 한 마리의 반야생 어미 돼지가 새끼들이 진흙구덩이 밑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위험에 처하여 무섭게 소리지르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였다. 낡은 마차가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을 때, 링컨은 “운전사! 잠깐만 마차를 멈춰 주시오!”라고 소리질렀다. 그가 새끼 돼지들을 구출하고 돌아왔울 때, 그의 동료는 “자 보시오, 아브라함. 이 조그마한 에피소드에 이기심이 끼어들 여기가 어디 있소?”라고 말했다. “왜요! 아 그래요, 에드. 이것이 이기주의의 본질이라는 것이요. 내가 만약 돼지를 그냥 두었다면, 나는 온종일 마음의 평화를 갖지 못했을 것이오. 나는 나의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해 그 일을 한 것이오. 알겠소?”

 

반론을 살펴 보겠다. 포퍼에 의하면, 귀납의 원리로서는 과학적 진리의 확실성을 담보 할 수 없으며 반증에 의해 과학적 진리의 확실성을 높일 수 있다. 즉 확실성에 대한 이론 법칙, 즉 반증 불가능한 진술, 반증 가능성이 높은 진술, 반증을 이겨내는 진술 중에서 반증 가능성이 높은 진술, 다시 말해 뒤집힐 가능성이 있는 진술이 가장 가치 있는 진술인 것이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에서 링컨은 심리학적 이기주의가 참임을 주장 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마치 반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리고 이것이 심리학적 이기주의의 가장 큰 결점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사례를 살펴보겠다.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 및 법학 교수인 로젠햄 박사가 이끈 조사단이 여러 정신 병원에 환자로 입원하는 일을 허락받았다. 그 병원의 의료진은 그들에게 어떤 특별한 점이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고, 조사단원은 단순한 환자들로만 인식 되었다. 조사단원의 목적은 자기들이 어떻게 취급받는 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조사단원은 어떤 의미로든지 완전하게 "정상적"이었으나, 그들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들이 정상적으로 행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곧 그들의 모든 행동이 어떤 종류의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는 징조라고 해석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느 인터뷰에서 한 "환자"는, 비록 그가 어린아이였을 때에는 어머니에게 더 가까웠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아버지에게 더욱 애착이 갔다는-완전히 정상적인 사태의 변화-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유년 시절의 불안정한 관계"의 보기로 취급되었다. 즉 심리학적 이기주의는 “이기적”이라는 말을 오용함으로써 반론의 여지가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가령 우리는 정말로 성인과 같은 마음씨를 가진 사람이 오직 이타적인 동기만을 가지고 이타적인 행위를 한 반례를 통하여 심리학적 이기주의를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심리학적 이기주의는 “이기적”이라는 말을 이런 경우를 포함하는 식으로 해석함으로써 반론의 여지를 없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심리학적 이기주의의 주장은 아무런 내용도 없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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