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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철학

Ἠθικὰ Νικομάχεια 제 1권

작성자정호진|작성시간12.05.24|조회수141 목록 댓글 0

『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1권

201111897

철학과 정호진

 

요약

 

『니코마코스 윤리학』1권에서는 최고 좋음을 발견하고 분석하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왔다. 1권은 최고 좋음을 정의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1권 1장은 “모든 기예와 탐구, 또한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 왔다.”라는 짧은 구절에 대한 논의를 하는 부분인데, 이 책의 필자는 이 짧은 구절이 두 가지 개념적인 논점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하나는 행위가 되는 어떤 것은, 행위자의 평가에 따르면, 좋거나 가치 있거나 보람이 되는 어떤 목표를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최고 좋음이 모든 인간 행동의 목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2장에서 최고 좋음을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서 다른 모든 것들을 추구하는 좋음 또는 목표라고 정의한다. 이 책의 필자는 2장에 나오는 최고 좋음에 관한 논증을 통해서 최고 좋음을 정치 활동의 목적과 동일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3장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탐구에서 너무 많은 정확성을 기대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는 부분이다. 이 책은 윤리학에 관한 책인데, 윤리학은 어느 정도 실천적인 것을 다룬다. 그런데 실천적 학문은 구체적인 사실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부정확하게 되므로 너무 많은 정확성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4장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최고 좋음에 관한 탐구를 시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 좋음을 ‘에우다이모니아(eudaimonia)‘라고 한다. 통상 이것을 ’행복이라고 번역하는데, 필자는 ‘행복’과 ‘에우다이모니아’는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첫 번째로, 행복은 심리적인 상태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에우다이모니아는 활동을 지칭한다. 두 번째로, 행복은 착각할 수 없지만 에우다이모니아는 착각할 수 있다. 세 번째로, 행복은 일시적인 것이지만 에우다이모니아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 요약하자면, 에우다이모니아는 ‘잘 사는 것’과 ‘잘 행동하는 것’과 동의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최고 좋음의 명칭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일치하고는 있지만, 그 실체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견 차이들이 존재한다. 5장에서는 최고 좋음에 관한 대중적 견해가 나온다. 대중들은 최고 좋음을 즐거움, 명예 또는 존경심, 돈 벌기의 ‘삶들’과 동일시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주장을 그러한 것들이 그 자체로 우리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며 거부해 버린다. 6장에서는 최고 좋음에 관한 학술적 견해, 특히 플라톤의 ‘좋음의 형상’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플라톤은 좋음의 형상이 존재하며 모든 좋은 것들은 그 좋음의 형상과 고유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플라톤의 주장도 좋음의 형상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거부해버린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대중적인 견해 그리고 플라톤의 견해를 모두 거부해버린 후에 7장에서 최고 좋음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가 ‘가장 완전한 목적’이고 ‘자족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완전한 목적이란 항상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며 결코 다른 어떤 것을 위해서 추구되지 않는 것을 말하며 자족적이란 말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종류의 삶을 ‘선택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아무것도 부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어떤 목적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능’을 검토함으로써 에우다이모니아의 본성을 결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능’이란 어떤 사물의 고유한 행위, 인간에게는 ‘삶의 특정 방식’을 의미한다.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기능이 영혼의 이성을 가진 부분의 활동이라고 말을 한다. 인간의 영혼에는 감정, 욕구, 사고라는 세 부분이 있는데 감정과 욕구를 담당하는 부분은 사고를 담당하는 부분인 이성에 복종한다. 이성은 다른 존재와 공유하지 않는 부분이므로 이성이 인간의 기능이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이성을 가진 부분을 탁월하게 활용하고 있다면 에우다이몬적인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전히 이 삶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가 영위할 수 있는 최상의 삶에 대해서 생각할 때 머리에 떠올리는 그런 삶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8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다이모니아에 관한 설명이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일상적인 직관적 통찰과 일치해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후에 에우다이몬적인 삶들의 원인을 고찰하게 된다. 9장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배움과 습관을 통해서 에우다이몬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우연 역시 몇 가지 역할을 감당한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으나 10장-11장에서 에우다이모니아를 결정하지는 못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에우다이모니아는 삶 전체를 통해 안정되는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12장에서 에우다이모니아는 칭찬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칭찬을 하기 위해서는 비교대상이 필요한데 에우다이모니아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것이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그는 에우다이모니아가 칭찬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을 맺고 있다. 마지막 13장은 2권에서부터 설명하게 될 탁월성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인, 영혼의 부분들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영혼은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구분될 수 있다. 비이성적인 부분은 다시 영양이나 성장을 담당하는 부분과 ‘이성에 참여하는’ 부분으로 세분화된다. ‘이성에 참여하는’ 그리고 ‘이성에 귀 기울이는’ 부분은 감정들과 욕구들을 가진 부분이다. 품성의 탁월성들은 영혼의 이 부분에 속한다. 품성의 탁월성들에 관련된 사유의 탁월성들은 이성을 가진 영혼의 부분에 속한다. ‘이성에 귀 기울인다’는 말은 ‘이성에 귀 기울이는’ 부분인 감정들과 욕구들이 제멋대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식과 그 상황들의 여러 측면들의 가치에 관한 우리의 판단에 따라 일어난다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감정들과 욕구들은 이성의 활동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의견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의 목적은 행복이다.’라는 말은 사람들 사이에서 잘 알려져 있는 말이다. 우리는 현재를 위해서이든 미래를 위해서이든 행복을 위해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번에 1권을 읽고 에우다이모니아와 행복이라는 개념이 다르다는 말에서 약간 혼동이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최고 좋음이 ‘에우다이모니아’라고 하였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위의 문구는 잘못된 문구인가? 4장에 따르면 에우다이모니아는 삶 전체적으로 잘 살거나 잘 행동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전체적으로 잘 살거나 잘 행동하면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는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5장과 8장에서 즐거움은 에우다이몬적인 삶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육체적인 만족만을 즐거움이라고 보고 있지만 음악을 듣고 즐겁다는 느낌을 받았다면 어떤가? 육체적인 만족인가? 아니면 내가 ‘즐겁다’라는 말을 잘못 사용하고 있는 것인가? 일반적으로 ‘즐겁다’라고 하면 행복한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이라는 개념을 ‘에우다이모니아’와 대비시켜 이해가 잘 안 된다. 그리고 플라톤도 그렇고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고 구분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을 이성적인 부분과 비이성적인 부분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 비이성적인 부분들 중 감정들과 욕구들을 가지는 부분이 이성적인 부분에 복종한다고 말한다. 1권에서는 햄버거에 관한 예를 들었는데, 그렇다고 한다면 항상 어떤 감정을 가졌을 때 왜 그런 감정을 가졌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면 설명할 수 없으면 그 감정을 잘못된 것인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 그런데 왜 사랑하는지 그 이유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면 나는 그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할 수 없다는 말인가? 누군가에게 감동을 받았을 때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생각 때문에 감동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성에 분리되어서 자체적으로 감정이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감정을 가진 뒤에 생각을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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