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 제 3권
서론
품성의 탁월성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으로서 이를 설명한 바가 있다. 지복을 위해 모든 감정적이고 일시적인 쾌락을 잠재울수 있는 품성의 일관성 또한 에우다이몬적 인간의 전형으로 제시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행위의 합목적성과 자발성이라는 외적 요소를 통해 한 인간을 평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3권은 이러한 행위들이 어떻게 발현되는지에 대한 ‘의사결정’의 본성과 역할에 대해 다룬다. 그리고 그 양태는 자발과 비자발, 기꺼운 마음과 꺼리는 마음으로 나뉘어 곧 책임의 정체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게 된다.
3권 1장
1. 자발성과/비자발성의 논의가 중요한 이유는 올바른 행위에 대한 사회적 평가는 오직 자발적 행위에 대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행위에 있어서 자발성/비자발성을 깔끔하게 나누어놓는 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어떠한 행위에 대한 행위주체가 갖는 책임의 문제, 곧 외부의 영향이 배제된 상태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특정 행위의 시작이 외부적 조건에 의한 것이라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소화와 같은 신체적 작용이나 위협에 의한 강제 같은 상황의 책임은 외부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선택’이 가능한 생각이나 의식의 상태를 판단의 기준으로 여겼다. 불분명한 혼합된 상태에서 위협적인 강제의 문제는 생각과 욕구(생존욕구)라는 내적인 요인에서는 상대적으로 분명하지만 그 결정적인 주도권이 외부에 있다고 말한다면 그 의미가 더욱 불분명해진다.
비자발적인 행위에 대한 논의를 보다 하자면 하나는 보다 나은 즐거움에 의한 비자발성 주장은 모든 여타 행위들의 중요성들과 칭찬의 문제를 무의미하게 만들기 때문에 인정될 수 없다. 또한 무지의 문제에 있어서 설사 모르고 행한 실책이라도 않 후에 도덕적 책임감과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한 의식적 주도권/책임감이 수반된 행위를 우리는 도덕적 판단을 위한 행위 기준으로 제시할 수 있다.
3권 2장
2. 그렇다면 이 책임여부를 분별하게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어윈은 행위자의 합리적 선택능력에 의한 보충의 필요를 말한다. 합리적 선택은 탁월성 안에서 고유하며 동시에 행위보다는 성격을 보다 잘 분간해 내는 것으로 보인다. 탁월성이 합리적 선택을 도출하는 품성상태로 정의되며 동시에 합리적 선택의 영향이 행동보다는 품성에 있음을 짚어본다면 합리적 선택은 행위의 결과에 대한 것도 욕구도, 또한 소망에 대한 것도 아님을 말한다. 인간의 행위에 대해 합리적인 것은 타의나 결과에 개연치 않는 자기 자신의 주체성과 일시적이거나 비합목적성을 배제한 사려를 말하는 듯하다.
3권 3장
3. 심사숙고에 대해 말해보자, 아까 합리적 선택이 결과의 효용 내지 행위의 성공 여부와는 관계없는 품성의 영역임을 정의한바 있다. 그리고 이 합리적 선택은 동시에 심사숙고된 것이라 말하면서 2장을 끝마쳤다. 심사숙고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 우리의 행위에 의해 성취 가능한 것을 숙고함을 말한다. 그러나 이는 모든 것을 숙고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독립된 절차가 존재하지 않는 행동, 또한 결과가 불분명한 행위, 또한 올바른 방식이 확립되지 않는 불확실성의 상황속에서 우리는 심사숙고하게 된다. 즉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황 속에서 요구되는 과정적이고 도구적인 것들을 우리는 심사숙고 속에 상기하고 있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숙고한다.
또한 심사숙고가 합리적 선택에 필수적이며 또한 이 합리적 선택이 탁월성이라는 고귀한 품성에 연결되어 있음을 상기한다면, 이 심사숙고의 주체는 어떤 목적에 다다르기 위한 방법으로서 고귀함을 우선적으로 순위에 두게 될 것이다. 다시 돌아가서 합리적 선택은 특별한 목적을 위한 결단이고 의도이며,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한 숙고적 욕구이다.
그렇다면 이 심사숙고에 대한 존재여부는 어떻게 가려지는 것인가? 충분히 숙고가능한 시간이 있다고 할 때인가? 아니면 집중가능하고 일관성이 있는 사유가 가능하다고 여겨지는 외부적 조건에 의해서인가? 책에서는 급하게 이루어진 행동이 심사숙고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만약 위기에 있는 아이를 구하는 일처럼 급박한 상황속에서 행위자는 아이들을 구하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가장 적합한 방식을 취했다. 이 문제에 대해 다른 사람들은 좀더 쉽고 고귀한 방법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다. 이 심사숙고에 대해 이 행위자는 충분히 설명하고 해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그리고 이 심사숙고는 고귀한 목적을 갖추고 있었다.
3권 4장
4. 계속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과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전까지가 이 목적을 이뤄가는 과정에 대해서 말했다면 이번에는 목적을 대하는 사람의 태도, 곧 소망에 대해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망의 속성이 좋은 것을 지향함이라고 정의하면서 모든 사람은 나쁜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반대급부를 근거로 내놓는다. 그렇다면 사람이 좋은 것으로 여겨서 지향하는 소망은 다 옳다고 봐야하는가? 여기서 옳고 그름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각 사람은 이미 자신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고 있다. 이미 서로 반대되는 것도 각기 사람들에게는 좋은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에 대해 “소망하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각 사람들에게 좋은 것은 외견적인 좋음”이라는 주장을 했다. 즉 우리 모두는 좋은 것을 소망하지만 잘못해서 실제적으로는 나쁜 것을 소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3권 5장
5. 우리는 탁월한 품성에 대해서는 해당 주체의 탁월성으로서 이와 결부된 행위와 의도를 칭송하곤 한다. 그렇다면 결함이 있는 품성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우리는 품성과 탁월성, 이에 관련된 책임에 대해 인간의 자유의지를 들어 설명해야 한다. 결국 이 품성문제, 행위문제 전반은 행위 주체인 우리에게 달려있는 것이다. 품성은 행위의 축적들이 이뤄내는 습관과도 같다. 우리는 특정한 품성 상태에 이르기까지 그것을 선택할만한 자유의 능력과 의지가 충분히 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이 품성이 빚어낸 행위를 기준으로 해서 이 품성은 우리에게 고착화되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명하는 듯하다. 이미 고착된 품성이라는 것은 되돌릴 수 없는 상태를 전제해야한다. 그렇다면 자유의지가 영향을 미칠수 없는 사건의 발생 및 고착화로 이 문제가 넘어갔음을 의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의견은 결국 사람의 품성을 전환불가능한 것으로 여긴다. 한가지 추측가능한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행위의 축적을 통한 품성화 또한 이러한 논리 안에서는 설득력을 잃는 것이다. 다르게 생각할 수 있음이라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다시 이 책임을 해당 주체에게 물을 수 있는 논리적 개연성 또한 떨어지게 된다. 우리는 행위와 사유의 자유라는 개인의 가능성을 통해 책임을 물어야 한다.
3권 6-9장
6-9. 중용의 품성에 대해
-용기를 이야기하다
제목을 붙임으로 이 장에 대한 요약을 시작하려 한다. 이전에 논의된 품성의 성격은 감정, 사유와 욕구의 경향이다. 곧 어떤 사람이 올바른 가치를 정하고 그에 맞춰 삶과 적당하게 일치시킨다면 그는 탁월성을 담지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탁월성은 과연 최고의 목적이 될수 있는가? 용기를 들어 설명하자면 용기 자체는 두가지 감정의 중용에 해당하는 품성이다. 두려워할 것에 대해서만 두려워하고 대담할 상황에서만 대담할 줄아는 적합성에 대한 분별과 지혜가 용기의 중용이 말하고자 하는 요체이다. 우리는 만약 감정의 상태나 행위 자체를 통해서만 중용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상황과 그것에 대처하는 사람의 능력과 역량을 살펴보려하는 본질적인 핵심을 놓치게 된다. 감정상태나 행위는 유사한 상황이나 가설된 상황을 ‘인지’함 안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것처럼 용기는 고귀함을 위해서 존재한다. 즉 탁월성 자체만이 목적이 될 수 없다. 두려움을 통제하는 목적이 곧 용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용기는 고귀함을 위해서 두려움을 통제한다.
3권 10-12장
- 절제를 이야기하다
인간에게 동물적인 육체적 즐거움이 있다고 해서 이것의 과도한 실현을 인간됨의 실제로 여길 이유는 없다. 인간의 목적은 에우다모니아, 다시 말해 그것 자체로 실현 가치가 있는 고귀함이다. 우리의 상태와 관계없이 영원히 지향해야할 무엇. 바로 이 지복에 대한 접근을 제한하는 것이 우리의 감각과 지성을 흐리는 삿된 이익임을 앞에서 설명한바 있다. 절제는 이 삿된 이익과 감각들의 실체에 대한 탁월한 품성, 중용이라 할 수 있다. 절제는 올바른 방식으로 올바른 이유를 근거해서 즐거움을 취하는 것이다. 즉 제대로 된 인간됨 아래서 즐거움을 성취하는 것. 인간적 차원에서의 즐거움이 실현되는 것이 절제의 목적이다. 그에 따르면 절제는 오직 육체적인 즐거움에 향유에 관련된 것이다. 동물과 공유하는 쾌락들, 그것의 정도를 섬세한 고찰없이 적용한다면 동물과의 경계가 혼란스러워지는 것들이다. 절제는 다시 말해 인간의 비이성적인 부분들의 탁월성이다. 육체적인 즐거움들은 그 자체로서 선택될 수 있는 지복들과는 구별되어 있다. 즉 이성과 같이 인간됨을 실현하는 요소에 대해서 독립적으로 작용하는 접촉과 미각과 같은 것들은 절제를 요구받는다. 만약 이런 절제, 곧 이성과 함께하는 작용이 없을 경우. 인간은 무절제라는 저급한 경향성에 빠진다. 필요이상의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여 인생과 정신을 그것에 지배당하게 된다. 즉 목적이 없는 상태에 빠진다. 다른 한편은 무감각/무기력에 해당할 것이다. 적당한 육체적 자극이 없는 상태는 마땅히 삶에서 추구되어야할 즐거움과 목적을 상실한 상태이다.
내 생각
아리스토텔레스, 행복의 어려움
- 니코마코스 윤리학 3권에 대한 단상
- 이전, 기독교 서적인 릭 워렌 목사의 목적이 이끄는 삶을 읽은 적이 있었다. 목적이라. 그 단어 안에서 느껴지는 조직과 경영 논리의 뉘앙스에 쉽게 책을 덮은 기억이 있다.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거기엔 인간 삶의 질서와 그것의 구체적 실현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내리려한 의도가 있었음을 생각한다. 행복하기는 어렵다. 특히 우리의 말초적인 구매 욕구를 선정적인 자극을 통해 사들이려 하는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는 더더욱 그러하다. 모든 자극적인 선전선동, 패션과 사상을 빼놓고 나면 우리가 누구인지조차 모르는 사회 속에서 자신의 참된 바램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자극의 과잉, 자극이 곧 인간인 사회인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극과 타성에 묻혀 살며, 심지어 그러한 삶을 적당한 논리로 합리화시키려는 몰이성에 대해 논리적 차단을 시도한다. 실패하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마땅히 인간에게 주어진 탁월성과 고귀함을 인식하고 그를 위해 살아가라. 자신의 영혼을 말초적인 자극이나 저열함이 아닌 고귀한 인간의 정신으로 채워 넣어라. 이성을 통해 끊임없는 지복으로 삶을 인도해가라. 인간의 정신은 합리화의 도구가 아닌 인생이라는 과정 속에서 자신을 실현해가는 역량으로서 자리해야 한다. ‘좋음’을 인식하고 지향하는 인간의 정신은 이미 수많은 ‘보다 못한 것’을 경계하고자 하는 탁월성의 가능성을 담지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 인간인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