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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고대철학

니코마코스 인용구 1~3권 (조광현)

작성자사막의 여우|작성시간09.05.20|조회수41 목록 댓글 0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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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선이요, 또 어떤 것은 이런 것들 때문에 선이다.

→ 그 자체가 선인 것은 무엇이 있을까? 과연 인간은 그런 자체의 선을 찾을 수 있을까? 직접 성취할 수 있을까? 그런 궁금증이 일면서 니코마코스 인용구들에 빠져 들었다.

2. 마치 흰 빛깔의 정의가 눈의 경우에나 흰 꽃의 경우에나 똑같듯이,

→ 사실 그 꽃이 흰색인지 다른 색인지 정확히 ‘참’인 측면에서는 확인하기 어렵다. 인간의 가시적인 눈을 통해 우리가 그렇게 받아들일 뿐이다. 눈은 정말로 흰색일 수 있으나, 흰 꽃은 원래 다른 색인데 빛의 반사나, 다른 작용을 통해 흰색으로 보여질 수가 있다. 이때, 정의는 똑같다고 말 할 수 있을까? 세상은 항상 상대적 기준이나 정의도 존재 할 두 있다.

3. 그렇다면 모든 선은, 한 선으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에 혹은 한 선에 기여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 하나인가?

→내 생각에 선은 하나이기 보단 여러 가지라고 생각한다. 다만 공통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 선으로부터 나올 수는 있으나, 모두 한 곳으로 모아지라는 법은 없다고 생각한다.

4. 그런데 우리가 지금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선이다.

→ 인간이 도달 할 수 있는 선은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선과는 완전 다를 것이다. 적어도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선은 현실성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더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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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또 직조공이나 목수가 이 선 자체를 앎으로써 얼마나 자신의 기술에 도움을 받으며 혹은 이데아를 본 사람이 그로써 얼마나 더 훌륭한 의사나 장군이 될 수 있겠는가?

→ 어느정도 한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선의 이데아가 완전무결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 인간이 받아들이는 것이기에 그 선은 이데아의 선과 같이 인간에 의해 성취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6.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일에 대하여 하나의 목적이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행동하여 달성해야 할 선이다.

→하나의 공동 목표를 선으로 하는 건 지나침이 없지 않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떤 목적을 설정하였을 때, 그것이 꼭 선이 되리라고는 볼 수 없다. 그들에게는 선이겠지만, 제 3자에게는 악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 이는 선의 개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7. 또 언제나 그 자체에 있어서 바래지고 다른 어떤 것 때문에 바래지는 일이 절대로 없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궁극적인 것이라고 본다.

→과연 자조적 선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는 절대적 선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내가 보기엔 그말이 그말 같다. 인간은 관념상으로 절대적인 선이 궁극적이라 생각한다.

8. 그러나 최고의 선은 분명히 궁극적인 목적이다.

→ 아무리 악한 사람도 결국은 선 앞에서 무릎을 꿇는 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래서 여기서는 이 말에 동의하고 싶다. 즉,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선을 이루는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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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행복이 초고선이라 함은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 정말..이 말은 다섯 살 꼬마에도 알 것 같다.

10. 우리는 행복이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것이요, 다른 여러 가지 선 가운데의 한 선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 행복은 어떻게 정의하는가가 문제가 되겠지만, 행복 자체로 봤을 땐 행복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11. 행복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인 어떤 것이요, 또 행동의 목적이다.

→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듯이 인간은 행복을 먹고 살아가고 있으며,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12. 더욱 요망되는 일은 그것이 무엇임을 좀 더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이다.

→내가 고대 철학자에게 하고픈 말이다. 모다 알기 쉽게 사유할 순 없었을까? 철학적 용어들이 일상적인 용어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나..이거 뭐..지금은 웬만한 학문적 용어보다 몇 배 더 어려우니..아리스토텔레스여 왜 좀 더 명료하게 설명할 순 없었나요..??

13. 인간의 선이란 결국 덕에 일치하는 정신적 활동이라 하겠다.

→ 그럼 덕은 무엇일까? 현재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그런 덕을 의미할까? 덕을 어떻게 설명하는냐에 따라 선도 결국 바뀔 것이다.

14. 사실은 무엇보다도 앞서는 것, 즉 제 1의 원리이다.

→ 이 사실이 우리가 아는 사실(감각체를 통한)인지 아님, 플라톤이 말하는 ‘참’ 인지는 모르겠다. 아니, 확실히 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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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우리는 정신과 관계되는 선들을 가장 뛰어나고 참된 선이라고 보며, 또 정신의 능동과 활동을 정신에 관계되는 선으로 본다.

→ 선은 다 정신과 관련 있지 않을까? 육체적인 선이 존재할까? 육체적인 수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결국 선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모두 정신적이 측면이다.

16. 우리의 정의와 잘 어울리는 또 하나의 견해는 행복한 사람이란 잘 살며 잘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이다.

→ 잘 산다는 의미가 막상 경제적인 부를 뜻하는 건지 궁금하다. 만약 경제적인 부(富)라면, 그 사람이 행복하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을까? 행복을 정하는 기준은 상대적이라고 보며, 어떤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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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행복은 세상에서 가장 좋고 가장 고귀하고 가장 즐거운 것이요,

→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며, 궁극적인 목표도 결국 행복이라고 본다. 인간은 스스로의 삶을 평가할 때도 행복을 그 기준으로 삼는다. 나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하는 이런 행복을 누려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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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행복은 또한 외부적인 여러 가지 선을 필요로 한다.

→ 즉 행복의 목적으로 가는데는 인간에겐 여러 가지 수단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경제적 상황이나 정치적인 위치 등 정신 자체로써 모든 것이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그리고 인위적인 것들을 통해 달성되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자족적 행복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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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런 까닭에 또한 소년도 행복하다 할 수 없다. 소년은 그 연령 때문에 아직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없으니 말이다.

→ 행복의 기준에 연령이 포함될까? 단순히 정치학을 모르는 소년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어떤 일을 성취했을 때 나오는 즐거움이나 쾌락도 그 소년에게는 행복이라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을 제기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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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왜냐하면 행복한 사람은 가증하고 비열한 행위를 절대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 행복한 상태를 유지하려고 하거나, 쟁취하기 위한 행위에 있어서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즉, 자신의 지금까지 누려온 행복을 유지하고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가 세상에는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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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우리가 고찰해야 할 덕은 ‘인간적인 덕’이다. 우리가 찾고 있던 선도 인간적인 선이요, 우리가 찾고 있던 행복도 인간적인 행복이었으니 말이다. ‘인간적인 덕’이란 말로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신체의 덕이 아니라 정신의 덕이다.

→ ‘인간적인’ 덕과 선을 추구한다는 말이 인상 깊다. 플라톤을 보면 항상 인간의 입장이 아니라 항상 관념의 세계에서 뭔가 우리와 동 떨어진 것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인용구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더욱더 나에게 있어 정 깊게 다가서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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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칭찬받을 만한 정신 상태를 우리는 덕이라 부른다.

→ 동양에서 말하는 덕(德)과 서양에서 말하는 덕은 뭔가 조금의 차이가 있는 듯하다.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서양에서는 덕의 개념을 좀 더 쉽게 생각한 반면, 동양에서는 어렵게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냥 내 생각에 그런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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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자기가 당한 처지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에 따라, 절제 있고 온화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혹은 방종하고 성비가 급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 우리 현실에서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 아닐까? 그렇다면 도덕적인 덕은 인간이 어떤 행동에 대한 습관을 갖느냐에 달라 질 수 있다는 말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습관에 따라 달라지는 도덕적인 덕이라..글세..왠지 전에 생각한 덕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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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벌(罰)이란 일종의 치료인데, 치료란 반대되는 것을 통하여 행해지는 것이 그 본성이기 때문이다.

→ 반대되는 것이 치료라면, 왜 벌로써만 치료해야 할까? 다른 치료들을 통하여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치료는 반대되게 행해지는 것이라 정의한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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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덕은 중간을 목표로 삼는 성질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덕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도덕적인 덕이다.

→ 덕을 중간으로 삼는 것이 옳은 것일까? 선한 쪽에 치우치는 것이 더 옳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선함에 가까이 갈수록 덕에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 쉽게 이해되는데,..중간은 너무 애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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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그리고 칭찬받는 것과 성공한다는 것은 둘 다 덕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덕은 일종의 중용이다.

→ 너무나도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서의 중용이다. 하지만, 누구에게 칭찬 받는단 말인가? 어떤 상태를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인가? 모두 상대적인 기준이다. 절대적 기준 없이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은 결국 중간이 없다는 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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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우리는 중간인 사람을 온화한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하니까 중용을 온화라 부르기로 하자.

→ 중간인 사람은 그 상황에 따라 다르다. 정말로 한쪽으로 치우침 없이 양쪽을 다 보고 있으면 중용이고, 온화한 사람이라 할 수 있지만, 이도저도 아닌 중간 인 사람한테는 온화하다는 성품을 붙일 순 없다. 따라서 중용을 온화로 너무 성급하게 소급해서 부르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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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모든 사악한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며 또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 사악함과 악함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즉, 악함은 무지에서 비롯될 수 있으나, 사악함은 악함을 알고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사악함은 알면서도 하는 악한 행동으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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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욕망은 유쾌한 것과 고통스러운 것에 관계하지만, 선택은 이 두 가지 것의 어느 것에도 관계하지 않는다.

→ 그렇다면 선택이란 무엇인지 확실히 정의할 필요가 있다. 유쾌를 통해 행복을 추구했다고 할 때 이는 선택인가? 욕망인가? 선택이라면, 유쾌는 선택의 범주에도 포함된다. 그러나 욕망이라 하면 행복도 욕망에 포함된다. 행복을 추구하는 욕망은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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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낙관적인 사람들도 용감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들은 다만 여러 차례 이긴 일이 있고 또 많은 적을 물리친 일이 있기 때문에만 위험에 처하여 태연하기 때문이다.

→전쟁에서의 용기가 진정한 용기라 했을 때, 이들이 용기를 가질 수 있는 요인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자. 이들이 비관적인 생각을 갖는다고 했을 때, 과연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용기가 생겨났을까? 단순히 경험면에서 나타나는 태연함 일수 있겠으나, 전쟁상에서는 자신의 신념이나 믿음 등으로 태연한 사람들도 많다. 이들은 어떻게 불러야 하나? 낙관적인 생각을 했다고 용감하지 않다고 말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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