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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

나와 너

작성자채수진|작성시간04.06.12|조회수57 목록 댓글 0
 

주제 : 우리는 왜 “나와 그것”이 아닌 “나와 너”가 되어야 하는가.


구성 :


‘인간의 존재라고 하는 것은 나 외에 어떤 대상과의 관계 속에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 말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인격적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비인격적 관계이다.

사람들의 관계는 첫 번째 ‘나와 너’가 되어야하는데, 잘못하면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I and Thou> 냐 <I and It> 이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에서는 내 존재가 인간적으로 살아나고 나와 그것의 관계가 되는 순간 나라는 존재도 비인격화 되어버리고 만다.  대화적 관계. 듣는 관계에 있을 때에 인간 존재가 성립되고, 대상을 수단으로 할 때는, 들을 필요도 없고 듣지도 않는 그런 관계가 되어 인간의 인간됨은 무너진다.



의견 :  


이 세상에 인간이 존재하면서부터 <나>와 <너>라는 두 단어는 가장 먼저 말해졌을지도 모른다. 이 근원적인 말에 대해서 마틴 부버는 감상적인 접근 방식이 아닌 자신의 몸짓으로 글을 써 내려갔다.


그의 글을 이해하려면 경험함으로써 관계와는 멀어진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경험이라는 것은 완전히 새롭고 그 존재에 대한 모든 온전함이 아닌, 자신의 과거 기억과 정보의 재조합일 뿐인 것이다. 그러기에 관계에서 경험을 한다는 것은, 그때의 <너>는 단지 관찰과 이용의 대상일 뿐인 <그것>에 불과하고 <너>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수많은 아저씨, 아주머니들 사이에 우리의 관심은 부모님에게로 쏠린다. 그것은 나와 부모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 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관계는 비록 지금 이 순간에 <나>,<너>라는 말을 쓰는 상황으로 만나지 않더라도 역시 나와 너의 관계이고, 인격적인 관계다. 이런 사랑의 관계에서 우리는 진정한 <나>가 되고 다른 것과 대체할 수 없는 독특한 존재가 된다.

남자친구와 말싸움을 하다가 그에게 “이 세상에 남자가 너 뿐이냐?” 라고 한다면 이것은 살인과 다름없다. 그때, 그 남자친구의 <나>는 사라지고, 다른 사람과 대체될 수 있는 <그것>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전적인 존재이고 싶어 한다. 둘 사이는 사랑으로 충만하길 원하지만 현실은 대개 그런 희망을 배반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낯선 타인이기 십상이며, 사랑은 종종 오인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완전한 관계, 완전한 사랑 따위는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속에서나 나타나는 꿈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러한 ‘나와 너’의 관계에 앞서 몇 가지 의문이 든다. 그가 말한 바에 의하면 인간으로서 ‘그것’을 지양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우리의 관계는  ‘나와 너’보다 ‘나와 그것’의 관계가 더 많은 듯 하다. 공적인 문제를 처리해야하는 사람이나, 법관 같은 경우, 그들이 대하는 사람들을 ‘나와 너’의 인격적 관계로 대하면 그에 따르는 또 다른 피해자나, 도덕적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공적인 관계에서는 ‘나와 그것’의 관계가 더 현명하지 않을까. 그 법관이 ‘나와 너’가 아니라 ‘나와 그것’의 관계로 한 사람을 대했다 해서 그의 인간됨이 무너졌다고 말할 수는 없고, 근본적으로 이 ‘인간됨’의 기준도 모호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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