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4/26 교회창립 53주년 기념 주일예배 설교(Slide#1)
“섬김의 공동체”
빌립보서 2:5-8
오늘 우리는 교회창립 53주년을 기념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또한 여기까지 우리 교회를 인도해 오신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우리 교회에서 몸담고 신앙생활 하면서 언제나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 봉사의 자리를 지켜 오신 모든 성도님에게 이 시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의 헌신과 희생과 수고가 아니었다면 우리 교회가 이렇게 아름답고 건강한 믿음의 공동체로 자라지 못했을 것입니다. (Slide#2)
교회의 교회다움
제가 우리 교회 4대 담임목사로 취임한 것이 2009년 6월, 우리 교회의 창립 36주년을 기념하던 주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열일곱 번째 기념 주일을 맞이한 것입니다. 정말 ‘눈 깜빡할 사이’에 그 세월이 흘러갔습니다. 그해 당회에서 여러분과 함께 우리 교회의 비전을 정했습니다. (Slide#3) 우리 교회의 비전은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목회자로 부름을 받은 후에 계속해서 기도하며 다듬어 오던 비전이었습니다.
여러분, 교회라는 신앙공동체의 생명력이 과연 어디에서 나올까요? 어떤 환경, 어떤 악조건에서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능력, 끝까지 생존하게 하는 능력의 근원이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바로 ‘교회다움’이라고 확신합니다. 교인의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교회 건물이 아무리 커도, 아무리 많은 헌금이 쌓여 있어도 만일 ‘교회다움’을 잃어버린다면 그 교회는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맙니다. 그것이 지난 2천 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해 온 사실입니다. (camera)
따라서 교회는 교회다워야 하고, 목사는 목사다워야 하고, 성도는 성도다워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그 교회는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런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저는 그것이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초대교회 신앙공동체를 세우실 때 품으셨던 하나님의 간절한 기대와 소원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다움’이라는 키워드를 우리 교회의 비전에 담게 되었던 것입니다.
자, 문제는 ‘교회다움’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과연 어떤 교회를 가리켜서 ‘교회다운 교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사람마다 주관적인 생각에 따라서 서로 다른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하여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Slide#4) 하나는 ‘공동체성(共同體性)’이고, 다른 하나는 ‘공교회성(公敎會性)’입니다. 다시 말해서 ‘공동체성’과 ‘공교회성’의 가늠자로 교회다움을 측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성도들 사이에 ‘신앙’과 ‘생활’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가 잘 형성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아무리 수만 명이 모여 함깨 예배한다고 해도 만일 그 안에 공동체의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냥 뿔뿔이 흩어지고 만다면, 엄밀한 의미에서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대형 콘서트에 참석하여 구경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camera)
또한 공동체 관계가 잘 형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만일 다른 교회와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면 그 역시 교회다운 교회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릴 때마다 사도신경을 통해서 ‘우리는 거룩한 공회를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공회’가 바로 ‘공교회’입니다. 비록 교단이 다르고 인종과 피부색이 다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하나라는 고백입니다. (Slide#5)
공동체성의 회복
오늘은 그중에서 ‘공동체성’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건강한 교회, 교회다운 교회는 공동체성의 회복에 달려있습니다. 이 말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침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가 은혜롭고, 교회학교나 교육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고, 너른 주차장과 인프라가 완벽하게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만일 그 속에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면 그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게 문제입니다. 공동체성이 중요하다, 공동체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실제로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지, 또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잘 모릅니다. 아니, 안다고 하더라도 자신은 쏙 빼놓지요. 다른 사람이 공동체성의 회복을 위해서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자신은 언제나 거기에서 열외가 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다운 교회를 세우기가 힘들어집니다. (camera)
그렇다면 교회다운 교회는 사막의 신기루 같은 것일까요?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결코 다다르지 못하는 불가능한 목표일까요? 교회의 공동체성을 회복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 해답은 분명히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빌2:5). 교회는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으로 세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 마음을 품지 않기 때문에 신앙공동체가 자꾸만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Slide#6)
제가 지난 시간에 이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는 일은 겸손한 마음에 달려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겸손한 마음을 품는 일은 단순히 개인적인 성품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교회와 우리 가정이 과연 하나님 나라답게 세워질 수 있느냐가 달린 아주 심각한 문제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열심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봉사는 기껏해야 자기 의를 드러내는 자랑거리가 되고 맙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없는 옳은 말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죽이는 날카로운 무기가 될 뿐입니다. (camera)
우리의 신앙생활에 정말 필요한 것은 ‘열심’이 아니라 ‘중심’입니다. 우리의 중심에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이 자리 잡아야 합니다. 그럴 때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이기려고 하는 경쟁심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될 것이고, 그 반면에 서로를 세우려고 하는 따뜻한 사랑은 점점 더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할 때, 경쟁과 허영으로 가득했던 관계는 섬김과 사랑의 관계로 새로워질 수 있는 것입니다. (Slide#7)
따라서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치는 일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공동체성이 더욱 허물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먼저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우리의 굳어진 교만한 마음이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의 공동체성이 아름답게 회복되고,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 교회는 더욱더 교회다워지고, 마침내 우리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품어야 할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일까요? 오늘 빌립보서 본문은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Slide#8)
내려가는 마음
첫 번째로, 예수님의 마음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받는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마음’이었습니다. (Slide#9)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빌2:6,8a)
예수 그리스도는 본래 하나님의 본체(本體)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단지 하나님과 비슷한 분이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 가운데 계신 분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한 그 지위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영광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가장 낮은 자리, 종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실 충분한 자격이 있으셨지만, 섬김을 받는 자리에 머무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병든 사람들을 찾아가셨고, 죄인들의 곁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하여 자기 생명까지 내어주셨던 것입니다. (camera)
겸손은 자신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자격과 권리와 수고를 앞세워 대접받으려 하기보다,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마땅히 대접받고 인정받을 만한 분들이 참 많이 계십니다. 오랜 세월 교회를 섬기고, 시간과 물질과 몸을 드려 헌신하며 신앙공동체를 지켜 오신 분들은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사람은 자신이 대접받을 자격이 있다는 사실에만 매달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먼저 손을 내밀고, 먼저 이해하며, 먼저 섬기는 자리로 내려갑니다. 누군가가 나를 알아 주기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것, 누군가가 내 수고를 인정해 주기를 바라기보다 내가 먼저 사랑으로 섬기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품을 때 우리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Slide#10)
자기를 비우는 마음
두 번째로, 예수님의 마음은 ‘자기를 비워 다른 사람을 품는 마음’이었습니다. (Slide#11)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빌2:7)
여기에서 ‘자기를 비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자신의 신성(神性)을 버리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되신 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이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가지신 영광과 권리를 자기를 높이는 데 사용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종의 자리를 취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단순히 어떤 것을 포기하신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사람 가운데서도 섬기는 종의 자리로 내려오셨습니다. 높으신 분이 낮아지셨고,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 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습니다(마11:19).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손가락질받던 이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병든 사람을 가까이하셨고, 외로운 사람을 찾아가셨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사람들을 귀하게 품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자기를 비우셨기에 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높은 자리를 고집하셨다면 낮고 연약한 우리에게 다가오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꺼이 낮아지셔서 우리와 같은 자리까지 오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고, 겸손입니다. (camera)
우리에게도 이러한 자기 비움이 필요합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은 종종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만 가까이하려 합니다. 마음이 맞는 사람, 말이 잘 통하는 사람,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과만 어울리려고 합니다. 물론 가까운 친구가 있다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관계가 다른 사람을 밀어내는 울타리가 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거리를 두고, 내 기준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낮게 여기며, 늘 만나던 사람만 만나고 익숙한 자리만 찾는다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내 존재를 지워 버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나의 자존감과 인격을 부정하라는 뜻도 아닙니다. 단지 나의 고집과 우월감과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사랑으로 품을 자리를 내어주라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다가가고, 내가 먼저 웃어 주고, 내가 먼저 말을 걸고, 내가 먼저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의 겸손한 마음이 드러납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교회다운 교회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Slide#12)
복종하는 마음
세 번째로,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에 끝까지 ‘복종하는 마음’이었습니다. (Slide#13)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8)
예수님의 겸손은 단순히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십자가는 가장 수치스럽고 가장 고통스러운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의 자리에 서셨고, 의로우신 분이 불의한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 고난의 잔 앞에 고민하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지요.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22:42) 예수님은 자신의 편안함보다 하나님의 뜻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지키는 길보다 우리를 살리는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의 길이었기에, 죽기까지 순종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겸손은 단지 부드럽게 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가 기꺼이 손해 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조금 불편해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위해 내 시간을 내어주고, 화해를 위해 내 자존심을 내려놓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기꺼이 내 편안함을 양보하는 것입니다. (camera)
교회는 자신만을 돌보는 이기적인 사람들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자신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모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내가 얼마나 편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는가?’를 묻는 곳이 아니라, ‘내가 누구를 섬길 수 있는가? 누구를 세울 수 있는가? 누구의 짐을 함께 질 수 있는가?’를 묻는 곳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합니다. 가정의 갈등도, 교회의 분열도 결국 각 사람이 자기 마음을 앞세울 때 생겨납니다. 내가 옳다는 마음, 내가 더 인정받아야 한다는 마음, 내가 절대로 손해 볼 수 없다는 마음이 우리 사이를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먼저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달라집니다. 한 사람이 먼저 낮아지고, 먼저 섬기고, 먼저 용서하고, 먼저 손을 내밀면 닫혀 있던 관계에 은혜의 길이 열립니다. 갈등의 자리에 화해가 찾아오고, 서운함의 자리에 사랑이 싹트게 되는 것입니다. (Slide#1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믿음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교회의 연륜이 쌓이면 쌓일수록 더욱더 교회다운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교회다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고, 먼저 낮아지고 자신을 비우며 끝까지 순종함으로 서로를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camera)
예수님의 낮아지심은 십자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지극히 높이셨습니다. 우리 교회도 스스로 높아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귀하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늘 교회창립 53주년을 맞이하는 기쁜 이날, 지금까지 한결같은 은혜로 우리를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겸손한 마음을 품고 서로를 섬기는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 섬김의 공동체를 세워 가기를 다짐하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나 주의 도움받고자’, play 시작) (Slide#15)
이 시간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침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camera 회중석)
오늘의 기도 (camera/close up)
에벤에셀의 하나님, 지난 53년 동안 우리 한강중앙교회를 지키시고 인도하신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를 믿음으로 세워 온 선배들의 기도와 헌신을 기억해 주시고, 우리도 그 뒤를 이어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섬기며 사랑으로 품게 하옵소서.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 교회가 더욱 교회다운 교회, 연약한 사람을 돌보고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섬김의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 지역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아름답게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