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갑의 출현 | 가야 철갑옷 1 | 종장판갑 | 縱長板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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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갑은 신라나 가야 지휘관들이 입던 고대의 갑옷으로 보병 전투 시대였음을 증명하는 유물이다.
이것은 삼한의 변한(弁韓)에서 개발된 덩이쇠(철정)의 출현과 함께 만들어지던 갑옷으로
화살을 막는데 특화된 기능을 보인다.
3세기에는 이 철정을 만들수 있던 지역은 弁韓 즉 가야 영역이며 주변의 모든 나라에 수출했다고
중국 사서 삼국지 위지,후한서는 전하고 있으며 ,
실제로 동래 복천동 고분에서 나온 철정은 분석 결과 단타(鍛打)에 의한 여러 겹 상태,
미세한 조직결정, 낮은 탄소 함량의 특징을 보여 철기 제조를 위한 중간 재료로 밝혀졌다.
판갑을 만든다는 것은 이 철정을 1미리 두께까지 일정하게 펴 가공하는 기술을 의미하며
고도의 제작 기법과 철에 관한 지식이 요구된다.
4세기 초기 판갑의 특징
조끼 형태의 갑옷을 찾아보면 부여나 삼한에서도 그런 유물들이 있으며 딱히 모티브를 찾기는 힘들다..

아무튼 3세기까지 위의 조끼같은 갑옷들이 중국을 포함한 한반도에 유행한것 같은데
가야에서는 특이하게 철판으로 만들어 버렸다.
초기의 4세기 판갑은 철판을 세로로 붙인다. 후기 5세기 판갑은 철판을 가로로 붙인다.
철판을 고정하는 덧댄 테두리는 밑부분만 빙 두르고 위쪽은 두루지 않았다. 후기에는 위쪽도 테두리를 두른다.
철판끼리 연결은 가죽끈을 사용한것으로 보이지만 기술이 발전해 점점 리벳으로 처리한다.
또한 어깨 뒷쪽을 보호하기 위해 T 모양으로 직각 돌출되어 있는것이 특징이며 후대에는 곡선으로 처리된다.
뒷판과 앞 가슴 판의 연결을 고정하는 견갑 부속은 주로 5세기 갑옷에 보이는 형태인데 최초 형태에서도 그 존재가 확인된다.
갑옷이 발전될수록 이 갑옷은 전체적으로 둥그런 곡선으로 바뀐다




*유물 사진은 플리커에서 뽑은 고화질 사진으로 교체.
경북 경주시 구정동 145번지의 표고 약 40m의 구릉에 있는 3세기 末~4세기 初의 고분군.
사적 제350호. 지정면적 5,766㎡. 자연 구릉 꼭대기에 매장유구를 만들어 구릉 자체를 봉토로 쓴
특이한 구조의 덧널무덤[土壙木棺墓]이며, 1982년 3월 국립경주박물관 조사팀이 발굴조사하였다.
매장 유구는 지상에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덧널을 만든 뒤 그 안에 나무널과 껴묻기를 한 형식인데,
2기(基)의 매장유구가 약 1m의 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합장(合葬)되어 있는 부부묘로 추정되고 있다.
길이 8m, 너비 1.5m의 북쪽 유구에서는 처음으로 방어용 무기인 판갑옷[短甲]과
철제 목가리개 ·쇠창 ·쇠도끼 ·와질(瓦質)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길이 6m, 너비 1.2m의 남쪽 유구에서는
단지[短頸壺] 2점, 연질형(軟質形)의 기대(器臺), 긴창끝[大形鐵矛] 25점 등이 출토되었다.
경주지역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판갑옷, 와질토기와 경질토기가 동시에 출토된 점,
긴창끝 등이 널바닥에 깔려 있는 점과 입지조건으로 보아 지배계급의 무덤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 신라의 전형적인 돌무지덧널무덤보다 한 단계 앞선 형식의 고분으로, 신라시대의 고분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울산 중산리 판갑

울산 중산리 유적의 대표적인 오리 토기

초기 신라(斯盧國) 유적지 뉴스 종합
토기 사진
부산 복천동 판갑

고분에서 출토된, 못을 박아 수직으로 철편을 연결한 갑옷은 4세기 제품으로 추정되며, 만일
이것이 정확하다면,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통틀어 가장 오래된 철제 갑주 라고 말한다.
부산 김해 판갑

현재 이 갑옷중에서는 신라의 구정동 판갑이 가장 빠른데
魏書 동이전의 기록으로 볼때 철을 수출하던 나라는 가야이므로
더 빠른시기의 판갑이 가야 영역에서 발굴될 가능성이 크다.
부산의 복천동(福泉洞)과 김해의 양동리(良洞里) 유적지에서 4 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과 말의)
철제 갑옷과 철모가 출토되었으며, 김해의 칠산동(七山洞), 합천의 옥전(玉田), 함안의 도항리(道項里)
등에서도 350-450 년경으로 추정되는 철제 갑주들이 출토되었다. NRICP (2001) 참조.
가야지역의 철제유물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물건은 철정(鐵鋌)이다.
일명 덩이쇠로 불리는 철정은 철기의 중간소재이면서 교역시 화폐로 사용됐다는 것이 학계의 연구 결과다.
학계에 보고된 최초의 철정 자료는 일제때인 1918년 경남 창녕고분군에서 출토된 ‘철편(鐵片)’을 통해서다.
철정은 7세기말에 편찬된 ‘일본서기’에도 언급돼 있다. 4세기 중반 백제의 근초고왕이 왜에 보낸 물품목록에
덩이쇠 40매가 나타나고 있어 당시에 이미 교역이 이뤄졌다는 것을 말해준다.
철정은 이른 시기의 판상철부(板狀鐵斧)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세기께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다량의 판상철부가 나왔으며 이후 3~4세기 가야지역 분묘에서 다량이 쏟아졌다.
5세기대 김해 양동리와 울산 하대 등지에서는 10장씩 묶음이 된 ‘10배수 매납’이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일정한 형태와 규격성은 화폐 기능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때부터 판상철부는 철부(도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소형의 철정으로 바뀐다.
철정이 화폐로 사용됐다는 것은 ‘삼국지’ 변진조에도 언급돼 있다.
가야지역 유적에는 잘룩한 철판이 묶음이 된 상태로 발견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마치 중국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이 노끈으로 묶인채 발견되는 것과 같다.
철정의 기원은 판상철부(板狀鐵斧)에서 찾는 것이 일반적이다.
가야지역에서는 기원전 1세기께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처음 판상철부가 나왔다.
동래 복천동 고분에서 나온 철정은 분석결과 단타(鍛打)에 의한 여러 겹 상태,
미세한 조직결정, 낮은 탄소함량 등의 특징을 보여 철기제조를 위한 중간소재임이 밝혀졌다.
이 철정은 신라 백제지역에서도 발견되지만 기능과 수량 면에서 가야 유적의 것과 비교가 안된다.
일본 열도에서는 규슈와 오사카가 있는 긴키(近畿)지방에서 집중 출토되고 있다.
그 형태를 비교해보면 한반도에서 유입된 것이 확실하다고 한다.
# by | 2007/10/04 01:04 | 가야 | 加耶 | 트랙백 | 덧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