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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여행) 사진

2026.6.7(일) ~ 6.11(목) 4박5일 (3) 후쿠오카시

작성자박상승|작성시간26.06.13|조회수21 목록 댓글 0

4일차 ㅡ 후쿠오까
일본 나가사키현 시마바라시에 위치한 시마바라 무가야시키(시마바라 부케야시키, 嶋原武家屋敷)는 에도 시대 시마바라성을 지키던 하급 무사(사무라이)들이 모여 살던 주거지를 복원하고 보존한 역사적인 거리다. 시마바라성 서쪽에 인접한 이 지역은 당시의 독특한 도시 계획과 무사들의 검소한 생활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어, 마치 에도 시대로 시간 여행을 떠난 듯한 고즈넉한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성곽 도시의 설계: 17세기 초 시마바라성이 축조될 당시, 성을 둘러싸고 약 700 가구의 무사 저택이 격자형으로 정연하게 배치되었다. 이 거리는 총 7개의 구역으로 나뉘어 있어 '포포쵸(鉄砲町, 총포마을)'라고도 불렸다.
중앙의 수로(물길): 거리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석조 수로가 이곳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시마바라성의 급수를 위해 가토 기요마사의 토목 기술을 도입해 만든 이 수로에는 맑은 용천수가 흐르며, 에도 시대에는 주민들의 귀중한 생활용수(음용수)로 엄격하게 관리되었습니다. 현재도 깨끗한 물이 흘러 시마바라가 '물의 도시'임을 실감케 한다.
돌담(석벽): 거리 양옆으로는 인근의 아리아케해에서 가져온 둥근 돌을 진흙으로 개어 쌓아 올린 독특한 돌담이 이어져 있어, 성곽 도시 특유의 방어적 구조와 고풍스러운 미를 더한다.
무가야시키 거리에는 당시의 저택을 복원하여 내부를 무료로 관람할 수 있도록 개방한 대표적인 저택 3곳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각 저택 내부에는 당시 무사들의 생활 도구와 마네킹 등이 전시되어 있다.
야마모토 저택 (山本邸): 하급 무사 중에서도 비교적 지위가 높았던 가문의 저택으로, 잘 가꾸어진 정원과 다다미방의 구조를 통해 무사 가문의 격식을 엿볼 수 있다.
토리타 저택 (鳥田邸): 검소하면서도 실용적인 공간 배치가 돋보이는 저택이다. 마당 한편에 마련된 우물과 주방 시설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시노즈카 저택 (篠塚邸): 전형적인 하급 무사의 주거 형태를 보여주는 곳으로, 당시의 좁지만 아늑한 주거 공간과 검소했던 삶의 궤적을 느낄 수 있다.
휴게소(미즈타니 저택): 거리 중간에는 방문객들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휴게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맑은 수로의 물소리를 들으며 여유를 즐기기 좋다.

잉어가 헤엄치는 마을과의 연계: 시마바라는 시내 곳곳에서 깨끗한 샘물이 솟아나는 '물의 도시'다. 무가야시키 거리 중심의 수로뿐만 아니라, 조금 더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마을 고유의 수로에 비단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는 '잉어가 헤엄치는 마을(鯉の泳ぐまち)' 구역과 고즈넉한 정원이 아름다운 다실 '시메이소(四明荘)'가 있다. 무가야시키를 보신 후 함께 묶어서 도보로 탐방하시는 것을 추천한다.
로컬 별미 '구조니(具雑煮)'와 '칸자라시(かんざらし)': 도보 견학 중 출출해지면 시마바라의 향토 음식인 '구조니'(떡과 다양한 야채, 해산물을 넣고 푹 끓인 뚝배기 떡국)나, 맑은 용천수에 차갑게 식힌 새알심에 달콤한 꿀 시럽을 얹어 먹는 전통 디저트 '칸자라시'를 파는 고즈넉한 로컬 카페에 들러보시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일본 나가사키현 미나미시마바라시에 위치한 토석류 피해 가옥 보존 공원(土石流被災家屋保存公園)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이어진 운젠 후겐다케(普賢岳) 화산 폭발 과정에서 발생한 참혹한 토석류 재해의 현장을 그대로 보존한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야외 전시장이다.
토석류의 습격: 1992년 8월 8일과 14일, 화산 분화로 산등성이에 엄청나게 쌓여 있던 화산재와 암석들이 폭우를 만나 거대한 진흙탕과 바위 더미(토석류)로 변해 미즈나시강(水無川) 하류를 따라 순식간에 쓸려 내려왔다. 이 강한 흐름이 강둑을 돌파하면서 인근 마을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지붕만 남은 가옥들: 당시 이곳의 주택들은 평균 약 2.8m 두께의 토사에 매몰되었다. 다행히 주민들은 사전 대피령을 통해 목숨을 건졌으나, 삶의 터전이었던 집들은 1층 전체가 흙 속에 파묻혀 지붕과 2층 일부분만 땅 위로 간신히 머리를 내밀고 있는 처참한 모습으로 남게 되었다.


일본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시에 위치한 대표적인 전통 정원, 스이젠지 조주엔(水前寺成趣園, Suizen-ji Joju-en)이다. 흔히 '스이젠지 공원(수전사 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정원은 에도 시대의 가도(가장 중요한 도로)였던 도카이도(東海道)의 53개 역참(풍경)과 일본열도의 명소들을 축소하여 재현한 모형 정원(지우치 정원)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호소카와 가문의 걸작: 1632년 구마모토번의 영주(대명)였던 호소카와 다다토시가 이곳의 맑은 지하 샘물에 반해 영주 전용 다실과 사찰을 지은 것이 시초다. 이후 3대에 걸쳐 정원을 정교하게 다듬고 확장하여 오늘날의 거대한 '회유식 정원(지천회유식 정원)'이 완성되었다. 정원의 이름은 도연명의 시 《귀거래사》 중 '원일성취(園日涉以成趣, 정원은 날마다 거닐어 정취를 이룬다)'라는 문구에서 유래했다.
아소산의 맑은 용천수: 정원 중앙에 넓게 자리한 연못은 인근 활화산인 아소산 맥에서 거르고 걸러져 흘러나온 깨끗하고 풍부한 지하수로 가득 차 있다. 수질이 매우 뛰어나 에도 시대부터 다도(茶道)를 위한 최고의 물로 여겨졌다.

5일차 ㅡ
일본 후쿠오카시 하카타구에 위치한 셋신인(절신원, 節信院)이라는 사찰이다. 1895년(고종 32년)에 자행된 을미사변(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참혹한 역사와 그 주범 중 한 명의 참회가 교차하는 슬프고도 기이한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다.
주범의 번민: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 건청궁에 난입한 일본 낭인 무리 중 명성황후를 절명케 한 핵심 인물로 알려진 자 중 토우 가쓰아키(藤勝顯)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사건 이후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나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황후를 베었을 때의 마지막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평생 지독한 환청과 악몽, 정신적 번민에 시달렸다고 전해진다.
관음상 봉헌: 결국 그는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황후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08년 사건 당시 자신이 직접 사용했던 칼(히젠토)은 인근 쿠시다 신사에 맡겨 봉인하고, 이곳 셋신인(절신원)에 명성황후의 모습을 본뜬 '자안(子安) 관음상'을 제작하여 바쳤다.
'보상상'이라는 것은 아이를 안고 있는 자비로운 모습의 '자안 관음상(석상)'을 뜻한다. 최초 제작 당시에는 명성황후의 사진과 증언을 토대로 청동(동상)으로 제작되었으나, 이후 또 다른 비극적 역사를 거치며 모습이 바뀌게 된다.
태평양 전쟁과 징발: 1940년대 초,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자 일본군은 무기를 만들기 위해 이 청동 관음상을 군수물자로 강제 징발해 갔고, 1945년 후쿠오카 대공습으로 셋신인 사찰 자체가 완전히 전소되면서 최초의 동상은 소실되었다.
석상으로의 재현: 전쟁이 끝난 후, 공습 당일 관음상이 있던 자리에서 버려진 여아를 발견해 키우다 요절시킨 한 일본인 독지가 부부가 아이와 황후의 명복을 함께 빌며 원래 있던 자리에 관음상을 석상(돌로 만든 불상)으로 다시 재현하여 봉헌했다. 이것이 현재 셋신인 입구에 세워져 있는 관음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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